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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본 ‘실제 군함도’, 영화보다 끔찍해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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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본 ‘실제 군함도’, 영화보다 끔찍해 볼 수가 없다

익명 (미확인) | 금, 2017/07/28- 21:17

[사극으로 역사읽기] 범죄현장을 유네스코에 등재한 일본의 뻔뻔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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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함도> 포스터.ⓒ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군함도> 배경인 일본 하시마. 일본의 신청으로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서양이 동양으로 밀려오던 서세동점 시대, 일본은 특이하게도 서양 편에 서서 동양을 침략하며 산업혁명을 이룩했다. 그런 산업혁명 현장이라는 이유로, 미쓰비시 그룹의 해저탄광이 있었던 하시마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섬을 세계유산으로 만든 일본의 행동은 뻔뻔스럽고도 이상하다. 일본 산업혁명의 증빙으로 내놓았지만, 이곳은 그런 의의를 덮고도 남을 만한 범죄 현장이요 범죄 증거물이다. 전쟁 수행을 위한 자원 확보를 목적으로 조선인과 중국인들한테 인간 이하의 강제노동을 강요한 곳이다. 그래서 숨겨도 시원찮을 곳을 세계유산이랍시고 내놓았으니, 일본이 제정신을 가진 나라인지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미쓰비시는 국가나 공공단체가 아니다. 이런 기업에 의한 강제노동을 일본 정부에 의한 강제노동으로 볼 수 있을까? 당연하다. 미쓰비시는 일본 정부 및 조선총독부와의 협력 속에 조선인 노동자들을 강제 모집했고, 자사의 이윤 창출 못지않게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해 그들을 혹사시켰다. 따라서 미쓰비시의 행위는 곧 일본 정부의 행위였다.

행정법 이론에서도 그렇다. 국가나 공공단체뿐 아니라, 이들의 위탁을 받고 공무를 수행하는 사기업이나 사인(개인)도 행정주체에 포함된다. 공무수탁사인으로 불리는 이런 기업 및 개인의 행위에 대해서도 국가나 공공단체가 책임을 진다는 게 일반적 이론이다. 일례로, 서울대 법대 김동희 교수의 <행정법 I>에 이런 대목이 있다.

“특정 행정작용의 수행을 위하여 관계법상 사인에게 일정한 공권력이 부여되는 경우가 있다. ······ 이 경우, 사기업 또는 사인은 자신의 명의로 공법상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한도 내에서 행정주체의 지위에 서게 된다고 본다.”

미쓰비시는 강제동원이라는 측면에서 일본 정부의 대리인이자 행정주체였다. 그렇게 미쓰비시가 일본 국가를 대신해서 강제노동을 강요한 범죄 현장을 당당하게 세계유산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군함도라 불리는 하시마 섬

부산 아래에 규슈라는 큰 섬이 있다. 그 섬 서북쪽에 나가사키가 있다. 미군이 원폭을 투하한 곳이다. 그 나가사키 앞바다에 하시마 즉 군함도가 떠 있다. 동서 160미터, 남북 480미터인 섬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기획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에 김영환의 ‘군함도라 불리는 섬에 가다’란 글이 있다. 하시마가 군함도라 불린 이유를 묘사하는 대목이 이 글에 있다.

“하시마의 좁은 땅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기 위해 미쓰비시는 1916년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인 7층 아파트를 세웠다. 그 뒤로도 10층 아파트를 비롯하여 고층 건물들이 계속 지어졌고, 좁은 섬에 근대식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모습이 마치 군함처럼 보여 그때부터 군함도라고 불렸다. 이 작은 섬에 학교, 병원, 절, 목욕탕을 비롯하여 파친코와 영화관까지 있었다 하니, 바다에 도시 하나가 떠 있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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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함도.ⓒ 위키커먼스

영화 <군함도>에 묘사된 이 섬은 한마디로 지옥이다. 강제징용 노동자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바다 밑 탄광에서 목숨을 걸고 석탄을 캔다. 똑바로 서지도 못하고 누운 채 일을 한다.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비위생적인 조건에서 생활한다. 거기다가 총칼의 감시까지 항상 받는다.

영화 속에는 과장된 장면들이 없지 않지만, 1943년~1945년 이곳으로 끌려간 조선인 500~800명(추정치)은 생지옥과 다름없는 속에서 목숨을 부지했다.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에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노기 카오리의 ‘지옥섬 하시마의 하루’란 글이 있다. 그는 탄광 작업환경을 이렇게 기술했다.

“해저탄광은 승강기를 타고 바다 속 깊이 한없이 내려가야 했다. ······ 하강 속도가 너무나 빨라 온몸이 움츠러들 정도였다 ······ 지하 수백 미터 아래로 내려가면 탄을 모으고 올려 보내는 넓은 공간이 있고, 거기서 개미집처럼 퍼진 굴속으로 더 들어가야 했다.”

그런 열악한 데서 일을 시키면서도. 미쓰비시는 식사를 제대로 주지 않았다. 기본적인 보건 서비스 역시 물론이었다. ‘지옥섬 하시마의 하루’에 나오는 또 다른 대목이다.

“노무 관리자는 조선인들의 감기를 병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쉬고 싶다고 말하면 몽둥이로 때렸다. 지나가는 갱부들이 한 대씩 때리도록 전봇대에 묶어두기도 했다.”

주거환경도 말이 아니었다. 한 사람당 0.5평도 안 되는 좁은 방에서 7~8명이 함께 기거해야 했다.

“조선인이 수용된 협소한 방은 바람이 통하지도 않고 햇빛이 들지도 않았고, 파도가 거칠어지면 바닷물이 스며들어왔다. 늘 악취가 나고 습도가 높은, 너무나 비위생적인 곳이었다. ······ 밤에 눈을 붙이려고 해도 계속 땀이 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영화를 능가한 하시마 섬의 인간 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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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군함도>의 한 장면ⓒ CJ 엔터테인먼트

하시마에서 자행된 인간 학대는 영화를 능가했다. <군함도>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학대,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친일파 조선인의 학대와 기만을 주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섬의 학대 구조는 이보다 훨씬 복잡했다. 조선인보다 훨씬 더 심한 학대를 받는 중국인들이 있었다. 미쓰비시는 중국인들을 가장 가혹한 작업장에 투입했다. ‘지옥섬 하시마의 하루’의 또 다른 대목이다.

“이들 대부분은 납치당한 농민들이었다. 이 또한 일본 정부와 기업의 합작이었다. 미쓰비시는 중국인들을 철조망으로 둘러싼 목조 2층 건물에 가둬놓고, 재향군인을 중심으로 편성한 방위대로 하여금 총을 들고 주변을 감시하게 했다. 먹을 것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다. ······ 일본인 고자토 가쿠시는 일본인 갱부들이 먹다 남은 정어리 대가리와 뼈를 버린 곳에 중국인들이 모여들어 주워 먹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중국인들을 집중 학대하다 보니, 미쓰비시는 이들이 조선인들한테 접근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한·중 연합 폭동을 겁낸 것이다. 그래서 두 민족의 숙소를 섬의 이쪽과 저쪽에 배치하고, 양쪽 노동자들의 접촉을 철저히 금했다.

이 때문에 작업환경이 극도로 열악한 장소가 아니면 한·중 노동자들이 접촉할 수 없었다. 극도로 열악해서 안전사고가 우려되는 작업장에는 일본인들이 투입되지 않았으므로, 그런 곳에서만 한·중 노동자들이 마음 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처럼 인간 이하의 조건에서 강제노동을 시켜놓고도 미쓰비시는 월급마저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순진한 종업원한테 “내가 월급을 저축해놓을 테니 너는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는 악덕업주들이 있다. 미쓰비시는 그런 악덕업주였다.

“회사측은 용돈도 안 되는 월급을 주고 나머지는 고향에 송금한다고 했으나, 고향의 가족들 대부분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회사는 저축을 강요하기도 했는데, 통장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나중에 돌려주지도 않았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탈출이나 집단 저항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속의 군함도 노동자들도 섬에 위장 잠입한 광복군 박무영(송중기)의 지휘 하에 무기를 들고 집단 저항을 했다.

하지만 실제의 군함도 노동자들은 그럴 힘이 없었다. 탈출을 시도한 사례는 있지만, 집단 저항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죽음을 각오해야 그런 일을 할 수 있는데, 죽음을 각오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하시마에서 조선인이 반격하거나 쟁의를 일으켰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고 ‘지옥섬 하시마의 하루’는 말한다. 죽음을 각오할 분노심마저 상실시킬 정도로 참혹한 지옥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시마 해저탄광은 일터가 아니라 범죄현장이었다. 일본 정부가 미쓰비시를 앞세워 아시아인들을 강제동원해 인간 이하의 노동을 강요한 범죄 현장이다. 이런 범죄 증거를 일본은 세계유산이라며 내놓았다.

일본 정부의 말처럼 하시마는 정말로 세계유산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악랄한 인간 학대를 증명하는 세계유산이다. 그런 범죄 증거물이 나가사키 반도 앞에 둥둥 떠 있다. 은폐도 할 수 없는 확실한 범죄 물증이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이다. 

<2017-07-2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기록으로 본 ‘실제 군함도’, 영화보다 끔찍해 볼 수가 없다

※ 참고기사

[저널리즘]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1~9화

※ 참고영상 
<해방 70년, 나는 싸우고 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소리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유산’의 진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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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 기본 권리도 보장하지 못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외치는 진실과 정의는 무엇입니까?

화, 2018/08/28-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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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순 변호사님께

저는IDS피해자입니다

IDS홀딩스사건을 검색해보시면 제2의조희팔사건이라고 나옵니다.

김성훈은 무허가유사수신회사를 설립해 1만여명의 불특정다수의 투자자로부터

1조원등을 챙긴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2심 재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정만순변호사님

김성훈은 사기꾼입니다.

감방동기와 말도안되는 변제안을 만들어서 피해자들을 현옥시키는 머리좋은 사기꾼입니다.

피해자들중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피해자들을 도와주셔야죠.

IDS홀딩스사건을 제대로 봐주시고

파산사건을 다시한번 생각해주세요.

 

 

 

 

수, 2017/12/0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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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9/21-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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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소장을 지낸 한상범 교수님이 지난 10월 15일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교수님은 2001년 2월부터 2003년 9월까지 연구소 2대 소장을 지내셨으며 2002년 4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끝으로 공식적인 대외활동은 거의 못하셨다. 그 이유는 갑자기 찾아온 병마 때문이었다.
선과 악의 문제에 있어서는 조금의 주저함이 없으셨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본질을 꿰뚫어 설명하셨던 교수님, 실천하지 않고 현학적인 수사만 늘어놓는 지식 장사꾼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시던 교수님을 더 이상 뵙지 못함이 안타깝다. 연구소 소장님으로 2년 남짓 모셨던 인연으로 몇 가지 교수님과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나마 고인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1991년 창립부터 10년 동안 봉사해온 김봉우 초대 소장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갑자기 소장 직을 그만둔 후 후임 소장 물색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조문기 이사장님께서 신의 한 수처럼 모셔 온 분이 바로 한상범 동국대 법대 교수님이었다. 연구소로서는 천군만마요 야구로 치면 믿을만한 구원투수의 등판이었다. 왜냐하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법학계에서 한교수님만큼 친일청산의 중요성을 역설한 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1년 <한국법학계를지배한일본법학의유산>을 발표해 법학계의 일제잔재청산을 공개적으로 문제화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의 법문화와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일제잔재 무엇이 문제인가>등 제목만보면연구소가 펴낸책 이라고해도 믿을정도로 한교수님은 친일청산문제에 남다른 관심과 대안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게다가 <박정희, 역사법정에세우다><전두환체제의 나팔수들>에서 볼수 있듯이 독재와 불의에 대해서는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분이었다. 그야말로 준비된 구원투수의 등장이 아닐 수 없었다.

연구소 소장 재임 시절 술을 전혀 안 하시는 이유를 여쭤보니 1980년대 초 평생 마실 술을 다 드셨다고 한다. 이유인즉 신군부 시절 불법으로 연행당해 며칠 동안 고초를 겪고 난 뒤 울화가 치밀어 매일 밤 독주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법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무법이 횡행하는 시절을 살아내기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복기, 김기춘, 우병우 등 시대를 막론하고 늘 ‘법꾸라지’들이 난무했기에 교수님은 ????화있을진저 너희들 법률가여????라는책을펴내서법기술자들을질타했다.
또한 법 문구를 어렵게 만들고 난해하게 표현하여 특권층의 도구로 삼아선 안 된다며 <한글헌법 노트><한자숭배 나라망친다>는책을 펴내기도했다.법학자로서보기 드문 한글 사랑으로 한교수님은 ‘외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번은 재일교포 단체 초청으로 일본을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다. 독재시절 민주화운동을 했던 재일교포들과 양심적인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한교수님은 원고 없이 유창한 일본어로 잠시 강연하시더니 곧바로 “나는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자격으로 왔으므로 이제부터 한국말로 연설하겠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신다. 실용에 앞서 자존을 중시하는 태도였다.
민족적 자존 나아가 인간의 존엄은 개성 출신으로서 6·25의 참화를 처절하게 겪어낸 한교수님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다. 따라서 인간 존엄을 해치는 체제에 대한 본능적 저항은 한교수님에게는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교수님은 멀리 지방 출장길은 물론이거니와 가까운 외출 때도 늘 작은 책을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시집일 때가 많다. 한번은 나에게 “시인 중에 누굴 좋아하시나?”라고 물으시며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은 시와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셨다. 사회적 모순과 싸운답시고 자칫 거칠고 메마를 수 있는 감정을 다독이며 사회운동의 초심을 지키라는 조언이셨을 것이다.
지방 출장 중에 부득이 한방에서 묵어야 할 때도 전혀 개의치 않으시면서 늦은 시간까지 당대 인물들에 대한 평을 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당시 평판에 올랐던 인물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명박근혜 정권 때 중용되어 지금까지도 몇몇은 여전히 악명을 떨치고 있다.(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그 인물평들을 녹음해 두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이 밖에 서울 문래동 박정희 흉상 철거로 나를 포함해 여러 명이 재판을 받을 당시, 법정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법적, 역사적으로 박정희의 악행을 거론하며 흉상 철거는 정당하다고 저항권의 입장에서 무죄를 주장하던 한교수님은 피고인석에 선 우리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셨다.
이제 연구소는 1991년 창립 이래 터 잡고 활동하던 동대문시대를 접고 용산시대를 연다. 동대문시대에 〈친일인명사전〉 발간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성취했다면 용산시대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과 대중화라는 또 다른 과제를 안고 있다. 동대문을 떠나며 가장 어려운 시절 연구소 2대 소장으로서 큰 역할을 해주셨던 한상범 교수님이 더욱 그리워진다.
“국가보안법? 허~ 참나. 머릿속의 생각을 벌주는 나라가 어딨어?”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18/01/09-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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