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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균’동문 재심 시작하다

화, 2015/06/30- 19:41 익명 (미확인) 에 의해 제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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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균동문 재심 시작하다 

                                       

1987610, 대한민국 곳곳은 군사독재 타도를 외치면서 참여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함성으로 가득 메워졌다. 당시 정당한 요구를 하는 시민들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부당한 법 집행으로, 죄 없는 자국의 국민을 간첩으로 몰아 구금·고문·재판에 회부하면서 그 당사자와 가족에게 큰 고통과 상처를 입혔고, 역사에 지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그리고 후유증은 아직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87년 당시 국군보안사령부와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서 조작·발표된 일본 유학생 간첩 사건이다. 이 사건의 피해자인 장의균(70 신방)동문의 간첩조작 사건에 대한 재심심문이 616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법무법인 지향의 재심심의 요청으로 진행되었다. 그 첫 심문이 7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으며 다음 심의는 721240분 서울고등법원 서관 505호에서 열릴 예정이다.

장동문은 당시 37세의 나이에 간첩이라는 낙인 속에 차디찬 감옥에서 사랑했던 가족·친구들과 떨어져 8년이란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제 2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받은 고문의 후유증과 간첩이라는 낙인은 장동문의 삶을 너무도 힘겹게 짓누르고 있다. 이제 정확한 사실을 입증하여 진실을 밝혀내고 다시는 이 땅에 치욕의 조작사건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간첩도 만들어지는 걸 아십니까?>

윤혜경(장의균 동문 부인)

국민 여러분! 한마디의 간첩신고가 국가 안보의 초석이 됩니다....”

부평에서 종각까지 출근하는 나는 매일 아침, 부천역과 역곡역 사이, 시청에서 종각역에 닿는 동안에 어김없이 방송되는 목소리를 새겨듣습니다.

국민 여러분! 간첩을 신고하시면 삼천만원의 상금을 드립니다....”

때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듣고 있는지 무심한 표정들을 살피기도 합니다.

당신은 간첩이 만들어 지는 것을 압니까? 나는 만들어진 간첩과 그 가족들을 알고 있습니다.” 커다랗게 외치는 마음 속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저녁 종각역과 부평역을 오가면서 방송을 들으며 새삼스레 공안정국이라 이름 붙여진 요즈음의 세상살이에 분노하기도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나약함에 부끄러워 체념하지 않으려 열심히 사는 많은 사람들, 건강한 우리 아이들을 떠올립니다.

 

요즈음 올림픽 일주년 기념행사를 한다는 선전이 요란합니다.

지금은 까마득히 느껴지는 올림픽 공식신발’‘올림픽 공식라면’‘올림픽 공식○○온통 올림픽 홍수 속에서 살던 때였습니다.

엄마! 북한 사람들이 오면 환영해야지? 우리는 한민족인데..” 학교에서 돌아온 국민학교 4학년 여림이가 당치않다는 듯 이야기합니다.

열 문제인 도덕 시험에서 하나 틀렸다고 했습니다. 서울 올림픽을 맞이하여 북한 공산당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문제인데 보기가 경계해야 한다.환영해야 한다 .... ....였습니다. 딸아이는 환영해야 한다 라고 했고 선생님의 정답은 번이었습니다. 선생님께 말씀드렸냐는 물음에는 고개를 흔드는 여림이에게 틀렸어도 네가 맞는 거야. 우리는 같은 민족이니까 통일이 될 거니까 환영해야지라고 했지만 감옥에 갇힌 아빠를 둔 딸아이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과 같이 살고 있는 부모의 가르침의 차이에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며 착잡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우연히 TV에서 북한을 다녀왔다는 교수의 인터뷰를 아이들과 함께 보았습니다. “엄마! 왜 저 아저씨는 북한을 다녀왔는데 TV에도 나오고 우리 아빠는 일본에서 북한이랑 친한 사람 만났다고 감옥에 있어야 해?” 아이들은 정주영씨. 박철언씨는 구속되지 않고 문익환 목사.서경원 의원, 문정현 신부, 임수경은 구속 되어야 하는지를 그렇게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간첩이 된 서경원 씨가 독일에서 만났다는 사람 중의 하나가 그 교수였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때 TV에 나왔던 교수가 또 얼마 전에는 간첩의 동조자로 신문에 나온 것을 결코 알 수가 없었습니다.

2년 전, 198794일 내 남편은 하루 저녁 사이에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모든 신문마다 5단 이상의 기사를 채우고 덧붙여 해설기사, 사설에까지 등장하고 TV에 특집으로 방송되는 등 톱뉴스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정치권 침투 사건‘. ’재야 침투 간첩 장의균‘ ‘일본 유학 중 조총련 자진포섭’ ‘대학 재학시 좌경 사상에 물들어..’ 온갖 제목이 붙여져 신문에 난 남편의 모습은 우리가 배워 온 간첩답게 흉악범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세 아이의 아버지로 여길만한 모습은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간첩사건에 꼭 있음직한 조직표에는 나도 한 몫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엄청난 간첩가족으로서의 생활이 공표된 것입니다. 이미 두 달 전에 잡혀가 이틀 전에야 구치소에서 만난 남편으로부터 안기부 마음대로 되거나 검사 마음대로 되는 사건이 아니다. 정치적 판단에 따라 이용된다. 죄가 아닌 부분을 죄로 만들어 놓고 저항할 수 없는 서류가 되더라도. TV에 나더라도, 세상을 속이려 하지 마라. 당하기 싫어서 못하고 사는 것, 역사적으로 권리를 찾아라. 아이들에게 아빠는 통일을 원하는 사람이라고 하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의 일이었지만 붉은 전사 장의균으로 방송되는 특집에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의 행동 하나 하나는 지령을 받고,, 간첩하고..,로 계속되었습니다.

두 달 전 눈가리우고 끌려가 때론 치료해 주기도하면서 고문 받고 10일이 지나서야 2시간 재우고 보안사에 있던 한 달 간 하루에 2~3시간씩 밖에 재우지 않는 동안에 그들은 내 남편을 간첩으로 연출시킨 것입니다.

장의균씨는 1970년에 서강대학교에 입학해서 1980년에 졸업을 한 조금은 일상적이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구두닦이, 넝마주이 생활을 하며 개발되기 전의 잠실에서 개미회라고 하여 20~30명의 구두닦이, 넝마주이들의 살림을 맡아 함께 살기도 하였습니다. 결혼을 하고 학교에 복학한 후 우리말,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갖고,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깊은 감동을 받아 주역, 상고사 공부 등을 하며 개마서원이라는 출판사를 만들어 단기고사, 진한국마한사 등을 펴내기도 하였습니다. 1985년에 나름대로의 결심을 하고 일본으로 가 교토대학에서 우에다 마사하끼 교수의 개인연구원으로 공부를 하면서 세 아이 아버지로 노동을 해서 돈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남과 북이 한데 모여 사는 일본에서 상고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민족의 통일에 관심을 갖고 민족의 미래를 확인하고자 일본에 있는 조총련계 대학인 조선 대학을 방문하고 통일문제를 공부하고 토론한 것이 저들에게 준 빌미의 전부입니다. 박종철 사건 이후 고양된 국민들의 의식에 도움이 되고자 정치사회연구소라는 연구소 설립과정에 참여하다가 연구소 발족 5일 전 198775일부터 갇혔습니다.

6.29선언 바로 며칠 뒤의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속이구로 알게 된 5공 말에 내 남편의 간첩으로서의 역할이 정권을 지키려는 자들에 의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2년이 지난 지금 백담사에 전 대통령을 가둔 우리 국민들은 얼마나 거짓된 것이 많았는가를 느끼기는 합니다. 그러나 분단된 땅에 살면서 공안의 이름으로 붙여진 일들에는 설마! 무언가 있었겠지라는 안이함으로 저들의 정권욕에 어두운 조작, 인간성을 말살하는 고문을 방기함으로 분단의 벽을 두텁게 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몸으로 겪은 진실을 큰소리로 외칩니다.

여러분! 간첩도 만들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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