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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꿈꾸는 수인(1)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1. 유폐된 황제의 사상

영하 20도라고 한다. 감방은 영락없이 냉동고다. 천장만 덩실하게 높은 이 비좁은 감방에 세 사람이 웅크리고 앉았는데, 입김이 유리창에 서려 하늘로 통하는 유일한 창구는 하얗게 두툼하게 얼어붙었다. 조금 받아놓은 물도 돌덩이처럼 얼어붙었다. 방 한구석에 놓인 변기통도 얼어붙었다.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이 따끔따끔하다. 콧속의 털이 얼었다가 녹았다가 하는 것이다. 자연은 그 모든 위세를 총동원해서 만상을 얼어 붙이려고 기를 쓰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기적처럼 얼지 않고 있다.(, 한길사 판)

 

이병주(왼쪽)가 1963년 12월16일 2년7개월의 수감생활 후 특사를 받아 부산교도소에서 출소할 때 모습. 이권기 경성대 일문과 명예교수 제공

 

나림(那林) 이병주(李炳注 : 1921.3.16.~1992.4.3.)의 인문학기행은 영하 20도 이하의 겨울날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종로 3가나 청량리 588처럼 지번으로만 서울의 우울을 상정했던 이곳은 조선시대에 전옥서(典獄署)였다가 감옥서(監獄署)로 바뀐(1895) 뒤, 일제에 의하여 사실상 법 집행권을 약탈(1906, 조선통감부 설치)당한 후에 경성감옥(京城監獄)이란 명칭 아래 독립운동가들을 수감시킬 목적으로 지어진 곳(1908.10.21. 개소)이다. 민족사적 수난의 상징인 경성감옥은 서대문형무소(1920), 경성형무소(1946), 서울형무소(1950), 서울교도소(1961), 서울구치소(1967)로 화류계 여성 이름 바꾸듯이 변성명하다가 1987년 11월 15일 의왕으로 이전함으로써 대부분의 건물이 허물어지고 지금은 우아하게 서대문형무소역사관(1998.11.5. 개관)이란 명칭으로 몇 동만 남아있다. 이 시설을 원형 그대로 보관했다면 실로 세계적인 명물로 유네스코문화유산 목록에 오르고도 남을 아까운 유적이건만 이를 허물어버린 군부독재나, 그런 야만적인 조치를 막지 못한 민주세력의 역량을 생각하면 마냥 울화통이 치민다. 지금도 그 일대 독립공원엘 갈때마다 입구 보도에다 이 시설을 훼손한 자들의 동팡을 깔아두고 짓밟고 지나가도록 했으면하는 울적한 심정이다. 어째서 이런 세계적인 명물을 서울시도 아닌 일개 구청에다 소속시켜 그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있을까. 그렇다고 행여 관할 서대문구청이 잘못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예산에 비해서는 너무나 잘 관리 운영하고 있지만, 깜냥도 안 되는 온갖 박물관들에 국민의 혈세가 투자되는 데 비해 너무나 푸대접을 받는다는 민족사에 대한 불공평한 처사가 안타깝다는 뜻이다.
이병주가 이곳에 투옥당했던 1961~1962년(그는 10년형을 언도받고 1962년 부산교도소로 이감, 2년 7개월 만인 1963.12.16. 출감)은 서울교도소 시절이었다.
이런 감옥에서는 “원통형으로 굳어진 사등밥(통상 가다밥 혹은 콩밥으로 호칭)이란 관명(官名)이 붙은 밥”에, “소금 속에 미이라”가 된 새우, “된장의 향기를 살큼” 풍길 뿐 “들여다보면 거울이 될 수” 있을 정도의 멀건 국물이 한끼 식사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오만하게 버티고 앉아 황제다운 품위를 지키며 젓가락질”을 하는 의 중년 사나이.
그는 이 감방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카파레 안드로메다에서 악사로 있는 동생에게 “유폐된 황제의 사상을 아는가. 그건 이카로스의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하는 사상이다”라고 쓴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가장 야만적인 시설을 갖춘 서울교도소의 감방에 갇힌 나, 이 “고독한 황제는 환각 없인 살아갈 수 없다”, 그는 “유폐된 황제의 사상”으로 무장한 채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는 만해 선사의 불교적 변증법에 도취해서 그 징역살이의 고통을 감내한다.
세상에 억울한 건 그 혼자만이 아니다. 사관 사마천도 그랬지만 천하의 명 제왕학 교재를 썼던 마키아벨리도 그랬다. 피렌체 공화정 시절에 정청 제2사무국장부터 대통령 비서까지 두루 거쳤던 그는, 추방당했던 메디치 가문이 외세(교황과 스페인)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조종, 귀국하여 재집권하자 중뿔난 죄도 없으면서 죄인으로 내몰렸다. 혹독한 날개꺾기 고문을 6회나 당한 뒤 바르젤로 감옥(현 국립미술관)에 투옥, 운좋게 간신히 풀려났으나 벌금에 파직까지 당했다.
도리없이 그는 피렌체 근교 산탄드레아의 농장으로 은둔, 거기서 을 비롯한 명저들을 쏟아냈다. 이미 5살 아래 벗 프란체스코 베토리(서신교환 때는 로마주재 피렌체 대사, 나중 프랑스 대사, 피렌체 공화국 대통령)와 2년여에 걸쳐 43통의 왕복서한을 주고받았는데, 그 사연은 실로 사마천이 사형수 임안(任安)에게 보낸 안족서(雁足書)만큼이나 절절하다.
“운명은 나를 견직물업에 밝게 해주지도, 면직물업으로 돈을 벌게 해주지도, 금융업으로 입신할 수 있게 해주지도 않았으므로, 정치를 생각하는 수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단 말일세”라고 노골적으로 호구지책을 애원하면서도 마키아벨리는 유형이나 진배없는 농막에서의 삶을 시적으로 그려준다.
“나는 시골집에 있네……여기서 나는 해가 뜨면 일어나 숲으로 가네. 그곳에서 나무를 벌채시키고 있기 때문이지.
” 두어 시간 감독 겸 작업지시를 하고는 산림 속 옹달샘물로 가서야 “비로소 나는 내 자신의 시간”을 갖는다고 했는데, 필시 목을 축이고는 나르시스처럼 그 샘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좋은 샘물이라도 그걸로는 갈증을 달랠 수 없어 “한길로 돌아서 선술집으로 가네. 거기서는 나그네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 그러다가 “식사시간이 되면, 집에 가서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이 가난한 산장과 보잘 것 없는 재산이 허용해주는 식사를 들지.
”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식단인가를 암시하는 묘사다. 그래서 영혼의 갈증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허전한 지라 이내 선술집으로 가서 “푸줏간 주인과 밀가루 장수와 두 사람의 벽돌공”과 어울려 “불한당이 되어 보낸다네. 카드와 주사위가 난무하는 동안 무수한 다툼이 벌어지고, 욕설과 폭언이 터져 나오고 생각할 수 있는 별의별 짓궂은 짓이 자행”된다.
이 대목을 읽노라면 그에게 맞춤한 밥벌이 자리라도 마련할 만한 지위에 있었던 베토리가 왜 그런 건 전혀 고려조차 않았는지 궁금해지지만, 이내 그 해답은 자동응답기처럼 튀어나온다.
어느 시대나 출세지향적인 몸보신주의자들은 험지에 빠진 동지나 벗들을 경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덕택에 마키아벨리는 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지난 2016년 가을 이태리 여행 때 험지인데도 하루를 투자하여 나는 산탄드레아의 그 농장을 찾아가봤다. 한촌이라 관광객조차 별로 찾지 않았는데, 5백여 년 전의 그 마을풍경을 상상, 유추해보니 추방자의 처량함을 느끼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 정황을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기록한다.

 

밤이 되면 집에 돌아가서 서재에 들어가는데, 들어가기 전에 흙 같은 것으로 더러워진 평상복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네.
예절을 갖춘 복장으로 정제한 다음, 옛 사람들이 있는 옛 궁전에 입궐하지. 그곳에서 나는 그들의 친절한 영접을 받고, 그 음식물, 나만을 위한 그것을 위해서 나의 삶을 점지받은 음식물을 먹는다네. 그곳에서 나는 부끄럼없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들어보곤 하지. 그들도 인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대답해 준다네.
그렇게 보내는 네 시간 동안 나는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네. 모든 고뇌를 잊고 가난도 두렵지 않게 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느끼지 않게 되고 말일세. 그들의 세계에 전신전령(全身全靈)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겠지.(시오노 나나미, , 한길사 334~335쪽. 위의 인용문도 다 이 책에서 발췌)

 

이병주는 감방에서 고독한 유폐된 황제의 꿈으로 작가가 되었지만, 마키아벨리는 일개 정신(廷臣)으로 자족하며 인문학자가 되었다.
둘 다 유폐된 상황에서 궁중을 가상무대로 삼은 것은 고난을 돌파하려는 투지의 역설적인 수사법에 불과하다. 전락한 운명을 사사로운 영욕에 억매여 고통을 감내하기보다는 우매와 범죄로 억룩진 역사에 도전하겠다는 결연함을 응고시킨 의지이기도 하다. 누구의 명령에도 굴하지 않은 채 자신의 사상적인 금자탑을 쌓고야 말겠다는 갈망이 그들로 하여금 누추한 거처를 왕궁으로 날조할 수 있도록 역사의 여신 클리오의 인허를 받은 격이다.
이 두 수인의 꿈은 그 형식이 소설이든 인문학이든 자신들처럼 핍박당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입각하는 게 자연변증적인 전개일 터인데, 이병주도 마키아벨리도 그렇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2.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이병주

마키아벨리 시대의 이태리는 르네상스적 휴머니즘의 이상으로 공공적인 선과 자유로운 공민의 공동체를 추구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추방당한 그에게 이런 사조는 공허했을 터였고, 공동체(도시국가)의 위기와 해체가 빈번한 가운데서 사람들은 점점 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표변해가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엿다.
그래서 은 “군주는 자기 백성을 결속시키고 이들이 충성을 다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잔인하다는 악평 따위는 개의치 말아야 한다”든가, “신의도 저버릴 줄 알아야 하며, 자비심을 버리고 인간미를 잃고 반종교적인 행동도 때때로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 두어야 하겠다”는 등등으로 마키아벨리즘은 석화되었다.

그래서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사람이란 정겹게 품어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짓밟아 깔아 뭉개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작은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 들지만 치명적인 피해에는 그럴 엄두도 못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가 타인에게 손상을 입히려면 복수의 두려움이 없도록 해야만 한다.(George Bull trans, The Prince, Penguin Classics, 1966, pp 37~38)

 

물론 이 대목은 극한 상황이나 점령지를 통치하는 경우에 빗대어 거론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독재체제를 두둔하는 한편 그는 외침을 당했을 때의 방어능력에서는 군주국보다는 민주체제가 더 우수하다는 모순된 논리를 편다. 로마에 잔혹하게 점령당한 군주국 카르타고는 식민지화되었으나, 스파르타에 패배한 아테네는 시민들이 경험한 공화정의 자유주의 정신 때문에 결국 참주정치가 좌절되어버렸다고 주장한다.
이 모순된 마키아벨리즘은 이병주의 초기 문학에 강력하게 반영된다.
이병주 문학의 핵심은 정치 이데올로기와 국가권력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에 있다. 여기서 그는 인본주의자로서의 휴머니즘에 입각하면서 교양주의적인 양비론자의 태도를 취한다. 민족사의 비극을 소재로 삼든, 독재권력을 주제로 올리든 작가는 시종 냉소적인 양비론자의 시각으로 초월적 입장을 유지하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좌익은 순진하고 우익은 이악스럽다는 식이다.
반쪽 정부를 세운 이승만은 적당주의자, 김일성은 사람을 많이 죽인 민족반역자, 박헌영은 미군정을 연구하지 못한 무식자, 여운형은 이름 팔기를 좋아한 매명주의자, 조봉암은 대인이지만 변절자, 제주 4·3사태 등으로 동포를 많이 살해한 장택상이나 이범석은 아주 나쁜 사람, 이런 식으로 그의 인문학적인 가치관은 판관 포청천처럼 날선 도끼가 역사의 도마 위에서 번득인다. 이런 가운데서도 중반기까지 실록 대하소설로 분류되는 한국현대사를 다룬 일련의 작품들( 등)은 시종 마키아벨리즘적인 가치관으로 역사를 재단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승만에 대하여 가장 호의적이며 이념적인 밀착도를 지닌 작가는 이병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단죄하면서 이렇게 역사의 법정으로 몰아세운다.
“들먹여볼까요? 보도연맹학살사건, 거창 양민학살사건, 방위군사건, 중석불사건, 부산에서의 개헌파동, 그리고 (중략) 통일할 능력도 없거니와 민주주의를 제대로 할 성의도 없고 국민을 사랑할 줄도 위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낙인” 찍힌 것으로 한 등장인물은 말한다.() 박헌영으로부터 “수백 년 묵은 여우”(이병주, )라는 별명이 붙은 이승만은 왕이 될
태몽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하도 들어서 대통령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것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미군정 안에서도 “파시즘보다도 한 2세기 쯤 먼저 태어났어야 할 인물”이란 평가와 함께 왕조를 지향하는 성향 때문에 “부르봉”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활한 이승만/융통성 없는 김구/포용력 없는 박헌영”이라는 형용구처럼 8·15 직후 정치인 중 이승만만이 마키아벨리즘의 정치술수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고 이병주는 평가한다.
“2차대전 이후 소련 블록으로 들어간 나라는 조만간 공산국가로 될 것이고, 미국 블록으로 들어간 나라는 자본제 국가가 되고 말 것”이라는 현실정치론()은 지금은 상식이 되었지만 8·15 당시에는 좌우익 최고 이론가들도 꼭 집어서 이처럼 단정 짓지 못했던 게 대미 인식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런 대목은 이병주가 한국전쟁 이후에 역사를 재점검하면서 낸 결과물이지만 8·15 직후에는 그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아, 동편 바다 왼-끝의 대륙에서 오는 벗이여!”라며, “이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는 연합군이야!/ 정의는, 아 정의는 아직도 우리들의 동지로구나”라고 감격하던 「연합군 입성 환영의 노래」(1945.8.20.)를 외쳤던 오장환 시인은 불과 넉 달 뒤인 12월에는 「가거라 벗이여- 흑인 병사 엘 에스 뿌라운에게」에서 “그대 내어친 발길/ 이 길을 똑바른 싸흠의 길로 듸듸라”라며 내친다. GHQ(도쿄 연합군최고사령부의 통칭인 General Headquarters의 약자)는 일본 점령 통치에서 폈던 정치적인 관용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점령 초기부터 반소 친미정권의 수립이란 제국주의적인 의도를 분명히 강압하며 민족독립사상을 탈색시키고 친일친미세력에게 유리하도록 정치기반을 조성했지만 그 마수의 정체를 몰랐거나 알고도 일말의 기대와 화해를 위해 유연했음을 숨길 수 없다.
가장 비판적이어야 할 조선공산당은 ‘8월테제’에서 미국을 진보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했기에 당 기관지 에서 미군정 비판기사가 처음 등장한 게 1946년 4월 2일이었다. 미군과 일본군 헌병의 차이는 키가 더 크다는 것뿐이라는 농담과 미군정이 일제 때보다 못하다는 여론이 팽배할 때였는데도 말이다.
조선정판사사건(1946.5) 이후에야 공산당은 신전술(7월)로 전환했지만 여전히 미군정과 미소공동위원회(한반도 분할을 위한 국제정치쇼!)에 기대를 걸고 일방적인 구애를 계속했다. 당대의 최고 이론가의 하나였던 이강국은 (조선인민보사 후생부. 1946년판을 범우사에서 2013. 재출간)에서 “군정은 모름지기 우리의 완전독립을 후원할 것”이고, 하지 준장은 “실로 조선민족의 은인이며 민주주의의 사도”라고 했다. 백남운은 (는 신건사, 1946, 은 민족문화연구소, 1947 출간된 것인데, 범우사에서 합쳐서 으로 2007 재출간)에서 미국의 경제원조를 ‘남조선 단독 조치설’과 결부시켜 경계하는 수준이었다. 박헌영이 대미 강경노선으로 선회한 건 자신에 대한 체포령(1946.9.7.) 이후였고, 그는 여기에 정치적인 대안보다는 감정적인 조처로 많은 희생을 초래했다.
외신 기자들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방해하러 왔다거나 러시아의 한반도 우위권을 막는게 미국의 목적이라는 설까지 흉흉한 가운데, 미 육군성의 해외기지 설치 예산문제까지 구체적으로 보도(1946.6)했는데도 여운형조차도 “풍설일 게고 불가능하도다”라고 논평할 정도로 태연한 척했다.
그러니 6·25 같은 비극을 막을 수 없었을 터였다. 오늘이라고 뭐가 다를까?
미국(과 소련)을 정확하게 비판하며 민족적인 비극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한 논객은 오기영을 비롯한 민족적 양심세력과 젊은 소수 문학인들이었다.
하기야 레닌의 이 인정식의 번역으로 출간된 것이 1946년 3월이었는데, 이 명저는 레닌이 1916년 봄 취리히에서 집필한 것으로 원제는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평이한 개설’이다. 미국이 스페인의 식민지인 쿠바와 태평양 일대 및 필리핀을 탈취하려는 노골적인 야욕으로 미서전쟁(1898)과, 영국이 남아프리카 점령을 위해 야기한 남아전쟁(1899~1902)이 제국주의에 대한 연구의 절실성을 제고한데다가, 제1차대전 전후의 제2인터네셔널 내부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전쟁 지지냐, 국제평화냐는 치열한 논쟁 등이 집필 배경이었다. 조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독일이 남의 나라 침략전쟁을 지지해도 좋다는 주장과, 어떤 침략전쟁도 반대라는 논쟁을 종식시키고자 레닌은 제국주의의 정체를 밝혀내려고 부심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국내의 검열 때문에 주로 독점자본에 의한 경제적 침략에 치중하여 독점은 식민지에서 형성된다는 입장에서 썼기에 이후 지구에서 횡행하고 있는 기상천외의 제국주의의 잔혹성과 교묘한 직간접적인 침략 양상은 피했다.
21세기의 레닌이 등장한다면 오늘의 신출귀몰하는 미 제국주의의 진상을 까발려 줄 수 있으려나? 진보적인 정치학자들이 적지도 않건만 아직까지 미국의 정체를 알기 쉽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줄 만한 책 한 권 없다는 게 부끄럽다.
지금도 이런 판이니 당시야 어땠겠는가. 이런 갑갑한 정세였던 지라 작가 이병주는 아예 터놓고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다. 세계에서 가장 끈덕진 나라다. 미국은 지길 싫어하는 나라다. 미국은 언제든 전쟁을 필요로 하는 나라다”()라는 논리의 연장선에서 남한에서의 민족운동 전체를 비관적으로 썼다. 이 작가는 그런 미국에다 줄을 댄 이승만의 선견성을 적극 지지하는데, 그의 집권 이유로는 무엇보다 마키아벨리즘적인 원숙성에서 찾고 있다.
“정세를 이용하는 영리함”의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정세를 만들어 나가는 용기”()를 가진 인물이라는 평가는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이승만의 참모습을 드러낸 표현이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에서 이병주는 8·15 직후의 많은 암살사건조차도 “이승만 씨가 직접 조종한 것은 아닌” 다만 “과잉충성하는 놈들이 이승만의 의중을 대강 짐작하고 저지른 노릇”으로 관대하게 풀이()해주며 그의 피 묻은 추악한 손을 씻어주고자 진력한다. 바로 이병주 소설의 한계다.
이승만의 마키아벨리즘이 집권 중 단연 돋보이게 빛을 낸 장면으로 이병주는 농지개혁을 들었는데, 는 이를 극명하게 묘사해준다. 농지개혁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조병옥 등과는 달리 이승만은 “농지개혁은 이떤 일이 있어도 서둘러야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이유인즉 “공산당에게 농민을 선동하는 미끼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한민당의 세력 기반(지주층)을 없애버리는 좋은 방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인 대업을 위해 초대 농림부장관에 조봉암을 앉혔는데, 그야말로 이 과업에는 적격이었을 터라 “조봉암이 빨갱이의 본색을 드러낼 요량”으로 임무를 멋지게 수행했다. 그것까지도 염두에 둔 이 늙은 여우는 농지개혁으로 인기를 얻을 “조봉암 농림부장관을 치워버려야겠다는 결심도 동시”에 하는 것으로 이병주는 그려준다.
비판하며 지지한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이 무렵 이병주 자신의 역사의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서당, 1991)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세 전직 대통령을 다루면서, 「이승만 편-카리스마와 마키아벨리즘의 화신」에서는 역사적인 거의 모든 과오를 되도록 비호, 변명해주는 입장이고, 「박정희 편-탓할 것이 있다면 그건 운명이다」에서는 안면몰수하고 사사건건 비판의 칼을 들이대는 자세며, 「전두환 편-왜 그를 시궁창에서 끌어내야 하나」에서는 이병주의 모든 글 중에서 최하급의 졸문으로 전두환을 추켜대는데, 너무나 사리도 논리도 안 맞는 억지춘향이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리어 얼굴이 뜨거워질 지경이다.
1979년 10·26 이후의 과도기 때 이병주는 손세일의 주선으로 가끔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났고, 김상현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만났다. 그러나 이 둘에게는 인색했던 찬양을 전두환에게 풍성하게 나열하게 된 계기를 잡아준 건 이동화 송지영 윤길중 고정훈 신상초 선우휘 남계희 등 민주사회주의자들이었다고 이병주는 밝힌다. 그러나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이병주의 명성은 전두환 예찬으로 곤두박질 쳤다. 왜 이 작가가 이랬을까? 이병주의 아들 이권기 교수는 박정희를 비판하기 위해서 전두환을 빗댄 것이라고 했지만 그 점만으로는 뭔가 모자란다.
더구나 (전3권, 자작나무숲, 2017)에는 이병주에 대한 언급이 장황하게 나오는데, 그 흑막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미궁이지만 설상가상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이병주를 높이 평가하고 널리 읽히기를 바라는 까닭은 박정희 신화에 대한 가장 신뢰할 만한 정보와 재미있는 기록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동시대의 독립운동가인 김구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가장 인색할 지경인데, 이건 필시 학병으로 중국 체험자로서의 감성도 작용했을 것이다. 학병으로 중국 대륙 체험을 한 이병주로서는 상하이 임정의 영광과 오욕을 동시에 들었을 터지만, 이승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김구와 비교하면 불리하기 때문에 박헌영과 대비시키기를 즐겼다.
박헌영에 대한 이병주의 입장은 너무나 단호하고 신랄하다. 영웅이기엔 “미학이 방해를 하는 것이다”라는 부정적인 수준을 넘어 냉대의 시각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그의 항일경력에 대해서는 이승만 노선의 지지자인 이병주조차도 “공산당이 일제와 싸운 그 공적은 박당수, 아니 박헌영 선생이 몸소 증명하고 있지 않소”라는 이승만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냉대는 여전하다.
작가는 그 특유의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여 이승만의 정치적인 노회함과 박헌영의 얕은 술수를 대비시키면서 모스크바 삼상회담 문제를 둘러싸고 만났던 두 사람을 “늙은 교사 앞에 앉은 젊은 학생”으로 비유한다.() 그러면서 “한국 내의 공산주의 세력을 가장 겁내고” 있던 이승만이 박헌영과 당분간 밀월관계를 가질까도 고려했다가 실망, “불쌍한 인간! 감옥에서 자기 똥을 먹기까지 하며 양광(佯狂:거짓으로 미친 체함)을 부렸다더니 기껏 지능이 그 꼴밖에 되지 못하는군”이라는 쪽으로 판단이 내려졌다고 묘사한다. 이병주가 박헌영을 유일하게 옹호한 대목은 그가 미제의 간첩은 아니라고 한 반북적인 주장뿐이었다.
이병주가 그나마도 호의적으로 그린 인물은 암살당한 이후의 여운형이다. 그는 “언제 있을지 모르지만 남북을 털어놓고 투표로써 하나의 지도자를 선출하게 될 기회가 있기만 하면 여운형이 결정적인 다수표로써 선출될 것이란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고 쓰고 있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