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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부자, 박기순과 박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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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부자, 박기순과 박영철

익명 (미확인) | 월, 2017/08/07- 14:23

친일인명사전을 차근차근 들추다 보면 형제, 부자, 조손, 사촌 등 혈연관계에 있는 인물들이 함께 실려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박기순과 박영철이 그런 경우다. 국가도 이들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 전북 전주에서 미곡상으로 시작해서 조선을 대표하는 재벌로 성장하기까지, 그리고 친일파하면 떠오르는 ‘명성’을 얻기까지 이 부자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신도시 개발 특수를 누리다
박기순(朴基順, 1857~1935)의 장례식을 전하는 신문기사(<매일신보>1935.10.6)에의하면,그는 40세가 넘어서야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생전에 1만 5천여 석을 넘길 정도의 부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가 79세에 사망했으니 그의 재산 형성 시점은 일본인들이 경제침탈을 본격화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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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순과 취향정(醉香亭). 취향정은 박기순이 1917년 자신의 환갑을 기념해 전주 덕진공원 내 연지에 세운 정자다.

 

박기순은 열두 살에 부친을 여의고 어느 상점의 사환 노릇을 하다가 미곡상으로 독립하였고, 전주평야의 미곡을 군산에서 인천으로 내다 팔아 큰 이득을 얻었다. 이를 기반으로 토지를 사들여 만석꾼의 이름을 얻었고, 당시 전라도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토지왕’이 되었다.(<삼천리>,1931)특히박기순은신도시‘이리’(지금의익산)개발과정에서막대한시세차익을얻었다. 오늘날의 강남 개발이나 수도권 신도시 개발의 벼락부자를 떠올리게 한다.
일찍이 일본 자본은 한반도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인 만경강 일대 호남평야에 주목했다. 강제병합 후 그들은 이 비옥한 평야지대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식민지 수탈경제를 구축해 갔다. 

181920년대 이리역 주변 모습

지대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식민지 수탈경제를 구축해 갔다. 그 과정에서 군산과 전주를 사이에 둔 식민도시 이리가 개발되었다. 1914년 1월 호남선이 경성-대전-이리-나주-목포로 연결되
었고, 그해 11월에는 이리와 전주를 잇는 전북경편철도가 개통했다. 10여 호에 불과하던 작은 마을 ‘솜리’는 가로로는 군산과 전주, 세로로는 경성·대전과 목포를 잇는 교통 중심지로 거듭났다. 신도시 이리 개발은 식민지경영을 통해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는 총독부 권력층의 의도와 일본인 대토지자본가들과 박기순과 같은 일부 조선인자본가들의 적극적 개입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박기순은 신도시 및 역세권 개발의 혜택을 온전히 누렸다. 원래 박기순의 소유 토지는 전주도심이 아니라 외곽지대에 분포하고 있었다. 주로 이리역, 구이리역, 대장촌역, 삼례역, 전주역, 신리역 등 경편철도 연변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그는 신도시·경편철도·역세권 개발로 이어진 토지가치 상승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그의 토지는 1930년 현재 685정보였고, 사망하기 2년 전인 1933년 조선신탁주식회사에 320만평을 신탁했는데 당시 토지 시가는 150만 원에 달했다.
그렇다고 떨어지는 감을 누워 받아먹은 것은 아니다. 박기순은 전주경편철도설치기성회 회장을 맡아 전주-이리간 경전철을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철도가 개통한 후 1916년에는 전북경편철도주식회사 이사까지 맡았다.
개발에 필요한 기부도 아끼지 않았다. 1912년부터 1919년 사이에 박기순은 호남선 부지, 전주-군산 간 도로부지, 전주-영동 간 도로부지, 전주 덕진공원 건설비, 전주 다가공원 방천석축, 전주 다가교 가설비 등을 기부했다. 그 덕에 조선총독부로부터 목배 10세트와 감수포장 등을 받았다. 자신이 소유한 땅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차역과 시가지가 개발되도록 총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와의 관계도 잘 관리했다. 여산군수, 조선식산은행 이사, 전주면협의회 의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지역 유지들이 일제 협력을 통해 성장해 가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밟아갔다. 특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북자성회를 조직한 점이 주목된다. 당시 3.1운동을 방해하고 저지할 목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반대 단체가 조직되었다. 자제단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북자성회 규약에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하는 자를 배척하며, 그러한 자가 있다면 곧 본부장이나 지부장에게 밀고할 의무’를 명시했다. 박기순은 이 단체의 조직에 앞장섰고, 전주지부의 지부장을 맡았다.

여기에 아들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이 힘을 보탰다. 박영철은 1912년 8월부터 1918년 9월까지 전북 익산군수를 지냈다. 신도시 이리가 개발되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즉 박영철은 신도시 개발과 주변지역을 잇는 도로 및 철도 개설에 있어서 관권 즉 조선총독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실행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식민권력을 등에 업은 부자의 콤비플레이는 그들을 일약 전북을 대표하는 갑부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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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업은행 은행장 시절의 박영철(52세)

 

이제는 중앙이다
터닝포인트는 조선상업은행이었다. 1931년 박영철은 전국적 지점망을 가진 대형은행인 조선상업은행의 은행장 자리를 꿰찼다. 전북을 주름잡던 박기순-박영철 부자는 조선을 대표하는 자산가로 도약한 것이다.
1920년 박기순은 전주에서 삼남은행을 설립했다. 미곡상을 거쳐 신도시 개발에서 축적한 막대한 토지자본이 금융자본으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전주 지역 대지주와 유지들이 대주주이자 경영진으로 참여했다. 그렇지만 삼남은행이 성장해 가는 몇 년 동안 박기순은 대주주와 중역들을 차츰 물갈이해나갔다. 기존 주주들이 매도한 주식은 박기순 일족이 사들였다. 1925년 무렵이 되면 본인이 사장이자 최대 주주였고, 아들 박영철을 비롯한 박준철, 박판철, 박신철 등 일가붙이가 대부분의 주식을 소유했다. 삼남은행은 식민지 시기에 형성된 주식 세습구조의 한 사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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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조선상업은행

 

박기순은 삼남은행을 경영하면서 전북경편철도, 전북잠업, 전북축산주식회사 등의 이사로 참여했다. 은행가로서 그 재력을 토대로 다른 분야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의 기업활동은 전주를 넘어 익산, 남원, 군산 등지로 확대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지역의 각종 공직과 사회단체, 학교조합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이제 박기순은 전북 지역을 대표하는 자본가이자 유지로 성장했으며, 1924년에 중추원 참의에 임명됨으로써 그의 명망과 사회적 입지는 한층 더 공고해졌다.
중추원 참의가 되고 전북을 대표하는 지역유지가 되었지만, 박기순의 경제적 기반은 여전히 지역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 한계를 뛰어넘어 전국적 레벨의 자본가로 발돋음하는 것은 아들 박영철의 몫이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군인의 길을 걷던 박영철은 강제병합후 행정관료로 변신했다. 처음 부임한 곳이 전북 익산이었고 앞서 보았듯이 신도시 이리 개발과정에 힘을 보탰다. 조선총독부 지시에 철저히 순응하면서도 행정가로서의 자질을 발휘하여 신도시 개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익산군수에 이어 도참여관, 도지사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이때 박영철은 새로운 도약을 모색했는데 바로 중앙 재계로의 진출이었다.
함경북도 지사를 마지막으로 관계에서 물러난 박영철은 박기순으로부터 삼남은행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후 곧바로 조선상업은행과의 합병을 단행했다. 1928년 5월 당국의 인가를 받은 은행 합병으로 조선상업은행은 전국 지점망을 가진 대형은행이 되었고, 삼남은행은 6개월 뒤 단행된 ‘신은행령’(자본금 200만원 이상의 주식회사가 아니면 은행 업무를 할 수 없음)의 파고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금융정책에 관한 정보를 미리 알지 못했다면 할수 없었을 발빠른 대처였다. 박영철은 조선상업은행 부행장에 취임했다. 지역 관료출신인 박영철이 본격적으로 중앙 재계에 진출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조선상업은행 은행장자리에 올랐다. 이제 그는 토지의 민영휘, 금광의 최창학, 방직의 김연수와 함께 조선인 4대 재벌로 불렸다.(<삼천리>, 1932) 박영철은 차츰 자신의 입지를 넓혀 갔다. 1930년에는 조선미곡창고회사 이사, 1932년 10월에는 조선철도회사 이사에 선임되었다. 이어 1932년 12월 조선신탁주식회사 이사가 되었다.
이 회사는 경제공황에 대처하기 위해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금융신탁업무를 담당했다. 박기순이 이 회사에 320만 평(시가 150만 원)의 부동산을 신탁했으므로 박영철의 기반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 밖에도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맥주회사, 북선제지화학공업주식회사 등의 중역을 맡았다.
조선의 4대 재벌이라 해도 총독부 권력과의 돈독한 관계는 필수였다.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확전해 가는 동안 박영철은 조선국방의회연합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부육군병지원자후원회 등 일제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단체의 주요간부로 활동했다. 또 조선미곡조사위원회, 조선산업경제조사회, 임시교육심의위원회, 저축장려위원회, 물가위원회, 시국대책조사회 등에 참여하는 등 총독부의 식민통치 파트너로 활약했다. 이제 박영철은 “한상룡과 함께 중앙의 중요한 지위에서 활약하는 조선 문제의 대표자”란 평판을 얻었다.(<시정25년기념 약진지조선>, 1935)
한시에서 드러나는 친일의 진정성 박영철은 일제강점기에 군수, 도지사, 중추원 참의를 비롯한 고위 관공직을 역임했고,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또 조선 재계에서 알아주는 전국구 재벌이었다. 그렇다 보니 박영철이라고 하면 친일파 재벌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박찬승 교수는 박영철을 일러 ‘전방위 활약을 보인 친일파’라 표현했다.(<친일파99인>,1993)그런데 박영철은 많은 한시와 여행기, 그리고 회고록을 남긴 문학인이기도 하다. 현재 <백두산유람록(白頭山遊覽錄)>(1921),<아주기행(亞洲紀行)>(1925),<구주음초(歐洲吟草)>(1928),<오십년의 회고(五十年の回顧)>(1929),<다산시고(多山詩稿)>(1932,1939)와같은 저작이확인된다.
친일파들이 하는 흔한 변명 중 하나가 ‘어쩔 수 없이 협력했다’는 것이다. 내심으론 일제의 통치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일제 권력의 위협과 강제 앞에서 한 개인이 저항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허접한 변명에 불과하다. 특히 박영철의 시와 산문처럼 내면의 목소리가 담긴 문학작품은 그런 변명을 일축할 분명한 증거가 된다.
<다산시고>를보자.다산(多山)은박영철의호다.박영철은1932년에자신의한시를모아이 책을 펴냈고, 그후에 쓴 시를 합쳐 1939년에 다시 같은 제목의 책을 냈다. 모두 859수의 한시가 실렸는데, 관련 연구에 따르면 이 가운데 대략 100여 수를 친일작품에 해당한다.

  風雲日露兩交兵 풍운처럼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니
  東亞安危在此行 동아시아의 안위가 여기에 달렸구나
  萬里從征投筆起 만리 출정길에 붓 던지고 일어서니
  誰知定遠是書生 정원후(定遠侯, 班超 33~102)가 서생임을 누가 알리요
 〈종군일로전역 從軍日露戰役, 1904〉

박영철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전쟁에 종군했다. 그때 지은 시이다.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을 동양과 서양의 대결로 인식하고, 동양의 평화는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하는데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반초를 떠올렸다. 후한시대 학자였지만 무인으로 자원해 서역 흉노원정에 용맹을 떨친 반초처럼 자신도 붓을 던지고 일본의 대륙 진출에 공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서구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동양인들은 일본을 중심으로 연대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기 위해 내세웠던 이른바 ‘대동아합방론’에 정확히 부합한다.
박영철은 일본에 공감하여 그들의 조선 통치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식민지 건설에 적극 협력하였다. 박영철이 추구하는 세상은 일본제국주의의 번영과 함께 했다. 따라서 일본의 통치에 저항하고 독립을 추구하는 행동은 무모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역사 발전을 돌이키려는 것으로 보았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함경북도 참여관이던 박영철은 “신정(新政) 이래 생명재산의 안전 또는 교육 민업의 발달은 구한국정치에 비할 바가 아님은 누구라도 이의 없을” 것이니 성과 없는 무모한 운동은 그만두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이란 것도 두 민족이 같은 수준에 이르면 권리의무에 차별이 없어질 것이란 희망도 피력했다.
박영철에게 조선은 ‘일본 내지가 연장된 곳’이었다. 동민회(同民會) 활동은 그런 생각의 실천이었다. 동민회는 ‘철저한 내선융화의 실현을 통한 아시아민족의 결합’을 주장하며 참정권 청원 운동을 벌인 단체다. 즉 제국 신민의 일원이란 의식의 내면화를 기반으로 조선인들에게도 일본 국정에 참여할 권리를 달라는 요구였다. 서구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그런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1928년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고 유럽 각지를 돌아본 후 박영철의 감상은 이런 시로 표현되었다.

  白黃人種各西東 백인종 황인종이 각기 서양과 동양을 차지해
  文字方言互不通 문자와 지역 말이 서로 통하지 않는다.
  欲求平和長久策 평화를 이루려는 장구한 대책은
  先須全亞結心同 먼저 모든 아시아가 한 마음으로 뭉쳐야 한다.
  〈세계대세 世界大勢, 1928〉

러일전쟁 한복판에서 가졌던 박영철의 다짐은 20여 년이 흐른 뒤에도 변함없이 재현되었다. 이제 일본과 조선을 넘어 동양이 하나가 되어 서구 열강을 막아내야 한다. 드디어 일본 제국의 성장과 번영이 중국대륙으로 뻗어 나가니 박영철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었다. 아래는 1932년 만주국에 가서 발표한 경축시,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공략하는 일본군대를 찬양하는 시다.

  滿洲九月下天兵 9월 만주에 하늘의 군사가 내려오니
  一境簞壺老幼迎 노유를 막론하고 밥 싸들고 환영한다.
  革舊而今新政好 옛 제도를 혁파하니 이제 새 정치가 좋아서
  三千萬衆得蘇生 삼천만 민중들이 다시 살아났도다.
  〈축만주신건국 祝滿洲新建國, 1932〉

  北京戰捷又南京 북경을 점령하고 남경을 함락하니
  萬里山河旭日隆 만리산하에 빛나는 태양이 떠오르네
  赫赫皇威光四表 혁혁한 천황 군대의 위세 사방에 빛나니
  東洋自此保平和 이 때문에 동양이 평화를 유지하는구나
  〈황군위문가 皇軍慰問歌, 1937〉

1937년 박영철은 경성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가 되었다. 시에서 보듯 그는 일본과 조선이 하나이고, 더 나아가 만주와 중국도 일체라는 대동아공영론을 확신하고 있다. 일본 군대는 침략자가 아니었다. 새로운 정치를 구현할 해방자였다. 만주의 민중들을 다시 살린 일본 군대는 하늘이 내린 천병이요, 중국대륙을 점령한 천황의 군대는 동양의 평화를 가져올 평화유지군이었다. 일제의 전쟁은 동양평화와 인류복지를 위한 성전이었다. 당연히 조선 사람도 신성한 일본의 전쟁에 동참해야 했다. 1938년 조선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중추원 참의 박영철은 “반도민의 국민관념에 신기원을 그은” 것으로 평가하고, 신성한 의무를 위해 “부디 모범적이고 개인이나 가정에 치부가 없는 자신 있는 사람이 지원”하기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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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 시절 박영철.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박영철 총영사는 북중국과 몽고 각지를 순회하며 일본군을 위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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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유람록>과 <아주기행>

 

박영철은 시 외에도 기행문과 회고록 등을 남겼다. <백두산유람록>은박영철이전라북도참여관이던 1921년에 출간한 것으로 백두산 기행문과 시를 엮은 것이다. <아주기행>은강원도지사 시절에 발간한 기행문으로 백두산·지리산·한라산 등 국내여행지와 일본·대만·간도·블라디보스톡·만주·몽고·중국 등 해외를 견문한 것이다. <구주음초>는1928년암스테르담올림픽을 참관하기 위해 3개월에 걸쳐 아시아·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남긴 기록이다.
<오십년의회고>는박영철이51세되던1929년에낸 회고록이다.한글이나한문이아닌일본어로 썼으며, 본인의 행적보다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주 독자층으로 일본인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조선 멸망의 원인을 우리 민족에게 돌리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특권계급의 창궐과 관리의 부패, 정의와 공적 도의의 전멸 등을 꼽았고, 무기력하고 나태한 민족성, 낮은 문화와 생활수준을 지적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사대주의적 자학사관에 빠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화애호가이자 수장가 박영철
박기순·박영철 부자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 박순(朴淳)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본래는 양반이었지만 점차 가세가 기울어 박기순 대에 이르러서는 평민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그렇지만 미곡상으로 시작해 ‘토지왕’으로 이름을 날리는 등 형편이 나아지자 한학에 관심을 쏟았다. 1935년 박기순이 사망할 때 그의 집에는 3만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한다.
박영철도 일본에 유학가기 전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이후 한시를 즐겨 짓고 한문으로 저작을 남기는 등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인지 고서화와 시문 등 전통예술에 큰관심을 기울였다. 경성 소격동 144번지(현재 정독도서관 앞 선재미술관 자리) 박영철의 저택
에는 추사 김정희와 오세창 등의 그림과 글씨, 고려자기 등이 널려 있었다. 1930년과 1932년에는 동아일보사가 개최한 조선고서화전람회에 유명한 고서화를 다수 출품하기도 했다. 조선에서 손꼽히는 거부를 이룬 경제력이 그 밑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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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역화휘>와 <근역서휘>

 

그런데 박영철을 단순히 수장가로만 평가하고 넘어갈 수 없는 대목이 있다. 당시 박영철은 위창 오세창의 지도를 받아 <근역화휘(槿域畵彙)> 3책과 <근역서휘(槿域書彙)> 35책을 펴냈다. <근역화휘>는 조선초기부터 말기까지 그림 67점을 수록한 것으로 안견의 그림으로 전하는 산수도, 신사임당의 그림 등이 실렸다. <근역서휘>는 조선시대 명현의 글씨를 망라한 책이다.
흩어져 있던 고서화를 모으고 위창의 안목에 기대 가치 있는 작품들을 책으로 엮었으니, 우리문화유산의 정수들이 실렸다고 평가된다. 특히 1932년 5월에는 <연암집(燕巖集)>을 17권 6책으로 간행해 냈다. 학계에 ‘박영철본 <연암집>’으로 잘 알려진 책이다. 그동안 필사본으로만 전하던 <열하일기>와 <과농소초> 등 연암 박지원의 저작을 최초로 공간하여 세상에 알렸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으며, 내용 또한 매우 정확하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펴낸 국역 연암집도 박영철본을 대본으로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1939년 박영철이 사망한 후 유족은 경성제국대학에 115점의 유물을 기증했다. 자신의 수장품과 진열관 건립비를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하라는 박영철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거기엔 <근역화휘>, <근역서휘> 외에도 김정희, 이황, 정약용, 정선, 김홍도, 장승업 등의 작품이 포함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이를 기초로 경성제국대학진열관을 건립했고, 이를 인수한 서울대학교는 1946년 부속박물관을 개관했다.
박영철의 인생에서 <근역화휘>, <근역서휘>, <연암집>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한 인물이면서도 결과적으로 그는 우리 전통문화를 수호하는 데 일조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어 보인다.
박영철이 고서화를 수장한 것은 한학에 관심이 컸고 한시와 서화 등을 즐겼던 그의 성정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또 자신의 수장품을 조건없이 기증하고 심지어 전시실 건립비까지 쾌척한 사실은 문화애호가이자 수장가로서의 모범을 보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박영철이 수장품을 기증한 곳이 서울대학교가 아닌 경성제국대학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중일전쟁에서 일본 군대가 승승장구하던 때였다. 박영철은 조선의 문화와 예술 역시 일본이 건설할 ‘대동아’의 문화적 자산이 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민족의 유산, 그래서 다시 찾아야 할 가치가 아니었다. 일본이 대동아주의를 내세우며 추구한 동양성의 한 축을 담당할 미래 가치였다.

아버지와 아들, 친일파의 오명을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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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이 친히 장례식에 쓸 폐백과 제물을 내렸다는 <동아일보> 1939년 3월 15일자 기사.

 

1939년 3월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한 박영철에게 일본 천황은 친히 장례식에 쓸 폐백과 제물을 내리고 훈2등 욱일중수장을 추서했다. 당시 박영철의 사망으로 뇌일혈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의학박사 김성진은 “뇌일혈이란 대체로 지식계급에 많은 병입니다. 그 이유는 혈액이 몰려오는 기회가 노동자보다는 훨씬 많기 때문에 출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혈압이 높아져서 혈관이 파열되어 뇌에 출혈을 일으키게 됩니다. 장소가 뇌인만큼 위험하고 또 뇌를 많이 쓰는 저명인사에게 많게 됩니다. 대체로 비대하고 술과 고기를 많이 먹는 이에게 많은 병으로 노동자에게는 좀 드문 병입니다.”(<매일신보>1939.3.15)라고설명했다.
뇌일혈이 노동자보다 지식계급에 많은 병이라는 설명은 지금의 의학상식으로선 동의할 수 없지만, ‘비대하고 술과 고기를 많이 먹는’ 사람에게 많이 나타난다는 설명은 일견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아마도 박영철의 비대한 몸집을 염두에 둔 설명인 듯하다. 박영철의 사진들을 보면 그의 체구 변화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깊어짐과 함께 박영철의 몸집도 비대해져 갔던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땅에서 지배자에게 코드를 맞춘 삶으로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해방 후 그들의 고백처럼 세상이 뒤바뀔 줄 몰랐을 것이고, 세월이 흘러 부자가 나란히 치욕의 이름으로 역사에 남을 줄은 짐작이나 했을까. 대를 이어 친일한 사람들 중 아랫대의 누군가는 해방을 맞아 일제의 패망을 보아야 했다. 그런데 박기순-박영철 부자처럼 해방 전에 목숨이 다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이 계속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친일로 이룬 부를 누리다 삶을 마쳤다. 하지만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친일파라고 평가받는다면 그 치욕이 배가되지 않을까.

∷ 권시용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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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배우고 깨닫는 아이들, 한뼘 더 성장하다"
 

샤론지역아동센터 '역사탐험대 출동!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 

 

샤론 지역아동센터 역사탐험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르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서대문형무소. 한여름 무더위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이곳에 왁자지껄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울려 퍼졌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10여명 남짓한 샤론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이 그 주인공이다.

올해 6월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운동 역사를 배워가는 역사탐험대 출동!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샤론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은 보다 생생한 독립운동 현장을 경험하기 위해 광복절 즈음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았다. 프로젝트 초기만 해도 31절을 삼점일절로 읽던 아이들은 불과 두 달 사이에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삼점일절에서 ‘31독립운동 역사와 거리를 좁히다

 

 

“191931일 파고다 공원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칩니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2000만 명이었는데 이날 시위에 참여한 사람이 200만 명이었다고 해요. 전 국민의 10퍼센트가 목숨 걸고 독립만세를 외친 거예요.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랍니다.”

독립운동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는 운동이었어요. 말과 글을 잃는다는 것은 마음과 정신을 모두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죠. 그걸 지키려고 애썼던 분들이 계셨고, 총칼로 싸우는 것 못지않게 죽음을 각오하고 활동한 분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쓱 지나가며 곁눈질하는 것과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보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서대문형무소가 초행도 아니고, 독립운동에 대해 웬만큼 안다고 자부했음에도 서대문형무소 도슨트(전시해설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는 윤명희 선생의 설명을 들으니 알고 있던 사실조차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사전 자료조사를 통해 공부한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시간

 

샤론지역아동센터 아이들도 다르지 않은 듯했다. 아니, 중학교 1학년이면 아직 어린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설명을 듣고도 생각은 오히려 더 깊고 넓었다.

원래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설명을 들으면서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독립 운동가 외에도 정말 많은 분들이 독립을 위해 이름 없이 죽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후손들을 위한 그분들의 희생이 너무 감사하고 감동적이었어요.”

여성 감옥이 따로 있었다는 건 자료조사 하면서 알고 있었는데, 임산부 독립 운동가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어요. 임신한 몸으로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기저귀도 구할 수 없는 감옥 안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저는 정말 상상도 못할 일들인데 그 모든 것을 독립을 위해 견뎌내신 분들이 너무 대단한 것 같아요.”

 

아이들 스스로 배움과 깨달음 이어가는 역사탐험 프로젝트

 

 선생님 강의를 통해서가 아닌 아이들 스스로 독립운동의 역사를 배워가는 아동청소년 문화체험활동 지원사업 

 

경기도 군포시에 위치한 샤론지역아동센터는 초중생 아이들이 주축이 되어 역사탐험대 출동!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선생님 강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독립운동의 역사를 배워가는 프로젝트 수업이다.

선생님은 큰 주제만 제시할 뿐, 그 어떤 설명도 자료도 일절 주지 않는다. 연구 주제를 정하고,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과정은 모두가 온전히 아이들의 몫이다. 실제로 서대문형무소에 오기 전에도 자료조사를 이미 마친 상태였다. 또래와 비교해 이해의 범위가 남달랐던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이들은 작은 것 하나까지 모두 눈과 귀와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아이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설명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거나,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시큰둥한 표정을 보면서 아직 어려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재미가 없어서 지루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고 오해였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아이들은 작은 것 하나까지 모두 눈과 귀와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무표정이 전부였지만, 그 뒤에서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새로 알게 된 것 사이를 바삐 오가며 조금씩 성장해가고 있었다.

 

사실 저 역시 아이들 표정만 보고 걱정하던 때가 있었어요. 한번은 종일 견학만 다닌 적이 있었는데 너무 오래 걸으니까 아이들이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더라고요. 무리한 일정이었나 싶어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죠. 그런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설렁설렁 다닌 줄 알았는데 설명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신문기사로 정리해내는가 하면, 그날 다닌 곳들을 그림지도로 만들기도 하고, 직접 대본을 써서 종이인형극을 선보이기도 하는 거예요. 보기엔 떠들고 장난치는 것 같아도 아이들은 마음에 다 담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저는 확신해요.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머리에 지식을 채우는 일보다 마음으로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라고요.”

 

최미란 샤론지역아동센터 센터장이 역사탐험대 프로젝트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것은 그래서다. 2012년부터 매년 올해로 네 번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고되고 힘든 순간이 적지 않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단번에 잊게 만들만큼 아이들의 빛나는 성장을 매순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 어루만지는 따뜻한 돌봄아름다운 동행 계속되길

 

샤론지역아동센터 최미란 센터장

 

샤론지역아동센터가 2010년부터 아름다운재단과 인연을 맺어온 것도 아이들을 향한 남다른 애정 덕분이다. 아름다운재단이 문화소외지역 아동청소년들에게 문화체험 활동을 지원하는 아동청소년 문화체험활동 지원사업에 지원해 정서적으로 혼란을 겪는 아이들에게 태권도와 피아노 레슨 기회를 연결한 것이다. 최미란 센터장은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 센터는 지역 특성상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부모님이 맞벌이여서 아무런 돌봄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아요. 정서적으로 힘든 아이들도 많은데, 다행히 아름다운재단 지원으로 레슨을 받으면서 큰 힘을 얻었어요. 그중 한 아이는 3년간 피아노를 쳤는데 음악으로 마음의 병을 이겨냈고요. 지금은 누구보다 건강하게 성장했답니다. 앞으로도 우리 아이들이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계속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기댈 곳 하나 없는 아이들에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돌봄과 더불어, 역사탐험대 프로젝트처럼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주고 있는 샤론아동지역센터. 아이들을 향한 무한대의 사랑만큼 앞으로 아이들과의 아름다운 동행도 끝없이 진화되길 간절히 바란다.

 

글. 권지희 | 사진. 김흥구


<아동청소년 문화체험활동 지원사업>은 아름다운재단과 한국아동단체협의회가 파트너쉽을 맺어 공동으로 진행하는 사업입니다. 아름다운재단 꿈꾸는나무기금, 성도지엘삼더기금, 아름다운영화인기금, 효주기금, 행복한쉼표기금을 기반으로 전국 문화소외지역(농어촌, 광산촌, 섬지역 등)에서 저소득가정 아동청소년을 위하여 활동하는 단체나 아동청소년 이용시설 및 양육시설에 아동청소년 문화체험활동(문화예술교육, 현장탐방 등)을 지원합니다. [지원사업 자세히 보기]




 

숨요 변화사업국 사업배분팀전서영

 

아이들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꿈꾸는 다음세대' 영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월, 2015/09/0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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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1938년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총동원령을 제정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여파가 미쳤다. 일본은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들은 원치 않는 총을 들어야 했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중 최소 60만명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9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흐려졌다. 교과서는 단 한 문단으로 피해자의 삶을 축약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 건립은 정부의 불허로 난항을 겪고 있다.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역시 지지부진하다. 백발이 성성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국회와 법원을 오간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4월부터 강제 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취재를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피해자와 유가족을 찾았다. 일본을 방문, 비극의 흔적을 되짚어봤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94세의 피해자를 대신해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그의 간절한 당부를 독자들께 전한다.

※관련기사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⑯ [단독] ‘틀린 표현 버젓이’ 역사교과서…“일본 더 진전하기도”(2017/10/03)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⑮ [단독] 빈약한 강제동원 교과서 기술…심한 경우 3줄뿐 (2017/09/28)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⑭ [단독] 빛 좋은 개살구?…총체적 난국 ‘강제동원역사관’ (2017/09/26)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⑬ [단독] 혈세 522억 어떻게 흘러갔나…수상한 국립강제동원역사관 (2017/09/21)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⑫ [단독]오류투성이 ‘피해자 명부’…창씨개명 알아야 확인 가능? (2017/09/19)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⑪ “한국인은 열람 못해”…여전히 찾지 못한 이름들 (2017/09/14)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⑩ 16년간 연락 없는 외교부…”우리가 귀찮은 존재인가” (2017/09/12)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⑨ “화장실 따라와 늦게 나오면 매질” 근로정신대 끌려간 13살 소녀 (2017/09/04)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⑧ 친일파비가 현충시설…정부는 ‘나 몰라라’ (2017/09/04)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⑦ “노동자상 기부한다”는데…‘안 받겠다’는 국토부 (2017/08/21)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⑥ “너무 배고파 개밥까지” 94세 피해자의 눈물 (2017/08/14)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⑤ [단독] 58년만의 부고…“곡괭이 잡은 채 생매장됐다니” (2017/08/11)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④ “내가 죽더라도 알려야 한다” (2017/08/09)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③ “개 묻듯 묻었다” 탄광노동자 기록, 누가 지켜야 하나 (2017/08/07)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② “우리마저 손 놓을 수 없어”…일본의 소도시가 우키시마호를 기억하는 법 (2017/08/03)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① 우키시마호 참사 72년, 가라앉은 귀향의 꿈 (2017/08/01)

광복 72주년.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여전히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지난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정부는 강제동원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다. 피해자 위로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 대신 나선 이들은 수많은 ‘익명의 조력자’였다. ‘지워진역사 강제동원’ 기획 시리즈에서 다 담지 못한 강제동원 학계, 시민단체계 인사들의 ‘고군분투기’를 소개한다.

▲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국가의 협조가 절실하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이를 기록할 기관은 전무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지난 1995년 강제동원 진상규명에 뛰어든 이유다. 이후 김 연구원은 일본이 수탈한 조선의 인·물적 자원의 정확한 실태조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피해자와 연구자가 함께 만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정대협), 역사문제연구소,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 등에 제안해 ‘강제동원진상규명 시민연대’ 시민단체를 꾸렸다. 이뿐만 아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특별법)’ 초안도 김 연구원의 손을 거쳤다. 김 연구원은 강제동원 연구에 정부의 협조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강제동원 자료가 국가기록원에 이관되면 해당 자료 열람이 힘들어진다”면서 “우리 정부가 자료 연구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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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김서경 작가 제공

◀ 김서경 노동자상 조각가…예술로 희생자 넋을 위로하다

서울 용산역 앞 세워진 국내 최초의 강제동원노동자상은 김서경, 김운성 부부가 조각했다. 노동자상은 조선인 노동자가 어둡고 깊은 갱도를 나와 태양을 마주하는 순간을 형상화했다. 김 조각가는 이를 ‘불편한 눈부심’이라고 표현한다.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의지라는 것이다. 김씨 부부는 강제동원뿐 아니라 위안부 문제에도 목소리를 높여왔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도 이들의 작품이다. 김 조각가가 노동자상 제작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일제강점기 많은 조선인이 일본 땅에 끌려갔다. 일부는 생존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유해로나마 고향 땅에 잠드신 분들도 있다”면서도 “아직 유해조차 발굴되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이들이 많다. 비극적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후대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조각가는 앞으로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

▶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진상규명 위해 사할린에 흘린 땀방울

비포장도로를 7시간 가까이 달린다. 러시아 사할린 각 지자체 기록보존소에 연금, 노동자 카드 등 자료의 열람을 신청한다. 허가가 떨어지면 ‘서류철’로 된 문서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살펴본다. 대부분의 자료가 전산화돼 있지 않은 상황이다. 개인정보 문제로 복사가 불가능한 자료도 다수다. 일일이 손으로 베낄 수밖에 없다.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가 사할린에서 강제동원 관련 자료를 조사해온 방법이다. 방 교수는 지난 2005년부터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에서 활동, 사할린에 잠들어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 발굴에 집중해왔다. 지난해에는 사할린에 홀로 파견됐다. 그는 약 500여 명의 강제동원 피해자 명단을 발굴해냈다. 방 교수는 “현장에서 만난 피해자와 유가족 모두 절절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며 “이들의 수난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진상규명 활동을 지속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의 경우, 자료가 부족해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다수 있다”며 “한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명부 발굴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희자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이희자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공동대표…포기할 수 없던 아버지의 ‘이름’

“이희자 보추협 대표에게 물어봐라. 이 대표는 우리의 이야기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취재 도중 만난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와 강제동원 피해 유가족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이 대표는 유가족과 피해자를 보듬으며 약 30년간 강제동원 진상규명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그 또한 강제동원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이 대표는 지난 89년부터 관련 기록 찾기에 나섰다. 고군분투의 연속이었다. 가까스로 아버지의 사망 사실이 적힌 명부와 야스쿠니 신사 합사를 명시한 문건 등 총 6건의 자료를 찾았다. 이후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른 피해 유가족을 돕기 시작했다. 지난 2001년에는 보추협을 결성,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 대표는 찾아낸 기록을 토대로 일본 정부에 피해보상 소송을 걸었다. 또 끊임없이 국회 문을 두드려 특별법 제정을 이뤄냈다. 지난 6월 이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가족의 이야기를 모은 책을 출판했다. 이 대표는 “우리나라가 지난 45년 이후 정말 해방된 것이 맞는지 정부에 묻고 싶다”면서 “유가족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65년 한·일 협정으로 보상받을 권리마저 빼앗겼다.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가족의 외침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1005-11

▲ 장완익 변호사

▶장완익 변호사,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고충 해결사’

장완익 변호사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만남은 우연히 이뤄졌다. 지난 1994년, 정대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담당 변호사로 일하던 지인이 유학을 가면서 장 변호사가 대신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장 변호사는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강제동원 피해자 고충 해결에도 발 벗고 나섰다.

그는 지난 2004년부터 2년 동안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 업무를 진행했다. 장 변호사는 광복 이후 들어선 정권이 강제동원 진상규명에 무관심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승만·박정희·노태우·전두환 등 권위주의 정권들은 과거사 해결을 경시했다”며 “이로 인해 강제동원 역사가 국민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국가 주도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1005-12

▲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외길 25년째 

“술맛 떨어지게 또 우키시마호 얘기냐”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이 지인을 만나면 듣는 핀잔이다. 우키시마호 사건은 지난 1948년 강제 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을 실은 우키시마호가 부산항으로 향하던 중 폭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아직 정부는 희생자 숫자는 물론 정확한 사고 원인마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전 회장은 지난 1992년부터 꾸준히 우키시마호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당시 아시아반핵포럼에 참석해 유적지를 답사하던 중 이 비극적 사건을 알게 됐다. 전 회장은 우키시마호 생존자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모두 사비를 들여 이뤄진 일들이었다. 그는 총 82명의 생존자를 만나 증언을 일일이 기록했다. 정부는 지난 2008년에서야 ‘우키시마호사건소송자료집’ 두 권을 내놓았다. 이마저도 형식적 조사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 회장의 주장이다. 세월이 흘러 이 가운데 남은 생존자는 단 2명. 전 회장은 “더 늦기 전에 정부가 우키시마호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며 “아직도 일본 마이즈루만 앞바다에 묻혀 있을 유해를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회장은 우키시마호를 다룬 영화 제작도 계획 중이다. 언제까지 정부가 아닌 개인이 홀로 싸워야 하는 걸까.

1005-13

▲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역사 알아야 바로 잡는 것도 가능하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수십 년간 자료를 분석, 수집해온 ‘강제동원 전문가’다. 대학원 재학 당시 지도교수의 제의로 강제동원 문제에 첫발을 디뎠다. 지난 95년 일본에서 온 연구자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후 시민단체 등에서 활동하며 강제동원 특별법 제정을 도왔다. 지난 2005년 2월부터 지난 2015년까지 위원회 조사과장으로 10년간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했다. 노무동원 피해자의 유골 발굴과 자료 정리, 진상조사, 지원금 지급, 명부 전산화 등의 작업을 지휘했다. 특히 일본에 남아 있는 강제동원 관련 자료 입수와 유골 봉환에 힘썼다. 위원회가 종료된 후에는 강제동원의 역사를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정 연구위원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 현장에서 반성과 교훈을 얻기 위한 ‘다크투어(역사교훈여행)’를 기획 중이다. 경희궁 지하터널, 인천 동일방직터 등 국내 강제동원 피해 현장은 8000여 곳이 넘는다. 인천과 부산 등 각 지역에 노동자상을 세우는 일에도 참여했다. 정 연구위원은 “강제동원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일본에 제대로 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1005-14

▲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

◀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문재인 정부, 노동자상 건립을 전면적으로 보장하라”

최종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우리나라와 일본에 강제동원 노동자상을 세우는 데 힘을 보탰다. 노동자상을 세우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지난해 8월 최 직무대행은 노동자상 건립 행사 참석을 위해 일본 교토시 단바망간광산을 방문하려 했다. 그러나 탐탁지 않은 이유로 일본 입국이 불허됐다. 일본 정부뿐이었을까. 한국 정부마저 노동자상 건립에 비협조적이었다. 최 직무대행이 속한 민주노총은 노동자상 건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등은 지난 4월6일부터 매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1인 릴레이 시위를 벌였다. 최 직무대행은 지난 6월24일 열린 ‘노동자상 건립 촉구대회’에서 “정부는 강제동원 노동자 피해 보상을 위해 주권국가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력 끝에 노동자상은 지난 8월 용산역 앞에 세워졌다. 현재 부산에서도 노동자상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는 시민을 상대로 지지 서명을 받고 노동자상 조성에 필요한 비용을 모금, 오는 12월28일에 노동자상을 세운다는 계획을 밝혔다.

1005-15

▲ 한수산 작가

한수산 작가…‘군함도’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다

“소설 ‘군함도’ 집필은 운명이었습니다” 지난 7월 영화 ‘군함도’가 개봉했다. 영화 이전에 소설로 먼저 군함도의 비극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는 한수산 작가다. 한 작가가 소설 ‘군함도’를 취재하고 집필하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27년. 한 작가는 소설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일본 정부가 철저히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은폐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 작가는 오로지 ‘피해자의 증언’에 의지해 소설을 완성해야 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피해자들의 기억도 정확하지 않았다. 한 작가는 지금부터라도 일제강점기에 대한 객관적 기록을 남기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면서 “친일인명사전 모금 운동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에 많은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다만 이 분노를 분출할 길을 여는데 우리가 소홀했을 뿐”이라고 봤다. 또 “건국 이후 흔히 말하는 ‘친일 정부’가 이어졌다. 기득권 세력은 부단히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면서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올바른 과거사 기록 작업이 더 폭넓게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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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수많은 희생자는 왜 죽어야 했는가”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의 전문분야는 일본 역사교과서다. 한 박사는 지난 2010년부터 일본 역사교과서가 강제동원, 위안부 문제를 사실대로 기술하고 있는지 꼼꼼히 ‘모니터링’ 해왔다. 한 박사는 일본의 각 출판사를 직접 찾아가 왜곡된 부분의 수정을 요청하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은 기본적으로 강제동원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한국 교과서는 일제강점기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기술한다. 또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착취당한 일에 대해 ‘강제동원’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나 일본은 ‘강제연행’이라고 말한다. 이 단어에는 전쟁 속에서 일어난 일시적인 범죄, 또는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라는 의미가 내포돼있다.

한 박사는 “우리 민족은 식민지 체제 하에서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일본 국민이 해야 할 일을 강요당했다”면서 “그런데 현재 역사 교과서는 희생자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기술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 박사는 “강제동원과 관련해 교과서에서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강제동원의 실태를 정확히 알리고, 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짚어주는 것이 교과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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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공동대표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공동대표…행동하는 일본의 양심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바라는 목소리는 일본에도 있었다. 지난 60년대부터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과거를 반성하며 강제동원 피해자를 위한 자료 수집에 나섰다.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네트워크) 공동대표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강제동원 문제를 처음 공론화했던 재일사학자 고(故) 박경식 선생의 강연을 들으며 문제의식을 키웠다. 이후 일본 전역을 돌며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해왔다. 지난 2005년에는 네트워크 공동 대표를 맡는 등 주축이 됐다. 네트워크는 일본 내 흩어져 있던 400여 명의 강제동원 연구자와 시민운동가들을 모은 단체다. 히다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 조사, 비밀 자료 공개 요구, 미불 임금 처리 등을 위해 힘썼다. 네트워크가 수집한 자료는 한국 위원회로 보내져 진상규명을 위한 토대가 됐다. 최근에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도 힘을 보탰다. 히다 대표는 “과거 노무현 정부가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해 위원회를 설립했던 것처럼 새로운 정부에서도 다시금 노력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정진용, 이소연, 심유철, 박효상, 박태현 기자 [email protected]

쿠키뉴스 기획취재팀 [email protected]

영상=윤기만 [email protected]

<2017-10-05>쿠키뉴스

☞기사원문: [지워진역사 강제동원]⑰ 어둠 속 건져올린 진실…진상규명 힘쓴 11인의 조력자

목, 2017/10/05-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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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과서에 '세월호'는 어떻게 기록될까?

참사를 둘러싼 역사 전쟁

 

박주민 변호사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학자 E. H. 카의 명언이 회자되고 있는 요즘이다. 역사는 단지 과거의 단순한 사실(a mere fact)이 아니라 이것에 현재의 가치를 부여하여 역사적 사실(a fact of history)로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역사가 이렇게 가치 부여가 수반되는 것이기에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역사 앞에 "하나의" 혹은 "올바른"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어렵고, 특히 국가가 그런 수식어를 붙인 '역사'를 만들어 국민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이렇게 원래 안 되는 것이지만 만약 진실을 은폐하고 국민의 사고를 호도하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세력이 역사에 대해 단 하나의 가치관만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작업을 하려 한다면 그러한 시도는 더욱 더 좌절되어야 한다. 그들의 목표는 애초부터 '올바른 역사'가 아니라 '국민에 대한 호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의 집권 세력이 자국민의 정치적 선호를 바꾸려 국정원과 군 사이버 사령부를 동원해 자국민을 상대로 한 '심리전(戰)'을 전개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또 세월호 참사 당시 정작 12명의 잠수부, 헬기 2대, 군함 2척, 특수보트 6대만이 동원되어 구조 작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진행되지 않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500명의 잠수사와 121대의 헬기, 69척의 함정이 동원되어 대대적인 구조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온 국민이 믿게 했었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현재의 집권 세력이 국민에게 진실을 드러내고, 국민의 비판을 수용하여 문제를 개선하는 민주주의적 선순환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고 정치적 비판과 그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두려워해 진실을 숨기고 국민의 여론을 호도하는 악순환을 추구하는 자들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그들이 끊임없는 거짓으로 국민을 기만해왔다는 것은 앞으로도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게 한다. 진실을 은폐하려고 한 사람이 소위 '올바른 역사'란 것을 입에 담을 수는 없다.

 

카의 위의 말에 따르면 진실과 동떨어진 것을 역사로 만들려는 것을 막는 싸움은 2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는 '특정한 사건에 대한 사실을 확정하는 것과 관련되어서'이고, 다른 하나는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 관련되어서'이다.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반대하는 것은 후자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전자에 속하는 싸움이 작년부터 지속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단순한 교통사고로 만들기 위해 아니 믿게 만들기 위해 참사의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진상 규명 작업 자체를 방해하는 세력과의 싸움이다.

 

이 세력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여러 시도들을 벌여왔다. 우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충분한 권한이 부여된 조사 기구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는 특별법'의 제정을 방해했다. 이후 600만 명이 넘는 국민과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아픔을 제대로 치유하지도 못한 채 풍찬노숙을 견뎌냈던 피해자 및 그 가족들의 열망의 일부가 담긴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세월호진상규명특별법)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법의 취지를 몰각시키는 시행령을 만들었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국회법을 개정하기까지 하였으나 이에 대해서도 거부권이라는 비상한 방법으로 막아서기도 했다.

 

또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세월호특조위)가 요청한 조사 예산에 턱없이 부족한 예산만 집행하였고, 내년 예산도 세월호 특조위가 요청한 예산액 중 31%만 배정하려 하고 있다. 파견하기로 했던 공무원들도 제때 파견하지 않았다. 세월호특조위의 활동 시한을 연장하기로 여야 원내대표가 합의를 하였건만 이제는 말을 바꾸어 연장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사사건건 가로막고 있는 이러한 시도들은 대부분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만한 사실관계 자체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가만히 둘 수는 없다. 1863년 영국에서 지하철이 개통된 이후 전 세계에서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지하철 사고는 단 3건인데 이 중 2건이 우리나라 그것도 대구에서 발생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대형 참사가 밥 먹듯이 아니 황당할 정도로 반복되고 있다. 여러 전문가들은 참사 때마다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현장 실무 책임자만이 책임을 지는 소위 '꼬리 자르기'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제도적 개선과 그를 통한 참사의 재발 방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참사가 단순한 사고로만 역사적으로 기록되도록 만들어 왔던 것이 참사가 재발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세월호 참사 이전과 달리 보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세월호 참사의 진상은 제대로 규명되어야 하고, 세월호 참사의 의미가 제대로 기록되게 만들어야 한다.

 

세월호특조위의 활동시한 연장과 조사에 필요한 예산의 확보가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세월호특조위는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 달리 수사권과 기소권은 보장되어 있지 않지만 제한 없이 청문회를 할 수 있고, 특검도 2번이나 요청할 수 있다. 과거의 다른 위원회에 비하면 훨씬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세월호특조위가 제대로 활동할 수 있다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역사적 왜곡은 중단될 수 있을 것이고 참사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 당시 해당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그를 통해 진상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그 사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달라진 역사를 통해 후대와 현세가 배울 수 있는 교훈 역시 달라질 것이다. 이미 지나간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느냐의 싸움도 중요하지만 현재 발생한 그리고 진행 중인 사건들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는 일도 역사를 둘러싼 전쟁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역사를 둘러싼 싸움이 한창인 이때 다시 한 번 세월호 참사를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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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5/11/1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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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17/08/1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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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홍 “판사가 역사에 무식..즉각 항소할 것”

 

정미홍 전 아나운서. 2017.3.8/뉴스1 © News1 문요한 기자

(서울=뉴스1) 이유지 기자 =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혈서(血書)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해 연구소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58)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단독 김종복 판사는 31일 한국 근현대사 비영리 연구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정 전 아나운서에게 벌금 30만원을 선고했다.

김 판사는 “전직 아나운서로 대중의 영향력이 큰 사람이기에 명예훼손글을 무분별하게 실은 경우 통상에 비해 높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서 “다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용한 링크글의 논지가 분명하지 않고 전파가능성도 낮은 점을 감안해 벌금 30만원에 처한다”고 판시했다.

그는 “트위터로 글을 단순히 리트윗한 것이라 해도 타인의 글이 명예훼손적인 것이라면 문제가 된다”며 “민족문제연구소는 역사문제를 연구하는 단체를 표방하는 바, 증거도 없이 ‘박정희 혈서설’을 주장했다고 적시하는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또 “피고인 글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만주신문을 내세우기 전 과거 5년간 만주일보를 근거로 삼았지만 만주일보에 박 전 대통령의 혈서 기사가 있다는 것은 거짓이기에 박정희 혈서설은 조작됐다는 취지”라고 밝히고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5년간 만주일보를 근거로 박정희 혈서설을 주장해왔다는 증거는 찾을 수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정 전 아나운서는 선고 중 판사를 향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지속적으로 방송에 나와 만주일보에 (박정희 혈서설) 증거가 있다고 이야기해왔다”며 “위증죄로 증인을 고소한 건이 현재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어갔고 판사에게도 증거로 제출했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그는 선고 후 기자와 만나 “민족문제연구소가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계속 지적하고 있기에 저에 대해 인신공격 하는 것”이라 지적하고, “판사가 링크글 내용이 불분명하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에 무식하기 때문으로, 역사 공부를 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즉각 항소 의사를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39년 3월 31자 만주신문을 근거로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국 군관학교에 지원하면서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라’라는 혈서를 썼다고 2009년 밝혔다.

정 전 아나운서는 2013년 2월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박정희 혈서 기사 조작’이라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에 인용해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방할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올린 혐의를 받고 있다. 해당 글은 ‘지난 5년간 연구소는 박 전 대통령 혈서 기사가 만주일보에 실렸다고 주장했으나 만주일보는 1908년 폐간된 신문’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4년 7월 강용석 변호사와 정 전 아나운서를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소하고, 각각 3000만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강 변호사가 500만원, 정 전 아나운서는 300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고, 2심 재판부도 1심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지난 1월 원심을 확정했다.

 

<2017-08-31> 뉴스1

☞기사원문: ‘박정희 혈서 날조’ 주장 정미홍 1심서 벌금 30만원

※관련기사

☞ 연합뉴스 : 민족문제연구소 비방’ 정미홍 전 아나운서 1심 벌금 30만원

☞ SBS : 민족문제연구소 비방’ 정미홍 전 아나운서 1심 벌금 30만 원

☞ 머니투데이 :  ‘박정희 혈서 날조’ 주장 정미홍씨, 1심서 벌금 30만원

목, 2017/08/3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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