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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인가, 변절자인가 – 둘로 쪼개진 ‘애국지사 김규환’과 ‘변절자 김이대’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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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인가, 변절자인가 – 둘로 쪼개진 ‘애국지사 김규환’과 ‘변절자 김이대’의 행적

익명 (미확인) | 금, 2017/07/28- 15:20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 27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 애국지사와 순국선열을 기리는 독립유공자 선정에 필수적인 자료는 매우 많다. 특히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포상을 위해 후손들의 신청을 받거나 자체 조사로 발굴할 때 독립운동 행적의 근거로 삼는 주요 문헌 중 이 글의 주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는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9), ‘통칭’ 문일민의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그리고 ‘통칭’ 김승학의 <한국독립사>를 꼽을 수 있다. 이 중 김승학과 관련한 <한국독립사>의 발간에는 우여곡절이 있어서 현재까지
1965년 9월 초판발행본(독립문화사), 1970년 6월 상·하 두 권의 증보발행본(독립문화사), 1983년 3월 단행본으로 합친 증보발행본(독립동지회) 총 3종의 ????한국독립사????가 존재한다.
다만 김승학(1881∼1964)은 ????한국독립사???? 발간을 준비하던 1964년 12월 별세해 초판본(발행인 김국보)과 상·하권 증보본 발행 당시에는 편저자(증보편집 겸 발행인 김국보)로, 세번째 증보본은 김승학·김국보 공편저자로 발간되었다.
김국보가 1983년 증보발행본의 「발간사」에 밝혔듯이, 희산 김승학은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참여 시기부터 독립운동의 역사를 남기겠다는 뜻을 품었으며 해방 후 귀국해 40여 년에 걸친 자신의 독립운동 외에도 오랫동안 수집·보관한 자료를 토대로 문일민(1894∼1968)을 발행인으로 <한국독립운동사>를 발간했다(위에서 ‘통칭’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고 국가보훈처나 관련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문일민의 <한국독립운동사>, 김승학의 <한국독립사>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 계획했던 것과 다른 점이 있어서 김승학 자신이 다시 집필하던 중 별세했고 유지를 이어 유족들이 김국보 등과 함께 작업해 1965년 초판본이 발간될 수 있었다. 국가보훈처의 경우 김승학의 <한국독립사>는 1970년 발간된 상·하 두 권의 증보본(독립문화사)을 활용하고 있다.
뜬금없이 장황하게 서지사항을 늘어놓은 이유는 총무처(현재는 국가보훈처 담당)가 1963년에 대통령표창(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이 위의 세 자료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다만 공훈자료에 기록된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은 국내의 ‘대한청년당(단)’, 만주의 동창학교·일신학교 등 애국계몽운동에 한정되어 있으며 근거 문헌으로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와 <독립운동사> 5권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보훈처가 제공하는 독립유공자의 정보와 공적사항은 세 가지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다. ① <독립유공자공훈록>(이하 <공훈록>), ②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나라사랑광장 인물찾기의 ‘독립유공자(공훈록)’, ③ 공훈전자사료관 홈페이지 독립유공자 정보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등이다. ①은 책자로 되어 있어 이후 내용과 개인정보 등의 수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②③을 통해 온라인으로 수정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공적내용은 대동소이하지만 개인정보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있어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아무튼 이를 감안해 ① <공훈록> 제1권:애국계몽운동·의병전쟁편, 1986)과 ②③의 내용을 종합해 「김규환」의 항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규환(金奎煥)
– 출생지(②) : 평북 선천
– 본적지(③) : 경기도 고양
– 생몰년 : 1890.6.12∼1941.1.13(②) ; 1890.5.25∼1935.1.10(③은 오류임-필자)
– 이명 : 없음
1909년 남형우(南亨祐)·안희제(安熙濟)·이원식(李元植)·이시열(李時說)·윤세복(尹世復)·박중화(朴重華)·김동삼(金東三)·배천택(裵天澤)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1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1911년 5월 만주 봉천성 환인현(桓仁縣)으로 망명하여 윤세복 등과 함께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해서 교포들에게 독립사상 고취와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동창학교가 폐쇄된 후에는 1915년 6월에 김광제(金光濟, 김공제 金公濟의 오류임-필자)2·이시열 등과 함께 흥경(興京)현 동로홍묘자(東路紅廟子)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여 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일신학교는 1916년에 흥동학교(興東學校)로 개칭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1면·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93·126면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김규환으로 판단되는 인물’은 1920년대 만주를 무대로 광한단(光韓團), 통의부·정의부·국민부, 조선혁명당 등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1. ③의 ‘공적조서’에는 “1909년 조직된 大同(大東의 오류-필자)靑年黨員으로 활약(항일순국의열사전 P.71, 한국독립운동사 P.91”으로만 소개되어 있다. <항일순국의열사전>은 오재식 편술로 1958년 애국정신선양회에서 발간한 것을 말한다. 다만 명칭은 ‘대동청년단’이라는 기록도 있다(<大倧敎重光六十年史>, 1971 ; 이동언, 2010 <안희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 강덕상의 <현대사자료> 27은 일본 외무성 자료에 기록된 ‘金公濟’의 誤植임에도 ????독립운동사???? 5는 원자료 확인없이 ‘金光濟’ 로 인용하면서 오류가 발생했다.


 

근거 문헌은 다름 아닌 위에서 언급한 김승학의 <한국독립사>가 핵심이다. 다만 <한국독립사> 등에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필자가 언급한 ‘김규환으로 판단되는 인물’의 행적이 ‘김이대(金履大)’의 행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김규환과 김이대가 동일인이라는 판단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인가?
김승학이 발간에 관여한 <한국독립사>·<한국독립운동사>에는 간혹 “변절”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것은 특정 인물이 한때 독립운동을 했지만 어느 시점에 일제에 협력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독립운동가 김승학·문일민’이 필생의 업적으로 남긴 자료에 직접 “변절”을 지목했다면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안이다.
<한국독립사>·<한국독립운동사> 등에 독립운동 관련 행적은 ‘김규환’으로, 이외 1920년대 만주에서 활동한 행적과 “변절” 행적은 ‘김이대’로 기록되어 있어 언뜻 두 사람을 별개의 인물로 오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김규환’은 애국계몽운동 계열 독립운동으로 서훈이 추서되었고 ‘김이대’는 변절자로 분류되어 서훈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확인 가능한 모든 자료를 비교해 볼 때 김규환과 김이대는 ‘동일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한국독립사>·<한국독립운동사> 등에 기록된 1920년대 ‘김이대’의 행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3

14

<매일신보> 1929.12.5. 2면

 

이처럼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김이대가 왜 변절했을까? 사실일까? 한동안 의문만 갖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김이대의 변절’과 관련된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매일신보>에 보도된 김이대의 체포 기사이다. “[신의주] 국민부 지방(집행의 오기-필자)위원장 김이대와 동부 혁명군 제1지휘장 이웅은 지난 11월 초 신빈현에서 중국관헌의 손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는 중이라는데 국민부의 맹렬한 운동으로 중국관헌은 전기 범인을 석방할지도 모른다 하여 총독부 당국에서는 이를 주시중이라더라”(「구금된 국민부 집행위원장, 부원이 석방운동」).
체포 이후 김이대의 행적은 알 수 없지만 다음 두 자료에는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어느 때, 적어도 1935년 전후 시기에는 김이대가 변절한 것이 사실로 확인된다.
첫 번째 자료는 <삼천리>(1936.1)에 필자 미상의 글로 소개된 ‘만주의 조선인 낭인들’ 중 「김이대」 항목이다. “씨는 한동안은 운동의 거물로서 XX부의 한사람으로 있었으나 사변(만주사변-필자) 이후에는 귀순하여 협조회위원회장(協調會委員會長)의 직을 맡았다고 한다”(「만주와 북중국의 백의풍운아군(白衣風雲兒群)」).15

두 번째 자료는 조선민족혁명당 기관지 <전도(前途)> 제13호(1937.5.24)에 실린 「사설: 적의 전술」 중 일부 내용이다. “반동의 수괴라고 할 수 있는 자로 조선 내에서는 최린·최남선 등이 있으며, 이들은 3·1운동을 통해 소위 애국지사가 되어 노(老)선배라는 허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만주에는 김이대가 있다. 김이대는 과거 만주에서 만주동포참살의 혈채(血債)를 산적(山積)했는데 지금은 적의 협화회(協和會)의 수괴로 만주에서 적과 악전고투하는 혁명동지를 계속 도살하는 음모에 몰두하고 있다. (중략-원문) 목하 적의 음모의 마수는 조선민족혁명당 파괴에 이르고 있다”(「출판물허가의 이유 및 기사 해당요지(집무자료)」 <조선출판경찰월보> 제106호, 1937.7).
출판 ‘금지사유’로 “제국의 대륙정책을 비방 곡설함으로써 국제관계를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앙양하므로”라고 밝히고 있다.
정리하면 김이대는 1929년 11월 초 중국관헌에 체포되어 ‘아마도’ 조선총독부에 인계되어 회유와 협박을 받았을 것이고,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1935년 전후에 변절해 ‘간도협조회’와 ‘만주국협화회’의 간부로 활동한 것이다. 1935년 전후 변절로 추정하는 이유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이 제공하는 자료에 김이대가 1933년 말경까지 흥사단(興士團) 원동(遠東) 제5반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또 간도협조회(일명 선민협조협회·조선인협조협회)가 1934년 9월 옌지(延吉)에서 조직되어 ‘반만(反滿) 항일운동’의 예봉을 꺾고 만주국의 ‘치안유지’ 공고에 앞장선 친일단체이고 1936년 12월 만주국협화회로 합병되었으므로 위 두 자료의 김이대의 행적과 일치한다. 따라서 간도협조회 설립(1934.9) 이후 만주국협화회로 합병(1936.12) 이전인 1935년 전후에 변절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과 김이대의 변절 행적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김규환과 김이대가 ‘동일인’이라는 것은 어떻게 밝힐 수 있을까? 결정적인 단서는 김이대가 흥사단에 가입하면서 제출한 「흥사단우 이력서」(이하 「이력서」)에 원래 이름이 ‘김규환’이라고 직접 기록한 것이다.
「이력서」는 도산안창호선생전집편찬위원회 편, <도산안창호전집> 제10권:동우회Ⅱ· 흥사단우 이력서(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에 원본이 수록되어 있다(한국독립운동정보 시스템에서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흥사단 단우는 ‘통상단우’, ‘특별단우’, ‘예비·기타 단우’로 분류된다. 통상단우는 제1∼제309단우까지 단우번호가 부여되어 있으며 단우번호 없이 ‘특별단우’ 36명, ‘예비·기타 단우’ 110명 총 455명의 ‘단우 이력서’가 확인된다. 김이대는 평양 대성학교 출신으로 ‘동우구락부’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926년경 흥사단에 입단한 것으로 봐서는 ‘수양동우회’ 시기로 추정된다. 김이대는 ‘예비·기타 단우’로 분류되어 있다.3

16

1892년 평북 선천 출생의 김이대가 1926년 흥사단에 가입했으며 이전 이름이 “(김)규환·(김)검군·사헌”이라고 했으므로 ‘직업’란의 행적과 김규환·김이대로 각각 검토했던 행적이 100% 일치한다. 특히 「이력서」를 통해 김규환=김이대로 판단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는 김이대의 ‘가족’란 기록 중 “처 : ○씨, 자 : ○○·○○”와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어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 안장되어 있는 ‘애국지사 김규환’의 가족관계 및 출생지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또 「이력서」 ‘단체’란에 마지막 행적이 정의부라는 기록과 김승학 등의 자료에서 정의부 관련 행적(<대동민보>주간)이 1926년 9월 전후라는 기록도 일치한다.


3. 흥사단은 1913년 5월 안창호의 주도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되어 무실·역행·충의·용감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일제강점기 국내외에 지부를 설립하고 실력양성운동에 힘썼다. 국내에도 조직사업을 펼쳐 1922년 서울에 수양동맹회를, 1923년 평양에 대성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동우구락부를 결성했으며 두 단체는 1925년 수양동우회(1929년 동우회로 개칭)로 합쳤으나 1937년 이른바 ‘동우회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이후 김규환=김이대가 3부통합으로 성립된 국민부에서 활동하다가 1929년 11월 체포되었으며 1935년 전후 변절해 간도협조회와 만주국 협화회에서 활동한 정황은 김승학이 <망명객행적록>에서 밝힌 것에서도 확인된다. 김승학은 1930년대 중반 환인현 일본영사관 소속으로 독립운동가를 귀화시키는 사업에 앞장섰던 인물이 ‘만주국 선무반 책임자 김이대=김검군’이라고 지목했다. 이것은 김이대가 「이력서」에 기록한 이전 이름 중 ‘검군’이라는 사실과도 부합한다.

17

1935년 4월 12일 평양부 암정(岩町) 형무소에서 출옥 …… 자식 3형제 중에 2인은 전일(前日) 참의부 소재지인 남만주 환인현 방면으로 간 지가 2년이라고 한다. …… 그해 8월에 자식형제를 찾기 위하여 다시 남만주 환인현으로 들어갔다. …… 자식의 소재처를 탐문한 즉 수삭(數朔) 전에 환인현 왜(倭) 영사관에 피착되어 간 후 소식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이후 환인현 성리(城裡)로 갔더니 성내는 전일에 독립군 간부 인물로 명성을 날리던 김모(金某), 고모, 문모, 최모, 변모 제인(諸人)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면서, 선무반(宣撫班) 명색(名色)으로 세력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선무반에서 하는 업무는 전일의 독립운동자들을 만주국에 귀화시키는 사업인 것이다. 나는 증전(曾前)에 안면이 있던 김모를 찾아가서 자식의 행방을 탐문하였다. 이때 그의 답은, ”선생의 자제 영달(榮達), 영저(榮渚) 형제는 수년 전에 이곳 환인·통화 경내에 와서 외면으로는 농업을 하노라 하면서, 이면으로는 선생의 구(舊) 동지들과 연락하여 비밀음모를 한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나는 이때 그의 다음 말을 듣기 위하여 듣고만 있었다. 그는 다시 말하기를, “지금이라도 선생이나 자제가 이 선무반에서 같이 행동하신다면 무사할 것 아니겠습니까?” ……
그 이튿날 봉막돌(奉莫乭)이라는 청년이 내 여관으로 찾아왔다. 그는 환인현 동영영구(東英英溝)에서 백가장 일을 보던 봉태주(奉泰周)의 차남으로 이전에 영영구 보안대원으로 근무하던 자로서 지금은 만주국 선무반에서 저들과 같이 독립군 귀화설론(歸化說論)을 하고 다니던 사람이다. …… 그의 말은 이러하다. “어제 밤 우리(만주국 환인현 일본영사관 소속-필자) 선무반 책임자 김검군(金劒君) 선생님네가 말씀하시는 것을 듣사온즉 선생님이 오신 듯 하기에 지금 찾아왔습니다. 감옥에는 언제 나오셨으며,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나는 이 말을 듣고 간단하게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자네의 상관인 김검군(金劒君)을 만나게 되어 사실을 묻고 있는 중일세. 자네 혹 내 자식 형제들에 대해 들은 일이 없는가?” …… 전일에 환인현에서 김이대(金履大)가 나를 보고 선무반에 참가하면 내 자식을 방송한다고 하던 것이 그들의 음모임을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단기는 서기, 밑줄·강조 등은 필자)

<망명객행적록(亡命客行蹟錄)>은 김승학이 78세 때인 1958년에 자신의 일생과 독립운동일대기를 회고한 글이다. 후손 김병기가 일부 내용을 현대적 표기로 수정·보완하여 원문 전체를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2집(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1998.12)에 처음 공개하였다. 이후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문체와 문장 등을 쉽게 다듬어 2011년 후손(막내 손자) 김창업(사단법인 희산김승학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이 단행본으로 발행하였다.
지금까지 ‘독립운동가·애국지사 김규환’과 ‘변절자 김이대·김검군’은 동일인이라는 것을 추적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규환이 김이대라는 근거는 「흥사단우 이력서」와 ????망명객행적록????,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 안장되어 있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이대가 ‘만주사변 후 변절’했다고 기록한 <한국독립사>와 <한국독립운동사>는 국가보훈처가 독립운동가의 행적으로 인용하는 1차적인 근거자료이다. 이 두 자료가 변절자로 기록한 김이대는 1929년 11월 중국관헌에 체포되었으며 조선총독부가 이를 주시하고 있다는 <매일신보>의 기사도 확인된다. 다만 1933년 말까지 흥사단원으로 활동한 것이 확인된 만큼 변절 시기는 간도협조회 조직(1934.9)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1935년 중반에 ‘김이대=김검군’이 환인현 일본영사관 소속으로 만주국 선무반 책임자이며 독립운동가의 귀화업무를 담당했다는 기록(<망명객행적록>), 그리고 그 단체가 간도협조회이며(<삼천리>) 간도협조회가 만주국협화회로 통합된(1936.12)후 ‘김이대’가 “협화회 수괴로 만주에서 적과 악전고투하는 혁명동지를 계속 도살하는 음모에 몰두”하고 있다는 자료(<전도>, <조선출판경찰월보>) 등을 통해 ‘김규환・김이대・김검군’이
동일인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과 김이대·김검군의 변절 행적은 언젠가 학술적으로 정리될 필요가 있다. 공훈자료에는 김규환의 애국계몽운동 행적만 드러나 있지만 그가 김이대와 동일인으로 확인되었으므로 독립운동 관련 행적도 새로 정리되어야 한다. 예컨대 김규환과 윤세복·이시열은 대동청년단원으로 활동했으며 모두 동창학교·일신학교(1916년 흥동학교로 개칭)와 관계가 있다. 전자는 대종교 제3세 교주 단애 윤세복(1881∼1960)이 1911년 5월(음력) 설립한 학교이고, 후자는 대종교인(호 단총)으로 이후 불교에 귀의한 이시열(1892∼1980, 운허큰스님)과 함께 1915년 6월에 직접 설립한 학교이다. ‘검군’이라는 별명도 대종교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과 김이대의 변절 과정 및 이후의 행적은 이민족의 통치를 받던 엄혹한 시기에 겪었던 동일한 인물의 노정이다. 동시에 우리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기록이기에 반드시 제대로 정리되어야 한다.

∷ 이용창 편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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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회계의 ‘회’자도 모르고, 재무재표의 ‘재’자도 모르는 회계의 비전문가입니다.
재무재표를 어떻게 보는지도 모르고 자산, 부채, 계정항목 등….. 모르는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더하기, 빼기는 할 줄 압니다.
하지만 숫자머리가 별로 없어서 암산은 잘 못합니다.

그래서 큰 숫자를 더하(+)고 뺄(-)때에는 꼭 계산기를 사용합니다.
더하고 뺄 숫자가 많으면 엑셀로 표를 만들어 합계를 계산합니다.
엑셀 계산이 정확한지 검증은 못했지만,
숫자 좀 쓴다는 곳에서는 모두 엑셀을 사용하고 있어서 저도 엑셀의 계산결과를 믿고 사용합니다.

고작 더하기, 빼기나 할 줄 아는 회계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먼저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여러 회원이 연구소의 회비와 후원금 문제를 얘기하고 있고,
지난 6월 23일 운영위원회에서 ‘재무재표도 볼 줄 모르는 김땡땡이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해서
‘김땡땡’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엉뚱한 소리를 하는지 알아보고 싶어서입니다.

제가 검토한 자료는 민족사랑 말미에 수록된 결산서, 총회자료집에 수록된 운영성과표
그리고 지난 6월 23일자 운영위원회에서 배포한 2018년도 월별 입금 현황(15쪽)입니다.

각설하고 질문 드립니다.

1. 민족사랑과 2017년 자료집의 수입 관련
-2016년도 민족사랑에 보고된 월별 결산서의 “회원회비 등 기부금”의 12개월 치 총 합계는?
-2017년도 정기총회자료집 운영성과표의 “회원회비 등 기부금”의 총액은?

*민족사랑의 ‘회원회비 등 기부금’의 합계는 재무재표가 뭔지도 몰라도 됩니다.
더하기 빼기를 할 수 있다면 누구나 합계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손가락 열개, 발가락 열개를 사용해 숫자를 세는 꼬맹이들은 할 수 없습니다.

금전출납부 정도만 쓸 줄 아는 회계의 비전문가인 제가 볼 때
민족사랑의 결산서 합계(12개월 치)와 총회자료집의 합계는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계산을 잘못했는지 큰 차이가 납니다.

-제가 계산을 잘못했을 수 있으니 위 두 개의 질문에 꼭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서로 다르면 왜 다른지 설명 해주시기 바랍니다.

2. 2018년도 1월~3월 까지의 총수입에 대해서 질문 드립니다.
인용한 자료는 민족사랑에 수록된 월별 결산서와 6월 23일자 운영위원회 회의자료집입니다.
월 : 민족사랑 / 운영위원회 회의 자료집
1월 : 132,982,553 / 131,295,000
2월 : 127,887,590 /126,904,000
3월 : 126,114,690 / 124,145,000
*제가 여러 번 확인했지만 오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질문입니다.
이건 계산 문제도 아닙니다.
사무국과 운영위원회에서 직접 작성한 문건의 숫자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고
그냥 눈으로 확인하면 됩니다.

민족사랑 결산서는 우리 회원에게
매월 수입, 지출현황 그리고 잔액이 얼마인지 확인해주는 공식 보고서(?)입니다.

그런데 운영위원회에 보고한 내용이 회원에게 보고한 내용이 서로 틀립니다.

그리고 금액은 물론 수입 항목도 틀립니다.
민족사랑에는 수입항목에 ‘역사와책임’이 없는데, 운영위 회의자료집에는 ‘역사와책임’이 있습니다.

‘역사와책임’은 숫자 문제도 아니고, 한글만 읽을 줄 안다면 누구나 서로 틀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한글을 오래전에 터득했으니 제가 잘못봤을리는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무국은 회원과 운영위원회에게 서로 틀린 보고를 한 것입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둘 중에 하나는 허위보고라는 것입니다.

왜 허위보고를 했는지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목, 2018/06/2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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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가 짓밟던 김백일에 
김구 암살 배후범 김창룡까지
‘친일인명사전’ 인물들 현충원에

항일운동가 짓밟던 김백일에
임정 요인·독립운동가 묘역은
근린공원·북한산 등에 뿔뿔이

현충원 선열들 친일파 ‘발 밑’에
“친일파 국립묘지 안장 막고
효창공원 성역화 서둘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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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서울현충원에 마련된 김백일의 묘./김경욱 기자

무더운 날이었다. 묘역 사이로 난 아스팔트 길은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고, 잔디가 깔린 묘소 위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지난 1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는 6월의 뙤약볕이 가득 내려앉았다.

‘육군 중장 김백일’(본명 김찬규)은 그 정돈된 땅에 묻혀 있었다. 그가 묻힌 ‘장군 제1묘역’은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 다음으로 서울현충원에서 높은 곳이다. 김백일의 묘비에는 “6·25 사변이 돌발하자 제1군단을 지휘하고 북진의 선봉이 되어 그 용맹을 국내외에 과시하였다. 함흥 지구에서는 십만의 피난민을 보살펴 남하케 하는 등 실로 지, 인, 용을 겸비한 장군이었다”고 쓰여 있었다.

묘비에는 ‘전쟁 영웅’으로 적혀 있지만, 김백일은 대한민국과 한민족을 배반한 자다. 2005년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2009년 공식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그가 포함돼 있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도 올라 있다.

친일인명사전을 보면, 김백일은 1938년부터 7년 동안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다. 그는 간특대에서의 활동 공로로 1943년 일제로부터 만주국 훈장인 훈5위 경운장까지 받았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간도특설대는 1930년대 후반 간도협조회, 신선대 등과 함께 가장 악랄하게 조선인 항일 운동가들을 탄압한 3대 악질 조직 중의 하나”라며 “김백일은 최후까지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간도특설대의 해산 업무까지 맡았다”고 말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인 김백일이 국립묘지에 묻힌 것은 해방된 조국에서 장성으로 복무했기 때문이다. 그는 해방 뒤 1946년 오늘날 국군의 모태가 된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했고, 제3사단장 등을 지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제1군단장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195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뒤에는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고,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까지 받았다. 국립묘지 안장 대상자 등을 규정하고 있는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는 ‘장성급 장교로 전역·퇴역한 뒤 사망한 이와 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을 갖는다’고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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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일처럼 국립묘지인 현충원에 안장된 친일파는 모두 63명에 이른다. <한겨레>가 국가보훈처에 요청해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국립묘지 안장자 현황’을 보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가운데 63명이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다. 이 가운데 김백일, 김홍준,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백낙준, 김석범, 백홍석, 송석하, 신현준 등 11명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결정한 친일파다.

이들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간부로 복무하면서 항일 운동가들을 탄압하거나 일본 제국주의에 헌신한 인물들이다. 김홍준과 김석범, 송석하, 신현준은 김백일처럼 항일세력을 탄압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고, 해방 뒤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종찬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소좌 출신이다. 특히 이종찬은 일제로부터 무공훈장인 금치훈장을 받았는데,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가운데 금치훈장을 받은 이는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그가 유일하다. 해방 조국에서 국방부장관을 지낸 신태영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중좌로 복무했고, 그의 아들 신응균도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일본군 소좌로 활동한 친일 인사다. 백홍석과 이응준은 각각 일본군 중좌와 대좌로 복무했다. 이들 10명의 친일인사들은 대체로 광복 뒤, 장성급 장교로 대한민국 육군 또는 해병에서 근무한 공로로 국립묘지에 묻혔다. 연세대 초대 총장을 지낸 백낙준도 일제의 대동아 구상을 찬양하고 교회 신도들을 대상으로 전쟁에 쓰일 전투기인 ‘애국기 헌납 운동’을 벌인 대표적 친일 일사지만, 제2대 문교부 장관을 지내는 등 국가사회공헌을 인정받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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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서울현충원의 이종찬 묘.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가운데 금치훈장을 받은 이는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이종찬이 유일하다./김경욱 기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대표적 인물인 김창룡도 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다. 그는 일본 관동군 헌병 오장(하사)으로 항일 운동 조직을 색출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악랄하게 고문했다. 김창룡은 항일 운동 지도자인 백범 김구를 암살한 배후 인물로도 지목됐다. 백범을 암살한 안두희는 범행 43년 만인 1992년 4월 “(이승만 정부의) 특무대장 김창룡의 지시로 백범을 암살했다”고 고백했다. 김창룡은 2005년 여야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박정희와 함께 ‘적극적이고 악질적으로 우리 민족을 괴롭힌 현저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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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배우 인물로 지목된 김창룡의 묘가 국립대전현충원에 자리해 있다. 김창룡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있다./ 이종근 기자 [email protected]

이렇게 친일파들이 국립현충원에 묻힌 것은 물구나무선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을 잘 보여준다. 김창룡이 암살을 지시한 백범 김구를 비롯해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 이동녕·조성환·차리석 선생 등은 근린(동네)공원으로 관리되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묻혀 있다.(<한겨레> 5월31일치 1·4·5면) 이준 열사와 손병희, 신익희, 김창숙, 이시영, 여운형 선생 등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의 묘소도 강북구 북한산 자락에 흩어져 있다.(6월8일치 2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국립묘지에 누워 있고,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은 근린공원 등에 방치된 것이다.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들의 상황도 나을 게 없다. 박은식, 양기탁, 이상룡 등이 안장된 서울현충원의 ‘임정 묘역’과 권동진, 권병덕을 비롯해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이 연기한 안옥윤의 모델이었던 남자현 등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애국지사 묘역’은 이응준, 신태영 등 친일파가 묻힌 ‘장군 제2묘역’ 아래에 조성돼 있다. 항일 운동가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발아래 잠든 것이다.

국립현충원에 조성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묘를 강제로 이장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현행법상 이미 국립묘지에 안장된 사람을 재심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6·25전쟁 등에 기여했기 때문에 이들의 안장 자격이 취소되지 않는 한 강제로 이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친일파라고 해도 장성급 장교로 이미 안장자격을 얻어 묻혔다면 이장이 어렵다는 설명이다. 박성행, 이동락, 김응순, 박영희, 유재기, 윤익선, 이종욱, 임용길, 김홍량 등 군 장성 출신이 아닌 친일파 9명이 2014~2015년 국립묘지 밖으로 이장된 사례가 있다. 하지만 이들의 경우, 독립유공자 서훈이 국무회의에서 취소됐기 때문에 이장이 가능했다.

이 때문에 현재 국회에는 더불어민주당의 권칠승, 김해영 의원 등이 각각 대표 발의한 국립묘지법 개정안이 제출돼 있다. 친일파의 국립묘지 안장을 막고, 이미 안장된 자의 묘를 강제로 이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국가보훈처장 또는 국방부 장관에게 ‘이장 요구’ 등의 권한을 주는 내용이다. 권칠승 의원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일제에 협력해 민족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들로 국립묘지에서 배제하는 것이 당연한데, 현행법에 근거 규정이 없다”고 개정 이유를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군인묘지 성격이 강한 국립현충원과 별도로, 역사가 외면해 온 독립운동가의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해 백범 등 대한민국 독립과 건국의 아버지들이 묻힌 효창공원을 국가 차원의 민족·독립 공원으로 격상시키는 일에도 속도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홍소연 심산 김창숙 선생 기념사업회 전문위원(전 백범김구기념관 자료실장)은 “국립서울현충원은 6·25전쟁 뒤 국군 묘지로 만든 곳이다. 효창공원이야말로 오로지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마련한 대한민국의 첫 국립묘지다. 하루 빨리 효창공원을 성역화하는 것이 애국자들의 영예를 높이는 길”이라고 말했다.

김경욱 기자 [email protected]

<2018-06-28> 한겨레

☞기사원문: 국립묘지 묻힌 친일파 63명…독립운동가는 공원에 냉대

목, 2018/06/2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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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기념치유센터, ‘유엔 국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고문피해자 결의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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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태기념치유센터와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가 25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유엔 국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 박해전

“정부는 고문조작사건 피해자들과 사법농단 피해자들에 대해 완전한 명예회복과 정의로운 배상을 즉각 시행하라.”

고문조작 국가범죄 피해자들을 비롯한 인권단체들은 25일 김근태기념치유센터와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 주최로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유엔 국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기념행사 고문피해자 결의대회’ 결의문을 통해 “대한민국은 이미 인혁당과 같은, 많은 고문조작사건 피해자들에게 죽음보다 깊은 상처를 가한 바 있다”며 이렇게 요구했다.

이들은 또 “정부는 고문가해자의 훈포상을 즉각 취소하고, 양승태 전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농단의 주범들을 적극 수사하고 처벌하라”며 “국회가 중단된 과거사의 진실규명을 위해 ‘진화위법’을 즉각 개정하고 고문 방지와 고문피해자 지원법안을 즉시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함세웅 신부(김근태기념치유센터 공동대표)는 여는 말에서 “매년 6월26일은 유엔이 정한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로 이 땅의 수많은 고문피해자들을 기억하고 이들의 희생에 존경을 표하는 날”이라며 “그들의 희생을 거름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자라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함 신부는 “촛불혁명 이후 우리 사회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며 “이제는 독재와 분단으로 인한 고문과 같은 가혹한 폭력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인권 평화 국가를 만들어가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한 첫걸음으로 국가는 고문피해자들의 삶의 회복을 위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재근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 대표의원은 인사말에서 “적폐를 청산하고 상식이 통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촛불혁명에서 정권교체, 이번 지방선거까지 이어지는 국민의 준엄한 명령”이라며 “고문으로 인한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는 그날까지 국가와 사회, 우리 모두가 노력하는 것, 폭력의 역사를 뼈아프게 기억하고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힘을 모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의이자 적폐의 청산”이라고 밝혔다.

인 의원은 또 “고문의 끝을 꿈꾼다”며 “진정한 ‘고문의 끝’은 ‘고문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문의 상처가 없는 세상’이다. 고문의 상처가 모두 치유되는 그날을 위해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전영순 인혁당사건 피해자 가족은 고문피해자 증언에서 “지금도 눈물이 마르지 않고 고통은 끝나지 않고 있다”며 “인혁당재건위사건 국가배상 판결을 담당했던 대법관 4인 신영철 차한성 안대희 박시환을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부역한 불의한 재판관으로 고발한다”고 말했다.

증언자는 “인혁당사건 피해자와 가족들은 1심 판결 결과로 35년치의 피해배상금을 전액이 아닌 65퍼센트를 가지급받았다”며 “그러나 이 사건을 맡았던 대법관 4인은 하급심으로 파기환송하지 않고 피해기간 30년을 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기산점을 변경해 판결하며 주었던 배상금을 다시 빼앗아 갔다”고 규탄했다.

증언자는 또 “사법 판례에 유례없는 오점을 남긴 판결이 아닐 수 없다. 빨갱이 자식으로 35년을 고통받았는데 30년 고통을 이유 없이 피해기간에서 빼버린 것”이라며 “동일사건 사형수 피해자 8명에 대해서는 피해발생시점을 기산일로 100퍼센트 전액 배상한 것과 달리 장기 수감수 가족에게만 기산일을 변경해 형평성 없이 판결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양기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는 대법원의 적폐와 관련해 “국가배상금의 이자 산정 기산일의 경우, 다른 일반 사건에는 피해가 일어난 시점을 적용하고 있지만 과거사 재심 사건에는 안된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모순이자 차별”이라며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 침해”라고 밝혔다.

증언자는 “대법원은 2011년 1월 박시환 신영철 안대희 차한성 대법관들이 판결한 사건들을 재심의하여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며 “어떠한 연유로 느닷없이 형식과 절차를 무시한 채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판결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결의대회에 참가한 5공아람회사건반국가단체고문조작국가범죄청산연대는 자료집에 수록된 ‘아람회사건 국가범죄 청산을 짓밟은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사법농단’ 제하의 글에서 “아람회사건은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을 탄압한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사법농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며 “박근혜 정권은 2015년 박근혜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 김지하 사건은 서울고법 국가배상 판결을 확정 처리하고 문재인 대통령 후보 지지선언을 한 아람회사건 피해자들의 서울고법 국가배상 판결은 대법원에서 짓밟았다”고 밝혔다.

이들은 “서울고법이 인정한 아람회사건 일실수입 국가배상을 김지하 사건과는 딴판으로 모두 무효화한 박근혜 정권의 대법원 사법농단은 반국가단체 고문조작 국가범죄를 부정하며 과거사 청산을 짓밟은 또 하나의 국가범죄로서 원천무효”라며 “박근혜 정권의 청와대와 대법원은 ‘주요 재판사건 처리시 비공식적인 대화 채널을 적극 가동하는 기조를 유지했다’고 특별조사단 3차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특검을 통하여 아람회사건 피해자들을 짓밟은 박근혜 정권과 대법원의 정치공작의 전모를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들은 또 “‘국가는 아람회사건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를 문재인 정부가 하루빨리 이행하기를 바란다”며 “문재인 대통령과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적폐 청산과 피해자 원상회복을 위한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 소장이 사회를 맡아 ‘고문피해자의 삶의 회복을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주제로 진행된 이날 행사는 민가협 유가협 민청학련계승사업회 민청련동지회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 인권재단들꼿이 공동주관하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광주트라우마센터가 후원했다.

<2018-06-26> 신문고 뉴스

☞기사원문: “고문조작 피해 정당한 배상 즉각 시행하라”

금, 2018/06/2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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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금통 깬 학생, 독립운동가 후손, 영화인 배성우·임순례도 기부 동참
민족문제연구소 “시민 손으로 만드는 최초의 근현대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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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역사박물관

(서울=연합뉴스) 성서호 기자 = 오는 8월 29일 경술국치 108주년을 맞아 개관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시민 기부가 끊이지 않고 있다.

고액 기부자는 물론 가족 단위 기부자에 저금통을 깬 어린 학생까지, 박물관 건립위원회가 발족한 이후 8년간 14억 원 넘는 시민 성금이 모였다.

1일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2011년부터 이달 18일까지 모인 성금은 14억5천만 원에 달한다. 국내·외에서 약 5천명의 시민이 성금을 보내왔다.

개관을 앞둔 최근에는 기부가 더욱 늘고 있다는 게 연구소의 설명이다. 연구소 관계자는 “지난달 23일부터 이달 18일까지 525명(단체 포함)이 1만 원부터 2천만 원까지 총 9천여만 원을 건립기금으로 기탁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특히 가족 단위 참여가 늘고 있는데, 이들의 기금에는 후세가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잊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담긴 것 같다”며 “연구소에 장기 근속한 상근자 일부는 퇴직금 전액을 기부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문환이·곽경택 부부는 2016년 10월 8일 결혼 5주년을 맞아 박물관 건립기금으로 36만5천 원을 전달했다. 이 부부가 해마다 진행 중인 ‘결혼기념일 기념 365기부’의 하나였다.

독립운동가 김남곤 선생의 후손 김분희 씨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국가배상 소송으로 받은 배상금 일부를 건립기금으로 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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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감독 임순례(좌)·배우 배성우
(서울=연합뉴스) 오는 8월 29일 경술국치 108주년을 맞아 개관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시민 기부가 끊이질 않고 있다. 영화감독 임순례 씨와 배우 배성우 씨의 기부도 뒤늦게 알려졌다.

배우 배성우 씨와 영화감독 임순례 씨의 기부도 뒤늦게 알려졌다.

배 씨와 임 씨는 각각 2015년과 2017년 민족문제연구소 측에 건립기금을 전달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이들의 이름을 보고 처음에는 ‘동명이인’인가 했다”며 “박물관에 관한 언론 보도 등을 보고 좋은 취지라고 생각해 조용히 기부하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거액을 기부하고도 이름을 밝히지 않는 분까지 많은 시민이 기금을 보내주셨다”며 “다양한 계층에서 박물관 건립에 참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10만 원 이상 기부자는 박물관 건립 발기인으로 등록된다. 이들의 이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입구에 마련되는 ‘기억의 벽’ 명판 위에 새겨진다.

연구소 관계자는 “공적 자원 도움 없이 한국과 일본 시민들이 보내주신 자료와 기금으로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며 “이렇게 다양한 분들이 기증한 자료를 가지고 전체 근현대사 다루는 박물관은 최초일 것”이라고 말했다.

[email protected]

<2018-07-01> 연합뉴스

☞기사원문: 8년간 시민 성금 14억원…’식민지역사박물관’ 내달 문 연다

일, 2018/07/01-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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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 한강변 언덕 위에 한강신사가 건립된 까닭은?
– 서울 지역 곳곳에 포진한 일제 침략신사들의 흔적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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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강신사 터를 활용하여 지난 1994년에 재건된 ‘효사정’의 모습.

 

한강대교를 남쪽으로 건너 서울현충원 방향으로 500미터 남짓 걷다보면, 지하철 9호선 흑석역(중앙대입구)에 조금 못 미쳐 한강변 쪽으로 약간 솟아오른 작은 봉우리 하나를 만나게 된다. 1955년 6월 25일에 건립된 학도의용병현충비(學徒義勇兵顯忠碑) 앞을 지나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효사정(孝思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나타난다.
효사정은 원래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의 별서(別墅)였다고 전해지는 유적이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했던 곳에다 정자를 짓고 때때로 이곳에 올라 모친을 그리워했고, 멀리 개성 땅에 묘지를 쓴 부친을 추모했다고 하여 ‘효사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기금천현(衿川縣)‘누정(樓亭)’조에“노량나루터 남쪽 언덕에 있는 정자”라는 정도의 간략한 내용이 남아 있긴 하나 사실상 이것만으로는 더 이상의 정확한 원위치 고증이 어려운 상태이다.
하지만 지난 1994년에 서울 정도 600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리는 사업의 하나로 한강주변의 유적지를 복원 정비하는 계획이 추진되었고 이때 편의상 부득의하게 지금의 자리를 선정하여 정자를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곳이 진짜 효사정 자리인지에 대한 논란을 차치하고라도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강 쪽 전망이 참으로 빼어나다는 점에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장소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내내 ‘한강신사(漢江神社)’라는 시설물이 터를 잡고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도 꼭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후지이 가메와카(藤井龜若)가 펴낸 <경성의광화(京城の光華)>(조선사정조사회,1926)를 보면, 이한강신사의 건립유래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한강신사는 인도교(人道橋)를 건너 동쪽의 작은 언덕에 숲속에 한줄기 끈과 같은 가느다란 길이 산꼭대기까지 걸쳐 있는데 그 산부리의 약간 높은 상두산령(象頭山嶺)의 영지(靈地)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신(祭神)은 미야지대사(宮地大社), 코토히라대신(金刀羅大神), 스가와라대신(菅原大神)의 삼신(三神)으로 인도교 가교 청부인(請負人)이던 시키 노부타로(志岐信太郞) 씨가 대정 원년(1912년) 금상폐하(今上陛下, 대정천황을 말함)의 즉위를 기념하고 아울러 고국을 멀리 떠나온 재선민(在鮮民: 조선 거주 일본인)을 비롯하여 동포선인(同胞鮮人)에게 경신숭조(敬神崇祖)의 미풍을 가르치려는 돈독한 뜻에 따라 이곳 산자수명한 정지(淨地)를 택해 사재 십수 만 원을 들여 한강수호의 신으로 삼아 헌립(獻立)한 것이며, 매년 봄가을(5월 4일, 10월 4일)에 행해지는 대제례일에는 내선인의 참배자가 원근에서 운집하여 번잡함이 흡사 대공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섭사(攝社)에는 이나리신사(稻荷神社), 시키신사(志岐神社), 야신신사(矢心神社)를 모시며, 이 지역은 예로부터 영산(靈山)으로서 조선인들이 숭배하던 곳이다. 경내의 바위 사이에는 기이한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와룡송(臥龍松)이라 부르는 유명한 나무로 수령이 수백 년이 넘는 신목(神木)이다.

 

여기에 나오는 시키 노부타로는 1869년생으로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출신이며, 자신의 토목건축회사인 시키구미(志岐組)를 통해 경부철도 속성공사를 비롯한 철도관련 청부업에 주력하여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1921년에 조선의 특산물이라고 일컬어지던 천연빙(天然氷), 즉 겨울철 한강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 판매하기 위해 조선천연빙주식회사 및 조선천연빙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36년에 이들 회사와 여타 제빙회사가 조선제빙주식회사(朝鮮製氷株式會社)로 통합 전환한 이후에도 사장의 자리를 지킨 바 있다. 따라서 그는 이래저래 한강과는 많은 인연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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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1934년 12월 2일자에 수록된 토끼사냥 야유대회관련 명수대 주변 약도에는 ‘한강신사’의 위치가 또렷이 표시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에 ‘화장사’라고 표시된 사찰은 오늘날 서울현충원 구내에 있는 ‘호국지장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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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신사가 자리한 흑석동 한강변의 풍경. (<일본지리대계(조선편)>, 신광사,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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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기노시타 사카에가 개발을 주도한 명수대 주택지(현 흑석동)의 전경. 왼쪽으로 보이는 한강변 봉우리 위의 건물이 한강신사이다. (경성전기주식회사, <뻗어가는경성전기>, 1935)

 

이곳 한강신사의 제신으로 언급된 ‘미야지대사’는 일본 후쿠오카 소재 ‘미야지다케신사(宮地嶽神社)’를 말하는데, 시키의 고향에 있는 신사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었던 듯하다. 또한 ‘스가와라대신’은 일본 헤이안시대의 정치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말하며, 대개 ‘학문의 신’으로 추앙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코토히라대신’은 불교에서 일컫는 약사십이신장(藥師十二神將)의 하나이며 원래 인도 갠지즈강에 살았다는 쿰비라(Kumbhira, 蛟龍)에서 유래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바다를 수호하는 신으로 인지되어 일반적으로 선박 안전을 비는 대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한강신사가 자리한 봉우리를 일컬어 상두산(象頭山)이라고 한 것은 일본 가가와현(香川縣)에 있는 곤피라산(金刀比羅宮: 신사명)의 소재지에서 그대로 따온 이름으로 받아들여진다.
오카 료스케(岡良助)가 쓴 <경성번창기>(박문사,1915)라는책에는이곳이웅진강신사(熊津江神社)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한강신사는 그 이후의 시점에서 고쳐진 명칭인 듯하다. 아무튼 이곳은 일본인의 입장에서 한강 수호의 신으로 삼아 설립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912년에 그네들의 천황이 등극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이러한 신사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점에도 깊이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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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관보>1934년 5월 14일자에는 한강신사가 ‘신메이신사’라는 이름으로 새로 설립허가를 받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제패망기에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에서 엮어낸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1941)을 보면, 여기에는 한강신사의 명칭이 ‘神社’가 아닌 ‘神祠’로, 이곳의 제신(祭神)이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외 11신’으로, 창립일도 1912년이 아닌 ‘1934년 5월 9일’로 각각 변경 표기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 점에 착안하여 <조선총독부관보>를뒤져보았더니1934년 6월 14일자에 수록된 “경기도 시흥군 북면 흑석리에 신메이신사(神明神祠) 설립의 건이 기노시타 사카에(木下榮) 외 72명으로부터 원출(願出)된 것에 대해 5월 9일부로 이를 허가함”이라는 기록이 눈에 띈다.
여기에 나오는 기노시타는 한강신사의 설립자인 시키의 고향 후배이면서 ‘시키구미’와 ‘조선천연빙주식회사’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경력을 쌓았고, 1931년에는 지금의 흑석동 일대에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明水臺土地經營事務所)를 꾸려 자신만의 이상향(理想鄕)으로 가꾸는 일에 주력했던 사람이었다. 1917년 3월 22일에 제정된 총독부령 제21호 「신사(神祠)에 관한 건」에 따르면 “신사(神祠)라고 칭함은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公衆)에 참배를 시키기 위해 신기(神祇)를 봉사하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이를 설립하려는 때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노시타가 신사의 설립을 새로 청원한 것은 이에 따른 절차인 듯이 보인다. 또한 신메이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별칭이므로, ‘신메이신사’는 이를테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삼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신사(神祠, 격이 낮은 소규모 신사)인 셈이다. 이런 사실에 비춰보면 1930년대 전시체제기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맞물려 한강신사 자체의 기능과 성격에 있어서 제도적인 환골탈태가 진행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서울지역에 설치되어 있던 일제의 신사들을 얘기하면, 남산 왜성대에 자리한 경성신사(京城神社)와 남산 중턱 옛 한양공원 터에 들어선 조선신궁(朝鮮神宮, 1925년 10월 준공) 정도를 언급하는 것이 보통이다. 원래 경성신사는 1898년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설립되었다가 1913년에 경성신사로 개칭되었으며, 이 안에 천만궁(天滿宮, 1902년 창립), 남산도하신사(南山稻荷神社, 1931년 창립), 팔번궁(八幡宮, 1931년 창립)을 섭사로 거느리고 있었다.
이밖에 경성신사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노기신사(乃木神社, 1934년 창립)와 용산 일본군병영지의 후면 남산 기슭에 조성된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1943년 창립) 등의 존재도 곧잘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 말고도 태평로 쪽에 에비스신사(惠比須神社, 1913년 창립)를 비롯하여 원효로 인근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 1번지 위치)에 있는 문평산(文平山)에는 가토신사(加藤神社, 1914년 창립)라는 것이 있었고, 신메이신사는 영등포동, 용두동, 신길동, 이태원동 등지에도 두루 포진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매일신보>1943년5월18일자에는「신사(神祠)의신마(神馬)도출정(出征),금일한강신사(漢江神祠)에서 장행회(壯行會) 거행」 제하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한강신사에 관해 현재까지 드러난 막바지 기록이다.

 

미영격멸에 신마(神馬)도 출정 ― 부내 한강신사 앞에 모셔 논 구리로 만든 신마가 출정하기로 되어 17일 오전 10시 동 신사에서 장행회를 거행하였다. 여기에는 군 애국부의 히라이 대위(平井大尉)와 기노시타(木下) 흑석정 총대 이하 정민(町民) 다수가 참열한 아래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이 신마는 대정 10년도(1921년도)에 건립하여 지금까지 23년 동안 동 신사 앞에서 있던 것으로 이번에 육군에 헌납키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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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43년 5월 18일자에 수록된 한강신사 신마 출정 장행회 관련 보도사진.

 

여기에 흑석정 총대로 언급된 기노시타는 바로 명수대토지경영사무소 사장과 동일인이다. 겉으로는 한강 수호의 성지인 듯이 말하지만 결국에는 출정황군의 무운장구를 빌거나 전쟁동원을 위한 총력체제의 결집장소로 활용되고 마는 것이 바로 일제가 만든 이들 침략신사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월, 2018/07/02-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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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9일 개관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

명칭을 바꾸어주기 바랍니다.

아마 식민지역사를 잊어버리자 말자고 하는 뜻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이라고 이름지었다면, 김영삼 대통렬 때 경복궁 내의 일제 총독부 건물을 왜 해체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식민지역사박물관’이라는 명칭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 명칭 자체가 너무 쪽 팔리고 자존심 상하는 명칭이다. 이 이전에는 ‘역사정의실천시민역사관’이라고 했는데,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는가?

발전성이 있어야지 곱씹고 있는다고 되는가? ‘식민지역사발물관’은 곱씹으면서 지난 시기에 향수를 달래고 있는 모양새이지 결기를 세우고 기풍을 끌어올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이라는 명칭을 폐기하고 새로운 좋은 이름을 공모하여 선정하라.

월, 2018/07/02-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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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의 고베조선고급학교 수학여행물품 압수에 따른 규탄 기자회견]
조선학교 아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일본정부를 규탄한다
▪ 일시 : 2018년 7월 3일(화) 오전11시
▪ 장소 : 일본대사관 앞

1. 안녕하십니까.

2. 남과 북 양정상이 분단의 상징인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한반도 평화를 선언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북미간의 정상회담이 진행되며 대결의 종식과 평화를 모색해 나가는 이러한 순간에도 아베정부는 시대를 역행하는 우경화 행보를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습니다.

3. 얼마 전 6월 28일, 북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고베조선고급학교아이들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일본세관에 기념품과 선물을 모조리 빼앗기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아이들이 빼앗긴 물품은 학창시절 수학여행의 소중한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들로 북에 있는 친척이나 친구들로부터 받은 선물, 혹은 부모님과 일본에 있는 친구들, 후배들에게 선물할 기념품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울며 항의했지만 일본세관의 비인권적인 행태에 전량 압수당하고 말았습니다.

4. 일본정부는 정상화되지 않은 북일관계, 대북독자제재 등 정치적인 이유로 재일동포 아이들에게 지속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 내 모든 고등학교에 적용하는‘고교무상화’제도에서 유독 조선학교만을 배제시켰으며, 지자체의 보조금 지급까지도 중단하도록 종용하며 노골적 차별정책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떠한 사유도 한창 배우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차별을 가하는데 정당한 사유가 될 순 없습니다.

5.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은 일본정부가 <제재>를 구실로 재일동포 학생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직권남용하여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품들을 압수한 것에 대해 규탄하며 일본정부의 진정성 있는 사죄와 재발방지 약속, 압수한 물품에 대한 전량 반환을 요구하며 오는 7월 3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이에 동의하는 제 단체와 함께 기자회견을 진행하려 합니다.

6. 귀 단체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 연명을 요청드립니다.

[연명 참여 하기]


[규탄성명 초안]
<일본정부의 고베조선고급학교 수학여행물품 압수에 따른 규탄 기자회견>

조선학교 아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일본정부를 규탄한다

지난 6월 28일, 북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고베조선고급학교아이들의 기념품과 선물을 일본 세관이 함부로 몰수해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아이들이 빼앗긴 물품은 학창시절 수학여행의 소중한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들로 북에 있는 친척이나 친구들로부터 받은 선물, 혹은 부모님과 일본에 있는 친구들, 후배들에게 선물할 기념품이었다. 주로 화장품, 필통, 비누 같은 것들로 ‘위험품목’도 아니였으며, 현재 일본이 행하고 있는 독자제재를 통해 몰수할 필요가 있다고 보기에도 어려운 것들이었다.

아이들의 가방을 마구잡이로 검사하며 물품을 압수해간 비인권적인 행위에 학생들과 학부모, 재일동포들이 크게 항의했지만 ‘당신의 아이여도 이렇게 했겠느냐’는 한 학부모의 항의에 돌아온 대답은 ‘나는 아이가 없다’는 무책임하고도 불성실한 답변뿐이었다.

일본정부가 재일동포들에게 행하는 반인권적인 행위는 이 뿐만이 아니다. 일본정부는 정상화되지 않은 북일관계를 이유로 일본 내 모든 고등학교에 적용하는 ‘고교무상화’제도에서 유독 조선학교만을 배제시켰으며, 지자체의 보조금 지급까지도 중단하도록 종용했다. 하지만 그 어떠한 사유도 한창 배우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차별을 가하는데 정당한 사유가 될 순 없다. 지속적으로 재일동포 아이들에게만 차별을 가하고, 대놓고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본정부의 행태에 우리는 분노를 금할 수 없으며 이를 강력히 규탄한다.

남북정상회담과 역사상 최초인 북미간의 정상회담이 연이어 성사되며 대결을 종식하고 평화를 모색해 나가는 현 시대에 일본정부는 국제사회와 발맞춰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 속에 붙잡혀 시대를 역행하고 있다. ‘일본패싱’에 대한 우려속에 마지못해 북일관계 개선의 의지를 표명하고, 북일정상회담을 희망한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독자적인 대북제재를 유지하고 끊임없이 재일동포들을 탄압하는 행태에서 진정성을 찾기란 어렵다.

일본정부가 진정으로 북일관계 개선을 바라고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하고자 한다면,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청산과 함께 재일동포 탄압부터 중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일반시민들 사이의 물자교환까지 규제의 대상으로 하는 부당한 대북독자제재와 대북적대정책 역시 즉각 철회해야 한다.

적대행위의 지속과 관계정상화는 양립할 수 없다. 일본정부는 평화의 시대로 함께 나아갈 것인지, 과거에 머물며 고립을 자초할 것인지를 확실하게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일본정부가 북일관계 정상화에 나서고 재일동포들의 인권을 보장하는데 적극 노력할 것을 바라며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① 일본정부는 <제재>를 구실로 재일동포 학생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직권남용하여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품들을 압수한 것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죄와 재발방지를 약속하고, 압수한 물품을 전량 학생들에게 반환하라.

② 일본정부는 이번 사태가 벌어진 근원인 북에 대한 부당한 <독자제재>를 하루빨리 철회하라.

③ 일본정부는 재일동포의 민족교육에 대한 부당한 차별과 탄압을 즉시 중지하고 국제인권법에 기초한 제 권리를 보장하라.

2018년 7월 3일
참가단체 연명

월, 2018/07/0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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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세월호 참사에 분노한 주부, 역사정의 실현에 나서다 – 워싱턴지부 주희영 사무국장

방학진 기획실장 인터뷰•박광종 선임연구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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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일, 일전에 귀국한 워싱턴지부 사무국장인 주희영 회원을 연구소로 초청해 오전 11시 30분부터 인터뷰를 가졌다. 이날은 마침 북미정상회담이 있는 날이라 모두가 가슴 졸이며 좋은 결실을 맺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주희영 회원은 2000년 결혼 이민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평범하게 살아왔다. 그러던 중 2014년 세월호 참사가 터지자 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하였고 이후 미주 한인사회에서 이명박·박근혜 적폐청산운동과 통일운동에 진력하였다. 또한 작년 11월 민족문제연구소 워싱턴지부를 결성하는 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문 : 워싱턴지부가 만들어지기까지 과정을 말씀해 주세요.

답 : 워싱턴에 민족문제연구소 지부를 세우자고 제안한 분은 윤흥로 선생입니다. 작년 대선이 끝나고 나서 윤 선생은 이명박・박근혜 시기에는 비민주적 행태에 대한 규탄 시위에 진력했다면 이제 새 시대를 맞아 우리 진보운동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 방안으로 민족문제연구소 지부를 결성해서 활동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윤흥로 선생은 고려대 의대 출신으로 워싱턴 지역에서 40여 년간 진료활동을 하면서 각종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고 지원을 해오신 분이라 저를 비롯한 워싱턴 교포사회의 활동가들이 그 제안에 적극 찬동하였습니다. 작년 7월 제가 먼저 방한해 연구소를 방문해 지부 설립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고 9월에 윤 선생이 워싱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회장 자격으로 청와대의 초청을 받게 되었을 때 연구소를 방문해 지부 설립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가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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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지부 창립총회

 

그 결과 작년 11월 11일 임헌영 소장과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워싱턴 지역 동포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워싱턴지부 창립식이 성황리에 개최되었습니다. 초대 임원진으로는 이사장에 윤흥로, 지부장에 박진영(아메리칸대학 철학과 교수), 이사에 강신정 김조명 노병원 서혁교 은영재 이원술 최민석, 기획실장에 정석구, 사무국장에 제가 선임되었습니다.

문 : 워싱턴지부의 활동목표는 무엇이고 그동안 어떤 활동을 진행했나요.

답 : 워싱턴지부는 연구소의 주요 사업인 친일역사청산을 넘어 동북아 평화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주요 사업으로는 첫째 미국에 존재하는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여 연구소의 연구활동에 도움을 주고 둘째 미국 학자들과 연계해 한반도 더 나아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연구활동을 추진하며 셋째 동포 자녀들을 위한 역사교육에 힘쓰고자 합니다. 매달 셋째주 토요일에 정기모임을 갖고 역사 공부, 강연회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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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지부 독립운동가후손 초청모임

 

지난 2월 11일에는 함세웅 이사장을 모시고 동포간담회를 열었습니다. 함 이사장이 ‘통일과 한반도 정세’에 대한 모두 발언을 하고 질의응답시간에 참석자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어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또 3월 24일에는 워싱턴 지역 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 모임이 애난데일 설악가든에서 있었습니다. 이날 행사에 소설가이자 독립유공자인 심훈 선생과 박병익 선생의 후손들이 참석하여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자리를 마련해 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저희 지부는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 행사를 앞으로도 계속 진행할 계획입니다. 이 행사를 위해 저희 지부는 박은식, 김대지, 노원찬 선생 등 25분의 독립유공자 약력을 담은 소책자를 자체 제작하고 이를 독립유공자 후손들께 우송했습니다. 소책자 제작 과정에서 광복군 활동으로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으신 정재덕 선생에 대한 상세 이력을 발굴한 점이 특기할 만합니다.

문 : 연구소는 작년 8·15 때 『항일음악 330곡집』을 출간하고 항일음악회도 여러 차례 개최하여 항일음악을 알리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이를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널리 보급하고 싶은데 좋은 방안이 있는지요.

답 : 재외동포재단의 지원을 받거나 펀딩 등 시민모금을 통해서 『항일음악 330곡집』을 미국의 공립도서관, 대학도서관, 한인학교, 한인교회 등에 보급하는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정부 차원에서 해외교포나 2세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시스템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것은 일본과 아주 대별됩니다. 일본은 정부나 기업 차원에서 재외동포를 지원하거나 미국 도서관이나 연구소에 막대한 지원을 해왔습니다. 그로 인해 재미 일본인들이 미국 정계에 진출하여 일본에 유리한 정책 결정을 하거나 미국인들에게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을 심어주었습니다. 우리 정부도 이제 일회성 홍보행사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재미동포를 지원하고 미국 내의 친한 감정을 조성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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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본부앞 세월호참사규탄집회

 

문 : 어떤 계기로 사회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나요?

답 : 저는 원래 평범한 가정주부였습니다. 2000년 무렵 미국에 건너가 애들을 키우며 살고 있었습니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때 수많은 어린 학생들의 애끓는 죽음을 목도하면서 무능하고 무책임한 박근혜 정부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해 9월 22일 박근혜가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하기 위해 뉴욕에 도착한다고 하자 21일부터 뉴욕, 버지니아, 워싱턴, LA 등 미국 각지의 동포들 300여 명이 뉴욕 맨해튼 총영사관 앞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고 박근혜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때 저도 죽은 학생의 영정 사진을 들고 “세월호 사고, 대참사 만든 청와대가 책임져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열심히 쫓아다녔죠. 9월 24일자 뉴욕타임스에는 미주 동포들이 기금을 모아 ‘진실과 정의의 추락’이라는 제목의 전면광고를 실어 세월호 참사 당시 박 대통령의 대응이 부적절했다는 점과 법원이 국정원장에게 선거법 무죄를 선고한 것의 부당성을 지적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세월호 시위가 박근혜 적폐 청산을 위한 ‘촛불시위’의 효시였다고 자부합니다.

문 : 신문기사를 보니 지난 4월 28일 윤흥로 이사장이 회장으로 계신 민주평통 워싱턴협의회 자문위원에 임명되셨더군요. 축하드립니다.

답 : 감사합니다. 4월 28일이 4.27 남북정상회담 다음날이었어요. 민주평통에서는 성공적인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자축하는 자리를 마련하였고 겸해서 저를 포함한 4명의 신임 자문위원에게 위촉장을 수여했어요. 그리고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지원 사업계획도 발표했죠. 강력한 경제제제 때문에 한창 자라나는 북한 어린이들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고 합니다. 결핵약이나 비타민 등 영양제를 조속히 마련해 보낼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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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축하 및 자문위원회 전체회의

 

문 : 워싱턴지부 회원 중에 민주평통 위원이 많은가요?

답 : 회원의 절반 정도가 민주평통 위원입니다. 이명박·박근혜 시절에는 민주평통도 거의 보수적인 인사들로 구성되었어요.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서 윤흥로 이사장이 워싱턴평통 회장이 되었고 이후 차츰 진보적인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평통 위원은 명예직이고 매년 회비도 내야 합니다. 워싱턴 교포사회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온 뒤 정착한 분들이 많아 보수적입니다. 엘리트 의식도 강하고 공화당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죠.

문 : 판문점선언 발표 후 북미정상회담 촉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나요.

답 : 미국 상·하원 의원들과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미정상회담 촉구와 한반도 평화정착’을 요청하는 편지쓰기 운동을 벌였습니다. 청와대에서 추천인 20만 명이 넘는 청원에 대한 답변을 해주듯이 백악관에도 그런 제도가 있어요. 미시USA를 비롯한 한인커뮤니티에서 한반도 평화정착에 관련한 청원을 추진했는데 며칠 전 10만 명이 넘었어요. 조만간 백악관의 긍정적인 답변이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문 : 워싱턴지부에서 연구소에 바라는 점은?

답 : 워싱턴에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이 있어요. 한국 근현대사 자료의 보물창고라 할 만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공공기관이나 학자, 기자들이 많이 방문하는데 각자 필요한 사료만 찾고 나면 그만입니다. 사료 발굴 작업이 일회성에 그치고 효율적이지도 않으며 기관과 학자들 사이에 공유되지도 않습니다. 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워싱턴 거주 유학생이나 한인 2세들을 활용한 체계적인 사료 발굴 시스템이 조성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연구소에 인턴제도 혹은 연구소 부설 교육기관을 두어 한인 2세들이 가서 연구하거나 교육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문 : 끝으로 워싱턴지부의 앞으로의 계획은?

답 : 일단 7월 중에는 지난 5월 22일 정식 개관한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견학할 예정입니다. 개관 당일 문재인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을 마치고 방문한 곳이죠. 그날 비가 많이 와서 문재인 대통령을 환송하느라 비를 줄곧 맞았어요. 오는 11월 워싱턴지부 창립 1주년 기념식 때는 서울에서 강연자를 초청할 계획입니다. 본부에서 훌륭하신 분을 섭외해주시기 바랍니다.

월, 2018/07/02-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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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65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123점 보내와

5월 17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6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한국문인협회 전남지부에서 발행한 <전남문단>(창간호~제14호)와지난달에이어 여러 협회에서 받은 초청장, 원고 청탁서 등 다양한 편지를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월, 2018/07/0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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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2018 상반기 시민강좌 ‘한 시대, 다른 삶’ 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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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기념관은 특별기획전 ‘한 시대, 다른 삶’과 연계하여 시민강좌를 개설하였다. 1875년 운요호사건 이래 70년간의 일제 침략, 그 중에서도 식민지배 35년은 우리 역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나라와 민족이 위기를 맞은 그때, 어떤 이들은 목숨과 전 재산을 조국의 독립에 바쳤으나 또 다른 이들은 자신의 부와 출세를 위해 제 민족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이번 강좌는 전시를 기획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과 각 분야 전문가를 초빙해 일제강점기 서로 다른 길을 걸은 다양한 인물들을 대비하여 조명한다.
강좌는 총 7강으로 6월 12일(화)부터 28일(목)까지 매주 화, 목요일 오후 2시부터 진행되며, 30일(토) 오전 10시 특별강좌와 전시 관람으로 마무리한다. 근현대사를 심도 깊게 공부하고자 하는 일반 성인 40명을 모집하며 수강신청은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www.mhmh.or.kr)와 전화(02-903-7580)로 가능하고 무료로 진행한다. 이번 강좌는 수강을 원하는 시민의 편의를 도모하고 지리적 접근성을 높이고자 2018년 6월에 새로 개관한 삼각산 시민청에서 이루어진다. 작년 9월에 개통한 우이신설경전철을 타고 솔밭공원역에서 내리면 바로 강의실까지 올 수 있다. 1강부터 6강까지 삼각산 시민청 강의실에서 진행되며, 7강은 근현대사기념관 2층 강의실에서 진행 후 전시를 관람한다.

제1강은 신효승 연구원(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이 3대에 걸친 석주 이상룡 일가의 독립운동을 지도와 그래픽을 통해 설명하고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의의를 살펴보았다. 2강에서 권시용 연구원은 일제강점기 언론인과 문인으로 명성을 떨친 심천풍(우섭)과 심훈(대섭) 형제의 일생을 시기별로 상세히 다루고 심훈의 일기 등 사료를 통해 형제의 엇갈린 선택을 설명하였다. 3강은 홍명희 3대의 친일과 항일을 주제로 김덕영 연구원이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의 서로 다른 선택을 이야기로 풀어낸다. 서민교 연구원(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조선인(4강)을 구체적인 사료와 함께 다루며, 이명숙 연구원은 식민지 조선의 토지왕, 광산왕, 기부왕(5강)이라는 소재로 조선인 거부(巨富)들의 이면을 파헤친다.
제6강은 임헌영 소장이 강사로 나서 홍명희와 함께 동경삼재로 꼽힌 이광수와 최남선의 변절과 해방 후 반민특위특별재판에 회부된 상황까지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제7강은 근현대사기념관에서 특별기획전 ‘한 시대, 다른 삶’의 전시 주제를 아우르는 박수현 연구실장의 강의 후 전시 관람으로 전체 강좌를 마친다.

• 최인담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사

월, 2018/07/02-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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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희생자 제5차 유해발굴 공동조사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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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와 4.9통일평화재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포럼진실과정의 등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공동조사단)이 지난 2월 20일부터 4월 1일까지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 산 86-1번지 설화산 일대에서 진행한 제5차 유해발굴 공동조사가 마무리되었다.
공동조사단은 2월 20일부터 4월 1일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했고, 4월 12일부터 23일까지 발굴된 희생자의 유해와 유품에 대해 아산시 공설봉안당에서 감식을 진행하였으며, 5월 14일 같은 장소에서 안치식을 치른 후 세종시에 위치한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추모관’에 봉안되었다. 조사단은 이 지역에서 최소 208명의 유해와 551점 이상이 유품이 발굴하였는데, 희생자들은 한국전쟁 당시 아산지역 부역혐의 사건 당시에 희생된 부녀자와 어린이들로 밝혀졌다. 유해감식 결과 최소 208명 가운데 어른이 150명, 미성년의 어린이가 58명으로 확인되었다. 유품으로는 M1과 카빈 소총의 탄두와 탄피, 비녀, 귀이개, 단추류, 버클, 고무신, 어린이들의 장난감으로 보이는 구슬 등과 함께 여성용 비녀가 최소 89점 발견되어 희생자의 상당수가 부녀자였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는 아산시의 예산 지원으로 이루어졌으며, 무엇보다 연구소 아산지회 회원들의 물심양면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한편 5월 29일에는 아산시청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희생자 제5차 유해발굴조사 보고대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박선주 공동조사단 단장은 유해발굴 및 감식결과 보고를 통해 한국전쟁전후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국회 입법 필요성을 강조했다.
•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월, 2018/07/02-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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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3·1운동의 혁명적 성격’ 심포지엄 열려

연구소는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소장 박혜영)와 함께 5월 31일 오후 1시 30분부터 덕성여대 대강의동 104호에서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이번 심포지엄은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재정립하는 한편, 연구소가 강북구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는 근현대사기념관(관장 한상권) 개관 2주년을 기념하고자 마련됐다. 올해 심포지엄은 왜 ‘3·1운동’이 혁명으로 규정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한다. 특히 여성과 청년 노동자 등 새로이 조직화한 ‘3·1운동’ 참여 계층의 성격과 사회변동에 끼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이전 시기와 뚜렷이 구분되는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도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3·1혁명’의 이념적 지평〉이란 기조발제에서 3·1혁명의 성격을 민족혁명, 민주혁명, 국제주의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설명하였다. 곧 3·1혁명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독립을 일차적인 목표로 한 민족혁명”이었으며 3·1혁명을 계기로 새로운 근대적 주체-청년, 여성, 노동자-가 우리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3·1혁명은 “국민주권론을 바탕으로 한 민주공화국을 이루기 위한 민주혁명으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고 밝히면서 1910년 7월 6일자 ????신한민보????논설에서1919년4월제정된「대한민국임시헌장」까지각종선언서의분석을 통해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사상적 흐름을 짚었다. 끝으로 3·1혁명이 좁은 민족주의의 틀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국제주의를 추구했다고 주장하였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3·1운동과 여성의 현실 참여〉 발표에서 여성사에 있어서 3·1운동이 갖는 의의로서 여학생이 역사의 주체로 전면에 등장했다는 사실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제정한 「임시헌장」에서 남녀평등을 천명하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는 점을 들었다. 1920년 이후 전개된 여성의 현실 참여에 대해 ‘사회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 ‘독립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으로 장을 나누어 설명한다. 하지만 여성사 100년의 관점에서는 “일제 시기 여성운동은 성평등운동이자 페미니스트운동으로 독자성을 뿌리내리는 데 실패했다”라며 당시 여성운동이 갖은 시대적 한계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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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훈 연세대 교수는 〈3·1운동과 청년〉 발표에서 조덕진, 박헌영, 장병준, 강석봉 등 개별 사례 분석을 통해 3·1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의 경험과 기억이 이후의 활동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였다. 필자는 1920년대를 청년의 시대로 만들고 조선사회를 실질적인 정치·문화적 공간으로 변모시킨 바탕이 3·1운동의 체험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신주백 연세대 교수는 〈3·1운동과 사회변동〉 발표에서 3·1운동이 “주체가 능동적이고 진취적으로 선택한 역사적 경험”이었다고 평가하고, 3·1운동 이후 조선인사회에서 나타난 새로운 양상과 지배자의 변화 모습을 고찰하였다.
종합토론은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이 주재하였고, 약정토론자로는 신영숙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기획위원장, 이태훈 연세대 교수,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 등이 참여하였다. 심포지엄이 끝난 뒤에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한 독립운동가이자 덕성학원 설립자인 차미리사 선생 서거 63주기 추도미사가 함세웅 신부의 주재하에 차미리사 선생 묘역에서 거행되었다.

• 편집부

월, 2018/07/0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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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박운음

홍익미술대학 출신의 SNS 1인 미디어 만화가로서 고 노무현대통령 캐릭터를 이용한 만화와 일러스트 등을 그리며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드라마틱한 정치역정을 다룬 웹툰 『노공이산』과 캐릭터 일러스트 모음집 『바보 노공화』가 있으며, 청진기를 들고 독립운동에 몸 바 이태준, 김필순, 박서양, 황에스더 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만화 <조국의 심장을 지켜라>를 펴냈다.

월, 2018/07/02-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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笑賭博僧嘆失錢

 

元來非汝物(원래비여물)

執着豈如斯(집착기여사)

說法誇空手(설법과공수)

今嘆擧詐欺(금탄거사기)

 

노름하는 중이 돈 잃고 탄식함을 비웃다

 

본디 그대의 물건이 아니거늘

집착함이 어찌 이와도 같은고

설법할 땐 빈손을 자랑하다가

지금은 탄식하니 모두 詐欺라.

 

<時調로 改譯>

 

본디 남의 것이거늘 어찌 집착하는고

설법을 행할 때엔 빈손을 자랑하다가

지금은 장탄식하니 다 남을 속임이라.

 

*元來: 원래(原來). 본디 *如斯: 이러함 *空手: 빈손 *詐欺: 나쁜 꾀로 남을 속임.

 

<2018.7.4, 이우식 지음>

수, 2018/07/0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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