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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약은 강제로 체결된 불법조약이다! – 헤이그 특사 위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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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약은 강제로 체결된 불법조약이다! – 헤이그 특사 위임장

익명 (미확인) | 금, 2017/07/2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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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1907년 4월 20일 고종이 헤이그 특사에게 준 위임장이라고 알려진 문서이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실질적인 주권을 잃게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는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으며, 나라의 자주 독립을 호소하며 자결하거나 친일 매국노의 처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고종은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국권회복의 염원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자 회의 참가를 요청하였다. 또한 프랑스・벨기에 주재공사 민영찬에게 이 문제를 협의하라는 훈령을 내렸고, 러일전쟁 이후 불어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마르텔을 비밀리에 베이징에 파견하여 베이징 주재 러시아 공사를 만나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네덜란드로부터 초청장을 받은 대한제국은 12번째 초청국으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만국평화회의에 외교권을 상실한 국가가 회의에 참가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한국 참가를 반대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 이후에도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어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대한제국을 만국평화회의에 초청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대한제국을 초청하는 것을 포기했다.
한편 1905년 9월 고종의 밀사인 이용익이 러시아로 건너가 국내와 비밀접촉을 하면서 만국평화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상동청년회와 연결되어 이동녕, 이시영, 안창호, 김구 등이 이준과 이상설을 특사로 보내기로 의견을 모아 고종에게 특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를 받아들여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명의 특사를 헤이그 평화회의에 파견하였다.

이때 고종이 특사에게 위임장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졌는데, 미국 뉴욕에서 발행된 <The Independent> 1907년 8월 22일자(주간, 제3064호), 「A Plea for Korea(By Prince Ye We
Chong)」에 이위종이 쓴 호소문과 그가 소지하고 있던 신임장의 사본 및 번역문이 게재되어 있다. 여기에는 “1907년 4월 20일 한양 경성 경운궁에서 친히 서명하고 옥새를 찍노라”고 적혀 있다. 연구소가 소장한 ‘위임장’은 ????The Independent????에 소개된 것을 해방 이후 복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세 특사는 6월 27일자로 서명된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지니고 활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중재재판을 취급하는 만국평화회의 제1분과위원회를 찾아가 한국문제를 다루어 줄 것을 요청하고,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 참가국에게 탄원서를 배포하였으며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한국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을 강력히 호소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어느 나라도 일본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은 당시 국제관계를 볼 때 성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특사의 희망과는 달리 만국평화회의는 한국을 철저히 외면했다.
일본은 헤이그특사 파견을 ‘을사조약’ 위반행위로 몰아 7월 22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준 특사는 현지에서 순국하고 이상설·이위종 두 특사는 망명했다. 그들은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대한제국특파위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위임장

대황제가 칙서를 내리는바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은 세계 여러 나라가 공인한 것으로 짐이 지난번 여러 나라와 조약을 맺고자 하여 서로 우방으로서 긴밀함을 갖은즉, 이제 세계 여러 나라가 평화를 위하여 한 자리에 모이기에 응당 참석함이 마땅한 것인데 1905년 11월 18일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국가 간의 법을 어기고 도리에 어긋난 협박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아 우방과의 외교를 단절케 하였다. 또한 일본의 모욕적인 침략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을 뿐더러 그 침략의 의도는 인도자의 도리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짐의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참으로 가슴 아픔을 느끼는 바이다. 이에 여기 종2품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특파하여 네덜란드 헤이그 평화회의에 가서 본국의 모든 실정을 온 세계에 알리고 우리의 외교권을 다시 찾아 여러 우방과의 외교관계를 원만하게 하도록 바라노라. 짐이 생각건대 특사들의 성품이 충실하고 강직하여 이번 일을 수행하는 데 가장 적임자인 줄 안다.
대한 광무 11년 4월 20일 한양 경성 경운궁에서 친히 서명하고 옥새를 찍노라.

대황제 수결 황제어새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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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시위 나선 보통 사람들 얘기
경찰·검찰·법원 자료로 생생히 복원
“대규모 민족운동 원동력은 자발성”
“평범한 사람들 싸움이 오늘을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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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열전 -3·1운동의 기획자들·전달자들·실행자들 조한성 지음/생각정원·1만6000원

1919년 3월5일 9시30분, 경성 덕수궁파출소에서 근무하는 순사보 정호석(당시 34살)은 아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휴가를 얻었다. 경찰관 옷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서대문네거리에 있는 잡화상에서 광목을 사 집으로 돌아왔다. 넷째손가락 둘째 마디를 물어뜯어 흘린 피로 광목에 태극기를 그렸다. 다른 광목에는 ‘대한국 독립만세’라고 썼다.

담배설대에 광목들을 묶어 들고 집 근처의 흥영여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들어가 그는 만세 삼창을 한 뒤 ‘함께 만세를 부르지 않겠냐’고 물었다. 어린 여학생 한명이 나와 만세를 불렀다. 열 살 된 그의 딸이었다. 딸의 친구들 수십 명이 뒤를 이었다. 교사 두 명도 만세를 부르며 아이들의 뒤를 따랐다. 이들이 3·1운동의 ‘최연소 시위대’였다.

“그대는 왜 독립운동을 하였는가?”(검사)

“삶에 쪼들리고 있는 2천만 동포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정호석)

“이와 같은 일을 하면 무거운 형벌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각오하고 한 일이니 목숨이 아깝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험한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정호석은 딸이 다니는 학교로 가 만세시위에 동참하게 했다. 왜 그랬을까? 그건 2016년 하반기 서울 도심을 비롯해 전국에서 벌어졌던 촛불시위 때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나선 부모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만세’와 ‘촛불’은 나라의 미래를 바꾸는 일이었다.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아이에게 그 길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내 아이가 오래도록 그 길을 기억하고, 후일 그 길이 막히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면 제대로 된 길을 찾아 용감히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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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시위는 순식간에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으며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었다. 출처 국가기록원

조 연구원이 최근 펴낸 <만세열전>은 3·1운동의 진짜 주인공들 이야기다. “이 땅에 민주주의를 가져오기 위해,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싸워온 사람들은 대개 무명의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소중한 삶을 희생했지만, 역사책에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의 첫 번째 목표는 그들의 삶을 역사로 복원하는 것이다.”

이들을 생생하게 담아 내기 위해 경찰신문조서와 검찰신문조서, 예심심문조서, 공판시말서 등을 활용했다. 신문·심문조서는 ‘한 것도 안 했다’고 숨기는 피의자·피고인과 ‘하지 않은 것도 했다’고 꾸미려는 공안당국 사이의 진실게임이 벌어진 기록이다. 거짓도 들어 있다. 그럼에도 이런 자료들을 적극 활용했다. 조 연구원은 그 까닭에 대해 <한겨레>와 통화에서 “조서 등은 보조 자료로 여겨져 왔지만, 거기에 사람들의 내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런 자료를 토대로 3·1운동을 기획하고,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의 소식을 알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만세시위에 나선 사람들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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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시위는 순식간에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으며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었다. 출처 국가기록원

책은 여운형(1886~1947)에서 시작한다. 그는 1918년 11월 중국 상하이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특사 찰스 크레인을 만났다.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논의한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대표를 보내기로 하고, 이 회의와 윌슨 대통령에게 보낼 독립청원서 두 통을 작성했다. 조직의 명의로 청원서 서명을 하려는 목적에서 ‘신한청년당’이 만들어졌다. ‘벼락정당’이었다. 신한청년당은 이후 조선과 일본, 만주와 연해주로 흩어져 조선인들을 만나며 독립의 희망을 얘기했다. “3·1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책은 이어 천도교와 기독교의 독립운동 결정과 힘을 모은 과정을 다룬다. 독자적 운동을 모색하던 학생들도 종교계 쪽의 운동에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독립운동을 한차례로 끝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의 생각은 향후 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 독자적인 운동을 펼치겠다는 생각도 소중했다. 이런 생각이 있었기에 민족대표들이 독립운동의 지도를 포기했을 때 학생들이 나서 대신할 수 있었다.”
학생들만으로 3월5일 남대문역 시위를 준비했다. 일제는 이날 모인 군중이 약 1만명이라고 했는데, 3월1일은 2천~3천명이라고 했다. 학생들의 조직력, 3월1일 만세시위에서 얻은 용기가 가져온 결과였다. 남대문 일대는 ‘붉은 수건’으로 물들었다. 경성에서는 이날 시위 때 태극기가 처음 나왔다고 한다.

‘독립선언서’는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인쇄됐다. 보성사 사무원 인종익(49살)은 독립선언서를 지방에 전달하는 일을 하다 청주에서 체포됐다. 고문과 구타에도 처음엔 입을 열지 않았다. 전주에서 선언서를 배포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만인이 죽어 백만인을 살리는 방법이 있다면 죽음도 불사할 것이오. 만인을 죽이면 만인의 피가 백만을 물들이고, 백만을 죽이면 백만의 피가 천만을 물들일 것이오. 그럼 결국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소?”(인종익·경찰신문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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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익의 신상카드에는 사진이 없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주길 바라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사진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인종익은 1년5개월여 수형생활을 한 뒤 1920년 8월 출소했는데 이후의 흔적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일제가 만든 신상카드에도 ‘사진 없음’이라고 돼 있다. “그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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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선언서 등을 배포한 혐의로 체포된 당시 19살 청년 김동혁. 그는 예심판사의 심문에 “조선 사람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답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배재고등보통학교 2학년이던 김동혁(19살)은 3월1일 독립선언서 6매를 배포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2일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2호, 5일 <조선독립신문> 3호를 배포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피고(인)는 학생이면서 어째서 이번 계획에 가담했는가?”(예심판사)

“난 조선 사람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당연한 일일 뿐이었습니다.”(김동혁)

조선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3·1운동은 제대로 된 지도부가 없었는데도 순식간에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자발성이야말로 대규모 민족운동이 가능한 원동력이었다.”

어릴 적 서당에 같이 다녔던 노끈장수 김호준(21살)과 경성공업전문학교 2학년 양재순(22살)은 <각성호회보>라는 지하신문을 만들어 배포했다. 그들은 이렇게 썼다. “2천만 동포의 영혼과 삼천리강산을 가진 우리 민족은 맨손임을 걱정하지 말라. 철함 대포는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

지은이는 민주주의를 위한 모든 투쟁의 앞에 3·1운동이 있다고 말한다. “100년 전 포기할 줄 몰랐던 평범한 사람들의 싸움이 오늘을 열었다. 민주주의가 파괴될 때, 국가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가만히 있지 않고 일어나 당당히 싸우는 역사를 만들었다. 그 시작에 3·1운동이 있다.”

황상철 기자 [email protected]

<2019-02-15> 한겨레 

☞기사원문: 역사책에 안 나오는 3·1운동의 주인공들 

※관련기사 

☞서울경제: [책꽂이-만세열전]3·1운동을 완성한 무명의 보통사람들 

☞헤럴드경제: 소년·노끈장수·인쇄공…보통사람들의 3·1운동 ‘만세 이야기’

금, 2019/02/15-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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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릴레이 응원영상] – 10. 배동록 선생 – YouTube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D-9”
-릴레이 응원영상 열번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을 당했던 아버지와 한국인들에 대한 진상규명 활동을 하고 있는 재일동포 2세인 배동록 선생님이 잊어서는 안되는 역사를 위해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꼭 방문해달라는 부탁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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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발간의 기적을 이어 2018년 8월 29일, 다시 시민들의 힘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문을 엽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모금 참여
https://www.minjok.or.kr/archives/97796

목, 2018/08/23-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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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시대 민족음악의 스승이셨던 노동은 교수님!
선생님께서 2016년 12월 2일 국민적인 애도 속에 우리 곁을 떠나실 무렵,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은 촛불시민혁명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촛불은 마치 선생님께서 일생 동안 민족음악의 역사적 실현이란 과업을 이룩하고자 노심초사하시던 열망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민족적인 소망은 결실을 맺고 전기를 맞이하였으나, 선생님은 그 국민적인 승리의 합창을 듣지 못한 채 기어이 소천하시고 말았습니다.
민주화의 깃발 아래서 보다 자유롭고 넉넉하게 선생님께서 탐구해 오셨던 민족음악의 세계를 구축하실 수 있게 된 새로운 세상을 향유하시지 못한 채 떠나버린 선생님이시기에 저희들은 더더욱 안타깝습니다.
민족음악의 발전을 위하여 혼신을 다하셨던 노동은 교수님이시여!
선생님은 일찍이 음악이란 “인간을 위한 인간의 조직화된 소리”라고 정의하여, 음악을 전문 음악인의 전유물에서 모든 인간이 함께 즐겨 듣고 감동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으로 풀이해 주었습니다. “음악은 국경이 없다”며, 베토벤이 너무나도 좋아 그의 머리를 흉내 내려고 미장원엘 다녔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좋아하던 베토벤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 예술을 고통 받는 인간들을 위하여 사용하겠다는 정열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면서 내적인 만족감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보상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국경이 없이 모든 ‘고통 받는 인간들’을 위로하고자 음악활동을 했다는 베토벤의 예술적 투지는 바로 노동은 선생님의 예술적 투혼이기도 합니다.
국경이 없다는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굳이 민족음악을 강조하시며 일생을 민족음악의 구축에 심혈을 기울인 까닭은 바로 고통 받는 민족을 위로하고 용기와 투지를 북돋아 주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일찍이 이강숙, 이건용 선생님과 함께 ‘민족음악 연구자 3총사’로 맹활약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참다운 민족음악의 얼을 찾고자 작곡가 김순남과 정율성 등과 같은 격변기의 민족해방투사의 음악에 대한 연구와 보급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이어 선생님께서는 일제가 남긴 폐해에도 주목하여 친일음악과 왜색가요의 청산을 강력히 주장하셨습니다. ‘결혼행진곡’의 작곡자가 나치가 숭앙했던 바그너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곡은 물론이고 바그너 음악 전체를 연주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를 어기면 끝까지 추적하여 벌한다고 알려준 것도 바로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렇다고 선생님은 결코 폐쇄적이거나 배타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피아노와 풍물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선생님이셨습니다.
나아가 “우리 문화 속에 이미 널리 스며든 뽕짝 같은 왜색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것조차도 우리 문화의 일부이므로 비판적으로 수용, 발전시켜 역수출을 해야 한다”고 우문에 현답을 내놓기도 하셨습니다. 피아노를 치며 노래와 강의를 겸하시던 그 열강을 이제 우리는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은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민족음악사에 길이 남을 ????항일음악 330곡집????을 남겨 주셨습니다.
노동은 선생님! 선생님을 잃은 저희들이 슬픔을 딛고 그나마 위안을 삼는 점은 선생님의 유업들이 끊이지 않고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명진 사모님과 아드님 노관우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 그리고 우리 민족문제연구소가 힘을 합해 선생님께서 터 잡은 민족음악의 고귀한 과업을 이어 가겠습니다.
그러니 선생님, 이제 모든 염려 놓으시고 편안히 영면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삼가명복을 빕니다.

2017. 12. 9. 임헌영 올림

화, 2018/01/09-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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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8/09/05-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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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보고 연구소에서 정말 근거가 있는지 말해주세요.

일, 2018/01/28-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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