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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부자, 박기순과 박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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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부자, 박기순과 박영철

익명 (미확인) | 월, 2017/08/07- 14:23

친일인명사전을 차근차근 들추다 보면 형제, 부자, 조손, 사촌 등 혈연관계에 있는 인물들이 함께 실려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박기순과 박영철이 그런 경우다. 국가도 이들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 전북 전주에서 미곡상으로 시작해서 조선을 대표하는 재벌로 성장하기까지, 그리고 친일파하면 떠오르는 ‘명성’을 얻기까지 이 부자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신도시 개발 특수를 누리다
박기순(朴基順, 1857~1935)의 장례식을 전하는 신문기사(<매일신보>1935.10.6)에의하면,그는 40세가 넘어서야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생전에 1만 5천여 석을 넘길 정도의 부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가 79세에 사망했으니 그의 재산 형성 시점은 일본인들이 경제침탈을 본격화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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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순과 취향정(醉香亭). 취향정은 박기순이 1917년 자신의 환갑을 기념해 전주 덕진공원 내 연지에 세운 정자다.

 

박기순은 열두 살에 부친을 여의고 어느 상점의 사환 노릇을 하다가 미곡상으로 독립하였고, 전주평야의 미곡을 군산에서 인천으로 내다 팔아 큰 이득을 얻었다. 이를 기반으로 토지를 사들여 만석꾼의 이름을 얻었고, 당시 전라도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토지왕’이 되었다.(<삼천리>,1931)특히박기순은신도시‘이리’(지금의익산)개발과정에서막대한시세차익을얻었다. 오늘날의 강남 개발이나 수도권 신도시 개발의 벼락부자를 떠올리게 한다.
일찍이 일본 자본은 한반도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인 만경강 일대 호남평야에 주목했다. 강제병합 후 그들은 이 비옥한 평야지대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식민지 수탈경제를 구축해 갔다. 

181920년대 이리역 주변 모습

지대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식민지 수탈경제를 구축해 갔다. 그 과정에서 군산과 전주를 사이에 둔 식민도시 이리가 개발되었다. 1914년 1월 호남선이 경성-대전-이리-나주-목포로 연결되
었고, 그해 11월에는 이리와 전주를 잇는 전북경편철도가 개통했다. 10여 호에 불과하던 작은 마을 ‘솜리’는 가로로는 군산과 전주, 세로로는 경성·대전과 목포를 잇는 교통 중심지로 거듭났다. 신도시 이리 개발은 식민지경영을 통해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는 총독부 권력층의 의도와 일본인 대토지자본가들과 박기순과 같은 일부 조선인자본가들의 적극적 개입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박기순은 신도시 및 역세권 개발의 혜택을 온전히 누렸다. 원래 박기순의 소유 토지는 전주도심이 아니라 외곽지대에 분포하고 있었다. 주로 이리역, 구이리역, 대장촌역, 삼례역, 전주역, 신리역 등 경편철도 연변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그는 신도시·경편철도·역세권 개발로 이어진 토지가치 상승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그의 토지는 1930년 현재 685정보였고, 사망하기 2년 전인 1933년 조선신탁주식회사에 320만평을 신탁했는데 당시 토지 시가는 150만 원에 달했다.
그렇다고 떨어지는 감을 누워 받아먹은 것은 아니다. 박기순은 전주경편철도설치기성회 회장을 맡아 전주-이리간 경전철을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철도가 개통한 후 1916년에는 전북경편철도주식회사 이사까지 맡았다.
개발에 필요한 기부도 아끼지 않았다. 1912년부터 1919년 사이에 박기순은 호남선 부지, 전주-군산 간 도로부지, 전주-영동 간 도로부지, 전주 덕진공원 건설비, 전주 다가공원 방천석축, 전주 다가교 가설비 등을 기부했다. 그 덕에 조선총독부로부터 목배 10세트와 감수포장 등을 받았다. 자신이 소유한 땅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차역과 시가지가 개발되도록 총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와의 관계도 잘 관리했다. 여산군수, 조선식산은행 이사, 전주면협의회 의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지역 유지들이 일제 협력을 통해 성장해 가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밟아갔다. 특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북자성회를 조직한 점이 주목된다. 당시 3.1운동을 방해하고 저지할 목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반대 단체가 조직되었다. 자제단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북자성회 규약에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하는 자를 배척하며, 그러한 자가 있다면 곧 본부장이나 지부장에게 밀고할 의무’를 명시했다. 박기순은 이 단체의 조직에 앞장섰고, 전주지부의 지부장을 맡았다.

여기에 아들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이 힘을 보탰다. 박영철은 1912년 8월부터 1918년 9월까지 전북 익산군수를 지냈다. 신도시 이리가 개발되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즉 박영철은 신도시 개발과 주변지역을 잇는 도로 및 철도 개설에 있어서 관권 즉 조선총독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실행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식민권력을 등에 업은 부자의 콤비플레이는 그들을 일약 전북을 대표하는 갑부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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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업은행 은행장 시절의 박영철(52세)

 

이제는 중앙이다
터닝포인트는 조선상업은행이었다. 1931년 박영철은 전국적 지점망을 가진 대형은행인 조선상업은행의 은행장 자리를 꿰찼다. 전북을 주름잡던 박기순-박영철 부자는 조선을 대표하는 자산가로 도약한 것이다.
1920년 박기순은 전주에서 삼남은행을 설립했다. 미곡상을 거쳐 신도시 개발에서 축적한 막대한 토지자본이 금융자본으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전주 지역 대지주와 유지들이 대주주이자 경영진으로 참여했다. 그렇지만 삼남은행이 성장해 가는 몇 년 동안 박기순은 대주주와 중역들을 차츰 물갈이해나갔다. 기존 주주들이 매도한 주식은 박기순 일족이 사들였다. 1925년 무렵이 되면 본인이 사장이자 최대 주주였고, 아들 박영철을 비롯한 박준철, 박판철, 박신철 등 일가붙이가 대부분의 주식을 소유했다. 삼남은행은 식민지 시기에 형성된 주식 세습구조의 한 사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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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조선상업은행

 

박기순은 삼남은행을 경영하면서 전북경편철도, 전북잠업, 전북축산주식회사 등의 이사로 참여했다. 은행가로서 그 재력을 토대로 다른 분야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의 기업활동은 전주를 넘어 익산, 남원, 군산 등지로 확대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지역의 각종 공직과 사회단체, 학교조합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이제 박기순은 전북 지역을 대표하는 자본가이자 유지로 성장했으며, 1924년에 중추원 참의에 임명됨으로써 그의 명망과 사회적 입지는 한층 더 공고해졌다.
중추원 참의가 되고 전북을 대표하는 지역유지가 되었지만, 박기순의 경제적 기반은 여전히 지역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 한계를 뛰어넘어 전국적 레벨의 자본가로 발돋음하는 것은 아들 박영철의 몫이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군인의 길을 걷던 박영철은 강제병합후 행정관료로 변신했다. 처음 부임한 곳이 전북 익산이었고 앞서 보았듯이 신도시 이리 개발과정에 힘을 보탰다. 조선총독부 지시에 철저히 순응하면서도 행정가로서의 자질을 발휘하여 신도시 개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익산군수에 이어 도참여관, 도지사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이때 박영철은 새로운 도약을 모색했는데 바로 중앙 재계로의 진출이었다.
함경북도 지사를 마지막으로 관계에서 물러난 박영철은 박기순으로부터 삼남은행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후 곧바로 조선상업은행과의 합병을 단행했다. 1928년 5월 당국의 인가를 받은 은행 합병으로 조선상업은행은 전국 지점망을 가진 대형은행이 되었고, 삼남은행은 6개월 뒤 단행된 ‘신은행령’(자본금 200만원 이상의 주식회사가 아니면 은행 업무를 할 수 없음)의 파고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금융정책에 관한 정보를 미리 알지 못했다면 할수 없었을 발빠른 대처였다. 박영철은 조선상업은행 부행장에 취임했다. 지역 관료출신인 박영철이 본격적으로 중앙 재계에 진출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조선상업은행 은행장자리에 올랐다. 이제 그는 토지의 민영휘, 금광의 최창학, 방직의 김연수와 함께 조선인 4대 재벌로 불렸다.(<삼천리>, 1932) 박영철은 차츰 자신의 입지를 넓혀 갔다. 1930년에는 조선미곡창고회사 이사, 1932년 10월에는 조선철도회사 이사에 선임되었다. 이어 1932년 12월 조선신탁주식회사 이사가 되었다.
이 회사는 경제공황에 대처하기 위해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금융신탁업무를 담당했다. 박기순이 이 회사에 320만 평(시가 150만 원)의 부동산을 신탁했으므로 박영철의 기반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 밖에도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맥주회사, 북선제지화학공업주식회사 등의 중역을 맡았다.
조선의 4대 재벌이라 해도 총독부 권력과의 돈독한 관계는 필수였다.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확전해 가는 동안 박영철은 조선국방의회연합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부육군병지원자후원회 등 일제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단체의 주요간부로 활동했다. 또 조선미곡조사위원회, 조선산업경제조사회, 임시교육심의위원회, 저축장려위원회, 물가위원회, 시국대책조사회 등에 참여하는 등 총독부의 식민통치 파트너로 활약했다. 이제 박영철은 “한상룡과 함께 중앙의 중요한 지위에서 활약하는 조선 문제의 대표자”란 평판을 얻었다.(<시정25년기념 약진지조선>, 1935)
한시에서 드러나는 친일의 진정성 박영철은 일제강점기에 군수, 도지사, 중추원 참의를 비롯한 고위 관공직을 역임했고,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또 조선 재계에서 알아주는 전국구 재벌이었다. 그렇다 보니 박영철이라고 하면 친일파 재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박찬승 교수는 박영철을 일러 ‘전방위 활약을 보인 친일파’라 표현했다.(<친일파99인>,1993)그런데 박영철은 많은 한시와 여행기, 그리고 회고록을 남긴 문학인이기도 하다. 현재 <백두산유람록(白頭山遊覽錄)>(1921),<아주기행(亞洲紀行)>(1925),<구주음초(歐洲吟草)>(1928),<오십년의 회고(五十年の回顧)>(1929),<다산시고(多山詩稿)>(1932,1939)와같은 저작이확인된다.
친일파들이 하는 흔한 변명 중 하나가 ‘어쩔 수 없이 협력했다’는 것이다. 내심으론 일제의 통치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일제 권력의 위협과 강제 앞에서 한 개인이 저항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허접한 변명에 불과하다. 특히 박영철의 시와 산문처럼 내면의 목소리가 담긴 문학작품은 그런 변명을 일축할 분명한 증거가 된다.
<다산시고>를보자.다산(多山)은박영철의호다.박영철은1932년에자신의한시를모아이 책을 펴냈고, 그후에 쓴 시를 합쳐 1939년에 다시 같은 제목의 책을 냈다. 모두 859수의 한시가 실렸는데, 관련 연구에 따르면 이 가운데 대략 100여 수를 친일작품에 해당한다.

  風雲日露兩交兵 풍운처럼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니
  東亞安危在此行 동아시아의 안위가 여기에 달렸구나
  萬里從征投筆起 만리 출정길에 붓 던지고 일어서니
  誰知定遠是書生 정원후(定遠侯, 班超 33~102)가 서생임을 누가 알리요
 〈종군일로전역 從軍日露戰役, 1904〉

박영철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전쟁에 종군했다. 그때 지은 시이다.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을 동양과 서양의 대결로 인식하고, 동양의 평화는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하는데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반초를 떠올렸다. 후한시대 학자였지만 무인으로 자원해 서역 흉노원정에 용맹을 떨친 반초처럼 자신도 붓을 던지고 일본의 대륙 진출에 공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서구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동양인들은 일본을 중심으로 연대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기 위해 내세웠던 이른바 ‘대동아합방론’에 정확히 부합한다.
박영철은 일본에 공감하여 그들의 조선 통치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식민지 건설에 적극 협력하였다. 박영철이 추구하는 세상은 일본제국주의의 번영과 함께 했다. 따라서 일본의 통치에 저항하고 독립을 추구하는 행동은 무모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역사 발전을 돌이키려는 것으로 보았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함경북도 참여관이던 박영철은 “신정(新政) 이래 생명재산의 안전 또는 교육 민업의 발달은 구한국정치에 비할 바가 아님은 누구라도 이의 없을” 것이니 성과 없는 무모한 운동은 그만두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이란 것도 두 민족이 같은 수준에 이르면 권리의무에 차별이 없어질 것이란 희망도 피력했다.
박영철에게 조선은 ‘일본 내지가 연장된 곳’이었다. 동민회(同民會) 활동은 그런 생각의 실천이었다. 동민회는 ‘철저한 내선융화의 실현을 통한 아시아민족의 결합’을 주장하며 참정권 청원 운동을 벌인 단체다. 즉 제국 신민의 일원이란 의식의 내면화를 기반으로 조선인들에게도 일본 국정에 참여할 권리를 달라는 요구였다. 서구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그런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1928년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고 유럽 각지를 돌아본 후 박영철의 감상은 이런 시로 표현되었다.

  白黃人種各西東 백인종 황인종이 각기 서양과 동양을 차지해
  文字方言互不通 문자와 지역 말이 서로 통하지 않는다.
  欲求平和長久策 평화를 이루려는 장구한 대책은
  先須全亞結心同 먼저 모든 아시아가 한 마음으로 뭉쳐야 한다.
  〈세계대세 世界大勢, 1928〉

러일전쟁 한복판에서 가졌던 박영철의 다짐은 20여 년이 흐른 뒤에도 변함없이 재현되었다. 이제 일본과 조선을 넘어 동양이 하나가 되어 서구 열강을 막아내야 한다. 드디어 일본 제국의 성장과 번영이 중국대륙으로 뻗어 나가니 박영철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었다. 아래는 1932년 만주국에 가서 발표한 경축시,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공략하는 일본군대를 찬양하는 시다.

  滿洲九月下天兵 9월 만주에 하늘의 군사가 내려오니
  一境簞壺老幼迎 노유를 막론하고 밥 싸들고 환영한다.
  革舊而今新政好 옛 제도를 혁파하니 이제 새 정치가 좋아서
  三千萬衆得蘇生 삼천만 민중들이 다시 살아났도다.
  〈축만주신건국 祝滿洲新建國, 1932〉

  北京戰捷又南京 북경을 점령하고 남경을 함락하니
  萬里山河旭日隆 만리산하에 빛나는 태양이 떠오르네
  赫赫皇威光四表 혁혁한 천황 군대의 위세 사방에 빛나니
  東洋自此保平和 이 때문에 동양이 평화를 유지하는구나
  〈황군위문가 皇軍慰問歌, 1937〉

1937년 박영철은 경성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가 되었다. 시에서 보듯 그는 일본과 조선이 하나이고, 더 나아가 만주와 중국도 일체라는 대동아공영론을 확신하고 있다. 일본 군대는 침략자가 아니었다. 새로운 정치를 구현할 해방자였다. 만주의 민중들을 다시 살린 일본 군대는 하늘이 내린 천병이요, 중국대륙을 점령한 천황의 군대는 동양의 평화를 가져올 평화유지군이었다. 일제의 전쟁은 동양평화와 인류복지를 위한 성전이었다. 당연히 조선 사람도 신성한 일본의 전쟁에 동참해야 했다. 1938년 조선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중추원 참의 박영철은 “반도민의 국민관념에 신기원을 그은” 것으로 평가하고, 신성한 의무를 위해 “부디 모범적이고 개인이나 가정에 치부가 없는 자신 있는 사람이 지원”하기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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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 시절 박영철.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박영철 총영사는 북중국과 몽고 각지를 순회하며 일본군을 위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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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유람록>과 <아주기행>

 

박영철은 시 외에도 기행문과 회고록 등을 남겼다. <백두산유람록>은박영철이전라북도참여관이던 1921년에 출간한 것으로 백두산 기행문과 시를 엮은 것이다. <아주기행>은강원도지사 시절에 발간한 기행문으로 백두산·지리산·한라산 등 국내여행지와 일본·대만·간도·블라디보스톡·만주·몽고·중국 등 해외를 견문한 것이다. <구주음초>는1928년암스테르담올림픽을 참관하기 위해 3개월에 걸쳐 아시아·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남긴 기록이다.
<오십년의회고>는박영철이51세되던1929년에낸 회고록이다.한글이나한문이아닌일본어로 썼으며, 본인의 행적보다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주 독자층으로 일본인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조선 멸망의 원인을 우리 민족에게 돌리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특권계급의 창궐과 관리의 부패, 정의와 공적 도의의 전멸 등을 꼽았고, 무기력하고 나태한 민족성, 낮은 문화와 생활수준을 지적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사대주의적 자학사관에 빠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애호가이자 수장가 박영철
박기순·박영철 부자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 박순(朴淳)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본래는 양반이었지만 점차 가세가 기울어 박기순 대에 이르러서는 평민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그렇지만 미곡상으로 시작해 ‘토지왕’으로 이름을 날리는 등 형편이 나아지자 한학에 관심을 쏟았다. 1935년 박기순이 사망할 때 그의 집에는 3만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한다.
박영철도 일본에 유학가기 전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이후 한시를 즐겨 짓고 한문으로 저작을 남기는 등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인지 고서화와 시문 등 전통예술에 큰관심을 기울였다. 경성 소격동 144번지(현재 정독도서관 앞 선재미술관 자리) 박영철의 저택
에는 추사 김정희와 오세창 등의 그림과 글씨, 고려자기 등이 널려 있었다. 1930년과 1932년에는 동아일보사가 개최한 조선고서화전람회에 유명한 고서화를 다수 출품하기도 했다. 조선에서 손꼽히는 거부를 이룬 경제력이 그 밑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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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역화휘>와 <근역서휘>

 

그런데 박영철을 단순히 수장가로만 평가하고 넘어갈 수 없는 대목이 있다. 당시 박영철은 위창 오세창의 지도를 받아 <근역화휘(槿域畵彙)> 3책과 <근역서휘(槿域書彙)> 35책을 펴냈다. <근역화휘>는 조선초기부터 말기까지 그림 67점을 수록한 것으로 안견의 그림으로 전하는 산수도, 신사임당의 그림 등이 실렸다. <근역서휘>는 조선시대 명현의 글씨를 망라한 책이다.
흩어져 있던 고서화를 모으고 위창의 안목에 기대 가치 있는 작품들을 책으로 엮었으니, 우리문화유산의 정수들이 실렸다고 평가된다. 특히 1932년 5월에는 <연암집(燕巖集)>을 17권 6책으로 간행해 냈다. 학계에 ‘박영철본 <연암집>’으로 잘 알려진 책이다. 그동안 필사본으로만 전하던 <열하일기>와 <과농소초> 등 연암 박지원의 저작을 최초로 공간하여 세상에 알렸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으며, 내용 또한 매우 정확하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펴낸 국역 연암집도 박영철본을 대본으로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1939년 박영철이 사망한 후 유족은 경성제국대학에 115점의 유물을 기증했다. 자신의 수장품과 진열관 건립비를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하라는 박영철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거기엔 <근역화휘>, <근역서휘> 외에도 김정희, 이황, 정약용, 정선, 김홍도, 장승업 등의 작품이 포함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이를 기초로 경성제국대학진열관을 건립했고, 이를 인수한 서울대학교는 1946년 부속박물관을 개관했다.
박영철의 인생에서 <근역화휘>, <근역서휘>, <연암집>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한 인물이면서도 결과적으로 그는 우리 전통문화를 수호하는 데 일조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어 보인다.
박영철이 고서화를 수장한 것은 한학에 관심이 컸고 한시와 서화 등을 즐겼던 그의 성정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또 자신의 수장품을 조건없이 기증하고 심지어 전시실 건립비까지 쾌척한 사실은 문화애호가이자 수장가로서의 모범을 보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박영철이 수장품을 기증한 곳이 서울대학교가 아닌 경성제국대학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중일전쟁에서 일본 군대가 승승장구하던 때였다. 박영철은 조선의 문화와 예술 역시 일본이 건설할 ‘대동아’의 문화적 자산이 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민족의 유산, 그래서 다시 찾아야 할 가치가 아니었다. 일본이 대동아주의를 내세우며 추구한 동양성의 한 축을 담당할 미래 가치였다.

아버지와 아들, 친일파의 오명을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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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이 친히 장례식에 쓸 폐백과 제물을 내렸다는 <동아일보> 1939년 3월 15일자 기사.

 

1939년 3월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한 박영철에게 일본 천황은 친히 장례식에 쓸 폐백과 제물을 내리고 훈2등 욱일중수장을 추서했다. 당시 박영철의 사망으로 뇌일혈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의학박사 김성진은 “뇌일혈이란 대체로 지식계급에 많은 병입니다. 그 이유는 혈액이 몰려오는 기회가 노동자보다는 훨씬 많기 때문에 출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혈압이 높아져서 혈관이 파열되어 뇌에 출혈을 일으키게 됩니다. 장소가 뇌인만큼 위험하고 또 뇌를 많이 쓰는 저명인사에게 많게 됩니다. 대체로 비대하고 술과 고기를 많이 먹는 이에게 많은 병으로 노동자에게는 좀 드문 병입니다.”(<매일신보>1939.3.15)라고설명했다.
뇌일혈이 노동자보다 지식계급에 많은 병이라는 설명은 지금의 의학상식으로선 동의할 수 없지만, ‘비대하고 술과 고기를 많이 먹는’ 사람에게 많이 나타난다는 설명은 일견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아마도 박영철의 비대한 몸집을 염두에 둔 설명인 듯하다. 박영철의 사진들을 보면 그의 체구 변화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깊어짐과 함께 박영철의 몸집도 비대해져 갔던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땅에서 지배자에게 코드를 맞춘 삶으로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해방 후 그들의 고백처럼 세상이 뒤바뀔 줄 몰랐을 것이고, 세월이 흘러 부자가 나란히 치욕의 이름으로 역사에 남을 줄은 짐작이나 했을까. 대를 이어 친일한 사람들 중 아랫대의 누군가는 해방을 맞아 일제의 패망을 보아야 했다. 그런데 박기순-박영철 부자처럼 해방 전에 목숨이 다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이 계속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친일로 이룬 부를 누리다 삶을 마쳤다. 하지만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친일파라고 평가받는다면 그 치욕이 배가되지 않을까.

∷ 권시용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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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내역사) 시즌2 – 마지막 방송

역전다방

“최후의 결전4편 조선건국동맹의 활약”

화, 2018/08/07-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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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告金正恩

 

桀紂還生處(걸주환생처)

誰言有自由(수언유자유)

或嘆生地獄(혹탄생지옥)

萬姓化耕牛(만성화경우)

 

김정은에게 거듭 告함

 

夏나라 桀과 殷나라 紂의 還生處

그 뉘라서 자유가 있다고 말하나

或 산지옥 같다 嘆하기도 하느니

모든 백성은 밭갈이 소로 化했소.

 

<時調로 改譯>

 

桀과 紂의 還生處 자유 있다 뉘 말하나

或者는 산지옥이라 탄식하기도 하느니

오호라! 모든 백성은 밭갈이 소 되었소.

 

*桀紂: 중국 夏나라의 걸왕(桀王)과 殷나라의 주왕(紂王)을 아울러 이름. 천하

폭군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還生: 다시 살아남. 또는 죽은 사람이 다시 태어남

*生地獄: 아서    지옥이란  뜻으로, 아주  괴롭고 힘든 곳 또는 그런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름. 산지옥 *萬姓: 萬民. 온갖 성(姓) *耕牛: 논밭 갈 때 부리는 소.

 

<2018.8.8, 이우식 지음>

수, 2018/08/08-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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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다운로드]

교육부는 헌법이 보장한 교육의 전문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수호할 의지가 있는가?

1. 우리는 지난 5월 3일 성명(제목: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수정한 새 집필기준 마련, 당연하다)을 발표하여 새 교육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수정한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러나 7월 27일 최종 고시된 교육과정은 헌법 전문에 등장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추가하였다. 헌법 전문에 쓰여 있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가 아니라, 독일 기본법에서 말하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the basic free and democratic order, the principles of freedom and democracy)’를 의미한다. 헌법 전문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적 기본질서’와 ‘민주적 기본질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정교과서를 옹호했던 수구 세력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협소한 의미의 ‘자유민주주의’로 견강부회하는 상황에 비춰볼 때, 교육부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아무런 부연 설명도 없이 교육과정에 불쑥 추가한 것은, 문재인 정부의 교육부가 여전히 수구·냉전세력의 눈치를 보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 이 과정에서 교육부는 절차상 하자도 되풀이 하였다. 새 역사과 교육과정은 개발과정에서 역사교육 현장의 의견 수렴, 수많은 전문가 그룹의 자문과 공청회를 거치며 시안이 마련되었고, 행정예고 직전에 역사교육 전문가들로 구성된 교육과정심의회 역사과위원회의 심의를 거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부는 행정 예고 기간에 수렴된 의견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교육과정 개발진과 심의위원회의의 전문성을 무시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로 수정된 교육과정을 일방적으로 고시하였다. 이명박 정부의 이주호 교과부 장관이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마지막 결재 단계에서 일방적으로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를 바꾼 것과 닮은꼴이다. 교육부가 『문재인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 다짐한 “교육 민주주의 회복 및 교육자치 강화”가 무색할 따름이다.

3.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교육과정에 추가한 최종 단위는 박춘란 차관이 위원장인 교육과정심의회 운영위원회라고 한다. 대통령령인 교육과정심의회 규정 5조는 “운영위원회는 교육과정 제·개정에 있어서의 전체적인 원칙 및 목적조정에 관한 사항과 다른 위원회에 속하지 아니하는 사항을 조정 심의한다.”로 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소동은 운영위원회가 권한 밖의 사항에 대해 지극히 정치적 판단을 한 것으로 운영위원회 결정 과정 전체가 공개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교육부가 과연 교육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정치적 중립성을 수호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4. 교육부는 2018년 7월 31일 역사과 교과용 도서에 관한 검정 실시도 공고했다. 공개된 집필기준은 5쪽으로 대주제별로 대략적인 서술 범위만을 제시하여 다양하고 창의적인 교과서가 제작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은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함께 공개된 ‘편찬상의 유의점 및 검정 기준’은 매우 실망스럽다. 박근혜 정부가 탄핵국면에서도 국정교과서를 포기하지 않기 위하여 2017년 2월에 급조하여 발표했던 국·검정 혼용을 위한 검정기준과 매우 흡사하다. 국정교과서 폐지 운동과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과정에서 논의되고 제안된 새로운 검정교과서의 상(像)을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2020년에 현장에 적용해야 할 검정 역사 교과서 개발 전체 기간은 17개월이다. 교과서 집필, 교과서 검정과 현장 채택 등의 촘촘한 일정을 감안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국정교과서가 폐지된 이후에도 일부 보수 언론과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며 새 교육과정 고시를 차일피일 미뤄온 교육부의 무소신과 무책임을 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5. 박근혜 정부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부역했던 교육부는 권력의 힘으로 역사 교육에 개입했던 이전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잃고 몰락했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교육부가 할 일은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의 의견을 들어 역사교육이 정치권에 휘둘리지 않도록 제도적· 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교육부는 헌법이 보장한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는데 더 이상 앞장서지 말기 바란다. <끝>

2018년 8월 6일
역사정의실천연대

화, 2018/08/07-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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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보도자료]

수 신 : 각 언론사 정치, 사회, 통일, 외교담당. NGO 담당기자
발 신 :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준)
제 목 : [취재요청]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발족 기자회견
일 시 : 2018년 8월 9일(목) 오전 11시 30분
장 소 :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 (19층)
문 의 : 이하나 (언론담당 010-6584-2121) 김영환 (강제동원 공동행동 정책위원장 010-8402-1718)


강제동원 공동행동 발족 기자회견
피해자 김한수 어르신 발언 / 북측 민화협, 재일동포, 일본시민사회 연대사 발표
/ 양승태 재판거래 대응계획, 외교부 공개질의

1. 광복 73돌을 앞두고 있습니다 대일과거청산 및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뜨겁지만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 사회적인 동력과 집중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피해자들이 한 분 한 분 돌아가시는 지금 시민사회가 목소리 내고 행동하지 못하면 이 문제는 영영 해결하지 못한 역사로만 남을 것입니다.

2. 이에 각계 시민, 사회, 종교단체들이 모여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이하 강제동원 공동행동)을 결성하고 기자회견을 가집니다 . 단체에는 강제동원 피해자 단체를 포함해 민주노총 등의 노동단체 시민 사회 종교단체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별첨. 강제동원 공동행동 조직구성안)

3. 강제동원 공동행동은 향후 남북공동대응을 준비하며, 남북 강제동원 피해 실태조사 공동 피해자 증언대회 등을 추진할 예정입니다. 특히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단체 결성을 축하하는 북측 민족화해협의회 연대사 가 발표될 예정입니다.

4. 강제동원 공동행동은 이후 재일동포 및 일본시민사회와도 연대해나갈 예정입니다. 이 날 기자회견에는 ▲재일동포 (조선인강제연행조사단) 연대 발언 ▲일본시민사회 연대사(조선인강제노동피해자보상입법을위한일한공동행동)가 발표될 예정입니다.

5. 강제동원 공동행동은 시민사회의 실천과 공동행동을 활발히 벌이고자 합니다. 특히 최근 양승태 대법원 강제동원 재판거래와 관련하여 외교부가 사법부 김앤장과 결탁하여 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경위 등에 대해 ▲외교부 공개질의를 발표하고, 강제동원 판결 관련 8월 22일 대법원 심리시작을 앞두고 대법원의 정의로운 판결을 촉구하는 ▲8월 13일 ~17일 대법원 앞 1인 시위 및 기자회견 등 계획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기자회견 개요조직구성안, 발족선언문을 첨부합니다. 이 외에 북측 민족화해협의회 연대사, 일본시민사회 연대사, 외교부 공개질의서 등은 당일 배포될 예정입니다.


[기자회견 개요]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발족 기자회견
○ 일시 : 2018년 8월 9일(목) 오전 11시 30분 ○ 장소 :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19층)
○ 사회 : 김민철 (강제동원 공동행동 운영위원장)
○ 내용
▲ 여는말 : 홍순권 (강제동원 공동행동 상임공동대표)
▲ 피해자 발언 : 김한수 어르신
▲ 격려사 :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 의장)
▲ 발언1 : 일제 강제동원 사죄배상, 국민의 힘, 민족의 힘으로 해결하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김명환 위원장)
▲ 발언2 : 대일과거사, 다양한 과제 청산을 위해 단결하고 연대하자!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김종수 목사)
▲ 연대사 : 재일동포/ 량대륭(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북측/ 민족화해협의회 (대독 : 이연희 강제동원 공동행동 사무처장), 일본시민사회/ 조선인강제노동피해자보상입법을위한일한공동행동 (대독 : 김영환 강제동원 공동행동 정책위원장)
▲ 발족선언문 낭독 (평화디딤돌 박진숙 사무국장,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이하나 정책국장)
▲ 발족상징 퍼포먼스
▲ 향후 사업계획발표


[별첨1] 조직구성 (2018년 8월 9일 현재)

○ 단체명: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 고문 : 강만길, 김삼웅, 성타스님, 윤정옥, 이만열, 이이화, 이창복, 전기호, 함세웅

○ 상임공동대표 : 홍순권, 이수호, 조성우

○ 공동대표(단체) :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이국언)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이윤배)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원택스님)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 (서중희)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이희자)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조성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김명환)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권해효)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이희자) 평화디딤돌 (정병호) 포럼 진실과 정의 (이석태 / 김효순 / 홍순권) 흥사단(류종열) 합천 평화의집(이남재)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김종수) KIN지구촌동포연대 (배덕호)

○ 공동대표(개인) : 김삼열, 단병호, 이수호

○ 운영위원장 : 김민철(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 : 이연희(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정책위원장 : 김영환(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별첨2] 발족선언문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발족선언문]

해방 73년을 맞는 2018년 4월 27일, 남북의 정상이 발표한 ‘판문점선언’은 분단 70년의 장벽을 넘어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한반도에서 시작된 평화의 첫걸음이 동아시아에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역사적인 발걸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동아시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다.

동아시아에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역사적인 과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로 얼룩진 과거를 올바로 극복하는 일이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2010년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식민주의의 청산과 평화실현을 위한 한일시민공동선언’을 발표했으며, 한일국교정상화 50년을 맞아 ‘2015 한일시민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식민주의와 식민지배가 그 자체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억압하는 범죄이며, 식민지배로 인한 피해가 해결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음을 두 선언은 강조했다. 또한 식민주의의 청산을 위해 일본 정부가 해결해야 할 20개 과제를 제시하고 이의 신속한 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식민주의 청산을 위한 시민들의 요구에 성실하게 응답하기는커녕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아베 정권은 평화헌법을 무력화시키는 안보법제를 제정하는 등 군국주의의 부활을 시도하고 있으며, 아시아 침략의 역사로 점철된 메이지(明治) 시대를 미화하는 ‘메이지유신 150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침략전쟁과 식민주의의 역사를 극복하지 않는 한 일본은 평화로운 동아시아의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없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가 남긴 문제가 아직도 동아시아의 평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불행한 현실 앞에서 우리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투쟁해 온 피해자들과 동아시아의 시민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에서 한일 양국의 국가권력은 국익이라는 미명 아래에 피해자들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았다. 이에 자신들의 인간존엄의 회복을 위해 스스로 일어선 피해자들은 한국과 일본의 법정에서 그리고 역사의 현장에서 지금도 싸우고 있다. 70여년의 세월이 피해자들에게 안겨준 고통은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들은 피해자들에게 남겨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준엄한 현실 앞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과 진정한 대일과거청산을 위해 다시 힘을 모으고자 한다.

우리들은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비롯하여 대일과거청산을 위해 뜻을 같이 하는 남과 북, 재외동포와 일본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시민들과 연대할 것이며, 우리의 첫걸음이 역사의 진실을 밝혀 정의를 세우고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는 역사적인 발걸음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2018년 8월 9일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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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8/08/0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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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응원영상 5탄!]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기적을 이어 2018년 8월 29일,

다시 시민들의 힘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문을 엽니다.

‘라이터를 켜라’, ‘기억의 밤’ 등을 연출한 장항준 감독이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을 응원하는 영상을 직접 보내왔습니다.

수, 2018/08/0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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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릴레이 응원영상] – 4. 박주민 의원과 김광진·정청래 전 의원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릴레이 응원영상 4탄!
박주민 의원과 김광진·정청래 전 의원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응원합니다! 지난해 열렸던 ‘적폐청산 항일음악 콘서트’의 미공개 영상입니다^^

수, 2018/08/0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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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서울시교육청에 등록된 공익사단입니다.
관련단체로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영리민간단체 (사)민족문제연구소가 있습니다.
‘(사)’는 교육청에 등록된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가 모체(?)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우리 회원은 (사)민족문제연구소가 언제 설립되고, 어떤 목적 사업을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보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민족문제연구소를 추가로 등록한 이유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목, 2018/08/0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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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會議員輩特別活動費

 

外面民生苦(외면민생고)

錢與野同(탐전여야동)

如何多歲費(여하다세비)

私慾每無窮(사욕매무궁)

 

국회 의원들의 특별 활동비

 

백성들 삶의 고통은 외면하면서

돈을 탐냄에는 與野가 똑같다네

많이 받는 그 歲費 어찌 된 건가

사사로운 욕심은 늘 무궁하구나.

 

<時調로 改譯>

 

민생고 외면하면서 貪錢엔 與野가 같네

많이 받는 그 歲費는 대체 어찌 된 건가

당신들 私的인 욕심 언제나 무궁하구나.

 

*歲費: 국가 기관에서 한 해 동안 쓰는 경비. ≒세용(歲用). 국가 기관에서 官僚

등에게 지급하는 돈.법률국회 의원이 매월 지급받는 수당 및 활동비 *私慾:

자기 한 개인의 이익만을 꾀하는 욕심 *無窮: 공간이나 시간 따위가 끝이 없음.

 

<2018.8.9, 이우식 지음>

목, 2018/08/0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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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발족… “양승태 대법원, 충격과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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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이 9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발족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강제징용 피해자 김한수 할아버지가 김진영 민족문제연구사 선임연구원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 소중한

“항상 가슴에 피맺혀 있는 것은 일본과의 문제입니다. ‘인생 이렇게 살다 가면 끝인가’라는 생각에 한스럽고 슬플 때가 많습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인 김한수 할아버지가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어갔다. 100년 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난 김 할아버지는 “강제로 끌어다 일을 시켰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오늘까지 아무런 대가가 없다”라며 “지금까지 일본 대표라고 하는 사람들의 사과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너무도 괘씸하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김씨는 한국 정부를 향해서도 “우리는 왜 그렇게 밤낮 남의 나라에 찢기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라며 “앞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문제 해결의) 책임을 다른 곳에 전가하지 않고 좀 강력하게 헌신했으면 한다”라고 덧붙였다.

김씨와 같은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비롯한 대일 과거 청산을 위한 모임이 9일 발족했다.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대일 과거 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아래 공동행동)’은 이날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피해자들에게 남겨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준엄한 현실 앞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과 진정한 대일 과거 청산을 위해 힘을 모으고자 한다”라고 발표했다.

이어 공동행동은 “일본 정부는 식민주의 청산을 위한 시민들의 요구에 성실하게 응답하기는커녕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시도를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다”라며 “침략전쟁과 식민주의의 역사를 극복하지 않는 한 일본은 평화로운 동아시아의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북측 “굳은 련대의 인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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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이 9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발족 기자회견을 열었다. ⓒ 소중한

이날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일제 강제동원, 아베는 사죄하라”, “남북이 힙을 합쳐 강제동원 문제 해결”, “재판거래 규탄, 양승태를 처벌하라” 등이 적힌 피켓을 든 채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이날 공동행동이 발표한 당면 과제는 박근혜 정부와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 의혹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최근 일제 강제동원 소송과 관련해 청와대와 대법원 사이 재판거래의 실체가 드러났고, 외교부와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깊이 관여한 사실을 확인했다”라며 “충격과 분노를 금할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청와대, 외교부, 대법원이 헌법을 위반해 자국민 보호의 책무를 방기하고, 사법부의 독립을 유린한 국정농단을 펼친 것이다”라며 “이 땅에 정의를 수호할 법원도, 국민을 대변할 외교부를 비롯한 정부도 없었다는 참담한 사실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공동행동은 ▲ 일제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외교부의 공식입장은 무엇인가 ▲ 강제동원은 국제법상 반인도적 범죄이며 중대한 인권침해인데 외교부의 입장은 무엇인가 ▲ 한일청구권협정문제에 대한 외교부의 대책은 무엇인가 ▲ 피해자의 권리에 대한 외교부의 입장은 무엇인가 등의 내용이 담긴 외교부 공개질의서를 발표했다. 또 13~17일 릴레이 1인시위, 22일 기자회견을 대법원 앞에서 진행하기로 계획했다.

공동행동은 북한, 재일동포, 일본 시민단체 등과 공조할 계획이다. 북측 민족화해협의회는 서면 연대사를 통해 “우리는 공동행동이 일본의 과거 죄악을 청산하고 민족의 존엄과 자주를 지키며 판문점선언의 기치 밑에 민족적 단합과 조국통일의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데 선봉적 역할을 다하리라고 확신한다”라며 “남녘의 각 계층 단체, 인사들에게 굳은 련대적 인사를 보낸다”라고 밝혔다.

조선인강제노동피해자보상입법을위한일한공동행동의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도 “공동행동과 손잡고 운동을 추진할 일본 측 단체를 조속히 발족시키겠다, 이를 계기로 피해자들께서 살아계시는 동안 반드시 문제가 해결되도록 노력하자”라는 내용의 서면 연대사를 보내왔다.

공동행동은 “남과 북, 재외동포와 일본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시민들과 연대할 것이다”라며 “우리의 첫걸음이 역사의 진실을 밝혀 정의를 세우고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는 역사적인 발걸음이 될 것을 확신한다”라고 덧붙였다.

공동행동에 참여한 단체는 다음과 같다. ▲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 민족문제연구소 ▲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 ▲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 조선학교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 평화디딤돌 ▲ 포럼 진실과 정의 ▲ 흥사단 ▲ 합천 평화의집 ▲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 KIN지구촌동포연대

<2018-08-0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죽으면 끝인가…” 100세 강제징용 할아버지의 한탄

※관련기사

☞뉴시스: “일제 강제동원 문제, 남북한이 공동 대응”…공동행동 발족

☞연합뉴스: “남북 힘 합쳐 일제 강제동원 사죄받자” 공동행동 발족

목, 2018/08/09-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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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지 내일을 여는 역사 2018년 여름호 출간은 언제인가요???

금, 2018/08/10-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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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신사 부근까지 400여명 촛불 행진
“반일 일본인 일본에서 나가라” 우익들 방해도
토론회에서는 “메이지유신 150주년 빛만 강조해서는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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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 시민들이 ‘평화의 등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라는 펼침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전쟁 반대. (야스쿠니 신사) 합사 반대”

11일 저녁 한·일 시민 400여명이 도쿄 지요다구 재일한국와이엠시에이(YMCA)에서부터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근처까지 ‘평화의 등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라는 펼침막을 들고 촛불 행진을 벌였다. 시민들은 촛불을 상징하는 형광 띠를 손목에 두르고 “아베 (신조) 총리는 그만둬라” “야스쿠니 반대” 같은 구호를 외쳤다. “아베 정부는 군국주의적 정책을 취하고 있다”는 강한 비판 목소리도 나왔다.

이날 평화 행진은 태평양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야스쿠니신사 위헌소송 모임 등 한일 시민단체와 활동가 등이 참가한 촛불행동실행위원회가 주최했으며, 2006년부터 열리고 있다. 행진 마지막에 우치다 마사토시 촛불행동실행위원회 공동 대표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야스쿠니 신사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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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 시민들의 야스쿠니 반대 평화 행진을 방해는 우익들의 모습. “매국노 부끄러운 줄 알라”라는 손팻말을 들었다. 일장기와 욱일승천기 모습도 보인다.

우익들의 평화 행진 방해는 올해도 계속됐다. 우익 세력으로 추정되는 수십명의 일본인들이 “반일 일본인은 일본에서 나가라” 같은 구호를 확성기를 통해 외쳤다. “매국노, 부끄러운 줄 알라” “일본을 파괴하는 테러리스트는 용서할 수 없다” 같은 펼침막을 욱일승천기와 일장기 함께 흔들었다. 행진 장소 중 한 곳이었던 진보초 사거리에서는 태극기를 찢는 이도 있었고 평화 행진 참가자를 향해서 돌진하려다가 경찰에 제지당한 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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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 시민들의 야스쿠니 반대 평화 행진을 방해는 우익들의 모습. “극좌 촛불 데모 용서할 수 없다”고 쓴 펼침막을 들고 있다.

평화 행진에 앞서 이날 도쿄 재일한국와엠시에서는 ‘메이지 150년과 야스쿠니, 그리고 개헌’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렸다.

다카하시 데츠야 도쿄대 교수는 “올해는 메이지유신 발생 150년이 되는 해다. (아베 정부는) 메이지유신의 강점만을 강조하며 메이지 유신의 정신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메이지의 빛만을 강조하고 어둠을 외면한다”며 “그들이 생각하는 메이지유신의 강점은 옛 일본군의 군사력과 천황 중심 문화인 것 같다. 그런 역사관이라면 나는 찬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군 병사-아시아·태평양전쟁의 현실>이라는 책을 쓴 요시다 유타카 히토쓰바시대 교수는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이 벌인 전쟁에서) 숨진 이가 310만명이었는데, 이중 (제대로 먹지 못해서 몸이 쇠약해져 숨진) 병사가 전체의 60% 정도였다, 근대 군대사 관점에서 볼 때 퇴행적 현상이 벌어졌다”며 “야스쿠니신사가 전몰자를 영웅시하는 것과는 달리 병사들이 처했던 상황은 이처럼 가혹하고 무참했다”고 지적했다.

권혁태 성공회대 교수는 “최근 대법원이 박근혜 정부 때 위안부 소송은 각하 또는 기각하고 강제징용피해자 소송은 지연하라는 내부지침을 내린 게 드러났다. 이는 한일관계에서 한국의 우파 정권이 무엇을 지향하려 하는지를 드러낸 사건”이라며 “박근혜 정부가 두려워한 것은 ‘안보를 위해서 역사를 죽인’ 65년체제(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만들어진 한일 관계)의 균열을 우려한 것이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박근혜 정권은 65년 체제의 위기를 벗어나는데 그치지 않고 65년 체제의 군사적 약점을 보완하고 (2016년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 등으로) 이를 강화하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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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 재일한국와이엠시에이(YMCA)에서 ‘메이지 150년과 야스쿠니, 그리고 개헌’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다.

심포지엄 뒤에는 야스쿠니신사에 아버지가 합사된 유족 이명구씨가 단상에 올랐다. 이씨의 아버지는 1943년 군속으로 강제동원돼 1945년 4월 팔라우섬에서 숨졌다. 이씨는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끌려가신 3년 뒤인) 1946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9살 그리고 동생이 5살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제사상에 놓인 과일을 보고 먹고 싶다고 울던 동생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동생은 굶주림 끝에 쇠약해져서 숨졌다. 일본 때문에 나는 고아가 되었다”고 말했다.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서 죽게 한 것도 억울한데 왜 일본 정부는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합사를 했는가. 내가 살아있는 동안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은 야스쿠니신사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다”고 말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email protected].k

<2018-08-12> 한겨레 

☞기사원문: “전쟁 반대, 야스쿠니 반대” 도쿄에 퍼진 한·일 시민의 목소리

※관련기사 

☞연합뉴스TV: 한일 시민단체, 야스쿠니 인근 촛불 행진…우익 방해 여전

☞경향신문: 도쿄에서 13년째 “야스쿠니·전쟁 반대”…우익들 “매국노, 철퇴를” 방해

☞경인일보: 한일 시민단체, 야스쿠니 인근 촛불 행진… “가해, 피해 관계의 청산 이뤄지지 않아”

☞경인일보: 한일 시민단체, 야스쿠니 인근 촛불 행진… “가해, 피해 관계의 청산 이뤄지지 않아”

☞헤럴드경제: 광복절 앞둔 日야스쿠니…촛불집회와 혐한시위 신경전

토, 2018/08/1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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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응원영상 6탄!]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기적을 이어 2018년 8월 29일

다시 시민들의 힘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문을 엽니다.

전국역사교사모임 선생님들이 릴레이 응원메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월, 2018/08/13-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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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그날 바다’를 연출한 김지영 감독이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을 응원해주었습니다~^^

화, 2018/08/14-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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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

오는 8월 29일은 한일합병조약문이 발표된 경술국치일입니다.

이날, 서울 용산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개관합니다.

그동안 시민들의 성금으로 개관이 추진됐는데, 식민지 시대 민중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개관에 앞서서 이지수 기자가 미리 다녀왔습니다.

◀ 리포트 ▶

빛바랜 종이에 가족들을 향한 그리움이 한 자 한 자 적혀 있습니다.

“부모님께오서 양 내외가 걱정없이 사시고 아들도 잘 지내며…”

강제징용 피해자인 김외준 씨가 전쟁터에서 부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입니다.

편지 옆에는 전쟁터에 끌려가 시베리아에 억류됐다가 돌아오지 못한 이규철 씨의 수기가 전시돼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전쟁터로 가야만 하나. 일본을 위해서 죽고싶지 않다…”

벽면 한쪽에는 순사 임명장, 조선총독부 관료 임명장 등 친일파들의 행적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모두 식민지 시기를 겪었던 민중과 후손들이 수십 년 동안 간직했다가 기증한 물건들입니다.

강제징용 피해자나 항일운동가들의 유족들이 활동하면서 모은 자료는 물론, 일본 시민들이 보내온 것도 적지 않습니다.

[이희자/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대표]
“내가 활동을 하면서 나도 나이가 먹어가잖아요. (기록들이) 재탄생을 하게 돼서 나는 정말 30년의 활동이 허무하지 않았고…”

전시된 물건만 4백여 점, 서고에 보관된 기록물까지 합하면 7만 점 가까이 됩니다.

[김승은/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장]
“식민지배의 실상과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가 거기에는 일상적인 민중의 삶도 있고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지난 2007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기 시작해 11년 만에 시민 5천여 명의 기증품과 기금 35억 원이 모여 만들어졌습니다.

박물관은 오는 29일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될 예정입니다.

MBC뉴스 이지수입니다.

<2018-08-14> MBC

☞기사원문: ‘경술국치’ 기록한다..식민지 역사박물관 개관

※관련기사

☞ 경향신문: 일제강점기 역사박물관, 시민 모금으로 ‘첫 개관’

☞ KBS: “치욕도 역사” 시민이 세운 ‘식민지 박물관’ 첫 공개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이끈 이이화 건립위원장 인터뷰 이 위원장
“식민지 시대 아픈 역사 고스란히 알릴 것…청소년 위한 토론장 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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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와 인터뷰 하는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 [촬영 성서호]

 

(파주=연합뉴스) 성서호 기자 = “3·1 운동 때 발표한 독립선언서의 원본을 확보했습니다. 일본 강점기에 강제로 끌려간 이들의 편지나 일기도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볼 수 있어요.”

이이화(82)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은 광복절을 맞아 경기도 파주 자택에서 진행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박물관을 소개하며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사 대중화에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는 사학자인 이 위원장은 처음 건립위원장 자리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만 해도 고령을 이유로 자리를 고사했지만, 오는 29일 박물관의 정식 개관을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공적 자금의 도움 없이 시민들의 모금과 자료 기증으로 마련된 박물관은 특히, 여러 박물관 중 가장 많은 기증품으로 채워질 예정이다.

이 위원장은 “돈을 주고 사 와도 자료를 못 구하는 마당에 국가 예산도 안 받고 어떻게 꾸릴지 걱정이 컸다”며 “그런데 예상치 못한 호응을 받았고, 여러 곳에서 자료를 희사해 주셨다”고 고마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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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의 칙유 [민족문제연구소 제공=연합뉴스]

 

그는 “전시 자료 7만 점 정도를 모았는데 국내외 통틀어 7개 정도밖에 없다는 3·1 운동 독립선언서 원본도 있다”며 “강제 징용된 일본군에서 몸에 두르던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적힌 띠는 물론,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글 등의 자료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이밖에 식민지역사박물관에는 “한국의 통치권을 예전부터 친하고 믿고 의지하고 우러르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께 양여한다”는 내용의 순종 칙유(勅諭·임금의 말씀을 적은 포고문)와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포고문 등 국치의 아픔을 담은 사료가 전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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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합기념 조선사진첩 [민족문제연구소 제공=연합뉴스]

 

나라를 팔고 귀족이 된 조선 고위층들이 1910년 11월 부부동반으로 일본을 관광하던 당시의 흑백사진 등을 담은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이나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을 감시·탄압했던 경찰들의 자료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나라를 빼앗긴 시절 민초들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1940년 육군지원병에 끌려갔다가 전쟁터에서 소식이 끊겼던 임용택 씨의 사진부터 1945년 징집된 뒤 관동군 자폭특수대에서 훈련받은 이규철 씨의 육필일기 등은 당시 민중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런 자료들은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들의 유족이 직접 기증한 것이다.

이 위원장은 식민지역사박물관의 의의를 해방 후 70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과거사 청산의 ‘디딤돌’이라고 설명했다.

이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 만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해방 이후 경제 발전상에만 집중했지, 독립운동의 역사를 소홀히 하고 있다”며 “이번에 개관할 박물관은 식민지 시절의 아픔을 똑바로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지향점은 과거를 반성하고, 진실을 밝히고 화해하는 것”이라며 “일본과 친일파들이 반성하도록 하고 이후 화해하자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초대 박물관장 제안을 손사래 치며 거부한 그는 앞으로 박물관이 ‘살아있는’ 곳이 되길 바랐다.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강의도 듣고, 토론도 하는 학습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위원장은 “해방이라고 식민지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닌 만큼 자꾸 말로만 떠드는 것보다는 국민이, 특히 청소년들이 많이 알게 해야 한다”며 “기본 성격은 박물관이지만, 참신한 방법으로 식민지 역사를 알리기 위해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경술국치 108주년을 맞은 이달 29일 문을 연다. 2007년 준비위원회 발족 이후 약 11년 만으로, 공적 자금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일반시민 성금과 자료 기증으로 마련됐다.

[email protected]

<2018-08-14> 연합뉴스

☞기사원문: “시민의 힘으로 세운 식민지역사박물관…살아있는 역사 될 것”

수, 2018/08/15-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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