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제30차 민변 총회 참가 후기 :아끼는 곳에서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

지역

제30차 민변 총회 참가 후기 :아끼는 곳에서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

익명 (미확인) | 화, 2017/06/13- 14:27

제30차 민변 총회 참가 후기

아끼는 곳에서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

경남지부 유태영 회원

올해로 민변에 가입한지 3년째, 어느새 5월 민변 총회, 6월 국제노동팀 ILO 총회 참가, 가을 노동위원회-오사카 민변단 교류는 내 연간 일정에서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총회는 한해의 주요 사업을 공유하고 살림살이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모인 반가운 얼굴들을 오랜만에 만나고 민변의 정체성을 다지는 자리이다. 게다가 올해 제30차 민변 총회는 경남지부에서 공동으로 준비하는 터라 더욱 의미가 있었다. 통영은 지금 근무하는 법무법인 희망으로 이직하기 전에, 노동청에 6개월간 근무하면서 경남 생활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곳이다. 내가 아주 아끼는 곳인 통영에, 아끼는 사람들을 초대한다고 생각하니, 장소 선정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그 설렘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2017년 3월 16일, 총회 준비팀과 함께 한 사전답사부터 나의 총회 참가는 시작되었다. 백주선 회원팀장님, 이현아, 김서정 간사님, 신입회원 안지희 변호사님을 만나 후보지인 두 리조트 사이에서 어느 곳이 먼 길 달려온 민변 회원들의 고단함을 녹여줄지 신중하게 논의했다. 푸짐한 해산물이 끊이지 않는 다찌집에서 얼음 채운 바께스에 담겨 나온 소주와 맥주를 마시면서…

총회 당일, 점심 식사와 새 정부 출범 관련 사전 간담회, 중앙시장 투어로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한택근 변호사님께서 해저터널, 윤이상기념관, 중앙시장으로 이어지는 완벽한 도보 코스를 안내해주셨다. 짧은 경험이었지만 민변 변호사님들의 오랜 동지로서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는 합과 풍성한 여행 노하우에 감탄했다. 필자는 김인숙, 하주희, 김유정, 전민경, 이현지 변호사님과 건어물 쇼핑, 충무 김밥 간식, 강구안 까페까지 촘촘하게 즐기고, 다른 변호사님들은 중앙시장에서 막걸리까지 한잔씩 하고들 오셨다는 알찬 시간이었다.

이후 늘 그럴 듯 5시간 이상 이어진 정기총회가 각 지부, 위원회 보고 등으로 시작되었다. 공익변론센터의 디지털도서관 시연은 기대가 컸으나 기술적으로 여의치 않아서 아쉬웠고, 신입회원들의 공연을 보며 후배들의 민변 활동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경남지부 박미혜 지부장님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회원들의 모범회원상 수상, 오민애 변호사님의 멋진회원상 수상을 보면서는 자랑스러움과 부러움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번 총회에서는 특히 회칙 개정안 안건에 대한 토론이 뜨거웠는데, 앞으로 1년간 민변 내 여러 단위에서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더욱 널리 공론화되고 충실히 공유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총회 장소 입구에서는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ADI, 광주전남공익변호사모임 동행의 홍보 부쓰가 세워져 후원과 연대의 자리가 만들어졌다.

총회 뒷풀이는 민변의 여러 변호사님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술 한잔 나누면서, 선후배 회원들의 경험과 인간미, 노래 실력까지 느낄 수 있는 자리다. 탄팟 팟캐스트로 익숙해진 김준우 변호사님의 맛깔난 진행을 다시 들을 수 있어 반가웠다. 필자는 경남지부 내에서도 통영, 거제시 여성 변호사 1호로 송무를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총회에서 만나는 선배 여성 변호사님들과의 교류는 특히 더 소중한 시간이다.

둘째 날 프로그램은 세병관과 소매물도로 나누어 투어가 진행되었다. 점심 식사로 통영의 맛집 한산섬식당에서 뽈락매운탕을 먹고, 통영의 특산물 멸치에서 이름을 딴 엔초비호텔에서 커피를 마셨다.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한명의 회원이라도 더 마주하고 싶었는데, 수많은 후배들에게 커피 타임을 만들어 주신 심재환 변호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린다.

1박 2일 간 민변 회원으로서 가졌던 자부심과 앞으로의 민변 활동에 대한 의지, 거기다 통영의 쪽빛 바다의 아름다움을 가시 한번 기억하길 바라며 통영에서 태어나고 자란 박경리 작가의 ‘김약국의 딸들’ 도입부로 이 후기를 마친다.

 

제 1 장

통영(統營)

통영(지금은 忠武市)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중략)

지금도 흔히 여염집에 들르는 뜨내기 소반장수가 싸구려 소반을 통영소반이라 사칭하고

거래하는 풍경 있는데 통영갓, 통영소반은 그 세공이 정묘하여 매우 값진 상품이었다.

이밖에도 소라 껍데기로 만든 나전 기물이 이름 높다.

원료를 바다에서 채집하는 관계상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진주빛보다 미려하고 표질이 조밀한 소라 껍데기,

혹은 전복 껍데기를 갖가지 의장(意匠)으로 목재에 박아서 만든

장롱, 교잣상, 경대, 문갑, 자(尺)에 이르기까지

화려 찬란한 가구 제작은 일찍부터 발달되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바다에 나가서 생선 배나 찔러먹고 사는

이 고장의 조야하고 거친 풍토 속에서 그처럼 섬세하고 탐미적인 수공업이

발달되었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바닷빛이 고운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노오란 유자가 무르익고 타는 듯 붉은 동백꽃이 피는

청명한 기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28차 정기총회 감사 인사말

 

- 회장 한택근

존경하는 회원 여러분,

 

제28차 민변 정기총회가 2015.5.30.-31. 양일간에 걸쳐 경주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번 총회는 132명의 회원과 60여명의 가족들이 참석하여 역대 최다 참석자를 기록하며 성황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우선 제28차 정기총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될 수 있도록 관심과 성원을 보내 주신 모든 회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총회 식전 행사에서는 모임이 ‘회원 1,000명 시대’를 열게 된 것을 자축하고, 모임의 진로를 모색하는 진지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정기총회에서는 모임의 임원선출에 관한 회칙 규정을 정비하였고, 조직의 중·장기적 발전을 모색하기 위한 발전기금 사용 승인 안건을 통과시켰습니다. 저희 집행부는 안건을 통과시켜 주신 회원들의 뜻을 받들어 모임의 발전을 위해 배전을 노력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나아가 이번 정기총회는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회원 분들의 뜨거운 열망과 헌신적 활동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참석한 모든 회원들이 일어나 ‘회원 천명 시대를 맞는 모임의 특별결의문’을 함께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민주사회를 향한 회원들의 결의를 서로가 확인할 수 있었던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우리 모임은 중대한 도전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모임의 지속가능성과 발전을 담보할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야 하고, 밖으로는 시대를 역행하는 권력기관에 맞서 사회적 약자와 서민의 인권을 보호할 책무를 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도전을 슬기롭게 풀어나갈 수 있는 희망을 정기총회에서 보여주신 회원 여러분의 열망과 결의에서 찾고자 합니다. 집행부와 사무처는 회원 여러분의 헌신과 지혜가 샘솟을 수 있도록 하는 마중물의 역할에 충실하겠습니다.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고, 정의가 넘실대는 ‘민주사회’로의 여정은 한시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민변의 자랑스러운 선배님, 동료 및 후배 회원 모두 깊은 동지애로 함께 걸어갑시다. 그 길에 함께하는 모든 회원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수, 2015/06/10- 14:30
1,195
0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 초청강연 후기

 

- 권오훈 회원

 

6월 25일 열린 민변 6월 월례회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초청강연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민변통일위원회에서 주최한 이번 강연에서는 6. 15. 선언 15주년을 맞이하여 남북 관계의 현황과 과제에 대한 통일 문제 전문가 정세현 전 장관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었습니다.

IMG_1851

정세현 통일부 장관은 1993년 문민정부 당시 대통령비서실 통일비서관, 1998년 국민의 정부 당시 통일부 차관, 2002년 참여 정부 당시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북한과의 장관급 회담 등 북한 문제에 관한 주요 실무를 직접 담당한 바 있습니다. 이번 강연에서는 장관급 회담 당시 남북 고위급 인사들의 발언 내용을 비롯하여 공동 선언에 대한 협상 과정 등 고위급 회담 당시의 뒷이야기들, 나아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에 대한 향후 예측 등을 정세현 전 장관의 생생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3명의 대통령이 진행한 통일 정책을 모두 수행한 정세현 전 장관은 통일 정책에 있어서는 김영삼 대통령 당시의 정책이나,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당시의 정책이 큰 차이가 없으며, 바람직한 통일 정책은 결국 북한과의 평화적인 대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 했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통일 정책의 핵심은 모두 6. 15. 선언에 담겨 있으므로, 진보나 보수를 불문하고 6. 15. 선언의 이행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IMG_3530

한편 통일 정책은 단순히 한반도에 있는 남북한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 열강들의 치열한 정치, 외교적 대립 안에서 이해되고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국은 현재 미국과 G2를 형성하려 하고 있으며, 군사, 경제적으로 중국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로도 외연을 넓히려 하기 때문에, 중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북한의 문제를 쉽사리 미국 및 일본 등에 넘기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따라서 남한도 중국, 미국 나아가 러시아, 일본 등 주변 강국들과의 외교적 조율을 통해 통일 정책을 수립해야 하며, 이러한 상황을 배제하다가는 통일 문제에서 주체성을 잃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벌써 6. 15. 선언 15주년을 맞이했지만 통일에 대한 논의는 지지부진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한반도 정세는 남북한 통일을 제외하고 논할 수가 없는 만큼, 통일에 대한 한국 정부, 나아가 국내 전문가들의 주체적인 참여가 중요하다는 정세현 전 장관의 강연을 통해, 남북 문제에 대해 다시금 관심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IMG_3542

* 민변 통일위원회에서는 남북법제팀, 국가보안법 연구모임 등 통일 관련 활동을 통해 북한 및 남한의 관련 제도를 이해하고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통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회원 분들의 많음 참여 부탁 드립니다.

금, 2015/07/10- 14:40
1,105
0

긴급조치 변호단 2차 워크숍

- 강제동원, 홋카이도를 가다

 

 2015년 8월 그 해, 홋카이도의 여름은 뜨거웠다.

 

 <첫째 여정>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한 서린 홋카이도, 아직도 서러운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 이선경

 

 나에게 있어 홋카이도라는 지역은 겨울에 눈이 많이 오고 온천시설이 잘 되어 있는, 겨울 관광지로 좋은 장소 정도의 의미만 있었다.

 

그 홋카이도에 강제징용되어 희생된 분들의 유골이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남아있다는 소식도 이번 워크숍 준비 모임에서 처음 알게 되었을 정도로 나는 홋카이도와 우리 민족의 과거사에 대해 무지하고 또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태로 비행기에 올랐던 나에게, 창 밖에 펼쳐진 삿포로의 풍경은 다소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반듯하게 정리된 논과 밭 사이에 빨갛고 파란색 지붕을 가진 집들이 늘어서 있는 한적한 농촌 풍경은, 그곳이 그 끔찍한 강제징용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게 만들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에 오르자, 이번 워크숍의 가이드 김영환 선생님이 버스가 이동하는 동안 간단히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유골반환 운동의 경과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1997년부터 시작하여 한국과 일본, 중국 등 여러 동아시아 지역의 학자와 시민단체가 모여 10여 차례의 학술대회를 거치면서 공동으로 유골발굴을 해왔고, 이는 궁극적으로 동아시아 평화를 모색하기 위한 활동들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방문할 장소들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는 현장들이라고 하였다.

16일  삿포로별원 - 강제징용 간담회

 

버스로 한참을 달려 101구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본원사 삿포로 별원 납골당에 들어서니 가장 안쪽 구석에 초라한 유골함 3개가 놓여있었다. 본래 일본의 장례절차에 따르면 한 사람의 유골이 하나의 유골함에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삿포로 별원에 101명의 유골이 있으면 총 101개의 유골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1997년도에, 일제시대 강제징용 노동자들에게 노동을 시켰던 지자키 공업의 요청에 따라 삿포로 별원은 무연고 유골이라는 이유로 유골을 모두 합골해 버렸고, 그 때문에 현재 3개의 유골함 안에 101명의 유골이 섞여있다고 하였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최소한의 예우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서글픈 상황들이 담담히 다가왔다. 부디 고국으로 돌아가서 햇볕 잘 드는 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묵념을 하고 돌아섰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2003년 유골 발굴 당시 발굴된 유골이 강제징용 희생자 유골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근거 중 하나가 유골의 발을 감싸고 있던 발싸개 때문이었다는 것인데, 신발이 아닌 천으로 된 발싸개를 신고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강제징용 희생자의 유골임을 확인하였다고 하니, 당시 강제징용 희생자들에 대한 처우가 얼마나 열악하였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16일  삿포로별원 - 납골당 2

 

반가운 소식은 현재까지 홋카이도에 남아있는 미봉환 유골 150구 중(삿포로 별원과 사루후쓰, 비바이 탄광 등에 흩어져있다고 한다) 120구가 올해 9월 한국으로 봉환된다고 한다. 무엇보다 올해 유골봉환은 9. 11.부터 9. 20.까지 9박 10일 동안 진행되는데, 당시 강제징용자들이 끌려왔던 3,500km를 되짚어 서울까지 가는 여정이라고 하였다.

 

이번 유골봉환은 역사적인 의미가 큰 행사이므로 당연히 한국과 일본 양국 정부가 주최가 되어서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정부와 전혀 관계없이 순수 민간 차원에서만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2004. 12. 노무현 정부 때 고이즈미 총리에게 유골봉환을 요청한 이래 정부차원에서 유골봉환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나, 이명박 정부로 바뀌면서 정부가 유골봉환에 의지를 보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현재에는 부득이 순수 민간 차원에서만 유골봉환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였다.

 

물론 유골봉환의 최대 걸림돌은 강제징용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정부의 태도라고 하겠다.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이 일본 정부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입증할 수많은 자료 앞에서도 끝내, 강제징용은 민간기업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므로 일본 정부는 유골봉환을 비롯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일본 정부만을 탓하고 있을 수 있는지… 힘이 없어 자국민이 이 혹한의 땅에 강제로 끌려와 노예처럼 일하는 것도 막아주지 못했던 우리나라는,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고서도 그 유골을 봉환해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 국가의 존재이유일 것인데, 과연 우리 정부는 강제징용 희생자들을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둘째 여정>

차별은 조선인만의 몫이 아니었다. 홋카이도의 자연인 아이누를 만나다.

 

- 성춘일

 

8월 17일, 홋카이도 이튿날이 밝았다. 워크숍의 설렘과 고단함을 채 풀기도 전에 오타루 외곽, 해안가에 위치한 청어 잡이 박물관에서 둘째 여정을 시작했다. 가파른 언덕을 굽이굽이 두어 번 올라가자 오래된 낡은 집 한 채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어 잡이 어부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집을 박물관으로 꾸며서인지 박물관 내부와 외부에 전시된 물건은 화려하거나 형식에 치우치기 보다는 100여년 전 어부들의 소박한 삶의 모습을 들려주고 있었다. 박물관 옆에는 해안가 절벽으로 이어지는 아담한 뜰이 펼쳐져 있고 바닷바람에 살랑거리는 풀밭 위, 녹슨 크고 작은 닻과 낡은 고기잡이 도구들이 어부들의 고단한 일상을 전하고 있었다.

 

연세가 제법 있어 보이는 부부가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입장표를 사서 신발을 벗고 건물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는데 두터운 가죽장갑과 눈 위에서 신는 신발이 이곳이 겨울왕국임을 실감하게 했다. 남자 성인용 지게, 여자 성인용 지게, 아이들이 메는 지게를 보니 이곳 주민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생계를 위해 청어 잡이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층에는 당시 주민들의 의상을 걸어 놓고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입어 볼 수 있도록 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아이누족인 가와무라 켄니치(아이누 이름 : 신리츠 에오리)씨가 운영하고 있는 아이누민속박물관에 도착했다. 켄니치씨는 아이누 전통복장 입고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 박물관은 켄니치씨의 조부가 만든 것으로, 일본 정부가 세운 학교에서 아이누 아이들의 교육을 맡길 수 없다며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했다가 현재는 켄니치 씨가 이어 받아 아이누의 역사, 전통, 풍습을 알리는 민속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아이누들의 배, 의상, 그릇부터 낚시, 사냥도구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켄니치씨는 아이누의 역사, 전통, 풍습 등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어머니’를 뜻하는 아이누의 ‘하루코노’라는 단어는 원래 식량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아버지’는 돈 버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한다. 가족의 호칭에 가족 구성원의 역할이 녹아 있어 신기했다.

17일  아이누민속박물관 1

 

아이누족은 일본 정부가 금지하기 전까지 연어잡이와 수렵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민족이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메이지유신 이후 홋카이도를 점령하더니 홋카이도 전체를 일본 정부의 관할 하에 두면서 아이누족들은 일정한 구역에서만 거주할 수 있도록 하고 아이누들의 생활수단이었던 연어잡이와 수렵을 금지했다.

 

일본 정부는 홋카이도를 다스리기 위해 일본 본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둔전병으로 근무하는 일본인에게 일정 면적의 홋카이도 땅을 나누어 주어 유인함). 아이누들이 농사를 지으면 홋카이도 땅을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으나,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는 아이누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모두 빼앗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는 아이누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아이누 전통의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금지했다. 또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누족들의 호적에는 출생지역(아이누 거주지역)을 별도로 표기한 결과, 아이누 거주 지역 출신들은 공직 진출을 금지당하거나 교육 기회가 제한되는 등 많은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출신 지역 표기제는 없어져 눈에 보이는 차별은 사라졌지만 보이지 않는 차별은 여전하다고 한다.

 

아이누 사람들은 몇 년 전 일본정부를 상대로 본래 자신들이 주인이었던 홋카이도를 돌려달라고 반환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했다고 한다. 수렵민족인 아이누들에게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처럼 자연을 소유한다는 인식이 희박했고, 문자도 없었던 탓에 땅에 대한 소유관계를 표시한 공부 자체가 없었다. 고도 문명의 발명품인 글자로 표기된 문서를 가지고 다투는 법적 소송에서 이들의 패배는 어쩌면 예정된 결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억센 모기마저도 정겨워진 숲 속 고겐사에서의 깊은 밤

17일  고겐사2

 

점심을 해결한 후, 북쪽으로 한참을 달려 슈마리나이 댐 부근에 위치한 고겐사에 도착했다. 고겐사는 현재 ‘동아시아 공동워크숍’의 개최 장소이자 홋카이도 역사교육의 학습장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고겐사가 평화교류와 역사교육의 장소로 변모한 것은 1976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씨가 고겐사 본당에서 죽은 이들의 이름, 나이, 사망 연원일이 적힌 다량의 위패를 발견하면서부터이다. 위패에는 조선인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승려로 활동하면서 위패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의 죽음이 슈마리나이 댐 공사와 철도 공사 도중 희생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학습장 내부 각 벽에는 유골 발굴 작업과 유골 반환을 위한 각종 활동이 담긴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현재 밝혀진 바에 의하면 슈마리나이 댐 공사와 철도 공사로 희생된 이는 210여명 정도인데 그 중 40여명이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저녁을 먹기 전 슈마리나이 댐을 둘러보기로 했다. 어둠이 조금씩 밀려오는 시간, 일본 최대의 인공호수인 슈마리나이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여름을 잊게 만들 정도로 제법 매서웠다. 거대한 댐의 수문이 물길을 가로막고 서 있고 1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 탑이 수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탑은 슈마리나이 댐 공사 도중 사망한 수백 명의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세운 탑인데, 정작 탑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희생자들의 이름 대신 ‘순직자 위령탑’이라는 이름과 댐을 건설했던 우류전력 사장 아다치 다다시 이름만이 새겨져 있다. 슈마리나이 댐 공사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자 이 지역 사람들이 우류전력에 이들을 위로하는 위령비라도 세워 줄 것을 요구했는데, 위령비 세울 돈 조차 아까웠던 아다치 다다시는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건설했던 교각의 기둥을 옮겨와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일본 각지는 물론 우리나라와 중국에서까지 강제로 끌려와 새벽 4시부터 밤 9시까지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죽어간 사람들에게 위령비 세울 돈조차 아까워했으니 이들이 당시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혹독하게 대했을지 상상이 되었다. 슈마리나이 댐 공사의 참혹함은 이 공사장 집단합숙소의 이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당시 사람들은 슈마리나이 댐 공사장 근처에 있는 집단합숙소를 어항에 들어간 문어가 다시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이 합숙소에 잡혀 들어간 자는 살아서는 나올 수 없다는 의미로 ‘타코베야(문어방)’라고 불렀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 타코베야는 죽음과 공포의 대명사였다고 한다.

 

저녁식사 후, 고겐사에서 위패가 발견된 후 위패의 주인인 유골 발굴 작업과 한‧일 교류를 통해 수십년 동안 유골 봉환운동을 했던 오노데라 마사미(小野寺正巳)교수님과 야마자키 다다시(山崎忠司) 선생님으로부터 슈마리나이 공사 현장의 참혹함은 물론 유골 봉환 운동에서의 에피소드 등 유골 봉환활동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밤이 깊도록 계속 이어졌다.

17일  변호단회의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힘든 몸을 이끌고 고겐사에 도착한 직후부터 슈마리나이 댐, 조선인 유골 매장지까지 우리를 안내해 주신 오노데라 교수님, 일흔 셋의 연세에도 유골봉환 운동을 계속하고 계신 야마자키 다다시(山崎忠司) 선생님, 누가 알아주어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기에 묵묵히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의 활동을 이어가고 두 분의 모습은 마음에 큰 울림을 남겼다. 밤이 깊어가는 것도 잊고 한 잔 한 잔, 비워지는 술잔은 늘어만 간다. 그리고 우리들의 추억도.

 

 

<셋째 여정>

새하얀 메밀밭 한 가운데서 굳은 도약을 외치다.

 

- 이동준

 

고겐사(光顯寺) 조릿대 묘표전시관에서의 숙박. 겨울이면 기온이 영하 41도까지 내려간다는 슈마리나이답게 새벽의 추위가 제법 매서웠다.

 

일본 남자들은 “매일 아침 나에게 된장찌개를 끓여줘요”라고 청혼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어디선가 진짜 일본된장국 냄새가 발길을 이끌었다. 모두들 한솥밥을 떠서 둘러앉아 정겹게 식사하면서 돈독한 정을 나누었다.

 

고겐사를 떠나면서 우리는 9월 본국 봉환 예정인 희생자들의 유골을 살피고 위령의 의미를 담아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70여년의 긴 세월 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유골로 남아있는 희생자들의 원혼을 떠올리니 가슴 한 켠이 아파왔다.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가 편히 잠드실 수 있기를 기원하며 다음 달에 돌아오시는 길 또한 밝혀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18일 아침  유골

 

버스를 달려 슈마리나이(朱鞠內) 호수가에 도착하였다. 동양 최대의 인공호가 보여주는 절경에 감탄사가 나왔지만 잔뜩 찌푸린 하늘과 세찬 물살이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슬픔을 담은 듯 느껴져서 이내 숙연해졌다.

 

삿포로 시로 이동하는 길에는 광활한 메밀밭이 계속되었다(농업은 홋카이도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일본의 총 경작 가능한 땅의 4분의 1이 홋카이도에 있다고 한다). 우리는 백은의 언덕이라 명명된 사진촬영지 및 시마다야란 회사의 계약 농장터에서 단체사진을 남겼다. 새하얗게 펼쳐진 메밀밭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한편으로 그들이 가진 풍요로움에 대해 부러운 마음 역시 들었다.

18일  메밀밭2

 

이어서 방문하게 된 곳은 다카도마리의 한 공동묘지였다. 슈마리나이 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후카가와시 다카도마리 공동묘지에는 2명의 조선인을 포함한 5명의 피해자가 묻혀 있었고 그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들 외에도 더 많은 희생자들이 그 인근에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매장 추정지 위로 일반인들의 공동묘지가 들어서 있어 발굴 작업이 어렵다고 하여 몹시 안타까웠다.

 

이어서 이치조지(一乘寺)와 부설 다도시(多度志) 보육원을 방문하였다. 보육원은 이치조지의 주지스님이 서양식 어린이집을 모티브로 하여 만든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모델이었는데, 서양식 종탑과 일본 특유의 견고하고 단정한 목재구조의 건물이 인상적이었고, 해맑은 아이들의 미소는 발길을 돌리기 어렵게 하였다. 벽면에는 매해 어린이들의 졸업 작품으로 공동 제작된다는 대형 판화가 걸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많이 인상적이었는지 보육원을 떠난 뒤에도 동심을 가득 담은 어린이들 특유의 그림체가 자꾸만 머리에 남았다.

 

강제징용이 이루어지던 시절엔 하루가 걸려도 당도하지 못하던 길을 이제는 반나절이면 왕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토록 우리의 문명은 그 외관(外觀)이 눈부시게 진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內面)은, 특히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는 한국도 일본도 야만(野蠻)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자꾸만 과거로 회기하려 하고 있다. 수십 년이 지나서도 계속 야만과 대치해야하는 작금의 현실에 맞서 우리는 계속해서 투쟁하고 마침내는 승리할 것을 다짐한다.

 

변호사는 단순히 “타인의 송사(訟事)”만을 대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대리하면서 몇 배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번 워크숍은 보고 듣고 느끼는 시간을 거쳐 우리가 힘이 되어드리고자 하는 그분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보고 듣고 느껴서 담은만큼 무거운 마음을 금할 길 없지만, 변호단이 “일시적인” 부침을 겪고 있는 지금, 단단히 심신을 다잡고 도약할 수 있게끔 해주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화, 2015/08/25- 17:06
1,073
0

노동법 실무교육 수강 후기

안지희 회원

 

변호사시험을 치르고 방황하던 어느 날 민변에서 노동법 실무교육을 실시한다는 공고를 보았습니다. 노동법 공부를 해야 하는 줄 어떻게 알고, 할 일 없는지는 어떻게 알고 이런 찰떡같은 기획을 마련하셨는지. 감탄하며 회원신청서를 다운받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교육도 끝나버렸습니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밤에는 노동법 실무교육 덕분에 외롭지 않았는데, 아무 일정이 없는 화요일 저녁이 왠지 쓸쓸합니다.

1강부터 10강까지 모든 강의가 각자 훌륭했는데, 어떻게 후기를 작성해야 하나 난감합니다. 변호사님들의 강의력이 훌륭해서, 경험담이 재미있어서, 강의 자료가 좋아서…등등 강의마다 워낙 특색이 있어 하나씩 언급하기에는 자칫 길어질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강의를 들으면서 좋았던 점들을 편하게 털어놓음으로써, 강의를 준비해주신 변호사님들과 간사님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노1

저에게 2017년 3월은 앞으로 어떤 법조인으로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막연하게 공익변호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구체화하고, 그동안 수험공부에 치여 미뤄두었던 노동문제를 나름대로 깊이 고민해보고 싶었습니다. 노동법 실무교육은 이런 시기에 필요하고도 유익한 강의였습니다. 수업 중간 중간에 선배 변호사님들께서 갖고 계신 문제의식과 고민들이 저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더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2

그 중에서 현장에 가보니 비로소 서면을 제대로 쓸 수 있었다는 말씀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의뢰인이 하는 말만 듣고 서면을 작성하기 보다는, 직접 의뢰인이 일하는 곳에 가서 의뢰인이 어떤 일을 하는지 살펴보면 변론준비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록에 답이 있다.’ 시험을 볼 때는 그러했더라도 변호사가 되고나면 의뢰인과 함께 현장에도 가볼 수 있어야겠다고. 그렇게 조금 더 따듯하고 실력 있는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또 어떤 주장을 펼치기 전에 왜 그래야만 하는지 생각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조언도 마음 깊이 새겼습니다. 철저하게 노동자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다가 빠지게 될 수 있는 오류를 항상 경계하라는 취지의 말씀이었습니다. 노동법을 공부하다가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고 상처받을 때가 있는데, 거기에서 나아가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연습이 부족했다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태까지는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것들에 대해서, 이번 실무교육을 통해서 왜 그래야만 하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시간이 쌓여 언젠가는 저도 선배님들의 지혜를 닮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노3 노4

민변 가입 후 처음 참석했던 탄핵 촛불집회부터, 최근에 참여했던 강북월례회까지. 여러 기회에 변호사님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시간이 즐거웠지만, 노동법 실무교육은 그중에서도 가장 깊게 변호사님들과 소통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2시간 동안 준비된 강의를 듣는 것만으로 선배 변호사님들의 후배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전달되었습니다. 교육과정에서 배운 것들 열심히 복습해서, 그동안 변호사님들께서 짊어지신 무거운 짐을 후배로서 조금이라도 함께 들어드리고 싶다고 한다면 감사한 마음이 표현될까요. 2017년 3월 노동법 실무교육을 들었던 서초의 따뜻한 봄. 항상 기억하겠습니다.

화, 2017/04/25- 18:08
1,062
0

민변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 광주전남지부 총회 그리고 ‘의미가 되고 싶은’ 광주의 공익변호사 활동 들여다보기

글 정리 : 이혜정 변호사

 

  • 이야기 하나 : 광주전남지부 총회

2017. 2. 8. 쌀쌀한 저녁. 민변 광주전남지부에서 정기총회가 열렸다. 총회에는 대략 30여명의 회원이 참석하였고, 이 날 두 명의 신입회원이 가입하여 총 53명의 성원보고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총회가 시작되었다. 최근 광주지방변호사회 회장으로 당선된 최병근 변호사님과 정연순 회장님의 인사말에 이어 2016년 주요 안건과 사업에 대한 보고와 결산 및 세세한 평가가 이어졌다. 광주전남지부 총회를 위해 본부에서는 7명이 내려갔다.

noname01

2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신입회원에 대한 가입 승인과정이 본부와 달리 매우 엄격하다는 것이었다. 이 날 승인된 두 명의 신입회원은 가입신청서 제출 후 40여분에 이르는 집행부의 심층 압박 면접을 견뎌야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신입회원에 대한 보증 절차를 거쳐야 했고, 승인 전 표결을 위한 질의를 받은 다음, 6인 이상의 반대가 없으면 그제서야 비로소 광주전남지부의 정식회원이 되는 것이다! 이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는 의미로, 지부에서는 회원임을 인증하는 커다란 벽시계를 선물로 증정한다. 그 시계에는 “민변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다고.

4 3

총회 당일 험난한 과정을 거쳐 신입회원 승인을 받고, 인증 시계를 수여받은 길탁균, 김춘호 변호사님

총회자료집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각종의 활동들이 지난 한 해 동안 지부가 얼마나 분주하게 공익을 위해 헌신하였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각종 사업보고에 이어지는 정량평가와 정성평가는 아주 세심하고 날카로웠다. 가령 2016. 공익소송기획에 대한 정량평가의 경우 5점 만점을 기준으로 공익소송 활동은 4점, 배당은 2점, 사건발굴은 4점을 부여받았는데, 양질의 사건을 발굴한 것이 높게 평가되었다. 회원사업의 보고는 회원 상호간 친목도모의 경우 배점은 7점이나 그 평가에 있어서는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점수를 줄 정도는 아니라고’ 자평. 또한 활동을 하면서 회원들이 자연스레 만나는 과정에서 인생의 동반자가 됐거나, 회원과 지부에 관심이 많은 비회원 간에 곧 결혼할 커플이 있었는데, 이러한 인연 뒤에는 회원사업단이 의미 있는 인과관계를 끼쳤다며 회원사업단의 업적으로 자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소 억지스러운 자찬을 의식해서인지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인과관계가 없다는 측의 항의를 우려해 각주처리를 하면서, 막연하나마 인과관계에 대한 근거를 곁들이며 설명한 것은 마치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게 하는 나름의 설득력이 있어 어느새 수긍되었다.

5

재미나면서도 따뜻한 정감이 느껴지는 총회자료집만 봐도 광주전남지부의 활동과 분위기가 얼마나 가족적이고 화목한지 추운 날씨 속에서도 절로 훈훈함이 느껴졌다. 6시가 넘어 시작된 총회는 8시로 넘어가자 식사를 위해 뒷풀이 장소로 이동했다. 숨소리마저도 크게 들릴 정도로 근엄했던 총회와 달리 뒷풀이는 웃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즐거웠다. 지부 사회는 총회며, 뒷풀이며 정인기 변호사님 전담으로 보였는데, 진행이 깔끔하고 착착 진행되는 느낌에 감탄스러웠다. 김상훈 지부장님은 귀여운 얼굴을 더 돋보이게 하는 덧니가 매력적이어서 보기만 해도 웃음이 삐져나오곤 했는데, 그 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부장님의 그 덧니 뒤에는 또 다른 이가 숨어있는 게 아니라 익살스러움과 유머스러움이 한가득 자리 잡고 있음을. 특히 본부에서도 시급히 도입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 건배사 전의 지부장님의 호명 3창은 분위기를 흥겹게 달아오르게 하면서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었고, 서 있는 사람으로서는 짧게나마 건배사 멘트 준비시간을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친구따라 조건 없는 기부를 거침없이 하시고, 자그마한 얼굴에 우병우와 유재석, 최근 대한변협 회장으로 당선된 그 분의 얼굴까지 두루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그맨보다 더 웃겼던 강성두 변호사님, 지부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선한 아우라를 가진 임태호 변호사님, 소고기도 아닌데 겉만 익었다 싶으면 마구 먹어치우는 제 앞에서 연신 고기 굽느라 바빴던 박인동 변호사님, 가장 지부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도 부족했다며 활동이 뜸한 회원을 위축시키게 한 송창운 변호사님, 너무도 아름다우신 임선숙 변호사님, 광주지부 여성회원들은 어찌 다 그리 고우신지요. 이름만 접했을 때는 원로변호사님 같은 느낌이었는데 실제는 최강 동안인 이상갑 변호사님. 그가 있어 광주가 낯설지 않은 동기 김정우 변호사님. 지부를 든든히 지키고 있는 두상이 잘생긴 전직 락커 박상희 간사님 등 한분 한분이 그렇게 정겹고 그 시간이 너무도 행복했다.

photo_2017-02-10_17-49-28

photo_2017-02-10_17-49-20

오른 쪽 세 번째가 “웃기려고 하는 게 아닌데 여기저기 빵빵 터트리는 놀랍고 신비로운 일”(박상희 간사)을 일으킨다는 강성두 회원. 광주지부 제공

광주에서 발견한 것은 지부 회원들의 따뜻함만이 아니었다. 그 날 식당은 낙지마을로 예정돼 있었는데 실제는 낙지가 아닌 메뉴에도 없는 생뚱맞은 삼겹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낙지전문점인 그 식당에서 맛본 삼겹살은 그 동안 먹어 본 삼겹살 중 가히 최고라 말할 수 있었다. 역시 맛과 멋의 고장 광주는 남달랐다. 전공이나 전문이 아니더라도 최고의 맛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아마도 광주지부의 변호사들 또한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전문영역뿐 아니라 때로는 낯설고 막막한 공익사건을 마주할 때도 최고의 실력과 헌신으로 준비한다는. 광주는 이런 전통과 습관이 모든 곳에서 자연스레 베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으면서도 불의 앞에 당당했던 민주화의 성지 광주는 지부 회원의 면면 속에 그대로 담겨있었다. 따듯한 추억 한아름을 선물해 주신 광주전남지부 회원여러분, 정말 감사드리고, 5월 총회에서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겠습니다!

  • 이야기 둘 : 광주전남 지부 속 공익전담 이소아 변호사의 사는 이야기

이혜정 : 오랜만입니다. 모르는 회원들도 있으니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이소아 : 안녕하세요?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의 이소아 변호사입니다. 저희 단체는 수도권을 벗어난 지역, 특히 인권의 도시 광주에서 공익인권 전업으로 법률지원을 하는 비영리단체이구요. “존엄과 권리를 상실한 이들 곁에서 바라보는 귀, 듣는 눈으로 들어 법의 목소리로 세상에 전달하고자“하는 지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DSC00895

이혜정 : 서울에서 활동하다 광주로 가셨는데 광주에서의 근황은 어떤가요.

이소아 : 2013년 광주에 내려오면서 개인적으로는 정말 많은 일이 있어서 정신없이 지냈어요. 친정 부모님 두 분이 모두 편찮으셔서 간병을 해야 했고, 지난 가을에는 아빠가 돌아가셨구요. 아이를 낳게 된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생활에 있어 변수는 더 많아지는 것이니까요.그래도 뭐 어찌어찌 다~ 어떻게 지내왔어요. 주변 분들의 도움도 컸고, 신랑의 도움도 컸구요.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오히려 미리 걱정하는 버릇이 줄어들었어요. 미리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두더지와 같은 근시안으로 살기로 했어요. 닥친 일을 하나씩 해나가는 걸로. 일적인 측면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지요. ‘동행’이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으니까요. 처음 이 일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부정적인 전망도 많았어요. 광주는 도시 자체가 생산 도시가 아닐뿐더러 후원에 대한 시민의 인식도 상당히 박하거든요. 또 변호사가 왜 굳이 비영리단체의 상근변호사로 일하냐, 그냥 지금처럼 자신의 사무실에서 좋은 일하면서 지내면 되지 하는…. 그런데 사실 저는(이런 말 하면 겸손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뭔가 잘될 것 같은, 잘 해낼 것 같은 자신이 있었어요. 제가 광주에 내려와서 계속하여 접촉했던 인권단체들은 법률전문가의 결합에 매우 목말라 하고 있었고, 지역에도 지역 고유의 여러 가지 인권 이슈들이 있었거든요. 저는 서울에서 계속 단체 내 상근변호사로 일을 했었기에 이를 어떻게 하면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고 있고, 이를 잘 엮어낸다면 시민들에게도 후원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현재는 약 170명 정도의 후원회원들이 계시고 월 약 300만원 정도의 정기 후원금이 들어오는 단체로 성장했어요. (지역에서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이 정도 규모로 성장한 비영리단체는 없답니다)

이혜정 : 와 대단하시네요. 광주에서 공익전담으로 전업하게 된 과정과 동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소아 : 제가 올해 9년차 변호사인데, 해마루 광주분사무에서 근무했던 1년 반 동안만 로펌에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단체 내 상근변호사로 있었어요. 그러니 해마루에서 공익전담으로 전업을 했다기 보다는, 공익전담으로 다시 복귀를 했다고 보시면 되어요. 저는 연수원을 수료하자마자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성매매피해여성을 위한 ‘다시함께센터’에서 일을 했고 아파서 잠깐 쉬다가 2011년 5월에 민변에 상근변호사로 들어갔었지요. 왜 공익전담으로 일을 하냐고 물으신다면…. 그게 저한테 재미있고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얼마 전에 제가 2004년도에 적었던 일기장을 보고 웃었던 적이 있어요. 당시는 제가 사법시험 1차에 여러 번 떨어지고 마음속으로 굉장히 지쳐있던 상황이었는데, 1년 후, 5년 후, 10년 후, 30년 후, 계획을 써놨더라구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왜 하고 싶은가, 어떻게 이룰 것인가 순으로….5년 후 계획이 단체 상근변호사로 일한다, 10년 후 계획이 뭐더라… 이거랑 비슷한 거였는데… 아무튼 그때 왜 하고 싶은가를 적는 칸에 “의미가 되고 싶어서”라고 써있더라구요. 당시에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상태라 인정욕구가 정말 강해서… 그런데 지금은 이유를 바꾸고 싶어요. “재미있게 살고 싶어서”라고.

그리고 광주에서 변호사가 상근하는 비영리단체를 만든 이유는 간단해요. 필요하니까. 그리고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광주에 내려와서 1-2년 동안은 앞에서 말했던 개인사 때문에 돈이 좀 많이 필요해서 로펌에 잠시 있었지만, 광주에 내려오면서부터 제 마음 속에 광주의 공감 같은 단체를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지요. 그래서 광주지역 인권단체 현황을 계속 알아봤었어요. 그냥 먼저 전화하거나 찾아가서 저를 알리고 함께 일할 부분 있으면 함께 하자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1년 반 이상 네트워킹을 쌓아갔어요. 그러던 중 마침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공익전업변호사 자립지원사업 공모전을 하는 거에요. 2년간 변호사의 급여를 어느 정도 지원해주는 거에요. 기회다 싶어서 바로 단체를 만드는 것을 실행에 옮겼지요. 실질적으로 단체를 만드는 부분은 ‘희망법’이나 ‘감사와 동행’, 법률사무소 ‘보다’, 이주민센터 ‘친구’등에 의견을 구하면서 진행했구요. 결국 저 혼자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이혜정 : 그러면 공익 전담을 결정했을 때나, 현재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어려움이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사본 -DSC00469 (2)

공익 전담을 결정했을 때 어려움은, 제가 광주에서 공익전업을 다시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무래도 신랑이 약간 당황했었어요. 전보다 줄어들긴 했지만 엄마 간병비 등 계속 고정적인 목돈이 들어가거든요. 그래도 결국 흔쾌히 받아들여줬고, 이제 시아버님과 시누이도 저희 단체의 든든한 후원자세요.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는 법원에서 실무자가 화난 목소리로 전화해서 변호사를 찾을 때, 제가 변호사라고 했더니 목소리 톤이 바뀐다거나… 하는. 단체의 실무자가 없어서 모든 실무를 제가 직접 하는데, 제가 숫자에 어두워서 홈택스 등 세무 신고에서 오류가 날 때. 뭐 그럴 때.

이혜정 : 현재 주로 진행하는 공익 사건은 어떤 사건들인가요.

이소아 : 장애인권 관련해서 근육병 환자가 노인장기요양등급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활동보조서비스를 신청할 수 없게 되어있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활동보조서비스 변경신청 거부처분 취소소송, 성매매 피해 여성에 대한 사건들 중 특히 태국 여성들이 한국에 데려와져서 성매매를 하도록 강요당하는 일들이 생기고 있는데 그 여성들에 대한 지원, 뇌전증 환자 장애등급변경취소소송, 결혼이주여성의 이혼사건, 이주노동자의 난민불인정처분취소소송, 장애여성에 대한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원, 국가보안법 형사변론, 세월호 현장에서 70일간 근무하다가 자살하신 진도경찰분 유족의 유족보상금거부처분취소소송 등…. 뭐 지금 생각나는 건 이 정도입니다. 올해에는 주로 장애인권분야와 이주노동분야에 집중하려고 해요. 농업법률분야도 신경 쓰고 싶은데 아직 여력이 없네요.

이혜정 : 다양한 사건들을 두루 하시네요. 광주에서의 공익사건 현황이나 루트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이소아 : 주로 단체들을 통해서 진행돼요. 성매매피해여성상담소, 성폭력 상담소, 장애인권센터,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발달장애지원센터, 이주노동자 상담소 등. 저희 단체가 상담소처럼 붙박이로 상담하는 인력이 배치될 수는 없는 구조여서 개인이 직접 찾아오시는 경우는 아직은 잘 없어요.

이혜정 :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이소아 : 2014년 겨울 여수의 한 유흥주점에서 여성종업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이 사건은 원래 조용히 묻힐 뻔했는데, 함께 일했던 동료 여성 9명이 업소를 나와 광주에 있는 언니네 상담소에 제보를 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어요. 보통 다른 성매매 관련 사건의 경우 동료들이 이렇게 증언해주지 않아요. 왜냐하면 어찌 되었건 간에 자신의 생계가 달렸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사건의 경우 9명의 여성 모두가 업주의 끈질긴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고 일관되게 증언해 주었어요. 9명의 여성은 수사과정에서만도 각 2-3회 조사를 받았고, 재판 과정에서도 업주가 혐의를 부인해 모두 법정에서 2-3시간씩 증언을 했었거든요. 그 과정이 언니들에게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증언을 해주었어요. 그래서 업주들도 상당한 처벌을 받았구요.

여수 여성 사망 사건 언니들의 손

‘여수 여성 사망사건’에서 흔들림 없이 증언했던 ‘언니들’의 손. 이소아 변호사 제공

이 사건은 제가 일을 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여성들이 용감하게 증언을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사건이어요. 그래서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그리고 진도 경찰분 유족보상금거부처분취소소송 1심에서 승소했을 때, 1심만 거의 2년이 걸렸는데요. 당연하고 마땅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심리적 부검이라는 입증방법에 대해서 고민도 많이 하고 여러 가지 자료도 많이 찾아보았던 사건이라 보람이 되는 사건이었어요. 아직 2심이 진행 중이긴 하지만요.

이혜정 : 활동가와 변호사 그 경계선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차이가 있나요?

이소아 : 변호사와 활동가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거죠. 활동가는 그 문제에 전면적으로 결합하게 되는 부분이 있어요. 활동가로서 당사자, 단체 분들과 함께 가며 일을 진행하는 방식이 저와 맞아요. 반면 변호사로써 거리두기가 필요한 경우도 있어요. 그래야지 나의 전문성이 인정받고, 내가 제출하는 서면에 힘이 실리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이 부분의 강약을 조절하기가 참… 힘들어요. 그럼에도 당사자, 단체 분들과 ‘함께’ 가는 것이 좋아요. 법률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거든요. 저는 ‘내가 이 문제 전체를 해결하겠다.’라는 마음으로 일하지는 않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해야 할 부분을 다하는 것일 뿐이지, 그 결과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이혜정 : 광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이소아 변호사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든든하네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혜정 : 저희 단체가 광주에 있긴 하지만 저희가 다루는 인권 이슈들이 단지 광주에만 한정되는 문제들이 아니에요. 장애인권, 이주노동자 인권도 마찬가지로 저희가 다루는 문제들이 결국 관련한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일들이더라, 그래서 인권의 연대의 중요성에 대하여 새삼 깨닫게 돼요. 광주전남지역에 사는 분이 아니더라도 저희 단체가 다루는 문제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후원을 해주시길 바래요. 여러분의 후원이 작지만 커다란 변화를 이끌어낼 원동력이 될 것이거든요. 후원신청은 www.companion-lfpi.org 홈페이지에서 온라인으로 간편하게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금, 2017/02/10- 18:02
1,00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