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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100년의 급진, 그리고 새로운 100년, 생태문명과 신향촌의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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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100년의 급진, 그리고 새로운 100년, 생태문명과 신향촌의 건설

익명 (미확인) | 목, 2019/03/21- 11:02

편집자 주:

작년 북한농업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강연에 중국인민농업대학의 원로인 원톄쥔 교수를 초빙하게된 배경에는 이병한 다른백년 이사와 김유익선생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습니다. 김유익 선생은 농업과 농촌의 미래적 가능성을 바라보며 원교수가 추진하는 중국의 신향촌 건설 사업에 참여하여 몸소 체험하고 있는 이 시대의 참으로 귀한 분입니다. 중국의 소위 삼농 사업은 실히 인류의 문명사적 대실험입니다. 생태문명의 실현이라는 대명제와 더불어 농민공을 합쳐 농촌에 적을 두고 있는 인구가 9억에 육박하는 가운데, 과학기술과 ICT 산업의 눈부신 발전으로 기존의 산업에서 일자리가 새로이만들어 지지 않는 상황을 맞이하며 중국 지도부는 젊은 세대들이 농촌에서 미래를 찾도록 정책적 지원과 조언을 진행하고 있으며, 다른 측면에서 미패권주의의 말기적 패악에 대응한 근거지로 중국 농촌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以農村包衛覇權 이랄까요. 오늘부터 시작되는 김유익 선생의 칼럼 ‘신향촌건설’에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베이징에서는 3월초부터 2주간에 걸쳐, 흔히 양회兩會로 불리는 인민대표자회의와 정치협상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에 어김없이 중국 언론 지면은 그 소식으로 도배된다. 올해도 2월18일에 나온 (2019년)중앙 1호 문건으로 시작되는 중국의 대외 정치 메시지 발표 일정은 그렇게 이어진다. 그 메시지에 공통적으로 작년과 올해, 제일 먼저 언급된 정책이 무엇일까 ? 중미무역협상, AI와 전기자동차, 5G같은 첨단기술개발, 아니면 홍콩, 마카우, 광둥 지역의 11개도시를 선봉으로 삼는 粤澳港大湾区 개발?

정답은, 한국말로 읽으면 다소 촌스럽게 들릴 수도 있는, ‘향촌진흥鄉村振興정책’이다. 이게 중국의 새마을 운동 같은 건가 ? 사실 아닌 게 아니라 중국은 10년도 전에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열심히 벤치마킹했다. 그래서, 2005년부터 ‘신농촌건설운동’ 정책을 추진했었고, ‘화끈한’ 재정투입을 통한 그 성과가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순탄하게 넘기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원톄쥔, “토지개혁으로 위기를 극복해온 중국” 녹색평론 2018년 1-2월호). 향촌진흥정책은, 어찌보면 중국 농촌 구석구석까지 도로, 전기, 수도, 전화, 인터넷 등의 ‘5통通’인프라를 완성한 ‘하드웨어판’ 신농촌건설 정책의 ‘소프트웨어판’ 후속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중국정부의 양회 공식 선전 웹사이트, 정책 심화 이해를 돕기 위한 문답식 설명 – 1번으로 향촌진흥정책이 자리하고 있다.

향촌진흥정책은 2017년 연말 세간의 화제가 됐던 19대 공산당 전당대회의 가장 중요한 의제중 하나였는데, 한국을 포함한 해외언론은 주로 시진핑 장기집권 레짐을 위한 헌법개정논란에 치중하다보니, 소홀히 다루어진 감이 없지 않다.

중국을 논하다 보면, 최근의 미세먼지와 같은 환경문제, 아니면 경제나 외교정치영역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는 거의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중국 정부가 ‘삼농문제’(三農- 농민, 농업, 농촌)를 重中之重 – 가장 중요한 정책 현안으로 다룬 것이 이미 16년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 흐름의 형성과 실천에는, 흔히 상상하기 쉬운,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혁명과 같은 관제 프로파간다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신향촌건설운동’이라는 민간 사회운동의 개입이 존재한다.

신(新)향촌건설운동이라 했으니, 앞서 향촌건설운동이 있을법한데, 그렇다면 역사공부부터 해보자. 올해가 삼일운동 백주년이라 새로운 다음 백년에 대한 다짐이 꼭 필요한 곳이 이 지면인데, 바로 그 당시, 굴곡많은 동아시아 근대화 여정의 초입에 벌어졌던 이웃나라의 이야기이니 우리의 역사 회감과 무관하지 않다.

중국에도 100여년전에 근대화를 고민하던 기라성같은 선각자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마지막 유학자’로 불린 량슈밍(梁漱溟 1893~1988) 선생이 있다. 그는 약관의 20대에 명문 북경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됐는데 그 좋은 자리를 박차고 농촌으로 갔다. 그 핵심문화가 농업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농민의 나라 중국에서, 자주적 근대는 농민의 자각과 농촌의 변화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불교철학과 신유학의 대가로서, 제(諸)문명의 사상을 깊이 연구하여, 서구사상, 인도철학, 중국의 사유를 비교한 역저 ‘동서문화와 철학’을 남긴 국학대사(國學大師)답게, 동양 고유의 정신과 문화, 제도와 사회구조를 기반으로 어떻게 중국의 근대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래서, 상아탑안에만 안주할 수 없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그는, 직접 농촌으로 들어가, 향촌의 문화와 자원을 기반으로 한 근대화 개혁 실험을 진행했다. 량슈밍을 비롯한 중국의 지식인과 계몽청년들이, 향촌을 기반으로 저마다 중국의 전역에서 벌였던 실험이 시작된 계기가 된 것은, 동아시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특히 한국과 중국에게는 감격과 통한이 교차하는 사건이었던 1894년 갑오동학농민운동과 바로 이어진 청일전쟁이다. 굴욕적인 패전과 전쟁부채 배상 등으로 인한 막대한 손실이, 중국인들을 움직인 것이다. 이 당시에도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부국강병’의 꿈을 이루기 위해, 위로부터의 계몽을 통한 서구적 민주, 과학의 근대 혁명을 역설하고 있을 때, 또다른 일군의 지식인들은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꾀하며, 향촌으로 뛰어들었다.

특히, 허베이河北성 딩定縣현 쟈이청翟城村마을은 1904년에 지역엘리트였던 미춘밍米春明, 미디강米迪刚 부자의 마을자치 실험이 시작된 곳으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향촌건설운동 실험지로 알려져 있으며, 1926년, 대표적인 향촌건설운동 지식인/활동가 중 하나인 옌양추晏陽初가 이를 이어받아 딩현에서 평민교육 운동을 펼쳐나가기도 했다. 또, 아들 미디강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의 농촌자치 실험을 공부하고 돌아왔다하니, 동아시아 삼국의 향촌건설과 농촌공동체 운동은 그 역사적 연원이 서로 몸을 섞고 있음에 틀림없다.

20년~30년대에 황금기를 맞았던 향촌건설운동은 중국 전역의 600여개 단체 1,000여개가 넘는 실험마을을 헤아릴 정도로 활성화됐다고 한다(中國鄉村建設 百年圖錄, 西南師範大學出版社,2018).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대부분 중단되었고, 일본의 침공을 피해 국민당 임시정부가 위치했던 충칭重慶에서 명맥이 유지되는 정도였다. 이곳 지역의 기업가인 루쭈어푸魯作孚의,항일활동과 병행된 향촌건설사업은 마침 이곳으로 피난왔던 량슈밍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일제의 패망, 국공내전을 거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됐을 때, 량슈밍과 같은 일부 향촌건설운동 활동가들도, 자연스럽게 새로운 국가의 건설에 참여하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의 승리는 마르크스/레닌이 서유럽의 상황에서 이론적으로 설파한 것과 같은, 도시 노동자가 주축이 된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량슈밍선생 (사진: 바이뚜백과사전)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중국 공산당의 향촌혁명파와 향촌건설파는 마오쩌뚱과 량슈밍의 관계가 협력과 긴장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것과 같이, 실천방법과 핵심주제차원에서 다른 방향을 취하고 있었다. 전자가 주로 무력투쟁에 의한 토지혁명과 그 운용을 지속적으로 고민했다면, 후자는 문화와 교육을 통한, 주민들의 자치역량 강화에 방점이 찍혀있었다. 하여, 기실 상당수의 향촌건설운동 참가자들은 대륙을 떠나 대만 등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1938년 량슈밍과 옌안延安의 토굴에서 밤새워 토론하는 마오쩌뚱 (중국 인민대학교 ZHOU Li교수)

이제 현재형 향촌건설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필자는 2015년부터 매년, 중국CSA (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공동체지원농업)대회를 참관할 기회를 얻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국여성농민연합회, 한살림협동조합, 홍성의 풀무학교 공동체와 같은 단체들이 이 대회에 초청을 받아 연사로 참여하는 데, 다리 놓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작년 연말에도, 중국 각지에서 1,000여명 이상의 국내외 농민과 활동가, 학자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성황리에 행사를 마쳤다. 이번 행사가 10회차였고, 중국 최초의 CSA 농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베이징 교외의 작은당나귀 농장도 마침 설립 10주년을 맞았다. 국내에는 ‘채소 꾸러미’로 더 잘 알려진 CSA 개념을 실천하는 농장들이 이미 중국 전역에 2,000개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면, 어떤 이들이 이런 농장을 운영하고 있을까? 이들 대부분이 바로 중국에서는 반향청년(返乡青年)이라 불리는 귀농청년들이다. 또 이들중 대다수는 소농이자 가족농장, 혹은 우리로 치면, 영농조합법인 정도의 중소농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소비자가 얼굴을 아는 생산자를 만나는 것이 CSA의 핵심요건중 하나임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이다. 또 필연적으로, 친구나 가족같은 소비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꼭 안전한 먹거리를 생산해야 하고, 그래서 생태농업, 즉. 유기농 혹은 자연농을 경작방법으로 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향촌건설운동’의 성과인 것이다. 그럼, 대체 누가, 왜 ‘신향촌건설운동’을 제창하고 참여해왔을까? 그것은 민간 조직의 NGO 활동가들과 함께하는, ‘깨인’ 생산자와 소비자들이다. 그리고, 100년전 향촌건설운동에 량슈밍이 있었다면, 신향촌건설운동에는 중국 삼농문제의 최고 권위자중 한명이며 스스로를 역시 이 운동의 견결한 자원활동가로 칭하는 인민대학의 원톄쥔(溫鐵軍)선생이 있다.

중국인민대학교 원톄쥔(Wen Tiejun) 교수

원톄쥔은 중국을 연구하는 전세계의 학자들에게, 중국 근대화에 대한 독창적 분석으로 널리 알려진, 중국을 대표하는 지식인중 한명이다. 그런데, 량슈밍이 그러했듯, 단순히 뛰어난 학자가 아니라, 사회운동가로서의 활약이 적지 않다. 국내에도 그의 대표적 저작인 ‘100년의 급진’ 등이 소개되어 있는데, 시진핑 시대에, 관변화되어 가거나, 독립적인 목소리를 잃어가는 중국의 ‘지식인’들에 대한 실망이 적지 않음에도, 정부와의 마찰은 피하면서, 계속 중국 사회의 진보를 위해 노력하는 그에게 여전히 기대를 거는 이들이 많다.

대학에서 출발한 학자가 아니라, 연구관료 출신이었던 그는 80년대부터 현장을 발로 뛰면서 농촌문제를 연구하다가, 2001년부터 ‘신향촌건설운동’의 기치를 내걸게 된다. 정책제안을 통한 위로부터의 개혁만으로는 목표하는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대학생들과 함께, 농촌으로 들어가서 농민과 연대하기 시작한다. 청소년 시절 문화대혁명기의 상산하방 경험을 통해, 11년간 기층 농민의 생활을 체험했던 그였지만, 이를 개인적 트라우마로 남기지 않고, 자기수행과 사회변혁의 재료와 동기로 삼아, 향촌과 중국의 변화에 헌신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중국 전역의 대학에서 이루어진 방학중 농활과 정기적인 교내 독서모임 등으로 유지되던 산발적인 참여활동은, 향촌건설운동의 효시가 됐던 허베이성 딩현에 2003년 만들어진 ‘옌양추농민학교’와 2004년 베이징에 만들어진 ‘량슈밍향촌건설센터’의 설립과 함께 본격적인 사회운동으로 진화하게 된다. 옌양추농민학교에서는 의식이 있는 전국의 농민을 모아서, 협동조합, 생태농업, 생태건축 등을 무상으로 교육하였다. 량슈밍센터에서는 매년 10~20여명의 젊은이를 선발, 농민학교에서 수학한 농민들이 협동조합과 마을만들기 등을 진행하는 실험지로 1년 이상 파견하여 생활과 학습, 향촌건설 사업을 병행하게 하였다.

엔양추 농민학교는 지역 정부의 간섭으로 결국 2006년에 문을 닫게 됐다. 다른 한편으로 활동가들은, 농촌의 변화를 위해서는 도시 소비자들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됐다. 그래서, 농민학교 운영에 참여했던 이들 중 일부가 베이징으로 집단 이주하여, 유기농재배쌀과 같은 생태농업 생산물 판로를 개척하기 위한, 소비자 협동조합 실험을 시작하는 동시에, 2008년 작은 당나귀 시민농원을 설립하게 된다.

당시의 ‘빠링호우’(80년대 출생) 대학생들과 이에 영향을 받은 젊은 농민들이 지금은 중국 각지의 농촌으로 들어가, 유기농 농장운영과 마을자치 실험을 하고, 도시에서 학계, NGO, 사회적 기업 활동을 통해 소비자와 생산자를 잇는 역할을 하며 신향촌건설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30대의 핵심일꾼들이다.

중국의 귀농청년들

이들이 사명감으로 이 운동에 임하게 된 것은 중국 농촌이 90년대에 겪은 파괴적 변화를 당사자로서 경험한 때문이다. 78년에 시작된 중국의 개혁개방의 시발점은 사실 우리가 상상하는 북경이나 상해가 아니라, 농가책임경영제(大包干)를 처음 실시한 안휘성 봉양(鳳陽)의 한 시골마을이었다. 국가가 더 이상 개별 농가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는 대신, 개인 노력의 성과를 인정해주겠다는 계약에, 18명의 농민이 수결로써 합의한 것이다. 이렇게 생산성이 향상된 농업은 당시 농촌 지역 공동체에 기반한 중소규모 마을기업인 ‘향진(鄕鎭)기업’ 육성과 함께, 농촌과 도시의 소득 격차를 줄이는데 기여하여 80년대 중국 농촌의 르네상스를 가져온다. 하지만, 88~89년의 인플레이션에 동반한 거래수단의 화폐화, 연안지역을 중심으로 한 도시화, 수출 제조업 중심의 공업화, WTO가입을 계기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적극적으로 편입하기 위한 금융화 흐름이 강화된다. 이에, 농촌은 환경파괴와 더불어, 인력과 자본의 심각한 유출로, 공동체가 해체되는 수순을 밟게 된다. 국가 현대화의 비용을 농업, 농촌, 농민에게 전가하는 ‘삼농문제’가 최악의 상태로 치달은 것이다. 결국 앞서 언급한 젊은이들은, 유년기에 가난하지만 먹고는 살만하고 아름다웠던 농촌을 기억하는 동시에, 그 쇠락의 과정을 생생히 지켜 본 마지막 세대였던 것이다.

공동화되어가는 중국 농촌

중국이 농민들의 지지속에 성공한 공산혁명후에도 농민과 농촌의 희생을 요구했던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49년 신중국 건국직후 발생한 한국전쟁의 참화속에 적대국인 미국과, 공산권의 라이벌 맹주인 소련에 맞서기 위한 전쟁무기 생산기술과 자본이 긴요했던 마오쩌뚱은 농민 노동력을 시초자본 축적의 도구로 삼았다. 량슈밍이 이때 공식 회의석상에서, 농민을 배신하지 말라며 마오쩌뚱에게 항의하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그래서, 원톄쥔 등은 21세기에, 현대화를 추구하는 발전주의가 농민들의 삶과 농촌을 피폐하게 만든 것에 대해서, 다시 문제를 제기한다. 2000년 농촌지역 당간부였던 리창핑李昌平이라는 이가 당시 주룽지 총리에게 공개서신을 보내, “농민의 삶은 진정 고통스럽고, 농촌은 심각한 빈곤에 찌들어 있으며, 농업은 매우 위험합니다(农民真苦、农村真穷、农业真危险)라고 표현한 것이 ‘삼농’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 문제의식을 상당부분 수용한 중국 공산당 정부는 신농촌건설을 시작했고, 2012년부터 생태문명 건설이라는 목표를 헌법에 명시했으며, 2018년부터 앞서 언급한 ‘향촌진흥’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이 안에는, 생태농업과 6차산업(6차산업은 1차 (농업생산), 2차 (가공), 3차 (서비스 산업)이 결합된 농촌의 융복합 산업을 지칭한다) 육성등을 통한, 농촌의 환경과 경제적 삶의 질 개선정책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인프라의 문제가 상당부분 해결되고 절대빈곤을 벗어난 지금 시점부터 농촌과 도시의 문화적 생활수준 격차와 실질적 경제능력 격차를 줄이려는 목표를 설정하게 된 것이다.

중국 정부가 삼농문제를 중시하게 된 것은, 농민혁명정부라는 대의명분에 충실하기 위함이 아니라. 환경오염문제, 먹거리 주권과 안전문제, 도시화의 문제가 체제의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이미 2007년에 중국의 제1환경 오염원은 도시나 공업이 아니라 농업임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바 있다. 항생제와 촉진제, 그리고 첨가물 범벅인 중국의 농축수산물 문제는 더 이상 스캔들 축에도 들지 못한다. 이미 60%이상 진행된 도시화를 감당하기엔 사람이 너무 많다. 이미 실제 생산에 참여하는 농민은 2~3억도 안될지 모른다고 많은 이들이 걱정하는데, 농기계, 화학비료, 농약 등 과도한 에너지 사용과 환경파괴를 불가피하게 초래하는 관행농이 아니면, 소수의 농민이 그 많은 인구를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인가 ? 이전 세기 서구열강처럼 해외 식민지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한국같이 농민인구가 5% 미만으로 줄어들거나, 식량 자급률이 20%대로 떨어지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는 ‘강대국’은 역사속에 존재한 적이 없다.

신향촌건설운동에는 원톄쥔교수뿐 아니라 많은 대학과 연구소에 재직하는 상당수의 지식인들도 참여하고 있다. 긴밀하게 조직화된 형태는 아니지만, 그들은 소위 ‘대향촌건설운동’이라는 기치하에, 다양한 학술포럼이나 활동가, 농민들, 소비자들도 참여하는 행사에서도 지속적으로 발언하고 있다. 이들은 현장에 기반한 정책 연구와 제안, 향촌건설운동의 역사와 이념 정립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동시에 대중들과의 소통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원톄쥔 교수의 활동과 연구가 중앙과 각급 지역정부와의 일정한 긴장관계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정책에 반영됐듯이, 이들 그룹의 연구 성과가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중국 정부의 정책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향촌진흥정책의 얼개와 세부 내용을 살펴 보면, 소농/가족농 중심의 생태농업, 도농교류, 시민하향, 전통문화와 생태자원에 기반한 향촌의 6차산업 발전 등이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신향촌건설운동의 15년에 걸친 실험 성과나 목표와 정확히 일치한다. 다만, 권위주의 정부의 성격상, 여전히 자본투하와 상명하달 지시를 통한 대중 동원이 정책의 주요한 실행수단인 반면, 신향촌건설 진영의 학자들은, 농민들의 재조직화를 통한 자발성과 주체의식 배양이 최우선 과제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어 방법상의 이견이 존재한다.

또, 이런 정책 흐름에 발맞춰 시민하향과 동시에 진행되는 자본하향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자아내게 하는 지점이다. 제한된 정부자원과 중앙, 지방정부의 급격한 채무 증가를 신경써야할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민간자본의 참여가 요구된다. 또, 도시의 부동산 개발에 의한 초과 이윤이 더 이상 녹녹치 않은 상황에서, 민간자본도, 투자처를 물색하며, 향촌진흥정책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한편으로 물적 자본뿐 아니라, 문화자본을 갖춘 도시 중산층과 고학력자, 전문가 그룹의 참여가 향촌진흥 성패의 관건중 하나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미, 도시 생활의 경쟁적 환경에 지친, 젊은 중국인들이 귀농귀촌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기 시작하거나, 향촌생활경험을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혹은 소비트렌드로 받아들이는 것도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중국의 국내농촌관광 매출액이 이미 2018년 연말 기준으로 8천억 위안, 즉 한화 135조원에 상당하는 금액을 돌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중국인민망 기사).

이때, 정부와 자본, 다양한 유관활동에 참여하거나 귀농귀촌한 중산층 시민 그리고, 현지 농민들이 협치를 이루고, 공정하게 과실을 나눌 수 있는,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 신향촌건설 연구자들은 그러한 문제의식 속에 다양한 정책 등을 연구하고 있는데, 필자는 매달 한편씩 이들의 연구 성과를 번역 소개하려고 한다. 이 글들이, 국내 독자들의 중국 사회에 대한 이해범위 편향 문제를 다소나마 해소하고, 더불어, 양국 연구자와 활동가, 그리고 인민들의 보다 폭넓은 연대 및 교류의 출발점으로 작동하기를 기대해 본다.

[대산농촌문화] 통권 101호(2019신년호)에 게재된 글입니다(기고한 글을 일부 수정하고 대산농촌재단의 허락을 득하여 본지에 실린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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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용비자용 초청장을 발급하던 중국 여행사가 초청장 발급 업무를 중단해 중국을 사업상 방문하려는 여행자들에게 큰 불편이 일어나고 있다. 사드(THAAD)배치 결정으로 인한 중국 당국의 보복 조치가 아닌지 우려도 커지고 있다.

무발국제여행사유한책임공사(이하 무발여행사) 한국 영업소는 오늘(8월3일) 오전 비자발급 대행업무를 맡아오던 국내 여행사들에 이메일을 보내 오늘부로 초청장 발급 업무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중국 상용비자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중국측 업체의 초청장을 첨부하거나 무발여행사가 발급하는 초청장을 첨부해야 했다. 중국 현지에 공식적인 협력사가 있는 경우는 해당 협력사가 발행한 초청장을 첨부했지만 마땅한 중국 협력사가 없는 중소기업이나 개인사업자의 경우는 비자발급 대행업체를 통해 무발여행사가 발급하는 초청장을 첨부해 왔다.

무발여행사는 중국 정부가 지정한 상용비자 초청장 발급 기관으로 국내에 사업소를 두고 상용비자 초청장 업무를 독점해왔다.

그러나 이번 무발여행사의 초청장 발급 중단 조치로 중소기업과 개인사업자의 경우 비자 신청에 큰 불편을 겪게 됐다. 뿐만 아니라 상용비자 발급 서비스를 대행해주고 수수료를 받아온 국내 여행업체들에게도 적지 않은 타격이 예상된다.

비자발급 대행사인 H 여행사 관계자는 무발여행사 측이 전화를 걸어와 “중국 정부의 정책 변경으로 더 이상 업무를 할 수 없게 됐다”며 “초청장 발급 계약을 파기하고 보증금을 환불해주겠다”고 밝혔다면서 일시적인 중단이 아니라 사업소를 철수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지난 7월 초청장 제도가 일부 바뀌게 되었을 때만 해도 지난 5월에 사전 공지가 있었다”면서 이번 조치는 사전 통지 없이 매우 급작스럽게 이뤄져 큰 혼란을 겪고 있다”면서 덧붙였다.

또 다른 비자발급 대행사인 M 여행사 관계자는 “이제 상용비자를 신청하려면 신청자가 직접 중국 업체가 제공하는 초청장을 가져와야 한다”면서 “일반인들의 경우 초청장 발급 업무를 직접 하기 힘들기 때문에 큰 불편을 겪을 것”으로 예상했다.

무발여행사 관계자는 뉴스타파와의 통화에서 초청장 발급 업무가 중단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중국 대사관의 지시”라고 밝혔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대사관이 중단 지시를 했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중국 대사관 측은 중국 대사관 영사부가 상용비자 발급 중단 공문을 여행사에 보냈다는 일부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면서 “비자발급 업무에 대해 어떤 공지도 보낸 사실이 없으며 평소와 같이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무발여행사에 초청장 발급 중단을 지시했는지에 대해선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상용비자 초청장 발급의 갑작스런 중단 조치가 한국의 사드배치로 인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확산되고 있다.

비자발급 대행업체인 J 여행사 관계자는 “업계 모두 진행하던 업무에 차질을 빚고 있다면서 사드로 인한 피해가 가시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의 영사서비스과는 “무발여행사가 초청장 발급을 중단하게 된 것은 주한 중국 대사관과는 무관한 것으로 업체 내부에 문제가 발생해 중국 정부로부터 자격정지 조치를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사드와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그러나 “중국업체가 다른 업체를 초청장 발급사로 지정할 지에 대해선 알 수 없다”고 밝혀 중국 상용비자를 받으려는 한국인의 경우 상당 기간 큰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수, 2016/08/0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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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예산을 염두에 두고 기획재정부에서 향후 경제운용계획에 제4차 산업혁명의 추진내용을 집어넣겠다고 뜬금없이 언론에 공표했다. 배경에 상관없이 한국 미래를 걱정하는 일단의 올바른 결정이다. 그러나 겉치레와 면피용 행정을 넘어서 제대로 방향을 설정하고 내실있는 성과를 만들어 가려면 치밀한 토론과 성찰이 필요한 주제이다.

이명박의 ‘녹색성장’과 박근혜의 ‘창조경제’같은 황당한 오류를 되풀이해서는 아니 된다. 마침 지난 2월, 제5회 백년포럼에서 다루었던 주제였기에 당시 보조 자료로 작성했던 내용을 약간 보완하여 다시 재구성 해본다.

수면 위로 떠오른 ‘4차 산업혁명’

올해 1월말, 스위스의 관광도시 다보스에서 2016년 세계경제포럼이 열렸다. 초기에는 주로 기업을 중심으로 경제인모임으로 시작되었던 다보스포럼은 매년 참여 범위를 넓히면서 정치인, 과학자들 그리고 많은 국가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들이 함께하면서 논의 주제도 매우 다양하게 확대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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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www.gereports.kr/)

수많은 인사들이 참여하였고 매우 광범한 주제들이 논의되었으나, 그 중에서도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주제가 단연코 핵심적 내용으로 부각되었다.

사실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는 새롭다기보다는 미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이미 여러 해 전부터 회자되었으나, ‘다보스포럼 2016’을 통하여 화려하게 세계적 관심을 받는 주제로 떠오른 셈이다.

4년 전, 2기 오바마 행정부는 세일가스(Shale gas) 채굴기술의 성공 등에 자신을 얻어 ‘USA제조업의 부활’을 선언하였다. 미국 내 주요 제조 산업체들은 자신들의 고유 분야에 전통적으로 강한 유통과 서비스 그리고 소프트웨어 산업의 경험과 기술을 재결합시켜 제조 산업분야의 혁신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유럽에서도 오비이락처럼 물리학박사 출신인 독일의 메르켈수상이‘Industrie 4.0’을 주창하고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가 대서양 양편에서 공식적으로 수면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첨단기술과 과학의 통합…새로운 차원의 산업혁명

제4차 산업혁명의 주요영역이 컴퓨터 기술과 인터넷 환경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이를 제3차 산업혁명과 분리하여 별도로 지칭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기존의 제3차 혁명은 주로 공장자동화, 사무자동화, 금융과 물류시스템 혁신 등에 집중하여 이루어지고, 개별기업, 개별산업, 개별국가 단위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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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news.kbs.co.kr/)

반면 제4차 산업은 기존의 컴퓨터에 로봇기술, 인공지능(AI), 감지기술(remote sensors), 무제한적인 데이터 저장, 사물인터넷( IOT)의 등장, 네트워크간의 새로운 결합 등 새로운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누적 결합되면서 개별적 영역에 머물던 제3차 산업의 영역에서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과학과 기술의 통합된 형태 (integrated system of all modern & advanced S&T)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디지털(digitalization), 자동화(automation), 전기전자(Electricity & Electronics) 등이 중심기술로 역할하게 된다. 동시에 전 세계를 석권한 금융 산업과 지구적 차원의 생산거점과 시장을 확보한 글로벌 기업들에 의해 미래의 비즈니스 모델은 더 이상 한 지역과 한가지 산업에 머물지 않고 국가경계와 산업별 장벽을 넘어서 전 세계를 기반으로 하게 된다(end to end loops in integrated space & industry ).

자본재 및 소비재 시장의 수요가 감지기술 등에 의해 축적된 빅데이터(big data)를 통해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분석되면 이러한 통계가 기존 제품의 생산 및 새로운 제품의 기획자료가 되어 유연하게 자동화된 무인시설을 통하여 생산과정을 거치면서 역시 무인화된 물류체계와 거점을 통하여 시장과 수요자에게 공급된다.

이 과정에서 생산 및 서비스 설비의 운영상태와 조건이 실시간으로 확인되고 종합되어 최적의 관리와 적정한 정비를 사전적으로 시현하게 된다.

예컨대 하늘을 나는 점보 비행기의 엔진과 주요 기능품 상태가 1초 단위로 항공사와 공급업체에게 실시간으로 제공되어 언제 무슨 제품의 어느 부품이 교환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안전한가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

한국에 설치된 발전소의 GE 주요 설비에 대한 운용정보가 원공급자인 미국 GE의 종합진단센타에 실시간으로 제공되어 본사에서 원격으로 해결할 것은 즉시 조치되고, 한국 현장에서 조치해야 할 사항은 실시간으로 현장기술자에게 통보되어 처리지시가 이루어진다.

앞서 가는 미국

이러한 이야기는 단지 인건비가 비싼 선진국 뿐 아니라 임금이 싼 중국같은 국가에서도 발견된다.

세계철도산업의 40% 를 차지하는 중국의 차량바퀴를 생산하는 공장의 경우 각 차량의 운용상태에 대한 정보가 실시간으로 종합되어 매일 생산해야 할 수요량과 사양이 무인과정을 통해 생산에 투입된다. 대부분 공정이 자동화되어 14억 인구가 매일 이용하는 철도차량의 바퀴를 생산하는 현장에는 10명 남짓한 종업원만 일하면 충분하게 된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실현되면 이미 구축된 정보시스템과 결합되어 자가용이 필요없는 시대가 된다. 또 다양한 감지기능 기술과 데이터 분석기법이 보편화되면서 산업활동뿐 아니라 개인의 일상적 요구사항을 손 안의 모바일 콘트롤러 또는 핸드폰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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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electronicdesign.com/)

미국은 이미 세계적인 독점을 형성한 소프트웨어 및 정보산업을 기반으로 대표적인 제조업체인 GE를 중심으로 Industrial internet consortium -IIC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GE 회장은 GE가 더 이상 전통 제조업체가 아닌 소프트 산업회사임을 선언한다. 반면에 아이폰 공급업체인 애플사는 자동차를 움직이는 컴퓨터(mobile computer)로 정의하면서 자율주행 자동차 생산을 암시하기도 한다.

지난 11월29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는 기술혁신이라는 특집을 통하여 한물 간 것으로 평가됐던 Microsoft 사를 재조명했다.

2015년 기준 120억불(13조원)이라는 엄청난 기술개발비를 인공지능(AI) 분야에 투자한 나델라(Nadella) CEO는 마치 빌 게이츠가 개인 컴퓨터 시대를 예측하고, 스티븐 잡스가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듯이, AI의 새로운 시대를 선언했다.

그는 모든 산업분야와 모든 일상생활의 영역(all walks of life, every industry & business process)에서 인간과 대화하고, 판단하고, 업무를 처리하는 AI 개발에 전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독일, 일본, 중국의 대응

미국기업들이 화려한 소프트웨어 산업을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다면, 전통적 기술을 기반으로 착실하게 종합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독일의 대표주자인 지멘스(Siemens)사는 2015년 하노바 산업전시회에 ‘Industrie 4.0’에 기초한 중형 규모의 유연 무인화 방식인 생산공장(smart factory) 및 기업경영 모델을 소개하면서 새로운 도전의 문을 열었음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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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www.zdnet.co.kr/)

일본은 전통적으로 강세인 첨단로봇산업에 전략적으로 집중하면서 새로운 산업의 핵심 영역을 차지할 기세이다.

중국은 거대한 인구와 시장을 배경으로‘next 10years project’를 통해 세계 제조업의 중심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한 각종 자동화산업에 주력한다, 예컨대 산업용 표준로봇이 유럽과 일본에서 2억-3억원 대 가격을 형성하는데 비해 중국은 1억원 미만의 로봇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소수의 일부 학자들은 컴퓨터 산업 및 인터넷환경이 인류에 미치는 영향은 증기기관으로 움직였던 철도산업에 못 미치며, 제4차 산업혁명보다 제2차 산업기에 만들어진 세탁기 발명이 훨씬 중요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제 인류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혁신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고 판단하며, 제4차 산업의 도래를 무시하는 태도는 기계화가 도입되던 시대의 러다이트운동처럼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될 것이라고 한다. 

4차 산업혁명의 위협: 기술 격차의 확대

문제의 핵심은 이전의 산업혁명들은 노동과 일자리를 새로운 형태로 전환시켜 왔으나 (예컨데 제1차 산업혁명은 농업중심에서 공장제 제조업과 육체노동으로, 제2차 산업혁명은 근육질 노동에서 사무직 관리직업무로, 제3차 산업혁명은 서비스와 지식산업중심으로 이동시키면서도 과거보다 더 많은 일자리들을 만들어 냈다), 제4차 혁명은 기존의 일자리 형태를 바꿀 뿐만 아니라 많은 일자리를 단기간 내에 없앨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논쟁과 토론이 진행 중인 주제에 섣부른 예단은 피해야할 것이지만, 그동안 나온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몇가지 논쟁점들을 나열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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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서울경제신문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인공지능(AI)과 바이오, 사물인터넷(IoT), 로봇 등이 이끌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최대 부작용으로 양극화 심화가 61.7%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대량실업, 인간 효용가치의 하락, 기계의 지배 등 순이었다. (이미지 출처: http://www.sedaily.com/)

‘Industry 4.0’의 통합적 종합적 기능은 기존의 산업체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효율과 성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성과가 마르크스와 케인즈가 예언하였듯이, 모든 국가와 개개인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인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행 과정에서 기업간, 국가간 개별 단위의 생존전략과 결합되어 경쟁과 탐욕으로 상호 간에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릴 위험성이 매우 높다고 할 것이다.

우선 빅테이타를 처리하는 핵심 중앙정보센타의 투자 규모만도 수 억에서 수 십억 달러에 달하며, 전체 시스템 구성에 필요한 다양한 분야의 기술개발에는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가 요구된다.

따라서 이를 감당하기 위해 기업간 연합과 합병이 불가피하다. 위에 예로서 언급한 세계 최대 규모의 제조업체인 GE 조차도 다른 분야의 기업들과 연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투자의 위험을 상쇄하기 위해 경쟁사였던 프랑스의 알스톰(Alsthom)사를 합병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독일의 거대기업인 지멘스(Siemens)그룹만이 독일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독자적인 실행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더구나 승자독식의 성격이 강한 핵심기술로서 정보산업, 소프트웨어 및 인터넷환경을 미국이 장악한 상태에서 새로운 기술제국주의의 위험성조차 내재되어 있다. 최근 구글 등 미국계 기업과 중국 및 유럽국가 간의 갈등은 이를 암시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미국과 더불어 세계 5위권 경제대국인 독일, 중국, 일본 및 인도 그리고 한국 정도가 겨우 국가 단위의 지원과 전략을 통해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외 대부분의 국가와 기업들은 종속적인 위치에서 부분적 영역에 한하여 하청 협력을 구해야 할 형편이다. 우리가 흔히 디지털 격차와 소외를 이야기하듯이 미래에 형성될 ‘industrie 4.0’은 그 규모와 기술적 수준에서 국가간, 기업간, 지역간 새로운 격차를 형성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4차 산업혁명의 위협: 사라지는 일자리

이미 언론에서 보도됐듯이, OECD 국가를 기준으로 500만명 정도가 수 년 안에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한다. 제3차 산업혁명의 진행과정에서 형성되어온 중간수준의 관리직의 약 50% 정도가 조만간 일자리를 잃고, 장기적으로는 반복적인 작업을 하는 육체적 노동 뿐 아니라 단순한 판단을 하는 관리직종 대부분이 사라질 위험에 있다고 전망된다.

문제는 기존의 산업혁명처럼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지면서 기존의 직업군을 대체하고 보충할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로봇과 AI가 해낼 수 있는 영역에서는 더 이상 인간이 일할 기회가 없어진다고 보아야한다. 제4차 산업혁명이 만들어내는 기술영역과 인간영역 간 절충과 타협이 가능할 수 있을까?

표준적이지 않은 직업군으로 혁신(innovator), 발명(inventor), 전략분석(data interpreter), 경영판단(decision makers), 그리고 문화예술 활동 등은 별다른 영향없이 독자 생존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AI 기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답변일 것이다. 오히려 문제의 해결은 기존 방식이 아닌 새로운 개념으로 일자리를 재규정하는 것이다. 노예가 대부분의 생산 활동을 담당했던 그리스 도시국가 시절, 정치공동체 일원으로서 시민의 역할이 새로운 일자리에 대한 하나의 암시가 될 것이다.

낡은 관습과 제도를 버려라 

위에서 암시하였듯이, 미래의 교육에서 암기식, 주입식 교육은 완전 무의미해진다.

무심한 판사의 판결보다 AI의 사안처리 능력이 더 공정하고 투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단순한 회계학 역시 미래에는 on-line 방식의 회계시스템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따라서 미래의 교육은 제공된 정보와 지식을 재해석하고, 새롭게 창의하는, 한마디로 적용된 기술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영역으로 이동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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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4차 산업혁명 시대로 쏜살같이 날아가는데, 교육은 여전히 근대 초기의 교육 형태로 남아 있다. 흔히 한국의 교육현실을 21세기 아이들에게 20세기 교사들이 19세기 지식을 주입하는 것으로 묘사하곤 한다. (사진 출처: http://www.k-today.com/)

산업체계 내에서는 복잡한 시스템을 운용하고 분석하고 처리하는 고도 수준의 전문영역군과 전략적인 판단을 하는 책임자군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성과를 모두가 공유하게 된다면, 업무시간도 대폭 단축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생산과 서비스 산업 영역에서 해방된 영역 – 교육, 문화, 연구, 취미, 운동, 사회활동 등에 주로 시간을 보내게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될지 모른다.

문제는 급격히 변해가는 혁신 환경과 새로운 산업체계 속에서 쏟아지는 재화와 서비스를 소비할 수 있는 시장수요를 만들지 못하고, 공유하는 순환의 과정을 형성하지 못하면, 제4차 산업혁명은 백악기 공룡과 같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와 스스로 고립된 조직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쇠퇴해갈 것이라는 점이다.

소비처가 없는 생산과 서비스는 무의미하다. 또한 지구라는 제한된 지리적, 자연적 환경 요인 역시 명백한 한계로 작동할 것이다.

한국처럼 극심한 양극화를 보인 미국 대선에서 보여준 버니 샌더스의 예언과 같은 외침, 유럽 내에서 급속히 퍼지고 있는 기본소득, 건전한 시장질서와 함께하는 공동체로서 사회국가에 대한 갈망 등은 이러한 새로운 사태를 예감하는 시대의 자각이다.

다보스포럼의 주요 토론을 담은 유튜브 영상들을 보면, 한결같이 인류의 미래에 대한 각 단위별 지도자들의 책임에 무게를 두고 있다. 개인단위, 기업단위, 사회단위, 국가단위 그리고 국제단위의 지도자들의 책임지는 역할을 요청하고 있으며, 그 중에도 글로벌 기업들의 지배구조와 경영진 그리고 사회적 책임이 핵심적 주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특히 단순히 이익을 추구하는 주주중심의 편협한 경영에서 이웃과 함께 하는 사회공헌과 지구의 미래, 특히 지속가능한 에너지원과 환경조건을 기업경영의 본령이자 전략목표로 삼도록 하는 지배구조의 전환이 주요 주제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익실현이라는 자본의 탐욕을 기본 축으로 운영되는 기업의 속성을 감안하면, 과연 어떤 기업의 책임자가 스스로 자기 목에 동아줄이 될 방울을 달겠는가? 그나마 이러한 주제들이 국제 규모의 포럼에서 스스럼없이 토론되었다는 사실에서 새로운 희망은 시작된다고 위로를 삼는다.

혁신 친화적 사회시스템 만들어야

영국에서 제임스 와트가 만든 증기기관으로 인류역사의 전대미문의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프랑스의 발명가인 파팽이 먼저증기기관을 발명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사회는 이러한 혁신기술을 받아들일 준비와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파팽이 발명한 기관을 달은 화물 증기선이 라인강에서 운행을 시작했지만, 곧바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길드조합원들에 의해서 파괴됐다.

그의 아이디어가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시피 강의 화물선에 적용되었으나 기술적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조만간에 자취를 감추고 만다. 산업적, 경제적 이해와 정치적, 사회적 제도의 차이가 증기기관의 발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둘러싸고 와트와 파팽의 운명을 갈랐다. 제4차 산업시대의 도래를 목전에 둔 한국사회에 매우 중요한 암시를 준다.

근세 유럽에 화약 종이 나침반 등 주요한 발명품을 선물한 중국은 자신들의 낙후된 봉건체제를 극복하지 못한 채 한때 전 세계를 누볐던 정화(鄭和)제독의 선단 이야기를 전설로 묻고 세계 GDP의 30-40%를 차지했던 풍요로운 역사를 뒤로 한 채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승수적 발전을 거듭한 조그만 섬나라 영국에게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한다.

한글이라는 독창적 문자를 만들고,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틀’이라는 손기구를 발명하고도 이를 대량인쇄가 가능한 구텐베르크 방식의 기계로까지 발전시키지 못한 조선의 이야기도 동어반복이다.

목전에 닥친 제4차 산업혁명의 거센 기류는 ICT 강국으로 알려진 한국사회에게도 분명히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가져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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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정치, 경제체제가 포용적이고, 혁신 친화적인가에 따라 그 나라의 운명이 달라진다. 사진은 인종과 자연환경이 거의 유사한데도 국경 담장을 사이에 두고 빈부격차가 뚜렷한 미국 아리조나주의 마을과 맥시코 마을. 사진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 실린 사진.

당연히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적 적용이 일차적인 당면과제로 다가오겠지만, 특정기업에 대한 특혜와 줄세우기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정부는 일반적으로 개별기업과 혁신적 창업자들이 마음놓고 활동할 수 있는 개방된 산업 운동장을 만들어야 한다. 편향없는 적극적인 지원을 통하여 기술개발과 혁신활동을 일상화하는 환경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미국의 IIC 같이 경쟁을 보완하는 협력의 플랫홈을 유도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거대한 기술적 제국주의에 대응하여 국가간 수평적이며 독립적인 영역을 구축하기위한 정부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

종합적인 산업과 과학기술 정책에 더불어 입시와 서열중심인 현재의 양육식 초중등 교육제도를 핀란드 교육제도처럼 학생 모두를 소중히 여기는 창의적 프로그램으로 전환해야 한다. 정치 제도와 절차를 모두가 참여하고 모두에게 공의로운 제도로 재정립해야 한다.

기술개발과 산업활동의 결과를 0.1% 만이 독식하는 현재의 사회경제적 패러다임을 폐기하여 99%가 함께하면서 창의와 활력을 담보할 협력의 네트워크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기본소득 개념처럼 내용의 성과물을 국민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등 새로운 시대 흐름의 요구를 시급한 과제로 받아들여 미래를 준비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제4차 산업시대의 한국의 미래는 실패한 파팽의 증기기관, 그리고 손기구에 지나지 않는 조선시대의 ‘금속활자판’ 이야기에 머물 것이다.

 

“강력한 성장은 강력한 제도에서 비롯된다, 특히 개방되고 포용적인 민주적 제도라는 조건에서 형성되는 혁신을 통해 이루어진다(‘The strong growth is all about strong institutions, particularly the open inclusive institutions of democratic system, which create the condition of innovation’ – in ‘Breakout Nations’ written by Ruchir Sharma.)”

수, 2016/12/14-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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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중국과 가장 많이 무역을 합니다.
수출의 26.1%,수입의 16.1%가 중국 시장에 달려 있습니다.


중국 다음으로는 미국, EU, 일본 등과 무역을 많이 하지요.


그런데 중국도 미국, EU, 일본과 무역을 많이 합니다.


게다가 지금 저유가로 경제가 휘청이는 브라질, 러시아도 중국과 무역을 많이 하지요.
그래서 중국 경제가 흔들리면 전세계가 불안합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시장이 중국 경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뭘까요?

먼저 우리 수출입이 중국에 매우 의존적인데다가


GDP대비 무역의존도가 상대적으로 가장 높기 때문이죠.
보세요. 한국만 GDP대비 무역의존도가 100%가 넘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은 무역이 안 되면 내수로 버티는데…우리는 그게 쉽지 않습니다.

중국 경제에 저당잡힌 세계 경제.


국내 소비라도 반등하면 좋겠습니다만, 1200조 원 가계빚이 또 내수를 짓누릅니다.

우리 경제, 정말 자가당착에 빠진 걸까요?

<자료 : WTO 2014년 기준>

리서치/구성 : 최경영
인포그래픽 : 최미정

수, 2016/01/27-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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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른백년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단비뉴스팀과 함께 ‘사랑하지 않는 대한민국’을 주제로 6편에 걸쳐 우리 주변의 삶을 들여다본다. 장시간 노동자, 청년 실업자, 경쟁에 시달리는 직장인, 노인, 청소년들이 그들이다.  

노인은 말동무를 찾아 매일같이 탑골공원에 간다. 취업 못한 청년은 안전한 직장을 가질 때까지 스스로 고립된다.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는 직장인은 연인을 만날 시간조차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 사는 현대인에게 사랑은 사치다. 각자도생 사회에서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누구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지 못한다. 

당신은 사랑하고 계십니까. 

<프롤로그> 1. “들어줘서 고마워”      2. 한국인의 밥상

<청년 실업자> 1. “사랑도 유예가 되나요?”  2. “연애도 사치일 뿐”   

<자영업자> 1. “주말도, 휴일도 없는 30시간 편의점이예요”  2. 쉽게 문 열고, 쉽게 망한다.

(이 글은  전남 광주에서 24시 편의점을 운영하는 김혜숙씨(가명)의 육성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런 형식을 ‘사람책’이라고 한다. 

또 이 글은 경향신문( “365일 하루 30시간 부부 맞교대…군대 간 아들 면회도 못 갔어요)에 전재됐다)

남편이랑 저랑 둘이서 13년째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어요. 아르바이트는 안 써요. 하루 24시간을 둘로 쪼개서 반반씩 근무하는 셈이죠. 저는 보통 새벽 3시쯤 일어나요. 식사를 준비해 놓고 도시락을 싸서 부지런히 집을 나서면 4시 반에서 5시 사이에 남편이 있는 가게에 도착해요.

아무래도 남편이 야간에 고생을 하니까 10분이라도 더 빨리 가려고 애를 쓰죠. 이때가 하루 중 남편과 제가 만나는 유일한 시간이에요. 교대시간 전후로 한 두 시간 남짓이요. 그 시간 동안은 둘이 목이 터져라 얘기를 하죠. 진상손님 흉도 보고, 못했던 잔소리도 하고. 그때는 손님도 안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손님이 오면 대화를 못하잖아요.

하루 2시간, 한 달에 이틀 반나절을 함께하는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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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쯤 남편이 집으로 가고 나면, 그날 팔 빵을 구워요. 우리 편의점은 빵이랑 쿠키를 직접 구워서 팔아요. 그리고 8시부터는 상온제품, 유제품 등 연달아 들어오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재고가 없는 건 추가 발주를 넣어요.

틈틈이 빵을 굽고 포장하면서 손님을 받다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요. 보통 오전 11시 전에 가게에서 첫 끼를 먹죠.

정오가 되면 근처 대학에서 학생들이 점심을 해결하러 몰려들거든요. 그 전에 해치워야 해요. 밥은 카운터 안쪽에 간이식탁을 펴놓고, 집에서 싸온 몇 가지 반찬이랑 먹어요.

어떤 날은 손님이 몰려서 한 끼 먹는 데 두 시간씩 걸리기도 해요. 오후 3시 반쯤 남편이 다시 오면 저는 집으로 돌아가요. 정말 하루가 금방 가죠.

편의점 일이 편하다는 말은 다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예요. 정말 혼자서는 손발이 모자라죠. 쉽게 생각하고 덜컥 편의점을 시작했다가 한 달 만에 두 손 들고 나가는 경우도 여럿 봤어요.

저희끼리는 24시간이 아니라 ‘30시간 편의점’으로 이름을 고쳐야 한다고 말해요. 혼자서는 도저히 창고정리나 청소를 하기 힘들어서, 교대시간 전후로 둘이 같이 근무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사실상 남편은 하루에 15시간 이상 가게 일을 하고 있어요. 자영업이 다 그렇긴 하지만요.

주말도 휴일도 없는 연중무휴의 도돌이표 하루

편의점을 시작하기 전에 저는 가정주부였고, 남편은 은행에 다녔어요. 은행 지점장을 7~8년 정도 했어요. 2000년도였을 거예요. 외환위기 칼바람을 간신히 피했다고 생각하던 시기에 마지막 해고바람이 불었어요. 그때 명예퇴직을 당했죠.

남편이 40대 후반이었고 첫째는 고3, 둘째는 겨우 중2였어요. 돈 들어갈 일이 너무 많은 시기였죠. 남편이 작은 개인회사에 재취업을 했었어요. 그런데 자금을 끌어오고 영업을 해야 하는 일이라 남편이 많이 힘들어했어요. 그만뒀죠.

당시에 은행에서 받은 퇴직금도 있고 집에 목돈이 꽤 있었는데, 사기꾼이 붙더라고요. 사기도 여러 번 당했어요. 남편이 돈을 벌어보겠다며 주식도 하고 사업투자도 했지만 다 여의치 않았어요.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그때 지인이 편의점을 하고 있었어요. 물어보니, 편의점은 장사경험이나 별다른 수완이 없어도 해볼 만하겠더라고요.

그때는 편의점 매출이 많지 않아도 본사에서 점주들한테 최저수입을 보장해주기도 했고. 그렇게 알음알음 시작하게 됐어요. 본사에서 주는 최저보장금이라도 다 챙겨보자고 생각했죠.

매장을 세 번 옮기면서 편의점을 하는 12년 동안, 제가 몸이 아팠을 때 잠깐 빼고는 아르바이트를 쓴 적이 없어요. 저희는 편의점을 처음 할 때 누군가에게 뭘 팔아야 한다는 두려움이 컸어요. 지금도 서로 “장사는 정말 나랑 안 맞아”라고 말하죠.

영업을 잘해서 떼돈을 벌 자신도, 능력도 없었어요. 인건비를 줄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몰랐죠. 그래서 초기에는 둘이서 하루에 열대여섯 시간씩 근무하며 일을 배웠어요. 편의점이라는 게 쉬는 날이 없잖아요. 가게를 시작한 뒤부터 12년째 저희 부부는 주말도 휴가도 없이 집과 가게만 오가며 지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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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부부는 끼니 때가 되면 편의점 한 구석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는다. 사진은 김씨가 싸온 도시락 모습.

요즘에는 제가 몸 관리를 하느라 일주일에 세 번, 퇴근 후에 운동을 다니긴 하지만 집에 가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자려고 하죠. 몸이 너무 힘드니까. 하루 대여섯 시간 정도 자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는 아들 방학 때만 기다려요. 기댈 곳은 우리 아들밖에 없으니까. 둘째 아들이 다른 지역에서 대학원을 다니는데 방학이면 집에 와서 가게 일을 도와주거든요. 아들 덕에 일주일에 하루 이틀만 가게를 쉬어도 감지덕지죠.

편의점과 집 밖에서는 잠수인생

저희는 아들 둘 다 군대 면회를 한번도 못 갔어요. 첫째는 해병대에 입대했는데 입소할 때 데려다준 게 끝이었고, 둘째는 면회는커녕 군대 갈 때 데려다주지도 못했어요. 편의점을 하니까 하는 수 없었어요.

그러다 잠깐 편의점을 쉬었던 5개월 동안 집에 있으면서 애들 밥해주고 집안일하면서 보냈는데, 작은아들이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엄마가 집에서 밥을 해준다고. “엄마, 너무 좋아. 너무 좋아” 그러더라고요. 미안했어요. 둘째가 중2 때부터 제가 편의점을 한다고 집에 없었으니까요.

저희가 친정이나 시댁 식구가 참 많은데, 결혼식 등 경조사에 참석 못한 지도 10년이 넘은 것 같아요. 못 갔어요, 한번도. 가려면 또 대충 하고 갈 수는 없잖아요.

남편도 저도 365일 24시간을 편의점과 집만 왔다 갔다 하니까 입고 갈 옷이 없는 거예요. 애들 아빠도 회사 다닐 때 입던 낡은 양복 밖에 없고. 그런 상황이 돼 있었어요. 옷을 사고 구두를 사고 또 준비를 하고, 그러기가 싫었어요. 여유도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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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남편은 은행지점장으로 일했지만 2000년 갑자기 정리해고를 당했다. 사진은 1998 외환위기때 대량해고를 당한 한 은행원이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는 모습 (사진 출처: http://www.gokorea.kr)

친구들이 자식 결혼한다고 연락이 오면, 저는 몸이 아파서 못 간다고 하고 애들 아빠는 일 때문에 못 간다고 말해요. 그래서 저희 부부는 우리 아이들 결혼할 때 아무도 안 오겠구나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친정어머니가 치매예요. 처음에 남매들끼리 돌아가면서 돌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편의점 일을 하면서는 제가 어머니를 모실 수 없잖아요. 그때가 두 번째로 했던 편의점 매장 계약이 종료되고 잠깐 쉴 때였는데, 새로 편의점을 열기 전까지 한 20일 정도 저희 집에서 친정어머니를 모셨어요. 이게 마지막이다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어느 날은 오빠가 전화를 해서 “이제 네 차례니까 네가 좀 모시라”고 하는 거예요. 전 “다들 사는 거 바쁘고 힘들어서 집에서 어머니 모시기 힘드니까 요양원에 가시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독하게 말해버렸어요.

남편이 은행에 다니고 제가 집안 일만 할 때는 사교모임이 많았어요. 취미생활도 하고. 그런데 편의점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친구들 모임에도 제가 먼저 잠수를 타게 되더라고요. 계속 모임에 나가지 않다보니 연락이 점점 줄고 자연스럽게 아무도 안 만나게 됐어요.

지금은 같이 편의점 하면서 알게 된 친구 말고는 연락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종일 편의점에 있다 보면 전화 통화를 하다가도 손님이 오면 끊어야 하고, 시간 내서 누굴 만나기도 쉽지 않으니까요. 동네 주민 모임은 회비만 내고 있어요.

자주 오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편의점은 단골 개념이 적기도 하고, 손님들과는 절대 친하게 안 지내요. 되도록 말 섞지 않으려고 하죠. 외상을 달라고 하거나,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거절하기 어려워지거든요. 또 까딱 잘못하면 사기당하니까. 몇 걸음만 가면 근처 편의점이 두 곳이나 있는데 거긴 한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주인 얼굴도 몰라요.

저희 부부는 편의점이나 집이 아닌 곳에서는 일종의 잠수를 타고 있는 거예요. 사회생활, 사적인 생활 모두에서요. 라디오에서 저와 비슷한 사연만 나와도 꺼버리고 독하게 일만 했어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이런저런 관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마음 아파하지 않기로 했어요. 살다보니, 외롭고 슬프고 그런 감상에 젖어서는 내가 못 버티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는 감정이 늙어버린 것 같아요.

“자식들 때문이 아니면 이걸 왜 하겠어요?”

두 번째 편의점 계약이 만료되던 때가 저희가 편의점을 시작한 지 딱 10년째 될 즈음이었어요. 처음 가게는 유흥가에서 했고, 그 다음 가게는 중학교 앞에서 했는데 술꾼들, 사고치는 중학생들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사람들한테 굉장히 치였죠.

정말 편의점 하면서 수명이 줄어드는 것 같다고 느꼈을 정도예요. 오는 손님들도 다 미워 보이고. 그래서 계약이 만료되면 다시는 편의점을 안 하려고 마음먹었었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행이나 다니면서 푹 쉬려고 했어요. 그런데 쉬면서 수입이 딱 끊기고, 있는 돈만 쓰니까 금방 불안해지더라고요.

연금 조금 나오는 것 가지고는 생활하기 힘들어요. 우리가 앞으로 10년만 살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살지도 모르는데 한 푼이라도 더 벌어놔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다른 일을 해보려고 집에서 가까운 직업훈련소에 몇 달 다녔어요. 저는 제봉을 배우고 남편은 양재를 했어요. 편의점을 그만두고 앞으로는 무조건 둘이서 붙어 다니자고 합의를 했거든요. 계속 서로 못 보고 살았으니까.

2개월 넘게 다녔는데 전망이 너무 없어서 그만뒀어요. 직업훈련소는 별로 쓸모가 없어요. 정부는 왜 그런 데 돈을 쓰나 몰라요. 그러고는 5개월 만에 다시 편의점을 열었어요. 남편이랑 편의점 쪽은 쳐다보지도 말자고 했었는데, 다시 24시 편의점을 하게 된 거예요. 이 나이에 저희가 또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게 쉽지 않으니까요.

 

편의점을 다시 하게 된 건 아이들 때문이라고 볼 수 있죠. 자식들이 다 독립했으면 저희가 왜 이걸 하고 있겠어요?

첫째는 아직 경제적으로 자리를 못 잡았고, 둘째는 취직 대신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했으니까요. 우리 애들 나이가 서른넷, 서른하나예요. 예전 같았으면 벌써 독립해서 장가갈 나이인데 아직 그러지 못해서 저희 부부가 이러고 있죠.

저희 또래들이 요즘에는 다 자식 때문에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는 것 같아요. 세상이 그렇게 변해서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참 힘든 건 사실이에요. 힘들어요.

가게를 그만두면 남편과 여행을 가고 싶어요. 국내든 해외든 여행을 한번도 못 갔어요. 그런데 자식들 결혼도 안 시켰고 아직 할 일이 많아요. 사회적으로 복지가 최저생활이라도 가능한 정도만 지원되면, 저희가 편의점을 그만할 수 있지 않을까요?

월, 2017/02/20-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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