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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인가, 변절자인가 – 둘로 쪼개진 ‘애국지사 김규환’과 ‘변절자 김이대’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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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인가, 변절자인가 – 둘로 쪼개진 ‘애국지사 김규환’과 ‘변절자 김이대’의 행적

익명 (미확인) | 금, 2017/07/28- 15:20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 27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 애국지사와 순국선열을 기리는 독립유공자 선정에 필수적인 자료는 매우 많다. 특히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포상을 위해 후손들의 신청을 받거나 자체 조사로 발굴할 때 독립운동 행적의 근거로 삼는 주요 문헌 중 이 글의 주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는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9), ‘통칭’ 문일민의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그리고 ‘통칭’ 김승학의 <한국독립사>를 꼽을 수 있다. 이 중 김승학과 관련한 <한국독립사>의 발간에는 우여곡절이 있어서 현재까지
1965년 9월 초판발행본(독립문화사), 1970년 6월 상·하 두 권의 증보발행본(독립문화사), 1983년 3월 단행본으로 합친 증보발행본(독립동지회) 총 3종의 ????한국독립사????가 존재한다.
다만 김승학(1881∼1964)은 ????한국독립사???? 발간을 준비하던 1964년 12월 별세해 초판본(발행인 김국보)과 상·하권 증보본 발행 당시에는 편저자(증보편집 겸 발행인 김국보)로, 세번째 증보본은 김승학·김국보 공편저자로 발간되었다.
김국보가 1983년 증보발행본의 「발간사」에 밝혔듯이, 희산 김승학은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참여 시기부터 독립운동의 역사를 남기겠다는 뜻을 품었으며 해방 후 귀국해 40여 년에 걸친 자신의 독립운동 외에도 오랫동안 수집·보관한 자료를 토대로 문일민(1894∼1968)을 발행인으로 <한국독립운동사>를 발간했다(위에서 ‘통칭’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고 국가보훈처나 관련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문일민의 <한국독립운동사>, 김승학의 <한국독립사>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 계획했던 것과 다른 점이 있어서 김승학 자신이 다시 집필하던 중 별세했고 유지를 이어 유족들이 김국보 등과 함께 작업해 1965년 초판본이 발간될 수 있었다. 국가보훈처의 경우 김승학의 <한국독립사>는 1970년 발간된 상·하 두 권의 증보본(독립문화사)을 활용하고 있다.
뜬금없이 장황하게 서지사항을 늘어놓은 이유는 총무처(현재는 국가보훈처 담당)가 1963년에 대통령표창(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이 위의 세 자료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다만 공훈자료에 기록된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은 국내의 ‘대한청년당(단)’, 만주의 동창학교·일신학교 등 애국계몽운동에 한정되어 있으며 근거 문헌으로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와 <독립운동사> 5권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보훈처가 제공하는 독립유공자의 정보와 공적사항은 세 가지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다. ① <독립유공자공훈록>(이하 <공훈록>), ②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나라사랑광장 인물찾기의 ‘독립유공자(공훈록)’, ③ 공훈전자사료관 홈페이지 독립유공자 정보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등이다. ①은 책자로 되어 있어 이후 내용과 개인정보 등의 수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②③을 통해 온라인으로 수정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공적내용은 대동소이하지만 개인정보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있어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아무튼 이를 감안해 ① <공훈록> 제1권:애국계몽운동·의병전쟁편, 1986)과 ②③의 내용을 종합해 「김규환」의 항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규환(金奎煥)
– 출생지(②) : 평북 선천
– 본적지(③) : 경기도 고양
– 생몰년 : 1890.6.12∼1941.1.13(②) ; 1890.5.25∼1935.1.10(③은 오류임-필자)
– 이명 : 없음
1909년 남형우(南亨祐)·안희제(安熙濟)·이원식(李元植)·이시열(李時說)·윤세복(尹世復)·박중화(朴重華)·김동삼(金東三)·배천택(裵天澤)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1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1911년 5월 만주 봉천성 환인현(桓仁縣)으로 망명하여 윤세복 등과 함께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해서 교포들에게 독립사상 고취와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동창학교가 폐쇄된 후에는 1915년 6월에 김광제(金光濟, 김공제 金公濟의 오류임-필자)2·이시열 등과 함께 흥경(興京)현 동로홍묘자(東路紅廟子)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여 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일신학교는 1916년에 흥동학교(興東學校)로 개칭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1면·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93·126면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김규환으로 판단되는 인물’은 1920년대 만주를 무대로 광한단(光韓團), 통의부·정의부·국민부, 조선혁명당 등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1. ③의 ‘공적조서’에는 “1909년 조직된 大同(大東의 오류-필자)靑年黨員으로 활약(항일순국의열사전 P.71, 한국독립운동사 P.91”으로만 소개되어 있다. <항일순국의열사전>은 오재식 편술로 1958년 애국정신선양회에서 발간한 것을 말한다. 다만 명칭은 ‘대동청년단’이라는 기록도 있다(<大倧敎重光六十年史>, 1971 ; 이동언, 2010 <안희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 강덕상의 <현대사자료> 27은 일본 외무성 자료에 기록된 ‘金公濟’의 誤植임에도 ????독립운동사???? 5는 원자료 확인없이 ‘金光濟’ 로 인용하면서 오류가 발생했다.


 

근거 문헌은 다름 아닌 위에서 언급한 김승학의 <한국독립사>가 핵심이다. 다만 <한국독립사> 등에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필자가 언급한 ‘김규환으로 판단되는 인물’의 행적이 ‘김이대(金履大)’의 행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김규환과 김이대가 동일인이라는 판단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인가?
김승학이 발간에 관여한 <한국독립사>·<한국독립운동사>에는 간혹 “변절”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것은 특정 인물이 한때 독립운동을 했지만 어느 시점에 일제에 협력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독립운동가 김승학·문일민’이 필생의 업적으로 남긴 자료에 직접 “변절”을 지목했다면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안이다.
<한국독립사>·<한국독립운동사> 등에 독립운동 관련 행적은 ‘김규환’으로, 이외 1920년대 만주에서 활동한 행적과 “변절” 행적은 ‘김이대’로 기록되어 있어 언뜻 두 사람을 별개의 인물로 오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김규환’은 애국계몽운동 계열 독립운동으로 서훈이 추서되었고 ‘김이대’는 변절자로 분류되어 서훈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확인 가능한 모든 자료를 비교해 볼 때 김규환과 김이대는 ‘동일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한국독립사>·<한국독립운동사> 등에 기록된 1920년대 ‘김이대’의 행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3

14

<매일신보> 1929.12.5. 2면

 

이처럼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김이대가 왜 변절했을까? 사실일까? 한동안 의문만 갖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김이대의 변절’과 관련된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매일신보>에 보도된 김이대의 체포 기사이다. “[신의주] 국민부 지방(집행의 오기-필자)위원장 김이대와 동부 혁명군 제1지휘장 이웅은 지난 11월 초 신빈현에서 중국관헌의 손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는 중이라는데 국민부의 맹렬한 운동으로 중국관헌은 전기 범인을 석방할지도 모른다 하여 총독부 당국에서는 이를 주시중이라더라”(「구금된 국민부 집행위원장, 부원이 석방운동」).
체포 이후 김이대의 행적은 알 수 없지만 다음 두 자료에는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어느 때, 적어도 1935년 전후 시기에는 김이대가 변절한 것이 사실로 확인된다.
첫 번째 자료는 <삼천리>(1936.1)에 필자 미상의 글로 소개된 ‘만주의 조선인 낭인들’ 중 「김이대」 항목이다. “씨는 한동안은 운동의 거물로서 XX부의 한사람으로 있었으나 사변(만주사변-필자) 이후에는 귀순하여 협조회위원회장(協調會委員會長)의 직을 맡았다고 한다”(「만주와 북중국의 백의풍운아군(白衣風雲兒群)」).15

두 번째 자료는 조선민족혁명당 기관지 <전도(前途)> 제13호(1937.5.24)에 실린 「사설: 적의 전술」 중 일부 내용이다. “반동의 수괴라고 할 수 있는 자로 조선 내에서는 최린·최남선 등이 있으며, 이들은 3·1운동을 통해 소위 애국지사가 되어 노(老)선배라는 허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만주에는 김이대가 있다. 김이대는 과거 만주에서 만주동포참살의 혈채(血債)를 산적(山積)했는데 지금은 적의 협화회(協和會)의 수괴로 만주에서 적과 악전고투하는 혁명동지를 계속 도살하는 음모에 몰두하고 있다. (중략-원문) 목하 적의 음모의 마수는 조선민족혁명당 파괴에 이르고 있다”(「출판물허가의 이유 및 기사 해당요지(집무자료)」 <조선출판경찰월보> 제106호, 1937.7).
출판 ‘금지사유’로 “제국의 대륙정책을 비방 곡설함으로써 국제관계를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앙양하므로”라고 밝히고 있다.
정리하면 김이대는 1929년 11월 초 중국관헌에 체포되어 ‘아마도’ 조선총독부에 인계되어 회유와 협박을 받았을 것이고,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1935년 전후에 변절해 ‘간도협조회’와 ‘만주국협화회’의 간부로 활동한 것이다. 1935년 전후 변절로 추정하는 이유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이 제공하는 자료에 김이대가 1933년 말경까지 흥사단(興士團) 원동(遠東) 제5반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또 간도협조회(일명 선민협조협회·조선인협조협회)가 1934년 9월 옌지(延吉)에서 조직되어 ‘반만(反滿) 항일운동’의 예봉을 꺾고 만주국의 ‘치안유지’ 공고에 앞장선 친일단체이고 1936년 12월 만주국협화회로 합병되었으므로 위 두 자료의 김이대의 행적과 일치한다. 따라서 간도협조회 설립(1934.9) 이후 만주국협화회로 합병(1936.12) 이전인 1935년 전후에 변절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과 김이대의 변절 행적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김규환과 김이대가 ‘동일인’이라는 것은 어떻게 밝힐 수 있을까? 결정적인 단서는 김이대가 흥사단에 가입하면서 제출한 「흥사단우 이력서」(이하 「이력서」)에 원래 이름이 ‘김규환’이라고 직접 기록한 것이다.
「이력서」는 도산안창호선생전집편찬위원회 편, <도산안창호전집> 제10권:동우회Ⅱ· 흥사단우 이력서(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에 원본이 수록되어 있다(한국독립운동정보 시스템에서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흥사단 단우는 ‘통상단우’, ‘특별단우’, ‘예비·기타 단우’로 분류된다. 통상단우는 제1∼제309단우까지 단우번호가 부여되어 있으며 단우번호 없이 ‘특별단우’ 36명, ‘예비·기타 단우’ 110명 총 455명의 ‘단우 이력서’가 확인된다. 김이대는 평양 대성학교 출신으로 ‘동우구락부’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926년경 흥사단에 입단한 것으로 봐서는 ‘수양동우회’ 시기로 추정된다. 김이대는 ‘예비·기타 단우’로 분류되어 있다.3

16

1892년 평북 선천 출생의 김이대가 1926년 흥사단에 가입했으며 이전 이름이 “(김)규환·(김)검군·사헌”이라고 했으므로 ‘직업’란의 행적과 김규환·김이대로 각각 검토했던 행적이 100% 일치한다. 특히 「이력서」를 통해 김규환=김이대로 판단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는 김이대의 ‘가족’란 기록 중 “처 : ○씨, 자 : ○○·○○”와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어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 안장되어 있는 ‘애국지사 김규환’의 가족관계 및 출생지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또 「이력서」 ‘단체’란에 마지막 행적이 정의부라는 기록과 김승학 등의 자료에서 정의부 관련 행적(<대동민보>주간)이 1926년 9월 전후라는 기록도 일치한다.


3. 흥사단은 1913년 5월 안창호의 주도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되어 무실·역행·충의·용감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일제강점기 국내외에 지부를 설립하고 실력양성운동에 힘썼다. 국내에도 조직사업을 펼쳐 1922년 서울에 수양동맹회를, 1923년 평양에 대성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동우구락부를 결성했으며 두 단체는 1925년 수양동우회(1929년 동우회로 개칭)로 합쳤으나 1937년 이른바 ‘동우회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이후 김규환=김이대가 3부통합으로 성립된 국민부에서 활동하다가 1929년 11월 체포되었으며 1935년 전후 변절해 간도협조회와 만주국 협화회에서 활동한 정황은 김승학이 <망명객행적록>에서 밝힌 것에서도 확인된다. 김승학은 1930년대 중반 환인현 일본영사관 소속으로 독립운동가를 귀화시키는 사업에 앞장섰던 인물이 ‘만주국 선무반 책임자 김이대=김검군’이라고 지목했다. 이것은 김이대가 「이력서」에 기록한 이전 이름 중 ‘검군’이라는 사실과도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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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4월 12일 평양부 암정(岩町) 형무소에서 출옥 …… 자식 3형제 중에 2인은 전일(前日) 참의부 소재지인 남만주 환인현 방면으로 간 지가 2년이라고 한다. …… 그해 8월에 자식형제를 찾기 위하여 다시 남만주 환인현으로 들어갔다. …… 자식의 소재처를 탐문한 즉 수삭(數朔) 전에 환인현 왜(倭) 영사관에 피착되어 간 후 소식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이후 환인현 성리(城裡)로 갔더니 성내는 전일에 독립군 간부 인물로 명성을 날리던 김모(金某), 고모, 문모, 최모, 변모 제인(諸人)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면서, 선무반(宣撫班) 명색(名色)으로 세력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선무반에서 하는 업무는 전일의 독립운동자들을 만주국에 귀화시키는 사업인 것이다. 나는 증전(曾前)에 안면이 있던 김모를 찾아가서 자식의 행방을 탐문하였다. 이때 그의 답은, ”선생의 자제 영달(榮達), 영저(榮渚) 형제는 수년 전에 이곳 환인·통화 경내에 와서 외면으로는 농업을 하노라 하면서, 이면으로는 선생의 구(舊) 동지들과 연락하여 비밀음모를 한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나는 이때 그의 다음 말을 듣기 위하여 듣고만 있었다. 그는 다시 말하기를, “지금이라도 선생이나 자제가 이 선무반에서 같이 행동하신다면 무사할 것 아니겠습니까?” ……
그 이튿날 봉막돌(奉莫乭)이라는 청년이 내 여관으로 찾아왔다. 그는 환인현 동영영구(東英英溝)에서 백가장 일을 보던 봉태주(奉泰周)의 차남으로 이전에 영영구 보안대원으로 근무하던 자로서 지금은 만주국 선무반에서 저들과 같이 독립군 귀화설론(歸化說論)을 하고 다니던 사람이다. …… 그의 말은 이러하다. “어제 밤 우리(만주국 환인현 일본영사관 소속-필자) 선무반 책임자 김검군(金劒君) 선생님네가 말씀하시는 것을 듣사온즉 선생님이 오신 듯 하기에 지금 찾아왔습니다. 감옥에는 언제 나오셨으며,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나는 이 말을 듣고 간단하게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자네의 상관인 김검군(金劒君)을 만나게 되어 사실을 묻고 있는 중일세. 자네 혹 내 자식 형제들에 대해 들은 일이 없는가?” …… 전일에 환인현에서 김이대(金履大)가 나를 보고 선무반에 참가하면 내 자식을 방송한다고 하던 것이 그들의 음모임을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단기는 서기, 밑줄·강조 등은 필자)

<망명객행적록(亡命客行蹟錄)>은 김승학이 78세 때인 1958년에 자신의 일생과 독립운동일대기를 회고한 글이다. 후손 김병기가 일부 내용을 현대적 표기로 수정·보완하여 원문 전체를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2집(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1998.12)에 처음 공개하였다. 이후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문체와 문장 등을 쉽게 다듬어 2011년 후손(막내 손자) 김창업(사단법인 희산김승학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이 단행본으로 발행하였다.
지금까지 ‘독립운동가·애국지사 김규환’과 ‘변절자 김이대·김검군’은 동일인이라는 것을 추적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규환이 김이대라는 근거는 「흥사단우 이력서」와 ????망명객행적록????,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 안장되어 있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이대가 ‘만주사변 후 변절’했다고 기록한 <한국독립사>와 <한국독립운동사>는 국가보훈처가 독립운동가의 행적으로 인용하는 1차적인 근거자료이다. 이 두 자료가 변절자로 기록한 김이대는 1929년 11월 중국관헌에 체포되었으며 조선총독부가 이를 주시하고 있다는 <매일신보>의 기사도 확인된다. 다만 1933년 말까지 흥사단원으로 활동한 것이 확인된 만큼 변절 시기는 간도협조회 조직(1934.9)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1935년 중반에 ‘김이대=김검군’이 환인현 일본영사관 소속으로 만주국 선무반 책임자이며 독립운동가의 귀화업무를 담당했다는 기록(<망명객행적록>), 그리고 그 단체가 간도협조회이며(<삼천리>) 간도협조회가 만주국협화회로 통합된(1936.12)후 ‘김이대’가 “협화회 수괴로 만주에서 적과 악전고투하는 혁명동지를 계속 도살하는 음모에 몰두”하고 있다는 자료(<전도>, <조선출판경찰월보>) 등을 통해 ‘김규환・김이대・김검군’이
동일인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과 김이대·김검군의 변절 행적은 언젠가 학술적으로 정리될 필요가 있다. 공훈자료에는 김규환의 애국계몽운동 행적만 드러나 있지만 그가 김이대와 동일인으로 확인되었으므로 독립운동 관련 행적도 새로 정리되어야 한다. 예컨대 김규환과 윤세복·이시열은 대동청년단원으로 활동했으며 모두 동창학교·일신학교(1916년 흥동학교로 개칭)와 관계가 있다. 전자는 대종교 제3세 교주 단애 윤세복(1881∼1960)이 1911년 5월(음력) 설립한 학교이고, 후자는 대종교인(호 단총)으로 이후 불교에 귀의한 이시열(1892∼1980, 운허큰스님)과 함께 1915년 6월에 직접 설립한 학교이다. ‘검군’이라는 별명도 대종교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과 김이대의 변절 과정 및 이후의 행적은 이민족의 통치를 받던 엄혹한 시기에 겪었던 동일한 인물의 노정이다. 동시에 우리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기록이기에 반드시 제대로 정리되어야 한다.

∷ 이용창 편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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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7일 오후 6시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이하 ‘역사재단’) 주최로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에서 강만길저작집 출간기념회를 열었다. 강만길 고려대명예교수의 의사에 따라 직접 논문 지도를 받은 제자들만 참여하는 소박한 자리를 마련하였다. 신용옥 역사재단 상임이사의 사회로 진행된 기념식에서 저작집 간행위원회 대표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의 인사말이 있었고, 이어 신용옥 이사가 저작집 출간 경위
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제자인 조광 국사편찬위원장의 감사인사, 저작집을 펴낸 창비 기획편집위원장인 백영서 교수 및 임헌영 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강교수는 답사에서 “이번 저작집 역시 학자로서 치열하게 살고자 한 삶의 흔적이 아닌가 싶다”며 “앞으로 후학들이 나를 넘어서는 뛰어난 연구업적을 남기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고 소회를 밝혔다.

 

강만길저작집은, 역사재단이 2010년부터 기획한 것으로 역사재단과 창비사의 2년간의 노력 끝에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출간 40주년을 기념해 올 12월에 간행된 것이다. 강교수의 첫 저작인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을 시작으로 초판 출간 연도에 맞춰 19권의 저서를 순서대로 배치하고 2010년에 나온 〈역사가의 시간〉은 자서전이라는 성격을 고려해 저작집의 마지막 권으로 했으며 미출간 원고도 한 권의 단행본으로 엮었다. 특히 제자 20명이 각 저서에 대한 사학사적 의미를 조명하는 해제를 실어 그 의의를 더했다.
• 편집부

수, 2019/01/02-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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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9/01/03-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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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2018/12/30-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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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寄金正恩

 

壓制連三代(압제연삼대)

衆言未久亡(중언미구망)

民飢君飽喫(민기군포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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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에게 거듭 띄우는 글

 

압제하는 정치가 三代를 이으니

뭇사람 未久에 망한다고 말하네

백성은 굶는데 임금은 배부르니

공산주의란 승냥이와 이리 같네.

 

<時調로 改譯>

 

壓制三代 이으니 未久에 망한다 하네

백성은 굶고 있는데 임금은 배부르니

오호라! 공산주의란 豺狼과도 같다네.

 

*壓制: 권력이나 폭력으로  남을  꼼짝 못 하게  강제로  누름 *三代: 아버지, 아들,

손자의  대. ≒삼세(三世)  *衆言: 많은  사람의  말 *未久: 얼마 오래지 아니함

*飽喫: 배부르게 먹음. 포식(飽食). 포복(飽腹) *共産: 공산주의(共産主義).

을 공동(共同)으로  관리하고  소유함  *豺狼: 승냥이와 이리를 아울러 이르는 말.

 

<2019.1.4, 이우식 지음>

금, 2019/01/04-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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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급식이 아닌 학교 다닐쩍에 도시락 처먹던 세대들은 잘 알게야. 

점심시간에 애들끼리 도시락 먹으면 당연 서로 같이 싸온 반찬 나눠먹고 하는게 올바른 것이며 국가간 외교로 따지면 주는게 있으면 받는게 있는 국제적 참다운 교류인게다. 

그런데 꼭 도시락은 안 싸오고 거지새끼 처럼 염치도 없이 애들한테 밥이나 얻어 처먹고 반찬이나 축내면서 왔다갔다하는 얄미운 새끼들 있지? 

바로 이런 새끼들이 지금 북괴 빨갱이같은 새끼인게다. 

남한한테 얻어먹고 퍼가고 바라는건 졸라리 많으면서 정작 남한한테는 아무런 도움도 안되고 오히려 해만되고 말썽이나 부리는 애물딴지 개버러지 새끼들 

바로 북괴 빨갱이거지10새끼들인게다.

금, 2019/01/0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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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시빌

팔용동

목장원

주소는

창원 의창구  팔용로 494-20

박상규윤항기의 경상5회 갑짱들아!

진영당감 일세

ㅍㅏ이브

손소리통  목장원:256-6205

합천봉산똥대지가

생각나는  오마고  창원 경상고 다섯기  정기총회에서

ㅂㅗ고픈 칠팔칠구팔공의  경상고5기

황금도야지해  에는 희비 제대로 내고

경조사 스님에게  찾아 배야 대는데,

기해와기회

올겐 진짜  너거 한테 비찐거 가파야 대는데,

0110모교일  19:00에 봄세

금, 2019/01/04-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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笑筆强於刀諺

 

日本霜刀國(일본상도국)

朝鮮久筆邦(조선구필방)

如何其結果(여하기결과)

誤信正無雙(오신정무쌍)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속담을 비웃다

 

일본은 시퍼런 칼의 나라였고

조선은 오래 붓의 나라였지만

그 결과는 마침내 어떠했던가

잘못된 믿음 참으로 무쌍했네.

 

<時調로 改譯>

 

일본은 서슬도 푸른 칼의 나라였었고

조선은 오랜 세월 붓의 나라였었지만

그 결과 어떠했던가 誤信 무쌍하였네.

 

*霜刀: 서릿발같이  푸르고  날카롭게  서슬이      *如何:   형편이나 정도가

어떤가의  뜻을  나타내는 *結果: 어떠한 원인으로 결말생김. 그런 결말의

상태 *誤信: 잘못 믿음 *無雙: 서로 견줄 만한 게 없을 정도로 뛰어나거나 심함.

 

<2019.1.5, 이우식 지음>

토, 2019/01/05-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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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임종국 선생의 엄정함과 양심이 지배하는 사회를 소망하며

새해 우리 사회를 향한 나의 소망 두 개.

하나는 우리 사회가 엄정함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엄정함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패거리 짓기, 같은편 편들기와 봐주기가 지배하는 사회다.

친일연구를 하다가 알게 된 아버지의 친일행적까지도, 대학 은사 유진오 등 많은 인연 닿는 인사들까지도 “그런 저런 사정은 일체 눈을 감기로 작정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자료와, 그것을 정리한 카드 속에 묻혀서 생사를 함께 할 뿐인 것이다”라고 쓴 임종국 선생의 엄정함이 오늘날 우리 시대가 다시 불러와 기려야 할 시대정신이다.

동문이니까, 동향 사람이니까, 같은 편이니까…등등의 부족사회 수준의 감성으로 잘못된 것에 눈감고 침묵하고 봐주는 사회 분위기, 2019년에는 사라졌으면 좋겠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양심회복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썩지 않은 구석이 없다.”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내가 유학에서 돌아와 인사차 찾아뵌 교수님이 1991년에 하신 말씀이다.  그 후 한 세대 가량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 사회는 그때보다 나아졌을까?  아니다.  세상 곳곳이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로 얼룩져있다.

아예 ‘양심’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라진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무감각하거나 무관심하다.  처벌도 죄질에 비하면 솜방망이다.  앞에서 말한 엄정함이 부족한 때문이다.  그러니 어물쩍 넘어가고, 비리와 부정부패는 계속된다.  저지르는 사람들이나 그냥 넘기는 사람들이나, 양심과 엄정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수준 낮은 사회 분위기가 2019년에는 사라졌으면 하는 소망이다.

 

2019. 1. 4
민족문제연구소 제명자, 회원
여인철

토, 2019/01/05-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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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변호인단 “강제징용 기업 한국 자산 압류해달라” 강제집행 신청
아베 주장하는 ‘국제법‘ 뭐냐 질문에… 법조계 “나도 물어보고 싶다”
법조계 “‘국제법 위반했다’ 국내외 향한 ‘여론전’… 그 이상 이하도 아냐”

[법률방송뉴스=유재광 앵커] 우리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을 두고 일본이 범정부 차원에서 반발하고 있습니다. ‘LAW 인사이드’ 신새아 기자 나와 있습니다.

어제(6일) 아베 신조 총리가 뭐라고 입장을 밝힌 모양인데 어떤 내용인가요.

[기자] 네. 아베 총리가 어제 NHK ‘일요토론’ 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받은 전범기업 신일본철주금의 한국 내 자산 압류 신청에 대해 “매우 유감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반도 출신 노동자’와 관련해서 압류를 향한 움직임은 매우 유감이다”

“국제법에 근거해 의연한 대응을 취하기 위해 구체적 조치에 대한 검토를 관계부처에 지시했다”는 것이 아베 총리의 워딩입니다.

아베 총리는 그러면서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이 끝났다.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판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앵커] 아베 총리가 “매우 유감이다”고 한 전범기업에 대한 자산 압류 신청, 어떤 내용인지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죠.

[기자] 네, 지난 연말 우리 강제징용 피해자들 변호인단이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에 일본 전범기업인 신일철주금이 포스코와 함께 설립한 합작회사 ‘PNR’의 한국 자산을 압류해달라며 강제집행을 신청했는데요.

관련해서 변호인단은 지난해 두 차례 신일철주금 본사를 직접 방문해 협의를 요청했지만 신일철주금 측이 면담조차 거부하며 모르쇠로 일관하자 이에 대한 대응 조치로 한국 내 자산 압류를 신청한 것입니다.

여기다가 배상 판결을 받은 또 다른 전범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에 대해서도 비슷한 압류 절차를 진행할 계획인데요. 이에 일본 정부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앵커] 아베 총리 워딩을 보니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등 ‘국제법’을 많이 언급하고 있던데 국제법이 어떻게 돼 있다는 건가요.

[기자] 네, 안 그래도 궁금해서 강제징용 손배소송을 수행한 김세은 변호사에게 “국제법이 어떻게 돼 있어서 아베 총리가 그러는 거냐” 라고 물어봤는데요. 돌아온 답변이 걸작이었습니다.

“그 국제법이 도대체 뭔지 나도 물어보고 싶다”는 답변이었는데요. 직접 들어 보시죠.

[김세은 변호사 / 법무법인 해마루]

“아, 저희도 사실 그게 궁금한데요. 일본 측에 좀 물어봐 주셔야 될 거 같은데. 어느 국제법, 계속 아베 총리나 고노 외무상 워딩이 그래요. 국제법 위반이다, 국제법에 근거해서 조치를 취하겠다고 얘기를 하는데 어느 국제법인지 사실 국제법이라는 건 없어요.”

[앵커] “국제법이 없다”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기자] 네, 통상 ‘국제법을 어겼다’고 할 때는 김세은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구체적으로 ”어떤 국제 조약, 또는 어떤 국제 협약, 몇 조 몇 조, 이걸 위반한 거다“ 이렇게 얘기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베 총리의 워딩은 이런 게 없이 그냥 거두절미하고 “국제법 위반이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는 건데요. 국내외를 향한 ‘여론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게 김세은 변호사의 말입니다. 직접 들어보시죠.

[김세은 변호사 / 법무법인 해마루]

“사실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모호하게 그냥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엄청 ‘국제법 위반이다’ 라고 이야기 하면 우리가 되게 큰 잘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어떤 걸 위반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주장이고요”

일본 정부 일부 각료가 ‘한국에 대한 트럼프식 관세 보복’ 등을 언급하는 것도 다 이런 여론전, 보수우익 결집 등 정치적 목적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앵커] 일본 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면 어떻게 되나요.

[기자] 네,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재판을 받는 건 통상 우리가 알고 있는 재판처럼 어느 일방이 제소를 한다고 해서 바로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고요. 양 국 정부가 모두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기로 동의를 해야 재판 관할권이 국제사법재판소에 발생합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이미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새삼 국제 분쟁화 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따라서 국제사법재판소 재판은 옵션이 못 된다는 게 법조계의 설명입니다.

[앵커] 일본 정부는 저렇게 강경하게 나오는데 우리 정부는 어떻게 대처해야 될까요, 그러면.

[기자] 네, 한일청구권협정 3조 1항엔 ‘본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한 양 체약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배상업무가 종료됐다는 일본과 그건 정부 차원의 일이고 민간 차원은 다른 문제라는 게 우리 정부 입장인데요.

일단 외교 경로를 통해 풀어보고 안 되면 별도의 중재위원회를 구성한다든다 하는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의 말을 한 번 들어보시죠.

[조시현 /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한국 외교부가 지금 오늘 반응이 나왔잖아요. ‘비우호적이고,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다’고 했는데 저는 지금 단계에서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말한 것은 아닌가. 아베 정부가 제일 먼저 취할 것은 뭐냐면 협의를 해야죠. 언론 선전전을 할 것이 아니고…”

[앵커] 일본은 총리까지 나서 여론전을 펼치는데 우리 정부도 기민하게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될 것 같네요. 오늘 잘 들었습니다.

<2019-01-07>법률방송뉴스 

☞기사원문: 아베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판결”… 강제징용 변호사 “아베가 말하는 ‘국제법’은 없다”

화, 2019/01/0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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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8일 충북지부전체회원모임에서 임헌영 소장님은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사무국에 요청을 하라고 하셨고, 지난 3월 24일 정기총회에서도 의문이 있으면 언제든지 사무국에 연락을하여 문의하라고 했습니다.

2018. 12. 14. 서울시교육청은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하여 행정처분을 했습니다.
행정처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운영에 있어서 법률 또는 행정처분 기준을 위반했기 때문이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 회원들이 공유하여야 할 중차대한 사안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영업상 경영상 비밀에 관한 사항’이라며 비공개했던 총회 의사록을 교육청을 통해 입수해 확인해 본 결과
2002년 1월에도 동부교육청이 법인실태 조사후 고발 및 시정시시를 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회원은 민문연 집행부에서 어떻게 연구소를 운영했으면 고발을 당해야 했는지 그 이유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작년에 또 서울시교육청이 현장 실사를 하고, 행정처분을 했습니다.

서울시교육청이 행정처분한 공문을 제공해주시고, 회원에게 공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화, 2019/01/08-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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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그날의 조서 기록 – 그대는 어째서 독립만세를 불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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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받는 사람의 실루엣
테이블
서류뭉텅이들

전등

1919년 3월 1일

100년 전 그 날은 몇몇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다.

학교 기숙사에서, 총독부 순사로 보초를 서던 곳에서, 농촌의 민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뛰쳐 나왔던 모든 사람들의 걸음이다.

일제는 3·1운동 참여자들을 취조한 신문조서를 2000여건이나 남겼다.

참여자 200만명, 사망 7500여명, 피검자 4만7000여명이라는 규모에는 못 미치지만

당시 참여했던 민중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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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문조서 기록을 열람합니다…

3.1운동 당시 신문조서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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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다함께 만들어온 세상 100년
그대는 어째서 독립만세를 불렀는가
100년전 3.1 운동 그날의 신문기록







화, 2019/01/08-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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