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7년 8월 3일자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시절인 지난해 11월 외교부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일본기업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 행사에 부정적 견해들을 인용한 의견서(이하 외교부 의견서)를 대법원에 전달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은 1965년의 한일 청구권협정과 상관없이 일본 기업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외교부 의견서는 대법원의 판결 취지를 사실상 부정하고 있어 피해자들과 피해 회복을 위해 싸워온 시민단체로서는 분노와 함께 절망감을 떨칠 수 없다. 지난 5년간 피해자들은 대법원이 최종 확정판결을 내리길 손꼽아 기다렸다. 그 사이 피해 당사자 원고들은 모두 돌아가셨다. 확정판결이 이렇게까지 늘어진 데는 일본기업의 지연 전술이 있었다. 그러나 항간에는 한국정부가 방해하고 있어 늦어지고 있다는 강한 의혹도 돌았다. 그런데 이번 보도로 그것이 의혹이 아니라 사실임이 확인됐다. 그동안 외교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를 위해 일하지 않았다고 비판했으나 이제 그걸 수정해야겠다. 일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일을 방해했다고.
외교부 의견서를 보면서 지난 2002년 외교부가 한일협정 문서 공개를 거부하면서 내세운 ‘악명 높은’ 답변이 떠오른다. 문서를 공개했을 때 한일 관계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답변을 받아보고서 우리는 한국 외교부가 일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본 외무성 한국지부가 아닌가 착각했다. 외교부 의견서 역시 같은 기조에 서있다. 불리하면 새로운 논리를 개발해서라도 자국 피해자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자 국가의 의무 아닌가.
국제관계라는 것이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문제는 형세가 불리하거나 논리가 부족하더라도 피해자를 위해 일하려고 노력하고 있느냐이다. 피해자들로서는 그것만으로도 많은 위로가 될 것이다. 정 안되면 하는 척이라도 해라. 그게 국가가 존재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하에서 외교부는 무엇을 했나. 피해자와 시민단체가 유골 조사와 봉환 문제를 비롯해서 노동자의 통장 반환 문제, 야스쿠니문제 등을 두고 일본정부와 씨름을 할 때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 배상 판결까지 부정하는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했으니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일하는 기관인가. “이게 나라냐”라는 비난이 달리 나온 것이 아니다.
최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놓고 외교부는 피해자 중심주의에 서서 해결책을 모색하겠다고 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국가에 의해 중대한 인권침해를 당한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이들이 피해를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국가가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모든 국가가 지켜야할 국제법의 한 원칙이기도 하다. 이 원칙은 위안부 피해자분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권피해자들에게 적용되며 일제에 의한 강제동원 피해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국가는 자국민의 인권보장을 위해 외교적으로 필요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이번 외교부 의견서가 보여주는 것처럼 책임회피에 급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외교부가 지고의 가치라고 여기고 있는 1965년의 한일 청구권협정 역시 인권과 정의에 기초하여 재검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해방 후 7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신음하며 절규하는 피해생존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제의 폭압적인 통치하에서 이들이 어떠한 경위로 동원되어 비인간적인 조건하에서 인권유린을 당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이 끝난 다음 어떤 과정을 거쳐 귀국했으며, 돌아가신 경우 사망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밝히고, 유골이라도 수습해 생사도 모르는 가족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은 모두 일본 정부에게 있다.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은 이러한 피해자들의 권리를 대변하기 위해 진지하게 과거를 성찰하고 성실하게 진실을 규명해 이들이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당당하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돕는 데 있다. 형식적인 법 논리를 들이대며 궁색하게 잘못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을 변명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법을 말하곤 있지만 힘의 논리만이 정의라는 법과 인권을 부정하는 인식과 다를 바 없다. 잘못된 시대, 잘못된 정부에 의해 잘못된 합의가 피해자들의 삶을 또다시 유린한다고 한다면 이를 바로 잡는 일은 이 시대에 바로 오늘 제대로 된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비판의 화살이 국정을 농단한 주범들에게만 겨냥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국정 농단을 가능하게 했던 수많은 ‘아이히만’들에게도 그 화살이 겨눠져 있다. 외교부라고 여기서 비껴갈 수 없을 것이다. 외교부의 아이히만들이 바뀌지 않는 한, 그리고 뼈를 깎는 반성과 혁신이 없는 한, 한국 외교의 미래는 없다. 변화는 피해자들에게 사죄를 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 다시 묻는다. 한국 외교부는 누구를 위해 일하는 기관이며, 관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들인지를. 이제 당신들이 답변할 차례다.
일제강점기 조선주둔 일본군대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다보면, 그들만의 기념행사가 정례적으로 벌어진 흔적을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관병식(觀兵式)이니 육군기념일(陸軍記念日)이니 하는 행사가 그것들이다.
<매일신보> 1926년 1월 9일자에 수록된 ‘육군시 관병식(1월 8일)’의 모습. 사이토총독의 참석 하에 광화문 앞길에서 거행되었다.
우선 관병식은 천황 앞에서 군대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열병(閱兵)과 분열(分列)을 포함한 일종의 대규모 군사퍼레이드를 벌이는 것을 말한다.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도 해마다 새해가 되면 일정한 날(대개 1월 8일)을 정하여 조선총독과 군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육군시 관병식(陸軍始 觀兵式)’을 개최하며, 자기들 천황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혹은 천장절축일(天長節祝日)에도 빠짐없이 다수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주둔지의 연병장과 도심지 대로에서 성대한 관병식을 거행했다. 드물게는 사단대항연습(師團對抗演習)과 같은 대규모 군사훈련의 말미에 열리는 관병식도 있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26년 1월 9일자에 수록된 「가상(街上) 관병식의 성관(盛觀), 도창검극(刀槍劍戟) 일광(日光)에 찬연」 제하의 기사에는 광화문 앞길에서 벌어진 관병식의 풍경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오랫동안 적막하고 있던 광화문통(光化門通) 너른 마당도 8일 아침 11시부터 거행된 관병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었다. 총독부가 경복궁으로 옮겨간 기회에 조선에서도 관병식을 거리에서 행하는 실례를 보게 된 것이니 정각 전부터 전차와 인마의 교통을 끊자 모여드는 구경꾼과 각 학교 생도들의 단체관람자로 인하여 광화문 앞에서부터 태평통 본사 앞까지 두 길가에서는 사태가 치밀리는 구경꾼과 기마경관 사이에는 쉬지 않는 승강이가 먼저 시작하였던 것이다. 정각이 되매 맑은 하늘 빛나는 일광을 춤추는 듯한 요란한 나팔소리와 함께 모여드는 보병, 공병, 기병, 포병의 씩씩한 기치, 창검은 오히려 무사의 위풍이 넘치었으며 ‘선린상업’, ‘경성사범’, ‘경성중학’ 등 세 학교의 학생들까지 뒤를 따라 장쾌한 관병식은 눈에 덮인 광화문 넓은 뜰에서 감개 깊은 광화문을 향하여 성대히 열렸었다. 스즈키(鈴木) 군사령관의 검열이 있은 후 뒤를 이어 분열식도 무사히 끝이 나 조선에서 처음으로 거리 위에 관병식은 이로써 종결을 고하였는데 때는 열두 시 십 분이었었다.
1874년 12월 2일 태정관 포고 제130호에 의해 제정된 ‘육군연대군기(황색 테두리에 자주색 수술을 두른 욱일기)’의 모습. 보병연대는 장방형이고, 기병연대는 정방형인 것이 다르다.
다음으로 육군기념일은 러일전쟁 당시 1905년 3월 10일 일본육군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봉천(奉天)을 점령한 날을 기려 제정한 것이다. 이에 상대되는 것으로 해군기념일도 있었는데, 이 역시 1905년 5월 27일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일본해군의 연합함대가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해마다 육군기념일이 되면 이날에 맞춰 거리행진을 포함하여 모의전투시범이나 한강변에서 폭격연습과 같은 행사도 곧잘 벌어지곤 했다.
이것 말고도 일본군대에서 거행되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연례행사의 하나는 군기제(軍旗祭)이다. 군기제란 것은 천황으로부터 연대(聯隊) 단위의 일본군대에만 하사되는 군기, 즉 ‘욱일기(旭日旗, 쿄쿠지츠키)’를 수여받은 날을 기념하는 행사인데, 바꿔 말하면 ‘부대창설기념일’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1889년 10월 7일 칙령 제111호 해군기장조례(개정)에 의해 처음 군함기로 채택된 ‘욱일기’의 모습. 이 규정에 따라 일본군함에는 배 앞쪽에 일장기를, 배꼬리에는 군함기(욱일기)를 게양하게 되었다. 해군기(욱일기)는 육군기와는 달리 일장의 중심이 깃대 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해군제도연혁>, 1940)
일장기 도안를 바탕으로 16가닥의 붉은 아침 햇살이 묘사된 ‘욱일기’의 제정 연혁을 살펴보면, 1870년 5월 15일에 공포된 ‘태정관 포고 제355호 육군국기장(陸軍國旗章) 병(並) 제기장(諸旗章) 병부성(兵部省) 도등막(挑燈幕) 등의 건’이 그 효시이다. 이것이 1874년 12월 2일 ‘태정관 포고 제130호 육군보기포삼병연대군기(陸軍步騎砲三兵聯隊軍旗) 병(並) 보병대대기(步兵大隊旗) 급(及) 동향도기(同嚮導旗)’로 개정되면서 각 연대 단위로 욱일기가 하사되기 시작했는데, 이에 앞서 1874년 1월 23일에는 일본천황이 근위보병 제1연대 및 제2연대를 대상으로 손수 욱일기를 건네는 최초의 군기수여식이 거행된 바 있었다. 이렇게 하사받은 군기는 그 자체가 제국군대의 상징이 되어 목숨을 걸고 지켜야하는 절대적인 존재로 간주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만약 적군에게 포위될 때는 불가피하게 이를 소각하는 방식으로 군기가 탈취되는 치욕적인 상황을 모면하기도 하는데, 이런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군기는 재교부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한 번 하사된 군기는 포탄을 맞거나 총알이 관통하여 깃발이 다 떨어지고 헤어진 흔적이 역력하더라도 회수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테두리만 남은 채 기면(旗面)이 완전히 사라진 경우도 흔했지만, 오히려 그러한 전투이력을 지닌 부대 역사 자체가 자기들만의 대단한 명예와 자부심으로 승화하는 연결고리가 되기도 했다.
한편, 욱일기는 육군기에 머물지 않고 해군기로도 사용되었는데, 1889년 10월 7일에 개정된 ‘칙령 제111호 해군기장조례(海軍旗章條例)’에서 처음 그 흔적이 포착된다. 이때의 규정에 따라 일본 군함에는 뱃머리에 일장기 모양의 함수기(艦首旗; 국기와는 ‘일장’의 크기가 다름)를, 배꼬리에 욱일기 모양의 군함기(軍艦旗)를 각각 게양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게 되었다. 다만, 해군기로 사용된 욱일기는 육군기와는 달리 일장(日章)의 중심이 바람방향을 고려하여 깃대 쪽으로 치우친 모양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욱일기가 일본제국이 벌인 침략전쟁 때마다 빠지지 않고 그 선봉에 등장했다는 사실이었다. 개항 이후 일본공사관의 경비를 명분 삼아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 수비대의 선두에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걸쳐 큰 전쟁을 일으킬 때마다 밀려든 일본함정과 기병대의 말머리에도, 그리고 이른바 ‘의병진압작전’을 위해 이 땅에 무단상륙을 감행했던 임시파견부대의 행렬에도 어김없이 욱일기는 그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조선주둔 일본군의 연대별 군기수여일 현황>
이러한 상태에서 조선총독부에 의한 식민지배가 개시되고 곧이어 일본군대의 주둔방식이 주차군(駐箚軍) 편제에서 상주군(常駐軍) 형태로 전환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1916년 봄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 전역에 새로 주둔할 2개 사단 가운데 제19사단(용산)이 먼저 창설되어 신설 7개 연대(보병 제73, 74, 77, 78, 79, 80연대 및 기병 제27연대)에 대한 군기친수식(軍旗親授式)이 1916년 4월 18일 일본 동경 황궁에서 일괄 거행되었다.
1916년 4월 21일 용산역에 도착한 제19사단(신설) 소속 연대기들의 모습. 여기에는 보병 제78연대를 비롯한 5개 신설연대(보병 및 기병)의 군기가 포함되어 있다. (<조선사단창설기념호(조선사진화보 특별호)>, 1916년 11월)
이들 깃발은 이틀 후 부산항에 도착하고, 대전과 대구에 각각 주둔지역이 설정된 보병 제79연대 및 제80연대를 제외한 나머지 5개의 연대기는 모두 기차편을 통해 용산역으로 이동하였다.<매일신보> 1916년 4월 22일자에 수록된 「신연대기 도착(新聯隊旗 到着)」 제하의 기사는 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기보(旣報)와 여(如)히 보병 제73, 74, 77, 78의 4연대 및 기병 제27연대의 군기(軍旗) 5류(旒)는 각 기수(旗手)가 봉대(奉戴)하고 예정과 여(如)히 작(昨) 21일 오전 8시 50분 용산역(龍山驛)에 도착하였는데 차전(此前)에 이구치(井口) 군사령관, 다치바나(立花), 하시모토(橋本) 양 사단장 이하 군사령부 제9, 19 양 사단 막료, 장교, 동 상당관, 조선장교, 애국부인회, 정내유지(町內有志), 용산 각학교 생도, 기타 일선관민(日鮮官民) 등 수백 명의 출영이 유(有)하였는데 열차가 정각에 도착하매 역내 승강장에 출영한 이구치 군사령관, 다치바나, 하시모토 양 사단장 및 각요부원(各要部員) 경호 하에 기수가 차(此)를 봉지(奉持)하고 제78연대 군기는 복(覆, 덮개)을 제하고 타(他)는 복(覆)을 시(施)한대로 1개 중대의 병사가 차(此)를 호위하고 나팔의 향(響)으로 대오 정정히 제78연대본부에 입(入)하였고 차(且) 78연대는 양삼일중(兩三日中), 기타의 각 연대는 착대 순차(着隊 順次) 다치바나 사단장이 각대에 출장하여 각각 수여식을 행하였더라.
수압식 도록코에 실려 옮겨지고 있는 함경북도 나남 주둔 보병 제73연대 및 기병 제27연대의 군기 모습. (<사진통신> 1916년 11월호)
<조선제23부대 지나사변기념사진첩> (1940)에 수록된 용산 주둔 보병 제79연대의 군기 모습. 깃발의 일부가 훼손된 것은 이 부대가 중일전쟁과 같은 침략전쟁에 가담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제국육군대사진첩 (소년구락부 1933년 11월호 부록)>에 수록된 일본군대의 전투장면. 여기에는 어김없이 일본국기인 일장기와 더불어 육군기인 ‘욱일기’의 모습이 함께 등장하는데, 기면(旗面)은 몽땅 사라지고 테두리만 남은 군기의 모습에서 무수한 침략전쟁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다.
그 직후 5월 1일에는 보병 제78연대의 연병장에서 데라우치 총독의 참석 하에 각 부대에 대한 군기수여식(軍旗授與式)과 더불어 사단개청식(師團開廳式)도 이날 함께 열렸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나 1919년 6월에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으로 옮겨가고 제20사단(용산)이 신설되면서 예하 연대의 소속변경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용산주둔 보병연대의 경우 매년 4월 18일이 군기수여일이기 때문에 군기제(軍旗祭)라는 이름의 부대창설기념행사가 꼬박꼬박 거행되었다. 조선군사령부의 창설기념일(1918년 6월 1일)에도 줄곧 기념식이 벌어지긴 하지만, 그 규모가 훨씬 더 성대하고 다수의 군중이 동원되는 것은 ‘군기제’ 쪽이었다.
만주사변에 파견된 일본군대에 제공된 군용담배 ‘히카리’의 포갑지 도안이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일본군대의 상징인 ‘욱일(아침햇살)’ 모양이 등장하고 있다.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군대는 단지 식민통치를 뒷받침하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고 시베리아
출병, 간도침공, 만주사변, 중일전쟁, 장고봉사건을 비롯하여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침략전쟁
에 속속 참전했던 내력을 지녔고, 그때마다 파견부대의 선봉에는 ‘욱일기’가 빠지는 법이 없었
다. 이러한 까닭에 전쟁터를 누빈 ‘욱일기’야말로 영예로운 군기이기는커녕 침략전쟁에 의한
고통과 상처, 그리고 일본제국군대가 행했던 폭압과 만행을 상기시켜주는 ‘전범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답사일이 다가올수록 이렇게 떠나도 되는 건가? 하는 어색함이 자꾸 밀려왔다. 대안학교 교사로 어디를 가든 여러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던 것이 몸에 배어 단체여행 전엔 늘 이것저것 챙길 것들과 인솔교사의 책임감으로 팽팽하게 긴장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내 여권만 잘 챙겨오면 된다는 말에 여권을 잘 챙겨두고도 왠지 모를 불안감이 남았다. 직업병이라고 할 수밖에….
나름 낯가림 하는 성격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수십 명이 함께 하는 답사를 덜컥 신청한 것은 일정 중에 난징 위안소 진열관이 눈에 들어와서였다. 간디마을학교 봄을찾기 프로젝트 수업 중 아이들과 간마소녀상 봄이를 만들며 일본군 ‘위안부’와 일제 강점기에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한·중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서〉란 제목을 단 답사는 아이들과 나눌 것을 풍성하게 해주리라는 기대가 컸다.
4박 5일 동안 고속열차로도 7시간이나 걸리는 난징과 광저우를 누비며 임정주화대표단본부, 항공열사공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훈련지, 민족혁명당 거점, 난징대학살기념관, 신해혁명기념관, 황포군관학교 등 역사의 현장을 빡빡한 일정으로 다녔다. 이동하는 중간 중간 이준식 근현대사기념관장님의 알찬 설명으로 답사지 한 곳 한 곳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깊이 있는 설명을 들으며 답사지 어느 한 곳도 허투루 지나간 곳이 없지만 내게는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이 가장 강렬하게 남았다. 봄을찾기 아이들과 다시 와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난징 시내의 금싸라기 넓은 땅에 오래된 건물과 수천 점의 많은 자료, 할머니들의 슬리퍼에서 화장품 통 같은 소소한 유물까지도 소중하게 보존해 전시하고 입장료도 없이 유적관을 개방하는 중국정부에 놀라움과 감사함을 느꼈다. 난징 위안소에는 조선인 위안부가 많았는데 특히 2006년 돌아가신 박영심 할머니께서 끌려왔던 곳이다. 박영심 할머니 방은 당시 모습으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으며 위안소 입구에는 잘 알려진 할머니의 임신한 사진 모습이 커다란 동상으로 재현되어 있었다. 동상 뒤 외벽 위로 흐르고 있는 눈물이 입구 한 쪽 벽을 가득 메운 흑백사진 속의 한·중 위안부 할머니들의 슬픔을 대변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실제 위안소 현장의 생생한 유물들을 통해 드러나는 할머니들의 무거운 고통과 아픔에도 꾹 참고 있던 눈물이 툭 터진 시점은 위안부 할머니의 흉상에서 끝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과 마주했을 때였다. 흉상 아래 준비되어 있던 흰 수건으로 계속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렸지만… 정말로 정말로 그 눈물 다 닦아 드리고 싶었는데… 끝없이 흐르는 할머니의 눈물을 다 닦아 드리지 못하고 아픈 마음을 간직한 채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여러모로 보람 찬 답사였지만 4박 5일 동안 수많은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덕분에 나로서는 더욱 뜻깊었다. 사람과 사람의 작은 만남이 모든 변화의 시작이라고 했던가. 그 옛날 비바람 속에 만주벌판을 달리며, 남의 나라 깊은 산 속에서 독립을 위해 군사 훈련을 하며, 목숨 걸고 싸울 수 있었던 것도 다 뜻을 함께하는 동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답사지를 함께 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듣고, 밤이 깊도록 감흥을 함께 나누었다. 마치 여러 권의 명작 사람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통!하는 좋은 인연들로 후기를 적고 있는 지금까지도 마음 한편이 따뜻하다. 좋은 인연으로 인해 과거를 이해하러 갔는데 과거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현재를 공감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왔다.
아이들을 위해 떠난 답사에서 내가 더 충만해져서 돌아왔다. 아이들에게 더 좋은 선생이 되어야겠다. 앞으로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아픈 우리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그리고 행동해야겠다.
• 알차고 보람찬 역사 답사를 기획해 주신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와 민족문제연구소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심정섭 지도위원 제57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0점 보내와
7월 26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제57차 자료기증을 했다. 주요자료는
1942년생 황OO가 경기도 강화국민학교, 강화중학교, 강화여자상업고등학교, 경기도농촌진흥
원 등을 거치면서 받은 상장과 수료증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자료 기증 잇달아
8월 2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의 히구치 유이치 공동대표가 연구소를 직접
방문하여 ????해협????, ????재일조선인사연구???? 등 소장자료 10점을 기증하였는데, 일본으로 돌아간 후인
8월 8일, 자택에서 소장자료를 정리하다가 기증자료를 발견하여 <조선신궁연보>(1936), <조선문
학사>(1981) 등 26점을 추가로 기증했다.
8월 12일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유족들과 오랫동안 교류를 가지고 있는 사노 미찌오 호우센 대학 교수가 「야스쿠니의 집靖國の家」 문패 1점을 기증했다.
8월 12일 야노 히데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이 <구일본군조선반도출신군인·군속사망자명부>(2017) 1권을 기증했다.
8월 9일 홍종화 작가가 <혈의 누> 등 도서 3권을 기증했다.
8월 18일 김민철 책임연구원이 단행본 등 다수의 책을 기증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 피해를 입은 후 현재까지 피폭자들의 권익을 확보하고
인권을 옹호하는 운동에 앞장서 온 곽귀훈 회원(경기동부지부)이 8월 21일 <世界>(2016~2017)
총 14권을 기증했다.
중요한 사실인데요. 친일인명 사전은 물론 널리 알렸으면합니다. 자유한국당 정진석의 조부 정인각에 대한 내용입니다.
정진석 의원님 할아버지가 정인각(창씨개명으로 大谷正雄 오오타니 마사오)씨가 계룡시 면장으로 있으면서 군용물자 조달 및 공출업무, 여론환기 및 국방사상보급 선전업무, 국방헌금 및 애국기(당시 일본기, 욱일승천기(전범기)) 헌납자금 모집업무 등을 적극적으로 일본을 위해 열일 하신 분입니다.
시몽동의 주저 『형태와 정보 개념에 비추어 본 개체화』의 출간으로 저자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시간을 갖는다. 해설서인 『시몽동, 개체화 이론의 이해』를 기반으로 주요 개념들과 사상을 이해하고 자연과 인간, 기술과 정치 등 여러 측면에서 그의 철학이 가지는 현대적 의미를 살펴본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맑스주의 도시철학자의 평생의 테마는 소외, 변증법, 일상, 도시, 재현, 기호, 공간, 리듬, 국가 등이며 르페브르는 이를 헤겔, 니체, 맑스의 이론을 절합, 구성한 메타필로소피란 사유 틀에 담아 풀어내고자 했다. 본 강좌는 르페브르에 관한 두 권의 책으로 르페브르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방식으로 10주간 진행된다.
철학은 인간의 삶과 우리가 거주하는 이 세계에 주어지고 나타나는 가장 근본적인 것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따져 묻는 것이다. 철학적 사유는 역사 속에서, 역사적 사건들과 호흡하며 형성된 것이다. 우리는 철학이란 무엇인지, 철학적 사유가 어떻게 심화되고 변형되었는지를 고대부터 근대초기까지의 철학사를 되짚는 시간을 갖는다.
세미나 11은 라깡이 국제정신분석학회(IPA)로부터 “파문”을 당한 직후 일 년간 진행된 강연. 시관충동으로서의 응시 개념에 대한 정교한 세공으로 욕망과 자아의 구조를 설명하는 라깡의 임상이론이 선명하게 제시되는 강의이다. 또한 그림과 스크린 이론을 통해 회화와 영화 이론으로의 확장 가능성을 타진하는 분석이 진행될 예정이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 주체의 존재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를 구성하는 정화, 자기 수련, 포기, 시선의 변환, 생활의 변화 등과 같은 탐구, 그리고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이라 부르도록 합시다.” ―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현대적 삶의 예술로서 영화는 우리 삶에 근접한 세계를 보여준다. 우리 삶의 지속으로 확장되는 세계는 모종의 깊이와 실체감을 획득하지만, 그리운 마음이나 감정은 본질적인 결여이기도 하다. 저편의 세계를 받아들이게 하는 친밀한 미지성, 이를 느끼게 하는 작품들과 작가들을 살펴본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언어이다. 사회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기본 도구로 감흥을 전달하고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다. 2017년 이상문학상 수상 소설집과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에서 강의 텍스트를 골라 합평한 뒤 수강생의 글을 합평한다.
한글/한문서예의 기본획을 잘 습득하여 기틀을 잡습니다. 수강회원 개개인에 대한 맞춤 지도가 이루어지며 사군자(문인화)를 배울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공모전 · 전시회 등 서화예술 활동에 참여하며 삶의 질을 높여나갑니다.
다중지성 연구정원 세미나
[철학미학] 생명과 혁명 세미나 : 세계의 그물망 그리고 생명 http://waam.net/xe/liferevolution
푸코, 『비판이란 무엇인가? 자기수양』 > 매주 일요일 오후 2시 > 공동길잡이 (문의 : 02-325-2102)
들뢰즈, 과타리, 푸코, 브뤼노 라투르, 알폰소 링기스, 나카무라 유지로, 키스 안셀 피어슨, 프리초프 카프라, 순데르 라잔 등의 핵심 문헌을 읽고 현대 사회의 생명과 혁명 문제에 관하여 토론합니다. 주제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철학미학] 건축, 도시공간, 그리고 사회적 삶 세미나 : 삶과 예술 http://waam.net/xe/city
조정환, 『예술인간의 탄생』 > 길잡이 손보미 010-9975-1656 > 매주 금요일 저녁 7:30
‘창의적으로!’라는 외침이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누구나가 ‘예술인’이기를 꿈꾸고, 단순히 꿈꾸는 것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예술인’과 동일시하고, 또 해야만 하는 지금, ‘예술’이란 무엇 인지, ‘예술과 삶’은 어떠해야 할지 함께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철학미학] 정동(affect)과 정서(affection) 세미나 : 집단주체성(군중, 대중, 다중, 민중)의 이론 http://waam.net/xe/aff
시몽동,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 > 공동길잡이 (문의 02-325-2102) > 격주 월요일 저녁 7:30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 지난 세기의 이성주의와 인식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과 함께 감성, 감정, 정감, 정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왔습니다. 정동과 관련된 문제의식과 개념을 공유하면서 타르드, 비르노, 들뢰즈, 시몽동 등의 핵심문헌을 살피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던져 주는지 생각하면서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정치철학] 정치철학 고전 읽기 세미나 http://waam.net/xe/classics
맑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 공동길잡이 (문의 02-325-2102) > 격주 토요일 오후 4시
칸트의 『영구 평화론』, 헤겔의 『법철학』, 맑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레닌의 『국가와 혁명』, 『그람시의 옥중수고』 등 정치철학의 고전들을 함께 읽으며 현대 정치철학과 나아가 정치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토대를 다집니다.
[철학미학] 들뢰즈와의 마주침 세미나 http://waam.net/xe/deleuze_der
들뢰즈·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 매주 토요일 저녁 7시 > 공동길잡이 (문의 : 이정섭 010-5497-7582)
우리 사유 바깥으로 나가는 여정에, 지도가 있다면 들뢰즈가 아닐까요? 그를 통해 우리를 넘어서는 세미나를 시작합니다. 들뢰즈가 바라보는 철학사, 그리고 들뢰즈가 던지는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우리의 문제들로부터 그리고 물음을 던지고 그리고 해를 찾고 그리고 … 그리고 …
[정치철학] 푸코 세미나 : 파레시아 읽기
http://waam.net/xe/deleuze_anti
푸코, 『담론과 진실』 > 매주 화요일 저녁 7:30 > 길잡이 박영대 010-3517-2216
푸코의 ‘자기배려’와 ‘파레시아’를 중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법, 진정한 자기를 되찾는 법을 배우고자 합니다. 더 큰 상실감을 가져오는 힐링이나 소비와는 다른, 새로운 삶의 기술을 익히고자 합니다. 함께 즐겁게 공부할 분들을 기다립니다.
[정치철학] 여성주의 세미나 시즌2 ― 여성주의 다시 읽기 http://waam.net/xe/herstory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 길잡이 쿨한주니 010-4302-9436 > 매주 토요일 오후 6:30
‘여성주의’가 실천이 아닌 트렌드화되어 다양한 책이 등장하고 있지만, 정작 여성주의 고전은 너무 고리타분하다고, 이미 알고 있다고 넘어가지 않았나요? 여성주의가 오늘날처럼 정립되기 위해 이루어졌던 피와 땀의 노력을 책을 통해 접할 수 있기 바랍니다.
[문학예술] 시 읽기 모임 http://waam.net/xe/poem
길잡이 표광소 010-5752-3406 >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시는 마음에 어떤 특별한 효과를 만들어 내고, 이 세상을 뚜렷이 비추어 내려고 단어를 사용하는 어떤 특별한 방법입니다. 시는 지금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더 먼 세계를 보는 안목을 넓혀도 줍니다. 시 읽기 모임은 시인 5천여 명이 생존하는 대한민국의 시간과 공간에 살며 1주일에 1시간 남짓 시를 향유하는 보람과 활기의 공유지입니다.
[철학미학] 미디어 이론 세미나 : 매체(Medium)을 넘어서 http://waam.net/xe/media
맥루언, 『미디어의 이해』 > 길잡이 권유진 010-3038-육사3오 >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영화를 뜨거운 미디어(hot medium)으로 보고 관객참여도가 높은 TV를 차가운 미디어(cold medium)라고 본 영문학자 겸 미디어 이론자 마셜 맥루언. 본 세미나는 맥루언으로 시작해 하이데거, 프리드리히 키틀러, 스탠리 카벨, 아즈마 히로키 등 동서양 이론가들이 미디어, 그리고 더 넓게는 매개(mediation)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정치철학] Assembly 읽기 세미나 http://waam.net/xe/assembly
네그리·하트, Assembly > 공동길잡이 (문의 : 02-325-2102) >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북미에서부터 중동, 유럽, 아메리카 대륙,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최근 몇 년간 “지도자가 없는”(leaderless) 사회운동이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세미나에서는 최근 영어로 출간된 안또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Assembly를 함께 읽으며 책이 제기하는 여러 쟁점들에 관해 토론합니다.
1. 박근혜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과정을 조사할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원회)가 지난 25일 공식 출범했다. 교육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진상조사위원회는 “촛불혁명에 담긴 상식과 원칙이 바로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첫 걸음으로써, 그동안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어온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과정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마련되었”으며, “향후 재발방지 대책에 대한 연구 및 제안을 하고 ‘(가칭)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 백서 발간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밝혔다.
2. 지난 10년간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실정으로 인해, “나라를 인간의 신체에 비유하면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곳이 없다”라는 말이 실감나게 들릴 정도로 한국사회는 골병이 들었다. 문재인정부가 문체부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 국정원 적폐청산 TF 등을 구성하여 이전 정권의 적폐를 밝히는 데 온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적폐청산 없이는 대한민국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 모든 적폐 가운데 가장 근간이 되는 게 역사적폐이다. 역사적폐는 국민들의 가치관을 전도시킨다는 점에서 적폐 중의 적폐인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헌법 전문에 명기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부정하고 친일-독재세력을 건국의 아버지들로 내세우기 위해 이른바 ‘건국절’을 제정하려 하였다. 이와 함께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이승만-박정희와 같은 독재자 그리고 재벌집단 등을 미화하고, 장기집권을 위해 역사교과서마저 국정화함으로써 교육을 사유화하였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가치마저 유린하는 전대미문의 ‘역사쿠데타’를 감행한 것이었다.
3. 역사쿠데타는 마침내 대통령탄핵으로 이어졌으며, 국정교과서는 촛불민심이 선정한 “박근혜 체제가 낳은 6대 적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박근혜정권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은, 촛불동력으로 당선된 문재인대통령이 취임 후 사흘 만에 교육 분야 첫 번째 업무 지시로 국정교과서 폐지를 지시함으로써,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로써 역사적폐가 청산된 것은 아니다. 역사쿠데타의 재발을 방지하려면,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진상을 명확하게 밝혀 책임자를 사법처리하는 한편, 진상조사결과를 자료집으로 발간하여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이를 목적으로 출범한 진상조사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정치 보복’이니 위원회가 국정교과서를 반대한 인사들 중심으로 조직되었다고 비난하는 세력이 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궤변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한 핵심세력은 박근혜대통령, 황우여·이준식 교육부장관과 김재춘·이영 차관, 박성민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 부단장, 그리고 김정배 국편위원장과 진재관 편사부장, 박덕호 역사교과서 편수실장 등이다. 이들에게 사법책임을 묻지 않고 어떻게 역사정의가 바로 설 수 있단 말인가. 역사쿠데타의 핵심세력을 조사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이야말로 진상조사를 정치적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또한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바람직한지 그렇지 않은지조차 판단하지 못하는 무정견한 인사들을 조사위원으로 위촉한다는 것 자체가 황당한 이야기이다. 이런 최소한의 상식적인 판단조차 못하는 인사들에게 어찌 진상조사의 책임을 맡긴단 말인가. 세월호특조위가 난항을 겪었던 것도 세월호 진상규명을 반대하는 인사들이 조사위원회에 들어가 위원회를 만신창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4. 우리는 “국민주권의 촛불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지난 8월 17일 감사원에 ‘역사교과서 국정화 공익감사’를 청구하였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감사원은 하루빨리 교육부, 국사편찬위원회, 기획재정부 등에 대한 감사를 착수해, 국민 대다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강행 과정에서 국민의 혈세가 어떻게 졸속 편성되고 집행되었는지 등을 낱낱이 밝히고 책임자를 엄중 문책하도록 해당 기관에 통보해야 한다. 그리고 교육부 진상조사위원회는 감사원의 감사결과를 진상조사와 적폐청산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
5. 지난 3월 17일 대구지방법원은 문명고등학교 학부모가 낸 ‘연구학교 지정처분의 효력 정지 신청’을 인용하였다. 법원은 문명고가 국정교과서를 주교재로 하여 역사수업을 진행함으로써 학습자인 학생들의 인격발현과 학부모의 자녀교육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면서, 그 근거로 학생의 학습권 및 학부모의 자녀 교육권은 결코 희생되어서는 아니 되는 “헌법상 보장되는 중요한 기본권”이라는 점을 들었다. 불법, 탈법, 위법, 꼼수로 점철되었던 국정교과서 제작에 충성을 다한 이들은 ‘헌법 가치’인 학생의 ‘학습권’과 부모의 자녀에 대한 ‘교육권’을 침해하는 데 일조한 ‘범법자’인 것이다. 그럼에도 국정화 추진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교육부 관료들이 문책은커녕 더 좋은 자리로 영전하거나 훈장까지 받은 경우 사례가 있다. 교육부 진상조사위원회는 이들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하여 범죄행위에 상응하는 처벌을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과거 친일-독재를 미화하는 교학사 교과서를 옹호하였거나 이번에 국정교과서를 집필하는 등 반 헌법적인 역사관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재위원으로 위촉된 이배용·이재범·최성락 위원을 해촉하도록 관계기관에 강력히 요청해야 할 것이다.
6.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는 역사적폐 청산의 출발이지 그 종착지가 결코 아니다. 친일과 독재 그리고 재벌을 미화하고, 낡은 색깔론과 종북놀이로 광신적 반공주의를 양산함으로써 헌법가치를 부정하는 역사쿠데타세력에 대한 단죄와 역사적폐청산은 앞으로도 간단없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끝>
▲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청와대 석불 1939년 조선총독부 문서에는 청와대 불상이 경주군 내동면 도지리 절 터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고 적혀있다. 현재 원위치로 추정되는 이거사 절터가 현재에도 도지마을, 도지동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 조선고적도보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혜문)가 ‘청와대 불상은 고향에 가고 싶습니다’라는 청원을 9월 29일 청와대 국민청원 누리집에 등록했다.
청와대 불상(수려한 외모 때문에 ‘미남 부처’로도 불린다)은 데라우치 총독의 환심을 사려던 일본 상인 ‘오히라’에 의해 1913년 서울로 옮겨져 현재까지 청와대 경내에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청와대 불상에 대한 대통령 비서실 답변 대통령 비서실은 2017년 8월 22일과 28일 두 차례에 걸쳐 “(청와대) 경내에 위치한 불상의 이운 문제에 대해서는 종교계 및 관련 전문가 등의 다양한 의견 수렴 등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한 사항으로 앞으로 시간을 두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결정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답변했다. ⓒ 구진영
앞서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지난 8월 7일 청와대와 대한민국 국회 앞으로 ‘청와대 불상 제자리 찾기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했다.
당시 청와대는 “(청와대) 경내에 위치한 불상의 이운 문제에 대해서는 종교계 및 관련 전문가 등의 다양한 의견 수렴 등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한 사항으로 앞으로 시간을 두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결정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밝혔다(관련 기사 : “청와대 불상, 경주로 돌려놔야”… 청와대 답변을 공개합니다).
전문가·종교계 “경주로 돌아가야”
▲ 청와대 불상 ‘미남 부처’라고 별명이 붙은 이 불상은 1913년 경주에서 지금의 서울 남산 밑 총독관저에 옮겨졌다. 1937년 새로운 총독관저가 완성되자 현재의 청와대 자리로 위치를 옮겨졌으며 현재까지 청와대 관내에 남아있다. ⓒ 구진영
진정서 접수 이후 2개월가량의 시간이 지난 현재, 불상에 대한 여론은 어떨까?
일단 관련 전문가들은 ‘청와대 불상이 경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견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 책임연구원은 KBS <취재파일K>와의 인터뷰에서 불상이 청와대에 있어야 할 이유를 묻자 “전혀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덧붙여 “한국을 강제 병합했던 바로 그 당사자인 데라우치 총독의 손을 거쳐서 불상이 지금 총독관저에 옮기게 됐고 총독관저가 옮겨지는 것에 따라 청와대에 들어갔다”라면서 “(불상은) 전형적인 일제잔재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청와대 불상의 이전을 반대한다고 알려졌던 조계종은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9월 26일 의견문을 발표했다. 조계종은 “문화재가 조성됐을 때의 당시 취지와 목적에 맞게 종교성과 역사성을 간직한 문화재로 보전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라며 “불상의 역사적 가치가 올바르게 조명되고 신앙적 환경 조성을 위해 원래의 자리로 이전되기를 바란다”라는 입장을 정부에 공식 전달했다고 밝혔다.
▲ 경주 남산 약수계 석불좌상(왼쪽)과 청와대 불상(오른쪽 위)) 최근 청와대 불상과 형태가 매우 유사한 쌍둥이 불상이 경주 남산에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한 국립춘천박물관에 청와대 석불좌상의 중대석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오른쪽 아래) ⓒ 임영애
청와대가 지난 8월 ‘불상에 관해 다양한 의견 수렴을 하겠다’는 것의 귀결점은 청와대 불상의 경주 이전인 듯하다. 이런 여론을 의식했는지 대통령비서실은 문화재청과 서울시에 현장 조사를 거쳐 국가 문화재 승격 여부를 검토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한겨레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서울시 문화재위원회는 지난 15일 회의를 열어 청와대 불상의 국가보물 지정 건의안을 확정 의결했다. 불상이 국가 보물로 지정되면 서울시가 갖고 있던 관할 권한이 문화재청으로 바뀌게 돼 정부차원에서 불상 이전 논의를 할 수 있는 행정 요건이 갖춰진다.
이제부터는 청와대 불상이 경주 국립박물관으로 갈 것인지 원래의 자리로 추정되는 이거사터로 갈 것인지 등 이전 장소에 대한 논의만 마무리되면 될 것으로 보인다.
▲ 청와대 불상 제자리찾기 국민 청원 등록청 문화재제자리찾기는 9월 29일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에 ‘청와대 불상은 고향에 가고 싶습니다’는 청원을 등록했다.
청와대에 진정서를 제출했던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청와대 불상 이전 문제는 시대정신의 구현이다. 해방과 동시에 처리됐어야 할 사건이 권위주의 시대에는 해결될 수 없었다”라면서 “(청와대 불상이 경주로 간다면) 일제강점기로부터 기인한 권위주의의 청산이자 민주주의의 승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새로운 길을 모색합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던, 우연한 기회가 주어졌든 도전은 가슴 뛰는 일입니다. 민중의소리 평생교육원 ‘이산아카데미’는 새로운 직업의 길을 개척한 ‘꾼’들을 찾아 그들의 밥벌이와 가치를 묻습니다. 동영상 강좌가 깊이 있는 인문학적 지식을 전한다면, 페이퍼 특강에선 독자에게 정보와 영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을 전할 계획입니다. 직업의 세계에선 때론 구체적인 기술보다 좋은 관점이 필요하기도 하니까요.
뉴라이트 진영에서 이승만 국부론을 내세우며 48년 건국설을 밀어붙일 때 역사학자 조한성은 책『한국의 레지스탕스』를 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비밀결사 단원들이 목숨과 맞바꾸면서도 소망했던 새로운 조국 꿈을 추적했다. 그들의 투쟁은 때론 성공하고 많은 경우 패배했지만 그들이 흘린 선혈에서 대한민국이 비롯되었다고 조한성은 말한다. 이후 그는 『해방 후 3년』을 통해 우리 사회에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해방 후 역사가 미소 양국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도대체 우리 민족의 역할은 어디에 있는가? 분단도, 전쟁도 모두 외세 탓인가?”
역사학자 조한성을 만났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 조사관으로 활동하다 지금은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에게 인터뷰를 청한 이유는 그의 저술이 우리 사회에 던졌던, 그 참신한 질문 때문이다. 43세의 이 역사학자는 늘 치밀한 사료분석으로 새로운 관점과 상상을 선사했다. 인터뷰는 청량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이루어졌다.
▲ 좌 부터 ‘해방 후 3년’ ‘한국의 레지스탕스’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이다. 이중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은 민족문제연구소 공저다. 그의 저술은 때로 모래알처럼 작게 보였던 것도 크게, 보편적 인식과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보게 한다.ⓒ출판사 생각정원 캡처
현대 사학의 원로이신 서중석 선생님께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현대사에 매료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조한성: (웃음) 이제 서중석 선생님 그만 팔아먹어야 하는데…. 대학 1학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당시 영상을 접하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 세대는 한국현대사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아서 충격이 컸죠. 돌베개에서 나온 『5.18 광주민중항쟁』을 보고 공부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시절 체험이 저를 현대사로 이끌었어요.
지도교수님은 현대사 박사 1호이신 서중석 교수님과 근대사 1세대 연구자이신 임경석 교수님이셨어요. 서 교수님은 한 강의에 20개 정도의 주제가 나오는데 이를 학생들을 나눠 조사를 시키셨어요. 역사연구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선행연구’에 대한 파악이었죠.
연구사 정리는 역사연구의 기초공정이에요. 현대사는 아직도 공백이 많은 분야거든요. 그 공백을 찾아 연구하고 새로운 문제 인식과 질문을 던지게 돼요. 서중석 선생님은 지금 은퇴 후에도 박정희 시대를 계속 정리하고 계시거든요. 개인적으론 힘이 드시더라도 80년대까지 쭉 정리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임 교수님은 사료를 다루는 방법을 세밀하게 가르치셨어요. 서중석 선생님 안식년일 때 임 교수님께 배웠거든요. 사료 가운데 한국 근대사 자료는 일제 생산문서가 상당히 많아요. 이 문서들은 일제의 관점으로 쓰였기에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해요. 독립운동가가 쓴 자료라 해도 그 문서들은 작성자 중심으로 작성되었기에 같은 사건도 전혀 다른 내용으로 쓰인 경우가 많아요. 이런 경우엔 사료를 꼼꼼히 읽고 분석해 참과 거짓을 읽어내야 합니다. 임경석 선생님은 그 방법을 알려주신 분입니다.
성균관대 사학과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전부터 역사학자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인식이 있었잖아요?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는지요.
조한성: 고등학교 2학년 때 국사 선생님 수업이 재미도 있고 진지했어요. 전 좋은 스승님을 만나면 힘을 내는 스타일인가 봐요. 그때부터 역사에 흥미를 느꼈어요. 어머닌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가길 원하셨는데 제가 막내라 그런지 진로를 강요하진 않으셨어요. 나중 문제가 있으면 곁에 끼고 함께 살려고 그러셨는지는 몰라요. (웃음)
석사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사료와 자료를 봐야 하고, 이때부터는 역사학자로서 자신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해야 해요. 대단한 은사님들께 좋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굉장한 경험이었고 지금도 저의 이야기를 책이나 강의에 담아 알리는 작업이 행복합니다.
▲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인터뷰하는 조한성ⓒ민중의소리
돈벌이 걱정은 없었습니까?
조한성: 처음 이 일을 선택할 때부터 돈 버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웃음)
전 고등학교 시절 역사에 관심이 많았음에도 사학과를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선배들이 사학과 들어가면 죽으라고 한문공부 해야 한다고 해서요. 실제로 사료분석에 한문은 필수인가요?
조한성: 아, 너무 안타까워요. 한문을 피해갈 방법이 있는데, 실제로 한국 고대사, 한국 중세사, 동양사 연구에는 상당한 수준의 한문 실력이 필요해요. ‘지곡서당’ 같은 곳을 다니면서 한문을 공부하는 분들도 많아요. 서양사는 영어가 필수, 한국근대사의 경우 한문과 일어가 중요해요. 한국 현대사는 오히려 영어가 더 중요해요. 전공에 따라 영어, 러시아도 필요하죠. 해당 언어를 알면 더 다양한 사료를 볼 수 있으니까 유학을 가는 친구도 많아요. 다만 현대사의 경우 국한문 혼용이 많아 한문의 자구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조금 설렁설렁해도 가능해요.
일제의 공적조서, 해방 후엔 명백한 친일파 증거
그래도 한문의 자구 정도는 다 읽을 수 있어야 하는군요? (웃음)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을 하셨습니다. 그때 6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조사를 하다 보니 자료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그래도 큰 성취감을 느낀 조사 활동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조한성: 아시겠지만 친일파와 관련한 조사는 당대에 해야 했던 작업이죠. 하지만 이승만의 방해로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지금은 증인을 채택할 수가 없죠. 만일 해방 후 철저히 조사했다면, 친일행위를 목격하고 들은 이들의 증언, 당사자의 증언이 결정적 증거자료가 다 남아있었겠죠.
제가 ‘관료팀’에 배치되어 도지사, 군수들 조사했어요. 거물급들은 관련 텍스트가 남아있는데 지방은 그런 것들이 전혀 없었어요. 4년 반이라는 시한으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내는 것도 불가능했고요.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 사상범 검거 실화집』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알려지지 않거나, 아직 발굴되지 않은 자료들이 많이 있을까요?
조한성: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남긴 ‘지나사변 공적조서’라는 자료가 있어요. 중일전쟁 시기 일제가 관료들의 공적을 조사해 훈‧포상을 해줬는데 당시엔 공적을 적은 조서였지만 지금은 친일 행위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된 것이죠. 어떤 후손이 선조의 친일행적을 숨기고 지방에서 선조를 미화하고 기념사업을 하려다 이 자료 때문에 친일행위가 명확히 드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적이 있어요.
이 자료는 위원회가 일본에서 직접 수집한 자료인데 이 자료 때문에 30년대 후반에 활동했던 관료들의 친일 행위가 많이 드러났어요. 위원회가 천 명 정도의 친일파를 선정했는데 이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새로운 자료를 발굴한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이런 자료의 수집은 시간과 노력, 자금이 많이 들기 때문에 국가기관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위원회가 좀 더 오래 유지가 됐더라면 아마 더 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제강점기 거상 巨商으로 일본에 비행기를 헌납하는 등 친일행위를 하다 해방 후 독립운동가와 손잡고 좋은 일을 한 이들도 있어요. 이들의 후손은 자신의 부친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 것에 대한 불만이 상당하더라고요. 친일파 분류는 어떻게 합니까?
조한성: 친일파 분류는 대개 1904년 러일전쟁 시기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의 행위를 바탕으로 판단합니다. 말씀하신 사례처럼 해방 후 행위에 관해서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실 해방 후에는 누구나 우리 민족을 위해 일하지, 일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겠죠? 일제 강점기 친일을 하다가 독립운동을 한 경우는 친일파 선정에서 제외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해서 친일행위를 한 경우는 친일파로 선정합니다.
‘밀정’의 압권,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암살’ ‘밀정’ ‘군함도’ 등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흥행입니다. 모두 보셨는지요?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한다는 긍정성 이면엔, 또 역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준다는 주장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조한성: 저 역시 언급하신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어요. 역사학계에서도 굉장히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영화 ‘밀정’은 굉장히 인상 깊게 보았거든요. 작가나 감독이 공부를 상당히 많이 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가가 대사 하나하나를 많이 생각하고 썼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김원봉이 황옥(기자 주:황옥은 실제 인물이다)을 끌어들이기 위해 동료를 설득하는 대목의 대사를 보세요.
“이중첩자에게도 조국은 하나뿐이오. 그에게도 분명 마음의 빚이 있을 것이요. 그걸 열어주자는 겁니다. 마음의 움직임이 가장 무서운 게 아니겠소?”
김원봉이 황옥을 설득하는 방면도 압권이거든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를 정해야 할 때가 옵니다.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이 영화의 백미죠. 실제 역사에서도 황옥이 밀정인 것을 알면서도 동지로 받아들이는 장면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에요. 아마 작가의 상상이 사실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요.
하지만 영화는 영화로 봐야죠. 다큐멘터리도 아닌데 ‘역사 왜곡’이라고 하면 과한 비판이죠.
중요한 것은 ‘영화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만들어졌느냐’인 것 같아요. 과도한 설정이 있으면 왠지 손발이 오그라들고 어색하잖아요? 그런 건 역사가가 아니더라도 자연히 느끼게 되죠. 반대로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다고 설득력이 높아지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역사적 사실과 장면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기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들면 그 역사적 팩트의 무게에 눌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설득력을 잃는 경우도 있거든요. 최근 영화 ‘군함도’가 흥행에 실패한 건 아쉬워요. 흥행의 실패로 군함도의 역사나 강제동원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거대한 축인 건 맞지만 그것이 독립운동의 다양한 계열을 모두 수렴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 건국절 논란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뉴라이트의 공격에 대한 반정립으로 흐른다는 느낌이 있어요. 임정 법통계승을 따지다 1919년 건국절로 가거든요. 역사적 맥락에 비추면 굉장히 부자연스럽거든요.
조한성: 우선 48년 건국절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이승만과 친일세력의 공로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죠. 반면에 1919년 건국절 주장도 한계가 분명해요. 건국절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분위기는 그렇지 않아서 걱정스러워요. 건국절 논란 자체는 소모적이에요. 애초 뉴라이트 진영의 정치적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온 주장이거든요.
그런데 임시정부가 모든 독립운동세력을 압도하진 못했어도 여타 독립운동세력과는 구분해주어야 할 것 같아요. 1919년~21년까지 대부분 독립운동세력을 하나로 묶었고, 그 이후에는 세력이 약화하지만 40년 이후 중국 국민당 장개석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광복군도 만들고 좌우합작도 하면서 다시 세력을 키웠죠. 다만 여타 세력을 압도하진 못했기에 안타까움이 있죠.
▲ 역사학자로서의 특징이랄까. 조한성 작가는 인터뷰 도중 역사와 관련한 구체적인 질문에선 관련 자료를 다시 꼼꼼히 보고 말을 다듬었다.ⓒ민중의소리
“독립선언 33인 중 단 한명이라도 민중과 함께 했다면 어땠을까요?”
최근 ‘어쩌다 어른’과 같은 TV 프로그램을 비롯해 참 맛깔나게 우리 역사를 소개하는 스타강사들이 여럿 있습니다. 올해 설민석 강사가 3.1 운동 관련 ‘민족대표들의 태화관 술자리 발언’으로 상당한 비난을 받았어요. 그런데 당시 현장을 술자리로 폄하하고 ‘태화관 마담’ 발언 문제는 그렇다 쳐도, 자칭 ‘민족대표’라는 분들이 독립선언문을 내고 자수한 건 당시 목숨 걸고 항쟁을 이어갔던 민중과 대비하면 투항주의, 내지는 명백한 제한성이 아닌가 생각해요.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지도자의 부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조한성:
저도 개인적으론 설민석 강사의 강의를 좋아해요. 이분 때문에 우리 역사에 재미를 붙이신 분도 많을 것으로 생각해요. 그런데 강의를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과장하거나 재미있게 하려다 실수할 수 있거든요.
책은 출판 전 단계에서 거를 수 있지만, TV는 그렇지 않죠. 미디어 환경의 특성상 ‘스타강사’들은 자신의 역량 그 이상의 것을 요구받거든요. 방송국에선 시청률을 생각해 더 자극적인 멘트를 끌어내려고 하고요. 그래서 전 역사의 영역에선 강사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만큼인지 반드시 따져봐야 한다고 봐요. 요릿집에서 했다고 독립선언 그 현장을 술자리라고 하는 건 엄청난 왜곡이죠.
독립선언 33인의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사학계에서도 존재하죠.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의 역할 즉, 국내 3.1 운동을 기획하고 자금을 준비하고, 조직을 확장해 이 운동을 전국화한 공로는 분명히 평가해야 한다고 봐요. 33인의 ‘서명’은 당시 일제의 ‘무단통치’상황에선 목숨 걸고 한 겁니다. 실제로 일제는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이런저런 법령을 끌어 모두 적용하려고 했고요.
33인이 선언서에 서명하면서 ‘조선민족대표’라고 밝혔어요. 이를 이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들을 ‘민족대표’라고, 즉 민족지도자 33인으로 과대평가하는 건 문제라고 봅니다.
33인은 처음부터 자신의 역할을 한정했어요.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일본 정부, 조선 총독부, 각국 영사관에 알리는 것이 목표였어요. 그래서 ‘통고’를 한 것이죠. ‘자수’라고 하면 너무 폄하한 것이고, 자신들의 표현대로 독립선언을 통고한 것입니다. 딱 여기까지가 이 33인의 역할이었죠.
28일 최종회의에서 군중과 함께하지 않기로 했는데, 군중시위가 폭력화할 것에 대한 우려였어요. 일본 경찰에게 잡히면 피하지 않고 체포되어 독립선언의 경과를 주장하기로 한 것이죠. 애초 33인은 군중을 지도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어요. 이것이 한계죠.
만약 33인 중 단한명이라도 민중과 함께 투쟁하며 체포될 때까지 지도한 지도자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 사람은 안창호, 이승만에 버금가는 민족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3.1 운동 주역 중 천도교, 기독교 못지않은 세력이 있었는데요. 바로 학생이에요. 한국 학생운동의 시초지요. 이들이 3.1, 3.5 서울시위를 실질적으로 지도했고 각 지방의 시위에서 활약했어요. 29년 광주학생운동에서 45년 이후 4.19, 6월 항쟁 등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었죠. 전 학생운동에 대해 더 적극적인 평가가 필요하다고 봐요.
우리 독립 운동사를 보면 무슨 단체니 계파니 하며 반목하는 대목이 꽤 많습니다. 어떤 큰 줄기가 없이 오밀조밀하게 흩어져 분열하는 것으로 보여 흥미를 잃을 때도 있습니다. 유독 우리나라 독립운동이 그런 것인지요? 당시 식민지 나라 독립운동의 공통적인 모습이었는지요?
조한성: 사실 나라를 빼앗기고 하나로 모일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다른 나라의 사례는 연구해보지 않았지만 아마 비슷할 겁니다. 다만, 우리 독립운동의 약점은 하나로 수렴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이 없었다는 겁니다. 다들 고만고만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우리 민족의 진짜 불행은 해방 시기가 바로 치열한 냉전의 시작 시기였다는 것이죠. 미소 대결이 첨예화된 곳이 한반도였어요.
“내부의 힘이 강대국의 ‘규정’을 충분히 바꿀 수 있어요”
저서 『해방 후 3년』을 인상 깊게 읽었어요. 우리 역사는 강대국의 강력한 힘에 압도되어 규정된 결과물이라는 인식에서 민족 내부의 통합된 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이는 지금의 한미관계에 대해서도 일종의 경각심을 준다고나 할까요? 선생님의 관점은 ‘역사에 대한 가정’,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당시 분단의 길목에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대목은요?
조한성: 해방 후 3년의 역사를 보면 미·소의 규정력이 너무 강해 어쩔 수 없이 미소 양국에 끌려가는 듯한 모습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미·소 공동위원회죠. 한반도를 미래를 다루는 회의인데 정작 우리는 거기에 참여하지 못했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수동적인 역사의식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이 외부의 힘만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내부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느냐는 것도 미소의 규정력만큼이나 크다는 것이죠. 그럼 분단이 되지 않으려면 어때야 했을까. 그것은 좌우가 하나로 뭉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해지는 것이 좌파의 역할입니다. 남쪽에는 여운형이나 김규식처럼 좌우를 묶으려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북쪽에 이런 세력이 있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자연히 박헌영이나 김일성이 좌우합작을 할 마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북한의 경우 소련의 영향으로 하나의 세력으로 되어 있었거든요.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은 남쪽이 훨씬 진지했어요. 여운형의 경우 수차례 북으로 가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을 했거든요. 김일성은 단 한 차례도 내려오지 않았죠.
『해방 후 3년』을 읽다가 든 생각입니다. 남로당의 단정 반대 투쟁이나 4.3 항쟁, 지하 총투표 조직이 진지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보여주기 식 , 좌경 모험주의로 보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의 희생을 요구했던.
조한성: 남로당의 모험주의가 큰 영향을 주었어요. 박헌영은 지하 선거를 위해 모든 조직을 동원해 투표용지를 옮기고 주민을 모아 투표를 시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조직이 노출되고 파괴돼요. 한국전쟁 이전에 남로당 조직이 모두 깨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죠. 당시 참가했던 이들의 인터뷰를 보면 이 투쟁이 얼마나 졸속이고 많은 희생을 불러왔는지를 알 수 있죠. 김일성과의 경쟁을 의식한 박헌영의 야심이었다고 밖엔 해석이 안 돼요.
김구는 일관되게 ‘충칭 임정’으로의 권력 이양을 주장했고, 미 군정을 엎기 위한 2차례의 쿠데타를 기획하기도 했습니다. 좌우 합작 절호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충칭 임정세력이 주요 내각을 구성하고 나머지 3석 정도를 상대에게 양보하는 수준의 안을 제시해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완고한 고집과 배타성’, 지도자로서는 치명적인 약점 아닌가요? 김구가 해방 이후 나라의 전면적인 개혁의 측면에서 좌익세력과도 진지하게 일을 도모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의 반공의식의 기원이 궁금합니다.
조한성: 제가 연구 하면서 가장 복잡한, 그러니까 어떤 일관성이 보이지 않는 인물이 바로 김구 선생입니다. 김구 선생은 이승만과 달리 개인적 권력욕은 없어 보여요. 그런데 임정에 대한 열망은 엄청났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20여 년간 그 어려움 속에서도 임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확실히 김구 선생은 반공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활동하면서 쌓인 것들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갈등은 20년 무렵 레닌자금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자 김립을 암살하는데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선생님께선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 즉 ‘5년 신탁통치 후 통일 정부 수립방안’에 진정성이나, 현실성이 있었다고 보시는지요? 가령 동아일보의 치명적 오보가 없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조한성: 모스크바 3상 회의는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유일무이한 국제적 합의였으니 결의안대로 되었다면 통일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겠죠. 문제는 반탁운동이 일어나면서 결의안대로 하는 것이 어렵게 돼버렸다는 겁니다.
당시 오보를 동아일보만 꼭 찍어서 얘기하면 동아일보측이 굉장히 섭섭할 거예요. 당시 다른 신문들도 대부분 똑같이 보도했으니까요. 당시 오보는 사실상 미 군정이 유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련의 입장에서 반탁운동이 일어났을 때 큰 충격을 받은 건 그 뒤에 미국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것이 소련을 경직화시켰고, 이후 3상회의 원안 고수만 주장하게 됩니다. 한 나라의 운명을 두고 미국이나 소련이나 그 대처 방안이라는 것이 참 문제가 많았습니다.
“한국 대통령의 역사적 소임, 전쟁 막는 것입니다.”
역사학자가 보는 지금의 한반도, 남북 상황. 어떻게 보시는지요? 문 대통령의 안보행보에 대한 생각도 궁금합니다.
조한성: (한숨) 우선 답이 없어 보일 만큼 깜깜하죠. 북한은 당분간 핵무장의 완성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이고요. 그 후 북미협상에 나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당사자이면서도 당사자가 아닌듯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인데요. 해방 후 3년의 경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외부의 상황에 끌려만 가서는 절대 안 됩니다. 내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참혹한 실정이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외교력과 상관없이 48년도엔 누가 봐도 전쟁이 확실했어요. 이승만은 대책도 없이 북진통일을 외쳤고, 이런 이승만이 불안했던 미국은 한국군을 위한 무기를 지원하지 않았죠. 결국 전쟁에 이길 힘도 준비도 아무것도 없이 그저 쌍방 간의 도발을 이어가다 남침을 맞잖아요? 만약 이승만이 북진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면 김일성이 그렇게 쉽게 남침을 했을까 상상하게 됩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전쟁을 막는 일’입니다. 당장 성과가 없더라도 우리 정부는 북한과 계속 대화를 시도하며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는 사인을 계속 주면서 북‧미간 협상을 유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쟁을 억지하는 것은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당사자 아닙니까?
역사연구자로 살면서 가장 희열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조한성: 제 관점으로 대중에게 역사를 이야기할 때입니다. 아직 한국 학계에선 ‘논문’은 인정받지만, ‘대중저술’은 그렇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역사학자들이 대중저술을 선호하지 않아요. 어떻게 보면 대중에게 역사를 알리는 일이 더 중요한 작업이잖아요. 그러다보니 작가들이 오히려 역사 관련 책을 써요. 재미있죠. 하지만 작가들의 작업엔 늘 ‘오류’라는 함정이 있습니다. 전 이런 오류 없이 대중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어요.
『한국의 레지스탕스』 , 『해방 후 3년』, 민족문제연구소 공동 저술인 『군함도 – 끝나지 않은 전쟁』모두 재미있게 봤습니다. 힘 있는 문체가 당대 상황으로 몰입하게 만들더군요. 다음 작품이 궁금합니다.
조한성: 지금은 ‘3.1 운동’에 대한 책을 구상 중이에요. 자료가 굉장히 많은데, 그래서 오히려 잘 정리가 안 되는 경우에요. 일반인들이 200만 명이 참가했는데 그분들의 자료가 모두 남아있지는 않지만 ‘심문 조서’같은 형식으로 많은 분의 자료가 남아있어요. 이분들의 이야기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쓰고 싶습니다.
역사학자를 꿈꾸거나 역사 관련 일을 하고 싶은 이들이 많습니다. 학생들이 역사를 공부하며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 붙잡는 방법이랄까요? 조언 해주신 다면요?
조한성: 역사 속 인물이 되어, 실제 주인공으로 분해서 인터뷰 형식이든, 신문기사의 형식이든 자신의 글로 써보시면 어떨까요? 수업시간의 일방적인 가르침보다 훨씬 재미있거든요. 역사는 정말 재미있는 학문입니다. 학교 현장에서도 학생들이 더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많은 방법을 개발했으면 해요.
[편집자주] 지난 1938년 제국주의 실현을 꿈꾸던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국민 총동원령을 제정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여파가 미쳤다. 일본은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 사할린, 남양군도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들은 원치 않는 총을 들어야 했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중 최소 60만명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79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는 흐려졌다. 교과서는 단 한 문단으로 피해자의 삶을 축약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 건립은 정부의 불허로 난항을 겪고 있다.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역시 지지부진하다. 백발이 성성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국회와 법원을 오간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지난 4월부터 강제 동원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취재를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피해자와 유가족을 찾았다. 일본을 방문, 비극의 흔적을 되짚어봤다. 쿠키뉴스 기획취재팀은 94세의 피해자를 대신해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그의 간절한 당부를 독자들께 전한다.
광복 72주년.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여전히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지난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정부는 강제동원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다. 피해자 위로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 대신 나선 이들은 수많은 ‘익명의 조력자’였다. ‘지워진역사 강제동원’ 기획 시리즈에서 다 담지 못한 강제동원 학계, 시민단체계 인사들의 ‘고군분투기’를 소개한다.
▲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국가의 협조가 절실하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이를 기록할 기관은 전무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지난 1995년 강제동원 진상규명에 뛰어든 이유다. 이후 김 연구원은 일본이 수탈한 조선의 인·물적 자원의 정확한 실태조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피해자와 연구자가 함께 만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정대협), 역사문제연구소,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 등에 제안해 ‘강제동원진상규명 시민연대’ 시민단체를 꾸렸다. 이뿐만 아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특별법)’ 초안도 김 연구원의 손을 거쳤다. 김 연구원은 강제동원 연구에 정부의 협조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강제동원 자료가 국가기록원에 이관되면 해당 자료 열람이 힘들어진다”면서 “우리 정부가 자료 연구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 사진=김서경 작가 제공
◀ 김서경 노동자상 조각가…예술로 희생자 넋을 위로하다
서울 용산역 앞 세워진 국내 최초의 강제동원노동자상은 김서경, 김운성 부부가 조각했다. 노동자상은 조선인 노동자가 어둡고 깊은 갱도를 나와 태양을 마주하는 순간을 형상화했다. 김 조각가는 이를 ‘불편한 눈부심’이라고 표현한다.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의지라는 것이다. 김씨 부부는 강제동원뿐 아니라 위안부 문제에도 목소리를 높여왔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도 이들의 작품이다. 김 조각가가 노동자상 제작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일제강점기 많은 조선인이 일본 땅에 끌려갔다. 일부는 생존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유해로나마 고향 땅에 잠드신 분들도 있다”면서도 “아직 유해조차 발굴되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이들이 많다. 비극적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후대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조각가는 앞으로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
▶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진상규명 위해 사할린에 흘린 땀방울
비포장도로를 7시간 가까이 달린다. 러시아 사할린 각 지자체 기록보존소에 연금, 노동자 카드 등 자료의 열람을 신청한다. 허가가 떨어지면 ‘서류철’로 된 문서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살펴본다. 대부분의 자료가 전산화돼 있지 않은 상황이다. 개인정보 문제로 복사가 불가능한 자료도 다수다. 일일이 손으로 베낄 수밖에 없다. 방일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가 사할린에서 강제동원 관련 자료를 조사해온 방법이다. 방 교수는 지난 2005년부터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에서 활동, 사할린에 잠들어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 발굴에 집중해왔다. 지난해에는 사할린에 홀로 파견됐다. 그는 약 500여 명의 강제동원 피해자 명단을 발굴해냈다. 방 교수는 “현장에서 만난 피해자와 유가족 모두 절절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며 “이들의 수난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진상규명 활동을 지속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의 경우, 자료가 부족해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다수 있다”며 “한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명부 발굴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희자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이희자 태평양전쟁희생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공동대표…포기할 수 없던 아버지의 ‘이름’
“이희자 보추협 대표에게 물어봐라. 이 대표는 우리의 이야기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취재 도중 만난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피해자와 강제동원 피해 유가족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이 대표는 유가족과 피해자를 보듬으며 약 30년간 강제동원 진상규명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그 또한 강제동원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이 대표는 지난 89년부터 관련 기록 찾기에 나섰다. 고군분투의 연속이었다. 가까스로 아버지의 사망 사실이 적힌 명부와 야스쿠니 신사 합사를 명시한 문건 등 총 6건의 자료를 찾았다. 이후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른 피해 유가족을 돕기 시작했다. 지난 2001년에는 보추협을 결성,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 대표는 찾아낸 기록을 토대로 일본 정부에 피해보상 소송을 걸었다. 또 끊임없이 국회 문을 두드려 특별법 제정을 이뤄냈다. 지난 6월 이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가족의 이야기를 모은 책을 출판했다. 이 대표는 “우리나라가 지난 45년 이후 정말 해방된 것이 맞는지 정부에 묻고 싶다”면서 “유가족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65년 한·일 협정으로 보상받을 권리마저 빼앗겼다.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가족의 외침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 장완익 변호사
▶장완익 변호사,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고충 해결사’
장완익 변호사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만남은 우연히 이뤄졌다. 지난 1994년, 정대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담당 변호사로 일하던 지인이 유학을 가면서 장 변호사가 대신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장 변호사는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강제동원 피해자 고충 해결에도 발 벗고 나섰다.
그는 지난 2004년부터 2년 동안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 업무를 진행했다. 장 변호사는 광복 이후 들어선 정권이 강제동원 진상규명에 무관심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승만·박정희·노태우·전두환 등 권위주의 정권들은 과거사 해결을 경시했다”며 “이로 인해 강제동원 역사가 국민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국가 주도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외길 25년째
“술맛 떨어지게 또 우키시마호 얘기냐” 전재진 우키시마진상규명협회 회장이 지인을 만나면 듣는 핀잔이다. 우키시마호 사건은 지난 1948년 강제 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을 실은 우키시마호가 부산항으로 향하던 중 폭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아직 정부는 희생자 숫자는 물론 정확한 사고 원인마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전 회장은 지난 1992년부터 꾸준히 우키시마호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당시 아시아반핵포럼에 참석해 유적지를 답사하던 중 이 비극적 사건을 알게 됐다. 전 회장은 우키시마호 생존자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모두 사비를 들여 이뤄진 일들이었다. 그는 총 82명의 생존자를 만나 증언을 일일이 기록했다. 정부는 지난 2008년에서야 ‘우키시마호사건소송자료집’ 두 권을 내놓았다. 이마저도 형식적 조사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 회장의 주장이다. 세월이 흘러 이 가운데 남은 생존자는 단 2명. 전 회장은 “더 늦기 전에 정부가 우키시마호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며 “아직도 일본 마이즈루만 앞바다에 묻혀 있을 유해를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회장은 우키시마호를 다룬 영화 제작도 계획 중이다. 언제까지 정부가 아닌 개인이 홀로 싸워야 하는 걸까.
▲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역사 알아야 바로 잡는 것도 가능하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수십 년간 자료를 분석, 수집해온 ‘강제동원 전문가’다. 대학원 재학 당시 지도교수의 제의로 강제동원 문제에 첫발을 디뎠다. 지난 95년 일본에서 온 연구자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후 시민단체 등에서 활동하며 강제동원 특별법 제정을 도왔다. 지난 2005년 2월부터 지난 2015년까지 위원회 조사과장으로 10년간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했다. 노무동원 피해자의 유골 발굴과 자료 정리, 진상조사, 지원금 지급, 명부 전산화 등의 작업을 지휘했다. 특히 일본에 남아 있는 강제동원 관련 자료 입수와 유골 봉환에 힘썼다. 위원회가 종료된 후에는 강제동원의 역사를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정 연구위원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 현장에서 반성과 교훈을 얻기 위한 ‘다크투어(역사교훈여행)’를 기획 중이다. 경희궁 지하터널, 인천 동일방직터 등 국내 강제동원 피해 현장은 8000여 곳이 넘는다. 인천과 부산 등 각 지역에 노동자상을 세우는 일에도 참여했다. 정 연구위원은 “강제동원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일본에 제대로 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
◀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문재인 정부, 노동자상 건립을 전면적으로 보장하라”
최종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우리나라와 일본에 강제동원 노동자상을 세우는 데 힘을 보탰다. 노동자상을 세우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지난해 8월 최 직무대행은 노동자상 건립 행사 참석을 위해 일본 교토시 단바망간광산을 방문하려 했다. 그러나 탐탁지 않은 이유로 일본 입국이 불허됐다. 일본 정부뿐이었을까. 한국 정부마저 노동자상 건립에 비협조적이었다. 최 직무대행이 속한 민주노총은 노동자상 건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등은 지난 4월6일부터 매일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1인 릴레이 시위를 벌였다. 최 직무대행은 지난 6월24일 열린 ‘노동자상 건립 촉구대회’에서 “정부는 강제동원 노동자 피해 보상을 위해 주권국가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력 끝에 노동자상은 지난 8월 용산역 앞에 세워졌다. 현재 부산에서도 노동자상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는 시민을 상대로 지지 서명을 받고 노동자상 조성에 필요한 비용을 모금, 오는 12월28일에 노동자상을 세운다는 계획을 밝혔다.
▲ 한수산 작가
◀ 한수산 작가…‘군함도’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다
“소설 ‘군함도’ 집필은 운명이었습니다” 지난 7월 영화 ‘군함도’가 개봉했다. 영화 이전에 소설로 먼저 군함도의 비극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는 한수산 작가다. 한 작가가 소설 ‘군함도’를 취재하고 집필하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27년. 한 작가는 소설을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일본 정부가 철저히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를 은폐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 작가는 오로지 ‘피해자의 증언’에 의지해 소설을 완성해야 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피해자들의 기억도 정확하지 않았다. 한 작가는 지금부터라도 일제강점기에 대한 객관적 기록을 남기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면서 “친일인명사전 모금 운동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에 많은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다만 이 분노를 분출할 길을 여는데 우리가 소홀했을 뿐”이라고 봤다. 또 “건국 이후 흔히 말하는 ‘친일 정부’가 이어졌다. 기득권 세력은 부단히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면서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올바른 과거사 기록 작업이 더 폭넓게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
◀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수많은 희생자는 왜 죽어야 했는가”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소속 역사학 박사의 전문분야는 일본 역사교과서다. 한 박사는 지난 2010년부터 일본 역사교과서가 강제동원, 위안부 문제를 사실대로 기술하고 있는지 꼼꼼히 ‘모니터링’ 해왔다. 한 박사는 일본의 각 출판사를 직접 찾아가 왜곡된 부분의 수정을 요청하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은 기본적으로 강제동원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한국 교과서는 일제강점기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기술한다. 또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착취당한 일에 대해 ‘강제동원’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나 일본은 ‘강제연행’이라고 말한다. 이 단어에는 전쟁 속에서 일어난 일시적인 범죄, 또는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라는 의미가 내포돼있다.
한 박사는 “우리 민족은 식민지 체제 하에서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일본 국민이 해야 할 일을 강요당했다”면서 “그런데 현재 역사 교과서는 희생자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기술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 박사는 “강제동원과 관련해 교과서에서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강제동원의 실태를 정확히 알리고, 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짚어주는 것이 교과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공동대표
▶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공동대표…행동하는 일본의 양심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바라는 목소리는 일본에도 있었다. 지난 60년대부터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과거를 반성하며 강제동원 피해자를 위한 자료 수집에 나섰다. 히다 유이치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네트워크) 공동대표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강제동원 문제를 처음 공론화했던 재일사학자 고(故) 박경식 선생의 강연을 들으며 문제의식을 키웠다. 이후 일본 전역을 돌며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해왔다. 지난 2005년에는 네트워크 공동 대표를 맡는 등 주축이 됐다. 네트워크는 일본 내 흩어져 있던 400여 명의 강제동원 연구자와 시민운동가들을 모은 단체다. 히다 대표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골 조사, 비밀 자료 공개 요구, 미불 임금 처리 등을 위해 힘썼다. 네트워크가 수집한 자료는 한국 위원회로 보내져 진상규명을 위한 토대가 됐다. 최근에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도 힘을 보탰다. 히다 대표는 “과거 노무현 정부가 강제동원 진상규명을 위해 위원회를 설립했던 것처럼 새로운 정부에서도 다시금 노력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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