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 천하?
새해 첫날입니다. 동트기 전, 고요한 새벽입니다. 2019년을 선생님과의 서신으로 출발합니다. 두근두근, 한 해를 여는 신고식입니다. 심호흡을 깊이 하고 반듯하게 자리에 앉았습니다. 처음처럼, 새 마음을 새깁니다. 지금 이 순간의 초심을 6개월 내내 지속하고 싶습니다.
지난 연말을 돌아봅니다. 학술행사 참여 차 베이징에 다녀왔습니다. 마침 개혁개방 40주년을 맞춤한 때였습니다. 천안문 광장의 국가박물관에서는 ‘위대한 변혁’을 주제로 한 전시가 한창이었습니다. 한참을 줄을 서고 기다린 끝에야 겨우 관람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실망스러웠습니다. 고속철도, 고속도로, 고속인터넷, 세계 최장의 교각과 달 탐사 등 시종 물질개벽의 성취를 일방으로 선전합니다. 경제강국, 기술강국, 우주강국, 군사강국만 도드라지게 꾸며두었습니다.
물론 지난 40년 중국이 이룩한 상전벽해는 괄목할 것입니다. 그 성취를 더욱 실감나게 해준 것은 공교롭게도 기내에서 시청한 영화 한 편이었습니다. 제목이 유별납니다. <Crazy Rich Asians>. 아시아인이라고 했지만 실은 중국인 이야기입니다. 더 정확히는 ‘글로벌 중국인’이라 해야겠군요. 도입부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주인공 커플이 뉴욕의 레스토랑에서 나눈 대화가 지인의 SNS를 통해 싱가포르에 계시는 부모님에게도 곧장 알려집니다. 뉴욕, 상하이, 홍콩, 타이베이, 싱가포르, 런던 등 글로벌 도시들을 가로지르며 실시간 이어지는 연결망이 대단합니다. 200년 오래된 화교 네트워크와 20년 새로운 온라인 네트워크가 결합된 21세기의 디지털-화교망을 실감나게 연출합니다. 누천년의 아날로그 공동체와 새천년의 디지털 커뮤니티가 합류한 모양새입니다. 신대륙과 구대륙을 아우르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횡단하는 글로벌 차이나의 현재입니다.
‘Crazy Rich’, 영화 제목이 상기하는 것처럼 중국은 이미 물질개벽의 수준에서 미국과 유럽에 육박했습니다. 구미를 능가하는 것 또한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격차는 더더욱 벌어질 것입니다. 2049년, 중화인민공화국 일백주년에는 명실상부 G1이 될 공산이 큽니다. 새로운 현상만도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오래된 지위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세계사는 아편전쟁 이전으로 반전하고 있습니다. 저 나라의 지도층이 부쩍 ‘책임대국’을 강조하는 것 또한 ‘익숙한 미래’를 예비하고 대비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 준비의 일환으로 사상계에서는 ‘천하’나 ‘대동’이라는 말도 자주 쓰고 있습니다. 이번 베이징대학의 한 연구소 개소식 또한 ‘천하’를 핵심 키워드로 삼고 있었습니다. 천하질서가 무너졌다고 호들갑이었던 것이 불과 120년 전입니다. 동아시아인의 장구한 역사 감각으로 미루어 보면 백년의 대란은 잠시, 일시에 그칩니다. 일치일란(一治一亂)의 한 주기, 변주일 뿐입니다. 천하는 붕괴되기는커녕 더욱 확장되고 심화된 형태로 다시 굴기하고 있습니다. 이번 세기에는 동아시아로만 한정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일대일로(一帶一路)를 따라 아랍으로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아메리카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오래된 사자성어가 “Global First”라는 신조어로 번안되고 있음을 곳곳에서 목도합니다. 보호주의로 퇴각하고 국가주의로 퇴행하고 있는 구미에 맞선 대안적 지구사상으로 매력공세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신천하, ‘다시 천하’의 기세가 하늘을 찌릅니다.
동아시아인으로서 천하의 귀환을 마다할 것 없다 여깁니다. 40년 항산을 갖추었으니, 다음 40년은 항심을 다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천하론을 추수하는 것만으로는 썩 석연치 않습니다. 지난 백년을 지나 ‘다시 천년’으로 복귀하는 것 또한 영 마뜩치 않습니다. 다행히도 천하대란의 벽두, 우리들의 선조들이 자생적으로 토해낸 모던한 개념이 솟구쳤습니다. 바로 ‘개벽’입니다. 저들에게 ‘천하’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개벽’이 있습니다. 저들이 끝내 ‘천하’를 고수하고 사수할 때, 우리는 ‘개벽’을 창안하고 창조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선생님의 책 <한국 근대의 탄생>을 다시 펼쳐 든 까닭입니다. 저에게는 단연 2018년 ‘올해의 책’으로 꼽는 수작입니다. 완미해서가 아닙니다. ‘다시 개벽’의 물꼬를 틔우는 선전포고와도 같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21세기 다른 백년, 다른 나라, 다른 문명의 단서가 숱하게 묻혀있는 보물창고 같은 저서입니다. 부디 더욱 널리 읽혀지기를 바랍니다.
2. 다시 개벽!
아시다시피 저는 유라시아를 천일 간 유랑했습니다. 근대의 고약한 시공간 개념을 철폐하고 싶었습니다. 공간적으로 서구와 비서구를 무 자르듯 나누고, 시간적으로 전통과 근대에 만리장성을 쌓아둔 딱딱하고 단단한 고정관념을 부셔버리고 싶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가 다시 합류하고 고전과 미래가 소통하는 21세기의 포스트모던한 진풍경을 두 눈에 담고 두 발로 누비고 싶었습니다. 귀로에 접어들며 뜻밖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서구적 근대가 산출한 겹겹의 분단체제의 심층에 성(聖)과 속(俗)의 분단체제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상과 지상의 분단체제라고도 하겠습니다. 자연과 자유의 분화라고도 하겠습니다. 속이 성을 압도했습니다. 지상의 논리가 천상의 도리를 압살했습니다. 자유가 자연에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그 근대화=세속화의 교조주의가 곳곳에서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성과 속이 다시 합류하고 있는 모습을 도처에서 목격했습니다. 언젠가부터 ‘성속합작’이라고 말을 즐겨 쓰게 된 연유입니다. 탈서구적 세계화, 지구적 근대의 정수였습니다. 허나 탈세속화의 끝이 비단 종교의 귀환이 아니었음이 백미입니다. 기성종교가 축적한 문명적 자산이 대안적인 ‘라이프 스타일’로 업데이트되고 업그레이드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영성화’라고 표현합니다. 특정계급만 향유하던 일상을 한층 성스럽게 영위하는 삶의 기술이 대중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삶의 양식의 추구가 ‘새 정치’도 추동하고 있었습니다. ‘민주주의 2.0’, 권리(權利)의 민주화에서 천리(天理)의 민주화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전혀 낯선 모습만은 아니었습니다. 거듭 거푸 동학운동을 떠올렸습니다. 사람을 하늘로 모시고 만물을 한울로 섬기는 동학이 목하 지구사의 대세, 메가트렌드와 합치한다고 여겼습니다. 귀국하면 신동학 운동에 투신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 자신을 ‘개벽파’로 자임하게 된 것입니다. 동무와 동지가 있을까, 동덕(同德)을 찾았습니다. 그러다 눈을 찔러온 것이 선생님이 쓰신 일련의 논문들입니다. 이틀을 몰아서 ‘조성환 읽기’에 몰두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반드시 찾아뵈어야 할 분으로 첫 손에 꼽았습니다. 처음 뵌 것이 작년 봄, 4월입니다. 익산의 원광대학교 앞, 아담한 카페였습니다. 그 후로 학교 안과 밖에서 여러 차례 만났습니다. 넌지시 서신 형태의 연재를 제안한 것이 늦가을 무렵이었습니다. 기꺼이, 망설임 없이 수락해 주셨죠. 신이 났습니다. 흥에 겨웠습니다. 덕분에 신년 맞이가 더욱 신명이 납니다.
<개벽파 선언!>. 철학자와 사학자가 나누는 이 대화에 임하는 저의 기대부터 밝혀두려 합니다. 사학과 철학의 앙상블, 사상사의 졸가리를 새로이 세우고 싶습니다. 제 선생님과 선배님들이 서술한 한국근현대사는 한마디로 ‘개화사’입니다. 문명개화, 서구적 근대로 향해 진보하는 150년사를 뼈대로 삼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에 기초하여 1,500년 과거사도 기술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좌/우와 진보/보수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쪽은 식민지 근대화와 개발독재의 성취를 높이 치고, 다른 쪽은 항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가치를 높게 삽니다. 그러나 심급에서 ‘탈아입구’의 대서사는 공유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지구사의 대반전을 맞춤하여 ‘개벽사’(開闢史)를 새로이 쓰고 싶습니다. 1860년 동학 창도 이래 150년사를 통으로 갈아엎고 싶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턱없이 벅찹니다. 공부도 아직 미진합니다. 밑천이 모자란 정도가 아닙니다.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그래서 먼저 개벽사를 정리하고 계신 선생님의 도움을 긴히 빌고자 합니다.
개벽사의 서술은 개벽학의 수립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현재의 대학은 개화학교입니다. 학과체제부터 커리큘럼까지 온통 개화독재입니다. 절절하게, 열렬하게 개벽대학을 염원합니다. 그리고 새 학파의 등장은 새 정파 탄생의 마중물이 될 것입니다. 개벽파를 규합하고 개벽당의 출범까지 내다봅니다. 물론 서두를 이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철학이 부재한 새 정당과 새 정치의 좌초를 이미 숱하게 목도한 터입니다. 정당보다 시급한 것이 학당입니다. 공교육 학교와 사교육 학원 사이, 학당의 새 길을 모색합니다. 공/사로 나뉘되 학교와 학원 또한 일백년 개화의 관성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응당 개벽학당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할 것입니다. 개벽사의 서술, 개벽학의 수립, 개벽파의 규합, 개벽당의 출범, 그리하여 끝내 개벽국가의 탄생을 목도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먼저 마당을 깔고 피리를 불면 재야의 인재와 강호의 고수들이 속속 모여들기를 희구합니다. 무엇보다 다른 백년의 주인공, 새 천년에 태어난 1020세대의 호응을 깊이 갈망합니다.
3. 디톡스
바야흐로 2019년입니다. 3.1운동 100주년입니다. 3.1운동부터가 ‘다시 개벽’운동이었습니다. 19세말 천하대란 속에 좌절한 동학혁명이 3.1운동의 기개로 20세기를 열어젖혔던 것입니다. 1919년에서 다시 백 년 째, ‘또 다시 개벽’, 개벽 2.0을 궁리합니다.
옥스퍼드 사전이 2018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것이 ‘Toxic’이었습니다. 깊이 공감합니다. 과연 유럽과 아시아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극서와 극동이 하나의 지구를 공유합니다. 폭염과 폭한이 유난스럽습니다. 미세먼지는 나날이 극성입니다. 지난 백년, 개화득세의 후과입니다. 적폐 중의 적폐, 19세기말 문명개화 이래 누적된 ‘개화 중독증’을 서둘러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개벽파 선언>이 그 해독제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21세기의 디톡스 운동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중독에서 해독으로, 포스트모던, 포스트 웨스트, 포스트 트루스 시대정신과도 부합합니다.
미리 오해는 피하고 싶습니다. 개벽이 개화를 능가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개화와 개벽의 대합장/대합창을 도모합니다. 서방학과 동방학을 회통한 신동학을 추구합니다. 천주와 천하와 천도가 융합하는 다시 개벽을 소망합니다. 해원상생(解寃相生), 일방의 승리가 아니라 쌍방의 조화를 탐색합니다. 지난 연말, 한해를 마감하는 술자리에서 애용했던 건배사가 하나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에 남긴 방명록 문구입니다. <한국 근대의 탄생>의 부제 ‘개화에서 개벽으로’야말로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에 딱 어울리는 화두라고 생각합니다. 맹목적 척사로 치달았던 북조선과 맹종적 개화로 내달렸던 남한이 다시 어울어지는 최선의 방편 또한 양쪽에서 공히 잊혀졌던 개벽파를 더불어 재건해가는 데 있다고 여깁니다. 2019년을 개벽파 재건의 원년으로 삼읍시다.
첫 글은 이쯤에서 닫습니다. 책에서 제기한 도전적인 내용들은 차근차근 여쭙겠습니다. 화면에서 눈을 거두고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새 해가 떠오릅니다. 개벽의 새벽이 밝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