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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길 주변의 마을들

일, 2016/09/04- 14:37 익명 (미확인) 에 의해 제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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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_ 윤주옥 실행위원장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사진_ 허명구 님

 

소금길은 지리산 남쪽의 화개천과 대성골, 빗점골, 덕평골을 지나 벽소령을 넘어 지리산 북쪽의 광대골에 이른다. 소금길이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이용되었던 것은 바다와 내륙을 잇는 최단거리 물류길이라는 것과 함께 물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지리산 남쪽의 풍부한 물은 북쪽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했고 여러 마을을 거느리게 했다. 화개장터 초입의 가탄, 법하에서 시작된 마을들은 화개천을 따라 삼신, 정금 등으로 이어져 빗점골 삼정까지 계속된다.

소금길에 있던 여러 마을 중 빗점과 오리촌, 설산, 덕평 등은 지금은 사라진 마을이다. 빗점은 삼정의 북서쪽에 있었다. 빗점이란 지명은 산줄기가 얼레빗 같이 줄지어 뻗어 있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간혹 소점(梳店-얼레빗이라는 뜻)이나 즐점(櫛店-빗같이 산이 뻗어 있음을 뜻함)으로 불렸다.

오리촌은 삼정의 동북쪽, 벽소령의 남쪽에 있던 마을이며 1632년 무렵에는 화개의 열 개 마을 중 하나였다고 한다. 설산(雪山)은 덕평과 오리촌의 남쪽, 삼정의 동쪽에 있었고, 계류를 이용하여 사금(沙金)을 채취하던 금()방앗간이 있었다고 한다.

 

최다엽 어머님(1934년생. 83)은 빗점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까지 빗점에서 살았던 분이다. 그때 빗점은 산 속 마을치고는 제법 큰 마을이어서 열 집 넘게 있었다고 한다. 어머님은 나무를 착착 포개어 재서 지은 윤판집에 살았다고 하며, 깊은 산속이었지만 빗점은 곳곳이 평평하여 논밭도 많았다고 한다.

어머님에 의하면 오리촌은 농사는 안 짓고 벽소령 너머로 넘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술을 팔아먹고 살았다고 하며, 설산은 농사짓고 살았고, 덕평은 감자벌이를 해서 먹고 살았다고 기억하셨다.

 

5면-그림1_소금길고지도.jpg

1918년 고지도에 기록되어 있는 소금길과 주변 마을들

 

정부는 빗점을 포함한 여러 마을들이 빨치산에게 은신처와 먹을거리를 제공한다며 1949년경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은 마을에서 쫓아냈다. 어머님은 빗점에서 쫓겨 의신으로 내려와 신랑(1930년생)을 만나 혼인했다. 어머님은 신랑이 군대 가 있는 동안 친정식구들이 있는 청암에서 살았다. 신랑이 군에서 나온 후 의신으로 돌아왔으나 땅도 없고 먹고 살 수가 없어 다시 빗점으로 올라갔다.

먹고 살기 위해 다시 빗점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빗점에서 아주 내려오게 된 것은 1970년대였다. 정부가 산 속의 독가를 모두 정리한다며 이주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의신마을 지리산역사관 뒤쪽에 터를 잡아 집을 짓도록 했다. 빗점뿐만 아니라 원대성 등 지리산 곳곳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산에서 내려와야 했다.

 

정춘자 어머님(1943년생. 74)은 신랑이 군대 가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 감자벌이라도 해먹고 살자고 빗점으로 들어갔다.

전쟁 후엔 내가 가장 먼저 빗점으로 들어갔거든. 거기서 애기 3개 낳았고. 감자만 내리 9일을 먹으니까 손발이 저려 물에 손을 넣지를 못해. 삼정에 와서 보리 베는 일 도와 주고 끝보리 한 되를 얻어다가 밥을 해먹었는데 꿀처럼 맛있어. 밥을 먹고 나니 손발이 안 저려. 말도 말아.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죽지 못해 살았지.”

 

지금 빗점, 덕평 등의 마을들은 국립공원 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되어 들어갈 수가 없다. 그 마을들에 사람이 살았던 것은 45년 전의 일로 살아계신 분도 많지 않고, 살아 계신 분들의 기억도 희미하다. 더 늦기 전에 소금길 마을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꼼꼼히 기록되었으면 한다.

 

5면-그림2_삼정마을.jpg

삼정마을 전경. 삼정은 소금길 상에 남아있는 끝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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