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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를 벗어난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제자리 찾기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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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를 벗어난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제자리 찾기 원해

익명 (미확인) | 금, 2017/07/28- 14:37

인터뷰 ∷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조근송 명예회장

정리 :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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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준 열사의 외손자인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조근송 명예회장

 

우리 연구소는 헤이그 특사 110주년을 맞아 이준 열사의 집터 위치가 ‘안국동 152 및 153번지’였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하고 종로구청을 통해 표석신설 신청서를 제출한 결과, 지난 3월에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의 심의를 거쳐 표석설치 결정을 통보받았다.
이 자리가 1907년 헤이그특사의 출발지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준의 아내 이일정이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상회를 개설하여 운영했던 곳이라는 공간적 의미가 모두 고려된 결정이었다. 이준 열사 순국 110주년이 되는 7월 14일 해당 표석의 설치 제막식이 거행될 예정인데, 이에 앞서 이준 열사의 유족 대표인 조근송(趙根松) 이준열사기념사업회 명예회장과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문 : 어려운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조근송 선생님은 이준 열사의 외증손이신데, 가계에 관한
개괄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답 : 이준 할아버님은 어렸을 때 아버님과 할아버님 두 분 모두 돌아가시는 바람에 큰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셨는데, 외롭게 크신 분이기 때문에 정이 많고 또 혼자이시기 때문에 깐깐한 면도 계셨다 그래요. 저의 증조부 조시범(趙時範)과 이준 할아버지는 같은 서당에 다니던 학동이었습니다.
고향인 함경남도 북청에서 일찍 장가를 들어 태어난 분이 따님 한 분과 아드님 한 분인데, 맏딸이 저의 할머님 이송선(李松鮮)이예요. 그 할머니 이름의 ‘송’자를 따서 제 이름에 붙였다고해요. 아들 이름이 이종승(李鍾乘)인데 이용(李鏞)으로도 부르죠. 그리고 서울에서 또 한 부인을 얻었는데 이분이 이일정(李一貞) 여사입니다. 이분 슬하에 이종숙(李鍾肅)이라는 따님한 분을 두었습니다. 어릴 때 사직동에 계셨는데 맨날 놀러도 가고 용돈도 얻고 그랬습니다. 이분들은 눈이 잘 안 보이는 병을 얻어 고생이 많으셨어요.

문 : 유족들의 근황은 어떻습니까?
답 : 저의 집 쪽으로 아버님 조윤(趙潤)은 1971년에 돌아가셨고, 제 위로 형님이 세 분 계셨는데 다 돌아가셨어요. 누님도 두 분 다 돌아가시고 여동생 한 사람이 남아 있어요. 이용 할아버지 쪽은 이열(李洌)과 이활(李活) 이렇게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준 열사의 친손자들은 지금 전부 이북에 있습니다. 그 후손이 있는 걸로 알고 있지만 정확히 파악이 안 되니까 심지어 이산가족 상봉 신청도 하고 싶은데 못하고 있어요.
이종숙 할머님 쪽으로 유성천(柳星天)이라는 따님 한 분이 계셨으나, 지난 2011년에 돌아가셨어요. 이 아주머니 밑에 아들 둘하고, 딸 하나가 있죠. 이종숙 할머니의 사위가 문화공보부장관을 지낸 이규현(李揆現) 씨예요.

문 : 이준 열사의 집터에 관해 따로 전해 들으신 얘기가 있는지요?
답 : 안국동 집터 위치는 옛날 아버님이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이준 할아버지가 이곳에 계실 때 민영환 선생과 교류가 많았다고 그래요. 집들이 서로 먼 거리도 아니었는데 그 집안을 너무 잘 알고, 민영환 선생이 자결하실 때 상하이에 계시다가 급거 귀국하셨대요. 집에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민충정공이 자결하신 그 칼을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셨는데 그 칼이 헤이그로 가실 때 없어졌답니다.

문 : 선생님께서는 원래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답 : 저야 뭐, 이공계 전자 쪽을 나와서 금성사 중앙연구실에 있었죠. 디지털파트예요. 하나의 에피소드를 말하면 학생들이 사용하던 OMR 카드, 그 포맷을 제가 정했어요. 1980년대에 에어 스페이스 매니지먼트(공중공용관리)라고 군사용 프로그램 개발에도 관여했고요, 가상현실(VR)도 1995년도에 제가 처음 했었죠. IT쪽 일을 계속하다가 대신증권으로 옮겼어요. 당시 한국의 증권산업의 통신인프라가 취약했었는데 이 일을 담당했습니다. 지금의 증권전산망이라든가 이런 것을 안정화시키는데 힘을 기울였지요.

문 :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일은 어떻게 관여하시게 되었습니까?
답 : 헤이그에 있던 이준 열사의 유해를 모시고 오던 1963년도부터 추도식에 계속 다녔는데 이일정 할머니의 외손녀인 유성천 아주머니가 유족 대표로 하시고 나는 그냥 참여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07년 헤이그특사 100주년 기념행사 때 예전에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총무를 하고 이준 열사 유해를 모셔올 때 영정도 들기도 했던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 이준 열사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언론에 나오고 한 일이 있었어요. 그때 KBS 열린음악회에 그 사람을 유족이라고 데려다 앉혀놓고 사진도 찍고 했던가 봐요. 북청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사셨던 형님들이 그 사정을 훤히 아는데, 난리가 난 거예요. 그래서 가짜가 드러났는데, 이 문제를 따지고 항의하는 과정에서 제 이름이 노출되고 제가 이준 열사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많이 알려지게 된 겁니다. 문화공보부 자료에 보면 이준 열사 유해 봉환 때 유족들이 몽땅 모여서 찍은 사진이 있어요. 형님들 계시고, 형수들 계시고, 사직동 할머니, 성천이 아주머니, 이규현 씨도 있고, 꼬마들까지 다 있는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이 유족들이 다 모여서 찍은 것으로 유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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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준 열사 유해봉환 국민장의식 1907년 7월 순국한 후 56년 만인 1963년 9월 30일 환국한 이준 열사의 유해를 모시고 10월 4일 10시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이후 현재의 수유리 묘지로 운구하여 오후 3시 30분에 하관하였다. 가운데 검은 완장 찬 여성이 이준 열사의 작은딸 이종숙.

3 이준 열사 유해봉환 당시 수유리 묘역에서 촬영한 유족 사진(1963.10.4) 사진의 앞줄 가운데에 선 남자 아이가 인터뷰 당사자인 조근송 명예회장이고, 바로 뒤쪽에 이준 열사의 따님(이종숙), 그 오른쪽에 부친(조윤, 두건 차림)과 모친이 나란히 서 있다. 다시 왼쪽으로 이준 열사의 외손녀(유성천)와 그 부군(이규현, 검은 넥타이 차림)의 모습이 보인다.

 

문 : 이준열사기념사업회의 현황은 어떻습니까?
답 : 1946년도에 이준열사기념사업회가 시작될 때 함태영(咸台永) 선생이 초대 회장을 하셨어요. 이분이 이준 열사보다 연세 차이는 많지만, 같이 법관양성소 출신이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회장을 맡으셨습니다. 1945년에 해방이 되고 이준 열사의 아들인 이용 장군이 북쪽에서 못 빠져 나왔고, 소련군 점령하에 있다가 이듬해 5월에 월남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남에 와서 7월 14일 순국일에 제사를 지낼 때 이준열사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답니다.
그 이후 김창숙 선생 등 여러 저명인사들이 기념사업회를 이끌었는데, 여러 가지 논란이 있는 이갑성 씨와 같은 경우에도 제가 어렸을 때 많이 봤고, 꼿꼿하고 마르게 생긴 윤치영 같은 이도 기념사업회 일을 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친일행적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제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어쨌건 이렇게 왔는데 근년에 기념사업회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어요. 지금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사람은 전재혁 씨라고 정보기관 출신인데 용공이니 반공이니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해요. 또 깜짝 놀란 게 안두희를 열혈청년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난 당신하고 일 못 한다 강력 반발했더니 이준열사기념사업회는 유족이 필요없다, 이런 식으로 나와요. 그래서 보훈처에도 얘기했지만 사단법인 내의 문제이니까 방법이 없다 이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스스로 기념사업회를 나가는 것은 반대입니다.
현재 명예회장이고 제가 들어가겠다는 것은 자기들이 인정했으니까 말이죠. 회장은 2, 3년을 하고 넘기는 것이 보통인데, 이 사람은 벌써 만 10년이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문 : 이준 열사의 아드님이신 이용 장군에 대한 말씀을 좀 들려주시죠.
답 : 1907년에 이준 열사가 돌아가셨을 때 그 충격으로 큰 따님인 저희 할머님(이송선)이 식음을 전폐하시다가 불과 1년 만인 1908년에 스물여섯 나이로 일찍 세상을 뜨셨어요. 그래서 아버님은 만 두 살짜리로 북청 외가에서 컸는데, 그때 이용 장군이 안아서 키우다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버님한테서 이준 할아버지보다는 이용 할아버지 얘기를 더 많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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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40년대 찍은 이준 열사의 아들인 이용 장군(가운데)과 그의 아들 이활(왼쪽), 이열(오른쪽) 사진. ⓒ 조근송

이분이 하신 일은 대한민국 무장투쟁사를 다시 적어야 할 정도예요. 청산리전투 때 홍범도 장군 밑에서 중대장을 하셨습니다. 이용 장군은 김경천 장군과 더불어 고려혁명군의 사령관으로 그분은 동부사령관이고, 이용 장군은 북부사령관을 맡으셨어요. 북만주사관학교 교장도 하셨지요.
그리고 이용 장군에 대해서는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때 평양에 올라가서 북한하고 붙었다고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건 조금 달라요. 제가 듣기론 이용 할아버지가 밤에 몰래 종로 쪽에 사시던 아버님을 찾아와서 “여기 있으면 죽는다, 나 오늘 북한으로 간다.”고 하시면서 “내가 장개석을 만나고 그런 다음에 다시 온다. 지금은 몸을 피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셨답니다. 집에 사진이 한 장 있는데, 음력 5월달에 김우송(金又松)이라는 할아버지의 생신 때 찍은 건데, 이걸로 보면 아버님 말씀대로 7월초에 북한으로 넘어간 것이 맞습니다.

문 : 이준 열사 기념관 건립 등 현양사업이 현재 추진되고 있나요?
답 : 이준 열사와 관련한 기념시설은 아직 국내에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고요, 헤이그에 있는 것도 운영에 어려움이 있다고 해요. 이걸 서로 합해야 하는데 관계도 이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념사업회 쪽에서 이런 기념관을 마련하고 통합에 앞장서야 하는데 사정은 그렇지 못합니다. 원래는 기념관 건립뿐만 아니라 남북교류와 이준대학 설립까지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딴 분은 몰라도 이준 열사에 대해서는 남한이건 북한이건 모두 긍정적이고 거부감이 없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거든요. 남북 합작으로 비무장지대 안에 이준대학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지난 정부에서 어디 들어줘야 말이죠.
위와 같은 내용의 대화를 끝내고 표석 제막식 때 다시 모시기로 하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연구소로 어려운 발걸음을 주시고 이준 열사의 가계에 관한 소상한 설명과 비화를 들려주신 조근송 명예회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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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님께 요청 드릴 사항 2가지가 있어서 게시판에 글 남깁니다.

1. 박정희가 일제때 활동했던 사진과 기록(어느 문헌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지) 그리고 해방 후 빨치산

행적에 대한 사본을(원본 명시)  우편으로  보내주실 수 있는지요?

요청 드리는 이유는 제 70 노모가 박정희(박근혜) 숭배자(일명 박사모)라 언터넷에 떠도는 사진과 기록,

뉴스 매체가 조작이라면서 신뢰하질 않습니다.

그러면서 가짜 뉴스, 개소리의 진원지인 유튜브 관련 박사모 관련 사이트는 왜 이리 신뢰하는지 참…

박정희의 친일 행적이 담긴 사진과 기록 내용, 해방 후  빨치산 행적을 공식 문서로 해 확인시켜주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제 메일로 받는 방법도 확인해 볼 수 있으나 정확한 기록에 의한 것이 더 확실한 팩트로 전달할 수 있기에

부탁 드립니다.  보내주실 주소는 제 개인 정보란의 집 주소(인천)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복사 비용 및 우편요금이 발생한다면 납부하도록 하겠습니다. )

2. 핸드폰 기기 변경으로 친일인명사전을 재 다운로드 하려는데 방법을 알려주세요.

기존 핸드폰 기기(아이폰6s plus)에서 10,000으로 구매했는데 기기 변경(LG G6)하고 다시 받으려고 하니

다시 10,000을 납부해야 받을 수 있는 것이라서… ㅠㅠ

아니면, 다운로드 받은 사람의 기기 정보와 인적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연결하여 기기 변동이나 전화번호

변경시에도 다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수정 보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월, 2017/10/09-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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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1]
팟캐스트 ‘역적(역사적폐 청산)’- 에필로그

수, 2017/10/11-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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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7/10/1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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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수리온부터 사드까지 누구를 위한 안보인가 =군의 적폐청산과 개혁방향

진행: 김미화 
출연: 김종대 정의당 국회의원,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하어영 한겨레21 기자

본 프로그램은 포럼 진실과 정의 ·민족문제연구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의 모임 ·한겨레21 ·한겨레TV와 함께 합니다. 

프로듀서: 이경주ㅣ종합편집: 문석진ㅣ타이틀: 이정온ㅣ카메라: 정동화 이규호 김도성 조성욱ㅣ메이크업 : 강도겸ㅣ기술: 박성영 ㅣ연출: 이규호
제작: 한겨레TV

※ 한겨레TV <2017.10.17>

☞기사원문: 김미화와 함께하는 스타트업 적폐청산 3화 (안보)

※ 관련영상

☞한겨레TV: 김미화와 함께하는 스타트업 적폐청산 2화 (경찰)<2017.10.10>

☞한겨레TV: 김미화와 함께하는 스타트업 적폐청산 1화 (검찰과 국정원) <2017.9.26>

화, 2017/10/17-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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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p-content/uploads/2017/10/201710.pdf

목, 2017/10/1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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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

목, 2017/10/19-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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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현 연구위원

지난 9월 21일 대법원은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장관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이로써 올해 5월 12일에 나온 서울고등법원의 판결(민족사랑 5월호 참조)이 확정되어 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를 둘러싼 친일논쟁은 사법적인 차원에서 일단락되었다.
방응모의 친일행적은 해방후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1948.9.22. 공포, 법률 제3호)에 따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다루지지 못하다가 50여 년이 흐른 뒤인 2004년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반민규명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에 의해 2009년 6월 29일 방응모의 행위들이 친일반민족행위인 것으로 결정되었다. 구체적으로 반민규명위는 그동안 밝혀진 그의 행위들이 반민규명법 제2조의 13, 14, 17호에 해당된다고 했다.


13.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
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4.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 제조업체를 운영하거나 대통령이 정하는 규모 이
상의 금품을 헌납한 행위
17.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
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방응모는 2009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랐다. 이 사전의 발간에 대해 조선일보가 11월 9일 오피니언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갉아먹는” 것이라고 하는 가운데 2010년 1월 방응모의 양자인 방우영, 방우영이 죽자 그의 아들 방상훈이 원고로 또한 이들의 회사인 조선일보사가 원고 보조 참가인으로 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냈다. 서울행정법원의 1심판결에 비춰보면 조선일보사의 일제시기 행위가 어느 국가기관에 의해서도 문제되지 않았는데도 조선일보사가 원고측에 선 이유를 약간 짐작할 수 있다. 판결에 따르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2005.12.29. 제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선정할 때 반민규명위
의 결정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고 이에 따라 “재산권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구사주의 행적과 재산상속, 언론사라는 상속된 회사의 성격과 활동, 뉴라이트, 건국절, 국정교과서 파동, 이른바 ‘역사전쟁’, ‘역사적폐’ 등 많은 것들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반민규명위는 2005년 5월 31일 발족하여 2009년 11월 30일 활동을 종료하였기 때문에 위원회의 결정과 관련된 헌법소원이나 행정소송의 수행 등은 행정자치부 산하의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이 맡게 되어 방응모결정 취소소송의 피고 역할을 하였다. 방응모의 상속자들과 조선일보사의 소송은 그 후 2010년 12년 22일 서울행정법원의 1심 판결, 2012년 1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의 항소심 판결, 2016년 11월 9일 대법원의 상고심 판결, 다시 2017년 5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의 항소심 판결과 이번의 대
법원 판결까지 6년여의 재판과정을 거쳐 5개의 판결문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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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관이 내무대신에게 전투기 제작 군수회사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주식인수에 관한 승인을 요청하면서 이 회사 유일의 조선인 감사인 방응모를 ‘경성유력자’로 표시하였다.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주식인수의 건을 승인함」(일본내무대신, 1944.10.6.) 출처: 아시아역사자료센터

 

반민규명법 제2조가 열거하는 친일행위결정과 관련하여 결국 13호에 관한 위원회의 결정만이 적법한 것으로 판결되었다. 17호 관련은 2012년의 단계에서 절차적인 이유로 위법하게 되었고, 14호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투어졌지만 역시 위법한 것으로 이번 판결로 확정되었다. 법원이 인정한 구체적인 방응모의 친일행위는 잡지 ????조광????의 발행, 여기에 논설 투고한 것, 임전대책협력회와 조선임전보국단의 간부로서의 활동에 국한되었다. 조선항공공업의 주주와 감사로 활동한 것(14호 해당)이나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직과 선전부 위원이었던 사실(17호 해당)은 반민규명법의 문구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형식적 논리로 친일이 아니라고 한 셈이다. 결국 위원회와 달리 법원이 볼 때는 방응모의 과거 행적은 일부만이 친일에 해당하는 것으로 범위가 대폭 축소되게 되었다. 어렵게 친일반민족행위규명에 관한 입법이 이루어지고 국가기구인 반민규명위가 활동했지만 사법부에 의하여 그 의미와 효과는 반감된 것이다. 이번 대법원의 기각 판결에서는 ‘심리불속행’이라고 하여 상고심 자체를 열어주지 않았다. 아쉬움을 떠
나서 친일반민족행위 규명이라는 역사적 책무를 일부 대법관들과 판사들이 배반하고 방응모에게 부분적으로 면죄부를 발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서 분노의 마음까지 든다.
이제 이해승의 친일재산에 대한 사건을 제외하고 방응모 재판이 종료됨에 따라 반민규명위와 관련된 소송들도 끝나고 친일반민족행위 문제에 대한 성찰과 실천은 다시 시민사회로 넘겨지게 되었다. 친일문제에 대한 입법, 위원회의 활동, 사법 판결에 이르는 국가의 관여가 한 바퀴 돈 지금, 시민사회측에서 식민지배와 부역협력자들이 남긴 역사적 과제들을 다시금 점검해볼 때이다.

목, 2017/10/19-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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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 28

국회프락치사건의 시작

그것은 프레임이었다. 만들어지는 순간 각인되고 부인할수록 견고해졌다.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빠져들어 온몸을 옥죄었다. 그것은 흡사 개미지옥과 비슷했다.
1949년 5월 9일 동아일보는 ‘의정 단상의 1년 회고’라는 코너에 민국당 국회의원 김준연의 글을 실었다. ‘회고’라기보다는 반대파에 대한 일방적 매도로 가득 찬 글이었다. 그는 주장했다.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협상 운운하며 5·10선거에 불참하고 대한민국의 성립을 방해했다고,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소위 ‘소장파’라 불리는 무리들이 대한민국을 부정하며 남로당의 선전방침을 추종하고 있다고. 그의 주장은 놀라웠다. 국회 내에 김일성을 추종하는 세력이 있고, 그들이 남로당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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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당 중진 김준연 의원. 1949년 5월 9일 동아일보 기고를 통해 국회프락치사건을 예고했던 그는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88구락부의 일원으로도 알려져 있다.

 

김준연이 누구인가? 일제강점기 ML파임을 숨기고 서울파 고려공산동맹의 책임비서를 꿰찬 후,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철수 몰래 당 중앙을 탈취하여 선전부장에 올랐던 자이다. 체포 후 전향하여 우익의 논객이 되었고, 동아일보와 긴밀한 연관 속에서 해방 후 민국당(한민당의 후신)의 중진이 되었다.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과거를 지우고 싶었던 것일까. 얼굴에 올라오기 시작한 검버섯처럼 그는 어느새 독기 가득한 극우 인사가 되었다.
김준연의 주장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이날 동아일보엔 심상치 않은 기사가 하나 실렸다. 최근 남로당원 3명이 검거됐는데, 그들이 소장파 국회의원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황윤원과 접촉했다는 것이었다. 남로당원들은 이들 국회의원들에게 외군(外軍) 완전 철퇴, 남북 정치범 석방, 남북통일정치회의 개최, 선거에 의한 최고입법기관 구성과 중앙정부 수립, 조국방위군 재편 등을 주장하여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 후일 남로당 7원칙으로 알려진 사항이다. 남로당원들은 국회의원들이 소속된 정당 내에서 프락치 활동을 벌이고 국회의 원들을 조종하여 남로당의 세력 확대를 꾀했다고 한다.
두 개의 글로 프레임이 완성되었다. 내부에 적이 있고 그 배후에 남로당이 있다는 프레임이었다. 실상 동아일보는 두 개의 글로 중대 사건을 암시한 셈이었다. 무속인들도 부러워할 예지능력이었다. 8일 후인 5월 17일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의원이 체포되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의 시작이었다.

 

이승만과 민국당의 연합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권은 내외 양면에서 강력한 도전에 직면했다.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도전은 공산주의자들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내부의 ‘적’도 만만치 않았다. 제도권 밖에는 김구와 김규식 세력이 건재하고 있었고, 이들과 공명하는 국회 내 ‘소장파’ 의원들이 반민법과 지방자치법, 진보적인 농지개혁법 등을 견인하며 신생 정부에 도전하고 있었다. 가장 뼈아픈 것은 반민특위였다.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의 가장 강력한 힘인 경찰력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할 수 있었다. 더구나 내각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소외당한 한민당도 야당을 선언하고 이승만 정권에 반기를 든 상황이었다. 내부의 ‘적’을 제압하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했다.
1948년 말부터 변화의 조짐이 있었다. 여순사건 이후 추진된 국가보안법 제정이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한민당과 다시 손을 잡는데 성공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초래한 위기가 두 세력을 하나로 묶는데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기꺼이 손을 잡고 극우반공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함께 했다. 1949년 들어 이승만 정권은 부분적 조각을 단행할 때마다 한민당 세력을 정부 안으로 끌어들였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다른 ‘적’에 대적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민당은 한민당대로 신익희와 지청천 세력을 끌어들여 세력 확대를 꾀했다. 이제 한민당은 민주국민당(민국당)이 되었다. 이승만과 민국당의 연합으로 전선은 명확해졌다.

11

1949년 6월 21일 이문원 등 소장파 국회의원의 구속을 보도한 기사. <경향신문> 1949.6.23.

 

정부 vs 국회

1949년 5월 21일 임시국회가 열렸다. 5일 전인 5월 16일 80여 의원들이 중대한 안건이 많다고 임시국회 소집을 요구했지만, 국회의장 신익희는 웬일인지 국회 개원을 지연시켰다. 의원들이 지방에 있다는 등의 이유를 댔지만 일부 의원들에 국한된 얘기여서 납득하기 어려웠다. 결국 국회는 시작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국회의원 3명이 구속된 후에야 국회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신문 기사를 보고 동료 의원들의 체포를 알게 된 국회의원들은 국회가 열리자마자 검찰총장 권승렬에게 체포 경위를 따져 물었다. 권승렬은 이들 국회의원이 3월 하순부터 좌익계열 인사와 내왕하는 것을 탐지하고 내사에 착수했으며, 이들이 남로당 7원칙에 동의하고 이를 남한에 적용하는 것을 협의한 혐의로 구속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권승렬의 답변은 더 큰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물적 증거 여부에 대해 답변하면서 “이 사건은 물적 증거라는 것은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마는 다소는 있습니다마는 … 없습니다마는 …” 하고 심하게 말을 더듬은 탓이었다. 사실상 증거도 없이 국회의원들을 체포했음을 은연중 드러낸 답변이었다.
더구나 당국은 구속영장이 발부된 4명의 의원 가운데 한 명을 체포하지 못했다. 황윤원 의원이었다. 지방에 있다가 체포를 피하게 된 황윤원 의원은 5월 24일 국회에 출석해서 자신의 무죄를 호소했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공산당과 열렬히 싸워왔으며 죄라면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된 죄밖에 없다고 울먹였다.
상당수의 국회의원들은 체포된 국회의원들이 실제로 국가보안법에 걸릴만한 행동을 했는지 의심했다. 당시 경찰의 자의적 공권력 행사가 드문 일이 아니었던 데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에 대한 공격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장파 의원들은 체포된 국회의원에 대한 석방 결의안을 제기했다. 격론 끝에 투표 결과는 재석 184명 가운데 가 88표, 부 95표,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재석이 184명이나 되었다는 것은 이 문제가 얼마나 첨예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석방에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지지세력 확보를 위해 역량을 총동원한 결과였다.
이후 양측의 싸움은 김준연 의원의 제명에 관한 긴급동의안 제기로 옮겨 붙었다. 김준연 의원이 석방동의안 토의 과정에서 체포 의원 석방을 요구하는 자는 모두 대한민국을 부인하는 자라고 매도한데다 5월 9일자 동아일보 기고문과 기사가 소장파를 모략하려는 모종의 음모로 읽혔기 때문이었다.
갈등은 국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5월 31일 파고다공원에서 세 의원의 석방동의안에 찬성한 88명의 의원을 적색분자로 규탄하는 ‘민중대회’가 개최되었다. 집회를 개최한 이들은 손빈과 허일 등 반민법 대상자들이었다. 이들은 연일 ‘민중대회’를 개최하며 국회를 압박했다. 동네 반장들까지 동원되어 주민들을 동원했지만 당국은 사태를 방조했다. 시위대는 6월 2일 국회가 있는 중앙청까지 행진했고, 6월 3일에는 반민특위로 몰려가 난동을 벌였다. 이쯤 되자 이들의 진짜 목적이 드러났다. 88명의 의원에 대한 공격은 표면이고 실상은 반민특위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민특위는 난동을 부린 주도자를 검거하는 한편, 이들의 배후로 밝혀진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 최운하와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을 구속했다. 최운하는 노덕술 만큼이나 유명한 일급 친일 경찰이었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움직임을 기다린 자들이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격의 빌미였다.

 

반민특위 습격, 국회의원들의 체포, 그리고 암살

6월 6일 새벽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경찰을 인솔하고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이들은 반민특위 소속 특별경찰대를 무장해제하고, 반민특위 직원들을 연행해 무자비한 린치를 가했다. 우연히 그곳을 방문했던 검찰총장 권승렬도 경찰들에게 수모를 당했다. 몸수색을 당하고 권총을 빼앗겼던 것이다. 한 의원은 경찰의 반민특위 테러를 ‘경찰의 쿠데타’라 명명했다.
국회는 분노했다. 국회는 경찰의 테러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국무총리 이하 전 각료의 퇴진, 반민특위의 원상복구를 결의했다. 그러나 친일 판사 출신인 장경근 내무차관은 국회에 출석하여 반민특위 습격이 내무부 책임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도 6월 7일 AP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특경대의 해산은 자신이 지시한 것이라고 밝혔다. 사태가 이러하자 경찰들은 반민특위 인사의 쇄신, 경찰관 신분의 보장을 주장하며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총퇴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었다. 대통령부터 일개 경찰관들까지 불법을 저지르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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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의 유해. 1949년 봄, 김구의 현실정치 참여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치테러의 피해자가 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공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국회가 폐회한 다음날인 6월 21일 체포되지 않았던 황윤원의원과 노일환, 강욱중, 김옥주, 김병회, 박윤원 의원이 추가로 체포되었다. 6월 25일에는 국회부의장 김약수가 체포되었다. 이들 국회의원의 혐의는 남로당 공작원의 회유에 넘어가 남로당에 가입하고 국회 내에서 정부 파괴 공작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국회 밖에서 발생했다.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된 것이다.

독재의 연원, 6월 공세
일련의 사건들은 명확히 하나의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극우반공체제 강화였다.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권력 기반인 경찰 조직을 뒤흔드는 반민특위를 해산시키고, 반민특위의 인적 배경이자 국회 내 반정부 중심세력인 소장파 국회의원을 체포해 세력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1949년 봄부터 부쩍 정계로 진출할 가능성이 점쳐졌던 잠재적 최대 라이벌김구를 제거했다.

이승만 정권은 반대파를 공격하는데 좌익사건을 활용하고, 관변의 힘으로 민을 동원하여 반대파에게 압박을 가했으며, 최후의 방법이라 할 ‘암살’을 시행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그 후에도 유사한 사건들을 손쉽게 목도할 수 있다. 부산정치파동이 그러하고 장면암살미수사건이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1949년 6월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은 이승만 독재의 연원이라 할만하다. 이후에 달라지는 점이 있다면 소장파 대신에 민국당이 새로운 탄압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1950년 4월에 있었던 대한정치공작대사건이 그 시작이었다. 대한정치공작대사건이란 김성수, 김준연, 백관수, 조병옥 등 민국당 지도자들이 군과 경찰에 잠입한 남파간첩들과 내통하여 선거를 방해하고,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요인을 살해하고, 정부를 전복할 음모를 꾸몄다고 조작하려다 이 사실이 들통 나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는 백성욱 내무부장관과 신태영 육군총참모장, 최영희 헌병사령관, 김병완 치안국장 서리 등 이승만 정권의 주요 인사가 관련되어 있었는데, 조작의 정도가 너무 노골적이고 저급하여 이내 들통이 나고 말았다. 이렇게 이승만 독재의 역사는 대상을 바꿔 반복되었다. 한번은 비극이었고, 한번은 희극이었다.

목, 2017/10/19-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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