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경실련 2020년 7,8월호 – 당신과 나를 이어줄 ㅊㅊㅊ]
안녕한 날의 페미니즘
조진석 나와우리+책방이음 대표
최근 여성학과 관련한 책을 읽어본 적 있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돌이켜보니, 대학 다닐 때 ‘여성의 삶’에 대한 관심과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기 위한 노력으로 독서를 한 경험을 빼고 그 뒤에 의식적으로 읽어본 적이 없더군요. 왜냐면 ‘여성이 처한 심각한 문제’를 뉴스에서 이슈로 매일 접하지만, 경제위기와 환경오염과 지구온난화와 전쟁과 평화 같은 뉴스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알아야 할 주제 중에 이것은 빠지거나 의제상 후순위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독서의 목록에서 항목 자체가 빠졌다는 뒤늦은 깨달음을 질문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현재까지 대체로 많은 남성들의 독서 목록에 페미니즘 도서는 필독서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가 결코 짧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손희정은 『다시, 쓰는, 세계 – 페미니즘을 만든 순간들』에서 “일반적으로 페미니즘 제1물결이라고 부르는 운동은 19세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일컫는다. 그 이후로 1960~1970년대 페미니즘 제2물결을 지나 1990년 제3물결, 그리고 2010년 이후 펼쳐지고 있는 전 세계적인 페미니즘 부흥을 제4물결이라고들 평가한다”고 밝혔습니다. 또 이 책은 2015년 이후의 주요한 이슈를 꼽고 있습니다. “2015년 페미니즘에 관한 남성 평론가 K의 황당하고 무책임한 발언(
출판계에서 이전에 드문드문 대학 수업 교재와 이론서를 중심으로 나오던 페미니즘 관련 대중 도서가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근처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여성이 흉기에 찔려 살해당한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왜 남성은 일면식 없는 여성을 죽였는가? 왜 여성은 남성에게 죽어야만 했는가? 여성이라는 이유를 빼면, 설명되지 않는 상황을 맞아서 역설적으로 페미니즘을 주제로 하는 책이 이제서야 대중의 문제의식과 만나 출간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페미니즘과 여성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는 계기가, 여성 살인 사건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비극적입니다.
살인만큼 끔찍한 강간 사건을 많은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갑작스럽게 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렇지만 부부, 가족, 친구, 데이트 중에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이 실제 숱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심리적 충격이 한층 더 클 뿐 아니라 대처를 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는 담고 있습니다. 이 책 집필의 계기는 잡지 『미즈 MS.』 1982년 9월의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 조사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에 따르면, 낯선 사람에 의한 성폭력이 더 흔할 것이라는 세간의 편견과 달리 실제로는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미즈 MS.』와 국립정신건강연구소에서 미국 전역 32개 대학 총 6,100명의 남녀 대학생을 조사()하고서 놀라운 결과를 확인합니다. “여성 응답자 4명 중 1명꼴로 법적 의미의 강간 혹은 강간 미수를 경험해 본 적이 있으며, 많은 여성이 정식 데이트 상대뿐 아니라 친구나 동료로부터, 혹은 직장이나 파티, 술집, 종교 행사, 동네에서 만난 사람 등 주변의 다양한 ‘아는’ 남성들로부터 성폭력 당하고 있음(acquaintance rape)을 ‘사실’로” 밝혀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로빈 월쇼 역시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피해자입니다. 로빈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싶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친구는 자살해버리겠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남자친구가 자신으로 인해 불행해지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 그녀는, 남자친구의 요청에 따라 함께 친구의 집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친구가 없었고, 그 집에서 그녀는 남자친구의 위협 때문에 성관계를 맺습니다. 다음 날 남자친구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고, 그 뒤 1~2주 사이에 불쑥 직장 근처에 나타나곤 했습니다. 몇 주 뒤 남자친구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가 다시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고 최소한 몇 달 동안은 그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곳은 가길 꺼렸습니다. 남자친구가 나를 ‘강간’한 것을 깨닫는 데 3년이 걸렸습니다. 가해자가 과거 성관계를 한 적이 있는 전 남자친구라는 사실 때문에, 내 경험에 ‘강간’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강간은 낯선 사람에게서나 당할 수 있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3년 뒤 깨닫고 나서 피해 사실에 대한 분명한 자각은 오히려 몇 년간 저자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고, 결국 상담을 통해서 몇 년에 걸쳐 쌓인 응어리들을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십년쯤 지나서 다 극복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사건의 실태부터, 피해자들의 7가지 반응과 그 의미, 가해자들의 성 관념과 행동 양식, 10대들의 피해 경험, 사교클럽에서 벌어지는 집단 강간, 이런 강간이 발생하는 근본 원인과 사건의 영향 및 후유증, 경찰과 법원의 대응 방식과 문제점, 여성들에게 전하는 피해 예방과 사후 대처 방법, 성폭력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남성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부모와 학교와 입법자에게 주는 메시지, 생존자와 함께할 때 더 빨리 회복된다는 메시지까지, 이제까지 결코 ‘강간’이라고 불리지 않은 일이지만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적절한 지침서입니다.
2020년 7월, 21대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은 1호 법안으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를 폐지하고자 합니다. 2020년 7월, 더불어민주당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성폭력 고소장이 접수된 다음날 자살했습니다. 2020년 4월, 더불어민주당 오거돈 전 부산시장은 성추행 사건으로 자진사퇴했습니다. 2019년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및 추행, 강제 추행으로 더불어민주당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는 유죄 판결을 최종적으로 받았습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폐지를 해야 할까요? 오히려 강화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왜 강화해야 하는지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을 부제로 한 『김지은입니다』를 통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책에서 앵커가 묻습니다. “안희정 지사와 김지은씨 사이에 벌어진 일이 위계에 의한 것. 다시 말해서 권력관계를 이용한 것이라는 것, 그렇게 주장하시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저한테 안희정 지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안희정 지사님이었습니다. 수행비서는 모두가 노(No)라고 할 때, 예스(Yes)를 하는 사람이고 마지막까지 지사를 지켜야 하는 사람이라고. 저는 지사님이 얘기하시는 거에 반문할 수 없었고 늘 따라야 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가 가진 권력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기 때문에 저는 늘 수긍하고 그의 기분을 맞추고 항상 지사님 표정 하나하나 일그러지는 것까지 다 맞춰야 하는 게 수행비서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김지은씨는 답합니다.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일을 눈치 챈 사람이나 아니면 김지은씨가 이러 이러한 일이 있어 고민이다라고 털어놓은 사람이 누구누구입니까?” “실제로 SOS를 치려고 여러 번 신호를 보냈었고 눈치 챈 선배가 혹시 그런 일이 있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얘기를 했었고 그런데 아무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냥 어떠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한테 얘기해주지 않았습니다.”(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
더불어민주당 지자체장으로 인해서, 이와 같은 위력에 의한 성폭력의 피해자가 계속 생기고 있습니다. 수많은 곳에서 『김지은입니다』를 읽고서 각성하는 순간을 꿈꾸어봅니다.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을 노래하기 위해.
[당신과 나를 이어줄 ㅊㅊㅊ]은 책방이음의 조진석 대표가 추천하는 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책방이음은 시민단체 나와우리에서 비영리 공익 목적으로 운영하는 서점입니다.
2009년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문을 열었으며, 우리 사회를 밝게 만드는데 수익금을 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