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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인가, 변절자인가 – 둘로 쪼개진 ‘애국지사 김규환’과 ‘변절자 김이대’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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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인가, 변절자인가 – 둘로 쪼개진 ‘애국지사 김규환’과 ‘변절자 김이대’의 행적

익명 (미확인) | 금, 2017/07/28- 15:20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 27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 애국지사와 순국선열을 기리는 독립유공자 선정에 필수적인 자료는 매우 많다. 특히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포상을 위해 후손들의 신청을 받거나 자체 조사로 발굴할 때 독립운동 행적의 근거로 삼는 주요 문헌 중 이 글의 주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는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9), ‘통칭’ 문일민의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그리고 ‘통칭’ 김승학의 <한국독립사>를 꼽을 수 있다. 이 중 김승학과 관련한 <한국독립사>의 발간에는 우여곡절이 있어서 현재까지
1965년 9월 초판발행본(독립문화사), 1970년 6월 상·하 두 권의 증보발행본(독립문화사), 1983년 3월 단행본으로 합친 증보발행본(독립동지회) 총 3종의 ????한국독립사????가 존재한다.
다만 김승학(1881∼1964)은 ????한국독립사???? 발간을 준비하던 1964년 12월 별세해 초판본(발행인 김국보)과 상·하권 증보본 발행 당시에는 편저자(증보편집 겸 발행인 김국보)로, 세번째 증보본은 김승학·김국보 공편저자로 발간되었다.
김국보가 1983년 증보발행본의 「발간사」에 밝혔듯이, 희산 김승학은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참여 시기부터 독립운동의 역사를 남기겠다는 뜻을 품었으며 해방 후 귀국해 40여 년에 걸친 자신의 독립운동 외에도 오랫동안 수집·보관한 자료를 토대로 문일민(1894∼1968)을 발행인으로 <한국독립운동사>를 발간했다(위에서 ‘통칭’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고 국가보훈처나 관련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문일민의 <한국독립운동사>, 김승학의 <한국독립사>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 계획했던 것과 다른 점이 있어서 김승학 자신이 다시 집필하던 중 별세했고 유지를 이어 유족들이 김국보 등과 함께 작업해 1965년 초판본이 발간될 수 있었다. 국가보훈처의 경우 김승학의 <한국독립사>는 1970년 발간된 상·하 두 권의 증보본(독립문화사)을 활용하고 있다.
뜬금없이 장황하게 서지사항을 늘어놓은 이유는 총무처(현재는 국가보훈처 담당)가 1963년에 대통령표창(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이 위의 세 자료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다만 공훈자료에 기록된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은 국내의 ‘대한청년당(단)’, 만주의 동창학교·일신학교 등 애국계몽운동에 한정되어 있으며 근거 문헌으로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와 <독립운동사> 5권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보훈처가 제공하는 독립유공자의 정보와 공적사항은 세 가지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다. ① <독립유공자공훈록>(이하 <공훈록>), ②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나라사랑광장 인물찾기의 ‘독립유공자(공훈록)’, ③ 공훈전자사료관 홈페이지 독립유공자 정보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등이다. ①은 책자로 되어 있어 이후 내용과 개인정보 등의 수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②③을 통해 온라인으로 수정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공적내용은 대동소이하지만 개인정보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있어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아무튼 이를 감안해 ① <공훈록> 제1권:애국계몽운동·의병전쟁편, 1986)과 ②③의 내용을 종합해 「김규환」의 항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규환(金奎煥)
– 출생지(②) : 평북 선천
– 본적지(③) : 경기도 고양
– 생몰년 : 1890.6.12∼1941.1.13(②) ; 1890.5.25∼1935.1.10(③은 오류임-필자)
– 이명 : 없음
1909년 남형우(南亨祐)·안희제(安熙濟)·이원식(李元植)·이시열(李時說)·윤세복(尹世復)·박중화(朴重華)·김동삼(金東三)·배천택(裵天澤)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1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1911년 5월 만주 봉천성 환인현(桓仁縣)으로 망명하여 윤세복 등과 함께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해서 교포들에게 독립사상 고취와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동창학교가 폐쇄된 후에는 1915년 6월에 김광제(金光濟, 김공제 金公濟의 오류임-필자)2·이시열 등과 함께 흥경(興京)현 동로홍묘자(東路紅廟子)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여 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일신학교는 1916년에 흥동학교(興東學校)로 개칭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1면·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93·126면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김규환으로 판단되는 인물’은 1920년대 만주를 무대로 광한단(光韓團), 통의부·정의부·국민부, 조선혁명당 등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1. ③의 ‘공적조서’에는 “1909년 조직된 大同(大東의 오류-필자)靑年黨員으로 활약(항일순국의열사전 P.71, 한국독립운동사 P.91”으로만 소개되어 있다. <항일순국의열사전>은 오재식 편술로 1958년 애국정신선양회에서 발간한 것을 말한다. 다만 명칭은 ‘대동청년단’이라는 기록도 있다(<大倧敎重光六十年史>, 1971 ; 이동언, 2010 <안희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 강덕상의 <현대사자료> 27은 일본 외무성 자료에 기록된 ‘金公濟’의 誤植임에도 ????독립운동사???? 5는 원자료 확인없이 ‘金光濟’ 로 인용하면서 오류가 발생했다.


 

근거 문헌은 다름 아닌 위에서 언급한 김승학의 <한국독립사>가 핵심이다. 다만 <한국독립사> 등에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필자가 언급한 ‘김규환으로 판단되는 인물’의 행적이 ‘김이대(金履大)’의 행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김규환과 김이대가 동일인이라는 판단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인가?
김승학이 발간에 관여한 <한국독립사>·<한국독립운동사>에는 간혹 “변절”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것은 특정 인물이 한때 독립운동을 했지만 어느 시점에 일제에 협력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독립운동가 김승학·문일민’이 필생의 업적으로 남긴 자료에 직접 “변절”을 지목했다면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안이다.
<한국독립사>·<한국독립운동사> 등에 독립운동 관련 행적은 ‘김규환’으로, 이외 1920년대 만주에서 활동한 행적과 “변절” 행적은 ‘김이대’로 기록되어 있어 언뜻 두 사람을 별개의 인물로 오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김규환’은 애국계몽운동 계열 독립운동으로 서훈이 추서되었고 ‘김이대’는 변절자로 분류되어 서훈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확인 가능한 모든 자료를 비교해 볼 때 김규환과 김이대는 ‘동일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한국독립사>·<한국독립운동사> 등에 기록된 1920년대 ‘김이대’의 행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3

14

<매일신보> 1929.12.5. 2면

 

이처럼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김이대가 왜 변절했을까? 사실일까? 한동안 의문만 갖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김이대의 변절’과 관련된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매일신보>에 보도된 김이대의 체포 기사이다. “[신의주] 국민부 지방(집행의 오기-필자)위원장 김이대와 동부 혁명군 제1지휘장 이웅은 지난 11월 초 신빈현에서 중국관헌의 손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는 중이라는데 국민부의 맹렬한 운동으로 중국관헌은 전기 범인을 석방할지도 모른다 하여 총독부 당국에서는 이를 주시중이라더라”(「구금된 국민부 집행위원장, 부원이 석방운동」).
체포 이후 김이대의 행적은 알 수 없지만 다음 두 자료에는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어느 때, 적어도 1935년 전후 시기에는 김이대가 변절한 것이 사실로 확인된다.
첫 번째 자료는 <삼천리>(1936.1)에 필자 미상의 글로 소개된 ‘만주의 조선인 낭인들’ 중 「김이대」 항목이다. “씨는 한동안은 운동의 거물로서 XX부의 한사람으로 있었으나 사변(만주사변-필자) 이후에는 귀순하여 협조회위원회장(協調會委員會長)의 직을 맡았다고 한다”(「만주와 북중국의 백의풍운아군(白衣風雲兒群)」).15

두 번째 자료는 조선민족혁명당 기관지 <전도(前途)> 제13호(1937.5.24)에 실린 「사설: 적의 전술」 중 일부 내용이다. “반동의 수괴라고 할 수 있는 자로 조선 내에서는 최린·최남선 등이 있으며, 이들은 3·1운동을 통해 소위 애국지사가 되어 노(老)선배라는 허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만주에는 김이대가 있다. 김이대는 과거 만주에서 만주동포참살의 혈채(血債)를 산적(山積)했는데 지금은 적의 협화회(協和會)의 수괴로 만주에서 적과 악전고투하는 혁명동지를 계속 도살하는 음모에 몰두하고 있다. (중략-원문) 목하 적의 음모의 마수는 조선민족혁명당 파괴에 이르고 있다”(「출판물허가의 이유 및 기사 해당요지(집무자료)」 <조선출판경찰월보> 제106호, 1937.7).
출판 ‘금지사유’로 “제국의 대륙정책을 비방 곡설함으로써 국제관계를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앙양하므로”라고 밝히고 있다.
정리하면 김이대는 1929년 11월 초 중국관헌에 체포되어 ‘아마도’ 조선총독부에 인계되어 회유와 협박을 받았을 것이고,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1935년 전후에 변절해 ‘간도협조회’와 ‘만주국협화회’의 간부로 활동한 것이다. 1935년 전후 변절로 추정하는 이유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이 제공하는 자료에 김이대가 1933년 말경까지 흥사단(興士團) 원동(遠東) 제5반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또 간도협조회(일명 선민협조협회·조선인협조협회)가 1934년 9월 옌지(延吉)에서 조직되어 ‘반만(反滿) 항일운동’의 예봉을 꺾고 만주국의 ‘치안유지’ 공고에 앞장선 친일단체이고 1936년 12월 만주국협화회로 합병되었으므로 위 두 자료의 김이대의 행적과 일치한다. 따라서 간도협조회 설립(1934.9) 이후 만주국협화회로 합병(1936.12) 이전인 1935년 전후에 변절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과 김이대의 변절 행적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김규환과 김이대가 ‘동일인’이라는 것은 어떻게 밝힐 수 있을까? 결정적인 단서는 김이대가 흥사단에 가입하면서 제출한 「흥사단우 이력서」(이하 「이력서」)에 원래 이름이 ‘김규환’이라고 직접 기록한 것이다.
「이력서」는 도산안창호선생전집편찬위원회 편, <도산안창호전집> 제10권:동우회Ⅱ· 흥사단우 이력서(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에 원본이 수록되어 있다(한국독립운동정보 시스템에서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흥사단 단우는 ‘통상단우’, ‘특별단우’, ‘예비·기타 단우’로 분류된다. 통상단우는 제1∼제309단우까지 단우번호가 부여되어 있으며 단우번호 없이 ‘특별단우’ 36명, ‘예비·기타 단우’ 110명 총 455명의 ‘단우 이력서’가 확인된다. 김이대는 평양 대성학교 출신으로 ‘동우구락부’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926년경 흥사단에 입단한 것으로 봐서는 ‘수양동우회’ 시기로 추정된다. 김이대는 ‘예비·기타 단우’로 분류되어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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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평북 선천 출생의 김이대가 1926년 흥사단에 가입했으며 이전 이름이 “(김)규환·(김)검군·사헌”이라고 했으므로 ‘직업’란의 행적과 김규환·김이대로 각각 검토했던 행적이 100% 일치한다. 특히 「이력서」를 통해 김규환=김이대로 판단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는 김이대의 ‘가족’란 기록 중 “처 : ○씨, 자 : ○○·○○”와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어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 안장되어 있는 ‘애국지사 김규환’의 가족관계 및 출생지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또 「이력서」 ‘단체’란에 마지막 행적이 정의부라는 기록과 김승학 등의 자료에서 정의부 관련 행적(<대동민보>주간)이 1926년 9월 전후라는 기록도 일치한다.


3. 흥사단은 1913년 5월 안창호의 주도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되어 무실·역행·충의·용감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일제강점기 국내외에 지부를 설립하고 실력양성운동에 힘썼다. 국내에도 조직사업을 펼쳐 1922년 서울에 수양동맹회를, 1923년 평양에 대성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동우구락부를 결성했으며 두 단체는 1925년 수양동우회(1929년 동우회로 개칭)로 합쳤으나 1937년 이른바 ‘동우회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이후 김규환=김이대가 3부통합으로 성립된 국민부에서 활동하다가 1929년 11월 체포되었으며 1935년 전후 변절해 간도협조회와 만주국 협화회에서 활동한 정황은 김승학이 <망명객행적록>에서 밝힌 것에서도 확인된다. 김승학은 1930년대 중반 환인현 일본영사관 소속으로 독립운동가를 귀화시키는 사업에 앞장섰던 인물이 ‘만주국 선무반 책임자 김이대=김검군’이라고 지목했다. 이것은 김이대가 「이력서」에 기록한 이전 이름 중 ‘검군’이라는 사실과도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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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4월 12일 평양부 암정(岩町) 형무소에서 출옥 …… 자식 3형제 중에 2인은 전일(前日) 참의부 소재지인 남만주 환인현 방면으로 간 지가 2년이라고 한다. …… 그해 8월에 자식형제를 찾기 위하여 다시 남만주 환인현으로 들어갔다. …… 자식의 소재처를 탐문한 즉 수삭(數朔) 전에 환인현 왜(倭) 영사관에 피착되어 간 후 소식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이후 환인현 성리(城裡)로 갔더니 성내는 전일에 독립군 간부 인물로 명성을 날리던 김모(金某), 고모, 문모, 최모, 변모 제인(諸人)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면서, 선무반(宣撫班) 명색(名色)으로 세력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선무반에서 하는 업무는 전일의 독립운동자들을 만주국에 귀화시키는 사업인 것이다. 나는 증전(曾前)에 안면이 있던 김모를 찾아가서 자식의 행방을 탐문하였다. 이때 그의 답은, ”선생의 자제 영달(榮達), 영저(榮渚) 형제는 수년 전에 이곳 환인·통화 경내에 와서 외면으로는 농업을 하노라 하면서, 이면으로는 선생의 구(舊) 동지들과 연락하여 비밀음모를 한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나는 이때 그의 다음 말을 듣기 위하여 듣고만 있었다. 그는 다시 말하기를, “지금이라도 선생이나 자제가 이 선무반에서 같이 행동하신다면 무사할 것 아니겠습니까?” ……
그 이튿날 봉막돌(奉莫乭)이라는 청년이 내 여관으로 찾아왔다. 그는 환인현 동영영구(東英英溝)에서 백가장 일을 보던 봉태주(奉泰周)의 차남으로 이전에 영영구 보안대원으로 근무하던 자로서 지금은 만주국 선무반에서 저들과 같이 독립군 귀화설론(歸化說論)을 하고 다니던 사람이다. …… 그의 말은 이러하다. “어제 밤 우리(만주국 환인현 일본영사관 소속-필자) 선무반 책임자 김검군(金劒君) 선생님네가 말씀하시는 것을 듣사온즉 선생님이 오신 듯 하기에 지금 찾아왔습니다. 감옥에는 언제 나오셨으며,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나는 이 말을 듣고 간단하게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자네의 상관인 김검군(金劒君)을 만나게 되어 사실을 묻고 있는 중일세. 자네 혹 내 자식 형제들에 대해 들은 일이 없는가?” …… 전일에 환인현에서 김이대(金履大)가 나를 보고 선무반에 참가하면 내 자식을 방송한다고 하던 것이 그들의 음모임을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단기는 서기, 밑줄·강조 등은 필자)

<망명객행적록(亡命客行蹟錄)>은 김승학이 78세 때인 1958년에 자신의 일생과 독립운동일대기를 회고한 글이다. 후손 김병기가 일부 내용을 현대적 표기로 수정·보완하여 원문 전체를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2집(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1998.12)에 처음 공개하였다. 이후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문체와 문장 등을 쉽게 다듬어 2011년 후손(막내 손자) 김창업(사단법인 희산김승학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이 단행본으로 발행하였다.
지금까지 ‘독립운동가·애국지사 김규환’과 ‘변절자 김이대·김검군’은 동일인이라는 것을 추적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규환이 김이대라는 근거는 「흥사단우 이력서」와 ????망명객행적록????,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 안장되어 있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이대가 ‘만주사변 후 변절’했다고 기록한 <한국독립사>와 <한국독립운동사>는 국가보훈처가 독립운동가의 행적으로 인용하는 1차적인 근거자료이다. 이 두 자료가 변절자로 기록한 김이대는 1929년 11월 중국관헌에 체포되었으며 조선총독부가 이를 주시하고 있다는 <매일신보>의 기사도 확인된다. 다만 1933년 말까지 흥사단원으로 활동한 것이 확인된 만큼 변절 시기는 간도협조회 조직(1934.9)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1935년 중반에 ‘김이대=김검군’이 환인현 일본영사관 소속으로 만주국 선무반 책임자이며 독립운동가의 귀화업무를 담당했다는 기록(<망명객행적록>), 그리고 그 단체가 간도협조회이며(<삼천리>) 간도협조회가 만주국협화회로 통합된(1936.12)후 ‘김이대’가 “협화회 수괴로 만주에서 적과 악전고투하는 혁명동지를 계속 도살하는 음모에 몰두”하고 있다는 자료(<전도>, <조선출판경찰월보>) 등을 통해 ‘김규환・김이대・김검군’이
동일인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과 김이대·김검군의 변절 행적은 언젠가 학술적으로 정리될 필요가 있다. 공훈자료에는 김규환의 애국계몽운동 행적만 드러나 있지만 그가 김이대와 동일인으로 확인되었으므로 독립운동 관련 행적도 새로 정리되어야 한다. 예컨대 김규환과 윤세복·이시열은 대동청년단원으로 활동했으며 모두 동창학교·일신학교(1916년 흥동학교로 개칭)와 관계가 있다. 전자는 대종교 제3세 교주 단애 윤세복(1881∼1960)이 1911년 5월(음력) 설립한 학교이고, 후자는 대종교인(호 단총)으로 이후 불교에 귀의한 이시열(1892∼1980, 운허큰스님)과 함께 1915년 6월에 직접 설립한 학교이다. ‘검군’이라는 별명도 대종교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김규환의 독립운동 행적과 김이대의 변절 과정 및 이후의 행적은 이민족의 통치를 받던 엄혹한 시기에 겪었던 동일한 인물의 노정이다. 동시에 우리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기록이기에 반드시 제대로 정리되어야 한다.

∷ 이용창 편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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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 개막

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이 8월 11일 개막하였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인 3월 5일 또는 4월 1일에 개막하려고 했지만 코로나19로 연기되었다. 창간일 대신 두 신문이 1940년 일제에 의해 폐간 당한 8월 11일에 맞추어 개막하였다. 이 기획전은 일제가 발행을 허가한 1920년부터 1940년 폐간되기까지 20년간 두 신문의 부일협력 행위를 추적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주관하는 이번 기획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모두 4부로 구성되었는데, 먼저 198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낯 뜨거운 ‘민족지’ 논쟁을 소개하며 “두 신문이 과연 민족지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제1부 「조선의 ‘입’을 열다」에서는 조선‧동아의 창간배경을 파헤쳤다. 3‧1운동 후 일제는 민심 파악과 여론 조작을 위해 민간신문의 설립을 허용했다는 사실과 두 신문의 창간 주도세력의 성격을 통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태생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제2부 「황군의 나팔수가 된 조선·동아」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 개전을 계기로 경쟁적으로 침략전쟁 미화에 나선 두 신문의 보도 실태를 조명한다. 그리고 두 신문의 투항이 사실상 이해관계에 따른 자발적 선택이었음을 다양한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총독부의 보도지침이 강제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선택한 ‘일본국민적 태도’를 보인 전쟁 보도는 조선·동아의 노골적인 부역행위의 결정판이었다.
제3부 「가자, 전선으로! 천황을 위해」는 조선·동아가 1938년 시행된 일제의 육군특별지원병제도와 전쟁동원을 어떻게 선전·선동했는지를 고발한다. 조선 청년들을 침략전쟁의 희생양으로 내몬 행위는 단순한 부역이 아니라 전쟁범죄로 규정해야 할 두 신문의 흑역사이다.

 

제4부 「조선·동아 사주의 진면목」에서는 일제하 조선일보 방응모와 동아일보 김성수의 친일행적을 다룬다. 언론사를 사유화한 두 사주는 전쟁협력을 위한 각종 관변단체의 임원으로 참여하는 한편 강연·기고 등을 통해 일제의 대변인 역할을 자임하는 활동을 펼쳤다. 방응모가 고사기관총을 국방헌납하고 김성수가 “탄환으로 만들어 나라를 지켜달라”며 철대문을 뜯어다 바친 반민족범죄도 소개한다. 에필로그에서는 프랑스의 친나치 언론 숙청과 우리의 반복되고 있는 부역언론의 현재를 비교하였다.
고경일 작가의 카툰과 레오다브의 그래피티가 전시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고, 언론개혁 특강 등 부대행사가 전시 폐막 때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전시물로는 동아일보가 정간 해제를 목적으로 총독부에 복종을 서약한 경위가 담긴 「동아일보 발행정지 처분의 해제에 이른 경과」와 조선일보 폐간 당시 사주 방응모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밀약을 담은 「언문신문 통제에 관한 건」 등 조선총독부의 극비문서가 있다.
그동안 조선‧동아 1면에 실린 일왕부부의 사진에만 주목했다면 1면에 일왕부부의 사진이 실리게 된 뒷배경을 바로 이 극비문서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가 최근 입수한 재일 조선인 유학생 단체들의 동아일보 ‘성토문’ 원본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1924년 만들어진 이 성토문 전단은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광수가 쓴 사설 ‘민족적 경륜’의 친일 성향과 패배 의식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조선 민중이 ‘민족지’를 표방한 동아일보에 얼마나 실망과 분노를 토해내고 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짐에 따라 전시장을 직접 올 수 없는 분들을 위해 VR온라인전시도 추진중이다. 전시 홍보 영상은 유튜브 민족문제연구소 채널에서 보실 수 있으며 기획전 도록도 회원들에게 제공될 예정이다. 이번 전시는 10월 25일까지 열린다. 언론개혁의 의지를 담아 회원들의 많은 참여와 성원을 바란다.

수, 2020/08/26-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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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조선일보 방씨 일가의 ‘그린벨트 훼손 불법 호화 묘지’ 규탄 집회

 

 

연구소 경기북부지부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의정부시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준)는 8월 8일 의정부종합운동장 엄복동 동상 앞에서 ‘친일파 조선일보 방씨 일가 불법행위범시민 규탄대회’를 열고 불법 호화묘지에 대한 행정절차에 즉각 돌입할 것을 의정부시에 요구했다.
앞서 고발뉴스는 지난해 1월부터 방씨 일가가 700여 평에 이르는 그린벨트 임야를 훼손해 호화 분묘를 불법 조성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의정부시는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음을 연속 보도했다. 고발뉴스의 보도를 접한 기념사업회는 이날 집회에서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해방 후에는 친독재를 일삼아온 조선일보 사주 방씨 일가가 수십 년 전부터 의정부시 가능동에 불법 조성한 가족묘지에 대해 관계당국은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에 상응하는 법적 조치와 원상회복을 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또한 ‘의정부 관내 불법 조성된 조선일보 방응모 일가의 가족묘에 대하여 법률에 따라 엄격한 처벌과 원상복구를 위하여 청원드립니다’란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도 올려놓았다. 참가자들은 집회를 마친 후 엄복동 동상부터 가족묘가 시작되는 입구까지 행진했다. 의정부시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준)는 올 가
을에 정식 창립과 동시에 조선일보를 산림법, 장묘법, 개발제한구역특별법 등 위반 혐의로 고발할 예정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수, 2020/08/26-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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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근현대사기념관 독립민주시민학교,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특별강좌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사월혁명 60주년을 맞아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의 주제로 독립민주시민학교 특별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강좌는 해방 이후 민중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무너뜨린 4월혁명을 문화예술인들이 어떠한 창작활동으로 승화시켜 혁명정신을 이어 나가고자 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강좌는 9월 5일에서 9월 20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에 현장 수강과 온라인 수강을 병행할 계획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 방침에 따라 온라인 수강으로 변경되었다. 실제 강의를 촬영한 뒤 영상 편집을 마친 결과물을 근현대사기념관과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려 많은 시민들이 온라인으로 쉽게 수강할 수 있게 하였다.
첫 번째 강의는 문학평론가인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이 <이승만 독재정권과 문화예술계의 대응-한국문학에서 본 4·19혁명>의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해방 전후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이승만에 대한 문학적 평가와 함께 혁명문학 소개를 통해서 세계혁명문학의 특징과 문학에서의 4월혁명의 성과를 알 수 있는 강의였다.
2강 <껍데기는 가라! 시인의 절규-4·19혁명과 한국문학>은 한양대학교 유성호 교수가 강의하였다. 이 강의를 통해서 신동엽, 김수영 등의 시인들의 작품에 4월혁명이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3강 <혁명의 기록-사월의 노래>는 성공회대학교 이준희 교수가, 4강 <잘 돼 갑니다-우상의 시대>는 한상언영화연구소 한상언 소장이 맡았다. 대중문화 속에 4월혁명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알 수 있는 강의였다. 이 외에도 5강 서울대학교 방민호 교수의 <피의 행진-대열 속에서>, 6강 숙명여자대학교 권성우 교수의 <성찰, 자유, 배신의 미학-4·19가 문학에 미친 영향과 파장> 강의도 온라인으로 수강할 수 있다.
독립민주시민학교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강좌는 근현대사기념관의 홈페이지 외에도 민족문제연구소와 서울시 강북구의 홈페이지에서 2020년 10월 18일까지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11월에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계획하여 많은 시민들에게 양질
의 역사교육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목, 2020/09/2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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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학교현장을 다시 떠나며

이민우 운영위원장

 

1981년 5월 21일 오후 8시경 인천제일교회에서 한완상 교수의 강연회가 끝나고 청년학생 500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전두환 물러가라’ ‘노동3권 보장하라’ ‘광주민중항쟁 진실규명하라’ 외치며 동인천역으로 향했다. 당시 나는 인천 인성여고 교사이며 인천기독청년협의회 회장이었다. 1981년 5월 18일에 이미 5.18 민중항쟁에 대한 진실규명과 전두환정권의 사죄 등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한 때였다.
나는 그날 저녁에 인천 중부경찰서에 잡혀갔다. 당시 동인천역 근처에 있었던 광야서점에 내 이름 앞으로 와 있던 유인물 300여 장의 출처를 대라며 경찰은 같이 연행되었던 다른 후배들과 나를 엄청 두들겨 고문하였다.
이렇게 되어 나는 결국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만기 출소하고 인성여고에서 해직되어 교단을 떠났다. 내가 경찰서에서 두들겨 맞고 있는 때에 나중에 출소한 후에 알았지만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학생은 학교 교무실의 내 자리를 지키며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하여 참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출소 후에는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아 당시 탄압받던 민주노조였던 콘트롤 데이터 노동조합 탄압저지대책위 간사로 또 원풍모방대책위 간사로 여기저기를 누비다가 결국 생산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직접 함께 투쟁하자고 하여 가방공장에서, 트랜스 공장에서 1년여를 일하고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간사로 들어가 10년을 노동현장에 대한 상담과 투쟁에 대한 지원활동을 하였다. 1980년대 노동현장은 너무나도 열악한 상태였다. 그래서 19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나도 그 한복판에서 3개월여를 집에도 못가고 치열하게 현장과 함께하였다. 참으로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이 세상이 변혁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으로 그나마 만족할 수밖에 없는 한계적인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인천에 선인학원 재단이 있었다. 당시 부패사학의 대명사였다. 이 재단을 실제로 만들고 운영한 사람은 그 유명한 백인엽이었다. 조그만 사립재단을 인수하여 선인재단으로 바꾸고 그 산하에 유치원 1곳, 초등학교 1곳, 중고등학교 10곳, 전문대학 1곳, 대학교 1곳 도합 14개의 학교를 거느린 거대 사학재단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비호를 받아 그야말로 사학재벌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온갖 비리가 발생하여 인천교육계의 암덩어리가 되었다. 졸업장을 팔아먹고, 그야말로 학교 부지를 헐값에 사기 위하여 온갖 편법을 동원하고, 학교 건물을 짓는데도 학생의 교육환경은 최악으로 9층 건물에 화장실은 1층에 달랑 한 개뿐이었다. 이렇듯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조건의 교육환경에 학생들을 수용하고 학생들에게 노동을 시키기도 하고, 교사를 옛날의 하인을 부리 듯 하니 최악의 교육조건에 내몰린 학생들과 교사, 교수 들이 학원민주화를 외치며, 학원 부패척결을 외치며 들고 일어나자 지역사회에서 선인학원 정상화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이들의 싸움을 지원하였다. 나도 여기에 함께하여 결국에는 선인학원이 해체되어 14개의 학교가 공립화되고 인천대학교는 부패사학의 대학에서 국립대학교으로 탈바꿈하였다.
인천대학교의 정상화를 위하여 나는 이때에 교직원으로 들어가 5년여를 일하고 1999년 김대중정부에서 민주화운동 관련 교사 복직 때에 마지막으로 복직하였다. 그로부터 20여 년을 학교현장에서 평교사로 복무하고 정년을 맞이하여 다시 학교현장을 떠나게 되니 참으로 인생은 길고도 짧은 것 같다.
누구나 자기 인생을 이야기하면 책 몇 권 쓸 정도로 많은 굴곡을 겪으며 살아간다. 정년을 하면서 나를 돌아보니 참으로 사연과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고 시대정신에 부응하여 나의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나 한편으로는 많은 부분이 부족한 삶이어서 아쉬움도 크게 남는다. 앞으로 우리 민족적 과제인 평화와 통일, 아직도 미완인 친일 청산을 위해 씨름하며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금, 2020/09/25-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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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안익태의 표절과 변절

 

김정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강사1

1. 들어가며

 

1942년 9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 음악회’에서 안익태가 자작곡인 교향환상곡 <만주국>을 직접 지휘하였다.

 

안익태 애국가2의 표절문제가 최초로 제기된 것은 1964년, 제3회 서울 국제음악제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불가리아계 미국인 지휘자 피터니콜로프(Петър Николов)에 의해서이다.
그는 〈애국가〉가 불가리아 노래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오 도브루자의 땅이여, О, Добруджански край)〉와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불가리아 태생의 작곡가이자 UCLA 교수 보리스 크레만리에프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악보를 보내오면서 표절의 근거를 제시하였다. 중앙대 이유선 교수는 저서 <한국양악백년사>에서 이를 한 번 더 언급하며 새 국가 제정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애국가〉의 표절에 관한 시비는 <코리아 타임스>의 음악평론가 제임스 웨이드(James Wade)와 전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 공석준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그 뒤에도 전 중앙대학교 교수 노동은에 의해 논의된 바 있다.
본고에서는 〈애국가〉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유사성에 대해 선율형을 중심으로 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표절 사실을 확인할 것이며, 〈애국가〉 작곡 이후 안익태가 전개한 자기표절의 일련의 과정이 어떻게 변절과 위장의 수단이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1 국가만들기시민모임 사무총장 겸 연구위원장
2 이하 <애국가>로 약칭함.

 

 

 

안익태의 대한국애국가(大韓國愛國歌) 자필악보. 1949년 4월 18일 사보(寫譜)

 

2. 안익태의 표절

애국가의 작곡시점은 1935년 11월, 미국 필라델피아이며, 같은 해 12월 28일 초연되었다. 즉 불가리아 방문 전에 〈애국가〉가 작곡된 점은 사실일 것이나, 공석준 스스로가 독보(讀譜)에 의한 참고 여부는 알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꼭 불가리아를 직접 방문해야만 불가리아의 노래를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안익태는 〈애국가〉 작곡을 위해 40여 개국의 국가(國歌)를 수집하였으며, 세계 각국의 민요, 가곡, 성가곡들을 모아 기초자료로 삼았다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접했을 개연성은 부정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두곡의 선율을 상세히 비교하여 표절 여부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래 악보의 윗단은 〈애국가〉이고, 아랫단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이다. 굵은 선은 선율의 흐름이고, 위아래를 연결한 가는 선 중 초록색은 일치하는 음, 노란색 선과 원은 변주된 음이다.

 

 

셋째 단 이외의 부분에서 선율의 흐름이 유사하다는 점이 한눈에 드러난다. 〈애국가〉의 출현음 총 57개 중 맥락과 음정이 일치하는 음은 모두 33개(58%)이며, 변주된 음까지 포함하면 그 개수는 모두 41개(72%)이다. 즉 선율의 맥락과 음정의 일치도를 기준으로 하면 두 곡의 유사도는 58~72%이다. 이처럼 높은 유사도를 표절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애국가〉에서 노랫말과 선율이 부합하지 않는 부분들 또한 표절로 인한 결과로 추정된다. 예컨대 아래 악보 첫마디 ‘동해물과’에서 ‘해’가 악구의 정점에 있으며, 음가도 가장 길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 음절에 악센트가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동’과 ‘해’는 연결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동/해물과’로 들리며, 결과적으로 노랫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제2마디의 ‘백두산이’는 더 심각하여, 한반도에서 가장 높으며 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백두산의 형상이 아래로 거꾸러진, 계곡과 같은 선율형으로 되어있다.

곡풍(曲風)에 있어서도 대체로 처량하여 기백을 느끼기 어렵고, 장엄하고 활기찬 면이 부족하며, 애국적 감격이 표현되지 못하였으며, 정체성이 부족하다는 점이 계속 지적되어왔다. 이는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선율에 기존에 있던 〈애국가〉의 노랫말을 붙이면서 초래된 결과로 분석할 수 있다. 원래 약박인 선율을 강박으로 시작함으로써 ‘동/해물과’가 되었고, 원 선율을 변주하면서 백두산이 거꾸러진 형상이 되었으며, 원래 활기찬 행진곡 풍의 곡을 보통 빠르기보다 느리게 바꾸면서 활기와 기백이 감소된 것이다. 서양의 노래가 원곡이므로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전혀 갖추지 못한 점도 문제이다. 결국 〈애국가〉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선율을 결과적으로 상당 부분 차용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3. 안익태의 자기표절

안익태가 자신의 작품을 연주한 일시와 장소를 정리한 것3


3 이해영, 안익태 케이스, 37-38쪽의 표 참조.

 

 

안익태의 일본식 이름 ‘에키타이 안’(EKI TAI AHN)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38년 7월, 헝가리의 외트뵈쉬(Eötvös) 기숙학원 서류이다. 그는 이를 한국식 이름과 혼용했으며, 해방 이후인 1952년까지도 스페인에서 일본식 이름을 썼음이 확인된다.
〈에텐라쿠〉는 에키타이 안이 1938년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유럽에서 가장 많이 연주한 레퍼토리로, 일본의 아악 〈에텐라쿠(越天樂)〉의 주제 선율을 그대로 활용한 곡이다. 이 곡은 1940년에는 〈야상곡과 에텐라쿠〉라는 이름으로, 1960년 6월 15일에는 〈강천성악(降天聲樂)〉이라는 이름으로 연주된다. 1962년 1월 한국 초연시 언론에는 세종대왕이 지은 아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940년에 작곡했다고 보도된다. 〈에텐라쿠〉의 원 악보와 음원은 존재하지 않으나, 1941년 헝가리 월드 뉴스에 등장하는 1분 정도의 편집 영상을 KBS 음원의 6분 01초 이후와 비교하면 동일곡이라는 점이 이해영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즉 〈에텐라쿠〉는 〈강천성악〉으로 자기표절되었다.
1938년에 초연된 〈코리아 판타지〉는 1940년 10월 19일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교쿠토(極東)〉가 연주되면서부터 자취를 감춘다. 〈교쿠토〉에는 〈애국가〉가 포함된 4악장의 합창 부분이 생략되고, 몽고여행의 기억을 담은 ‘음악이야기’로 대체된다. 그것은 불가리아 노래를 반 이상 닮은 〈애국가> 선율을 듣는다면 불가리아 청중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지 않았겠는가.
1943년 1월 3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에텐라쿠〉와 함께 연주된 〈토아〉(Toa) 역시 〈교쿠토〉의 다른 이름으로, 일본어이며 ‘동아’(東亞)를 뜻한다. 이는 다시 1942년 9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에서 〈만주국〉이라는 곡명으로 연주되며, 마지막 악장에 만주국을 찬양하고 추축국의 결속을 다짐하는 합창이 들어간다.
바로 이 4악장 합창 부분 대본을 에하라 고이치가 썼는데, 그는 만주국 건국 이후 하얼빈특별시 부시장을 역임하고, 독일이 만주국을 승인한 1938년부터 주 베를린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으로 부임한 인물이며, 주독 일본 첩보기관(IS)의 총책이다. 에키타이 안은 에하라 고이치의 사저에서 1941년 말부터 1944년 4월 초까지 기거하며 그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였으며, 그 대가로 일본제국과 나치독일에 선전 활동 용역을 제공하였다.
〈만주국〉은 1944년판 〈한국 환상곡〉으로 다시 재구성되어서, 1946년 3월 15일 바르셀로나 리세오 극장에서 연주된다. 이때 마지막 악장에는 다시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를 사용하였다. 즉 〈한국 환상곡(코리아 판타지)〉, 〈교쿠토〉, 〈토아〉, 〈만주국〉은 대동소이한 곡이며, 최초에 합창으로 표현된 ‘애국’의 자리는 ‘몽고’로, 또 ‘만주’로 바뀌었다가 다시 ‘애국’으로 돌아왔다. 만주국을 찬양하고 추축국 3국의 동맹을 다짐하던 그 선율로 다시 ‘애국’을 노래한 것이다. 결국 안익태의 대표작들은 모두 자기표절의 결과로 생성된 이명동곡(異名同曲)이었다.

 

4. 나가며
〈올드 랭 사인〉의 선율을 애국가로 부르는 것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작곡한 〈애국가〉가 어찌하여 결과적으로 불가리아 노래를 차용한 ‘표절’이 되었을까? ‘하나님’은 어찌하여 그로 하여금 독자적이면서 민족 정체성을 가진 선율을 쓰게 하지 않았을까? 그러한 〈애국가〉가 과연 ‘애국’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에키타이 안에게 있어 표절과 자기표절은 일신의 영달을 위한 변절과 위장의 수단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 〈애국가〉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선율을 결과적으로 표절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만일 의도적 표절이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나라의 노래와 이처럼 닮은 선율을 〈애국가〉로 부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낯 뜨거운 일이다. 국민 모두가 오랫동안 불러왔다고 해서 그 부끄러움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국가라면 적어도 우리나라의 건국이념, 철학, 역사, 자부심, 비전 등이 담기고, 모두가 함께 부르면서 정서적 공감대 형성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평화와 평등까지 고취시킬 수있는 좀 더 진취적이고 기상이 있는 선율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이 담긴 전통장단과 악조라야 함은 물론이다.
일반에 널리 알려진 주제, 또는 자신이 특정 작품에서 썼던 주제를 다시 활용하여 창작하는 것은 여러 작곡가들이 즐겨 쓰는 창작기법이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선율을 그 출처를 밝히지 않고 주제로 활용한다든가, 전반적으로 동일한 곡을 이름만 바꾸어 다시 발표하는 행위는 표절과 자기표절에 해당한다. 표절과 자기표절은 ‘창작’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금기시되는 행위이며, 가장 기본적인 ‘양심’의 문제이며, 법적,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안이다.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가 오래 전에 만들어져서 저작권 관련 법적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결과적 표절임을 확인한 이상 공식적 행사에서 이를 부르기를 강요하거나 권장하는 일은 앞으로는 없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우리의 정체성과 시대정신을 모두 반영한, 정통성과 품격을 갖춘, 대한민국의 법정 국가(國歌)를 만들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여야 할 때이다.

목, 2020/09/24-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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