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코리아 양국체제론>의 요지

 코리아 양국체제란 대한민국(ROK)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두 나라가 주권국가로서 서로 인정하여 공식 수교하고 평화롭게 공존, 교류, 협력하는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 공존체제이다. 코리아 양국체제는 지난 70여 년 남북 간에 쌓이고 쌓인 적대와 불신을 완화하고 해소함으로써 평화적 통일로 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경로다.

지난 70여 년 남북은 수없이 많은 ‘통일방안’을 경쟁적으로 제안해왔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통일은 멀어졌다는 역설 속에서 살아왔다. 지금까지 한국과 조선은 서로를 국가 대 국가로서 인정한 바 없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통일을 말해봐야 통일이 이뤄질 리 없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반드시 통일하자고 하니까 전쟁까지 했던 것 아닌가. 그래서 통일을 하자고 할수록 통일이 멀어지는 역설이 여태껏 발생해 왔다고 하는 것이다.

평화로운 통일로 가는 ‘제1보’가 양측이 상대를 진심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인정하는 데 있음은 굳이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은 자명한 사실이다. 국가로서 성립되어 있는 양자 간의 관계에서 그렇듯 진정에서 우러난 실제적인 인정이란 서로를 정당한 주권국가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서로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각자의 내부에서 상대를 부정하고 적대했던 심리와 제도가 바뀌기 시작한다. 그래야 편지 한 통 오가는 데서 시작해서, 전화가 오가고, 사람이 오가고, 그리고 마음이 오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평화로운 통일로 가는 ‘제1보’이고, 이것이 이루어지는 상태가 코리아 양국체제다.

그러나 지난 70여 년 동안 그 ‘제1보’는 한 번도 제대로 떼어지지 못했다. 첫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하면서 내달리고 도약하기를 꿈꾸는 온갖 화려한 통일안들이 난무해왔다. 코리아 양국체제는 여태껏 미뤄온 그 첫걸음을 제대로 분명하게 내딛자는 것이다. 통일에 이르는 첫걸음이 될 양국체제가 정착되고 안정되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 첫 과정을 제대로 이수(履修)하는 데만 많은 노력과 인내와 창의력이 요구된다. 이 가장 기본적인 과정을 분명한 목표로 인식하고 그 과제의 실현을 위해 실제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 과정을 애매모호하게 남겨둔 채 2단계, 3단계로 건너뛰자는 통일안들은 말만 화려할 뿐 실효가 없다. 오히려 갈등과 불신만 키워왔다.

양국체제란 단순히 한반도에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두 국가 간에 ‘국가로서의 상호인정’이 공식적으로 이뤄지고 그러한 상호인정 관계가 안정적으로 정착되어야 비로소 양국체제라 할 수 있다. 2018년 현재 세계 157개국이 남북 두 국가를 동시에 인정하고 수교하고 있으니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세계인이 인정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한반도에 양국체제가 성립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은 전혀 아니다. 막상 남북 두 국가는 서로를 국가로서 정식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치르고 극단적으로 적대했던 두 국가가 엄혹했던 냉전 기간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은 상황 탓으로 보아 이해해본다 하더라도, 소련-동구권이 붕괴하여 미소냉전이 해소되고 1991년부터는 남북 두 나라가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음에도 그 후로도 근 30년을 서로 국가 대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지내왔다는 것은 분명 비정상이었다.

그러나 현실이 크게 변하여 이러한 비정상이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과 동년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이 연이어 열리면서 한국전쟁(Korean war)의 종전과 북미 수교가 남, 북, 미 3국의 공식 어젠다에 올랐다. 정전상태를 종식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당사자가 될 남북 두 국가가 이제 서로를 정상적인 국가로서 인정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여기에 더하여 이후 북미·북일 수교가 이뤄지는 날이 올 것인데, 그때에도 남북만은 끝내 상대를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는 채 남아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이제 코리아 양국체제가 눈앞의 현실로 성큼 다가오고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마리오트 맹점 실험을 해보았을 것이다(아래 그림).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 눈으로 그림의 십자 표시를 응시한다. 그리고 눈을 멀리 가까이 하면 어느 지점에서 검은 원이 사라져버린다. 반대로 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 눈으로 그림의 검은 원을 응시하면서 거리를 조정하다보면 어느 순간 십자가가 사라져버린다.

지금껏 코리아 남북의 대한민국(ROK)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라는 두 나라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이 꼭 그랬다. 한쪽 눈만 뜬 채 상대를 맹점 지대에 넣어놓고 서로가 멀쩡하게 존재하는 상대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헌법에는 ‘한반도’에 오직 대한민국만이 존재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에는 ‘조선반도’에 오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두 눈을 바로 뜨고 바라보면, 멀리 보든 가깝게 보든, 뒤집어 보든 바로 보든, ‘코리아’에는 엄연히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 그리하여 2019년 현재 세계 157개국이 한국(ROK)과 조선(DPRK) 두 나라를 모두 인정하여 동시 수교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남과 북 두 코리아는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세계인의 시각에서 볼 때는 매우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코리아 양국체제란 두 코리아 모두 정상적인 세계인의 시각을 갖자는 것이다.

코리아의 외눈박이 맹목은 있는 것을 없다고 우기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거꾸로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놀라운 신박을 부린다. 아직도 여전히 1980년 5월의 광주 시민항쟁 대열에 북에서 보낸 수백 명의 특수부대(소위 ‘광수’)가 있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망상 허언에 증거가 있을 리 없다. 5·18 당시 계엄사령부와 미국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맹목의 외눈박이들에게는 증거가 중요하지 않다. 필요하지도 않다. 오직 ‘그래야만 한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외눈박이 맹목의 당위가 있을 뿐이다. 존재를 부정하는 북과 연결시켜야 5·18 광주를 부정할 수 있고, 그래야 광주 시민들에 대한 피의 살육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외눈박이 맹점 놀음은 이렇게 내통하고 있다. 이러한 식의 지록위마(指鹿爲馬) 뺨치는 외눈박이 맹점 놀음으로 오랜 세월 독재체제를 정당화해왔다. 심지어 세월호 참사 항의도, 촛불집회도, 북과 연결시켜 압살하려 했던 공작들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코리아 양국체제란 외눈박이 넌센스, 기만술로 지탱해 온 독재체제, 독제심리를 영구히 종식시켜 정상체제, 정상심리가 확고히 자리 잡도록 하자는 것이다.

지난 70년 코리아 남북에 독재체제, 독재심리가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양측이 ‘내전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전 상태’란 하나의 주권, 하나의 영토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벌이는 필사의 전쟁 상태고,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절박하고 극단적인 심리 상태다. 내전 체제는 전쟁 체제고 비상 체제다. 6·25 전쟁 이후 남과 북 사이가 그랬고, 남과 북 내부가 그랬다. 이러한 상태에서 남이든 북이든 독재의 위협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내전 상태가 유지되는 한, 통일 의지와 통일 열망은 오히려 내전 격화와 독재 강화의 불쏘시개로 이용되어 왔을 뿐이다. 오늘날 코리아가 이러한 내전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다. 하나의 주권, 동일한 영토를 놓고 벌이는 필사의 전쟁상태를 끝내야 한다. 그러자면 한국과 조선 두 국가가 서로의 주권과 영토를 인정하고 공존해야 한다. 시늉이나 속임수로서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서로 상대가 자신의 영토와 주권을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해져야 한다. 그것이 코리아 양국체제다. 그때서야 통일의 길은 비로소 열린다. 하나가 되자고 하면 오히려 하나가 되자는 둘이 우선 분명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고 애당초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나가 되자고 다급하게 몰아댔던 것이 오히려 분란과 갈등을 심화시켜 왔다. 둘임을 인정해야, 하나가 되자는 노력의 진실성이 성립한다. 코리아 양국체제는 한 민족 두 나라 공존을 통해 평화적 통일에 이르는 길이다.

 

2. 상상적 대화

-지금 코리아에 평화와 공존이 정착되는 것은 코리아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사적인 문명전환과도 깊게 맞물려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코리아의 남과 북, 대한민국(ROK)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이 두 나라가 세계 앞에 큰 책임감을 가지고 코리아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갈 큰 비전을 품어야 할 때입니다.

한국과 조선 모두 유엔 회원국인데요, 그 192개 회원국 중에서도 한 민족이 이루고 있는 이 두 나라의 관계는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두 나라는 1991년 유엔에 회원국으로 동시가입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이후 30년 동안 서로 수교하지 못하고 지내왔습니다. 1950년에는 큰 전쟁을 했고, 이후로도 시종일관 적대해 왔지요. 1991년 유엔동시가입하고 <남북기본합의서>도 교환하면서 이제 두 코리아도 과거 동서독처럼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으려나 했는데, 그 이후로도 또다시 적대의 함정에 휘말려 들어가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세계인들의 시각에서는 이해가 잘 안 되고 답답했던 겁니다. 저 사람들은 말로는 오랜 역사를 공유하는 똑같은 코리안이라고 하면서 왜 저럴까. 그러다가 2018년 연이어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니까 생각이 바뀌고 있어요. 아, 저 사람들이 자기 문제 해결의 의지가 있기는 하구나. 이제 정말 코리안들이 무얼 제대로 해보려나. 이런 기대가 생겼어요.

이럴 때 코리아 남북이 이 지점에서 한 발 더 대담하게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주변 강대국 탓만으로 돌릴 일이 아니라 양국이 주도해서 코리아와 동아시아의 평화정착을 앞장서 이끌어가는 모습이죠. 한국과 조선 양국 간의 수교, 즉 한조수교는 이 길을 여는 획기적인 발걸음이 됩니다. 우리가 비록 전쟁을 하고 70년을 적대해 왔지만 이제 그것을 모두 과거로 돌리고 우리 양국은 서로를 한 민족이 이룬 정당한 국가로서 상호인정한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것이죠. 세계여론의 큰 환영과 찬사를 받을 것입니다. 이럴 때 조선도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고 ‘제재’의 압박에서 벗어날 지렛대를 갖게 됩니다. 아울러 한국도 조선의 성공을 위해 국제사회에서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근거와 명분을 얻게 되지요.

-이런 상황에서 모든 문제는 결국 미국이 열쇠를 쥐고 있다, 또는 결국 북미갈등이 해결돼야 모든 문제가 풀린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사태의 일면만을 보는 것입니다. 남에도 북에도, 좌에도 우에도, 이런 심리가 남아있습니다. 그런 주장의 심리를 잘 들여다보면 미국에 대한 신화나 우상 같은 게 있습니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결국 미국이 다 알아서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굉장히 반미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미국을 실체보다 훨씬 크게 우상화하는 심리입니다. 미국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안다. 이런 식이죠. 반미(反美)가 아니라 숭미(崇美)인지도 모르겠네요. 말이 안 됩니다. 과거 미소 냉전기라면 모르겠지만 이제 더이상 그런 관점으로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세계가 크게 변하고 있는 현재와 미래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심지어 냉전시대에도 미국은 전능하다는 생각은 오류였어요. 냉전 이후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남북문제도 꼭 북미관계 개선이 앞에 가고 남북관계 개선이 뒤따라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꾸로 남북 간 신뢰의 고리를 튼튼하게 해서 북미관계 개선을 끌어갈 견인차를 만들 수 있어요. 그런 방식이 더 바람직하고 현실성이 있죠. 그러한 남북관계 개선의 획기적 고리가 한국, 조선 양국이 상대를 국가로서 인정하고 정식 수교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코리아 양국체제’의 핵심입니다. 대한민국(ROK)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간의 한조수교북미수교=조미수교에 앞서 이루어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역량이 우리에게 있어요.

이 ‘한조수교’는 세계적으로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 될 것임에 분명합니다. 세계냉전의 마지막 적대관계·폭발장치를 해체하는 역사적 장면이 될 것이니까요. 이 수교는 코리아 남북만이 아니라 미중러일 등 주변국에도 기회와 이점을 분명히 제공합니다. 이미 중국과 러시아는 그런 의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도 자국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명확히 그렇죠. 우선 코리아에서의 전쟁 위기 때문에 자국의 안보가 위협받는 위험이 사라집니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성립은 동아시아 평화체제 성립의 관건입니다. 동아시아에서 전쟁위기가 완전히 사라지면 미국과 일본 민간에는 경제적으로도 새로운 기회가 열리게 됩니다. 코리아 양국이 서로 인정하고 평화체제를 만들겠다는데 미국과 일본 국민이 왜 반대하겠어요. 그렇게 되면 내심 반대하고 싶은 양국의 냉전세력에게도 명분이 없습니다. 미국, 일본은 결코 하나가 아닙니다. 흑이냐 백이냐 이렇게 너무 단순하게 볼 필요가 없습니다. 촛불을 지지하고 평화를 성원하는 큰 힘이 미국, 일본에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힘과 연대할 수 있는 안목과 포부가 필요해요. 이렇게 되면 북미, 북일수교도 순탄하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평화보장이 불가역적임이 분명해질 때 북핵폐기 프로세스도 현실화됩니다. 거듭 말하지만, 한조수교가 북미, 북일수교에 선행할 수 있습니다.

정치 문제에서는 상징적 고리를 풀어가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1972년 동서독이 서로 국가로서 인정하면서 대표부를 교환했죠. 대표부 교환은 대사 교환보다 한 단계 높은 외교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교이되 특별한 수교였던 것이죠. ‘한 민족 두 국가(one nation, two states)’ 간의 수교이니 특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동서독 수교가 빌리 브란트 동방정책의 꽃이었어요. 그리고 1974년 미국과 동독도 수교했지요. 1972년 동서독 수교 이후 동서독 간 교류는 매우 활발해졌습니다. 그러나 양측 모두 당장의 큰 성과보다는 서로의 신뢰를 쌓아나가는 과정을 중시했죠. 그 신뢰란 상대가 우리 체제를 위협하지 않을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동서독은 서로 전쟁을 하지 않았던 나라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점진적으로 조심스럽게 진행했어요. 코리아 남북은 더욱 그렇습니다. 전쟁을 했지 않습니까. 바탕에 깔린 그 불신과 적대를 서서히 장기적으로 풀어간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세계사의 큰 방향이 이러하고, 또 촛불과 판문점·싱가포르 정상회담으로 이제 문제 해결의 큰 매듭은 일단 풀어놓았으니, 일희일비 흔들리지 말고 긴 호흡으로 차분하고 꾸준하게 한길로 나가야 합니다. 2019년 한 해만 보더라도 하노이에서 2차 북미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는 것 같으니까 금방 낙담했다가, 또 6월 30일 판문점에서 남북미 정상이 극적으로 만나니까 또 금방 당장 뭐가 다 될 것처럼 들뜨다가, 그 후로 별 뚜렷한 결과가 안 나오니까 또 불안·초조해하는 식으로 왔다갔다 흔들렸지 않습니까.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날씨(weather)는 요변덕해도 기후(climate)는 장기적 경향, 안정성이 있다고 하죠. 목표가 분명하고 흐름이 분명하니 그 방향으로 하나씩 하나씩 꾸준히 해결해가면 됩니다.

– 그런 변화를 한사코 가로막으려고 하는 세력이 있죠. 공포와 불안, 초조를 끊임없이 부추기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어디서든 당당하게 표명할 정당성이나 호소력이 없습니다. 핵전쟁까지를 불사하고 북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누가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북이 위협에서 벗어나야 북핵폐기도 동북아 비핵지대화도 본격적인 프로세스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냉전종식 이후의 세계인들은 극한의 이념적 적대와 부정의 심리상태를 더이상 공감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극단적인 이념적 적대감과 증오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세력의 미래는 닫혀 있습니다. 이제 그 좁은 상자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가 있습니다. 양국체제를 인정하고 그 위에서 경쟁하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지혜롭고 넓게 보면서 문제를 자신을 가지고 풀어갈 수 있어야 하겠어요. 진행 중인 큰 변화를 반드시 책임 있게 이뤄내겠다는 큰 포부와 결의를 코리아 남북의 모든 정치 지도자들, 정당들이 품어야 하겠습니다.

여전히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변화 없는 현상 유지에 슬그머니 몸을 둡니다. 일단 안전해 보이니까요. 코리아에서 내전적 적대 상태가 너무 오래돼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 미소 냉전체제도, 미국 일극주의도 이미 한참 흘러간 옛이야기입니다. 세계는 다극화되었고, 한국은 촛불혁명이 일어났고, 조선은 사실상의 핵보유 국가가 되었어요. 이제는 70년 적대와 고착을 풀 수 있으며, 풀어야만 하는 때입니다. 이 절호의 상황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불안과 강박, 집착에서 과감하게 빠져나와야 합니다. 과감하게 깨고 나오지 못하면 불신, 불안, 강박, 집착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무한히 제자리를 돕니다. 남과 북 두 국가의 국가로서의 상호인정이 그 강박의 고리를 깨고 나오는 첫걸음입니다. 그래야 꼬리를 무는 모든 교착의 연쇄고리가 풀립니다.

70년 간 극단적으로 적대해 왔던 두 주권이 평화적 공존의 과정을 통해 통일로 간다는 것은 토마스 홉스나 칼 슈미트가 생각했던 근대 주권관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합니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주권관이 여기서 나올 것입니다. 세계사적 차원에서 새로운 주권 모델을 코리아 남북에서부터 만들어 간다는 포부를 가져야 합니다. 먼저 남북 수뇌부 차원에서 이 경로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믿음을 공유해야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논의를 남북의 공론 기구에 논의에 부치는 데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겠지요.

그동안 남북접촉은 많았어요. 1972년 7·4공동성명 이후 160여건 가까운 남북간 합의서가 나왔지요. 그러나 지금 실효있게 남은 게 무엇입니까?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가 실종되어 버린 곡절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남북합의도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 백지가 되어버렸지요. 과연 2018년의 판문점과 평양의 공동선언은 어떻게 될까요? 들떠있을 때가 아닙니다. 같은 분단국가였던 서독과 동독은 코리아가 첫 남북접촉을 했던 1972년에 서로 국가임을 인정하면서 양국체제로 들어가 결국 통일했습니다. 그러나 코리아 남북은 1972년은 고사하고 1991년 기본합의서에서도 서로를 국가로서 인정하지 못했어요. 그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고리를 풀지 못하면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선 남북합의의 국회동의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남북 상호인정의 법적 실효성이 전면화되기 시작합니다.

남북 모두 큰 시야를 가지고 통 크게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남북수교와 양국체제는 남북 간의 ‘깊은 신뢰’를 확고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서로 상대를 위협하고 말살하지 않겠다는 확증이지요. 그런 깊은 신뢰, 근본적 신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기초죠. 아직도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런 근본적 신뢰가 단단하지 못하니 아직도 이상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2020년 6월, 합의사항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고 돌연 개성에 어렵게 설치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해버린 일이나, 동년 9월에는 한국의 실종 해수부 어업지도원이 북측 해안에서 군인들에게 사살당하는 돌발사건이 그렇습니다. 아직까지도 신뢰보다 불신, 소통보다 불통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나마 9월의 사건에 대해서는 김정은 위원장이 신속하게 사과하고 한국 정부가 이를 수용하면서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악화되는 것은 일단 막았어요. 촛불 이후의 시기임에도 민간인의 ‘불법’ 월경에 대해 남북 모두가 과거 냉전기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대응했다는 것은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상황은 언제든 남북 모두 원치 않는 방향으로 퇴행할 수 있습니다.

– 한국이 중국, 러시아, 베트남과 같은 과거의 소위 ‘적성국’들과도 수교해서 잘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같은 민족인데 코리아 남북이 그렇게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분단을 반대할수록 분단이 강화되어왔던 지난 시간을 돌이켜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단고착’의 결정적인 계기는 코리아전쟁이었습니다. 그 코리아전쟁이 왜 났습니까? 남북 모두, 좌우 모두, 분단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고 열정만 불태우다가 벌어진 일입니다. 분단극복을 강조할수록 분단고착이 강해지는 역설입니다. 이 역설, 딜레마를 이제는 반드시 끊어야죠. 이유를 알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 역설은 애초에 둘임을 부정했던 데서 시작했지요. 따라서 이 딜레마를 끊으려면 둘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어요. 하나가 되자고 하면 오히려 하나가 되자는 둘이 우선 분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쪽 모두가 각각 정당성이 있고 자신이 있어야 서로를 인정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남북이 그동안 그렇게 못해온 것은 그런 정도의 실력과 자신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어요. 2018년 한 해 동안 남북 정상이 세 차례나 정상회담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 한국과 조선 두 나라가 서로를 국가로서 인정할 만큼의 자신감과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신호였습니다. 이제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죠. 둘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평화적 통일을 하려면 둘이 먼저 제대로 서야 합니다. 그것이 ‘코리아 양국체제’죠. ‘한 민족 두 국가의 공존을 통해 평화적 통일로 가는 길’입니다. 이제 그 길이 열리고 있습니다. 반대로 둘임을 결코 부정하면서 반드시 하나가 되자고 하면 반드시 내전적 적대가 발생합니다. 막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내전적 적대를 풀어놓고 통일하자고 나서면 정말 위험합니다.

이런 사정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저는 한국과 조선의 양국체제를 통해 통일로 가는 이 길이 『노자 도덕경』 22장에 나오는 ‘곡즉전 왕즉직(曲則全 枉則直)’이라는 표현과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요. ‘휘어진 것(曲)이 온전한 것(全)이고, 굽은 것(枉)이 똑바른 것(直)’이라는 뜻이 되겠는데요, 아주 재미있는 말입니다. 우주에는 모든 것이 곡선이라고 말합니다. 질량을 가진 우주 사물의 중력 때문입니다. 그래서 휘어가는 경로가 사실은 최단경로가 됩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이 밝혀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주에서 모든 가장 빠른 길은 사실은 휘어가는 곡선의 길입니다. 항공로도 그래요. 최단 항공로를 2차원 평면으로 보면 곡선으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지금 코리아의 남과 북은 같은 민족이지만 서로 전쟁을 했던 사이입니다. 그것도 3년에 걸친 아주 참혹한 전쟁이었어요. 그 전쟁으로 한민족의 10% 이상이 죽거나 심하게 다쳤습니다. 게다가 전쟁 이후에도 70년을 솔직히 말해 별로 사이좋게 지내오지 못했지요. 그런 사이가 하루아침에 단번에 좋아지고 단숨에 합쳐질 수 있겠습니까?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과거야 어찌 되었든 지금 당장부터라도 ‘우리는 애초에 하나이니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하면 당장 통일이 될까요? 남북 모두에서 내전적 갈등과 적대만 더 키우고 말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을 감수하고 밀어부치자고 하면, 그 적대와 갈등이 증폭되고 극단화되어 남북 모두에 적대적 강경파가 크게 대두하여 득세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통일만 보려고 하면 통일이 안 보입니다. 밤하늘 아래 누워 별 하나를 골라 오래 지켜보세요. 2~3분도 안 돼 희미해지면서 사라져 버립니다. 오히려 그 별의 주변을 보아야 그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천문 관측자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입니다. 별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주변 보기, 돌아보기가 필요하다, 통일로 가기 위해서는 ‘코리아 양국체제’라는 중간역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겉보기에 휘어지고(曲) 굽은(枉) 길 같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중력이 존재하는 우주의 최단 경로는 항상 굽어있습니다. 노자와 아인슈타인이 가르쳐준 것처럼, 휘어지고 굽어 보이는 길이 가장 온전하고(全) 똑바른(直) 길입니다(곡즉전 왕즉직).

 

3. 얇은 평화를 두터운 평화로: 남북정상 공동선언의 국회 동의에 대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세차례의 남북정상회담, 두차례의 북미정상회담과 한차례의 남북미 정상 회동이 있었고, 이를 통해 남북미간 파국적 충돌이 일단 저지되었으니 취임시 표방했던 ‘한반도 운전자론’이 절반은 성공했다고 보아도 되겠다. 그러나 아직 절반의 난관이 남아있다.

2017년 8월의 한 칼럼에서 새 정부의 출범을 축하하면서 필자가 언급했듯, 성공한 운전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선 “운전의 방향과 목표가 확고하게 설정되어 있어야 일시적 장애물이 나타나거나 예상치 못한 길 막힘이 있어 잠시 우회하더라도 길을 잃지 않고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 했고, “그 목표는 ‘코리아 분단체제’를 ‘코리아 양국체제’로 전환하는 데 있다”고 했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이후 현재까지 북미 교섭이 교착상태에 있고, 올해는 (남북공동선언 합의 이행이 지지부진하다고) 개성의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다거나, 실종 월경 공무원이 피살되는 등의 돌발사태가 벌어졌다. 어렵사리 이룬 남북미 간 평화기조가 흔들리는 것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장애물’이 생긴 것이다. 이럴 때야말로 목표가 어디인지 다시금 분명히 해두어야 할 때다. 그래야 돌발사태 속에서 길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빠져버리는 일 없이 굳게 제 길을 지켜 목표에 이를 수 있다.

이 글 제목에서 ‘얇은 평화’란 금새라도 뒤집어질 개연성이 있는 가역적이고 불안정한 평화를, ‘두터운 평화’란 최소한 중기적 지속(대략 10여년)을 안정적으로 예측할 수 있고 이에 기초해 장기적 평화를 도모해볼 수 있는 불가역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상태를 말한다. 두터운 평화를 이루기 위한 요목(要目) 중 이 글은 남북정상합의에 대한 국회비준동의에 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앞서 언급했듯, 남북정상합의의 국회동의는 남북 상호인정의 법적 실효성이 전면화하는 바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남북정상합의는 6.15(2000 평양), 10.4(2007 평양), 4.27(2018 판문점), 9.10(2018 평양) 네차례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하나 지금껏 국회비준동의된 바 없다. 그 결과 그렇듯 중요한 남북합의가 두터운 평화의 매개가 되지 못하고, 늘 일시적인 평화 무드를 가져다주는 듯하다가 정치적 상황이 변하면 짧은 시기에 그 무드가 깨끗이 소실되고 마는 반복을 경험해왔다. 6.15나 10.4의 경우 당시 정부 여당은 그 정상합의를 국회동의에 부칠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그렇다면 과연 ‘촛불 이후’의 남북정상합의 경우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선 문재인 정부는 2018년 9.11. 판문점선언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그러나 20대 국회에서는 제1야당의 거부로 상임위에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시도는 하였으나 촛불 이후임에도 여전히 국회에 남북합의의 국회동의를 거부하는 세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어 2018년 10.23일 판문점-평양선언의 부속합의인 군사합의서에 대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비준한 바 있다. 이 비준에 대해 당시 제1야당은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국회동의권를 명시한) 헌법 60조를 위반한 위헌이라고 그 적법성을 공격했다. 국회에 제출한 비준안에 대해서는 비토하고, 부속합의에 대한 대통령 비준에 대해서는 국회동의를 구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것이다. 결국 당시 야당은 이리하든 저리하든 남북합의에 관한 일체의 법제화 시도를 반대하고 봉쇄하려는 입장이었다.

2020년 4.15총선 이후 과반다수당이 된 여당과 정부가 이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남북정상합의는 대한민국 국회의 동의 절차를 밟고 완전한 법적 효력을 발휘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얇고 위태로운 평화가 아니라, 두텁고 안정된 평화상태에 이를 수 있다. 주지하듯이 1민족 2국가 체제에서의 양국 관계의 법적 성격을 원만하게 정리한 사례는 이미 존재하고 널리 연구되어있다. 독일의 예다. 1972년 동서독기본조약에서 1민족 2국가의 ‘특수한 성격’에 대해 법적 정리를 한 바 있고, 1973년 서독연방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해 “(기본조약의) 형식은 국제법적 조약이지만, 그것의 특수한 내용을 볼 때는 특별한 내부관계를 규정한 조약”이라 판시했다. 1민족 2국가의 법적 2중성의 합헌성에 대한 판시였다.

그동안 반대만 하던 쪽에서도 이제 그러한 무작정 반대가 더이상 민심의 지지를 받을 수 없음을 느끼고 있을 것으로 본다. 이들도 1민족 2국가의 현실을 인정하는 새로운 길을 고려할 때가 되었다. 과거 서독 기민당이 사민당이 주도했던 1972년 동서독기본조약에 대한 국회비준동의에서 반대표를 던졌지만, 이후 현실을 인정하고 1민족 2국가 양국체제를 당론으로 수용함으로써 독일통일에 큰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