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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민동9월 인왕산산행-산행도 역사의 숨소리와 함께라면 재미가 두배

토, 2015/09/26- 10:03 익명 (미확인) 에 의해 제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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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길도 역사의 숨소리와 함께 간다면 재미가 두 배-인왕산트래킹

 

96일은 대학 동문 산행일이다. 오늘의 트래킹 코스는 연세대, 안산, 인왕산, 독바위산, 백련산을 거쳐서 백련사 근처에서 뒷풀이를 하는 방식으로 기획되었다. 참여하는 각자의 기호, 시간 그리고 신체적인 조건에 따라 출발지를 나누어 진행하는 방식으로 하였다. 1차 팀(윤주원81, 장소자81, 남중현82, 최원호83, 김성화85, 조민재87)은 연세대에서 모여서 안산을 오른 뒤 역사적인 장소인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독립문에서 2차 팀과 합류하기로 하였다. 2차 팀에는 전원배82, 이주섭83, 임정태83, 정선임83, 황종규85, 양하림(정선임동문 차녀), 마가렛 할머니가 참여하였다.

1차 팀이 안산 위에서 바라본 남산과 서울 하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움을 뽐내었다한다. 게으른 천성으로 2차 팀으로 합류한 탓에 그 아름다움을 체험하지 못한 게 무척 아쉽다. 2차 팀과 합류한 일행은 선바위 쪽으로 오르기 시작하여 조민재 동문으로 부터 선바위, 단군신전, 일제 강점기의 남산의 총독부 신전. 후에 지어진 총독부위치 및 방향. 광화문 방향 등등, 그 것들이 다시 제자리를 잡게 된 배경, 그리고 이제 굿당 수준으로 변해버린 선바위 밑의 사연 등에 대한 값진 강의를 듣게 되었다.

산길을 조금 더 걷다 보니 드디어 서울의 인왕산 산성자락이 남대문 방향으로 이어지고 남산까지 펼쳐지는 광대한 서울의 모습이 시원스레 보이기 시작하였다. 비록 성곽은 새로 복구한 흔적이 많았고 그 위는 몰염치한 전선줄들이 우리의 시야를 거슬리게 하였지만, 선선한 날씨와 시원스러운 서울의 모습은 우리가 이렇게도 좋은 자연환경을 바로 옆에 두고 살고 있구나 하는 자긍을 충분히 갖게 하였다. 인왕산 봉우리에 이르니 안성철(81)동문이 미리 올라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잊지 못할 명 강의들이 조민재 동문으로부터 다시 이어진다.

한국사 공부할 때 [이괄의 난]에 대해서는 들어봤을 줄로 안다. 그러나 그저 외웠을 뿐, 그게 뭔지는 대부분 잘 몰랐을 것이다. 이괄은 인조반정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도성안의 주요 (?)보직을 받지 못하고,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후금과의 국경수비를 전담하고 있었다. 한양에 있는 아들이 개국공신들의 이간질의 희생양이 되어 역모의 누명을 쓰게 생겼다. 이간질한 간신과 왕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도성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것을 이괄의 난이라고 한다. 당시 팔도도원수로 평양에 머물고 있던 장만이 정충신을 앞세워 이괄을 진압하게 되고, 이괄은 도망가다 이천부근에서 부하들에 의해 목이 잘려져 죽게 되었다고 한다. 정충신(나주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장군이 된 인물-권율이 발굴했다)의 봉호는 금남으로, 현재 광주의 금남로는 정장군의 봉호를 따서 만든 것이란다.


이괄은 그저 꽹괄이요 장만은 볼만일세에 대하여

이괄이 도성을 점령한 후, 장만이 정충신을 앞세워 이괄을 폐퇴시키기 위해 진압군으로 들어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괄은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한다. 이 때, 작은 징을 만들어 두드리게 하였다. 이 작은 징의 소리가 꽹꽹거리고 나는 상태였고, 이괄이 그것을 불고 다니게 하였다 하여 꽹과 괄이 합해져서 꽹과리기 되었다 한다. 한편, 장만은 직접 나서는 스타일 보다는 뒤에서 지켜보면서 밑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휘를 하게끔 하는 스타일이었단다. 그것이 백성들이 보기에는 정춘신 뒤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팔장을 끼고 보고만 있는 것으로 비춰졌을 게다. 이리하여, "이괄은 꽹괄이요 장만은 볼만일세"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한다.

 

비굴한 왕 인조, 그리고 인절미의 탄생

확실한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절미란 이름이 만들어진 유래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한다. 이괄의 난으로 인하여 도망을 가게 된 인조는 얼마나 빨리 도망을 가게 되었는지 공주지방에 이르게 되었다. 어느 날 임씨성을 가진 남자가 떡을 만들어 왕에게 받쳤다. 그것을 먹은 왕이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절미한 떡이라 하여 [임절미]로 부르라고 했다 한다. 이후 부르기가 너무 어려워, 임절미가 [인절미]로 변형되어 부르게 되었다 하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러한 유래들은 비단 인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임진왜란 때 도망가던 선조는 도로묵 물고기 이름을 만들게 되고, 이순순장군은 금풍생이(구운 +평선이라는 관기)라는 물고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일행은 인왕산에서 내려온 후, 난이도 때문에 추가 일정을 소화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숙정문 인근에 떨군 다음, 독바위산을 거슬러 올라간 후 상명대 뒷담 부근을 지나 백련산 자락으로 넘어가기 시작하였다. 백련산 자락을 오르는 시기부터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이 때 쯤 부터는 트래킹 코스를 기획한 조민재동문에 대한 원성(?)이 하나씩 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울의 서북쪽이 훤히 보이는 쉼터에 자리를 잡고 맛보는 왕포도와 칡즙의 맛, 그리고 아직까지 시원함을 간직한 물은 금방 우리 모두를 순한 양으로 만들어놓았다.

부암동은 붙일부자를 써서 바위에 돌을 붙이면 아들을 얻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런데 그 바위는 터널을 만들면서 폭파해서 어디로 썼는지 없어지고, 백련산도 원래는 왕족들이 매를 잡는데서 응봉(매바위)이라 불리었는데, 그 바위도 깨져서 사라져버렸다는 웃픈 해프닝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백련산 팔각정에서 인천의 계양산, 강화의 마니산, 김포의 문수산, 그리고 아주 멀리 어슴프레하게 개성의 송악산까지 볼 수가 있었다. 산을 내려온 일행은 장근주(78)동문과 오세제(81)동문과 해후하고 백련사 입구에 있는 백숙집에서 윤주원동문의 찬조로 맛있는 뒷풀이를 하고, 추가적인 우의를 더 다져야할 사람들은 신촌에 머물고, 나머지는 가정을 향하였다. 산행을 마친 후 스마트폰의 만보기에 찍힌 오늘의 운동 거리는 20킬로미터를 넘어 있었다.

사람과 자연과 역사가 같이 호흡하는 서강 민동산우회에 더욱더 많은 동문들이 참여하여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다음 산행을 더욱 기대해본다(임정태83/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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