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생태문명의 비전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반드시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가치도 그 비전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삶의 중심에 있는 가치이며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일의 핵심이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아름다움을 자기 철학의 중심에 두었다. 그는 관계적 관점에서 세계를 설명했으며 이런 관계들이 “아름다움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미적 사건들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아름다움의 생산”이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면 아름다움이라는 원리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를 견고하게 재구조화할 수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현대 서구 문명의 지배적 패러다임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이 “보는 사람의 눈”에 달린 것, 단지 의견에 그치는 판단이라고 믿게 됐다. 그래서 아름다움을 피상적이고 사소한 특성으로, “오직 피부 두께”로 거론한다. 이런 가르침은 아름다움을 공공생활에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예술세계에서는 아름다움이 줄곧 논쟁적인 주제였지만 대개는 화장품, 패션, 성 상품화, 소비자 마케팅의 영역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아름다움이 공공정책, 지방정부, 경제발전, 교육, 공공보건, 환경보호에서도 고려할 가치가 있는 주제라고 제안하는 일은 당황과 조롱 사이의 어디쯤에 있는 무미건조한 감정을 끌어낸다.

자연세계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에서도 아름다움에 대한 현대성의 편견이 그대로 유지된다. 토지이용계획을 세울 때 산책로를 만드는 것과 건물을 짓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한다면 우리는 미적 결정을 내린다. 구역설정, 쓰레기처리, 대기질과 수질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물론 우리의 도덕적 코드와 문화적 관계에는 미적 차원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움의 사소함을 확신하기 때문에 이런 결정에서 아름다움을 여러 요소 중 하나로 경시한다. 그 결과는 우리 도시와 집들이 싸고 투박하게 지어짐으로써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 경험을 퇴화시키는 비타협적 법칙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생태적 패러다임의 본질이다

사실 아름다움은 생태적 패러다임의 본질이다. 아름다움은 현대 산업기술 자본주의 세계관의 핵심에 도전해 생명을 부정하는 원리와 가정을 소환하는 가치체계이다. 아름다움은 생명체에 내재하는 생동감과 관련이 있으며 존재들간의 관계에서 강화된다. 생명을 긍정하는 관계는 가치를 가지며 아름다움은 우리가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아름다움은 생명, 그리고 생명의 경험들과 가장 긴밀하게 연결된 가치이며 그래서 다른 존재들의 활기와 연결된 우리 자신의 활기를 북돋운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실재를 좀더 정확히 설명하는 포스트 기계론의 패러다임을 구상할 때 아름다움을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 기계론의 반생명성에 대항하기 위해 화이트헤드는 느낌의 형이상학을 제안했고 관계의 느낌을 실재의 가장 기본으로 설정했다. 느낌을 다시 도입하는 것은 기계론의 가정들과 현대사상의 경로에 대항하는 생각들을 순차적으로 끌어낸다. 느낌은 주체성을 요청하고 주체성은 자유, 새로움, 목적, 가치를 요청한다. 생명이 다시 세계로 돌아오는데 이는 생존을 위한 혼란스런 돌진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향한 궁극적 목적으로서의 회귀이다. 화이트헤드는 “아름다움, 도덕적이고 미적인 그것은 존재의 목적이다”(Cited in The Philosophy of Alfred North Whitehead, Paul Arthur Schilpp, editor (La Salle: Open Court, 1941 and 1951), p. 8)라고 썼다.

 

조직의 원리이자 목적으로서의 아름다움

이런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생각하면 예술에 국한돼온 아름다움이 확장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현대 세계에서는 공공영역에서 아름다움에 기울이는 작은 관심이 오로지 예술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공공예술 지원은 공공조각, 벽화, 간판 같은 형식적 활동에 그친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존재의 목적”으로 이해된다면 세계의 구조와 과정이 생명을 긍정하고 의도적으로 “생명의 생생함”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이끄는 비전을 제시하게 된다. 아름다움은 이런 저런 물질적 형태가 아닌, 문화적 커먼즈를 창조하는 조직 원리로서 우리의 공공영역에 다시 들어와야 하며 전반적인 삶의 실천이 돼야 한다.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사회적으로 공정한 새 패러다임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실재의 구조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새로운 형이상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오랫동안 인식해 왔다. 그러나 그들조차 지속가능성과 아름다움이 어떤 관계인지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환경에 대한 글과 함께 제시된 이미지가 아무리 우리의 마음을 열고 “이 아름다운 세계에 등을 돌리지 마시오”라고 외치도록 만들더라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아름다움의 역할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토론을 위한 시각적 자료 이상으로 활용되지 않으며 기계론과 유물론의 형이상학을 전복하는 일의 중요성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것은 아름다움이 실재가 아니거나 우리가 아름다움의 부재에서 괴로움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아름다움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도록 훈련 받아왔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조직의 원리로서 다시 도입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생태적 패러다임을 향해 움직이려는 노력을 기울여도 여전히 현대적 패러다임에 속박된다. 지속가능성이라는 목표에 접근하는 지배적 방식도 현대성에 명백하게 붙들려 있다. 지속가능성이 공공의 논의에서 견인력을 가질수록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서 거의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 기술적 혁신으로 환원된다. 탄소저감기술이 우리의 제1세계 생활양식을 유지해주면서 기후붕괴를 피하는 놀라운 가능성을 갖는 지속가능성의 성배가 되어왔다.

에너지 절약과 재생 가능한 자원기술이 기후안정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에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자신에게 내재한 활력과 모든 존재의 가치를 긍정하는, 지속가능성을 위한 보다 넓고 깊은 토대가 필요하다.

 

지속가능성, 생명에 대한 긍정, 아름다움

“지속가능성”이란 단어는 인내를 최선의 목표로 제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큰 의도가 있다. 바로 번성에 대한 관심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지구에서 끝없이 견디는가” 혹은 “우리가 어떻게 현재의 지위를 유지하는가”가 아니다. 지속가능성은 그것 자체가 목표가 되거나 에너지 절약과 재생 가능한 자원의 문제로 축소되면 안 된다.

지속가능성이란 개념의 핵심에는 가치, 그리고 무엇이 지속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공리적 질문이 있다. 그것은 (확실히 재생능력이 해답의 필수적 부분이기는 하지만) 단순한 지속을 넘어선 문제이다. 훨씬 위대한 미적-윤리적 비전이 아름다움과 선함이 융합되는 지속가능성의 실천적 작업을 제시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면 생명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살수 있는가”이며 이것은 “우리는 아름다움을 증진시키는 방식으로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도 같다. 그래서 지속가능성은 아름다움과 함께 번성하는 세계에 도달하는 실천적 지침이 된다.

아름다움을 생태문명의 점근선적 목적으로 만들 때 우리는 기계론을 유기체적 세계관으로 대체하는 일을 완성하게 된다. 아름다움을 다시 도입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정신을 만족시키고 고양시키며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의 주체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문명을 재형성할 수 없다.

 

아름다움을 실천하기

“실천(practice)”이란 단어는 영어에서 두 가지 품사-명사와 동사-로 쓰이지만 단수이며 의도적인 반복이란 특징이 있고 삶의 형태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실천은 바람이나 생각을 실용적, 기술적 활용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실천”이란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 동사 “성취하다(accomplish)”에서 왔으며 “행동에 적합한(fit for action)“, “효과적인(effective)”, “활기 있는(vigorous)” 같은 단어들과 관련이 있다.

아름다움을 단순한 “우리의 경험”이 아니라 “생명의 구조의 일부”로서 세계에 돌려주는 일은 아름다움의 실천을 우리 일상생활의 한 부분으로 만들려는 헌신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 음악에서 스즈키 메소드의 창시자인 스즈키 신이치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네가 밥을 먹는 날에만 (바이올린을) 연습하라.” 스즈키의 목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사회를 아름다움과 도덕성으로 정의되는 국가로 만들어 재건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세계관을 재형성하려면 악기를 배우는 것처럼 엄청난 연습이 요구된다는 걸 알았다. 낡은 습관을 깨고 새로운 습관을 개발하려면, 새로운 자세를 유지하는 새로운 근육을 만들려면, 인식을 정화하려면, 새로운 느낌을 표현하는 언어능력을 얻으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아름다움을 실천에 옮기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출발점으로 4가지를 제안한다.

1. 아름다움으로 이끌라

현대성은 형식과 기능의 관점을 부과했는데 오로지 이런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기능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때는 효율성(시간과 비용 모두에서)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형식이 기능에 종속될 때는 보다 큰 관계의 패턴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물질적 생산이란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이 계획이 세계의 아름다움에 어떻게 기여할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면 기능과 형식은 삶의 위대한 경제를 책임지게 될 것이다. 이 경제는 관계의 전체성과 모든 행위가 전체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규칙에 기초를 둔다. 미적 문제를 우선으로 한다는 것(관계 없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존재의 활기와 그 활기가 어떻게 전체의 활기에 기여하는지,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상호성이 핵심이다: 어두운 하늘의 별빛처럼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빛나게 한다. 화이트헤드가 든 사례는 샤르트르 대성당의 9개 문을 그린 조각작품이다: “이 조각들은 각각 아름다움을 지니면서 전체의 아름다움에 자신을 내어준다.”(Alfred North Whitehead, Adventures of Ideas (New York: The Free Press, 1933), p. 264) 아름다움으로 이끄는 것-삶을 긍정하는 관계로서 이해되는 아름다움-은 즉각 효율성과 금전적 이익을 넘어 생명체계의 활기로 관심을 확장시킨다.

서울의 1호 공공건축가인 승효상은 도시 디자인에 대한 자신의 접근법이 “재개발”보다는 “재생”이라고 설명함으로써 경제발전에서 재생으로 초점을 옮겨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다. 그의 구분은 1960년대 이후 서울에서 지배적이었던 서구 산업화 모델을 생태적이고 문화적으로 조율된 모델로 대체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승효상의 비전에 따르면 건축가들은 서울이란 장소의 독자성과 생기를 얻기 위해 서울을 둘러싼 8개의 산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는 도시를 “기억과 바람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라고 하면서 “존재하기보다 생성”하는 전체를 디자인하는 최우선 원리로서 전통 문화와 자연-기술과 건축가 개인의 육감이 아닌-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했다.(http://www.urbanista.org/issues/local-eyes/news/close-encounters-of-the-...) 세계에 존재하는 살아있음에 대한 그의 옹호(그리고 우리를 삶으로 데려가기 위한 도시 디자인에 대한 그의 헌신)는 생태문명을 형성하고 아름다움을 우리 삶의 조직 원리로 만드는 중요한 발걸음이다.

2. 느낌을 앎의 기초로 만들라

미학(aesthetics)이란 단어는 “느낀다”는 뜻이다. 어원은 그리스어인데 인식하거나 감각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반대말인 반미학(anesthetic)은 “무감각하다”는 뜻으로 감각을 무디게 만듦으로써 고통의 공포를 없애는 의학적 발전과 연관돼 대부분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친근한 단어이다.(번역자주: anesthetic은 마취제라는 뜻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느끼고 느낌을 갖는 것, 다른 사람의 느낌을 경험하는 것, 삶을 유지하는 일들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 세계관은 실재의 구조에서 근본적인 것인 느낌의 부정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느낌, 주체성, 가치는 서로 통한다. 이것은 모두 기계론의 가정에 대한 평형추이며 삶의 형이상학을 향한 주춧돌이다. 살아있는 주체들의 세계에서 세계의 전체성과 세부를 동시에 알 수 있는 것은 철저한 느낌을 통해서이다. 상호적응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느낌이고 상호적응이 가져오는 생명을 긍정하는 결과-즉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철저한 느낌을 통해서이다. “무엇이 아름다움 혹은 아름다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느낌의 형이상학에 달려있다. 그래서 아름다움의 실천은 느낌을 근본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실천이자 느낌에 의해 구성되는 전체성에 대한 수용성을 배우는 실천,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의 삶-정신을 느끼도록 자신을 훈련시키는 실천을 통해 우리의 인식이 보다 정교해지고 “언제나 우리를 둘러싼 것들을 우리의 눈이 볼 수 있고 우리의 귀가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실천이다.

3. 아름다움의 이름을 말하라

서구의 지배적 문화는 아름다움이 단지 주관적 의견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름다움을 개인적 스타일의 문제로 생각하도록 배우고 그것을 사적인 삶에 국한시켰다. 그리고 오직 합법적인 가치체계는 돈과 관련된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아름다움을 공공생활의 한 요소로 여길 때도 기껏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움의 가치를 여행객들이 쓰는 돈이나 생태적 서비스의 형식으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아름다움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간명한 대답을 할 수 없는데 당황할까 봐 걱정된 나머지 우리는 아름다움을 공공적 고려가 필요한 가치로서 언명하는 것을 자제해왔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새로 들어서는 고층호텔이나 대규모 학생기숙사 프로젝트, 대형 조립식건물의 상점을 추하다는 측면에서 반대하지 않았는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런 개발을 반대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이다.

아름다움은 세계에 있는 어떤 것, 그러나 단순히 우리의 사적 감각에 의해 구성된 것은 아닌 경험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을 검열함으로써 우리 자신에게 심각한 장애를 만들었다. 공공 영역에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부정하는 형이상학 체계에 굴복했다. 우리는 경제주의에 도전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하고 만족스러운 비경제적 가치의 형식을 스스로에게서 빼앗았다. 가장 중요하게는 아름다움에 대한 침묵을 통해 우리는 세계를 파괴하는 일의 공모자가 됐다.

우리는 문화를 형성하고 문화적 가치를 강화하는 언어의 힘을 안다. 아름다움의 실천에서 중요한 부분은 모든 구조물, 시스템, 공동체 생활을 규정하는 과정에 대한 공공의 대화에 미적 판단을 다시 도입하는 것이다.

4. 아름다움을 가르치라

우리에게는 삶의 구조를 가치로 가득 찬 관계의 문제로 이해하는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STEM 교과목-과학, 기술, 공학, 수학-에 대한 현재 교육의 선호는 우리가 세계를 그토록 심각하게 파괴하도록 이끌어온 바로 그 사고방식을 계속 껴안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 커리큘럼에 예술을 더한 STEAM 역시 이런 패러다임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모든 측면에 드러난 생명”(Alfred North Whitehead, The Aims of Education and Other Essays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repr. 1959), p. 10)을 주제로 삼고 삶의 전체성은 미적 과정, 즉 “생명의 생생함”에 기여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생명과 생명의 상호적응을 통해 가장 잘 이해된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교육이 필요하다. 아름다움 중심의 교육은 예술, 예술감상 혹은 철학적 미학을 가르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철학과 느낌에 기반한 인식론에 기초를 둔 교육이다. (전체는 부분으로 환원시킬 때 가장 잘 이해된다고 가정하는) 환원주의적 방법론에 근거한 비판적 사고를 강조하는 논리 중심의 교육과는 대조적으로, 아름다움 중심의 교육은 전체가 부분보다 크다고 간주한다. 무엇보다 이것은 “세계의 활기찬 존재함”을 가정한다. 아름다움의 학습이 우리 대학에서 탐구주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산업적 패러다임에서 생태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작업이 필요한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결론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경시와 지구의 생명을 지탱하는 서식처의 변형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 현대성의 특징인 미적, 도덕적 무관심은 자연세계의 남용과 전반적인 생명에 대한 저평가에 기여한다. 우리의 형이상학, 언어, 교육시스템, 삶의 실천에 아름다움을 다시 가져오는 것은 우리가 생태문명을 창조하는데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샌드라 B. 루바스키

노던아리조나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