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는 “이름짓기”가 아니라 성찰과 실천이 중요하다
윤찬영 전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대중 대통령이 1999년 8.15 경축사에서 기존에 내세웠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외에 “생산적 복지”를 새로운 국정의 기조로 선언하였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복지”가 국정기조로 선포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이후 등장하는 정부마다 “○○복지”라는 이름짓기가 이어져 왔다. 국민의 정부 당시에 우리나라는 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있던 터라 대대적인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려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미 김 대통령이 선포하였듯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국가 부도 직전의 대한민국을 살려낼 대대적인 수술의 지침이었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 몰리게 된 근본적인 원인으로 정경유착이 지목됐다. 그 핵심에 부패한 정치와 재벌의 독점적 지배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좌파든 우파든 재벌개혁을 한 목소리로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산적 복지가 선언된 것이다. 당장 복지가 필요한 민중들에게 복지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장주의자들은 복지를 낭비적으로 보아 반대의 입장을 보였기 때문에 “복지” 앞에 “생산적”이라는 강력한 제동장치를 걸어둔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이는 실로 정치 9단의 탁월한 수사(修辭, rhetoric)였다. 객관적으로 복지가 매우 필요했던 당시에 복지를 갈망하는 좌파의 입장과 오히려 그것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복지를 반대하는 우파의 입장을 동시에 두둔하는 절묘한 어휘 구사였다.
사실 생산적 복지는 거의 20년 만에 재집권한 영국 노동당 정부의 토니 블레어 수상이 선포한 “제3의 길(The 3rd Way)”을 본떠서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토니 블레어는 사회학자 기든스(A.Giddens)가 제창한 “제3의 길”을 자신의 노선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영국 복지국가를 주도해 왔던 사회민주주의 길(the 1st way)과 `70년대 말 대처 정부에서 주도해 온 신자유주의의 길(the 2nd way)을 혼합한 제3의 길은 신 노동당의 좌표로 선포된 것이었다. 신자유주의로 굴절된 사회민주주의는 당내 좌파는 물론 유럽 각국의 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제3의 길 노선을 받아들인 국민의 정부는 그것을 생산적 복지로 번역을 했던 것이다. 복지국가의 길을 가 본 적도 없고, 시장주도의 자유주의의 길을 가 본 적도 없는 우리가 중도노선으로서 제3의 길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절묘하지만 낯선 생산적 복지의 구체적인 실물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결국, 국민의 정부는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을 “생산적 복지의 꽃”이라고 포장을 하였다. 법 제9조 제5항 “조건부 수급”, 소위 “자활”이 생산적 복지의 핵심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고용시장에서 이미 배제된 사람들을 자활노동으로 몰아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에 한해서 생계급여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과거 생활보호법과 달리 “권리성 급여”라고 했던 것이다. 생산적 복지는 이미 신자유주의 백신을 투입한 체계였기 때문에 미흡한 복지였다. 그렇다고 해서 생산성이 좋았던 것도 아니어서 생산적 복지는 복지를 지지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 모두로부터 비판과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 이후 참여정부는 생산적 복지를 계승한다며 “참여복지”를 내세웠으나 핵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들과 자료를 망라해 볼 때, 참여복지는 “보편적 복지”가 핵심이었던 것 같다. MB정부는 “능동적 복지”를 내세웠으나 곧 폐기되었고, 박근혜 정부는 “맞춤형 복지”를 내세웠으나 출발부터 기초연금 파동과 증세 논란을 일으키며 사실상 무복지 내지 저복지로 일관했다. 이제 문재인 정부는 “포용적 복지”를 제창하였다. 이 이름을 듣는 순간 참으로 긴장감 떨어지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타적이거나 차별적인 것이 복지의 내용이나 성격이 될 수는 없다. 복지는 당연히 포용적이지. 그러므로 포용적 복지는 동어반복적이거나 “시원한 아이스크림” 또는 “뜨끈한 국밥” 같은 밋밋한 어휘일 뿐이다. 게다가 무엇을 포용하는지 구체성이 없다. 비정규직을 포용한다는 것인지 수도권이 아닌 지방을 포용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틀린 말이거나 무의미한 말은 아니지만 참으로 허름한 작명이다. 게다가 포용적 복지를 상징 또는 대표하는 제도가 무엇인지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그저 잡다하고 어수선한 복지 논의만 무성하다. 정부가 핵심으로 꼽는 아동수당이 그렇고, 사회서비스원도 그렇다.
이름이 중요하기는 하겠지만 그보다는 실질과 실천이 중요하다. 그것이 복지의 본질에 부합한다. 생산적 복지가 복지와 경제 두 마리 토끼를 잡았는지, 참여복지가 보편적 참여를 달성했는지 정확한 평가는 없다. 권력의 중심에서 이런 이름을 짓는 작명가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 멋진 말로 포장해서 도대체 누구를 현혹하려는 것인지? 복지국가 또는 복지정책의 노선을 포장하는 것보다는 본질과 진정성에 대해 성찰하고 집중해야 할 것이다. 유권자를 현혹시키려는 조어(造語)에 집착하는 것은 불순해 보인다. 그나마 생산적 복지는 성과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당시 시대적 문제의 본질과 해법을 지향하는 이름이었다. 이와 같은 조어법이라면 포용적 복지보다 “포용적 성장”이 백번 낫다. 성장은 경쟁적이거나 효율적인 것을 추구하니 “포용적”이라는 관형어와 짝을 이룰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복지는 어떤 성격이나 방향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시대에 대한 고민과 미래에 대한 비전보다 듣기 좋은 이름 짓기에 주력하는 것은 너무 경박하고 무책임하게 보인다. 아기가 태어난 후 이름을 지어도 늦지 않을 텐데, 우선 멋진 이름부터 지어 놓고 여기에 아이의 개성과 꿈을 맞추게 하는 것은 순서가 맞지 않는다.
현재는 저출산 고령화의 위험 시대다. 많은 문제들이 이것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문제 해결의 에너지도 이것 때문에 여의치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복지체제는 어떤 가치 또는 특성을 최우선적으로 또는 가장 강력하게 추구해야 하는가? 이것에 답을 줄 수 있는 그런 복지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포용적 복지라는 하나 마나 한 밋밋한 기조와 간판을 걸고 우물쭈물하지 말라. 이름은 천천히 짓더라도, 지금 이 시기 대한민국은 어떤 복지를 지향하고 추구해야 하는지 진정성을 가지고 간절하게 성찰하고 토론하자. 이렇게 하다보면 적절한 이름이 지어질 것이다. 제발 강호의 목소리들을 포용하기 바란다. 포용적 복지론자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