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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지역

이방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익명 (미확인) | 월, 2017/08/2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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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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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용산’ 종점과 ‘신용산’ 종점이 구분되어 있는 전차정류장일람도의 일부(『경성번창기 』,1915)

흔히 용산(龍山)이라고 하면 용산역 앞이거나 미군기지 일대를 먼저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치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방(坊)’을 기준으로 살펴보더라도 ‘용산방’은 청파역, 공덕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1899년 12월 ‘용산행’ 전차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신용산(新龍山)’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만초천 물길의 동쪽 지역에 ‘용산정거장’이 개설되면서 위치관념이 약간 변경된 탓도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의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 일제가 이른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년 2월 23일)’에 근거하여 서울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둔지방(屯芝坊)’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용산군영지’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용산’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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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방향에서 담아낸 용산보병연대 일대의 전경사진 가까운 쪽이 보병 제78연대, 먼 쪽이 보병 제79연대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하였다. 이 가운데 철도용지와 중복되는 51만 평은 제외되고 과다하게 설정된 후보지 134만 평이 한국정부에 환부됨에 따라 실제 군용지 건설에 소요된 땅은 115만 평 규모로 최종 낙착되었다. 하지만 한국정부에 되돌려졌다고 알려진 곳 역시 상당수는 일본인들에게 불하처리되면서 일본군영지의 배후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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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에서 창설된 제19사단사령부의 개청식 광경 『조선사단창설기념호(조선사진화보특별호)』,1916년11월

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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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주둔 일본군 사단 배비표 (『소화8년조선요람』,1932)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

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시베리아출병’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촉발된 이후에는 전황이 길어질 조짐이 일자 방향을 바꿔 남방전선으로도 속속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지원병제도와 징병제 실시를 통해 다수의 조선인들도 현역병으로 징집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전투지원을 위한 노무인력으로 강제 동원되는 등의 고초를 겪게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당시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1944.5)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45년 2월에는 종래의 조선군사령부가 폐지되고 조선군관구사령부(朝鮮軍管區司令部)와 제17방면군사령부(第17方面軍司令部)의 편제가 생겨났으나, 오래지 않아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속박이 종결되고 용산군영지도 당연히 이방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바람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승국 미국(제24군단)에 의한 미군정 실시와 더불어 옛 일본군 주둔지들은 그대로 미군의 수중으로 접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 철수와 함께 소규모의 주한미군사고문단(KMAG)만 잔류한 시절도 있었으나 불과 1년 이후에 발생한 6.25전쟁은 모든 것을 예전 상태로 되돌려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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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 때마다 이른바 ‘출정’과 ‘귀환’ 통로로 사용한 용산역 구내의 전경

용산기지는 이제 미군이 주역인 상태로 전환되어 미8군사령부(1953년 9월 동숭동에서 이전), 유엔군사령부(1957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이전), 주한미군사령부(1957년 7월 창설), 한미연합군사령부(1978년 11월 창설)가 터를 잡는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그리고 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로 남아 용산기지 일대는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이방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으로 남게 된 셈이었다.

그나마 지난 2004년에 이르러 간신히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용산기지 반환협정이 체결되는 단계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법률 제9600호로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마련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 조짐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당초 협정문안에서 2008년 말로 명기된 반환시한은 무려 10년 가까이 넘기고도 언제 반환절차가 종결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

장차 ‘용산공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날 용산미군기지 내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옛 일본군 병영의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용산병영지 외곽에 자리한 배후 시가지에도 군사도시의 기능을 가늠케 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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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침략의 총본산인 용산군영지와 배후 시가지 일대가 잘 포착되어 있는 항공촬영사진 『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0

해방촌을 끼고 있는 남산 자락에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분사라고 할 수 있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가 있고, 청파동 철길 옆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터(신광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대의 관병식(觀兵式)이 벌어지던 용산연병장 자리는 그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해있고, 용산고등학교, 삼광초등학교, 수도여고 터, 용산초등학교, 선린상고 등 옛 일본인 학교들은 여전히 용산군영지를 감싼 듯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대규모 병력이 ‘출정’과 ‘귀환’을 반복했던 용산역도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

일본군영지를 조성할 당시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은 한강리(漢江里, 현 한남동)를 밀어내고 ‘한강’이라는 이름을 선점한 채 ‘한강통(漢江通, 현 한강로)’이 되었고, 그 길의 중간 쯤에 일제가 만들어낸 ‘삼각지(三角地)’라는 지명은 지금도 버젓이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한 일본군대의 연병장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연병정(練兵町)’은 ‘남영동(南營洞)’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지 오래다.

오랜 세월 외국군대의 주둔지로 각인되어 있는 용산 지역에는 군영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일대가 온통 일제침탈과 분단시대의 유적지로 가득 찬 셈이다. 이러한 잔존물들은 그 자체가 일제침략의 유력한 증거품이자 식민지배의 고난을 상기시켜주는 역사교육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시절에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담아내고 또한 해방 이후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곳을 찾는다면 그 으뜸은 마땅히 용산지역의 몫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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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후원금 출금동의 관련 전화하셨을때 못받은것같은데
그 이후로 전화가 안와요ㅎㅎ
다시 전화한번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항상 수고하십니당!

일, 2017/09/10-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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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배송 중단 요청합니다.

종이값, 배송료 아깝습니다. ^^

추석 잘 보내세요

월, 2017/10/02- 21:08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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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我國某名詩人之詩後

 

美人眞若此(미인진약차)

素面却佳容(소면각가용)

麗句雖盈滿(여구수영만)

全無動我胸(전무동아흉)

 

우리나라의 어떤 이름난 詩人의 詩를 읽고 나서

 

미인이란 참으로 이와도 같느니

민낯이 되레 아름다운 모습이라

고운 글귀들로 비록 가득하지만

내 가슴 動搖 따위, 전혀 없구나.

 

<時調로 改譯>

 

미인 이와 같느니 민낯 되레 佳容이라

곱게 꾸민 글귀 따위 비록 가득하지만

어쩌랴! 나의 가슴은 動搖함이 없구나.

 

*我國: 아방(我邦). 우리나라 *若此: 이러함 *素面: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

*佳容: 아름다운 용모(容貌)  *麗句: 아름답게  꾸민  글귀  *盈滿: 가득하게

*全無: 전혀 없음.

 

<2017.7.12, 이우식 지음>

수, 2017/07/12-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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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잘 사는 친일 후손들…‘환수율 겨우 3%’

11월17일은 ‘순국선열에 날’이다. 이날은 일제강점기 하에서 대한민국의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희생하거나 헌신한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 등의 순국선열들에 대한 추모와 존경을 표하는 날이자 그들의 독립정신 및 호국정신을 기리는 법정 기념일이다. 또한 이날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던 치욕적인 날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순국선열의 날’ 지정은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독립투사들을 추모하는 날로 기념하고, ‘을사조약’ 체결의 역사적인 치욕을 새기기 위해서 지정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다만 이같이 국권을 뺏겼던 날을 잊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걸고 싸웠던 순국선열들을 기리기에는 아직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친일파’, 그중에서도 ‘재산환수’ 문제는 우리나라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법률 개정으로 친일행위에 대한 유연한 법률적용 가능
친일재산환수 대한 법률적 증거 있음에도 미진한 환수

승소율은 매우 높지만 재판성립요건 자체가 쉽지 않아

이완용 ‘0.09%’ 환수…되팔거나 법인명의라면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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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에 날’을 맞아 친일파 재산환수 이슈가 다시금 제기된 상황이다. <사진=YTN 뉴스 캡처>

[사건의 내막=김범준 기자] 국내에서 ‘친일파’란 과거 일본 제국주의에 동조했던 자로서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굉장히 치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당시 적극적으로 동조한 협력한 인물들과 함께, 해방 이후 현재까지도 ‘과거에 대한 반성’은 커녕 이들의 만행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며 옹호하는 자들도 친일파로 불린다. 결국 ‘친일파’는 ‘매국노’와 동급으로 사용되는 말이됐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이같은 친일파는 1800년대 말 일본이 ‘군국주의’로 우리나라를 위협하면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본은 1867년 메이지 덴노가 즉위한 후 근대 서양의 시스템으로 국가를 개조했다. 중국이 정점에 서는 수천 년 간의 조공 제도로 고착된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깨고 천황의 이름으로 대등하게 청나라와 조선에 외교 문서를 보냈다.

특히 이듬해인 1868년 조선을 향해 자신들이 ‘왕정 복고’를 이뤘음을 국서로 통보했는데, 그동안 형님 정도로 자신을 생각하던 조선 조정에 황제를 참칭하는 민감한 언어 선택으로 큰 충격을 줬다. 자연히 ‘왕’인 조선은 일본에 격이 한 등급 내려간다. 당연히 조선은 국서 접수를 거부하고 일본도 1872년 외교 사절단이 철수하는 등 갈등은 점점 고조됐다.

그러나 1876년 운요호 사건 때 이양선으로 일본이 무력 시위를 하자 조선 조정은 격론 끝에 문호를 제한적으로 개방하기로 했다. 당연히 일본과 통상은 텄다고 해도 조선 조정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국론 역시 ‘존왕양이’의 외세 배척 여론은 더욱 강해졌고,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파는 이런 여론을 잘 이용했다. 이 때만 해도 우의정 박규수와 영의정 이유원 정도가 외세를 이용하자는 의견이었는데 실상 그마저도 동도서기론, 즉 “서양 문명은 기술면에서 앞서 있을지는 모르나 동양의 정신 문화를 존중하고 배울 점이 있다”는 식의 이상론이었지 일본을 좋아한다는 커녕 최소한 일본에게 뭘 배운다거나 가까이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1880년 대, 우의정 박규수의 제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이 일본 책과 문물을 접하고 일본의 발전상을 흠모하게 된다. 물론 김옥균의 ‘일본은 동양의 영국을 자처하니, 우리는 프랑스 같은 문화 군사 강국을 이루자’는 언급을 볼 때, 일본과 동급으로 조선을 생각했지, 결코 ‘신하’가 된다는 생각은 그들 역시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당시 청나라의 도움으로 대원군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명성황후와 민씨들이 청나라식 근대화, 양무운동을 개화 모델로 삼고 국정을 장악하면서, 상대적으로 일본식 급진 개혁을 바랐던 김옥균의 개화당은 친일파란 누명을 쓰고 권좌에서 밀려났다.

서양에 쓰러지기 직전인 청나라 모델로는 미래가 없다는 건 확실했던 개화파는 초조했다. 1884년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 완공 축하연에 난을 일으켰다. 고종의 신병도 확보하고 서울 요지를 선점한 그들의 난은 성공하는 듯 했으나 압록강 근처에 주둔했던 청나라 군대가 삽시간에 반격을 가하면서 실패한다. 갑신정변이다. 역적이 된 개화파는 일본으로 탈출했고, 조선에 일본식 개혁을 말하는 사람은 없어졌다. 친일파가 처음 매국노의 멍에를 쓴 건 한일강제합병이 아닌 이 때가 최초다.

그러다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에,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한일합병은 피할 수 없게 됐다. 그 전만 해도 친일 세력을 발본색원 할 것같이 굴었던 수구파(개화당을 제외한 민씨 쪽 친청파+이완용)들은 얼굴을 싹 바꿨다. 1905년 외교권을 뺏긴 을사늑약을 시작으로 정미 7조약 등등 대한제국을 해체할 치명적인 조약들마다 수구파들은 누구보다 일본을 위해 열심히 일했으며, 이완용, 송병준 등은 각기 무리를 짓고 친일 충성 경쟁을 벌일 정도였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맨 앞에서 길안내를 맡은 것은 친일파들이 심어놓은 헌병보조원, 즉 조선인 조센징 앞잡이들이었다. 1910년 강제병합이 완성되자 이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각종 은사금과 부동산 등은 물론 조선귀족 지위까지 나눠 받았다.

과거 대한제국이 부족한 재정에도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주미공사관은 단돈 5달러에 일본에 넘어갔고, 개화파의 거두이자 왕실 종친 박영효는 28만원, 이완용은 15만원, 박제순은 10만원의 은사금을 받고 아주 떵떵거렸다. 구한말 끝날 때까지 그동안 친일을 했든 친청·친러였든 상관없이 합병 때까지 조선 조정에서 버틴 자들은 모두 친일파라고 봐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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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완용 일가가 옥인동 집에서 찍은 사진. 가운데가 이완용 본인이다. 친일파의 거두로 불리는 이완용은 여의도 면적 두 배에 가까운 토지를 소유했지만 국고로 돌아온 것은 0.09%에 불과하다. <사진출처=구글 이미지 검색>

그 후로도 일본 제국이 35년 간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제국주의의 양상도 같은 듯 같지 않게 계속 변모했는데, 친일파들의 친일 부역 행위 역시 변모해 갔다. 조선이 점점 제국주의 일본에 동화되고 식민 지배의 정도도 깊어지고 점차 더 많은 조선인들이 시스템에 편입되면서, 일부 권세를 가진 집안들이 저질렀던 친일 부역 행위 역시 그 범위를 넓히고 곳곳에 스며들었다. 이런 시대를 시각적으로 리얼하게 잘 그려낸 작품이 옛 MBC 대하드라마인 ‘여명의 눈동자’다. 친일파의 출신 성분은 조선 귀족들에서 점차 일반 서민 출신들까지 확대되면서 광범위하게 우리나라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친일파의 정의

이같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정의는 법률로도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지난 2021년 10월12일에 공포되고 시행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 2조 정의 부분에 따르면, ‘친일반민족행위’라 함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지난 1945년 8월15일까지 행한 다음 각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이 법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20가지의 구체적인 사례들이 나온다. 그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부대를 공격하거나 공격을 명령한 행위

2.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단체 또는 개인을 강제해산시키거나 감금·폭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 단체 또는 개인의 활동을 방해한 행위

3.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하거나 이를 지시 또는 명령한 행위

4. 독립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그 단체의 의사결정을 중심적으로 수행하거나 그 활동을 주도한 행위

5.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을 저해한 행위

6. 을사조약·한일합병조약 등 국권을 침해한 조약을 체결 또는 조인하거나 이를 모의한 행위

7.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 다만, 이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작위를 거부·반납하거나 후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람 등으로 제3조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결정한 사람은 예외로 한다.

8. 일본제국의회의 귀족원의원 또는 중의원으로 활동한 행위

9.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행위

10.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少尉)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1. 학병·지원병·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宣傳) 또는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

12. 일본군을 위안할 목적으로 주도적으로 부녀자를 강제동원한 행위

13.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4.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 제조업체를 운영하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규모 이상의 금품을 헌납한 행위

15. 판사·검사 또는 사법관리로서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을 감금·고문·학대하는 등 탄압에 적극 앞장선 행위

16. 고등문관 이상의 관리, 헌병 또는 경찰로서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을 감금·고문·학대하는 등 탄압에 적극 앞장선 행위

17.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8. 동양척식회사 또는 식산은행 등의 중앙 및 지방조직 간부로서 우리민족의 재산을 수탈하기 위한 의사결정을 중심적으로 수행하거나 그 집행을 주도한 행위

19.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여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

20. 일본제국주의와 일본인에 의한 민족문화의 파괴·말살과 문화유산의 훼손·반출에 적극 협력한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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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친일파 단죄문’ 등 반민족행위자들을 색출하려는 움직임이 이뤄지고 있다. <사진=YTN 뉴스 캡처>

이같은 20가지의 친일행위의 법률적 정의로 인해, 그동안 애매했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상당히 구체적인 지목이 가능해졌다. 또한 친일파의 청산 및 친일재산 환수의 법률적 증거가 생긴 것으로 평가된다.

친일파 재산환수

문제는 친일파 땅 환수 작업이 미진하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환수한 친일파의 땅은 전체 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와 자치단체는 친일파 무덤과 땅을 찾아 단죄비를 세우고 국가 환수를 촉구하기도 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 10월 기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 관련소송 97건 중 93건이 종결됐다. 이 93건 중 91건에서 승소해 승소율은 97.8%에 이른다. 2006년 7월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 송병준 등 168명을 조사해 여의도 면적의 1.3배에 해당하는 1113만9645㎡를 환수한 바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국가에 귀속된 친일파의 땅은 1300만㎡(전체 3%)에 불과하다.

남아있는 4건은 모두 친일파 이해승과 관련된 소송이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지난 2009년 9월 이해승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인정하고 그의 후손이 물려받은 서울 은평구 일대 토지 2922m²를 친일재산으로 결정했다. 이에 이해승의 손자 그랜드힐튼서울호텔의 이우영 회장은 경기 포천시 임야 등 192필지(공시지가 110억원대)에 대해 국가귀속결정 처분 취소 소송을 내 승소 했지만, 법무부는 지난해 10월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대법원 1부(주심 이기택 대법관)는 지난 11월9일 이해승의 손자인 이우영 그랜드힐튼호텔 회장이 낸 친일반민족행위자 지정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심대로 “이해승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한 것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또 이 회장이 제기한 친일 재산 확인 결정 처분 취소 소송에 대해서도 원심과 같이 “친일 재산이 맞고 환수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해승은 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의 5대 손으로 1910년 10월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아 광복될 때까지 유지했다. 1911년 1월에는 일제의 한일병합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당시 16만8000원의 은사공채를 받았고 이듬해엔 한국병합기념장도 받았다.

이해승은 또 1917년부터는 친일파 이완용 주도로 설립된 친일단체 불교옹호회에서 고문을 맡았다. 이후에도 그는 일제 식민 통치에 협력한 공로로 쇼와대례기념장(1928년)을 받고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 평의원(1937년)을 지냈다.

대통령 직속으로 꾸려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5월 이해승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 이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도 이해승이 1913년과 1917년 취득한 서울 은평구 일대 토지를 친일 재산이라고 보고 국고 환수를 결정했다.

이에 이해승의 후손인 이 회장이 “조부는 대한제국의 황실 종친으로 후작 작위를 받았을 뿐이다. 식민 통치에 협력한 친일행위자가 아니고 재산도 환수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이해승이 식민 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를 인정한다”면서도 “한일병합에 대한 공로로 후작 작위를 받은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며 재산 환수 불가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뒤집고 “이해승이 친일행위의 대가로 각종 이권과 특혜를 부여받은 것이 맞다”며 “당시 취득한 이해승의 재산은 친일 재산이기 때문에 국가가 환수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결국 재판 끝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이해승이 후손에게 물려준 300억원대 재산은 국고로 환수되게 된 것이다.

부족한 재산환수

하지만 국가에 환수되는 땅은 친일파들이 일제 강점기 보유했던 재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현행 상법 상 후손들이 물려받은 토지를 팔거나 법인 재산으로 등록하면 환수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을사오적 이완용은 일제강점기 여의도 면적 두 배에 가까운 토지를 소유했지만 국고로 돌아온 것은 이 토지의 0.09%에 불과하다. 또 친일파 송병준도 일제강점기 당시 받은 토지의 0.04%만 환수 대상이 됐다.

조사위 관계자는 “해방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토지 관련 행정자료가 사라져서 찾지 못한 것도 많다”며 “해방 이후 곧바로 친일청산 작업에 들어갔다면 친일파 재산을 모두 찾아내 국고로 돌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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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0> 사건in

☞기사원문: 후손에게 남겨진 숙제, ‘친일파 재산환수’

일, 2017/11/1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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逢詩朋同醉吟

 

六千詩興盡(육천시흥진)

投筆欲遊人(투필욕유인)

放浪如金笠(방랑여김립)

門前經苦辛(문전경고신)

 

詩의 벗님을 만나 함께 술에 취하여 읊다

 

육천 편 詩의 흥취도 다하였으니

붓을 탁 내던진 遊人이고자 하오

저 김삿갓처럼 정처 없이 떠돌며

門 앞에서 괴롬과 쓰림도 겪겠소.

 

<時調로 改譯>

 

육천 詩興 다하니 붓 던진 遊人이려오

방랑 시인 金笠처럼 정처 없이 떠돌며

남의 집 대문 앞에서 苦辛함도 겪겠소.

 

*詩朋: 시우(詩友). 시반(詩伴). 함께  詩를 짓는  벗 *醉吟: 술에 취하여서  詩나

노래를 읊음 *詩興: 詩를 짓고 싶은 마음. 또는 詩에 도취되어 일어나는 취.

소흥(騷興) *投筆: 붓을 던짐 *遊人: 놀러 다니는 사람 *金笠: 김삿갓. 방랑

시인 김병연(金炳淵)의 다른 이름 *苦辛: 괴롭고 쓰라림.

 

<2017.7.16, 이우식 지음>

일, 2017/07/16-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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