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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천주교 사제·수도자 1천인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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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천주교 사제·수도자 1천인 선언

admin | 월, 2020/12/07- 19:48

1. 우리는 역대 모든 정부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하였습니다. 정부의 성공이 곧 나라의 평안과 주권자들의 행복으로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시대의 소명과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2. 잠잠히 묻혀서 고요히 지낼수록 좋은 우리가 이렇게 나서게 된 것은 국민의 엄중한 명령인 ‘검찰개혁’이 좌초될 위기에 빠진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주목하는 것은 검찰이 그동안 힘없는 사람들의 생존과 운명을 쥐락펴락하면서 특권층의 비리와 범죄는 눈감아 줌으로써 공정한 법집행의 최대 걸림돌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검찰개혁을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비웃거나 아예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나서는 일들이 너무나 빈번해졌고 그러다보니 검찰개혁을 공언하였으면서도 번번이 실패하고만 지난 민주정부들의 전철을 밟지나 않을지 걱정스러운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3. 거기에는 검찰 자신의 책임이 가장 큽니다. 검찰이 검찰권의 독립 수호를 외치고 있습니다만 자신들이 저지른 검찰권 남용의 역사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건을 조작해서 무고한 이를 간첩으로 내몰고, 멀쩡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인생을 망치게 만들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욕망을 위해 약자들을 괴롭혔던 강자들의 죄를 가려주고 치워주는 범죄의 세탁부 또는 청소부가 되었던 한국 검찰의 역사를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검찰개혁은 검찰로 하여금 이와 같은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더 이상 타락한 거래에 휘말리지 않도록 진정한 독립을 도우려는 일입니다.

수사와 기소에 관한 과도한 독점적 권한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도 우리 눈에는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통제되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은 검찰 자신을 위해서도 불행한 것입니다. 검찰 일부의 문제일 것입니다만 겉으로는 부패와 거악을 척결하겠다고 해놓고 뒤에서는 현직과 전관들이 서로의 이익을 챙겨주는 뒷거래는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아는 타락상입니다. 그동안 공익을 대변하기 위하여 일생을 헌신한 대다수 검사들의 명예와 긍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검찰은 공직자비리수사처, 검경 수사권 분리 등의 개혁 조치를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4. 검찰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인 윤석열 총장의 참회를 촉구합니다. 임명 초기 그를 향한 국민의 기대와 신망은 참으로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이후 그의 개인적 처신과 검찰을 지휘하는 모습은 너무나 뜻밖이었습니다. 처와 장모를 둘러싼 가족의 대들보 같은 허물도 심각하지만, 아무리 티끌처럼 작은 일이라도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무섭게 달려들다가도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기이할 정도로 관대한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태도는 경악스러울 정도입니다. 법무부 장관이 제기한 직무 배제와 징계 청구 사유에서 드러났듯이 검찰총장 본인이 하루빨리 물러나야 할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겸덕을 발휘하여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신이 말했던 “퇴임 이후 사회를 위한 봉사”일 것입니다.

5. 언론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입만 열면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사실을 왜곡, 과장해서 기사를 쏟아내고 있으나 지금 우리는 건너야 할 다리를 힘겹게 건너고 있을 뿐 방향이 그릇되지 않았습니다. 공연히 불안을 부추기고 정부의 선의를 비트는 행실을 중단하기 바랍니다. 진실을 격려하고 거짓을 꾸짖는 언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른바 ‘검언유착’, ‘검언일체’의 지경에 이른 부끄러운 현실을 직면하기 바랍니다. 진실의 장수가 되어야 할 언론이 거짓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는 현실을 우리는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6. 사법부의 책임 또한 조금도 가볍지 않습니다. 검찰에 의한 ‘재판관 사찰’이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부는 뚜렷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음으로써 검찰이 조직적으로 재판관을 압박하여 재판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범죄를 태연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아가 검찰총장이 재판관에 대한 사찰과 정보정치를 업무상의 관행이라 우기는데도 묵묵부답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 특히 법조의 나아갈 길은 언제나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것인지 한 번 묻고 싶습니다.

7. 제1야당 ‘국민의 힘’에게 묻습니다. 국민의 힘의 전신인 새누리당과 자유한국당은 검찰개혁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탈의 방조자 또는 협력자 구실을 하다가 결국 자신이 배출한 대통령 2인을 감옥에 보내고 말았습니다. 이런 과오를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아울러 다시 집권해서 나라를 이끌게 될 때를 위해서라도 여당과 합심하여 국회가 검찰개혁에 일조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8. 신앙인들과 시민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은 정작 다른 데 있습니다. 생태계 말기적 파국의 리허설이나 다름없는 코로나 사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해서 머리를 맞대고 살길을 찾아야 하는 마당에 검찰개혁이라는 숙원을 놓고 분열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힘을 내서 어려운 사람들의 겨울을 돌보고 저마다 역량을 다하여 정의와 인권을 회복하는 데 힘을 보탭시다.

 

2020년 12월 일
인권주일을 앞두고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천주교 사제‧수도자 1천인 일동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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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년

이범은 불광동 사람이다.

원래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지만(1957년생) 7살 때 서울에 올라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이 동네에서 나왔고, 평생 이 동네에서 일하다가 이 동네에서 죽었다. 놀기도 이 지역에서 많이 놀았다. 주말이면 지인들과 불광역에 모여 북한산에 올랐고, 불광사 길로 내려와 길목에 있는 연신내 골목식당에서 뒷풀이를 했다. 죽어서도 이 동네에 묻혔다. 그의 유골은 지금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구파발성당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는 말하자면 민주화운동권이었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정외과를 입학한 이후에 1979년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하여 징역을 살았고,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 시대에 1980년, 1985년, 2번 징역을 살았다. 그밖에도 여러차례 경찰에 붙들려 갔고, 구류도 살았다.

또 그는 출판인이었다.

1982년 결혼하고 생계수단으로 번역실을 시작했고, 출판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85년부터는 백산서당이라는 출판사를 인수하여 탄탄한 사회과학 출판사로 키웠다. 죽을 때까지 이 출판사에서 수백권의 책을 냈다. 그리고 본인이 여러 권의 책을 직접 써서 출판하기도 했다.

이범은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1990년 민중당이 창당될 때 정책실 차장으로 참여했고, 민중당 해체 후에는 1996년부터 나라정책연구회라는 정치단체에서 사무국장, 상근부회장으로 활동했다.

이범은 한편으로 시민운동가이기도 했다. 2001년 서영훈 한국적십자사 총재를 모시고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창립을 도왔고, 이어 서영훈 총재가 대표로 있는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의 운영위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그리고 2003년부터 몸살림운동본부를 만들고 초대 연구소장, 연신내수련원장등을 하면서 몸살림운동을 전파했다.

이범은 자신의 시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좀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쉬지 않고 실천을 모색했다. 그는 58세의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불꽃같은 열정’과 ‘사심 없는 직선적인 삶’은 지금도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 있다.

 

학창생활과 학생운동

1973년 이범은 경기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서 합격한다. 시험으로 경기고를 들어간 마지막 세대였으니 당시로서는 꽤 수재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식들 교육을 서울 가서 시켜야 한다’고 상경했던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한 셈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하면서부터는 재미없는 학교 공부와는 담을 쌓고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실존주의에도 빠지고,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정동교회에서 함석헌 선생께서 하시던 『장자』 강의도 들었다. 한때는 쇼비니즘적인 민족주의에 몰두하기도 했다. 이때는 낮이고 밤이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잘 이해도 못하는 철학과 역사, 문학서적을 탐독하는 게 제일 큰 낙이었다.’(이범의 저서 『한국은 그 한국이 아니다』에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국회의원 노회찬, 대안학교 이우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정광필, 언론인 고성국 등이 이범의 경기고 동기동창이었다. 경기고 동창 최만섭은 이범이 ‘머리를 박박 깎고 돗수 높은 안경을 끼고 도서관에서 두꺼운 사상전집을 읽고 있는 진지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머리가 빨리 트였던 이 경기고 동창들은 함께 몰려다니며 박정희정권을 비판하는 연설회나 강연을 들으러 다녔고, ‘문제의 뿌리를 천착하기 위해’ 철학공부를 함께 하기도 했다.

1976년도에 이범은 고려대 정외과에 합격한다. 그러나 입학 후 무슨 사정에선가 1년을 휴학하고 1977년에 1학년을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1년 후배 77학번들과 가깝게 어울려 지냈다. 이범은 고등학교 때 가입한 흥사단아카데미 활동을 대학 입학 후에도 열심히 했는데, 그 안에 ‘도산연구회’라는 이념서클을 조직하여 리더로 활동했다.

2학년이 되는 1978년 6월 이범은 서클에서 광화문에 유신반대 데모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광화문에 나갔다가 현장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같이 도산연구회를 했던 정경대의 송광의와 친구 이승환 등이 이때 구속되었다. 다행히 이범은 단순가담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이 때의 경험이 이범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후 이범은 본격적으로 반독재 반정부활동에 뛰어든다.

 

지하신문 「소리들」과 두번의 감옥생활

78년 가을에는 고대 내에서도 선배 고광진, 천영초, 정경연 등의 시위가 있었다.

박정희정권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던 이범은 그해 가을 광화문시위 때 유치장에서 만났던 백병규, 정태헌, 장동현 등과 함께 지하신문 「소리들」을 발간할 계획을 세운다. 77학번 백병규와는 1학년 말에 함께 그룹스터디도 했고, 2학년 초에 하숙도 함께 한 적이 있어 서로 의기상통하는 관계였다. 이범은 1년 선배인 김상복과 전체 기획을 의논하고, 구체적인 신문 제작과 배포 작업을 백병규 등 77학번 3명과 함께 했다.

제작은 원지를 철필로 긁어 가리방으로 인쇄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썼다. 이렇게 해서 수백부를 인쇄하고, 배포는 고대신문 우편함을 열고 우편물을 수거하여 주소를 확인한 다음 그 주소로 일일이 우표를 붙여 발송했다. 그밖에도 서울 시내와 학교 이곳저곳에 몇 부씩 뿌렸다.

지하신문이 학교와 정보기관에 들어가면서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악명 높은 성북경찰서 정보과에서는 의심가는 학생들을 한명씩 불러 취조하여 주모자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범은 사태가 험악하게 흘러가자 팀원들과 의논하여 지하신문 발간은 1호로 마감하고 등사기 등 관련물품은 모두 없애기로 했다.

그러나 1979년 2월 지하신문 제작팀 한 사람이 시국재판에 참석했다가 정보과 형사 눈에 띄었다. 형사들에게 집을 털렸고, 집에서 유인물이 발견되었다. 결국 이범과 김상복, 백병규, 정태헌 등 5명이 모두 검거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범은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서 복역하다가 10.26으로 박정희가 죽고 그해 11월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직후 이범은 11월 24일 명동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또한번 감옥에 갈 위기에 처한다. 8.15 특사로 먼저 감옥에서 나왔던 백병규, 정태헌 등과 함께 YWCA회관에 갔다가 현장에서 보안사 요원들에게 붙들려 육군본부 보안사분실로 잡혀 간 것이다. 다행히 구속까지는 가지 않고 즉심에 회부되어 구류 29일을 받았다.

80년 서울의 봄 때는 복학생대책위원회에 참여하여 이승환, 백병규 등과 함께 활동했고, 한편으로 새로 구성된 학생회에서 신계륜 학생회장과 함께 학생회 실무직책을 맡아 활동했다.

5.17 계엄확대조치로 계엄군이 학교에 진주하고 일제검거령이 떨어지자 이범도 일단 피신했다. 그러나 광주에서 시민들의 학살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범은 광주로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학살현장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학생회 활동과정에서 맡아 가지고 있던 돈을 광주시민들에게 전해줘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광주로 내려가는 차 속에서 검문에 걸려 연행되었고, 결국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게 된다. 군사재판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가 7개월만인 그해 12월 석방되었다.

 

김철미를 만나 결혼하다

78년 이후 구속과 감옥생활을 거듭하던 중에 이범은 뜻하지 않은 인연을 만난다. 80년 포고령 위반으로 감옥 살이하던 중에 한 아름다운 여대생이 면회를 왔다. 이대 4학년에 다니던 김철미였다. 김철미 역시 이대에서 횃불회라는 서클에서 활동하고, 학생회에서 간부도 맡은 경력이 있는 운동권 학생이었다.

김철미는 78년부터 향린교회에 다녔는데 80년 무렵부터 이범도 이 교회에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만난 적은 없었던 걸로 김철미는 기억한다.

80년 이범이 구속되자 교회에서 옥바라지 할 사람을 찾았고, 김철미가 자원해서 책을 넣어주면서 옥바라지에 나섰다. 김철미는 이범의 친구 송광의에게 부탁해서 이범 어머니를 소개받고 가족과 함께 면회도 다녔다. 80년 12월 이범이 석방되어 나오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이범 집안에서도 자연스럽게 김철미를 며느리 될 사람으로 인정했다.

두 사람은 82년에 드디어 결혼에 골인한다. 두 사람이 신혼여행 가 있는 동안 그의 고등학교 절친인 노회찬과 최만섭이 홍제동 옥탑방 신혼방을 정성스럽게 도배해 주었다.

 

출판인 이범, 그리고 시련

이범의 출판인 경력은 1984년 고대 1년 선배 서원기 사장의 강권으로 백산서당 편집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때부터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 이전에도 생계수단으로 다산출판사에서 잠시 일하기도 하고, 금강기획이라는 번역실을 차려 번역에 종사한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출판일에 뛰어든 것은 이 때부터였다. 1년 후 1985년 서원기가 민청련 집행국장으로 가면서 이범이 아예 백산서당을 인수해 본격적으로 출판사를 시작한다.

이범은 출판사 운영을 통한 지식계몽운동이 민주화운동의 적극적인 한 분야라고 생각하고 전력을 다한다. 아내 김철미도 번역에서부터 편집, 교정 등 모든 일을 옆에서 도왔다. 그의 오랜 친구 이명식, 이승환, 고성국 등이 편집위원으로 책의 기획을 도왔다. 이승환은 『경제사 입문』이라는 책을 번역 출판하여 백산서당 살림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이재화라는 필명으로 『한국근현대 민족해방운동사』라는 책을 써서 출판하기도 했다.

백산서당은 이후 수백종의 책을 내면서 사회과학출판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출판사로 자리잡았다. 『전공투』, 『청년이 서야 조국이 산다』, 『공산당선언』, 『철학의 기초이론』 등 수만권씩 팔리는 히트작도 여러권 냈다.

그러나 출판인으로서 시련이 찾아왔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한동안 사회과학 출판계가 활기를 띠었다. 독재시기의 족쇄가 어느 정도 풀려 국가보안법의 법망 속에서도 공산권 저작들의 출판이 봇물을 이루었다. 이때 백산서당에서 북한의 공식출판물인 ‘주체사상 총서’를 입수하고 몇 개 출판사와 합동으로 출판하기로 약속했다. 총 10권 중 백산서당이 선두타자로 1-4권을 내기로 했다. 원전을 가져다 타이핑해서 1-4권을 1만여부씩 찍었다. 그러나 당국의 대처는 예상외로 신속하고 강력했다. 책은 모두 압수당했고, 사장 이범에 대한 구속령이 떨어졌다. 이 일로 이범은 몸을 피해 가까스로 구속은 피했으나 장기 수배상태로 들어갔다. 결국 1990년 공식적 대표로 되어 있는 김철미가 대신 구속되는 조건으로 수배에서 해제되었다. 이 일로 김철미는 7개월이나 감옥을 살았고, 이범은 이 일을 두고두고 미안해했다.

 

재야운동, 민중당, 공동선시민운동

출판사를 경영하는 바쁜 와중에서도 이범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1983년 9월 김근태 의장을 중심으로 민청련이 창립되자 이범은 고려대 70년대 중반 학번을 대표하여 민청련의 기별대표조직에 참여했다. 그리고 고대 출신으로 노동현장에 들어간 노동운동조직들과도 연계를 가지고 지원했다.

1985년 이범은 이른바 ‘다산·보임사건’에 연루되어 김상복, 고성국 등과 함께 구속된다.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는 전두환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용공조작사건의 하나이지만 전혀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산보임사건의 구속자들은 노동현장과 연결된 일종의 정치조직, 정당까지 내다보는 한 정파조직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사당국의 발표는 완전 조작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매우 과장되고 왜곡된 것이었다. 특히 그들의 발표처럼 간첩 활동을 한 친북조직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 사건으로 이범은 1심에서 7년, 2심에서 3년을 선고 받았고, 2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했다.

이범은 재야운동 뿐 아니라 정당정치 활동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총선을 앞두고1990년 이우재, 장기표, 이재오 등을 중심으로 민중당이 창당되었을 때 이범은 수배 중임에도 불구하고 창당에 참여하여 정책실 차장을 맡았다. 그러나 막상 참여한 후에는 당 활동에 별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 지도부와 당 노선을 둘러싸고 여러차례 언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주변에 그만두겠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범은 1992년 대선에서 백기완 대통령후보 선거활동까지 돕고 민중당을 떠났다.

1993년 민중당이 해체하자 이범은 민중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이른바 ‘민중당 우파’들과 함께 나라정책연구회를 만들고 사회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모색했다. 이범은 이 연구회에서 발간한 월간 ‘21세기 나라의 길’ 책임편집위원으로 활동했고, 1996년부터는 나라정책연구회 사무국장, 상근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고 독일이 통일되는 세계사적 대격변을 겪고 나서 진보운동 진영에서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노력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범 역시 이 과정 속에서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재정립하려는 나름의 치열한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나라정책연구회 활동도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흥사단 운동의 대선배이면서 공동선운동을 이끌었던 서영훈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98년 백산서당에서 『자유시민 서영훈의 세상읽기』, 『벽오동 심은 뜻은』 등 2권의 서영훈 선생 책을 출간했다. 이범은 서영훈의 생명질서사상에 감명을 받고 서영훈 선생의 공동선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2001년에는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운영위원장을 맡아 활동했다.

 

『한국은 그 한국이 아니다』

이런 이범의 사상적 실천적 모색은 2003년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된다. 『한국은 그 한국이 아니다』(백산서당, 2003)가 바로 그것이다. 2002년 서울월드컵 열기가 한창 뜨거울 때 그는 한 선배의 소개로 전남 곡성의 한 암자에 들어가 20여일간을 머물면서 이 책을 완성했다.

그는 이 책에서 고등학교 시절 이후 지금까지 자신의 사상적 편력을 회고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생각하고 토론했던 주제들을 화두로 삼아 ‘생각하고 또 생각해 나름대로 해답을 찾아’ 제시했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서양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동도서기(東道西器)도 아니고 동도동기(東道東器)로 하자는 것이다 바로 탈구입아(脫歐入亞)가 우리 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세상의 기준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버리고 서양을 목표로 해서 서양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세태를 비판하면서 한국의 깊은 사상과 문화에 대한 긍지를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한동안 맑스주의에 경도되었던 이범 자신의 사상적 편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기도 했다. 그는 이 책의 제목에 대해서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은 모두 뒤집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한국이라는 나라의 상이 정확하게 맺힐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알아야 우리가 약소민족, 변방의 위치에서 벗어나 세계 문명을 창조하고 지구촌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평화의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

 

몸펴기생활운동 – 배워서 나눠주는 운동

2003년 어느 날 이범은 몸이 견딜 수 없이 아파 병원을 찾았다. 특히 등과 허리가 아파 의자에 앉아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몇 군데 병원을 옮겨 다니며 물리치료도 받고 약도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물리치료를 잘 한다는 김철을 소개했다. 김철은 이범의 굳어 있는 근육들을 풀어주고, 몸을 펴는 몇 가지 운동을 권했다. 김철 말대로 몸을 펴는 운동을 꾸준히 하자 못견디게 아픈 통증이 신기하게 씻은 듯 사라지고 건강이 돌아왔다. 이범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한 경험이었다.

이범은 이런 체험을 혼자만 누릴 수 없고 이것을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범은 김철을 모셔와 출판사가 있는 홍제동 2층에서 운동지도를 받았다. 그러다가 김철과 의논하여 아예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에 수련원을 내기로 했다. 사무실을 얻는 데는 정병문, 전종덕, 박성규, 송종환 등 골목산악회 선후배들이 십시일반 일조를 했다. 이범은 김철을 도와 수련원 안에서 수련생들을 지도하는 한편 몸살림 수련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전파하는 데 진력했다. 2005년에 『몸의 혁명』, 2006년에 『김철의 몸살림이야기 상,하』 등 3권의 책을 김철의 이름으로 출간했다. 그리고 2006년쯤에는 연신내에 수련장을 마련하고 초대 수련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몸살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저술활동과 더불어 활동사범을 대대적으로 양성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2009년 이범은 그동안의 경험과 연구를 정리하여 책으로 펴냈다. 『몸 펴면 살고 굽으면 죽는다』(백산서당, 2009)가 바로 그것이다.

이범은 한동안 이 몸살림운동에 전력을 투구했다. 선후배 지인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소문을 듣고 이범의 수련원을 찾아왔다. 이범은 자신을 찾아온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성심껏 몸을 풀어주고, 그들에 맞는 운동을 찾아 권유하고, 경과를 체크해줬다. 때로 몸을 움직이기 힘든 사람들은 직접 집으로 방문하여 치료도 해주었다. 몸 치료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범은 암이나, 중풍환자들까지도 치료해 효과를 확인했고, 구완와사나 크론병 같은 희귀병에도 자신의 치료법을 적용해 효과를 보았다.

이범의 혼신을 다한 노력으로 몸살림운동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몸살림도장이 전국적으로 설립되었고, 미국, 영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이범은 이 운동의 전도사가 되어 몸을 돌보지 않고 전국을 누비며 강연을 다녔다. 이렇게 몸살림운동이 확산되면서 향후 운영방침을 놓고 김철과 의견차이가 생겼다. 이범은 이 운동을 국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동호회 중심의 비영리 운동단체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처음에 이범을 도왔던 지인들조차도 이범에게 이 운동이 지속가능하려면 어느 정도 영리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느냐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이범의 생각은 확고 했다. 그는 자신의 방침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몸살림운동의 진로를 둘러싼 김철과의 의견 차이는 결국 조직 내의 갈등요소가 되었다. 결국 이범은 숙고를 거듭한 결과 2008년 자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과 별도의 조직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비영리단체로서 몸살림운동 동호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2011년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면서 (사)몸살림운동협회로 조직을 정비했다. 그리고 기존 ‘몸살림운동’과 상표권 분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2013년 ‘몸펴기생활운동’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2008년 동호회 창립취지문을 보면 당시 이범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몸펴기생활운동은 사람들이 허리를 바로 세우고 당당하게 가슴을 펴면 건강해진다는 간단한 원리에서 출발한다. 자세만 바르면 적어도 큰 병에는 걸리지 않고 살 수 있게 된다. 설사 큰 병에 걸려 있다 하더라도 몸만 펴면 쉽게 나을 수 있다. (중략) 몸펴기생활운동은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을 배워 이웃에 살고 있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몸살림운동에서 몸펴기생활운동으로 정립해 나가는 과정은 생각만큼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승을 버린 패륜아라는 등 이범에 대한 갖은 악선전과 비방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이범이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다. 술수를 모르는 고지식한 이범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조직적으로 분리해 나와 ‘몸펴기생활운동’이라는 동호회 운동을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범의 심신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스트레스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술도 평소보다 엄청나게 많이 마셨다.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을 찾아오는 몸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몇 시간씩 온몸에 진이 빠지도록 도움주기를 했다. 이런 무리한 생활은 이범의 건강을 급격히 무너뜨렸다.

 

골목산악회

1990년대 초 이범이 사는 불광동 지역에 민주화운동권 선후배들로 골목산악회라는 산행모임이 조직되었다. 서울대 73학번 정병문, 전종덕, 오세구 3명이 시작했는데, 얼마 후 이범과 우리교육 박성규 사장(서울대 72학번)이 합류했고, 거기에서 알음알음으로 이영창(서울대72), 이명식(고대 76), 나상억 교수(서울대 78)등이 합류해 1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매주 일요일 아침 7시면 불광사 앞에서 만나 북한산을 등반하고 12시쯤 내려와 불광사 골목길 골목식당에서 뒷풀이를 했다. 이범이 산악회 총무를 맡았는데, 산행날 새벽 6시면 회원들의 집에는 이범이 회원들을 깨우는 전화벨소리가 어김없이 울렸다.

토요일이 휴일이 되면서 골목산악회 모임날짜도 토요일로 바뀌었다. 그리고 모이는 시간도 오후 2시로 변경했고, 5시쯤 하산해서 뒷풀이를 했다. 시간을 바꾼 것은 뒷풀이가 너무 길어져 술 마시는 시간이 너무 길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골목산악회는 한때 회원이 40-50명, 산행에 모이는 사람이 15-20명이 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2003-4년 쯤부터는 민청련산악회가 여기에 합류해서 한 달에 한 번씩은 함께 산행했다. 골목산악회는 여전히 매주 어김없이 모였다.

2005년 4월경 남북관계가 호전되어 금강산 세존봉 산행이 가능해지면서 골목산악회 뒷풀이에서 우리도 금강산을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금강산지역 남북협력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던 이병호(현 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사장)가 주선하고 민청련동지회장을 맡고 있던 필자와 총무 한영수가 금강산 등반대 조직에 나섰다. 처음에는 가볍게 버스 한 대에 30-40명 정도 갈 예정으로 시작했으나 이 소문이 퍼져 너도나도 신청하는 바람에 결국 신록이 푸르른 2005년 5월, 138명이나 되는 대군이 버스 4대에 나눠타고 금강산으로 향했다. 이범과 그 아들 재승군도 여기에 동승했다.

이 산행에서 필자는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경험을 했다.

우리 등반대는 전날 금강산호텔 숙소에서 자고 아침 일찍 금강산 등산에 나섰다. 잔뜩 흐리고 이슬비가 조금씩 내리는 가운데 산행을 시작했는데 점차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면서 우리 눈앞에 금강산의 비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4시간 만에 세존봉 정상에 오른 우리는 끼리끼리 삼삼오오 흩어져 준비해간 점심식사를 했다.

나도 아내와 함께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5월의 빛나는 신록이 갑자기 군청색 푸르죽죽한 색깔로 변했다. 옆에서 아내가 놀래서 준비해간 우황청심환을 먹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쩔줄 모르고 있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등반대 중에서 젊은 20대 청년 둘이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아 옆의 너른 바위로 옮겨 눕게 했다. 그리고 손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신록의 색깔이 서서히 원래의 색깔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위기를 넘기고 무사히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아마도 전날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산행하면서 가벼운 뇌졸중이 왔던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뜻밖에 잘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큰 신세를 졌는데, 이들이 알고보니 이범의 몸살림 연신내수련원에서 수련하는 이범의 둘째아들 재승군과 또 한명의 또래 청년이었다. 이들을 만나지 못했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다. 이범의 몸살림이 내 생명을 구했던 것이다.

골목산악회와 민청련산악회의 합동산행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계속되고 있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

이범과 함께 오랫동안 골목산악회를 같이 하며 옆에서 지켜봤던 박성규 사장은 이범을 ‘순수한 사람’, ‘원칙을 정하면 타협을 모르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범의 최초 감옥 동기였던 백병규는 그를 ‘대륙풍이 있는 사람’이고, 소박하고 품이 넓은데다 세상과 사람의 근원을 천착하는 사람으로 평한다. 친구 이승환은 그를 바둑으로 치면 포석이 강한 ‘선이 굵은’ 친구였고, 지적인 탐구가 왕성하고 죽을 때까지 사상적 실천적 탐구를 계속했던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그의 아내 김철미는 이범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 ‘잔머리가 없고, 2번 3번이 없고, 항상 직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속정이 깊고 항상 가족과 아내를 걱정했던 사람, 눈물이 많아 영화를 보면서도 잘 우는 사람으로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다

이범에게는 그 이전부터 신병으로 부정맥이 있었다. 그런데 몸펴기생활운동이 독립하던 2013년 무렵부터는 그 증상이 심해졌다. 자다가 깜짝깜짝 놀랬고, 과묵한 그가 아내 김철미에게 자주 고통을 호소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지만 몸살림운동을 하면서부터 건강에는 누구보다 자신을 해오던 터라 이범은 자가치료와 운동을 할뿐 병원은 아예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몸에 대한 연구와 치료를 하면서부터 서양의학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 아내와 가족들이 아무리 권해도 병원 신세를 지려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 성모병원 의사로 있는 친구를 찾는 정도였다.

그러다 2013년 말 어느 날 이범은 심장발작을 일으켜 갑자기 쓰러졌다. 2014년 3월 경 병세가 심해져 가족과 친구들이 나서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으나 며칠 안가 이범은 병원을 탈출해 나왔다. 그리고 한사코 집에서 자신이 치료하는 게 낫다고 고집을 부렸다. 점점 병세가 악화되고 심부전으로까지 발전하자 8월에 가족들이 모두 나서 통사정해 양길승 원장이 있는 녹색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이미 병세는 이미 회복이 어려운 상태로 악화되어 있었다.

이범은 원래 비종교였으나 그 무렵 새로 교황에 취임하여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좋아했다. 그래서 친구 최헌걸이 보내온 교황 화보집에서 교황 브로마이드를 떼어 병상 머리에 붙이게 했다.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때때로 간성혼수 상태에 빠지는 상황이 되자 이범은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고 세례받기를 청했다. 친구 이승환에게 부탁하여 수원교구 홍창진 신부를 모셔와 약식세례를 받았다. 친구 송광의가 대부를 섰다. 그리고 2-3일 후 2014년 10월 27일 오전 11시 10분 이범은 아내 김철미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골은 화장하여 구파발성당 요셉관에 안치하고, 그 중 일부를 지인들이 그가 자주 다니던 산행길 옆 바위, 산사, 바다 등에 뿌렸다. 자연 속에서 편안히 안식하라는 바램이었다.

수, 2019/10/09-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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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진짜 경영위기 맞나?
  2. 일시적인 위기인가, 근본적 위기인가?
  3. 위기는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나?
  4. 사측의 예견되는 전략
  5. 노동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현대차의 일부 현장 활동가들은 작금의 현대차 위기를 아직도 다소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기껏해야 몇몇 악재 때문에 발생한 일시적 경영악화 내지는 인위적인 수치조작을 통한 회사 측의 의례적인 ‘엄살’ 정도로 받아들인다. 적어도 현대차에 있어선 앞으로도 당분간 지난 1998년과 같은 대규모 구조조정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분위기이다. 그 근거로 사측과 노조는 이미 단체협약을 통해 대략 매년 2천 명씩 발생하는 정년퇴임을 통한 자연감축 방식으로, 향후 10년간 2만 명을 줄이기로 합의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 6만여 명의 인력이 4만 명 정도로 축소되게 되어, 미래차 보급에 따라 엔진이나 변속기 등 기존 부속품이 없어지게 되는 것에 따른 인원감축 분을 얼추 맞출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 공연히 대규모 구조조정 운운하는 것은 현장에 불안감만을 조성하고, 오히려 ‘고통분담’을 호소하는 회사 측에 좋은 빌미를 제공할 뿐이라는 것이다.

과연 지금의 현대차 위기는 이렇듯 대규모 구조조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낙관적’인 것일까? 일부 활동가들의 이 같은 판단과는 달리, 현장 내 30~40대 비교적 젊은 층의 정서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감도는 것 같다. 50대 이상의 고참 들이야 이제 곧 정년퇴임할 것이기에 걱정이 덜 하겠지만, 아직도 창창하니 현대차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젊은이들로서는 그렇지가 않은 가 보다. 그들은 아마도 정년을 다 채울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욱 강하다.

이들 젊은 노동자들의 걱정은 사실 공연한 것이 아니다. 사측 경영진 스스로가 현재 현대차의 미래에 대해 별로 자신감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인용문을 한 번 보도록 하자.

“현대·기아차 경영진은 최근 판매량 회복 시점을 전망한 내부보고서를 보고 혼란에 빠졌다. 이 보고서에는 미국과 중국시장 판매량 회복이 단기간에 불가능해 최대 판매량(801만대)을 기록했던 2015년 수준으로 올라오는 시점을 5년 뒤인 2023년으로 봤다. 2023년 판매량이 회복되더라도 세계시장 점유율은 2015년 8%대에서 7%대로 떨어진다. 이 같은 전망도 신차 라인업을 다양화하고, 신흥시장에서도 견조 한 성장을 지속한다는 전제에서다.” ([현대차 大해부]② “美·中빅마켓서 고전… 판매량 회복까지 최소 5년”, 조선닷컴, 2018.05.30.)

다소 비관적인 이 같은 판단은 학계와 자동차업계, 증권업계 애널리스트 등의 주류적인 생각인 것 같다. 이들은 현대차가 내년까지 미국과 중국시장에서 어려운 상황이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크며, 최소한 “새로운 신차 사이클이 시작되는 시점까지는 고전이 계속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필자가 보기엔 이러한 판단 역시도 아직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측면이 있다. 이들은 지금 현대차의 경영위기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그 근원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하다. 또 현대차가 향후 부딪치게 될 자동차업계의 대변혁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 사실을 말하면, 지금의 위기는 현대차의 존폐와 관계될 뿐만 아니라, 조만간에 한국경제 전반을 혼란으로 몰아넣을 사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생각은 필자의 기우에 불과할까?

본인이 그렇게 판단하는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지금 불행하게도 현대차는 ‘3중 위기를 동시에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국제 자본주의 위기, 한국경제의 위기, 그리고 현대차의 자체 경영위기다. 이하에서 이들 하나하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국제 자본주의 위기

먼저, IMF 외환위기 때와 지금의 국제적 상황이 크게 달라졌음에 주목해야 한다. 현재 미국의 국제적 패권 지위가 크게 흔들리는 중이다. 이 때문에 세계 자본주의는 지난 금융위기 이후 수습은커녕 시간이 갈수록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지금 일국적 차원을 벗어나 지구화단계에 들어선 자본주의에 있어서는, 누군가가 나서 전 지구적 차원에서 세계경제의 균형자적 역할을 해줄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신자유주의가 한창 기세를 떨칠 무렵인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그 같은 역할은 미국의 몫이었다. 미국은 자신의 달러패권을 이용하여 세계경제에 있어 ‘소비중심’으로서의 역할을 나름대로 수행하였으며, 이를 통해 세계 자본주의는 자신의 과잉생산 압박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도 2008년 금융위기를 맞이한 이후에는 태도가 달라졌다. 지금은 제 살 궁리에 급급한 실정인데, 현재 미국과 유럽을 휩쓸고 있는 포퓰리즘의 열풍은 신자유주의 이후 방향을 찾지 못하는 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세계 자본주의는 지금 ‘일국주의’로 후퇴하느냐, 지구화를 향한 전진을 계속하느냐의 갈림길에 서있으며, 현재 횡행하는 보호무역주의는 세계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자본주의 전반의 모순을 한층 격화시킬 것이다.

지금 세계경제를 뒤흔들고 있는 중미 간 무역전쟁은 미국의 대중 억제전략, 그리고 미국경제 자체의 재정적자와 무역적자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으로까지 올라온 사정이 함께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발하였다. (필자의 레디앙 발표 글, “중미 무역전쟁―패권국가 미국의 최후 공세” 참조) 자력만으로는 자국 경쟁력의 회복과 일자리 창출을 충분히 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미국은 자신의 패권국가의 지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다른 나라에 자신의 부담을 전가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간의 중·미 간 무역전쟁의 진행과정이 보여주었듯이, 중국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다른 동맹국들에게 부과되는 ‘고통 분담액’은 반대급부로 커질 수밖에 없다. 이점이 미국이 전통적인 동맹국이라 할 수 있는 유럽연합과 일본, 그리고 멕시코·케나다 등을 포함하여 그야말로 적과 우군을 가리지 않고 지금 무차별적인 무역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이다.

미국은 현재 거대한 재정적자와 무역적자, 그리고 빈부격차의 심화와 고용불안으로 인해 광범위한 저소득층의 불만이 폭발직전에 와있다. 이처럼 ‘자기 코가 석자’ 인 상황에서 다른 동맹국들의 형편을 봐줄 수 있는 형편이 전혀 아닌 것이다.

이처럼 한국이 1997년 IMF 위기를 맞이할 때와는 상황이 분명히 달라졌다. 그 땐 미국이 소련의 붕괴로 인해 유일패권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으며, 국제 자본주의 지도자로서 나름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같은 미국이 이끄는 세계 자본주의는 당시 외환위기에 처한 한국경제에 대해 어느 정도 활로를 열어 줄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은 외환위기를 비교적 빨리 소화할 수 있었으며, 이후 세계경제의 확장기조와 인접국인 중국시장의 지속적인 확대, 그리고 엔고와 같은 유리한 조건들을 십분 활용하면서 다시 재기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젠 그러한 조건들이 대부분 사라진 상태이며, 다만 엄중한 각국 간의 경쟁만이 남아 있다. 트럼프가 취임한 직후 즉각 한미FTA 재협상을 요구한 데서 보듯, 미국은 오히려 자국시장을 방어하고 한국시장을 공략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당장 걱정되는 것이 미국의 ‘자동차관세 25%’이다. 얼마 전 GM이 미국 내 5개와 해외 2개 공장에 대한 폐쇄와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 하자, 트럼프대통령은 “수입자동차 관세를 매기면 GM공장이 문을 안 닫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트럼프의 이 같은 위협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이 때문에 유럽연합을 비롯한 주요 대미 자동차수출국들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지난 G20의 트럼프-시진핑 정상회담을 통해 중미 무역전쟁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이 카드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이는 현대차를 포함한 전체 한국 자동차산업에 또 다른 커다란 악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르노삼성자동차와 한국GM의 국내 생산량은 반 토막 날 것이라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또 한 해 50만~60만 대 정도 대미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현대-기아차로서도 생산 공장 2개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정도의 타격을 입게 된다. 이쯤 되면 현재 고사 직전의 부품회사들도 곧바로 직격탄을 맞고 무너질 공산이 크다. 현대차 노조가 “만약 미국의 한국산 자동차와 부품에 25% 관세폭탄이 현실화되면 대재앙 쓰나미로 다가와 한국자동차산업 몰락의 핵폭탄이 될 것” (현대자동차지부, 2018년12월10일자 성명) 이라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2) 한국경제의 위기

지금 세계는 유례없는 신 과학기술혁명의 파도 한 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미처 미래기술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한국은 자신이 그동안 자랑해왔던 제반 분야들을 하나 둘씩 내려놓고 있는 중이다. 처음 조선업종에 이어 지금은 자동차, 그리고 머지않은 장래에 반도체로 확대되는 위기를 맞고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재벌경영’의 구조적 족쇄에 갇혀 있는 한국의 주요 기업들은 물론이고, 국가적 차원에서도 별 다른 뾰쪽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기술혁명은 그 어느 때와 달리 개별 기업차원의 혁신능력뿐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전 국가적 차원의 종합적인 혁신체계 구축이 요구된다. 국가는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체계 및 연구시설과 함께, 주택·의료·환경 등의 복지시설을 제공할 의무를 짊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한 튼튼한 사회보장체계의 구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된다. 그러나 취약한 재벌체제에 기초한 한국의 국가권력은 이런 면에서 볼 때 너무나도 부족하다. 능력과 의지 모두 결핍되어 있는데, 더욱 한심한 것은 지금 와서 이러한 것들을 갖추기에 이미 시기가 상당히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혀 그를 위한 사회적 합의조차 이루어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대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국사회 역시도 이미 기존의 산업구조와 사회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안 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변화를 위한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 전형적인 위기상황임을 알 수 있다.

한국사회는 그 대신 늘어만 가는 비정규직으로 인해, 빈부격차와 사회갈등은 날로 심화되고 인재는 고갈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더욱 황폐해지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이미 1500조원을 넘어선 가계부채이다. 이미 통제력을 상실한 가계부채는 날마다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면서 도대체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최근 저신용·저소득자가 주로 몰리는 2금융권의 대출이 많이 불어난다는 소식은 매우 불길한 징조로 들린다. 그것은 벼랑 끝에 몰린 한계 채무자들의 마지막 도피처일 가능성이 크다. 금리가 은행보다 훨씬 높은 보험·카드사·대부업 등 제2금융권의 대출은 올해 3분기까지 19조원이 늘어나서 대출 잔액은 이미 414조원을 넘어섰다. 이는 전체 가계대출의 27%를 차지하는 것이자, 2017년 한국 전체 GDP의 25%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이처럼 위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한국경제의 전반적 상황은 현대차의 경영위기탈피 가능성을 더욱 낮게 한다. 현대차가 당면한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내수의 뒷받침과 함께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한국사회는 그럴만한 여력이 없는 실정이다. 오히려 향후 경제위기와 서민층 파산의 급증으로 내수의 급격한 위축이 예견되는데, 이는 현대차의 경영위기를 진일보 촉진하게 될 것이다.

(3) 현대차 자체의 경영위기

현대차는 지금 전통 내연기관차 부문에서는 중국의 급속한 추격으로 인해 기존의 지위를 위협받고 있으며, 미래차(친환경차, 지능형차) 분야에서는 세계 선두그룹들과 비교해 추격이 쉽지 않을 만큼 거리가 생긴 상황이다. 여기에 더해 이하 두 가지 사실은 앞으로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한다.

(a) 이미 급락한 영업이익률을 단기간에 회복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듯이 영업이익률은 연구개발비 규모와 비중을 결정하는 객관적인 제약조건이 된다. 이 때문에 무엇보다도 시급한 연구개발투자가 크게 제약될 것이라는 우려가 들지 않을 수 없다. 현재 폭스바겐, 도요타, GM 등 세계 주요 메이커들은 하나 같이 기존 내연기관차 시장에서 벌어들인 돈을 아직 수익이 나지 않는 미래차의 연구개발비로 쏟아 붓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이처럼 기존 내연기관차 분야에서 일정한 영업이익률이 올라주어야 미래차 경쟁에서도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엄중한 상황에서 이제 적자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는 현대차의 경영성적은, 향후 연구개발투자를 근본적으로 제약하게 만들어 선두주자와의 격차가 좁혀지기는커녕 더욱 벌어지게 만드는 악순환을 발생시킬 수 있다.

(b) 여전히 ‘후계승계’ 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는 불안한 리더쉽. 총수일가의 지배력 강화를 먼저 고려해야하는 한국의 재벌경영은 위기 극복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핵심 사업으로의 집중을 위해 비업무용 부동산, 세계 각지에 편재한 생산기지, 관계회사와의 복잡한 거래를 과감하게 정리하는 것은 한국 재벌의 속성 상 쉽지가 않다. 이 점은 GM이 위기 극복을 위해 취했던 태도와 좋은 대조가 된다. GM은 지난해에 독일 자회사 오펠과 영국 복스홀을 매각하면서 유럽 시장에서 과감히 손을 뗐다. 이어서 인도나 남아공 등에서도 잇따라 철수하여, 미국과 중국 등 돈이 되는 거대 시장에만 집중하는 전략으로 수익을 늘렸다. 이렇듯 구조조정을 통해 절감한 비용과 자산은 대부분 자율주행차와 카셰어링 등 신사업에 투자하였다. 그 결과 올 초 미국의 기술평가업체인 내비건트리서치로부터 자율주행차 개발에 나선 기업들에 대한 기술력과 비전, 상용화 전략, 생산력 등 10개 지표에 대한 종합 평가에서 GM이 가장 앞선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대차 大해부]①’800만대의 저주’에 갇힌 현대차‘)

재벌경영으로 얽히고설킨 현대차가 이렇듯 오직 회사만의 발전을 위한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향후 현대차 위기와 한국경제의 위기는 서로 맞물리며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국내 최대 자동차업체인 현대기아차그룹의 위기는 그 자체로서 한국경제 전반의 위기를 촉진 할 것이다. 한국 자동차산업은 생산액과 부가가치, 수출액, 종업원 수 모두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대략 10%로 단일산업 중 규모가 매우 크다. 산업네트워크 분석을 통해서 보면, 자동차산업 및 1차 금속제품 산업이 우리나라 제조업에서 중심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들 산업은 겉으로 드러난 성과보다도 국민경제에서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i-KIET산업경제이슈, 제6호, 2017년2월6일) 이 같은 국민경제에 있어 핵심적인 지주산업의 몰락은 기존 조선업 불황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충격을 가져올 수밖에 없으며, 수십만 개의 일자리가 한꺼번에 사라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현대·기아차 등 완성차 업체와 8800여 곳에 달하는 협력업체가 직접 고용한 인력은 35만5000명이다. 판매 및 물류, 서비스 등 간접고용 인력까지 더하면 국내 자동차산업의 고용 인력은 175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처럼 도처에 인화물질로 겹겹이 둘러싸인 현대차는 사실상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국면을 맞고 있다. 현대차의 예견되는 앞날은 도대체 어떠한 것일까? 필자가 보기엔 근본적 전환의 계기를 지금 마련하지 못한다면 독자생존이 어렵다고 본다. 기존의 내연기관차 시대에는 나름대로 틈새시장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앞으로 완전자율주행과 차량공유의 시대가 오면 어차피 세계 자동차시장은 플랫폼 경쟁에서 앞서있는 소수의 업체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기술혁명은, IT와 기존 고급 기술력을 가진 두 선진 부분의 연합에 의한 소수 몇 개의 메이저를 중심으로 세계 자동차산업을 재편하게끔 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가다가는 현대차를 비롯한 한국 자동차산업 전반은 이들의 하위 파트너 내지는 심지어는 하청업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기술종속과 플랫폼 의존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지금 애플이 대부분의 핸드폰 제조회사로부터 높은 사용료를 받아 가듯 상당히 높은 특허비용을 지불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하청업체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아직 완전히 공개되지 않은 대형악재 하나가 현대차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필자의 이 같은 판단에 힘을 실어준다. 그것은 ‘대형 리콜사태’인데, 지난 2015년9월과 2017년3월 미국에서 실시된 현대차와 기아차의 세타2 엔진 결함 리콜에 대한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의 적정성 조사 결과가 조만간 발표될 예정이다.

<포쓰저널>의 김성현기자가 쓴 기사에 따르면, NHTSA는 이미 조사를 마무리한 채 현대 기아차 측과 벌금 액수 등 후속조치에 대한 합의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며, 최종 결과는 이르면 12월 늦어도 내년 초에는 나올 전망이다. 조사 대상은 2011년―2014년 식 세타2 엔진을 장착한 현대차와 기아차 등 총 6개 차종인데, 이들을 모두 합치면 대략 290만대나 되는 규모이다. 해당 차종에서 이미 ‘미충돌 발화 사고’로 사망자까지 발생한 상태인데, 미국 정비업계에 따르면 현대 소나타를 기준으로 할 경우 엔진 교체 비용은 대당 300만원 안팎으로, 총 8조5천억 원 가량이 소요 될 전망이다. 이는 지난해 기준으로 볼 때 현대차 2년간의 순이익에 해당되는 액수이다. 여기에다 만약 현대·기아차가 엔진 결함을 속인 것으로 판정되면 형사처벌과 민사상 손해배상이 더해지게 되며, 미국 시장에서의 이미지 실추와 신뢰도 추락까지 감내해야 한다.(“현대차·기아차 세타2 엔진 발화원인 ‘거짓보고’ 의혹 NHTSA 조만간 결론”, 포쓰저널, 2018년11월20일자)

그렇잖아도 경영위기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현대차에게 있어 이 사건은 결정타가 될 수도 있다. 국제 독점자본은 그때쯤 가면 아마도 각종 내우외환의 위기에 빠진 현대차를 헐값에 인수하거나, 지배주주 자격으로 자본 참여를 통해 자신의 글로벌 생산체계에 편입시키려 할 것이다. 한국 재벌과의 연합은 그들에게도 유리한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직접 표면에 나서지 않고서도 한국의 잘 정비된 ‘비정규직제도’와 국가의 특혜를 충분히 활용하면서 초과착취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위기 시나리오’가 지금 당장 실현되기 보다는 향후 몇 년 간에 걸쳐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말이 있듯이, 명색이 세계 5대 자동차 메이커의 하나면서 국내에 독점적 지위를 구축한 현대기아차그룹은 향후 일정한 시간을 두고 쇠락해 갈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3중 위기’에 직면한 현대차는 ‘주관적 의지’만 가지고서는 지금의 하강 추세를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회사는 가능한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위기의 전면적 폭발을 누르려 할 것이지만, 그러나 위기의 점진적 진척을 막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고찰로부터 우리는 현대차 경영진이 들고 나올 카드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이 몰고 올 기술적 변화를 감안 하고 중국의 맹렬한 추격을 염두에 두면서, 결국 가까운 시기에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회사 측은 오히려 ‘어차피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대차 경영위기를 역공의 기회로 삼으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마침 지금은 문재인정부가 경제위기로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하며 구석에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현대차가 자신의 경영위기론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차츰 구조조정 전략을 구체화한다면, 추가적인 다음과 같은 이득도 기대할 수 있다. 즉 경영위기는 현대차 개별 자본만의 문제가 아니며, 또 ‘재벌경영’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경제 전반의 거시경제 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과오를 덮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것이며, 거기에다 ‘경제위기’의 책임을 문재인정부에게 돌림으로써, 이 정부의 재벌개혁에 대한 예봉을 꺾어 ‘타협적’이게 만들 수 있는 계기로도 삼을 수 있다.

어찌되었든 현대차 정규직노동자와 사측의 지금까지의 일종의 잠정적 타협과 휴전의 시기는 점차 지나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현대차는 이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여 기존의 경영전략을 일대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와있다. 현대차의 운명에 있어 남은 것은 두 가지 방향밖에 없다. 자본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의 구조조정이든지, 아니면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재벌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 분명한 것은 그 어느 쪽이든 지금까지의 ‘산업평화’는 깨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며, 그에 따른 상호간 ‘위기’의 책임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예상된다.

회사는 벌써부터 현장규율 강화를 들먹이며 현장의 주도권을 탈환하려는 움직임을 점차 노골화하고 있다. 예년과 다르게 금년 초부터 관리직 200여명에 대한 권고사직을 실시하였고, 그밖에도 노조 감시용 혐의를 받고 있는 ‘담장 감시카메라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 사측은 또 지난 11월16일자로 의장3부 B조 도아반원 대부분에 대해 ‘작업표준 미준수(변칙근무)’를 이유로 중징계(감봉)하는 조치를 내렸다.

물론 이와 함께 회사 측 말을 잘 듣는 어용 대의원과 노조간부의 양성 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현대차노조를 확실히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어야만 앞으로 경영위기의 진척에 따른 일감 줄이기, 인원감축, 노동강도 강화 등의 구조조정 작업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용 대의원들에 대한 매수 작업도 사실상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2000년대 초 경기가 좋을 때와는 달리 이들을 돈으로 달랠 수 있는 재정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재벌이 그간 정규직과의 타협을 가능케 했던 물적 조건은 지금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현대차가 위기 심화정도에 따라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다분한 가운데, 일부 활동가들이 아직도 사측과 노조가 향후 10년간 2만 명의 ‘자연감소’를 협약한 상태이기 때문에 별반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상황인식이 대단히 느슨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문제는 그 ‘10년’ 이란 긴 세월에 있다. 지금처럼 4차 산업혁명의 진행 속도가 빠르고, 지금까지의 내연기관 시대와 획을 긋는 자동차업계의 일대 혁명적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 시기에 있어 10년이란 세월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아주 긴 세월’이 된다. 그 동안 어떤 일도 발생할 수 있으며, 실제 경제위기가 도래할 경우 자본가들의 약속은 반 푼 값어치도 안 되는 한 장의 종이쪽지에 불과하다. 안이하게 그들의 약속을 믿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는 ‘허약한’ 노조에 대해 자본가들이 신의를 지켜야 할 이유가 있을까.

 

Redian, 12월 16일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는 공동게재에 동의함).

월, 2018/12/31-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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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혁명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간까지도 우리민족은 아직도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남북으로 갈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00년에 이르는 이 시간, 우리 8,000만 겨레의 가슴에 맺힌 한은 터질 듯 미어지며 그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이 쌓여 가고 있다. 따라서 3.1절 100주년을 맞는 행사는 반드시 “자주 쟁취결의”를 주안점으로 하지 않는 그 어떤 행사도 결과적으로 외세의 이익에 영합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사회 각계에서 대전환의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차제에 우리정부도 촛불혁명속의 중심요구인 주권쟁취를 위한 첫 사업으로서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특히 목하 진행되고 있는 4.27선언 후의 민족문제 앞에서는 단연코 민족공조의 방향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 발맞추어 모든 계층, 계급의 투쟁도 민족자주와 민족의 이익에 복속되는 방향에서 자기 계급의 이익을 관철해야 할 것이다.
이 이로(理路)에서 주목해야 할 일이 목전에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 기업의 대북 투자가 한미동맹 국가보안법 5.24치 등과 충돌하면서 그 성장마저 저해되고 있다. 사내 유보금을 많이 가진 대기업일수록 더더욱 한미동맹 국가보안법 등이 그 성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렇게 민족상생경제의 추진도 막혀있다. 여기에서 자본과 노동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있는 점을 발견하고 이를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본과 노동은 생리적으로 대립하는 것이지만 민족상생 경제 앞에 그 이해가 일치하는 사실이야 말로 우리민족 내부의 역사적 특성이다. 따라서 노사정의 협력문제도 이 관점에서 찾아야만 그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되돌아보면 동학농민혁명으로 시작된 새 시대 민족사 체재를 이루기 위한 거룩한 궐기는 부패한 봉건 조선조의 외세영합으로 차단되었다. 여기에서 이 땅에 발붙인 일본제국은 드디어 1905년 한일 수호조약에 이어 1910년 강제병합으로 우리는 국권이 소멸,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민족은 각성하고 분연히 일어섰다. 일제의 억압과 수탈에 항거하여 나라를 빼앗긴지 10년을 넘기지 않은 1919년 3월 1일,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민족 대항쟁으로 일제에 맞섰다.
나라를 빼앗긴지 10년이 못되어서 기미년 3.1민족대항쟁(혁명)을 벌인 자랑스러운 민족적 기세를 세계만방에 과시한 것이다. 그 기세는 전국에 메아리 쳤다.
그 후로 더 해진 일제의 야만적 수탈과 탄압으로 민족적 분노와 한이 쌓여갔다. 역사의 시간이 흘러서 드디어 일제 패망과 퇴각에 이르렀으나 우리 힘으로 맞이한 해방이 아니었기에 미군정이 만들어 낸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분단의 역사가 시작되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는 등 100년이 되는 이날 까지도 우리는 외세의 농간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 이제 우리에게는 “자주”이것이 이 시대 우리민족에게는 최고의 가치로 자리 잡아야 한다. 따라서 “민족자주”이것이야 말로 모든 계급의 이익에 선행하는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한미상호 방위조약에 억매인 한미동맹도 민족자주에 앞설 수는 없다. 이과제가 실현되지 못하는 우리조국의 미래는 군 작전권도 갖지 못한 체 일제 당시의 내선일체와 다름없는 속앓이만 계속되고 말 것이다.
어찌 통탄하지 않으리오, 지구상에서 외세에 가장 많이 시달려 온 민족이면서 외세에 대한 연구와 관심조차 멀어진 어리석은 민족으로 전락되고 있으며, 저항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오늘의 사정이다. 이에 삼일혁명 100주년을 맞는 우리는 다시 깨어나야 한다.
지난 날 항쟁에 나섰던 기세를 자랑하는 축제의 장이 아니라, 100년이 넘도록 통일된 자주 민족사를 쟁취하지 못한 한과 분노를 가지고 새로운 결의를 다짐하며 가열차게 나서야 한다.
이에 결연한 의지를 모아 기필코 자주.평화.통일의 민족적 소망을 달성하기 위해 온 국민이 총궐기 할 것을 8천만 겨레 앞에 촉구하며 선언하는 바이다.

2019년 3월 1일

 

배 다지

민족광장 상임의장

금, 2019/03/01-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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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세계적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코로나-19의 영향 속에서도, 유엔창립 75주년이라는 소중한diamond자축의 자리를 마련하는 한 해이다. 동시에 유엔의 재정기여도가 가장 높은 미국이 세계보건기구 WHO의 지원을 철회하는 사태를 접하면서 과연 유엔이 기능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앞서 유엔은 많은 현안들에 직면하여 있다. 유엔과 산하기관들은 공공보건, 교육, 평화 그리고 일부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한 빈곤 등 과제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해결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국제적인 평화와 안전을 유지해야 한다는 임무에 대해서도 유엔은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남아공의 인종차별, 이라크와 르완다 그리고 예멘의 내전 상황, 현재 진행중인 코로나-19의 사태 등에 무기력하기만 하다.

이러한 유엔의 실패를 해결하기 위해, 제2차 대전 주요 승전국들로 구성된 안보리의 영구적인 의석 즉 P5의 확대를 요구하여 왔다. 예를 들어 인도와 터키에게도 영구의석을 부여하자는 안, 안보리의 의석수를 늘리자는 안, 아프리카 지역에 더 많은 의석수를 배정하자는 안, P5의 거부권veto을 폐지하자는 안 등등.

그러나 상기 제안들은 애매모호하고 본질을 벗어나 있다. 핵심은 1945년과 2020년 상황의 주요한 차이점으로 탈-식민지화를 정확히 인지하고, 안보리의 영구적인 상임의석을 폐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와 방법을 아래에 기술하고자 한다.

유엔의 뿌리는 식민지와 깊이 관계되어 있다. 1945년 당시 P5중에 4개국은 식민제국들이었다. 지난 75년 동안 80개국 이상이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독립을 쟁취하였다, 인도와 케냐 그리고 나이지리아에서 카자흐스탄까지.

이러한 흐름은 회원구성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1945년 당시의 P5인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는 창립회원 50개국의 10% 비중을 차지했으며 인구수로는 50%을 넘어섰다. 2020년 현재로는, 여전히 인구수의 26%를 차지하지만 회원국 숫자로는 겨우 3%에 불과하다.

비록 임기제인 비상임의 10개국이 공개적으로 할당되어 있지만, 2년간 임기의 의석을 차치하려고 수백만 달러의 로비자금을 뿌려가면서 치열한 경합을 벌리고 있어서, 자연히 부국인 유럽국가들에게 기회가 편중되어 있다. 연구조사에 의하면 세계인구의 17.1%에 불과한 서유럽과 동유럽 전체가 안보리 의석의 47%를 차지하여 왔다고 한다.

이에 더하여 주요 강국들이 비상임 의석을 주도하여 왔다. 일본의 경우 22년간 의석을 지켜 왔고, 브라질은 20년간을 유지한 반면에, 아프리카 국가 중에는 오로지 나이지리아가 10년간 역할을 한 것이 전부이다.

이렇게 편향된 조직형태는 유엔의 다른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특별히 사무총장의 경우, 1945년 창립이래 9번의 사무총장 중에 유럽백인 총장이 4번을 맡은 반면에 무슬림 출신에게는 단 한번의 기회도 없었다.

유엔의 지도자들은 이런 편향성을 완화시키고자 산하기관 또는 사무차장 등 요직의 인사를 다양하게 선정하고 있지만 개별적인 인물의 선택은 해답이 아니다.

코로나-19의 예를 들어보자, 에디오피아 출신이 WHO의 사무총장직을 맡아 빈국들의 사정을 대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실질적 힘을 보태줄 안보리는, 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지구상의 모든 전투행위를 중지하자는 유엔사무총장의 요청에 따라, 겨우 제2532호 결의문을 낸 것이 전부이었다.

결의문을 제공한 것도 중요하지만 이는 별로 영향력이 없는 것으로,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대응도 늦었고 가난한 빈국들이 격리조치의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국제적 자금지원도 부족한 탓에 결국 수십만 명의 죽음이라는 사태에 이르러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에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유엔을 아예 무시하고, G20및 IMF에게 아프리카 질병예방 통제조직의 지원과 코로나 예방에 대한 조언을 직접 요청하였다.

조직의 균형적 할당이 왜 중요하냐고? 유엔의 지난 75년간 회원구성의 주요한 변화는 오로지 탈-식민지(탈-냉전)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필자와 같은 경제분석가들이 확인하고 있듯이, 회원국가간의 경제적 균형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1940년대에 P5가 세계GDP에서 차지한 비중이 47%였는데, 현재에도 여전히 49%를 차지하고 있다, 회원수로는 고작 겨우 2% 수준을 넘고 있는데 말이다.

P5가 지닌 유엔의 입지가 경제적 제국주의를 강화시켜왔는지? 아니면 이들의 경제적 힘이 유엔에서의 입지를 강화시켜왔는지? 이는 상호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주제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P5국가들을 배제하지 못해서 유엔이 구조적인 무기력에 빠졌다는 비판에 대하여, 그들 덕분에 경제사정이 나아졌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후자의 반론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탈-식민지상황에 따라 조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에 더하여 P5가 대부분의 회원국가들에게 경제발전의 혜택을 골고루 나누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해답은 1945년 당시 이상적인 국제지정학을 꿈꾸는 지도자들에 의해서 유엔이 창립되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안보리라는 조직은 단순한 산술적 대표성보다는 집단적인 책임과 실질적인 책임에 기초하여 구상되었다. 제2차대전의 종전이 이루어진 후, 샌프란시스코에 마주 앉은 P5 지도자들은 자신의 국가들이 그간 제국주의를 추구해 왔지만 상황에 대한 책임과 이를 이끌어갈 역량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경제적 역량에서는 변화가 없었지만, 2020년 현재 안보리 국가들은 현안에 대한 책임과 역량에서 1945년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더구나 2030년, 2045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75년 동안에 더욱 커다란 차이를 보일 것이고, 기후위기 등 지구적 도전의 현안들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보일 것이다.

안보리에 영구적인 의석P를 차지할 자격을 지닌 국가는 세상에 없다. 다른 국가들을 대신하여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고 역할을 맡아야 하며, 수행에 대한 책임과 역량이 투명하게 제시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안보리의 개혁모임은 15의석 모두가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5년제를 조건으로 임기제이어야 하며, 로비비용의 제한과 더불어 모든 지역에 활짝 개방된 경쟁을 통해 선발되어야 하고, 일방적 지배를 배제하고 효율성을 담보하기 위해 30년 주기로 2번의 연임 만을 허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개혁작업으로 안보리를 유엔총회처럼 허울뿐인 민주적 조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회원국가들이 역사와 인구 그리고 군사적 역량과 상관없이 모두 한 표를 행사하되 거부권이 없는 조직이 되어서는 안된다. 집단적 의지를 표방하면서 공개적이고 다양성을 지녔지만, 책임이 없는 기구이어서도 안되며, G-7과 BRICS 또는 G20처럼 힘있고 부유한 나라들이 따로 모여서 힘없는 국가들을 무시하는 방식도 안된다.

현재 임기제로 선출된 회원국가들이 하듯이, 15개 의석은 모두 다른 국가들에 의해 자격을 적정하게 평가받아 선출되어야 한다. 이들은 유엔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동맹을 형성할 필요가 있으며, 필요에 따라 그룹을 형성하여 지구적인 현안들인 가난과 기후위기에서 팬데믹과 금융위기까지 문제를 해결하도록 위임을 통해 책임있는 역량을 발휘해야 하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P5국가들도 안보리에 잔류할 수 있지만 이들 역시 경쟁을 통해 의석을 맡아야 한다.

15개국이라는 안보리 이사회 숫자가 초기부터 많아 보이기는 하지만 협력의 원칙을 기반으로 의사결정과정을 효과적으로 진행해야 하며, 거부권에 관해서는 이를 동조하는 2개국 이상의 지지를 획득해야만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거부권을 유지하는 배경에는 출범부터 무기력했던 유엔총회의 실패로부터 차별성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기 제안을 비판하는 측은 P5가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과 별도로 이루어지는 결정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단한다. 실제로 P5의 몇 국가들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유엔에 기반한 결정구조에서 벗어나 있다.

예를 들어, 5개의 상임국가 중 3개국은 유엔총회가 인준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결정을 무시하고 있다. ICC는 그 동안 수백만은 아닐지라도 수십만의 세계시민들에게 정의를 제공하는데 크게 공헌하여 왔다. 유엔은 비록 P5국가들이 무시하더라도 ICC를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고 지금도 역할을 하고 있다.

향후 다가오는 75년 또다시 세계를 무책임하고 불공정하게 방치할 수는 없다. 유엔개혁 모임은 미래의 도전에 과감히 호응하여 유엔을 목적에 부응하고 부여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조직으로 만들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출처 : 포린폴리시 FP(ForeignPolicy) on 2020-09-17.

Hannah Ryder

유엔개혁 및 발전모임의 좌장이자, 국제전략연구소의 아프리카 프로그램 책임연구자이며, UNDP 중국조직의 정책파트너십 책임자를 역임했다

화, 2020/09/29-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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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삼일절날 광화문 광장 일부에서는 여전히 매국적인 수구개신 교단의 분탕질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여러 종교 단체에서 연대하여 시대를 고백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오늘 주일을 맞아 삼일절 소성리에서 있었던 미사의 강론을 소개합니다. 감동과 희망의 메시지 입니다.


어제 조미정상 회담 결렬 소식을 듣고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인터넷 방송으로 두 정상이 회담장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이제 정전선언만 남았구나 확신했는데, 합의문을 거부하고 퇴장해버린 미국의 태도를 보고 모멸감마저 들었습니다. 사전에 실무진들이 조율하고 서로 재차 삼차 합의문의 내용을 확인을 했을 터이고, 정상 회담이란 요식에 지나지 않았을텐데 어찌 저런 무례한 행동이 나왔을까. 순간 우리가 아직 독립하지 못했구나. 독립 만세 운동이 다시 필요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갈라진 겨레가 하나 되는데 강대국의 추인이 필요한 지경이니 아직도 우리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는 약하고 못난 민족임을 절감했습니다. 한편 삼일운동 100년 주년 기념일에 좋은 선물을 선사하여 그간 자기들이 왜곡시킨 우리 민족의 과거사를 청산할 줄로 줄 기대했는데, 오히려 우리가 누구를 향하여 다시 한 번 독립 만세를 외쳐야 하는지 각인시켜주었으니 잘 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100년 전 오늘 우리 선조들이 벌인 독립 만세 운동은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민중의 저항이었습니다. 외세에 저항하는 민중 운동은 대개 종교 결사 형태로 폭력성을 띠며 진행되는데 반해, 삼일 만세 운동은 비폭력 운동이라는 데서 차원을 달리 합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1919년 3월 1일부터 4월말까지 58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고 집계했지만, 박은식 선생의 조선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시위 건수 1,542회, 시위 참가자 2백여만 명, 사망 7,509명, 부상 15,961명, 체포 46,948명에 달하는 대규모 봉기였습니다. 대구에서만 2만 3천 명이 시위를 벌여 일본군에게 113명이 총살되었고, 87명이 부상당하였다. 당시 조선 땅에 사는 인민 중 열에 하나는 거리로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다는 말입니다.

그냥 외치는 정도가 아니라 온 몸이 부서져라 절규했습니다.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오른팔을 베어버리면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고, 왼팔마저 베어버리니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방금 말한 통계를 뒤집어 보면 열에 아홉은 그렇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들은 대놓고 독립 만세 운동을 방해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완용 같은 작자는 신문에 이런 글을 써서 민중들을 회유합니다. “식민통치에 순응하면 죽을 고비에서도 살 길이 생기는데 왜들 저렇게 살 길을 놔두고 죽을 길을 찾아가는가.”, “처음에 무지하고 몰지각한 아이들이 망동을 벌이더니, 그 뒤 각 지방에서 뜬소문을 듣고 함께 일어나 치안을 방해하고 있다.” 매일신보에 세 차례나 경고문을 게재한 이완용은 “본인이 한마디 더 하고자 하는 것은, 독립론이 허망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각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며 독립에 대한 희망을 버리라고 촉구했으며 “한일합병은 조선 민족의 유일한 활로”라고 망언을 일삼았습니다.

한편 소수의 매국노들을 제외한 열에 아홉은 방관자였습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미사 전에 우리가 낭독한 독립선언서에는 천주교 대표 이름이 없고 천주교 신자들은 만세 운동에도 소극적이었습니다. “청천백일하에 숨길 수 없는 사실이, 천주교는 민중의 자유를 위해 해방 전까지 싸워 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라를 세속주의에 내맡기는 값으로 교회 안에서 식민지적인 평안을 얻으려 했다. 그들은 일찍이 교황을 위하여는 순교한 일이 있어도 나라와 민중을 위하여서는 한 마디 공적 증언을 한 적이 없다. 삼일 운동에 가톨릭만은 들지 않았다. 가톨릭은 역시 현대 민중의 바다에 홀로 떠 있는 봉건 귀족조의 외로운 섬이다.” 이는 함석헌 선생의 날선 비판입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의 명의로 발표된 삼일 운동 백주년 기념 담화문에는 이에 대한 고백과 반성이 담겨 있습니다. “백 년 전에 많은 종교인이 독립운동에 나선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역사의 현장에서 천주교회가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조선 후기 한 세기에 걸친 혹독한 박해를 겪고서 신앙의 자유를 얻은 한국 천주교회는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런 까닭에 외국 선교사들로 이루어진 한국 천주교 지도부는 일제의 강제 병합에 따른 민족의 고통과 아픔에도,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교분리 정책을 내세워 해방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외면한 채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신자들에게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여할 것과 신사 참배를 권고하기까지 했습니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며 한국 천주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고 저버린 잘못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찰하며 반성합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고 인류를 구원으로 선도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 종교의 본령이건만, 안타깝게도 교회는 때늦은 고백과 반성을 반복합니다. 인류에게 선익이 되는 거룩한 것과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는 상스러운 것을 식별하는 영적 시각을 제시하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자 의무입니다. 이를 등한시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존재하기 보다는 어둠에 동조하고 부패를 촉진하는 적폐 세력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 건설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힘을 가진 존재인 악령들과 한 패거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악령은 하느님과 상관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생명을 말살하고 평화를 깨트리는 모든 가치관이 악령입니다. 악령은 영적인 실체이므로 반드시 인간을 수단으로 삼아 목적을 완수합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 곳곳에 스며있는 악령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 하수인으로써 의도하지 않더라도 세상에 큰 해악을 끼치고 맙니다.

물질만능주의, 대량소비주의, 성공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 같이 인간을 욕망에 충실한 노예로 만들어, 세상을 끔찍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신념들. 이것이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오는 우리 시대의 악령들입니다. 이를 분별하고 몰아내지 않고서는 결코 하느님 나라는 우리 곁에 오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 사회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우상들도 우리에게서 복음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더러운 영에 속합니다. 핵발전, 군비경쟁, 민족주의, 국가주의, 개발지상주의 같이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리고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이념들은 여전히 세상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믿음을 두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 무엇과 대적해야 하는지 분별해내야 합니다.

이를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은 방관자로 살지 않고 투사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은 시대의 징표를 읽고 투신의 현장을 찾아 떠나는 여정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는 참 그리스도인의 본보기가 나옵니다. 행복선언은 현실의 불합리한 상황이나 비참한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상황과 조건들을 개선시키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이들이 복되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들은 인간이 하느님 앞에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가난한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또한 그들은 이런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 자기 이기심만을 내세우면서 서로 다투고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는 현실을 슬퍼합니다. 비정한 세상에서도 따뜻한 마음을 지킬 수 있는 그들은 진정 온유한 사람들이며 한편 불의한 사회에 정의를 외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이런 용기는 억압받는 이웃들, 사람대접 받지 못하는 작은 이들을 향한 자비와 연민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정의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불의한 세상과 싸웁니다. 자신을 버렸으니 사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심이 없는 사람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이 땅에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이며 설령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더라도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행복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더 아름다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몸소 자신의 가르침을 실천하였고 그로 인하여 자신이 하느님의 복된 아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없는 이들, 아픈 이들, 못 배운 이들, 무시당하고 서럽던 이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보여주시려고 분투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사들과 그리고 로마제국과 맞서 싸우던 힘든 삶이었지만 마음 한가운데서부터 행복과 기쁨이 솟아올랐기에 예수님은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진정한 행복과 기쁨은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룩하기 위하여 자신을 내던질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이룩될 하느님 나라가 이런 이들의 몫이 될 것이므로 이들을 진정 복된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1 운동 백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부끄러운 과거를 사죄하고 반성하는 동시에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저항정신을 다시 발견하려고 이곳 소성리에 모였습니다. 소성리는 우리 시대의 당면과제가 무엇인지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곳입니다. 이곳은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세상에 알리는 곳인 동시에, 거대한 어둠의 세력들과 투쟁하는 끈질긴 민중의 힘이 발산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악령과 대적하는 투쟁의 현장이기도 하면서 시대의 징표와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 식별의 장소입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식별되지 않은 악령은 끝까지 준동하며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악순환은 무한히 반복된다는 사실입니다.

동학 농민들로부터 시작된 근세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을 다시 한 번 상기했으면 합니다. 이후 3.1 독립 만세 운동,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10 민주항쟁, 그리고 촛불항쟁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온 저항의 불꽃은 다시 불타올라야 합니다. 아직도 탄핵되지 않는 쓰레기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3.1 독립 만세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고 완성해야 하는지 김해자 시인의 시를 일부 차용하며 강론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가 탄핵하는 것은
해방 후 내내 심판도 단죄도 받지 않은 거짓과 비리.
민주주의를 짓밟고 고문하고 죽이고도 출세와 이권을 챙긴 불의한 관료.
우리가 탄핵하는 것은
해방 후 내내 국민들의 고혈을 짜낸 탐욕스런 재벌.

연민과 분배와 정의가 얼어붙은 사이,
농촌은 해체되고 청년들은 미래를 빼앗기고 노동자들의 삶은 망가졌다.
부와 권력이 세습되는 동안 가난과 공포와 불안과 빚도 되물림되었다.
공부하고 노력하고 열심히 일해도 미래는커녕 오늘 하루를 기약할 수 없다.
이 모든 세습을 탄핵하라.

먹고 사느라 나 몰라라 했던 통회의 눈물,
힘없는 자에게 힘 있는 자 적이 되는,
이 모든 억압과 불평등을 불 싸지르기 위하여.
만인이 만인에게 적이 되고 분노가 되는 세상이 아니라,
만인이 만인에게 친구가 되고 위안이 되는 세상을 위하여.

(이제 일어나라, 바로 행동하라. 힘껏 저항하라.)

 

소성리 삼일절 미사 강론

일, 2019/03/03-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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