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도착예정 시간은 14분. 저 버스를 타게 되면 지각을 면할까. 급행버스를 기다려야 하나 선택해야 한다. 버스를 2개월 만에 탄다. 코로나19 31번 확진자발 지역사회 확산은 출퇴근의 풍경도 우리 가족의 아침도 모두 다르게 채색되었다. 시내 중심가 도로나 상가는 인적이 드물었다.
그나마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은 마스크에 가려져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의심하는 표정이 읽혔다. ‘당신, 신천지 아니야? 할머니는 왜 버스를 타러 나오신 거지?’
처음 보는 사람들 모두 서로에게 침묵하고 속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침묵만이 감도는 버스 안은 흔한 라디오 음악 소리도 허용하지 않은 채 텅 빈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내가 확진되면 어떡하지, 내가 타고 다닌 이 524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나로 인해 감염되면 어떡하나?’ 여러 가지 복합적이고 미묘한 두려움이 엄습한다.
다음날부터 나는 카풀을 시작했다. 딸아이를 휴교령이 내려진 유치원대신 시어머니에게 맡기면서, 출근하는 발걸음은 오히려 무거웠다. 재택근무나 돌봄휴가를 써야하나? 이런 상황에서 맞벌이를 하는 집안은 어떡하나? 다들 말못할 고민과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견뎠을 것이다.
kf마스크가 주는 답답함보다 내가 숨쉬고, 출근하던 일상이 이렇게 한 순간에 통제될 수 있구나 하는 무서움과 연일 보도되는 확진자수와 동선으로 인해 본의 아닌 사이버 추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꼬리표처럼 물고 늘어지게 된다.
남편과 같이 출근하는 길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서로의 아침 전쟁을 치러낸 전우애나 오늘도 출근길에 올랐다는 패잔병의 심정이라기보다 연애 이후 이렇게 오전시간을 오래 함께했던 적이 있을까? 무슨 말로 위로나 격려를 할까? 오늘도 바쁘려나 속으로 되뇌는 말들이 마스크를 가린 입 속으로 쑥 기어 들어갔다.
차라리 버스를 타고 다닐 때가 좋았다. 아이가 자고 있을 때 도망가듯 기어 나오는 엄마의 모습이 미안하기도 하지만, 출근 길에 듣는 노래나 팟케스트가, 짧은 출근 시간에 보던 책 한 구절이 내가 오롯이 누릴 수 있는 문화적 시간이었으니까.
가족이래도 불편하고 미묘한 권력 관계랄지, 아침에 마주하는 시어머니의 짧은 인사말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워킹맘인 사회복지사인 내 존재의 문제 같기도 했다. 그게 아닌데, 밀려드는 후원물품은 몸을 계속 힘들게 하고 마음을 지치게 한다. 나만 이렇게 힘드나 울분이 생기기도 하고, 오늘도 아이를 맡기려 전전하는 동료엄마 사회복지사의 얘기를 듣다보니 같이 화가 나고 억울했다.
2개월이 지났다. 벚꽃도 지고 라일락도 져버렸다. 흩날리는 꽃눈들 사이에서 많이 울고 웃었다. 봄을 만끽하기보다 흘려보냈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면 코로나19도 없어지고, 다들 건강을 되찾을까 생각이 많아지니 잠도 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이렇게 지난날을 회상할 겨를이 생겼지, 당시에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눈코 뜰 새 없었다. 우예 안되겠습니까? 연대나 우정 아니겠습니까? 구수한 사투리로 위로하는 유명 연예인의 화상 채팅으로 잠깐 웃어보기도 한다.
세상은 한동안 음률을 잃은 것처럼 조용했다. 조용하니, 작은 것들의 외침이 들리기 시작했다. 고라니가 도로를 뛰어 놀고, 해파리가 운하를 거슬러왔다고 한다. 마스크 없는 얼굴을 까먹을 정도로 그전으로 돌아가기 힘들겠지만, 음악가들이 방구석 콘서트를 열고 방세가 밀린 사람들이 무지개 깃발로 저항한다. 인간들은 다시 일상을 찾으려는 자구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할머니 집에 가는 게 지겨운지 유치원 유치원 노래를 부른다. 신청만 해뒀던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잠시 생각에 빠진다. 잠든 아이의 얼굴은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다시 버스에 오른다. 창밖의 풍경은 초록으로 뒤덮이고, 사람들의 마스크도 kf에서 덴탈, 천마스크로 변했다. 여전히 서로 말이 없지만, 간혹 음악소리가 열린 창문으로 흘러 들어온다. 절망을 춤을 추며 견디듯이 오늘도 내일을 희망해보며 버스에 오른다. 점심은 뭘로 할까 생각하면서.
– 토란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