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현재 양극단으로 나뉘어 있지만, 대부분 중국이 커다란 문제라는 점에는 동의하는 것 같다. 트럼프는 취임하는 첫날부터 중국과 통상문제로 대립각을 세웠고, 2017년 국가안보전략에서 중국을 ‘수정주의적 패권’이라고 호칭을 붙이며 주요한 전략적 적국으로 규정하였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예상되는 조 바이던은 2019년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중국이 미국의 먹거리를 빼앗아간다는 우려를 평가절하하였지만, 그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에 대한 강경대응을 추구하고 있다.
공화당의 강경파 상원인 J. Hawley와 M. Gaetz 같은 인사들이 경고음을 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진보와 중도 진영 역시 새로운 냉전시대에 대하여 염려하면서 중국과 관계를 통제할 새로운 대화를 촉구하고 나섰다. 표현을 달리하고 있지만, 이들 모두는 미중 관계의 현상태를 매우 중대하게 바라보고 있다.
불행하게도 미중 간의 경쟁에 대한 논쟁은 대상국가의 내부적인 성격을 비난하는 관행적 경향에 치우쳐 있다. 이들은 중국의 지배이념, 정치체계, 또는 개인 지도자의 특성 등을 지적한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의 오랜 관행이 되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여 구실로 독일의 군사주의를 격퇴하고 세계를 민주주의로 지킨다는 것을 내세워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 하였고, 이후 제2차 대전에는 파시즘을 패퇴시킨다는 명분으로 싸웠다.
냉전의 초기 당시에 유명했던 조지 캐넌의 ‘X’ 문건(타이틀: 소비에트 행동의 근원)에는 ‘모스크바는 공산당의 권위주의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내부적으로 팽창에 대한 무자비한 동기를 부여하고 외부적으로 상대국가들을 적으로 규정한다. 원만한 타협은 결코 유효하지 않으며, 소비에트가 내부적으로 무너질 때까지 봉쇄를 감행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이다”라고 적고 있다.
최근에도 미국의 지도자들은 이라크의 문제를 사담 후세인이라는 무자비하고 사악한 야망과 비이성적인 종교적 열광을 지닌 지도자 때문으로 규정하고, 그의 외교정책이 전적으로 이념적 신념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비난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모든 대결의 과정 속에서, 제기되는 현안의 문제들은 국제정치 자체의 본질적인 경쟁적 성격이라는 환경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되는 상대국 지도자의 기본성격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과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전직 백악관 안보보좌관이었던 H.R. MacMaster는 중국이 위협적인 것은 지도자들이 민주적 정치제도와 자유시장경제 대신에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모델을 추구하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폼페이오 역시 같은 입장이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미중 관계가 악화된 것은 10년 전 중국과 지금의 공산당 리더쉽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며, 현재 중국공산당은 서구의 이상, 서구의 민주주의 서구적 가치를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더 나가서, 호주의 수상인 Kervin Rudd같이 중국에 대해 복잡한(황당한) 견해를 지닌 이들은 “중국의 점증하는 위협은 시진핑 주석이 권력집중에 대한 공세적인 입장을 취한 것에 기인한다”고 판단하면서 “시진핑이 개인적 (독재)지도성향으로 중국체제에 관료제라는 전염병을 강화시키려 한다. 반면에 국제사회는 무방비상태로 이를 방관하고 상황에 익숙해져 있다”고 염려를 표한다.
이러한 견해는 중국의 지도자가 다른 성격이면 문제가 덜 심각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같은 주장을 Timothy G. Ash도 되풀이 한다 “신냉전시대는 시진핑이 2012년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면서 반전을 거듭하며 시작되었다.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보다 공세적으로 변질되었다.”
다른 이들은 중국의 강화된 외교정책의 주요한 요인으로 민족주의의 대두(자연적이든, 정부가 조작을 하였든)를 언급하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일군의 국제관계학자들에 의해 제기되는 것으로 카테고리에 의존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들은 단위-차원(Unit-level), 축소주의자(reductionist), 이차(부수적)-이미지(second-image)등으로 카테고리를 분류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상기의 다양한 이론들은 대체로 해당국가의 외교정책이 기본적으로 내부의 특성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미국의 외교정책은 때때로 자신의 민주주의 시스템과 자유라는 가치 또는 자본제적 경제질서 등에서 의존하며, 다른 국가들의 정책 역시 자신들의 내부적인 지배체제, 통치이념, 전략적인 문화 또는 지도자의 개인성향 등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국내적 특성에 기반하는 설명들은 매우 단순하고 직접적이라는 측면에서 부분적으로 매력적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주의는 관용에 기반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반면에, 지도자들이 무엇을 하던 견제하는 기능이 없는 독재국가들의 침략자는 지배와 억압의 성향에 기반하여 공세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내부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면, 대결의 과정에 대한 자신의 책임에 대하여 눈을 감게 하고 손쉽게 상대방을 비난하도록 유도하기 십상이다. 우리는 천사의 편에 서 있으며 우리의 정치체제는 건전하고 정의로운 원칙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전적으로 상대방의 나쁜 정치제도 또는 악한 지도자 때문에 온갖 악한 일들이 터져 나온다는 식이다.
이러한 인식에 기반하면 해결책이 손쉽게 준비된다. “나쁜 나라 또는 사악한 지도자들을 제거하라!” 또한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것은 국제적인 도전에 직면하여 일반대중의 지지를 과시하는 속도전의 방식으로, 악한 짓을 벌리는 것이 상대방의 속성이라고 몰아붙이면 된다.
불행하게도 모든 대결의 원인을 상대방의 국내적 속성에 기인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우선 대결이 일차적으로 상대국가의 체제라는 속성에 나온 것이라면, 장기적인 해결책은 체제를 전복하기만 하면 된다. 타협과 협상, 공존공영, 상호이익을 위한 광범한 협력 등을 거론할 근거가 사라지면서 차후에 잠재적으로 엄청난 재앙을 불러오게 된다. 상대방 역시 우리의 본질을 위협이라고 인식하게 되면 죽을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인 셈이다.
단위-수준(unit-level)이론이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미중 경쟁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광범한 구조적 요인들이다.
일단 강대국인 양국은 국제적인 기구들 속에서 전면적으로 격돌을 마주하게 된다. 왜냐하면 서로가 상대방에게 잠재적인 위협인 까닭에 서로가 상대방을 짜증스럽게 바라보면서 상대방의 이익을 위협하며 자신이 보다 많은 것을 확보하려는 동시에 상대방의 능력을 축소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서로가 상대방이 자신의 안보와 번영 그리고 국내적 생활방식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온갖 기법과 성공의 수위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면서 서로를 견제하여 갈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상대방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의 최근 외교정책의 변덕에서 충분히 지켜보았듯이, 모든 영역에서 패권을 향해 양보없이 경쟁을 벌여나갈 것이다. 상대방에게 가하려는 서로의 전략적 목표의 불일치(비양립성)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지정학적 조건에서 부분적으로는 지난 세기의 사건경험을 통하여, 긴장의 상황은 더욱 확대되어 간다.
한가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의 지도자들은 가능한 이웃국가들과 안전하게 지내길 바라는 것이고, 같은 배경으로 과거에 미국이 서구의 지역에서 몬로 독트린(고립주의)을 공식화하고 강화해온 행적이다. 북경당국은 주변국가들에게 자신들의 일당 국가자본주의를 강요할 필요가 없으며, 모든 주변국가들이 각자의 이해에 전념하기를 바라면서 그들에게 심각한 일체의 위협을 가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한 목표를 향하여, 중국은 미국이 중국 주변에서 철수하여 미국의 군사력에 대해 위협을 느끼지 않거나 일부 주변국들이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이러한 바램은 비현실적인 것도 아니고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어느 국가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상대방이 군사력을 주변의 여러 국가들과 연합하여 배치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한편 미국은 아시아에 잔류해야 할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J. Mearsheimer와 필자가 여러 번 언급하였듯이, 중국이 아시아에서 지배력을 확장하는 것을 봉쇄하는 것이 미국의 안보를 강화하고 중국으로 하여금 국내 현안에 집중하도록 강요하면서 세계를 향해, 특히 미국의 인접 지역에, 힘을 과시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의 논리는 역으로 중국이 자유질서를 유지하고 미국이 중국식 국가자본주의를 도입하려 한다고 가정해도 유효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불행하게도 제로-섬의 대립이다. 누구도 상대방을 제압하지 않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 간에 진행되는 경쟁의 근본 구도는 개별적인 지도자의 성향이나 체제의 성격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강대한 양국이 추구하는 힘의 배분과 이에 상응하는 전략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물론 경쟁의 강도에 미치는 영향과 상대방에 가하는 기량과 관련하여, 정치상황과 개별적인 지도력이 전혀 무관한 것은 절대 아니다. 지도자에 따라 수반되는 위험을 감수(또는 회피)하려 할 것이며, 현재의 미국인들은 무능한 지도력이 펼치는 고통스런 현장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거나 국내적 상황이 급변한다고 해서 미중 관계가 가지는 본질적인 경쟁의 성격이 따라서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국 내의 진보진영과 수구집단 모두 잘못하고 있다. 전자는 중국은 미국에 대하여 대단한 위협을 가하지 않을 것이며, 적당한 타협과 능란한 외교를 결합하여 대응하면 새로운 냉전이 야기시키는 격돌의 대부분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필자는 능란한 외교관의 자질을 전적으로 지지하지만, 이것만으로 강대국 간에 힘의 배분과정에서 발생하는 치열한 경쟁을 예방하는데 충분하다고 믿지 않는다.
트럼프가 그가 주도하는 통상전쟁에서 언급하였듯이, 참모인 강경파들은 중국과 경쟁이 승리하기 쉽고 편한 것으로 판단한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더욱 강력한 제재를 가하고, 미중의 경제관계에 대한 단절(decoupling)을 시도하며, 국방비를 대폭 증액하는 한편,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를 과시하면, 궁극적으로 중국의 공산당체제를 종결시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기의 행동에 따르는 명백한 위험과 비용을 차치하더라도, 이들은 중국의 취약점을 과장하고 미국이 지불할 비용을 과소평가하며, 중국과 치를 십자군 전쟁에 다른 국가들이 흔쾌히 가담할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가정하고 있다. 중국의 주변국가들은 중국에게 지배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미국과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지만, 한편으로는 폭력적인 대결의 장에 말려들기를 결단코 원하지 않는다.
또한 중국이 민주적으로 변한다 해서 자신의 이해를 방어하는데 소극적이며 미국의 종속적 지위를 항구적으로 수용할 것이라고 믿은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현재 국제정치의 구조적 관점이 제기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첫째로, 세계가 장기적 변화의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천재적인 전략이나 돌출적인 사건으로 현재의 경쟁구도가 해결될 수는 없다. 최소한 가까운 장래는 아니다.
두 번째, 현재의 상황은 심각한 경쟁구도이며, 미국은 이를 심각하게 대처해야 한다. 아마추어 수준의 책임자들과 국가보다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대통령을 내세워 야심적인 경쟁 상대자와 경합할 수는 없다. 당연히 앞선 군사기술에 투자를 해야 하고,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외교관 진영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에 더하여 아시아 동맹국가들과 충실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긴요한 까닭은 지역내의 많은 도움이 없이 단순히 미국 홀로 아시아에 영향력을 지탱할 수는 없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일은 양국이 경계(boundary)를 가지고 때로는 경합을 하고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면서도, 미국과 중국의 이해가 중첩되는 주제에 대해서는 서로 협력하고 진지하게 이해를 공유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후위기와 팬데믹 예방에 관한 것이다.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묵살하고 혼자서 모든 위험을 제거하고 미래의 위기를 예방할 수 없기 때문에, 워싱턴 당국은 중국이 넘어서는 안되는 레드-라인을 분명히 설정하고 중국에게 이를 이해시켜야 한다.
이 지점에서 단위-수준(unit-level)의 이론을 도입해야 한다. 양국은 경쟁을 하면서도 현재 여러 국제적인 기구들 안에서 심하게 얽혀 있기에, 이런 상황에서 경쟁관계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는 각자의 국내 정치제도와 책임자(지도자)들의 역량에 달려있다.
필자는 현재 미국이 결코 밀리지는 않겠지만 일방적으로 우세하지도 않다고 판단한다.
출처: 포린포리시 on 2020-06-30.
Stephen M. Walt
하버드대학교의 석좌교수이며 국제관계학의 세계적 권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