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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를 벗어난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제자리 찾기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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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를 벗어난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제자리 찾기 원해

익명 (미확인) | 금, 2017/07/28- 14:37

인터뷰 ∷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조근송 명예회장

정리 :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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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준 열사의 외손자인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조근송 명예회장

 

우리 연구소는 헤이그 특사 110주년을 맞아 이준 열사의 집터 위치가 ‘안국동 152 및 153번지’였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하고 종로구청을 통해 표석신설 신청서를 제출한 결과, 지난 3월에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의 심의를 거쳐 표석설치 결정을 통보받았다.
이 자리가 1907년 헤이그특사의 출발지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준의 아내 이일정이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상회를 개설하여 운영했던 곳이라는 공간적 의미가 모두 고려된 결정이었다. 이준 열사 순국 110주년이 되는 7월 14일 해당 표석의 설치 제막식이 거행될 예정인데, 이에 앞서 이준 열사의 유족 대표인 조근송(趙根松) 이준열사기념사업회 명예회장과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문 : 어려운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조근송 선생님은 이준 열사의 외증손이신데, 가계에 관한
개괄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답 : 이준 할아버님은 어렸을 때 아버님과 할아버님 두 분 모두 돌아가시는 바람에 큰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셨는데, 외롭게 크신 분이기 때문에 정이 많고 또 혼자이시기 때문에 깐깐한 면도 계셨다 그래요. 저의 증조부 조시범(趙時範)과 이준 할아버지는 같은 서당에 다니던 학동이었습니다.
고향인 함경남도 북청에서 일찍 장가를 들어 태어난 분이 따님 한 분과 아드님 한 분인데, 맏딸이 저의 할머님 이송선(李松鮮)이예요. 그 할머니 이름의 ‘송’자를 따서 제 이름에 붙였다고해요. 아들 이름이 이종승(李鍾乘)인데 이용(李鏞)으로도 부르죠. 그리고 서울에서 또 한 부인을 얻었는데 이분이 이일정(李一貞) 여사입니다. 이분 슬하에 이종숙(李鍾肅)이라는 따님한 분을 두었습니다. 어릴 때 사직동에 계셨는데 맨날 놀러도 가고 용돈도 얻고 그랬습니다. 이분들은 눈이 잘 안 보이는 병을 얻어 고생이 많으셨어요.

문 : 유족들의 근황은 어떻습니까?
답 : 저의 집 쪽으로 아버님 조윤(趙潤)은 1971년에 돌아가셨고, 제 위로 형님이 세 분 계셨는데 다 돌아가셨어요. 누님도 두 분 다 돌아가시고 여동생 한 사람이 남아 있어요. 이용 할아버지 쪽은 이열(李洌)과 이활(李活) 이렇게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준 열사의 친손자들은 지금 전부 이북에 있습니다. 그 후손이 있는 걸로 알고 있지만 정확히 파악이 안 되니까 심지어 이산가족 상봉 신청도 하고 싶은데 못하고 있어요.
이종숙 할머님 쪽으로 유성천(柳星天)이라는 따님 한 분이 계셨으나, 지난 2011년에 돌아가셨어요. 이 아주머니 밑에 아들 둘하고, 딸 하나가 있죠. 이종숙 할머니의 사위가 문화공보부장관을 지낸 이규현(李揆現) 씨예요.

문 : 이준 열사의 집터에 관해 따로 전해 들으신 얘기가 있는지요?
답 : 안국동 집터 위치는 옛날 아버님이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이준 할아버지가 이곳에 계실 때 민영환 선생과 교류가 많았다고 그래요. 집들이 서로 먼 거리도 아니었는데 그 집안을 너무 잘 알고, 민영환 선생이 자결하실 때 상하이에 계시다가 급거 귀국하셨대요. 집에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민충정공이 자결하신 그 칼을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셨는데 그 칼이 헤이그로 가실 때 없어졌답니다.

문 : 선생님께서는 원래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답 : 저야 뭐, 이공계 전자 쪽을 나와서 금성사 중앙연구실에 있었죠. 디지털파트예요. 하나의 에피소드를 말하면 학생들이 사용하던 OMR 카드, 그 포맷을 제가 정했어요. 1980년대에 에어 스페이스 매니지먼트(공중공용관리)라고 군사용 프로그램 개발에도 관여했고요, 가상현실(VR)도 1995년도에 제가 처음 했었죠. IT쪽 일을 계속하다가 대신증권으로 옮겼어요. 당시 한국의 증권산업의 통신인프라가 취약했었는데 이 일을 담당했습니다. 지금의 증권전산망이라든가 이런 것을 안정화시키는데 힘을 기울였지요.

문 :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일은 어떻게 관여하시게 되었습니까?
답 : 헤이그에 있던 이준 열사의 유해를 모시고 오던 1963년도부터 추도식에 계속 다녔는데 이일정 할머니의 외손녀인 유성천 아주머니가 유족 대표로 하시고 나는 그냥 참여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07년 헤이그특사 100주년 기념행사 때 예전에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총무를 하고 이준 열사 유해를 모셔올 때 영정도 들기도 했던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 이준 열사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언론에 나오고 한 일이 있었어요. 그때 KBS 열린음악회에 그 사람을 유족이라고 데려다 앉혀놓고 사진도 찍고 했던가 봐요. 북청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사셨던 형님들이 그 사정을 훤히 아는데, 난리가 난 거예요. 그래서 가짜가 드러났는데, 이 문제를 따지고 항의하는 과정에서 제 이름이 노출되고 제가 이준 열사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많이 알려지게 된 겁니다. 문화공보부 자료에 보면 이준 열사 유해 봉환 때 유족들이 몽땅 모여서 찍은 사진이 있어요. 형님들 계시고, 형수들 계시고, 사직동 할머니, 성천이 아주머니, 이규현 씨도 있고, 꼬마들까지 다 있는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이 유족들이 다 모여서 찍은 것으로 유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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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준 열사 유해봉환 국민장의식 1907년 7월 순국한 후 56년 만인 1963년 9월 30일 환국한 이준 열사의 유해를 모시고 10월 4일 10시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이후 현재의 수유리 묘지로 운구하여 오후 3시 30분에 하관하였다. 가운데 검은 완장 찬 여성이 이준 열사의 작은딸 이종숙.

3 이준 열사 유해봉환 당시 수유리 묘역에서 촬영한 유족 사진(1963.10.4) 사진의 앞줄 가운데에 선 남자 아이가 인터뷰 당사자인 조근송 명예회장이고, 바로 뒤쪽에 이준 열사의 따님(이종숙), 그 오른쪽에 부친(조윤, 두건 차림)과 모친이 나란히 서 있다. 다시 왼쪽으로 이준 열사의 외손녀(유성천)와 그 부군(이규현, 검은 넥타이 차림)의 모습이 보인다.

 

문 : 이준열사기념사업회의 현황은 어떻습니까?
답 : 1946년도에 이준열사기념사업회가 시작될 때 함태영(咸台永) 선생이 초대 회장을 하셨어요. 이분이 이준 열사보다 연세 차이는 많지만, 같이 법관양성소 출신이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회장을 맡으셨습니다. 1945년에 해방이 되고 이준 열사의 아들인 이용 장군이 북쪽에서 못 빠져 나왔고, 소련군 점령하에 있다가 이듬해 5월에 월남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남에 와서 7월 14일 순국일에 제사를 지낼 때 이준열사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답니다.
그 이후 김창숙 선생 등 여러 저명인사들이 기념사업회를 이끌었는데, 여러 가지 논란이 있는 이갑성 씨와 같은 경우에도 제가 어렸을 때 많이 봤고, 꼿꼿하고 마르게 생긴 윤치영 같은 이도 기념사업회 일을 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친일행적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제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어쨌건 이렇게 왔는데 근년에 기념사업회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어요. 지금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사람은 전재혁 씨라고 정보기관 출신인데 용공이니 반공이니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해요. 또 깜짝 놀란 게 안두희를 열혈청년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난 당신하고 일 못 한다 강력 반발했더니 이준열사기념사업회는 유족이 필요없다, 이런 식으로 나와요. 그래서 보훈처에도 얘기했지만 사단법인 내의 문제이니까 방법이 없다 이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스스로 기념사업회를 나가는 것은 반대입니다.
현재 명예회장이고 제가 들어가겠다는 것은 자기들이 인정했으니까 말이죠. 회장은 2, 3년을 하고 넘기는 것이 보통인데, 이 사람은 벌써 만 10년이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문 : 이준 열사의 아드님이신 이용 장군에 대한 말씀을 좀 들려주시죠.
답 : 1907년에 이준 열사가 돌아가셨을 때 그 충격으로 큰 따님인 저희 할머님(이송선)이 식음을 전폐하시다가 불과 1년 만인 1908년에 스물여섯 나이로 일찍 세상을 뜨셨어요. 그래서 아버님은 만 두 살짜리로 북청 외가에서 컸는데, 그때 이용 장군이 안아서 키우다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버님한테서 이준 할아버지보다는 이용 할아버지 얘기를 더 많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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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40년대 찍은 이준 열사의 아들인 이용 장군(가운데)과 그의 아들 이활(왼쪽), 이열(오른쪽) 사진. ⓒ 조근송

이분이 하신 일은 대한민국 무장투쟁사를 다시 적어야 할 정도예요. 청산리전투 때 홍범도 장군 밑에서 중대장을 하셨습니다. 이용 장군은 김경천 장군과 더불어 고려혁명군의 사령관으로 그분은 동부사령관이고, 이용 장군은 북부사령관을 맡으셨어요. 북만주사관학교 교장도 하셨지요.
그리고 이용 장군에 대해서는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때 평양에 올라가서 북한하고 붙었다고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건 조금 달라요. 제가 듣기론 이용 할아버지가 밤에 몰래 종로 쪽에 사시던 아버님을 찾아와서 “여기 있으면 죽는다, 나 오늘 북한으로 간다.”고 하시면서 “내가 장개석을 만나고 그런 다음에 다시 온다. 지금은 몸을 피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셨답니다. 집에 사진이 한 장 있는데, 음력 5월달에 김우송(金又松)이라는 할아버지의 생신 때 찍은 건데, 이걸로 보면 아버님 말씀대로 7월초에 북한으로 넘어간 것이 맞습니다.

문 : 이준 열사 기념관 건립 등 현양사업이 현재 추진되고 있나요?
답 : 이준 열사와 관련한 기념시설은 아직 국내에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고요, 헤이그에 있는 것도 운영에 어려움이 있다고 해요. 이걸 서로 합해야 하는데 관계도 이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념사업회 쪽에서 이런 기념관을 마련하고 통합에 앞장서야 하는데 사정은 그렇지 못합니다. 원래는 기념관 건립뿐만 아니라 남북교류와 이준대학 설립까지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딴 분은 몰라도 이준 열사에 대해서는 남한이건 북한이건 모두 긍정적이고 거부감이 없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거든요. 남북 합작으로 비무장지대 안에 이준대학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지난 정부에서 어디 들어줘야 말이죠.
위와 같은 내용의 대화를 끝내고 표석 제막식 때 다시 모시기로 하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연구소로 어려운 발걸음을 주시고 이준 열사의 가계에 관한 소상한 설명과 비화를 들려주신 조근송 명예회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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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2021년 상반기 특수분야 교원연수

<박물관에서 만나는교과서 사료 읽기 2 – 근대 사진 자료로 역사 읽기>

김슬기 학예실 연구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작년 교원연수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읽기>에 이어 5월14일부터 5월 16일까지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 읽기 2 – 근대 사진 자료로 역사읽기>를 진행하였다.
이번 연수는 교과서에 소개된 식민지역사박물관 소장 자료 중에서도 사진에 초점을 맞추었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 자료를 직접 보고 활용법을 토론하며 교과서에 실릴 새로운 사료 발굴 차원의 다양한 사료 소개와 역사부교재 개발을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기존40명의 참가인원을 계획하였으나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연장됨에 따라 인원을 간소화하여 24명의 교사가 참여하였다.
5월 14일(금) 진행된 첫 강의 「사진엽서에 담긴 식민지 조선과 근대 표상」은 권혁희 강원대 교수가 강사로 나섰다. 교과서나 다른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많은 사진엽서를 제시하며 당시 일본 제국이 조선인을 야만적이고 미개한 모습으로 보이도록 의도를 담아 촬영하여 제작·보급했음을 상기시켰다. 특히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관광 상품화하여 그 홍보 수단으로서 사진엽서를 적극 활용하였던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평한 참가자들이 많았다. 이어진 강동민 자료팀장의 실습 시간에는 이러한 근대 사진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사이트를 소개하고 직접 접속해 보여주어 참가자들로 하여금 수업시간에 사진을 활용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5월 15일(토)의 첫 번째 강의 「사진자료에 담긴 근대사의 공간과 사건」에서는 이순우 자료실 책임연구원이 근대시기 어떻게 사진 기술이 등장하고 보급되었으며 그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짚었다. 이후 교과서에 활용된 근대시기 사진의 오류, 잘못 알려진 사진들의 원출처를 발굴해낸 과정 등을 통해 잘못된 출처인용의 교육적 위험성과 출처 확인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였다. 
당일 두 번째 강의인 「사진과 삽화로 본 식민지 여성의 삶 -신여성과 일본군‘위안부’ 사이-」는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위안부’센터의 박정애 연구위원이 강사로 참여했다. 교과서에서는 신여성을 구여성이라는 비교대상을 전제로 하여 개화기의 새로운 문화와 패션을 접한 모습으로만 소개할 뿐 신여성들의 풍성한 작품 활동이나 사회 참여는 다루지 않는 모습을 꼬집었다. 또한 여전히 교과서에서 일본군‘위안부’를 피해자다움이 담긴 전형화된 모습으로 소비하고 있음을 짚으며 더욱 다면적인 접근과 풍성한 사례 소개가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이어진 실습 시간에는 노기 카오리 학예실 선임연구원이 직접 참여했던 일본군‘위안부’ 지도 제작 사례를 발표하고 직접 교사들이 지도를 그려보는 시간을 갖게 함으로써 일본군‘위안부’ 지도 제작의 의의를 깨닫고 교육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마지막 날인 5월 16일(일)은 김민철 연구위원의 강의 「일본군경의 사진첩 속 무단통치의 실상」으로 문을 열었다. 일본군경의 사진을 통해 헌병경찰제와 총독의 의미를 짚고, 당시 유생들의 일기를 통해 일본군경을 통한 무단통치는 곧 폭력지배의 일상화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강의 「사진에 담긴 식민지 조선의 농촌과 농민의 삶」은 이송순 고려대 교
수가 맡았다. 조선 농촌과 농민의 삶을 통해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성을 설명하며 토지조사사업과 농촌진흥운동을 실시한 일본 제국의 의도를 보여주었다. 또한 수많은 사진을 통해 당시 농촌과 농민의 삶을 더욱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모든 강의를 마무리한 후 김승은 학예실장의 인솔 하에 앞선 강의들에서 소개된 박물관 전시 자료들을 관람하고 실물 자료를 통해 강의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시간을 가졌다.
코로나에 더해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자리를 지키고 반짝이는 눈으로 강의에 집중하던 모든 참가자들과 함께 교원연수를 알차게 끝마쳤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올 하반기에도 교과서에 수록된 박물관 소장 자료를 중심으로 특색 있는 교원연수를 기획하고 있다. 관심있는 교사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

수, 2021/06/02-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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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화 <광대 : 소리꾼 감독판> 조정래 감독

 

인터뷰 :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의 흥과 한이 다시 울려 퍼진다. ’ 작년 7월, 코로나19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독창성과 풍부한 볼거리로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영화 <소리꾼>이 <광대>라는 이름의 ‘감독판’ 영화로 다시 돌아온다.
감독판이니 만큼 이전 개봉작에서 다루어지지 못한 서사들이 과연 어떤식으로 가미되었을지, 연출자의 시선을 따라 가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포인트다. 연구소에서는 오는 9월 전격 재개봉을 앞두고 전국을 돌며 시사회를 진행하고 있는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의 조정래 감독을 만나 보았다.

● 개봉 1년여 만에 ‘감독판’으로 다시 돌아왔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나?

● 일단 나부터가 판소리 고수(鼓手), 즉 국악인 출신이다. 인간문화재이신 정철호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이수자 자격까지 얻었다. 대학교 시절 영화 <서편제>를 보고 국악에 빠져들기 시작했는데 거의 미쳐있다시피 했던것 같다. 졸업 후 ‘바닥소리’라는 단체를 만들고 전국으로 공연을 다닐 정도였
으니까.(웃음) 어쨌든 대학교 때 판소리를 주제로 한 단편시나리오를 하나 구상했는데 그게 바로 이 영화의 모태가 된 ‘회심곡’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다. 영화 <귀향> 역시 판소리와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나눔의 집’과 수요집회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판소리 공연을 나가게 되면서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판소리는 영화감독인 나 스스로의 서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콘텐츠다. 이런 판소리를 주제로 한 영화 <소리꾼>, 게다가 그걸 감독판으로까지 선보일 수 있게 됐으니 감회가 남다르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기존 개봉작에 비해 소리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장면이나 음성, 관련 이야기들이 다수 살아났다.

● 영화 기획단계에서는 ‘남북합작영화’로 추진되었다고 들었다. 특별한 준비과정이 있었을 것 같은데?
● ‘남북합작’이라는 키워드는 이 영화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데 중요한 포스트를 차지한다. 제작 초기 단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서울과 평양 동시개봉을 준비했을 정도다. 지금이야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지만 영화를 기획할 2018년 당시만 해도 평창올림픽과 4.27 판문점선언을 계기로 남북 간의 평화
무드가 펼쳐지던 시기였다. 나 역시 그 바람을 타고 그해 11월 당시 김덕룡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방북단에 함께했었는데 바로 그때 영화의 북한 로케이션 기회를 얻게 됐다. 방북 기간 내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준비해간 <광대> 제작계획과 시나리오 등을 소개하고 다녔는데 다행히 북측 주관 단체에서 관심을 가져줬다. 어느 날 새벽 호텔로비로 나오라고 하더니 시나리오를 소개해보라고 하더라.(웃음) 그후로 남북합작영화 계획이 급물살을 타게 됐고 귀국 후에는 협의를 진행해보자는 연락이 북측으로부터 왔다. 그때가 2018년 12월경이었다. 협의는 중국 북경에서 남북 측 관계자가 만나 이뤄졌는데 우리가 쓴 제작 계획서를 북한 측에서 따져보고 실행 가능한 부분을 검토하는 형식이었다. 협
의 과정 내내 북측은 대단히 진중한 태도로 임했다. 단 한 줄도 그냥 넘어가는 일 없이 꼼꼼하게 묻고 가능 여부를 검증하더라. 시나리오의 취지는 물론이고 촬영 장소는 어디로 하는지, 어떻게 이동하는지, 엑스트라는 어떻게 지원하는지 등등 … 합의서만 해도 10번은 수정한 것 같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오히려 이런 꼼꼼하고 진지한 북측의 태도 덕분에 이 영화의 남북합작이 성사될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래서 영화 촬영기간 중 보름에서 한 달 정도를 북측에서 촬영하고 엑스트라까지 지원받기로 합의됐었다. 다만 영화 메인 캐릭터 중 한 명을 북측 배우로 하자는 제안은 거절당했다. “북한에서 영화는 사상이란 말이오!” 라며 단호히 거절하더라. (웃음) 아참, 이 만남은 물론 통일부의 정식허가를 받고 이뤄진 것이다. 귀국보고도 꼼꼼히 했다.

영화 <광대 : 소리꾼 감독판> 포스터

● 그러나 2019년 하노이 북미회담 이후부터는 남북관계가 급속히 얼어붙었다. 영향을 받았을 것 같은데?

● 맞다. 개인적으로도 제일 아쉬운 부분이다. 하노이 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야심차게 기획했던 북측 촬영이 무산됐다. 최대한 남북합작영화로 완성을 시키고 싶었기에 긴장이 완화되는 시점을 기다려보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속절없이 시간이 가고 2019년 여름이 지나면서부터는 더 늦어져서는 이도저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결국 남한만을 무대로 영화를 찍게 됐다. 정말 아쉬웠다. 등장인물들이 한반도 강산을 방랑하는 로드무비적인 느낌이 중요했는데 남쪽의 풍경만으로 묘사해야 했으니. 최후의 수단으로 북측에 사전 답사를 가서 촬영한 영상(주로 자연을 소재로 한)이라도 써보려 했는데 그 시도조차 무산됐다. 아무리 자연풍경이라지만 남북관계가 워낙 안 좋은 상황인지라 북한과 관련된 어떤 것도 담을 수 없었다. 색안경 낀 여론몰이에 당할 수도 있고 영화 흥행에도 타격을 받을 거라는 우려들이 많았다. 괴로웠다. 주위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의 의견이기에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었던 거다. 그래서 2020년에 개봉한 <소리꾼>은 감독 입장에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물론 영화의 작품성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코로나 때문에 흥행은 잘 안됐지만. (웃음) 동경국제영화제, 스
페인 한국영화제, 중동한국영화제 등에 개막작으로 초청됐고 배우들의 연기력도 주목받았다.

● 말이 나온 김에 감독판 <광대>와 기존 개봉작 <소리꾼>의 차별점을 이야기해 달라

● 아까 잠시 언급했지만, 기존 개봉작에서는 담지 못한 사전답사 영상, 북한의 자연풍경 영상들이 이번 감독판에는 전부 녹아들어 있다. 사전답사 당시 묘향산부터 황해도를 돌면서 북한의 풍광명미(風光明媚)를 찍어놨었는데 그걸 잘 편집하여 영화의 배경으로 대폭 활용했다. 이런 측면에서 <소리꾼>은 감독판인 <광대>에 와서야 ‘남북합작’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 이 영화를 봤을런지 잘 모르겠으나 만약 볼 수 있다면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을 봐줬으면 좋겠다. 또 하나의 차별점은 비주류의 이야기, 즉 기존 영화에서 생략됐던 조연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났다는 점이다.
한 예로 <소리꾼>의 광대패들에 대한 이야기를 완결성 있게 보강했다. 그리고 한국판 레미제라블 같
은 느낌을 조금이라도 살려보고자 민중의 저항적 측면, 혁명적이고 반봉건적 요소도 조금 강화시켰다. 물론 이런 부분들은 재촬영을 한 것이 아니라 기존 개봉작에서는 생략됐던 부분을 최대한 살린 것이다. 배우들, 이유리 씨나 김하연 양(아역배우)이 노래하는 장면도 좀 더 추가했다. 그러다보니 러닝 타임이 좀 길어졌는데 시청각적 감상이 풍부해지고 서사의 흐름을 빠르게 하는 것으로 보완해보려 했다.

● 감독판 개봉을 맞아 공개할 수 있는 촬영 에피소드가 있다면?

● 2020년 개봉 뒤에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 ‘학규(극중 주연)’가 피투성이의 몸으로 최후의 판소리를 하는 장면을 많이 말씀해주시더라. 실제로 그 장면은 현장에서도 굉장히 깊은 울림을 줬다. 괴산에 있는 세트장에서 촬영했는데 매서운 겨울 날씨로 입과 손이 얼어붙은 상황에서도 배우들이 완전히 몰입해줬다. 영화상 어떤 사운드 효과도 주지 않고 오로지 현장음만으로 소리를 전달한다는 원칙으로 촬영했기에 ‘학규’ 역을 맡은 이봉근 배우로서도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혼신을 다해 소리를 내줬다. 그 진심이 전해졌던지 당시 세트장에 있는 배우와 스텝들이 그 장면을 촬영하며 모두 울었다. 곤란했던 것은 악역들도 울고 있어서(웃음). 어쨌거나 바로 그런 혼신의 소리가 판소리의 ‘프로토타입’이 아닌가 생각한다.
극중 ‘청이(아역)’가 강물에 뛰어드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실제 시퍼런 강물에 뛰어들어야 했기 때
문에 배역을 맡은 김하연 양의 고생이 많았다. 처음에는 대역을 쓰려고 했는데 자신이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 전체적으로 배우, 스태프들의 팀워크가 좋았고 협력이 잘 이뤄졌다. 그리고 이건 영화 스토리
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에피소드인데 영화에 나오는 전통 공예품, 이를테면 괴불노리개나 복주머
니 같은 소품들은 전통공예작가인 이혜진 님, 내 아내가 직접 만든 것이다.(웃음) 아내가 미술팀 일
원으로 참여하며 많은 도움을 줬는데 한번쯤 소개하고 싶었다.

● 감독판인 만큼 영화를 통해 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 것 같다.

● 가족의 복원이다.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갈등으로 얽히고설키는 것이 아
닌, 길 위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이웃들이 점차 하나의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남북합작
의 영화를 만들어보고자 시도한 것 또한 바로 그런 지향에서다. 분단된 남북이 ‘가족의 복원’을 이루어가며 통일까지 꿈꾸는 것, 그런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북한에서 촬영한 풍경들을 이번 <광대 : 소리꾼 감독판>에 넣으면서 이런 감정은 더 절실해졌다. 북한의 자연은 아름다우면서도 이질감이 없다. 외국에 온 것 같은 낯선 느낌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어디 자연뿐이겠는가. 북한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직접 대면했을 때 느낀 감정은 그냥 ‘똑같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식, 술을 좋아하는 것, 흥 많고 신명 있는 것 … 다르고 이질적인 것은 우리들의 심리적 거리일 뿐이다. 이렇게 꼭 닮은 자연, 사람을 느끼면서 ‘가족의 복원’에 대한 꿈을 관객 분들과 공유하고 싶다.

 

 

● 조금 이른 감이 있는 질문이지만 혹시 지금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이 있는지? 있다면 간단히 소개를 부탁드리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싶다.

●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일본 홋카이도 조선인 강제노동자와 아이누족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디어는 몇 년 전, 일본 홋카이도에서 <귀향> 시사회를 통해 만나게 된 교수님으로부터 제공받았다. 그 교수님이 식민지 당시, 홋카이도로 끌려온 조선인 강제징용노동자들의 사연과 아이누족에 대한 일제의 탄압정책에 대해 설명해주시면서 꽤나 많은 사진과 자료들을 함께 주셨다. 그리고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유골이 묻혀있는 장소들과 아이누 인종연구의 현장 훗카이도대 ‘동물실험실’, 아이누 박물관 등을 안내 받았다. 일본이 조선인과 아이누 인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조선인들이 끌려간 군수공장이나 탄광 등의 실상은 어땠는지, 그곳에서 탈출하려던 조선인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
는지 등등. 그 참상이라는 게 듣기만 해도 괴로운 것이어서 참 많이도 울었다. 그렇게 아픈 감정을 느끼면서 시나리오를 써내려가게 됐고 대략적인 뼈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걸 영화로 만들려면 만만치 않은 돈이 필요할 것 같다. (웃음) 아무튼 지금은 <광대 : 소리꾼 감독판> 관련 활동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차차 구체화시켜 나갈 예정이다.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면 아마 민족문제연구소에도 종종 도움을 요청드리게 될 것 같다. 부족함이 많겠지만 회원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기대를 부탁드린다.

토, 2021/06/2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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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지금도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지뢰 !!!

 

이철민 전 고파지부장(현 파주지역신문 <파주에서> 편집위원)

 

 

지뢰 사고,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난 6월 4일(금요일) 오전 9시 50분경, 고양시 장항습지에서 습지 정화작업을 하던 50대 남성이 발목지뢰(M14) 폭발 사고로 무릎 아래가 절단되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장항습지는 람사르 습지에 등록된 생태계의 중요 지역으로 인구 100만의 고양은 물론 서울과 수도권 지역의 생물 다양성 보전과 인간의 환경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지뢰 폭발은 장항습지의 생태 보전과 정화작업을 진행하던 중 일어난 사고이기에 더욱 안타깝다.
‘지뢰’ 하면은 흔히 DMZ나 민통선 인근 군사지역에서 발생하는 사고 정도로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지뢰사고는 지금 이 순간 고양, 파주, 김포 등 수도권 일대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도 발생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휴전선 인근 지역에 지뢰가 매설된 것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으로 대량 살포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된 1964년을 기점으로 북한은 휴전선을 넘나들며 게릴라식 도발을 감행하였고, 휴전선의 철책선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이 시절 미군은 이 지역에 플라스틱 재질의 대인지뢰 M14를 대량으로 살포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우리군도 민통선 지역에 M14를 대량 살포한다.
이번에 장항습지에서 발견된 대인지뢰 M14는 강원도 화천, 양구, 인제 등 민통선 이북 지역에 매설해 놓은 이들 M14 대인지뢰가 장마와 폭우 등으로 유실되어 나뭇가지 등에 휩싸여 떠내려오다 장항습지에 가라앉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M14는 그 재질이 플라스틱이어서 폭우에 유실되면 땅으로 가라앉지 않고 나뭇가지 등과 함께 떠내려 오면서 한강 하류의 강기슭에 머무를 확률이 높다. 장항습지 지역은 하루 2회 서해안 밀물이 올라오다가 신곡 수중보에 막혀 물살이 머무는 곳으로 김포지역보다 수심이 얕아 플라스틱과 스티로폼 등 생활 쓰레기들이 갈대 및 버드나무 사이로 밀려와 쌓이는 곳이기도 하다. 민통선 지역에는 한국군과 미군이 매설한 M14 이외에도 북한군의 목함지뢰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목함지뢰는 평화의 댐, 화천댐, 소양강댐, 팔당댐 등 강물의 낙차가 심한 댐을 거치면서 목함지뢰 내부의 폭발장치가 분해되어 한강 하류에 이르면 나무상자만 떠내려 올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이에 비해 플라스틱 재질로 가볍고 작은(지름 4.5센티, 두께4센티 정도) M14는 폭우에 유실되어도 분해되지 않고 떠내려와 갈대밭이나 버드나무 가지 등에 걸리거나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다음은 최근 2년 동안 발생한 M14 지뢰사고 내용이다.

2019년 8월 29일 : 김포 해병 2사단 담당 장교(중위)가 철책선 바깥 갈대 제거작업 수행 중 지뢰폭발사고로 왼쪽 발목 절단

2020년 7월 4일 : 김포대교 상류 고양시 한강변에서 낚시하던 시민 지뢰폭발 사고로 다리 절단

2020년 9월 10일 : 강원도 인제군 12사단 이모 중사 수해복구 철책작업을 수행하던 중 지뢰폭발 사고로 발목 절단

2021년 6월 4일 : 고양시 장항습지 정화작업 중 민간인 지뢰폭발 사고로 오른쪽 발목 절단

가장 넓은 지역에 매설된 대인지뢰, M14

우리 국민들은 지뢰 폭발 사고가 발생하면 북한군의 짓으로 알고 있으나 지뢰 폭발사고의 90% 이상은 미군과 한국군이 매설한 대인지뢰에 의한 것이다. M14 대인지뢰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서 생산되어 DMZ 지역의 남방한계 철책선이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던 시기에 북한군의 DMZ 도발을 방어할 목적으로 약 1,300개소에 약 40만 발을 매설하여 놓았다. 한마디로 한반도 곳곳이 지뢰밭이 되어버린 것이다. 1960년대에는 미군이, 1970년대에는 한국군이 주도적으로 매설한 이 지뢰는 폭우가 내리면 빗물을 따라 강과 바다로 떠 내려와 무고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괴물이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군인과 민간인 지뢰사고자 약 6,000여 명 중 90%가 M14 대인지뢰 폭발사고 피해자이다. M14 대인지뢰는 누군가 제거하지 않는 이상 혼자서 없어지지 않는다. 

 

민통선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지뢰 매설 경고판(한국지뢰제거연구소 제공)

핵과 더불어 20세기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유해한 무기 중의 하나이다. 대인지뢰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던가 다리를 절단시키거나 동물의 목숨을 앗아가야만 자신도 소멸되는 아주 비열한 살상 무기이다.
현대식 첨단 무기의 발전으로 대인지뢰가 적의 침투를 저지하는 효과는 거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북한군이 휴전선을 넘나들며 도발하던 1960년에는 대인지뢰가 적의 침투를 저지하는 효과가 높았다. 그러나 이제 대인지뢰는 전방에 근무하는 우리 군장병, 그리고 후방 국민들의 목숨과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대인지뢰 전면 사용금지 협약에 가입해야 지뢰는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1983년 12월 특정 재래식 무기의 사용금지 및 제한에 관한 협약(CCW 제1의정서)에는 가입하였다. 그리고 1996년 9월 재래식 대인지뢰 전면 사용 금지 협약이 ICBL(국제대인지뢰금지운동)에 의해 발효되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와 미국은 북한과 군사적 대치 상황을 이유로 이 협약에는 가입을 유보하고 있다.
국내의 대인지뢰 금지운동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가 주축이 된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가 국내 대인지뢰 피해자 실태 조사와 특별 보상법을 추진하고 있으나 국방부의 비협조로 법 제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뢰 문제는 이제는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특히 민통선 지역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파주는 지금도 지뢰의 위험이 상존하는 지역이다. 지뢰 폭발사고의 근본적 해결책은 개인적 차원에서 조심한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다. 지뢰 문제를 공론화하고 여론화하여 군과 자치단체는 물론 지역 주민과 전문가, 정치인 등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법제화를 이루어야 비로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토, 2021/06/26-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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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과 함께하는 시민역사강좌 열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에서 주관하는 민간연계 시민대학에 3년 연속으로 선정되어 시민역사강좌를 개최하였다. 6월 29일부터 9월 14일까지 3개월 간 진행되는 시민역사강좌는 ‘프로그램Ⅰ: 내일을 여는 선언-우리시대 표상이 된 가치들과 그 역사’ 5꼭지와 ‘프로그램Ⅱ: 한일역사부정론의 궤변’ 5꼭지로 구성되며,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식민지역사박물관 5층 강의장에서 온라인 ZOOM
화상강좌로 진행하고 있다. 수강생은 일반 시민과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 등이 참여하고 있는데, 20대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 분포를 보인다.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강의지만 꾸준하게 매주 30여 명이 참여하여 시민강좌에 대한 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프로그램Ⅰ은 노동, 여성, 난민, 동물생명권, 지역을 주제로 한국현대사에서 변혁을 위해 외쳐진 각 분야의 선언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우리시대가 현재 지향하고 있는 다음 사회의 모습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8월 17일부터 진행할 프로그램Ⅱ의 기획 의도는 현재의 일본과 한국에서 나타나는 역사부정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자행된 강제동원의 문제를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을 이열치열로 이겨내려는 참여자들의 열기는 우리 사회현상의 변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시민사회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실천적 움직임으로 승화하고 있다.

화, 2021/07/27-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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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잊으면 잃고, 잃으면 잊혀질 역사와 진실

 

김지형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를 만나러 가는 길, 휴대전화를 분실했습니다. 다행히 습득하신 분과 연락이 닿아 휴대전화를 되찾았고, 효창공원앞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2시 55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치는 언덕길을 얼마나 지났을까요. 집결지인 백범기념관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인파, 행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땀에 젖은 옷깃은 축축했고, 늦은 것에 대한 무안함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민문연 선생님들께서 땀에 젖은 지각생을 친절히 안내해주셨고, 기쁘게도 행사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건네주신 생수로 목을 축여 더위를 씻어낼 수 있었고, 진중함에 위트까지 더해진 해설에 금방 몰입되어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탐방의 시작은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역 앞이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의 삶과 같이 위엄과 담대함이 느껴질 만큼 커다란 묘역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은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왕릉처럼 거대한 무덤 속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이지만, 그분은 지금도 자신의 호(號)처럼 평범하게, 민중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함께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습니다.
백범 선생님께 묵념을 드리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께서 잠들어 계신 묘역 앞에 섰습니다. 그분들께서 민족을 위해 손에 쥐었던 총과 폭탄의 중압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오히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울 수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숙연함만이 느껴졌습니다.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희생하신 그분들 앞에 이외에 어떤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는 허묘 안에서 넋으로만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분은 민족에 긍지와 독립 열망의 불씨를 쥐어 주셨지만, 후손인 우리는 그분의 유해 한조각도 찾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탐방 중 가장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임정요인 묘역 앞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군무차장 조성환…….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성함만 얼핏 들어본 것이 전부인 세 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진정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한 게 맞는 것인가?” 솟구치는 부끄러움에 잠시 더위를 잊을 만큼 온몸에 한기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와 죄송한 마음입니다. 묵념을 올리며 앞으로 세 임정요인의 행보를 기억에 새기고, 감사함을 마음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탐방의 마무리는 대망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이었습니다. 입구부터 상해임시정부 정문의 모습을 본따 지어올린 계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 탐방객 모두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계단을 올랐고, 내부에는 민족의 아픔과 치욕이 기록된 일제강점기 사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목을 겨눴을 일제의 총과 칼부터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기록물까지……. 모든 것들이 슬프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민족수난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연, 소중한 공간, 하물며 소중한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적지 않은 아픔을 느낍니다. 아픔의 크기만큼 그것이 소중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비할 바는 아니나, 행사장으로 가는 길 휴대전화 하나만 잃었을 뿐인데 큰 당혹감을 느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물며 국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일까요. 형언하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일 것이며, 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잊어도, 잃어도 안 될 역사와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간담회 자리에서 부친의 강제동원 역사를 말씀하신 어르신을 뵈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어르신의 또렷하고 강인한 시선, 단단하고 꼿꼿한 어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픈 역사를 생생히 목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빛에 총기를 잃지 않으시고,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견디기 위해 어깨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고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실린 시선과 어깨를 통해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현장에 함께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저를 박물관 회원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고 뜻깊은 현장을 의미 있는 영상으로 남겨주고 촬영과 더불어 원활한 현장 진행을 위해 달려주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진행해주었고, 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준 민문연 모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 2021/07/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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