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기억을 위해 집을 지어주려 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프로젝트
일본 남쪽, 나가사키 항에서 약 1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하시마(군함도)는 야구장 두 개 정도 크기의 작은 섬입니다. 1916년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 세워져 근대화의 상징으로 불렸던 이 섬은 좁은 섬에 근대식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서는 모습이 마치 군함처럼 보여 그때부터 ‘군함도’라고 불렸습니다. 과거의 영화를 그대로 간직한 그 섬에서 과연 누가 살았을까요?
지상에서 일하는 일본인과 달리 강제동원 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지하에서 석탄을 캐야 했습니다. 그 지하는 숨 쉬기조차 어렵고 몸을 펼 수 없을 만큼 좁았으며, 식량과 식수조차 주어지지 않는 말 그대로의 지옥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석탄 채굴을 위해 강제동원 되었지만, 그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관한 기록은 단 한 줄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때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가 족히 10개는 넘게 들어 있다는 납골당과 공양탑은 지금은 파괴되어 들여다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근대화의 상징’, ‘자랑스러운 세계유산’으로 포장하려는 군함도(하시마)는 일본의 근대화가 강제징용 된 조선인들의 무덤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많은 나라들이 과거를 돌이켜보며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 역사적으로 평가를 내리고 정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어떨까요? 우리는 아직도 친일문제가 분명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한일 과거사를 청산하고,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반민특위 정신을 이어받고,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되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한일 과거사 문제뿐만 아니라 박정희기념관 건립 저지, 친일파기념사업 저지와 같은 다양한 활동과 전시회를 통해 국민들에게 과거사 청산의 당위성을 알리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이제 행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민족문제연구소가 꾸준히 모아온 자료를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며 우리의 과거를 제대로 바라보고 기억하기 위해 2018년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려 합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건립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부지를 정했지만, 시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박물관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많은 것들이 부족합니다.
일본은 한일 과거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근거 없음’이라고 주장합니다. 과거에 동아시아에서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도리어 동아시아 안보를 지키는 파수꾼이라 자처합니다. 게다가 일본은 일제 침략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한국의 상황을 토대로 경제부흥을 이끌었지만, 전후 보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강제동원의 역사를 부정하는 발언을 그치지 않습니다. 한국정부는 그렇다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했을까요? 한국정부 역시 일본정부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한국정부는 국민적 합의 없이 한일협정을 진행해 그 청구금을 경제발전의 재원으로 사용한 바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위안부 합의 역시 당사자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진행하여 피해자들에게 다시 한 번 눈물을 쏟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곁에는 과거를 부정하는 세력들에 저항하며 물러서지 않고 목소리를 내온 역사의 산 증인들이 살아 계십니다. 그러나 역사의 산 증인이신 어르신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며 과거를 증명하는 목소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조금씩 사라지고 흩어져가는 기억들을 이제 한 곳에 모아 모든 이들이 함께 기억하고, 세대를 넘어 기억을 전달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지어주려 합니다. 이 기억들이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시민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시민들이 함께 모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여 제대로 된 역사 인식과 함께 역사를 통해 성찰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자 합니다.
역사의 참혹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민의 귀에 닿도록 만든 것은 피해자의 용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용기가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곁에서 도운 것은 한국에서 조직된 시민들의 힘이었습니다. 역사는 시민의 것입니다. 강한 자들이 제멋대로 헝클어놓은 역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기 위해,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이제 역사 위에서 성찰하기 위해 시민의 힘이 필요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을 통해 과거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역사로 나아가기 위한 큰 길을 내고 싶습니다. 함께 동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피해자 지원 단체 중심 구술 채록·녹화 작업
“생존자들 떠나도 문제의식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 민간사업… “정부가 지원 역할 해줘야”
“옛날에 당꼬바지 있잖아요? 형사들은 벌써 표가 났어요, 그때는. ‘뭐하러 왔느냐’ 그래서 ‘배에 쓸 물건 좀 사러 왔다’고. 가만히 생각하더니 ‘잠깐 좀 오라’더라고요. 가니까 웬 여관으로 들어가래요. 들어가니까 여섯, 일곱 명인가 와 있더라고요. 그걸로 문을 잠그고 내놓지를 않는 거예요. 자고 나니까 이튿날 아침에 속초역으로 나가자더니 그냥 기차를 타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 가는 사람들 전부 다 납치예요, 납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일제 강제동원 생존 피해자 구술 채록’ 중
1944년 일본 다카시마 탄광에 배치돼 노역했던 강제동원 피해자 손용암(93)씨의 육성 증언이다.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한순간에 탄광으로 끌려간 기막힌 사연이 강제동원 역사의 실상을 선명히 드러낸다.
일제강점기 생존 피해자의 증언을 채록하는 작업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피해 당사자의 기억에 아로새겨진 체험을 기록으로 남겨 현재화하려는 노력이다. 벌써 광복 76주년, 생존자들의 기억과 육체가 빠르게 소멸해가는 사정을 감안하면 한시가 급한 일이기도 하다. 채록 작업을 진행 중인 피해자 지원 단체들은 정부가 속히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영원히 남는 증언’ 채록 작업 활발
11일 서울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제9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맞이 세계연대집회 1,504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열리고 있다. 뉴시스
13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올해부터 생존 피해자 구술 채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재단으로부터 사업 수행을 의뢰받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6월 말까지 손용암씨를 포함해 24명의 생존 피해자를 인터뷰했다. 감탄사 하나까지도 빼놓지 않고 피해자 증언을 생생하게 채록하는 것이 원칙이다.
영상 채록 작업도 활발하다. 증언 내용뿐 아니라 구술 당시 감정과 표정까지 재연할 수 있다는 게 영상 채록의 장점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군함도 유네스코 일본 산업유산 시설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 영상을 소개하는 특별전을 열고 있다. 김승은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은 “관람객들이 ‘생존 피해자 목소리를 들으니 역사 교과서 속 얘기가 아니라 지금의 역사처럼 느껴진다’는 소감을 밝히고 있다”고 전했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는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피해 최초 증언 30주년(8월 14일)을 기념해 김 할머니의 첫 증언 집회 영상과 활동 초기 사진 자료를 공개하는 전시회를 17일 연다.
피해자 떠나도 ‘당사자성’ 유지하려면
지난달 16일 오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개최되고 있는 전시회에서 피해자의 영상이 나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강제 동원된 피해자 19명의 증언이 공개됐다. 뉴스1
이런 구술 채록 작업은 일차적으로 일제강점기 미시사(微視史) 사료를 확보한다는 의미가 있다. 식민지 정책, 전쟁 등 거시적 관점에서 포착하기 힘든 역사적 실상을, 개인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체험을 통해 입체적으로 되살릴 수 있는 것이다.
당사자 증언을 통해 일제강점기 역사의 본질을 분명히 밝히자는 의도도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 고 박대하씨의 아들 박영만(78)씨는 “주권 상실로 입은 피해의 역사를 국민 전체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더구나 가해자 일본이 극우세력 장기 집권으로 과거사 부정 움직임을 노골화하고 있어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한 상황이다. 김승은 실장은 “강제동원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에 대한 기억이 왜곡되면 개인적 경험으로 파편화될 수 있다”며 “이미 피해 사실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여론이 존재하는 게 현실”이라고 우려했다.
생존 피해자가 세상을 뜨더라도 그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할 수 있는 기반도 필요하다. 이나영 정의연 이사장은 “지금 세대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남은 생존자 수가 아니라 생존자가 모두 돌아가신 이후”라면서 “당사자성을 갖는 것, 다시 말해 피해 당사자들이 떠난 뒤에도 문제의식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라고 말했다.
단체들은 ‘선대의 피해가 나와 무관치 않다’는 의식이 필요하며, 생존 피해자 구술 채록이 여기에 기여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이 이사장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식민 시대의 불운한 여성들이 겪은 일 정도로 여기면 위험하다”며 “이 문제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시 성폭력은 물론이고 오늘날 여성 혐오와도 연결돼 있다는 걸 실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시민단체가 떠안은 부담… “국가 나서야”
광복절을 닷새 앞둔 10일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시민들이 생존 애국지사들의 초상화를 소개하는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뉴스1
하지만 생존 피해자 구술 채록 작업은 이들을 지원하는 민간단체 위주로 진행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단체들은 사안의 의미와 시급성을 감안할 때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이사장은 “피해자 단체가 서로 다른 자료를 갖고 있을 때 정부가 현황을 파악하고 단체 간 연계를 도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박물관・전시관이 없는 단체는 생존 피해자 흔적을 보존하기가 더 어려운 만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정부 쪽에서 ‘다 지나간 일이고 우리도 할 만큼 했다’는 말도 들려서 씁쓸하다”면서 “정부가 생존 피해자의 구체적 기억과 경험을 계속 역사화하려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익법인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관계자는 “생존 피해자 수가 급감하고 있는 만큼 정부가 구술채록 사업을 정규화해 예산과 인력을 안정적으로 지원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KBS [뉴스해설] 시간에 김환주 해설위원은 다시 확인된 군함도 ‘역사 왜곡’과 일본 정부가 국제기구의 시정 요구 조치에도 외면한다는 내용을 방영했다. 또 다른 매체는 일본 입장에서 반박하는 내용을 보도했다. 군함도 관련 유네스코 지적은 트집이라며 오히려 일본의 이미지를 떨어뜨리려는 한국의 정치공작이라는 것이다. 광복 76주년이다. 아직 식민통치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고 있는 피해자와 유족들이 많다. 일본군 위안부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강제동원의 역사가 바로 ‘군함도’이다.
▲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 서울시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는 주제의 전시관련 브리핑을 하고있다.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영상 공개전시에 몰린 취재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일본 근대 산업시설 등재 결정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은 철강·조선·석탄산업
세계유산은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으며 10가지 등재기준에 따라 인류가 공유할 만한 현저한 보편적 가치를 평가한다. 1~6까지는 문화유산, 7~10까지는 자연유산에 관한 기준인데 그 가운데 1가지 이상 부합하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다만, 모든 문화유산은 재질이나 기법 등에서 유산이 원래의 가치를 보유해야 하는 ‘진정성’, 유산의 가지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충분한 제반요소를 보유한 ‘완전성’, 법적·행정적 보호제도와 완충지역 설정 등의 ‘보호 및 관리체계’를 갖추어야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이런 기준 가운데 인간 가치의 중요한 전환점 기준 2, 문화적 전통 및 문명의 독보적 유산 기준 3, 역사의 중요한 단계 예증 기준 4를 들어 등재 신청을 했다. 그러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이코모스(ICOMOS)는 기준 3을 기각하고 기준 2와 기준 4만 유산 가치를 평가했다.
일본의 근대 산업시설들이 명백히 군사적 필요 때문에 만들어졌음에도 일본 정부의 신청서에는 이런 사실들을 강조하지 않았다. 세계유산위원회는 결정문에 각 시설의 역사 전체를 알 수 있도록 하라는 이코모스의 권고 사항을 각주에 부기하는 형식으로 명시했다. 일본은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노역을 했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정부도 징용 정책을 시행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 또한 일본은 정보센터 설립 등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이코모스가 권고한 해석전략에 포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일본정부가 후속 조치와 관련해 2017년 12월 1일까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경과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일본은 문화유산 등재 이후 2년마다 제출하는 이행 경과 보고서에서도 약속을 저버려 경고를 받았다 유네스코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공동조사단이 지난달 7~9일 도쿄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시찰한 결과를 발표했다. 보고서에는 1940년대 해당 시설에서 한국인 등이 강제노역을 했다는 등의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조치 또한 미흡했다고 밝혔다.
군함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군함도’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을 했던 슬픈 역사가 간직된 섬, 군함도의 공식 이름은 ‘하시마’다. 1974년 1월 탄광이 문을 닫아 아무도 살지 않는 섬이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TV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 소개되고 영화 <군함도>를 통해 이 섬에 관한 관심도 커졌다. 위치는 나가사키 항에서 약 18킬로미터 떨어졌으며 동서 160미터, 남북 480미터, 둘레 1.2킬로미터, 면적 0,063제곱킬로미터로 야구장 두 개 정도 크기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그런데 1960년에는 이 작은 섬에 5,267명이 살았다고 한다. 인구밀도가 도쿄보다 9배 높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구밀도를 기록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유는 석탄 때문이었다. 1810년 근처에 살던 어부가 우연히 석탄을 발견한 뒤 1890년대부터 일본 기업 미쓰비시가 본격적으로 바다 밑에 묻혀 있던 석탄을 캐내기 시작했다. 석탄 생산량이 가장 많았던 1941년에는 41만 1,100톤에 이르렀다고 한다. 미쓰비시는 1916년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인 7층 아파트를 세웠다. 그 후 10층 아파트를 비롯하여 고층 건물들을 계속 지었고 좁은 섬에 근대식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모습이 마치 군함처럼 보여 그때부터 ‘군함도’라고 불렀다. “도쿄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은 모두 하시마로 모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쓰비시는 해저탄광을 개발하기 위해 최신 기술을 개발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하시마는 일본 근대화를 상징하는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 하시마 탄광으로 강제동원된 고 서정우씨의 영상이 최초로 공개되고있다.
강제동원된 조선인들
군함도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1943년부터 1945년 사이에 500~800명의 조선인들이 하시마 탄광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설 『군함도』 의 한수산 작가가 실제로 만난 고 서정우 할아버지는 1944년에 16세였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해저탄광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탄광 바닥에 찬 물 때문에 습하고 후끈후끈한 공기를 마시며, 낮은 막장에서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하루 10시간 이상씩 석탄을 캐냈다. 강제로 끌려와 강제노동을 하다가 병이 들어서야 그는 육지로 나갈 수 있었다.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서 죽기 직전까지 구타를 당하기도 하고, 바다에 몸을 던진 사람들이 시체로 발견되기도 했다. 희생된 조선인들이 40~50명에 이르렀다는 증언도 있다.
인류의 보편적 차원에서 군함도는 세계유산일 수 없다
오늘날 군함도는 연간 1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유산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세계유산의 공식 명칭은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철강·조선·석탄산업’이다. 군함도를 홍보하는 메시지 속에는 침략전쟁을 바탕으로 한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정당화하고 식민지의 희생을 감추고자 하는 일본정부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아파트 등 그들이 환호하는 군함도 건축물의 대부분은 메이지시대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더구나 일본정부는 세계유산의 범위를 1910년으로 한정하였으므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섬을 둘러싼 호안의 일부와 조금밖에 보이지 않는 갱도 입구뿐이다. 일본정부는 강제노동의 어두운 역사를 가리기 위해 1910년으로 그 시기를 한정하는 꼼수를 부리고는 군함도 전체가 세계유산인 양 선전하고 있다. 이것이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의 모습이다. 또한 역사를 왜곡하는 현장이 세계문화유산으로 기억될 수는 없다.
유네스코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UNESCO(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는 1945년 설립되었으며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다. 유엔의 전문기구로서 전 세계의 교육과 과학, 문화의 보급을 통해 빈곤국에서 문맹 퇴치 및 인류의 보편적인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고 국제 교류 증진을 통한 국제간의 이해와 세계 평화를 추구한다. 무엇보다 인류가 창조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다양한 유형의 문화적 아이템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알리고 있다. 프랑스의 에펠탑과 같은 건축물, 앙코르와트 같은 신전, 이집트 피라미드와 같은 고대 유적, 오만의 관개수로와 같은 구조물까지 실로 방대한 영역의 인류유산이 포함되어 있다.
유네스코는 문화유산을 지정하는 일뿐만 아니라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의 관리, 보호와 보존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위험에 처한 곳이나 위협을 받고 있는 곳도 알리고 있다. 그래서 일부 세계유산 중에는 관리나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아 리스트에서 제외되는 곳도 여럿 있다.
(서울=연합뉴스) 정성조 기자 = “궁금해요. 일본 기업은, 말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이런 분(강제동원 피해자)이 있다고 하면 자기들이 사과해야지. 죄송하다고 빌어야지. 사과를 해야지. 그놈들 그렇게 무관심하게 있으면 일본이 나쁘지.”
1943년 1월 고등학교에 다니다 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 가마이시제철소에 징용된 이춘식(97) 할아버지는 광복절 76주년을 맞은 15일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대일 과거 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주최로 열린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앞서 이 할아버지 등 피해자 4명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2018년 대법원에서 원고 승소로 최종 확정됐다. 그러나 국내 법원에서만 13년이 걸린 노력이 무색하게 일본 측은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올해 6월에는 피해자 85명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다른 소송이 한국 1심에서 각하되는 등 피해자들의 숙원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유튜브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가는데도 일본 정부와 기업의 반성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44년 ‘일본에 가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학교도 보내준다’는 말에 속아 미쓰비시 나고야항공기제작소로 간 양금덕(92) 할머니는 “오래됐고, 나이도 많이 먹었다. 달래줄 마음이 조금 있을까 생각했는데 서운하다”며 한숨지었다.
“나 혼자 눈물 흘리고 ‘내 죄다, 내가 복이 없응게 이렇게 했지’ 하면서도, 참 그냥 내가 이제 죽으려나벼.”
교사의 말을 믿고 12살에 일본 도야마(富山)현 후지코시 공장에 근로정신대원으로 동원된 김정주(90) 할머니는 “우리 정부나 국회의원이 힘을 써서 우리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에 간 모든 사람이 보상을 받을 수 있게끔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젊은 사람들도 우리가 어떻게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에 가서 고생했는지 알아주면 좋겠다”고 했다.
강제동원 피해자 김정주 할머니 [유튜브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는 “강제 동원된 분들은 ‘일본의 사죄를 받고 후세에는 (이런 상황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일관되게 말씀하신다”며 “사죄를 못 받고 돌아가실까 봐 걱정하는 말씀이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일본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과거 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사무국장으로 활동 중인 야노 히데키 씨는 “피해자들에게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다”며 “일본 스가 정권은 정권 말기의 위기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강제동원 기업들이 그런 정권에 자신들의 판단을 맡기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강제동원 판결대로 배상하라”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광복절인 15일 오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광복 76주년 맞이 강제동원 사죄 배상 촉구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이 온라인 참석자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1.8.15 [email protected]
15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8.15 광복 76주년 맞이 강제동원 사죄 배상 촉구 온라인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이번 행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연대를 보여주고, 한 목소리로 일본에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진실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고자 마련됐다. 2021.8.15/뉴스1광복절인 15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열린 ‘8.15 광복 76주년 맞이 강제동원 사죄 배상 촉구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정주, 이춘식, 양금덕 어르신이 온라인으로 참석한 이번 행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연대를 보여주고, 한 목소리로 일본에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진실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고자 마련됐다./김현민 기자 kimhyun81@(서울=뉴스1) 이성철 기자 =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가 15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열린 ‘8.15 광복 76주년 맞이 강제동원 사죄 배상 촉구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이번 행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시민들의 연대를 보여주고, 한 목소리로 일본에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진실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고자 마련됐다. 2021.8.15/뉴스1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은 지난 4일 대선 출마 기자회견 때 애국가를 불러 화제가 됐다. 뒤이어 그의 집안사람들이 가족 모임 때 애국가 4절까지 합창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있었다. ‘전체주의적이다’라는 소감들이 나오자, 그 집안 며느리들이 가족 성명을 발표하는 진풍경도 나왔다.
가족 모임에서 애국가가 합창되는 것 자체가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태극기 집회에서도 나타났듯이 극우세력이 국민통합의 상징물을 앞세우며 대중에게 어필하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애국가 같은 상징물에 대해서도 부정적 인상이 조장될 여지가 생기게 된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상징물을 둘러싼 문제점이 그 뿐만은 아니다. 애국가와 관련해서는 ‘오염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태극기보다 애국가의 문제점이 더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된 논쟁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의 친일 행적은 잘 알려져 있다. 일왕(천황)을 찬미하는 ‘환상곡 에텐라쿠’, 사쿠라·후지산·사무라이와 더불어 일왕과 ‘일본해’를 찬미하는 ‘일본 축전곡’,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10주년을 경축하는 ‘만주 환상곡’ 등을 짓거나 지휘했다.
그는 한국에 관한 음악도 만들었다. 그런데 일왕을 찬미하는 ‘환상곡 에텐라쿠’를 발표한 1938년 그 해에 한국에 대한 사랑을 표시하는 ‘코리아 환상곡’도 초연했다. 이는 그의 의식 속에서 일본에 대한 감정과 한국에 대한 감정이 비슷한 시기에 혼재돼 있었을 가능성을 드러낸다. 그런 감정으로 일왕 찬미곡도 짓고 한국 찬양곡도 지었던 것이다.
게다가 ‘코리아 환상곡’과 ‘만주 환상곡’의 피날레 부분이 비슷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2007년 <내일을 여는 역사> 제27호에 실린 ‘다시 보는 안익태 – 애국가의 작곡가는 애국자였나’에서 음악학자 송병욱은 “(두 곡이) 주요 합창 선율 두 개를 공유하고 있다”며 “전자에서는 그 선율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대동아공영과 신질서를 찬미하는 가사를 위해, 후자에서는 해방된 한국과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가사를 위해 사용”됐다고 분석했다.
애국가의 오염 상태는 지난 11일 <안민석 TV>를 통해 생중계된 국회 공청회에서도 다시 한 번 강조됐다.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광복절에 즈음해 개최된 이 공청회에서는 작사가 쪽의 문제점이 집중적으로 조명됐다.
애국가 작사가는 공식적으로 ‘미상’이다. 누가 작곡했는지 확정돼 있지 않다. 애국가 작사가 논쟁의 대체적인 상황과 관련해 올해 3월 <기독교 사상> 제747호에 실린 김도훈 한국교원대 연구교수의 논문 ‘애국가 가사의 변천과 작사자 논쟁’은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가 하는 논쟁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은 지금으로부터 66년 전의 일”이라고 한 뒤 1955년 이후의 논쟁 실태를 이렇게 정리했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이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이 재생산되는 이유는 작사자를 입증할 만한 결정적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작사자 논쟁은 자료보다는 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증언과 진술, 전언(傳言)이나 전문(傳聞)을 중심으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2015년 <근대 서지> 제11호에 실린 박대헌 완주책박물관장의 논문 “SBS TV 그것이 알고 싶다 ‘애국가 작사 미스터리’의 논쟁에 대한 고찰”은 2014년 7월 12일 방송된 작사가 논쟁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동안 애국가 작사자 리스트에는 윤치호, 안창호, 김인식, 최병헌, 민영환 등이 이름을 올렸다”고 정리한다.
안창호냐 윤치호냐, 참 고약한 문제
이 후보들 중에 가장 유력한 인물은 둘이다. 11일 국회 공청회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임진택 애국가바로잡기국민운동 상임대표는 “지금 우리 애국가에 얽혀 있는 작사자 문제는 만고의 애국자 안창호 선생이냐 친일민족반역자 윤치호냐 하는 난처한, 고약한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
▲ 윤치호 ⓒ 퍼블릭도메인
안창호(1878~1938년)와 함께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윤치호는 1866년 출생해 조선국과 대한제국의 고위직을 역임한 뒤 1911년 일본 남작이 됐다. 그 뒤 총독부 어용기관들과 합세해 한국인 청년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 전쟁 수행을 위해 금전을 납부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에 따르면, 1941년 9월 ‘임전대책 대(大)연설회’ 때 일왕이 한국인과 일본인을 하나로 바라봐주고 똑같이 어질게 대해주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을 실천하고 있다면서 이렇게 연설했다.
천황폐하의 ‘일시동인’이라 하신 성의를 봉대하여 내선일체를 주장하시는 미나미 총독은 우리 반도의 아버지라고, 우리 민족의 경애를 받고 계십니다. 미나미 총독이 총을 메고 나서라거든 총을 메고 나섭시다. 곡괭이를 메고 나서라거든 곡괭이를 메고 나섭시다. 일언이폐지하고 우리 반도 민중도 내지동포와 같이 나라를 위하여 살고 나라를 위하여 죽자고 각오합시다.
조선총독을 반도의 아버지로 부르고, 내지동포인 일본인들과 함께 나라를 위해 살고 죽자고 외쳤던 윤치호다. 그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의 유력 후보다. 서글픈 것은 물적 자료로만 본다면, 안창호 쪽보다 윤치호 쪽이 더 유력하다는 점이다. 임진택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윤치호 작사설 측은 물적 증거가 있음을 앞세웠고, 안창호 작사설 측은 주로 전문증거를 앞세워 주장을 해왔습니다. 윤치호 작사설이 득세하게 된 것도 바로 물적 증거가 존재한다는 이유였죠.
▲ 도산 안창호 선생 ⓒ 퍼블릭도메인
안창호 작사설을 뒷받침하는 것은 주로 ‘누구한테서 들었다’는 내용이다. 발제에 앞서 환영사를 한 안민석 의원도 그런 전문증거 중 하나를 소개했다. 그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따님 안수산나씨를 LA에 가서 6년 전에 만났습니다”라며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따님인 안수산나씨는, 물론 재작년에 작고하셨습니다만, ‘어릴 때 애국가를 아버지가 직접 지었다고 나한테 말씀하셨다. 집안 어른들한테도 우리 아버지가 지은 거라고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고 말했습니다”라고 소개했다.
이 외에도 ‘할아버지 비서관인 구익균으로부터 할아버지가 애국가를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안창호 외손자 필립 안커디의 전문 증언,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가 학교 조회시간마다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는 1907년 3월 20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 등이 안창호 작사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확실한 증거는 아니다. 애국가를 불렀다고 했지, 작사했다고는 하지 않았다.
반면, 윤치호설은 문서 자료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그가 친필로 썼다는 애국가 가사지가 있다는 점, 그가 ‘역술’했다는 <찬미가> 노래집에 애국가가 포함돼 있다는 점이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자료들에 대해서도 합리적 비판이 제기된다.
1955년에 윤치호 유족은 1907년에 쓰였다는 애국가 가사지를 제시했다가 최남선·주요한 등이 그 당시 애국가에는 ‘충성을 다하여’란 문구가 없었다고 이의를 제기하자 ‘1907년이 아니라 1945년에 쓴 것’이라고 입장을 번복했다.
애국가 가사 속의 ‘님군(임금)을 섬기며’가 ‘충성을 다하여’로 바뀌는 과정은 조선왕정이 무너진 뒤 한국인들이 민주공화국을 추구하며 3·1운동을 일으키는 과정을 반영한다. 1907년에 윤치호가 친필로 썼다는 가사지에 ‘충성을 다하여’가 있었다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어색하다. 유족들이 입장을 번복한 것도 문제이지만, 정말로 윤치호의 친필이 맞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고 박대헌 논문은 소개한다.
또 윤치호가 역술했다는 노래집에 애국가가 포함된 것에 대해서도 반론이 제기된다. 임진택은 “윤치호 작사설 측에서는 역술이란 게 번역과 저술을 포괄하는 단어라고 강변을 합니다”라며 “하지만 역술은 ‘번역하여 기술한다’는 의미의 단일어이지 ‘번역도 하고 저술도 한다’는 복합어가 아닙니다”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저작물을 번역물과 함께 섞어 ‘역술’로 묶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으므로 ‘윤치호 역술 애국가’를 윤치호 작사설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파워포인트 화면과 임진택 대표의 발표 장면. ⓒ 안민석 의원실
오염된 애국가
그래서 이 문제는 오리무중 상태다. 이 때문에, 1955년에 이 문제의 심사를 맡은 정부 당국도 모호한 입장으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해 7월 30일자 <경향신문> 기사 ‘확증 없이 무(無)결론’은 이렇게 보도했다.
애국가 작사자 규명으로 104일간을 소비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사하여온 바 있는데, 28일 제3차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의 최종 회합에서 격론 끝에 ‘윤씨가 작사자로 가장 유력하다’는 결정으로써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지 못한 채 애매한 결론을 내리고 동 조사위원회는 해체되고 말았다.
‘윤치호가 가장 유력하지만 확정할 수 없다’가 결론이었다. 그래서 애국가 악보에 작사자 이름이 나오지 않게 된 것이다. 작사자 논쟁이 66년째 계속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논쟁이 장기화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 사안이 친일파로 인한 애국가 오염을 반영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심각하다. 윤치호설이 맞다면 작곡가뿐 아니라 작사가마저 친일파라는 말이 되어, 이제껏 열심히 애국가를 불러온 우리 국민들의 모양새가 이상해진다.
안창호설이 맞다 해도, 문제가 남는다. 친일파 유족들이 독립운동가 안창호를 밀어내고 자신들의 조상을 ‘가장 유력한 작사가 후보’로 만들었다면, 이는 독립운동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다. 그리고 안창호가 진짜 작사가라고 해도, 안익태의 영혼이 애국가에 들어감으로써 생긴 문제점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는다.
이런 현실은, 애국가의 위상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공청회에 함께한 김원웅 광복회장은 “표절과 친일이 드러난 안익태의 애국가는 이미 생명력을 상실했습니다”라고 탄식했다.
국민의힘 대권 주자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15일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내 독립관을 방문, 참배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등록한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 등이 과거 친일행적을 했다는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논란의 발단은 최 전 원장의 아버지 최영섭 대령이 자신의 회고록에 아버지 최병규씨의 독립운동 활동을 묘사한 것을 놓고 <오마이뉴스>가 이를 검증하는 보도를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최 전 원장의 가족들은 모임 때마다 애국가를 4절까지 함께 부를 정도로 애국심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그래선지 일제시기 조상의 활동을 둘러싼 논란을 최 전 원장은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최재형 캠프는 해당 보도를 한 언론사에 정정보도도 청구한다고 하는데요. 왜 100년 전 증조할아버지의 삶까지 검증대에 오르게 됐을까요? 진실은 무엇일까요?
일제 치하에서 ‘유력 가문’ 의혹의 실체는?
6일 보도된 <오마이뉴스>의 검증 기사는 최 전 원장의 아버지인 최영섭 전 해군대령(1928∼2021)이 지난 5월 펴낸 책 <바다를 품은 백두산>의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우선 최 전 대령이 자신의 아버지이자 최 전 원장의 할아버지인 최병규(1909∼2008년)씨를 회고하며 “2002년 10월 13일 항일독립운동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지만 감옥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훈장은 받지 못했다”고 쓴 부분이 첫번째 검증 대상이 됐습니다. 지난 2008년 최병규씨 사망 기사를 쓴 <강원도민일보>는 기사 제목을 ‘춘천고 항일운동 주도 최병규옹 별세’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마이뉴스>의 보도를 보면, 최 전 대령의 주장과 달리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최병규씨가 없었습니다. 국가보훈처에 정보공개청구를 한 결과, 최씨는 2002년 10월13일에 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서훈이나 표창을 한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같은 해 광복절을 앞두고 표창한 208명의 독립유공자 중에도 최씨는 없었다고 <오마이뉴스>는 보도했습니다. 보도 직후 최 전 원장 캠프는 최씨가 당시 표창을 받은 것이 맞다고 반박하면서도 다만 “대통령 표창 사유에 대해 최 전 대령의 착오가 있었다”며 독립유공자 표창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두번째는, 최 전 대령의 책과 정반대로, 최 전 원장의 할아버지가 ‘항일’ 아니라 ‘친일’을 했다는 의혹입니다. <오마이뉴스>는 같은 보도에서 최병규씨가 평강군 유진면에서 유진면 면협의원에 이름을 올렸고, 그의 형 최병렬씨도 고삽면 민협의원에 당선됐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아버지이자 최 전 원장의 증조할아버지인 최승현(1887~1953) 씨는 당시 유진면장으로 있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최병규씨는 1937년에는 평강군에서 1명을 뽑는 강원도회 의원 선거에 도전하기도 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최병규씨가 비록 낙선했지만, 3·1운동을 경험한 일제가 조선인의 독립요구를 무마하고자 ‘자치’를 앞세워 1920년부터 만들었던 강원도회 의원에 도전한 것 자체가 친일 행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삼부자가 평강군의 유력 인사로 자리매김한 것이 친일행적의 근거라는 겁니다.
<오마이뉴스>는 또한 최 전 원장의 조상들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최 전 대령의 주장을 오히려 친일행적의 근거라며 뒤집어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최 전 대령은 책에서 “1938년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목단강성 해림가로 건너갔고, 1940년에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가족들을 해림으로 불러들였다. 아버지는 7년간 해림에서 살면서 해림가 부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을 맡아 독립자금 확보와 전달 역할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썼습니다. 최병규씨의 독립운동 사례로 소개한 이 대목에 대해 <오마이뉴스>는 “해림가 가장이나 부가장이라는 자리는 만주국 행정체계의 말단 조직을 의미한다. 조선거류민단장 역시 일제가 조선인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든 관제 민간조직답게 특별한 조선인만이 맡을 수 있는 자리였다”며 오히려 최병규씨가 일제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인물이라는 의혹을 거듭 제기했습니다. <오마이뉴스> 보도를 보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1938년 6월30일 기사에서 “(최병규씨가) 아버지 회갑 축연비를 절약해 일금 20원을 국방헌금에 헌납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만주로 떠나기 전 이미 친일에 가담한 행적들을 일제로부터 인정받았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최재형 대선 캠프가 마련된 대하빌딩 앞에서 ‘가짜 독립유공자 친일행적 최재형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단
“민족문제연구소 “최 전원장 조부의 독립운동은 ‘설’에 불과”
<오마이뉴스>의 보도 뒤 최 전 원장 쪽은 “최 전 원장의 조부와 증조부가 독립유공자는 아니었지만 독립운동은 했다”는 취지로 반박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친일파 청산 문제를 연구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나섰습니다. 최 전 원장 할아버지의 이런 친일 의혹 근거들에 견줘, 독립운동 이력이 빈약하다는 겁니다. 연구소는 지난 13일 성명에서 “(면협의회원 재선과 도의원 출마, 국방헌금 납부 등과 만주 목단강성 해림촌 부촌장, 조선인거류민단장 재임 등) 이런 행적은 국가보훈처의 독립운동가 서훈에서 재고의 여지없는 결격 사유에 해당한다”고 밝혔습니다. 최병규씨가 만주에서 살면서 독립자금을 조달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1940년대 만주는 일제에 완전히 장악됐으며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인 이주가 장려되고 있었다. 괴뢰 만주국의 관공리로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주장이야말로 궤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최 전 대령은 책에 최병규씨가 1926년 4월 춘천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서거하자 ‘순종 서거에도 상장(喪章) 달기’ 운동을 주도했다가 불온학생으로 찍히고, 이어 10월에는 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일삼은 일본인 교사 배척을 위해 전교생 동맹휴학을 주도했다가 퇴학 처분을 받았다고 썼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이 사실은 확인했습니다. 다만 이 한 가지 사건을 근거로 최병규씨를 ‘독립운동가’라고 볼 순 없다는 것이 연구소의 의견입니다.
연구소는 오히려 최병규씨가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친일신문이었던 <만선일보> 해림지국 개소에 축하광고를 띄우는 등의 일로 여러 차례 이름이 거론됐다는 새로운 사실을 꺼내 들어 최병규씨가 만주에서 독립자금을 모았다는 최 전 대령의 주장에 대해서 “전혀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최재형 쪽 “친일 아니다…독립운동 했다” 주장
최 전 원장 쪽은 이런 의혹 제기에 대해 “과장과 허위에 가득 찬 것”이라며 최 전 원장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맞다는 주장을 거듭 이어갔습니다. 최 전 원장 캠프의 김종혁 언론미디어 본부장은 지난 13일 기자회견을 열어 우선 가족들이 면장 등을 지낸 것은 그 자체만으로 친일 이력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면장이 친일이라면 흥남에서 농업계장을 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부친은 뭐라고 불러야 하냐”는 겁니다. 국방헌금을 낸 것도 “당시 일제는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조선인들에게 무자비하게 헌금을 강요했고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한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습니다. <만선일보>에 이름이 등장한 것도 당시 부촌장직을 맡았기 때문에 가끔 이름이 나온 것일 뿐, 부촌장직을 맡은 것도 “친일파여서가 아니라 당시 평균적인 교육수준을 볼 때 최 후보의 조부가 고등교육을 받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고 했습니다. 대부분 일제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던 것일 뿐, 자발적으로 일제에 동조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김 본부장은 “최 후보의 조부와 증조부는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시 지주계급이었지만 항일행적을 평가받아 토지를 전면 몰수당하지 않았다”며 거듭 항일운동을 했던 점을 밝혔습니다. 이밖에도 최병규씨의 아버지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장독대에 독립신문을 숨겨 읽는 등 일제 치하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지난 1989년 출간된 최병규씨의 자서전에 자세히 나와 있다는 게 최 전 원장 쪽의 주장입니다.
“친일 적극 가담은 아니나 일제 협력 의심은 있다”
언론과 민족문제연구소, 최 전 원장 쪽의 공방을 종합해보면, 최 전 원장의 할아버지는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적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언론이 제기한 친일 의심 행적의 경우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를 정도로 친일에 적극 가담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일제에 협력한 행위로 의심될 만한 부분이 있어 최 전 대령이 주장하는 독립운동 사례만으로는 향후에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사학과)는 이날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일반적으로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삶 전체가 전반적으로 흠이 없고 존경할 만해야 한다”며 “그런데 이분의 1930년대 행적은 상당 부분 식민통치 말단에서 식민 체제에 동의했다고 볼 수 있는 행적이 있다. 독립운동가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건 난센스다”라고 말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박수현 사무처장도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최 전 원장의 조부와 증조부가) 1급 친일파처럼 적극 협력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일제에 협력했다고 볼 수 있는 이른바 부일 협력행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습니다. 박 사무처장은 또 “이런 상황에서 자꾸 최 전 원장 쪽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이라고 내세우고, 그걸 홍보 자료로 쓰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덧붙였습니다.
100년 전 조상의 행적까지 대선주자의 검증대에 올라온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최 전 원장 캠프에 합류한 정경희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달 “최 전 원장의 할아버지 최병규 선생은 강원도 평강 출신 독립운동가”라며 최 전 원장이 독립운동가 집안임을 강조했습니다. 최 전 원장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는 최병규씨가 독립운동가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한 지지자의 영상이 링크되기도 했습니다. 최 전 원장 스스로 “어떤 분들은 저더러 미담제조기라 하십니다”(3일 출마 기자회견)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미담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아버지 최영섭 전 대령은 해군 최초의 한국전쟁 당시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PC-701)의 갑판사관으로 북한 인민군의 무장수송함을 격침시킨 대한해협해전에 참전한 ‘전쟁 영웅’이기도 합니다. 애국심이 강한 환경에서 자라나 자신의 집안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자부심이 강했고, 그러다보니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란 믿음을 확고히 하면서 이를 강조하게 된 듯합니다.
최 전 원장 캠프 관계자는 이날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최 전 원장의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행적이 과도하게 부각됐다가 생긴 문제라는 주장에 대해 “그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지지자가, 또 정경희 의원이 그렇게 얘기하셨다. 그런데 그 시대 우리 조상이 살아남기 위해 애쓰며, 한편으론 장독대에 독립신문 숨겨서 자식들에게 읽혔던 것들을 어떻게 단죄할 수 있겠나. 다만 저희 스스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점을) 내세워 선거운동을 해보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상들이) 독립운동가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독립운동을 나름대로는 했었고, 조선에 사는 식민지배의 백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며 살았다는 입장”이라고 말했습니다.
▲ 국민의힘 대권 주자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지난 15일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방문, 유관순 열사가 수감되었던 여옥사 8호실을 둘러보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지난 13일 기자회견을 자처한 최재형 대선 예비후보 캠프의 김종혁 언론미디어본부장은 <오마이뉴스>가 공개를 요구한 최재형 후보 조부 최병규의 회고록 <사려와 조화>(1987년작)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공개한 건 원문 내용이 아니라 표지뿐이었다.
김종혁 본부장은 “유교집안에서 자란 자신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됐는지 사상적 편력을 말하면서 동시에 일제시대 자신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록이 있다”면서 “왜 나(최병규)는 일본에 대해 적개심 갖게 됐는가. 최승현(최재형 증조부)이 장독대에 숨겨놓은 대한신문, 독립신문을 어떻게 읽게 됐는가. 왜 내가 동맹휴학을 하게 됐는가 등이 자세히 적혀 있다”라고 책 내용을 요약 정리했다.
최재형 캠프는 <사려와 조화>를 수소문 끝에 찾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원문 전문을 공개하지 않고 표지만 공개했다는 사실 때문에 최재형 후보 일가를 향한 의구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오마이뉴스>가 조부 회고록의 공개를 요구한 핵심 이유는 최재형 증조부와 조부의 친일 행적을 밝혀보자는 게 아니다. 1938년 이후의 만주 행적을 조부 최병규가 어떻게 기록해놨는지 직접 확인해 이를 독립운동 이력으로, 독립운동가로 부를 수 있는지 검증해보자는 취지다. 하지만 최재형 캠프는 최병규가 만주로 이주한 뒤의 행적에 대해선 이번에도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후보 캠프는 현재 ‘최재형 후보가 직접 조부를 독립유공자라거나 독립운동가라고 한 적이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최재형 캠프가 운영하는 유튜브에 ‘최병규는 독립운동가’로 설명하는 영상이 링크돼 있었다는 점(17일 현재 해당 영상은 최재형TV 채널에 보이지 않는다), 정경희 국민의힘 의원이 최병규를 독립운동가라고 부르면서 지지 입장을 밝혔다는 점 등은 여전히 유권자에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검증은 여전히 필요하다.
[검증대상 ①] 최재형 캠프 “독립운동 인정받아 토지 몰수당하지 않았다” 최재형 아버지 “전답·임야를 공산당에 강제로 빼앗겨 하루아침에 알거지”
▲ 최재형 대선예비후보 캠프 김종혁 언론미디어본부장이 지난 13일 최재형 캠프 사무실에서 “최재형 예비후보 일가 친일 주장에 대한 반박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 최재형 캠프 제공
김종혁 본부장은 13일 최재형 후보의 증조부 최승현과 조부 최병규의 독립운동 이력과 월남 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조부와 증조부는 해방된 후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지주계급이었음에도 (북한 공산당에게) 그동안의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아 공산주의 치하에서도 토지를 몰수당하지 않았다. 반탁운동을 벌이다가 소련군이 체포를 하려고 하니까 일가족을 이끌고 월남하게 됐다.
그러나 이는 만주에서 강원도 평강으로 돌아온 과정과 해방 이후 월남 과정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파악하지 않은 해명이다. 최재형 후보의 부친 최영섭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는 최재형 캠프의 해명과 180도 다른 설명이 담겼다.
필자(최영섭)의 집안에는 대대로 내려온 전답과 임야가 있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에서 땀 흘려 모은 부동산이 많았다. 할아버지는 임야를 포함해서 약 200만 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낙엽송 약 40만 주를 심어 놓은 임야를 가지고 있었다. 대대손손 땀 흘려 일군 전답과 임야를 공산당에게 강제로 빼앗겨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것이다. (최영섭 <바다를 품은 백두산> 중)
최재형 캠프는 ‘북한 공산당에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아 토지몰수를 당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정작 최재형 후보의 부친은 “전답과 임야를 공산당에게 강제로 빼앗겨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됐다”고 기록했다.
최재형 캠프가 만주로 함께 이주했다가 돌아온 것으로 설명한 증조부 최승현은 만주 여행 사실은 있을지언정 만주로 함께 이주한 사실은 없다. 만주로 이주한 이는 1938년에 만주로 먼저 간 조부 최병규와 1940년 뒤따라 만주로 간 최병규의 부인 그리고 최영섭·최응섭·최호섭 삼형제 등이다. 이들이 평강으로 돌아온 시점은 1944년 12월이었다. 최재형 캠프의 해명과 최영섭의 <바다를 품은 백두산>의 설명이 다르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갔다는 최병규와 그 가족이 해방되기 8개월 전에 왜 먼저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최영섭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는 그 이유가 전혀 언급돼 있지 않다.
또한 ‘최병규가 반탁운동을 벌이다 소련군의 체포를 피해 일가족을 이끌고 월남했다’는 최재형 캠프의 해명 역시 부친 최영섭의 기록으로 반박 가능하다.
조부 최병규와 부친 최영섭의 월남은 1947년 2월 일이다. 북한에서 반탁운동이 벌어졌던 때는 1945년 말과 1946년 초였다. 조부 최병규와 부친 최영섭이 북한에서 은밀하게 반탁활동을 지속하다가 발각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당사자 중 하나인 최영섭의 회고록엔 그와 같은 언급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월남 이유도 전혀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소련군과 북한 공산당의 행패와 압력은 날이 갈수록 심했다.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 북한에 계속 있자니 견디기가 힘들었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남한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영섭 <바다를 품은 백두산> 중)
‘최병규 독립유공자 표창’ 등 <바다를 품은 백두산> 속 최영섭의 기록이 사실과 다르게 쓰여진 점을 고려했을 때, 최영섭의 증언이 실제와 다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병규 회고록엔 왜 ‘최병규와 그 가족이 해방 전 고향으로 돌아왔는지’, ‘반탁운동으로 인한 체포 위협 때문에 월남했는지’ 기술돼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조부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한 해명을 후보자 캠프에만 맡겨둘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검증대상 ②] 딱 최병규만 꼬집어 주거제한형?… 강경애-서정주 사례는 달랐다
▲ 왼쪽부터 소설가 강경애, 시인 서정주. ⓒ 위키공용/김종훈
최재형 후보 조부 최병규의 ‘1926년 춘천고보 순종 서거 상장달기 운동’과 ‘자격미달 교무주임 배척 맹휴 조직으로 인한 퇴학’에 대한 최재형 캠프의 해명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여태까지 (이와 같은 활동이) 항일운동으로 인정된 사례가 없다”라고 밝혀 <오마이뉴스>의 보도와 궤를 함께했다. 이에 대해 최재형 캠프는 “지역언론에서도 이미 인정한 사실”이라는 주장(12일)에 이어 13일에도 이런 해명을 내놨다.
최병규는 퇴학당한 후 고향에서 3년 동안 일본경찰로부터 감시를 받았다. 총을 들고 만주에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독립운동이 아닌 건가. (…)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독립운동이다 아니다를 평가하나. 일개 시민단체에 불과한 민족문제연구소가 아니라고 하면 독립운동이 아닌 건가.
3년 주거제한형이나 금족령은 일본 당국이나 일본경찰이 취한 판결이나 조치일 수 없다는 지적에 대해 최재형 캠프는 지난 6일 “고문하라는 법이 없으니 고문이 자행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면서 요주의 인물에 대한 사찰과 감시, 행동제약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맞다. 고문하라는 법이 없어도 고문을 했던 게 사실이고, 사찰과 감시, 행동제약도 있었다.
결국 일본 당국은 아버지를 퇴학 처분과 함께 강제로 고향으로 귀향시켜 평강에서의 3년 거주제한, 일명 금족령을 내렸다. (최영섭 <바다를 품은 백두산> 중)
최영섭 대령이 쓴 ‘3년 거주제한’이나 ‘금족령’이란 표현은 매우 그럴듯 하지만 실제 일제의 사찰·감시 양태와는 다르기 때문에 의혹이 제기되는 것이다. 독립유공으로 표창받은 일이 없음에도 표창 날짜까지 박아 부친을 독립유공자로 기술한 것을 고려하면 더욱 미심쩍은 대목이다.
일제는 1920년 병보석으로 석방된 김마리아와 1927년 병보석으로 석방된 박헌영 같은 요주의 인물을 사찰하거나 감시하긴 했지만, 구속 경력이 없는 인사에 대해 3년이라는 기간을 미리 정해 행동반경을 고향으로 제한하는 것과 같은 감시나 사찰은 없었다.
훗날 <인간문제> <소금> 등의 소설을 통해 식민지 여성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인물로 평가되는 강경애는 1923년 학교당국의 부당한 조치에 맞서 무려 한 달 간 맹휴를 조직하다 학교 당국에 의해 평양 숭의여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그럼에도 이후 서울 동덕여학교로 편입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 시인 서정주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서울 중앙고보에서 맹휴를 주도하다 퇴학당한 것은 물론 구속까지 됐음에도, 1931년 전북 고창고보에 편입해 등교하는 데 제약이 없었다.
유독 최병규에게만 일본당국이 3년간의 주거제한형이나 연금령 조치를 내렸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기자는 최영섭 회고록에 등장하는 조치는 일본당국이 내린 조치라기보다 증조부 최승현이 조부 최병규에 내린 ‘근신조치’로 해석하는 게 더 설득력 있다는 지적을 했다.
최재형 캠프는 독립운동 인정 여부와 전혀 관계 없는 지역언론 보도를 독립운동 이력의 근거로 제시한 것도 모자라 ‘민족문제연구소가 무슨 자격으로 독립운동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느냐’고 항변했다. 하지만 최재형 캠프도 독립유공자 인정 여부를 판단하는 국가보훈처와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은 역사연구기관·역사학자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관·집단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검증대상 ③] 만주에서의 활동은?… “윽박이냐” 반문 말고는 정확한 설명이 없다
▲ 해림에서 애국기2기에 해당하는 금액을 헌납했다는 매일신보 기사(1945. 3. 29) 해림가 부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이 당시 하는 일은 국방헌금이나 애국기 헌납금을 잘 걷는 일, 방공훈련에 주민들 잘 동원하는 일, 일제의 중국침략을 비롯한 “대동아전쟁(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창구역할을 잘하는 일 등이었다. ⓒ 매일신보
최재형 캠프는 13일 기자회견에서 조부 최병규의 1938년 이후 만주에서의 행적에 대해선 전혀 해명하지 못했다. <만선일보> 기사를 찾아낸 민족문제연구소의 최병규 만주 행적 추가공개를 ‘의미 없는 내용’이라고 반박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최재형 후보의 조부가 해림가에서 조선인 거류민 대표자격으로 부촌장 맡은 건 친일파라서가 아니고 평균적으로 볼 때 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어서 대표가 된 것이다. 그러면 만주 지역에 살았던 조선인 부촌장 등은 모두 친일파인가. 그렇게 몰아가도 되나.
‘만주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 밝혀야 독립운동을 했다는 주장을 수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오마이뉴스>의 지적에 대해선 “일제에 저항해 양심적으로 살아왔던 것을 자랑스러워 한 누군가에게 독립운동 한 증거를 대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반문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조부 최병규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는지 여부가 중요한 것은 1926년의 맹휴에 대해 백번 양보해 항일독립운동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최병규가 ‘독립운동가’로 불리기 위한 독립운동의 전문성·지속성이 확인돼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1938년 이후 만주 독립운동 사실이 인정된다면, 심지어 1930년대의 국방헌금이나 면협의원 재임, 도회의원 출마 등의 친일 의혹마저 독립운동의 현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최병규에겐 숨기거나 회피할 일이 아니게 된다. ‘국방헌금 강요 등 일제의 압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참가했다’는 아름다운 스토리(미담)를 더욱 맛깔나게 하는 양념을 버릴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재형 캠프는 조부 최병규가 만주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에 대해선 어떠한 해명도 내놓지 않았다.
최재형 후보의 부친 최영섭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시대상황과 다른 기록을 남겼다는 점도 새삼 주목된다. 최영섭은 “만주 목단강에 위치한 해림에는 조선 땅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 고국을 떠나온 사람들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로 붐볐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1938년 이후 만주 해림은 이미 일제가 군대를 동원해 장악한 지 오래여서 어린 최영섭의 눈에도 쉽게 보일 정도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로 붐비는 곳’은 아니었다. 당시 이곳은 독립운동가들로서는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거나 일반인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비밀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엄혹한 지역이었다.
조부 최병규가 회고록 <사려와 조화>에서 1938년 이후 만주 해림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지, 그곳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했다고 기록해놨을지에 대한 확인 없이 검증을 멈출 순 없는 노릇이다.
일제 침략과 강제동원의 상징 조병창 병원건물 철거를 반대하는 시민들은 23일 성명서를 통해 “인천시장은 캠프마켓 1780 건물을 존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캠프마켓 시민참여위원회(이하 시민참여위원회)는 1780 건물 철거를 재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같은 성명에서 “캠프마켓 내 1780 건물이 철거와 보존의 갈림길에 서 있다. 이 건물은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의 상징이자 조선인의 민족해방운동의 상징인 조병창의 병원 건물이었다. 국방부가 이 조병창 병원 건물을 8월 중에 철거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인천지역사회는 조병창 병원 건물 철거 반대의 여론으로 들끓고 있다. 문화재청은 2021년 8월 3일 국방부에 2022년 3월까지 철거 유예를 요청했다. 국방부는 문화재청의 요구를 인천시에 통보했다. 철거 여부와 시기는 향후 캠프마켓 부지와 시설물을 인수하게 될 인천시의 판단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인천시장은 지역사회의 요구와 반대되는 철거 계획을 철회해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캠프마켓은 일제가 조선에 설치한 무기공장 ‘인천육군조병창’이었다. 중일전쟁 도발 이후 일제는 부평에 조병창을 건설하면서 전국에서 1만 명 넘는 사람들을 강제동원하여 무기를 제조했다. 일제의 침략전쟁과 강제동원에 반대하는 조선인들은 이곳에서 태업을 하고 무기를 빼내서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민족해방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성명에서 “철거될 것으로 알려진 조병창 병원 건물에는 무기 제조 과정에서 산업재해를 당한 어린 학생을 비롯한 많은 부상자들이 있었다. 지난 6월 시민참여위원회에서 한 위원은 ‘부평미군기지 내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역사적 의미가 큰 건물’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면서 “지난 3월 25일 시민참여위원회는 회의를 통해 인천조병창 병원 건물을 존치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하지만 인천시 캠프마켓과(전 부대이전개발과)는 6월 17일 회의에서 존치 결정과 반대되게 철거 계획을 보고했다. 캠프마켓과가 직전 회의에서 채택된 결정과 반대되는 내용을 현안 보고의 방식으로 회의자료를 작성한 것이다. 캠프마켓과의 행태는 시민참여위원회의 의사 결정을 왜곡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고 따졌다.
이들은 “캠프마켓과의 문제를 떠나 시민참여위원회는 그동안 캠프마켓 내 건물을 존치하려 했던 결정을 바탕으로 병원 건물 철거에 대해 재논의를 해야 한다”면서 “캠프마켓은 반환, 환경오염 정화, 활용 계획 등 모든 면에서 시민들의 참여와 공감대 형성을 통해 결정돼왔다. 시민참여위원회가 캠프마켓 내 시설물의 존치에 대해서도 이런 태도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인천시장은 지금의 사태를 직시하고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인천시민의 지지로 선출된 박남춘 인천시장은 행정의 책임자로서 지금의 논란을 종식해야 한다. 인천시장은 인천시민을 대신해 캠프마켓과의 비민주적이고 근시안적인 관료적 행정행태에 일침을 가하고, 차제에 인천조병창 병원 건물의 존치를 결정해 캠프마켓 전체를 세계적인 역사문화 공원으로 만들어 후세에 물려주려는 시민적인 요구를 다시 확고히 해야 할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한편 최용규 변호사(전 캠프마켓 시민참여위원장)는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송영길 인천시장 시절 시작한 시민참여위원회에서 황순우 감독의 제안으로 부산 하이어리 부대를 참관하고 내린 결론이 역사의 현장을 가능한 보존하자는 것이었다”며 “(나는 물러가지만)캠프마켓을 지키는 일에 끝까지 같이 해주기를 바란다”고 썼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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