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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인가, 변절자인가 – 둘로 쪼개진 ‘애국지사 김규환’과 ‘변절자 김이대’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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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인가, 변절자인가 – 둘로 쪼개진 ‘애국지사 김규환’과 ‘변절자 김이대’의 행적

익명 (미확인) | 금, 2017/07/28- 15:20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 27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 애국지사와 순국선열을 기리는 독립유공자 선정에 필수적인 자료는 매우 많다. 특히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포상을 위해 후손들의 신청을 받거나 자체 조사로 발굴할 때 독립운동 행적의 근거로 삼는 주요 문헌 중 이 글의 주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는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9), ‘통칭’ 문일민의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그리고 ‘통칭’ 김승학의 <한국독립사>를 꼽을 수 있다. 이 중 김승학과 관련한 <한국독립사>의 발간에는 우여곡절이 있어서 현재까지
1965년 9월 초판발행본(독립문화사), 1970년 6월 상·하 두 권의 증보발행본(독립문화사), 1983년 3월 단행본으로 합친 증보발행본(독립동지회) 총 3종의 ????한국독립사????가 존재한다.
다만 김승학(1881∼1964)은 ????한국독립사???? 발간을 준비하던 1964년 12월 별세해 초판본(발행인 김국보)과 상·하권 증보본 발행 당시에는 편저자(증보편집 겸 발행인 김국보)로, 세번째 증보본은 김승학·김국보 공편저자로 발간되었다.
김국보가 1983년 증보발행본의 「발간사」에 밝혔듯이, 희산 김승학은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참여 시기부터 독립운동의 역사를 남기겠다는 뜻을 품었으며 해방 후 귀국해 40여 년에 걸친 자신의 독립운동 외에도 오랫동안 수집·보관한 자료를 토대로 문일민(1894∼1968)을 발행인으로 <한국독립운동사>를 발간했다(위에서 ‘통칭’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고 국가보훈처나 관련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문일민의 <한국독립운동사>, 김승학의 <한국독립사>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 계획했던 것과 다른 점이 있어서 김승학 자신이 다시 집필하던 중 별세했고 유지를 이어 유족들이 김국보 등과 함께 작업해 1965년 초판본이 발간될 수 있었다. 국가보훈처의 경우 김승학의 <한국독립사>는 1970년 발간된 상·하 두 권의 증보본(독립문화사)을 활용하고 있다.
뜬금없이 장황하게 서지사항을 늘어놓은 이유는 총무처(현재는 국가보훈처 담당)가 1963년에 대통령표창(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이 위의 세 자료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다만 공훈자료에 기록된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은 국내의 ‘대한청년당(단)’, 만주의 동창학교·일신학교 등 애국계몽운동에 한정되어 있으며 근거 문헌으로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와 <독립운동사> 5권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보훈처가 제공하는 독립유공자의 정보와 공적사항은 세 가지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다. ① <독립유공자공훈록>(이하 <공훈록>), ②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나라사랑광장 인물찾기의 ‘독립유공자(공훈록)’, ③ 공훈전자사료관 홈페이지 독립유공자 정보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등이다. ①은 책자로 되어 있어 이후 내용과 개인정보 등의 수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②③을 통해 온라인으로 수정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공적내용은 대동소이하지만 개인정보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있어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아무튼 이를 감안해 ① <공훈록> 제1권:애국계몽운동·의병전쟁편, 1986)과 ②③의 내용을 종합해 「김규환」의 항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규환(金奎煥)
– 출생지(②) : 평북 선천
– 본적지(③) : 경기도 고양
– 생몰년 : 1890.6.12∼1941.1.13(②) ; 1890.5.25∼1935.1.10(③은 오류임-필자)
– 이명 : 없음
1909년 남형우(南亨祐)·안희제(安熙濟)·이원식(李元植)·이시열(李時說)·윤세복(尹世復)·박중화(朴重華)·김동삼(金東三)·배천택(裵天澤)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1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1911년 5월 만주 봉천성 환인현(桓仁縣)으로 망명하여 윤세복 등과 함께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해서 교포들에게 독립사상 고취와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동창학교가 폐쇄된 후에는 1915년 6월에 김광제(金光濟, 김공제 金公濟의 오류임-필자)2·이시열 등과 함께 흥경(興京)현 동로홍묘자(東路紅廟子)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여 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일신학교는 1916년에 흥동학교(興東學校)로 개칭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1면·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93·126면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김규환으로 판단되는 인물’은 1920년대 만주를 무대로 광한단(光韓團), 통의부·정의부·국민부, 조선혁명당 등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1. ③의 ‘공적조서’에는 “1909년 조직된 大同(大東의 오류-필자)靑年黨員으로 활약(항일순국의열사전 P.71, 한국독립운동사 P.91”으로만 소개되어 있다. <항일순국의열사전>은 오재식 편술로 1958년 애국정신선양회에서 발간한 것을 말한다. 다만 명칭은 ‘대동청년단’이라는 기록도 있다(<大倧敎重光六十年史>, 1971 ; 이동언, 2010 <안희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 강덕상의 <현대사자료> 27은 일본 외무성 자료에 기록된 ‘金公濟’의 誤植임에도 ????독립운동사???? 5는 원자료 확인없이 ‘金光濟’ 로 인용하면서 오류가 발생했다.


 

근거 문헌은 다름 아닌 위에서 언급한 김승학의 <한국독립사>가 핵심이다. 다만 <한국독립사> 등에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필자가 언급한 ‘김규환으로 판단되는 인물’의 행적이 ‘김이대(金履大)’의 행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김규환과 김이대가 동일인이라는 판단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인가?
김승학이 발간에 관여한 <한국독립사>·<한국독립운동사>에는 간혹 “변절”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것은 특정 인물이 한때 독립운동을 했지만 어느 시점에 일제에 협력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독립운동가 김승학·문일민’이 필생의 업적으로 남긴 자료에 직접 “변절”을 지목했다면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안이다.
<한국독립사>·<한국독립운동사> 등에 독립운동 관련 행적은 ‘김규환’으로, 이외 1920년대 만주에서 활동한 행적과 “변절” 행적은 ‘김이대’로 기록되어 있어 언뜻 두 사람을 별개의 인물로 오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김규환’은 애국계몽운동 계열 독립운동으로 서훈이 추서되었고 ‘김이대’는 변절자로 분류되어 서훈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확인 가능한 모든 자료를 비교해 볼 때 김규환과 김이대는 ‘동일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한국독립사>·<한국독립운동사> 등에 기록된 1920년대 ‘김이대’의 행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3

14

<매일신보> 1929.12.5. 2면

 

이처럼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김이대가 왜 변절했을까? 사실일까? 한동안 의문만 갖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김이대의 변절’과 관련된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매일신보>에 보도된 김이대의 체포 기사이다. “[신의주] 국민부 지방(집행의 오기-필자)위원장 김이대와 동부 혁명군 제1지휘장 이웅은 지난 11월 초 신빈현에서 중국관헌의 손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는 중이라는데 국민부의 맹렬한 운동으로 중국관헌은 전기 범인을 석방할지도 모른다 하여 총독부 당국에서는 이를 주시중이라더라”(「구금된 국민부 집행위원장, 부원이 석방운동」).
체포 이후 김이대의 행적은 알 수 없지만 다음 두 자료에는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어느 때, 적어도 1935년 전후 시기에는 김이대가 변절한 것이 사실로 확인된다.
첫 번째 자료는 <삼천리>(1936.1)에 필자 미상의 글로 소개된 ‘만주의 조선인 낭인들’ 중 「김이대」 항목이다. “씨는 한동안은 운동의 거물로서 XX부의 한사람으로 있었으나 사변(만주사변-필자) 이후에는 귀순하여 협조회위원회장(協調會委員會長)의 직을 맡았다고 한다”(「만주와 북중국의 백의풍운아군(白衣風雲兒群)」).15

두 번째 자료는 조선민족혁명당 기관지 <전도(前途)> 제13호(1937.5.24)에 실린 「사설: 적의 전술」 중 일부 내용이다. “반동의 수괴라고 할 수 있는 자로 조선 내에서는 최린·최남선 등이 있으며, 이들은 3·1운동을 통해 소위 애국지사가 되어 노(老)선배라는 허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만주에는 김이대가 있다. 김이대는 과거 만주에서 만주동포참살의 혈채(血債)를 산적(山積)했는데 지금은 적의 협화회(協和會)의 수괴로 만주에서 적과 악전고투하는 혁명동지를 계속 도살하는 음모에 몰두하고 있다. (중략-원문) 목하 적의 음모의 마수는 조선민족혁명당 파괴에 이르고 있다”(「출판물허가의 이유 및 기사 해당요지(집무자료)」 <조선출판경찰월보> 제106호, 1937.7).
출판 ‘금지사유’로 “제국의 대륙정책을 비방 곡설함으로써 국제관계를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앙양하므로”라고 밝히고 있다.
정리하면 김이대는 1929년 11월 초 중국관헌에 체포되어 ‘아마도’ 조선총독부에 인계되어 회유와 협박을 받았을 것이고,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1935년 전후에 변절해 ‘간도협조회’와 ‘만주국협화회’의 간부로 활동한 것이다. 1935년 전후 변절로 추정하는 이유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이 제공하는 자료에 김이대가 1933년 말경까지 흥사단(興士團) 원동(遠東) 제5반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또 간도협조회(일명 선민협조협회·조선인협조협회)가 1934년 9월 옌지(延吉)에서 조직되어 ‘반만(反滿) 항일운동’의 예봉을 꺾고 만주국의 ‘치안유지’ 공고에 앞장선 친일단체이고 1936년 12월 만주국협화회로 합병되었으므로 위 두 자료의 김이대의 행적과 일치한다. 따라서 간도협조회 설립(1934.9) 이후 만주국협화회로 합병(1936.12) 이전인 1935년 전후에 변절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과 김이대의 변절 행적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김규환과 김이대가 ‘동일인’이라는 것은 어떻게 밝힐 수 있을까? 결정적인 단서는 김이대가 흥사단에 가입하면서 제출한 「흥사단우 이력서」(이하 「이력서」)에 원래 이름이 ‘김규환’이라고 직접 기록한 것이다.
「이력서」는 도산안창호선생전집편찬위원회 편, <도산안창호전집> 제10권:동우회Ⅱ· 흥사단우 이력서(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에 원본이 수록되어 있다(한국독립운동정보 시스템에서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흥사단 단우는 ‘통상단우’, ‘특별단우’, ‘예비·기타 단우’로 분류된다. 통상단우는 제1∼제309단우까지 단우번호가 부여되어 있으며 단우번호 없이 ‘특별단우’ 36명, ‘예비·기타 단우’ 110명 총 455명의 ‘단우 이력서’가 확인된다. 김이대는 평양 대성학교 출신으로 ‘동우구락부’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926년경 흥사단에 입단한 것으로 봐서는 ‘수양동우회’ 시기로 추정된다. 김이대는 ‘예비·기타 단우’로 분류되어 있다.3

16

1892년 평북 선천 출생의 김이대가 1926년 흥사단에 가입했으며 이전 이름이 “(김)규환·(김)검군·사헌”이라고 했으므로 ‘직업’란의 행적과 김규환·김이대로 각각 검토했던 행적이 100% 일치한다. 특히 「이력서」를 통해 김규환=김이대로 판단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는 김이대의 ‘가족’란 기록 중 “처 : ○씨, 자 : ○○·○○”와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어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 안장되어 있는 ‘애국지사 김규환’의 가족관계 및 출생지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또 「이력서」 ‘단체’란에 마지막 행적이 정의부라는 기록과 김승학 등의 자료에서 정의부 관련 행적(<대동민보>주간)이 1926년 9월 전후라는 기록도 일치한다.


3. 흥사단은 1913년 5월 안창호의 주도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되어 무실·역행·충의·용감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일제강점기 국내외에 지부를 설립하고 실력양성운동에 힘썼다. 국내에도 조직사업을 펼쳐 1922년 서울에 수양동맹회를, 1923년 평양에 대성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동우구락부를 결성했으며 두 단체는 1925년 수양동우회(1929년 동우회로 개칭)로 합쳤으나 1937년 이른바 ‘동우회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이후 김규환=김이대가 3부통합으로 성립된 국민부에서 활동하다가 1929년 11월 체포되었으며 1935년 전후 변절해 간도협조회와 만주국 협화회에서 활동한 정황은 김승학이 <망명객행적록>에서 밝힌 것에서도 확인된다. 김승학은 1930년대 중반 환인현 일본영사관 소속으로 독립운동가를 귀화시키는 사업에 앞장섰던 인물이 ‘만주국 선무반 책임자 김이대=김검군’이라고 지목했다. 이것은 김이대가 「이력서」에 기록한 이전 이름 중 ‘검군’이라는 사실과도 부합한다.

17

1935년 4월 12일 평양부 암정(岩町) 형무소에서 출옥 …… 자식 3형제 중에 2인은 전일(前日) 참의부 소재지인 남만주 환인현 방면으로 간 지가 2년이라고 한다. …… 그해 8월에 자식형제를 찾기 위하여 다시 남만주 환인현으로 들어갔다. …… 자식의 소재처를 탐문한 즉 수삭(數朔) 전에 환인현 왜(倭) 영사관에 피착되어 간 후 소식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이후 환인현 성리(城裡)로 갔더니 성내는 전일에 독립군 간부 인물로 명성을 날리던 김모(金某), 고모, 문모, 최모, 변모 제인(諸人)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면서, 선무반(宣撫班) 명색(名色)으로 세력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선무반에서 하는 업무는 전일의 독립운동자들을 만주국에 귀화시키는 사업인 것이다. 나는 증전(曾前)에 안면이 있던 김모를 찾아가서 자식의 행방을 탐문하였다. 이때 그의 답은, ”선생의 자제 영달(榮達), 영저(榮渚) 형제는 수년 전에 이곳 환인·통화 경내에 와서 외면으로는 농업을 하노라 하면서, 이면으로는 선생의 구(舊) 동지들과 연락하여 비밀음모를 한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나는 이때 그의 다음 말을 듣기 위하여 듣고만 있었다. 그는 다시 말하기를, “지금이라도 선생이나 자제가 이 선무반에서 같이 행동하신다면 무사할 것 아니겠습니까?” ……
그 이튿날 봉막돌(奉莫乭)이라는 청년이 내 여관으로 찾아왔다. 그는 환인현 동영영구(東英英溝)에서 백가장 일을 보던 봉태주(奉泰周)의 차남으로 이전에 영영구 보안대원으로 근무하던 자로서 지금은 만주국 선무반에서 저들과 같이 독립군 귀화설론(歸化說論)을 하고 다니던 사람이다. …… 그의 말은 이러하다. “어제 밤 우리(만주국 환인현 일본영사관 소속-필자) 선무반 책임자 김검군(金劒君) 선생님네가 말씀하시는 것을 듣사온즉 선생님이 오신 듯 하기에 지금 찾아왔습니다. 감옥에는 언제 나오셨으며,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나는 이 말을 듣고 간단하게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자네의 상관인 김검군(金劒君)을 만나게 되어 사실을 묻고 있는 중일세. 자네 혹 내 자식 형제들에 대해 들은 일이 없는가?” …… 전일에 환인현에서 김이대(金履大)가 나를 보고 선무반에 참가하면 내 자식을 방송한다고 하던 것이 그들의 음모임을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단기는 서기, 밑줄·강조 등은 필자)

<망명객행적록(亡命客行蹟錄)>은 김승학이 78세 때인 1958년에 자신의 일생과 독립운동일대기를 회고한 글이다. 후손 김병기가 일부 내용을 현대적 표기로 수정·보완하여 원문 전체를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2집(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1998.12)에 처음 공개하였다. 이후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문체와 문장 등을 쉽게 다듬어 2011년 후손(막내 손자) 김창업(사단법인 희산김승학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이 단행본으로 발행하였다.
지금까지 ‘독립운동가·애국지사 김규환’과 ‘변절자 김이대·김검군’은 동일인이라는 것을 추적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규환이 김이대라는 근거는 「흥사단우 이력서」와 ????망명객행적록????,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 안장되어 있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이대가 ‘만주사변 후 변절’했다고 기록한 <한국독립사>와 <한국독립운동사>는 국가보훈처가 독립운동가의 행적으로 인용하는 1차적인 근거자료이다. 이 두 자료가 변절자로 기록한 김이대는 1929년 11월 중국관헌에 체포되었으며 조선총독부가 이를 주시하고 있다는 <매일신보>의 기사도 확인된다. 다만 1933년 말까지 흥사단원으로 활동한 것이 확인된 만큼 변절 시기는 간도협조회 조직(1934.9)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1935년 중반에 ‘김이대=김검군’이 환인현 일본영사관 소속으로 만주국 선무반 책임자이며 독립운동가의 귀화업무를 담당했다는 기록(<망명객행적록>), 그리고 그 단체가 간도협조회이며(<삼천리>) 간도협조회가 만주국협화회로 통합된(1936.12)후 ‘김이대’가 “협화회 수괴로 만주에서 적과 악전고투하는 혁명동지를 계속 도살하는 음모에 몰두”하고 있다는 자료(<전도>, <조선출판경찰월보>) 등을 통해 ‘김규환・김이대・김검군’이
동일인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과 김이대·김검군의 변절 행적은 언젠가 학술적으로 정리될 필요가 있다. 공훈자료에는 김규환의 애국계몽운동 행적만 드러나 있지만 그가 김이대와 동일인으로 확인되었으므로 독립운동 관련 행적도 새로 정리되어야 한다. 예컨대 김규환과 윤세복·이시열은 대동청년단원으로 활동했으며 모두 동창학교·일신학교(1916년 흥동학교로 개칭)와 관계가 있다. 전자는 대종교 제3세 교주 단애 윤세복(1881∼1960)이 1911년 5월(음력) 설립한 학교이고, 후자는 대종교인(호 단총)으로 이후 불교에 귀의한 이시열(1892∼1980, 운허큰스님)과 함께 1915년 6월에 직접 설립한 학교이다. ‘검군’이라는 별명도 대종교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과 김이대의 변절 과정 및 이후의 행적은 이민족의 통치를 받던 엄혹한 시기에 겪었던 동일한 인물의 노정이다. 동시에 우리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기록이기에 반드시 제대로 정리되어야 한다.

∷ 이용창 편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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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IDS홀딩스  1만 2천명의 피해자중 한사람입니다.

 

2016년 9월 2일

IDS 김성훈대표가 긴급구속 되고

그 이후 모집책으로부터 김성훈대표가 100%변제를 해줄것이라며 기다려달라고만 했습니다

본인도 큰돈을 투자했으며

IDS가 잘못되면 자신이 더 큰일난다며 지난 1년이상 민사 형사 소송을 지연시켜왔습니다.

 

물어볼때마다 희망고문 하듯

잘 될꺼라고만 했고

실질적인 변제안이 나올거라며

너무 확신에 차서 말을 했기에

전 믿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후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이제와서는 제가 결정하고 투자한거니 변호사비용이며 법원 인지세와 송달료등을 요구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는 저로써는

다 따를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후 도저히 답답해서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경찰서에 찾아가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김성훈을 비롯하여

모집책 또한 같은 사기공범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이제라도 이 일을 조금이라도 해결하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밤잠을 설쳐가며 너무나 고통스러운 마음을 다스려가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정말 피같이 모은 돈인데

그냥 이대로 사기맞은것으로 끝난다면 미쳐버릴것 같고 절대 절대 포기할수가 없었습니다.

 

피해자들의 돈으로 법무법인 태평양을 선임하여 변호를 받고

구치소 동기인 한재혁과 공모하여 또다른 사기변제안을 만들고..

 

IDS홀딩스 대위변제자 한 씨는 김성훈 ‘구치소 동기’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792

 

 

그 대위변제자는 피해자들의 피같은 돈으로

경찰 인사 청탁을 하고

 

IDS홀딩스 대위변제자, 경찰 인사 청탁 정황 드러나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452

 

사건의 전말이 하나하나씩 들어날때마다 어이가없고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파산이라는 또 다른 커다란 시련이 떡~!하니 나타나  피해자들의 앞을 가로막아

추운겨울 한파가 뼈속을 파고들고 흘린 눈물이 얼어붙는것같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올바른 역사행동을 하는 곳이고

이런 훌륭한 곳의 고문변호사를 맡고 계시는 분이니

피해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수, 2017/12/06-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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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비망록 37

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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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강신사 터를 활용하여 지난 1994년에 재건된 ‘효사정’의 모습.

 

한강대교를 남쪽으로 건너 서울현충원 방향으로 500미터 남짓 걷다보면, 지하철 9호선 흑석역(중앙대입구)에 조금 못 미쳐 한강변 쪽으로 약간 솟아오른 작은 봉우리 하나를 만나게 된다. 1955년 6월 25일에 건립된 학도의용병현충비(學徒義勇兵顯忠碑) 앞을 지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효사정(孝思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나타난다.
효사정은 원래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의 별서(別墅)였다고 전해지는 유적이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했던 곳에다 정자를 짓고 때때로 이곳에 올라 모친을 그리워했고, 멀리 개성 땅에 묘지를 쓴 부친을 추모했다고 하여 ‘효사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기금천현(衿川縣)‘누정(樓亭)’조에“노량나루터 남쪽 언덕에 있는 정자”라는 정도의 간략한 내용이 남아 있긴 하나 사실상 이것만으로는 더 이상의 정확한 원위치 고증이 어려운 상태이다.
하지만 지난 1994년에 서울 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리는 사업의 하나로 한강주변의 유적지를 복원 정비하는 계획이 추진되었고 이때 편의상 부득의하게 지금의 자리를 선정하여 정자를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곳이 진짜 효사정 자리인지에 대한 논란을 차치하고라도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강 쪽 전망이 참으로 빼어나다는 점에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장소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내내 ‘한강신사(漢江神社)’라는 시설물이 터를 잡고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도 꼭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후지이 가메와카(藤井龜若)가 펴낸 <경성의광화(京城の光華)>(조선사정조사회,1926)를 보면, 이한강신사의 건립유래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한강신사는 인도교(人道橋)를 건너 동쪽의 작은 언덕에 숲속에 한줄기 끈과 같은 가느다란 길이 산꼭대기까지 걸쳐 있는데 그 산부리의 약간 높은 상두산령(象頭山嶺)의 영지(靈地)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신(祭神)은 미야지대사(宮地大社), 코토히라대신(金刀羅大神), 스가와라대신(菅原大神)의 삼신(三神)으로 인도교 가교 청부인(請負人)이던 시키 노부타로(志岐信太郞) 씨가 대정 원년(1912년) 금상폐하(今上陛下, 대정천황을 말함)의 즉위를 기념하고 아울러 고국을 멀리 떠나온 재선민(在鮮民: 조선 거주 일본인)을 비롯하여 동포선인(同胞鮮人)에게 경신숭조(敬神崇祖)의 미풍을 가르치려는 돈독한 뜻에 따라 이곳 산자수명한 정지(淨地)를 택해 사재 십수 만 원을 들여 한강수호의 신으로 삼아 헌립(獻立)한 것이며, 매년 봄가을(5월 4일, 10월 4일)에 행해지는 대제례일에는 내선인의 참배자가 원근에서 운집하여 번잡함이 흡사 대공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섭사(攝社)에는 이나리신사(稻荷神社), 시키신사(志岐神社), 야신신사(矢心神社)를 모시며, 이 지역은 예로부터 영산(靈山)으로서 조선인들이 숭배하던 곳이다. 경내의 바위 사이에는 기이한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와룡송(臥龍松)이라 부르는 유명한 나무로 수령이 수백 년이 넘는 신목(神木)이다.

 

여기에 나오는 시키 노부타로는 1869년생으로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출신이며, 자신의 토목건축회사인 시키구미(志岐組)를 통해 경부철도 속성공사를 비롯한 철도관련 청부업에 주력하여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1921년에 조선의 특산물이라고 일컬어지던 천연빙(天然氷), 즉 겨울철 한강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 판매하기 위해 조선천연빙주식회사 및 조선천연빙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36년에 이들 회사와 여타 제빙회사가 조선제빙주식회사(朝鮮製氷株式會社)로 통합 전환한 이후에도 사장의 자리를 지킨 바 있다. 따라서 그는 이래저래 한강과는 많은 인연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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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1934년 12월 2일자에 수록된 토끼사냥 야유대회관련 명수대 주변 약도에는 ‘한강신사’의 위치가 또렷이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에 ‘화장사’라고 표시된 사찰은 오늘날 서울현충원 구내에 있는 ‘호국지장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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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신사가 자리한 흑석동 한강변의 풍경. (<일본지리대계(조선편)>, 신광사,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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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기노시타 사카에가 개발을 주도한 명수대 주택지(현 흑석동)의 전경. 왼쪽으로 보이는 한강변 봉우리 위의 건물이 한강신사이다. (경성전기주식회사, <뻗어가는경성전기>, 1935)

 

이곳 한강신사의 제신으로 언급된 ‘미야지대사’는 일본 후쿠오카 소재 ‘미야지다케신사(宮地嶽神社)’를 말하는데, 시키의 고향에 있는 신사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었던 듯하다. 또한 ‘스가와라대신’은 일본 헤이안시대의 정치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말하며, 대개 ‘학문의 신’으로 추앙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코토히라대신’은 불교에서 일컫는 약사십이신장(藥師十二神將)의 하나이며 원래 인도 갠지즈강에 살았다는 쿰비라(Kumbhira, 蛟龍)에서 유래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바다를 수호하는 신으로 인지되어 일반적으로 선박 안전을 비는 대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한강신사가 자리한 봉우리를 일컬어 상두산(象頭山)이라고 한 것은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있는 곤피라산(金刀比羅宮: 신사명)의 소재지에서 그대로 따온 이름으로 받아들여진다.
오카 료스케(岡良助)가 쓴 <경성번창기>(박문사,1915)라는책에는이곳이웅진강신사(熊津江神社)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한강신사는 그 이후의 시점에서 고쳐진 명칭인 듯하다. 아무튼 이곳은 일본인의 입장에서 한강 수호의 신으로 삼아 설립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912년에 그네들의 천황이 등극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이러한 신사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점에도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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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관보>1934년 5월 14일자에는 한강신사가 ‘신메이신사’라는 이름으로 새로 설립허가를 받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제패망기에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에서 엮어낸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1941)을 보면, 여기에는 한강신사의 명칭이 ‘神社’가 아닌 ‘神祠’로, 이곳의 제신(祭神)이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외 11신’으로, 창립일도 1912년이 아닌 ‘1934년 5월 9일’로 각각 변경 표기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 점에 착안하여 <조선총독부관보>를뒤져보았더니1934년 6월 14일자에 수록된 “경기도 시흥군 북면 흑석리에 신메이신사(神明神祠) 설립의 건이 기노시타 사카에(木下榮) 외 72명으로부터 원출(願出)된 것에 대해 5월 9일부로 이를 허가함”이라는 기록이 눈에 띈다.
여기에 나오는 기노시타는 한강신사의 설립자인 시키의 고향 후배이면서 ‘시키구미’와 ‘조선천연빙주식회사’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경력을 쌓았고, 1931년에는 지금의 흑석동 일대에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明水臺土地經營事務所)를 꾸려 자신만의 이상향(理想鄕)으로 가꾸는 일에 주력했던 사람이었다. 1917년 3월 22일에 제정된 총독부령 제21호 「신사(神祠)에 관한 건」에 따르면 “신사(神祠)라고 칭함은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公衆)에 참배를 시키기 위해 신기(神祇)를 봉사하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이를 설립하려는 때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노시타가 신사의 설립을 새로 청원한 것은 이에 따른 절차인 듯이 보인다. 또한 신메이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별칭이므로, ‘신메이신사’는 이를테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삼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신사(神祠, 격이 낮은 소규모 신사)인 셈이다. 이런 사실에 비춰보면 1930년대 전시체제기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맞물려 한강신사 자체의 기능과 성격에 있어서 제도적인 환골탈태가 진행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서울지역에 설치되어 있던 일제의 신사들을 얘기하면, 남산 왜성대에 자리한 경성신사(京城神社)와 남산 중턱 옛 한양공원 터에 들어선 조선신궁(朝鮮神宮, 1925년 10월 준공) 정도를 언급하는 것이 보통이다. 원래 경성신사는 1898년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설립되었다가 1913년에 경성신사로 개칭되었으며, 이 안에 천만궁(天滿宮, 1902년 창립), 남산도하신사(南山稻荷神社, 1931년 창립), 팔번궁(八幡宮, 1931년 창립)을 섭사로 거느리고 있었다.
이밖에 경성신사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노기신사(乃木神社, 1934년 창립)와 용산 일본군병영지의 후면 남산 기슭에 조성된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1943년 창립) 등의 존재도 곧잘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 말고도 태평로 쪽에 에비스신사(惠比須神社, 1913년 창립)를 비롯하여 원효로 인근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 1번지 위치)에 있는 문평산(文平山)에는 가토신사(加藤神社, 1914년 창립)라는 것이 있었고, 신메이신사는 영등포동, 용두동, 신길동, 이태원동 등지에도 두루 포진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매일신보>1943년5월18일자에는「신사(神祠)의신마(神馬)도출정(出征),금일한강신사(漢江神祠)에서 장행회(壯行會) 거행」 제하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한강신사에 관해 현재까지 드러난 막바지 기록이다.

 

미영격멸에 신마(神馬)도 출정 ― 부내 한강신사 앞에 모셔 논 구리로 만든 신마가 출정하기로 되어 17일 오전 10시 동 신사에서 장행회를 거행하였다. 여기에는 군 애국부의 히라이 대위(平井大尉)와 기노시타(木下) 흑석정 총대 이하 정민(町民) 다수가 참열한 아래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이 신마는 대정 10년도(1921년도)에 건립하여 지금까지 23년 동안 동 신사 앞에서 있던 것으로 이번에 육군에 헌납키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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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5월 18일자에 수록된 한강신사 신마 출정 장행회 관련 보도사진.

 

여기에 흑석정 총대로 언급된 기노시타는 바로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 사장과 동일인이다. 겉으로는 한강 수호의 성지인 듯이 말하지만 결국에는 출정황군의 무운장구를 빌거나 전쟁동원을 위한 총력체제의 결집장소로 활용되고 마는 것이 바로 일제가 만든 이들 침략신사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월, 2018/07/02-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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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7일(목), 감사원 앞
주최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목, 2017/08/1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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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술국치 108주년인 29일 서울 용산구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한 어린이가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 권도현 기자 [email protected]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제강점기 역사에만 초점을 맞춘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경술국치 108주년인 29일 서울 용산에서 문을 열었다. 2011년 2월 박물관 건립위원회가 출범한 지 약 8년 만의 개관으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기부와 시민들의 모금으로 건립된 민간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등 시민단체와 학계 등이 중심이 돼 민간 차원에서 추진돼 왔다.

송기인 초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이 재직 2년간 받은 급여 2억원을 전액 기탁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건립이 추진됐다. 이후 초등학생들부터 학계, 시민사회 인사들까지 1만여명의 시민이 건립운동에 참여해 16억5000만원의 건립 기금을 조성했다. 독립운동가 후손과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도 자료와 기금을 보내는 등 건립운동에 동참했다. 일본의 과거사 관련 시민단체들과 학계 인사들 역시 1억원이 넘는 기금을 보냈다.

박물관에 전시된 상당수 자료들은 독립운동가 후손 등 시민들이 기증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선생이 68차례에 걸쳐 6000점이 넘는 자료를 보내 왔고,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도 희생자들의 한이 서려있는 유품을 박물관에 보냈다.

박물관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편찬 과정에서 축적한 자료 등을 포함해 총 7만여점의 자료와 5만여권의 도서가 수집됐다. 이 중 엄선한 일부가 박물관에 전시되고 나머지는 보관해 관리한다.

박물관의 상설 전시관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부터 식민 통치와 수탈, 친일파와 항일 운동,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기 역사를 담은 총 4부의 전시로 구성됐다. 강제병합 당시 순종의 칙유와 데라우치 통감의 유고, 3·1독립선언서 초판본, 을사오적 등 친일파의 훈장과 유품 등 희귀한 자료가 전시됐다. 박물관은 향후 소장자료를 활용해 전시는 물론 교육교재와 역사문화 강좌, 답사 프로그램도 마련할 계획이다.

박물관은 서울 용산구 청파동 효창원 인근에 세워졌다. 박물관 관계자는 “남산과 용산 일대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의 본산이 자리 잡고 있었고, 해방 이후에는 독립운동 선열의 묘역이 효창원에 들어섰다”면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독립정신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고 가꿔나가는 역사문화벨트의 중심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이화 박물관 건립위원회 집행위원장은 이날 개관식에서 “1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건립운동에 참여하는 등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자발적인 역사문화운동을 통해 박물관이 개관했다”며 “단순한 자료 전시에만 집착하지 않고 시민과 청소년들이 대화하고 소통하는 열린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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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술국치 108주년인 29일 서울 용산구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시민들이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 권도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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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술국치 108주년인 29일 서울 용산구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시민들이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 권도현 기자 [email protected]

선명수 기자 [email protected]

<2018-08-29> 경향신문

☞기사원문: 시민과 독립운동가 후손이 만든 ‘아픈 역사를 배우는 박물관’ 식민지역사박물관 용산에 개관

※관련기사

☞연합뉴스: ‘아픈 역사 한눈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경술국치일 맞춰 개관


[포토] 경술국치일에 돌아보는 일제 만행의 증거들

2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문 열어

국내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경술국치 108주년인 8월 2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문을 열었다. 박물관에는 1875년 운요호 사건에서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70년에 걸친 일제 침탈과 그에 부역한 친일파의 죄상을 정확히 기록한 사료와 전시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효창원 인근에 자리잡은 박물관의 규모는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까지 연면적 1500여㎡에 이른다. 박물관에는 기획전시실과 상설전시실, 서고와 수장고, 연구실 등을 갖췄다.

전시실에 보관된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을 증언하는 사료들 중 일부를 모아본다.

1. 순종황제의 칙유와 데라우치 통감의 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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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이 국권을 넘긴다고 밝힌 칙유로 석판 인쇄된 원본이다. “국권을 내가 믿고 의지하는 이웃 나라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긴다”는 내용이 쓰여있다. 조선 1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부임하면서 시정방침을 밝힌 포고문에는 “전 한국원수의 희망에 응하여 그 통치권 양여를 수락한다”고 쓰여 있어 조약 체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김정효 기자

2. 을사오적 권중현이 받은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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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오적 중 1인인 권중현이 한국 병합을 기념해 받은 메달과 증서이다. 권중현은 1907년 1월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밝힌 고종황제의 친서가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직후 ‘을사오적’의 암살을 기도한 나인영 오기호 등에게 저격당했으나 목숨은 잃지 않았다. 강제병합 뒤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1920년까지 10년간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김정효 기자

3 조선총독부 폐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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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 문관들이 착용하는 칼. 직급과 상관없이 모두 제복에 칼을 착용하도록 하여 조선인들에게 총독부 관리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다. 칼자루와 칼집에 ‘오동 문양’이 한 개씩 새겨진 것으로 보아 ‘주임관’이 사용한 폐검이다. 손잡이는 상어 가죽을 입혔다. 김정효 기자

4. 천인침과 군 위문품 속조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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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인침은 참전한 사람이 무사하기를 빌며 1미터 정도 길이의 흰 천에 붉은 실로 여성 천 명이 한 땀씩 꿰매어 만든 일종의 부적이다. 천인침은 부적과 같이 배에 두르거나 모자에 꿰메어 다녔다. 아래 속조끼는 부산공립고등여학교 2학년생 야마구치 사치코가 ‘무운장구’라고 쓴 미나미 조선총덕의 글씨와 일종의 호신부로 조선신궁의 도장을 찍은 천을 덧대어 만든 속조끼이다. 조선군사후원연맹이 학생들이 만든 것을 모아 군인에게 위문품으로 보냈다. 김정효 기자

5. 궁성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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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마다 ‘천황’ 있는 동쪽을 향해 의무적으로 절(궁성요배)을 해야 했던 당시 모습을 촬영한 사진들이다. 김정효 기자

6. 중일전쟁 전투일지를 기록한 일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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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나바 부대보병 제6사단 등이 1937년 7월에서 1938년 11월까지의 중일전쟁 전투일지를 기록한 일장기이다. 히노마루 안에 난징과 한커우를 점령한 날짜가 정확히 적혀 있다. 남경대학살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는 일정이 눈에 띈다. 김정효 기자

7. 특별지원병 이은휘의 장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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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행기는 청년들이 죽으러 나갈 때 앞세운 깃발이라고 해서 ‘청춘만장’이라고 불렸다. 이 깃발에는 “축 육군병지원자훈련소입소 궁분은휘 군, 국민총력 김제군 월초면 제남부락 연맹”이라고 쓰여있다. 이은휘는 1941년 지방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 면사무소에 갔다가 사실상 강제로 지원병으로 끌려갔다. 당시 임신 8개월이었던 아내를 두고 그는 결국 1944년 7월 11일 남태평양 파푸아뉴기니 라바울에서 전사했다. 아래는 당시 일본군 육군 병사가 사용한 군복과 철모 수통 등 군장이다. 김정효 기자

김정효 기자 [email protected]

<2018-08-29> 한겨레

☞기사원문: [포토] 경술국치일에 돌아보는 일제 만행의 증거들

수, 2018/08/29-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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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 ‘내역사’ 시즌2: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1회 식목일의 기원

☞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1회 “임시정부와 3.1혁명 1편_왜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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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2

제작 등: PD 김세호, 조작가, 방은희 교육팀장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2 ‘역적’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목, 2018/04/05-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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