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완전히 일본의 것이다. 분명 한국이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조약으로 장엄하게 서약했다. 그러나 한국은 그 자체 조약을 실시하기에는 무력하며, 스스로 중대한 이해를 갖고 있지 않은 다른 나라가, 한국인이 자신들을 위해 전혀 할 수 없는 일을 그들을 위해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조약은 한국이 스스로 잘 통치할 수 있다는 잘못된 가정에 입각한 것이었다. 한국이 어떤 의미에서든 스스로 통치한다는 게 전혀 불가능했다는 것은 이미 드러나 있었다. 일본은 한국이 다른 대국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일본은 자신의 자손들에 대한 의무를 조약상의 의무들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봤다. 그 때문에 좋은 때가 왔다고 생각했을 때 일본은 조용히 조약을 파기하고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이미 보여주었고, 나중에 독일과의 관계에서도 보여주게 되는 실무적이고 세련된 효율성으로 한국을 취했던 것이다. 시험대에 올랐을 때 조약은…전혀 소용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으며, 이보다 더한 무용지물이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범한 것을 비난하면서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하라고 촉구한 1914년 9월의 <아웃 룩> 기고문에서 한국에 관해 얘기한 부분이다. 일본의 조선침략과 식민지배를 적극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을사늑약과 러일전쟁 등을 저지른 일제의 만행을 두둔하고 재정적, 외교적으로 지원했던 루스벨트는 여기서 독일의 벨기에 침공을 비난하면서도 자신이 깊이 관여했던 일본의 조선침략과 병탄을 정당화하는, 전형적인 제국주의자들의 언설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역이기도 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미국을 영국 다음의 패권국으로 올려 놓는데 혁혁한 공헌을 한, 미국인들에게는 위대한 통치자일 수 있겠지만, 그는 조선을 나락으로 밀어넣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요 지독한 인종주의자였으며, 서구 백인의 우월성, 서양 문명 대 비서양 야만이라는, 허버트 스펜서류의 약육강식 승자독식 ‘속류 다위니즘’의 철저한 신봉자였다. 그가 일본의 조선지배를 적극 지지하고 찬양한 것은, 러시아의 중국 등 동아시아 지배를 막아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지역에서의 그들 자신의 이권을 러시아가 독점하게 내버려 둘 순 없었던 것이다. 미국은 그 점에서는 영국과 한 배를 타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인종적으로는 일본인보다 슬라브족 러시아인들이 더 우수한 것으로 봤는데, 그것은 슬라브족이 그들 앵글로색슨과 뿌리가 같은 유럽 백인계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당시 러시아의 전체주의 차르체제를 지독하게 혐오했다. 그리하여 인종적으로는 그들보다 열등한 일본이 차르 전제 치하의 러시아보다는 훨씬 낫다고 봤다. 바꿔 말하면 차르체제가 그들 앵글로색슨의 세계지배에는 일본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봤고, 일본은 그들이 손을 잡고 부려먹을 수 있는 만만한 존재로 인식했다.

그렇게 해서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식민지배하는데 중대한 기여를 했다.

1945년 여름 2차대전 막바지에 미국이 서둘러 원자폭탄을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하고 한반도를 그들 마음대로 북위 38도선으로 갈라 분단시킨 것도 러시아(소련) 때문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유럽에서 독일군을 격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소련군을, 독일 항복이 가까워짐에 따라 러시아 극동지역 및 만주 등 동북아지역에 투입하도록 스탈린에게 종용했다. 수천대의 항공기와 전차와 무기와 자동차들도 제공했다. 패전으로 향하던 일본 점령을 위한 일본 본토 침공 때 미군이 입게 될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을 줄이기 위해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소련군이 동아시아에서 또 하나의 대일본 전선을 만들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해 4월 루스벨트가 죽고 대통령직을 승계한 해리 트루먼은 7월에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하자, 소련의 대일전을 막는 쪽으로 대소 전략을 급선회해 소련군의 극동 및 동아시아 진주를 가능한 한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원폭을 갖게 된 미국에게 소련의 지원이 더는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필요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소련이 개입해 대일전 전승국이 되면 미국은 막대한 전리품을 소련과 나눠가져야 할 것이므로, 가능한 한 개입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일설에 따르면 일본의 패전이 분명해진 시기에 그가 굳이 투하하지 않아도 될 원폭을 서둘러 터뜨린 것도 소련의 대일전 참가 전에 일본의 항복선언을 얻어내 아예 소련의 대일 참전 기회 자체를 막아버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를 간파하고 있던 스탈린은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떨어진 8월 9일 자정을 기해 대기시켜 뒀던 150만 대군에 남하 명령을 내렸다. 만주와 조선, 일본 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파죽지세의 소련군 앞에서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한(의도적으로 하지 않은 측면도 있다. 그렇게 보는 쪽은 일본 대본영 참모본부가 그렇게 해서 소련과 미국을 대립시켜 일본 자신의 전략적 존재가치를 높임으로써 전후 일본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본다. 말하자면 일본 자신을 더 비싸게 팔아먹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냉전체제의 등장으로 그런 계산은 결과적으로 적중했다) 일본 관동군이 너무 빠른 속도로 무너지자 여전히 오키나와 부근에 머물러 있던 미군은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를 소련과 양분하기로 하고 38선을 그 점령경계로 그었다. 아무런 사전협의도, 한반도 주민에 대한 일말의 고려도 없이 일방적으로. 지금의 한반도 분단은 거기에서 시작됐다.

당시 소련은 일본을 독일 점령방식대로 연합국들이 나눠 점령통치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도쿄도 베를린처럼 연합국들이 분할지배하고 홋카이도를 소련이 점령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일본을 통째로 차지하고자 했던 미국은 일본은 그대로 두고 대신 한반도를 쪼개 소련과 나눠 점령했다.(소련은 대신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까지 장악했다.)

그해 9월에야 인천에 상륙한 미군은 기존 조선총독부 체제와 그 일본인 및 조선인 관리들을 그대로 온존시켰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일본을 미국 냉전전략의 동아시아 보루로 만들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9월 체결, 1952년 4월 발효)을 서둘러 체결하면서 일본의 전쟁책임에 면죄부를 주었고, 미일 안전보장조약을 동시에 체결해 주일 미군 영구주둔 근거를 확보했다. 그때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고 이후 평화체제를 구상해야 했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정작 일제의 가장 큰 피해자들인 조선(남북한)과 중국(대륙과 대만 정부)은 초청도 받지 못했고, 소련은 서명을 거부했다. 당시 존 포스터 덜레스 미 대통령 특사(나중에 국무장관)가 작성한 강화조약 초안에 한국은 대일 교전국이요 서명국 즉 연합국의 일원으로 기재돼 있었다. 초안 그대로 한국이 서명국이 됐다면 일본이 근대에 한국(조선)과 맺은 모든 불평등 조약이나 협약은 다 자동으로 불법이 되고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을 것이다. 독도문제 또한 초안에 일본이 한국에 돌려줘야 할 영토 리스트에 들어 있었으나 일본의 공작으로 나중에 일본영토로 바뀌었다가 그게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으로 봤기 때문인지 아예 리스트에서 이름 자체를 빼버렸다. 지금의 독도문제 뿌리가 거기에 있다. 미국에게 더 소중했던 일본이 집요하게 한국 배제를 요구하자 덜레스와 미국 국무부는 애초의 태도를 바꿔 일본 요구를 수용했다. 일본은 침략과 식민지배를 제대로 인정하고 사죄한 적 없으며, 강제징용과 일본군 성노예, 여자근로정신대 동원을 은폐하고 뭉갰다. 미국은 이를 알고도 묵인했다. 심지어 전후 일본 재건을 위해 일본의 전쟁 배상을 적극적으로 막았고 그렇게 해서 남긴 돈을 일본 재건에 쏟아부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분단됐고, 전쟁까지 치렀으며, 수백만이 죽었고, 그 덕에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도약했다. 1965년 한일협정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체제의 연장이었다. 이후 오늘까지 한국이 단 한 번도 일본에 대해 무역흑자를 기록한 적이 없고, 대일 무역적자가 700조원대를 넘어서게 된 것도 일본 재건 중심의 미국 전후 동아시아 질서 재편 구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일협정으로 한국은 미국의 의도대로 미일동맹체제하의 일본 엔경제권에 편입돼 일본의 전후 고도경제성장의 견인차가 됐다.

일본은 무상 3억 유상 2억이 이른바 ‘한강의 기적’의 종잣돈이 됐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위안부’문제와 최근의 강제징용 손해배상에 대한 적반하장식 태도에서 보듯 일본 근대의 토대가 됐던 조선침략과 식민지 수탈, 전후 미일동맹 중심의 약탈적 국제분업체제 등으로 누린 헤아릴 수 없는 막대한 혜택과 그로 인한 주변 민족들의 피폐와 고난에 철저히 눈을 감고 있거나 사실 자체를 은폐하며 미국 덕에 자신들이 누려온 특혜를 정당화하고 있다. 심지어 전쟁 당사국이었던 미국의 공습과 원폭투하, 그리고 북의 일본인 납치사건까지 앞세우며 극악한 가해자 일본이 아닌 가련한 피해자 일본 이미지를 세계에 각인시키는데도 성공했다. 한국 내 일부 ‘친일 종족주의’ 우익세력이 그런 일본 우익과 미국 패권주의자들 이익에 철저히 복무하며 그들에 동조하고 있다.

이런 일본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여전히 1914년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그것과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50억 달러의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하는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오만하고 일방적인 태도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트럼프와 그가 대표하는 미국 주류사회는 마치 미국이 한국이란 나라의 수호신이라도 되는 듯 여기는지 걸핏하면 주한 미군 철수나 감축을 내세우며 굴복을 강요한다. 따지고 보면 남북 분단과 무력대치라는 지금의 한반도 및 그 주변 안보상황을 창출하고 유지시켜 온 주역이 바로 미국 아닌가. 단순화해서 얘기하면, 미국은 자신들이 갈라 놓은 땅의 한쪽 당사자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분단당한 동족의 다른 한쪽을 적대국으로 상정하고 그 적대국으로부터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주둔시키고 엄청난 돈을 방위비 분담금 명목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 아닌가. 도대체 누가 누구로부터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지켜준다는 것인가. 남북을 포괄하는 한민족 전체로 우리의 시야를 넓히면, 미국이 분단당한 한쪽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군대를 주둔시키고 전시작전통제권까지 장악한 채 엄청난 돈을 요구하는 상황은 비극적일 뿐만 아니라 희극적이기도 하다. 미국인은 미국이 원초적 책임을 지고 있는 한반도 분단체제 때문에 ‘일천만 이산가족’이 아무런 항변조차 하지 못한 채 70여년 세월을 갈라져 살면서 오가지도, 말 한마디 건네지도 못하는 비극적 상황에 처해 있는 한반도 현실에 대해, 그 반인도적 반인륜적 상황에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에겐 일본이라는 미국의 동아시아 보루, 식민지적 친미 종속국가만 확보하고 있으면 그뿐인지도 모른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 직전 국방장관 등 고위관료들을 줄줄이 서울에 보내 한국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강행이 동북아시아 안보상황에 대한 잘못된 판단 또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종료 철회를 압박하고, 상원에서 결의안까지 서둘러 통과시킨 미국이 내세운 논리는, 지소미아 파기가 중국과 북을 이롭게 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미국과 일본이 한국정부를 노골적으로 협박하면서 연장시키려 한 한일간 지소미아가 결국은 중국과 북에 대적하기 위한 장치임을 공개 천명한 셈인데, 이른바 북·중·러의 북방 삼각동맹에 미일동맹이 한국까지 끌어들인 남방 삼각동맹으로 맞서겠다는 신냉전적 대결전략의 일환이다. 이는 일본을 활용해 동아시아에 적극 개입해 온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래 지금까지 변함없는 미국 동아시아 전략의 연장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얄타회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한일협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는 이 전략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늘 한반도를 희생양으로 삼아 왔다는 점이다. 한반도 영구분단을 전제로 한 미국의 지소미아 연장 압박은 동서냉전이 붕괴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이 그런 전략구도를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 패전 뒤 미국이 그 일본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점령하고 통치할 것인지 고민할 때, 존 포스터 덜레스 등이 다시 꺼내 활용한 것이 시어도어 루스벨트류의 지독한 인종주의였다. 덜레스 자신이 백인 우월성을 의심해 본 적 없는 철저한 인종주의자였다. 그들은 일본을 철저한 친미국가로 만드는데 아시아 주변 민족들에 대해 갖고 있는 일본인들의 민족적 인종적 우월감이라는 터무니없는 허위의식을 이용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것을 국가 대외정책 차원에서 적극 활용했다.

그와 관련된 얘기는 얼마전에 출간된 계간지 <황해문화>(2019년 겨울, 105호)에 실린 필자의 글로 보완하려 한다. ‘한일관계 구조와 형성, 균열, 봉합, 해체’라는 제목의 그 글을 아래에 덧붙인다. 이 글을 통해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첨단소재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 한국 배제로 시작된 한일간의 최근 갈등의 원인, 근원, 그 역사적 배경을 미국과의 관련 속에서 살펴 보려 했다.

그 글을 살펴보기 전에 잠깐 옆길로 빠져 주한 미군 얘기를 하나 덧붙이겠다.

“미국이 앞으로도 계속 세계 각지의 불안정화를 막기 위해 깊이 관여(군사 개입)해야 하나. 나는 관여해선 안 되며, 어차피 언젠가는 관여할 수 없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미래영겁 계속 부자일 리도 없고, 우리에게 (군사 개입의) 리스크가 너무 크다. 나는 오히려 아시아든 중동이든 미군이 계속 주둔하는 것이 지역의 불안정화를 초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이미 세계의 경찰관 역할을 수행할 수 없으며, 이제까지 독점해 온 세계적인 리더십을 각국이 나눠 가질 필요가 있다.”

11월 15일 <아사히신문> 13면의 ‘오피니언 & 포럼’의 큰 제목은 “떠나가는 미국”이었다. 그 면에 세 사람의 강사가 등장하는데, 위의 얘기를 한 이는 미국의 자유주의(libertarian) 싱크탱크 케이토(Cato)연구소 연구원인 트레버 스롤Trevor Thrall 조지 메이슨대 준교수다. 그 면엔 세 강사 의견과 함께 눈에 띄는 일러스트가 들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저쪽을 향해 가면서 옆쪽을 살짝 돌아보며 손을 흔드는 모습인데, 여러나라 문자들이 그의 주변에 크게 찍혀 있다. “굿바이(Good Bye)” “자이잰(再见)” “사요나라(さようなら)” “아디오스(Adiós)” 그리고 아랍어(مع السلامة) . 또 “안녕”이란 한글도 선명하게.

트레버 스롤이 말한 것처럼 미군이 “세계 각지의 불안정화를 막기 위해”, 또는 ‘부자’여서 타국에 군사 개입을 해 온 것으로 생각하진 않지만, 어쨌거나 그는 2000년대 초의 9・11 테러사태 이후 미국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5조~6조 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입한 결과 “대다수 미국인들”은 군사 개입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게 됐고 “자국이 안고 있는 많은 (국내)문제들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주장한다. 지난 20년간 미국이 전쟁에 쏟아부은 비용만 6조 4000억달러에 달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2008년 미국 대선 때 공화당 후보였던 존 매케인(지난해 8월 사망) 상원의원의 외교정책 자문 등을 역임한 또 한 사람의 강사 리처드 폰테인 Richard Fontaine 미 국가안보회의 요원은 군사 개입으로 오히려 미국의 국가 안보가 더 나빠졌다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전체 인구의 절반에 가깝다고 했다. 트레버와는 달리 리처드는 미국의 국제적 개입 지지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 미군 부분 철수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방위 분담금’을 50억달러를 내라고 한국에 요구하는 것은, 그의 대선 전략이나 이른바 장삿속 ‘딜’과도 무관하지 않겠지만, 대외 군사 개입에 대한 미국 내의 이런 부정적 여론도 상당부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트레버 스롤은 “장차 주한 미군도 주일 미군도 철수해야 한다고 본다”면서 “일본은 독자적으로 소형 핵무기를 개발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도 했다. 일본 신문과의 인터뷰였으니 그렇게 말했겠지만, 북이 핵 보유국이 되고 한국과 일본 주둔 미군이 떠나간다면 한국도 핵무기 개발 여론이 비등해질 것이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또 한 사람의 강사 쓰치야마 지쓰로土山実郎 국제안전보장학회 회장(아오야마가쿠인대 명예교수)도 “한미동맹도 흔들리기 시작”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도 그 존재이유를 잃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그런 나토를 “뇌사상태”라고 진단했다. 트레버는 일본과 한국만이 아니라 독일 등 유럽과 중동 등지의 주둔 미군 전체가 언젠가는 철수해야 한다고 본다. 그 ‘언젠가’가 먼 장래가 아니라고 그는 보는 듯하다.

아사히가 이런 특집을 한 것은 얼마전 트럼프 정권이 시리아에서 갑자기 미군을 철수시켜 손잡고 일했던 그곳 쿠르드족 독립운동세력을 졸지에 궁지에 빠뜨린 게 계기가 됐지만, 일본 내에도 지나친 대미 의존, 미군 의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최근 부쩍 고개를 들고 있는 듯하다.

글을 쓰면서 줄곧 떠올린 건, 왜 우리는 주한 미군 철수를 공개적으로 논의하지 않는 걸까, 아니 하지 못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었다. 미군의 장기 주둔이 지역의 안정화가 아니라 오히려 불안정화를 초래한다는 트레버 스롤의 지적은 그 지역에 한국만 넣고 보면 말도 안 되는 궤변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남북한 그리고 주변 동아시아 전체를 넣어 사고하면 그게 정답일 수 있다. 주한 미군은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만들고 얽히게 하면서 불필요한 대립과 분쟁을 야기하는 존재일 수 있다. 따라서 뭉뚱그려 전체 ‘한반도 문제’가 바로 미국이 만든 미국의 문제이고 주한 미군의 문제일 수 있다.

이제 <황해문화>에 게재된 글로 들어가 보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역사를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뻔히 알면서 그러는 것일까. 2019년 10월 4일 그는 임시국회 개원일에 행정 수반으로 다음과 같은 ‘소신표명 연설’을 했다.

“(일본이 한) 제안의 진전을 전 미국의 1,500만 유색인들이 주목하고 있다.”

100년 전 미국의 아프로 아메리칸(Afro-American)지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일본의 제안에 대해 그렇게 썼습니다. 1천만이나 되는 전사자를 낸 비참한 전쟁을 거쳐 어떤 세계를 만들어갈 것인가. 새로운 시대를 향한 이상, 미래를 염두에 둔 새로운 원칙으로 일본은 “인종 평등”을 제시했습니다.

전 세계에 구미의 식민지가 퍼져가고 있던 당시, 일본의 제안은 각국의 강한 반대에 부닥쳤습니다. 그러나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각국의 대표단을 앞에 두고 일본 전권대표인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는 의연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곤란한 현상 아래 있는 것은 인식하고 있지만,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이 내건 커다란 이상은 세기를 넘어 지금 국제 인권규약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기본원칙이 돼 있습니다.(<아사히신문> 10월 5일, 연설 전문 게재)

1차 세계대전 뒤인 1919년 1월 18일 파리에서 전쟁 뒤처리를 위해 열린 강화회의에 일본은 전승국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일본이 전승국이 된 것은, 영국과 맺은 동맹(영일동맹, 1902~1923년) 덕이었다. 영국이 독일이 중심이 돼 싸운 그 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했던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작전에 맞서려고 영국은 일본을 끌어들였다. 그때 일본은 참전 조건으로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중국 산둥반도와 적도 이북의 독일령 남태평양 섬들에 대한 권익을 요구했고, 비밀조약으로 그것을 확약받았다. 유럽전선에 묶인 독일로부터 그 지역 권익을 거의 그저 차지한 일본이 전승국의 일원으로 파리 강화회의에서 주창했다는 ‘인종 평등’의 실상은 물론 아베가 자랑스레 주장한 것과는 딴판이었다.

2019년 올해가 바로 3·1운동 100주년이니, 일본이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식민지배 확장에 반대하며 ‘인종 평등’을 고창했다는 그 회의 기간에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부하는 조선민족의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다. 여운형 등이 결성한 신한청년당이 김규식 등의 대표단을 파리에 보내 조선독립을 요구했고, 그해 4월에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수립됐다. 알다시피 일제는 그 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파리 강화회의는 그때도 진행중이었다. 아베가 자랑스레 얘기한 것은 그때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주도한 강화회의 국제연맹 규약의 인종평등 조항 채택 때 일본 대표가 활약을 했다는 얘기다. 그 덕에 지금 인권규약이 국제사회의 기본원칙이 됐다는 얘긴데, 한마디로 낯간지러운 얘기다. 그때 일본이 정말로 확보하고자 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그 얘기를 하려면 2차 세계대전 뒤의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얘기부터 살피는 게 좋다.

1차대전 뒤 파리 강화회의 때 일본의 동맹국으로 일본편을 들었던 영국은 2차 세계대전 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조약은 1951년 9월 체결, 1952년 4월 발효) 때, 미국이 마련한 조약 초안의 전승국(서명국) 명단에 들어 있던 한국을 삭제할 때도 일본편을 들었다.

그렇다. 한국은 원래 전승국의 일원이었다.(그럴 뻔했다.) 그때 한국이 그대로 전승국으로 강화회의에 초청받아 조약에 서명했다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한일합방’과 그 이전의 모든 조약들이 국제법상 불법이 되고 일본은 한국에 당연히 전쟁 배상을 했을 것이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합법으로 인정해 주는 대신 ‘독립축하금’이니 ‘경제협력금’ 명목의 돈 얼마 받기로 ‘공모’한 1965년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이나 12·28 ‘위안부’합의 같은 ‘거래’도 있을 수 없고, 아베 정권의 한국에 대한 첨단소재 수출규제 공세로 인한 지금의 한일 갈등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한일갈등, 꼬인 한일관계를 풀려면 이렇게 돼 온 경위를 알아야 한다, 그 역사를 알아야 ‘출구’를 찾을 수 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때 영국은 “한국이 서명국에 포함되면 일본의 식민지 통치 합법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되면 구미(유럽과 미국)의 식민지통치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이 분출될 것”이라며 한국이 서명국이 되는데 반대했다.(우쓰미 아이코内海愛子, <세카이世界> 2019년 10월호) 일본과 같은 입장일 수밖에 없었던 제국주의국가 영국은 자국의 식민지를 잃게 될까봐 한국의 조약 서명뿐만 아니라 독립 자체를 반대했다. 카이로 회담이나 얄타, 포츠담 회의 때도 그랬다. 베트남의 분단과 전쟁의 비극도 결국 프랑스가 그 비슷한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일어났고, 미국이 냉전전략 때문에 끼어들면서 커진 것 아닌가. 한국의 분단과 전쟁도 기본 골격은 그와 다를 게 없다. 1905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상호 보장해 준 미국과 일본의 암거래였듯이, 1902년 영일동맹 체결 때 영국과 일본은 인도와 조선을 두고 서로 주고받는 암거래를 했다.

1945년 생으로 교토외국어대에서 미국사를 가르친 마쓰다 다케시松田武의 <대미의존의 기원-미국의 소프트 파워 전략>(2015년, 이와나미서점)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는 대일 강화조약 교섭 과정에서 영국 총사령부의 연락사절 정치부문 대표 앨버리 개스코인과 회담하면서, 일본국민에게는 ‘앵글로 색슨 민족의 엘리트 클럽’ 정회원으로 대우받고 싶다는 강력한 바람(願望)이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지도자(덜레스)는 ‘후진국’이라거나 ‘저개발국’이라는 소리를 듣는 데에 일본국민은 과민할 정도로 격렬한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기민한 덜레스는 “일본이 공산국들보다 우수한 자유세계의 나라들과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일본인들에게 설명해서, 납득시킬 작정이었다. 그걸 위해 그는 “중국인이나 조선인(한국인), 그리고 러시아인보다 인종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자부하는 일본인의 국민감정을 이용할” 작정이었다. 덜레스는 일본인의 인종에 대한 특별한 감정과 이중기준을 충분히 이용함으로써 일본을 미국의 ‘주니어 파트너’로 서양세계가 껴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덜레스와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인종의 서열’론을 공유하고 있었다. 인종차별감정이나 제국주의관과 관련해 덜레스와 요시다 같은 보수적인 일본 엘리트들 간에는 별로 큰 차이가 없었다. ‘인종의 서열’론은 세계가 인종적으로 계층화된 다종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돼 있다는 전제 위에, 앵글로 색슨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해 보이는 일본인들의 이웃 아시아인들에 대한 멸시나 근거없는 우월감 조성엔 미국도 깊숙이 관여했다. 정병준의 <독도 1947>(돌베개, 2010년)에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 총리가 덜레스에게 건네준 비망록(‘한국과 평화조약’)이 인용돼 있다.

미국이 다가올 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서명국에 한국을 참가시키기 위해 초청할 계획이라는 사실을 시사했다. 일본정부는 미국이 다음과 같은 견지에서 이 문제를 재고해 주길 희망한다.

한국은 일본과 관련해서는 평화조약의 종결에 다라 독립을 획득하게 될 소위 ‘해방된 국가들(특별지위국)’의 하나다. 이 나라는 일본과 전쟁상태나 교전상태에 있지 않았기에 연합국으로 간주될 수 없다.

한국이 평화조약의 서명국이 된다면, 일본 내 한국 국민은 재산, 보상 등에서 연합국 국민으로서의 자신들의 권리를 획득하고 주장할 것이다. 오늘날에조차 거의 100만에 달하는 한국인 거주자 수(종전 무렵에는 거의 150만)로 인해 일본은 모든 방식의 증명할 수 없는 엄청난 요구에 압도될 것이다. 재일한국인 거주자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인종차별주의자 요시다는 역시 인종차별주의자인 덜레스에게 재일 한국인들이 ‘빨갱이’라며, 한국을 만일에 서명국(전승국)에 포함시킬 경우 최대 150만에 이르는 그 ‘빨갱이’들이 일본을 덜레스 희망하는 반공친미의 냉전 보루가 아니라 반미공산국가로 만들 것이라면서 그를 압박했다. 그때 이미 한국·일본을 포함해 미국이 지배하는 세계는 선악과 정의·불의를 가르는 기준이 진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빨갱이’냐 아니냐였다. 한국이 일본의 교전국이 아니라는 요시다의 말은 거짓이다. 한국민은 19세기 일본의 침략 이래 줄기차게 항전했다. 1919년엔 3·1운동을 일으켰고 망명정부를 수립했으며, 만주와 화북, 시베리아에서 무장투쟁을 계속하면서 일본군과 계속 싸웠다. 덜레스가 당시 조약 초안에 한국을 전승국(서명국)에 포함시킨 것은 그때 미 국무부도 ‘한국이 전승국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분개할 것’이라고 한 당시의 일반정서를 감안한 것이며, 그런 내용은 국무부 문서로도 남아 있다. 하지만 덜레스는 막판에 한국(조선)을 버리고 일본을 잡았다. 당시 한국전쟁 중이었으므로, 덜레스는 한국을 공산진영 확장에 맞서 싸우는 최전선국가로 서명국에 포함시키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일본의 강력한 반대와 영국의 일본 지지로 그 카드를 버렸다. 당시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가 강력히 항의했으나 아무 소용 없었다. 아주 버리기엔 마음이 켕겼던지 덜레스(당시 국무장관 고문, 나중에 국무장관)는 일본과 직접 교전상태에 있었던 건 아니라는 이유(요시다가 주장한 이유)로 한국에게 서명할 자격을 주진 않았으나, 그것에 대한 고려를 요청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갖고 있으니 “연합국의 일원으로 취급한다”면서 회의장 방청석 두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우쓰미 아이코) 한창 전쟁 중인 약소국, 미국의 도움 없이는 금방 소멸해 버릴 처지의 풍전등화였던 한국을, 미국은 회의 당사자가 아니라 방청객으로 밀어냈다.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배제당한 조선과 중국에서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와 배상문제는 그렇게 해서 제대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일본 보수우파를 앞세운 미일동맹이 지배한 그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이후 70여년 간 한국·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하위체제라 할 1965년 한일협정 때도 미국은 절박했던 최빈국 한국을 일본 엔경제권에 편입시키면서 ‘위안부’(일본군 성노예)와 강제노역 동원·징병 등 일본의 전쟁범죄, 식민지배와 수탈을 문제삼지 않았다.

요시다 시게루는 지금 아베 내각의 2인자라는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의 외조부다. 아베 총리의 외조부는 미국 국가정보국(CIA)이 주도한 일본 보수정당 대연합(보수합동)에 앞장서서 자민당 장기집권체제를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A급 전범자 기시 노부스케다. 지금 일본을 지배하는 그 손자들이 표방하는 정치적 지향점이 바로 그들 조부가 추구했던 세계다.

2차 세계대전 뒤 덜레스가 우생학이 유행하던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에 만연했던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사회진화론적 인종우열론을 적극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그의 1차 세계대전 때의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차대전 뒤의 파리 강화회의에 미국 대표단의 교섭위원으로 참석한 유명한 국제변호사였다. 그때 덜레스는 일본의 ‘인종 평등’ 주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파했다. 아베 총리가 미국 1,500만의 유색인종이 인종평등을 향한 일본의 분투를 응원하고 있었다고 그럴싸하게 얘기했지만, 알다시피 미국의 유색인종이 평등을 내놓고 얘기하며 싸우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1960년대 이후의 일이다. 아베가 얘기한 그 유색인종은 딱히 피부색깔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서구 열강의 침략이나 지배를 받아 수탈당하는 피억압자, 소수자, 약소민족을 가리킬 것이다. 덜레스는 그때 일본인들이 실은 그들과 같은 부류로 언급되거나 취급당하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고 혐오하면서 백인, 그 중에서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앵글로 색슨족과 동등한 대우를 백인들로부터 받고자 강렬한 열망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일본인들의 그 서양 백인 콤플렉스(열등감)를 적극 활용하면 일본을 친미 국가로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과 조선(한국), 일본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를 분열·대립시켜 조종하는 이이제이도 용이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베가 낯 두껍게 자화자찬한 파리 강화회의 때 일본의 ‘인종 평등’ 주장은 소수자, 피억압자의 해방과 평등이 아니라 바로 일본인 자신들을 백인과 동등한 인종으로 대우해 달라는 요구였다. 일본이 추구한 것은 인종차별주의 자체의 철폐가 아니라 자신들이 ‘우월적 백인 그룹’에 들어감으로서 나머지 유색인종들을 더욱 확실히 차별하기 위한(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더욱 굴절된 인종차별주의였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때 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 당시 미 국무장관은 ‘워싱턴의 늙은 너구리(능구렁이)’였던 덜레스를 대일 교섭담당관으로 임명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마니교의 선악(善惡) 2원론적 세계관의 소유자였던 덜레스는 당시 소련, 중국, 북한 등 사회주의권을 절대악으로 규정한 동서 냉전의 최전선 지휘관이 됐다. 그의 목표는 그런 ‘사회주의 절대악’을 분쇄하는 것이었고, 그 차가운 전쟁의 동아시아태평양 핵심 거점으로 일본을 육성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덜레스는 냉전에서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나라로 일본과 함께 독일을 꼽았다. 높은 공업력·기술력을 지닌 그들 나라가 소련쪽으로 기울 경우 미국은 고립되고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고 본 그는 공산주의와의 ‘성전’에서 승리의 열쇠를 쥔 나라들이 바로 독일과 일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본을 “미국의 국익과 안보에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동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나라”로 간주했다. 그 일본을 확실히 포섭할 수 있다면 한국의 전승국 지위 쯤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2차대전 패전국 독일과 일본은 졸지에 미국이 적극 육성해야 할 핵심 동맹국으로 바뀌었고 전범자들은 복귀했다. 도조 히데키 등과 함께 도쿄 스가모 감옥에 갇혀 있던 A급 전범자 기시 노부스케가 1948년 12월 23일 도조 등 7명의 A급 전범자들이 처형당한 직후 석방돼 그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당시 요시다 정권의 관방장관. 1960년대에 장수 총리가 된다)를 찾아가고 1960년 미일 안보동맹 재강화를 주도한 일본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었다. 히틀러의 나치스 잔재를 청산하는데 적극적이었던 미국은 군국일본 전범자들에겐 관대했다.

왜 미국은 전범국 일본에 관대했을까? 덜레스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1차 세계대전 뒤의 파리 강화조약 때 패전국 독일에 가혹한 청산과 배상을 강요한 전승국들의 전후처리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그 강화회의에 직접 관여했던 덜레스는 잘 알고 있었다. 무명의 히틀러가 힘을 얻고 나치스가 대중들의 열광 속에 독일과 유럽을 석권하면서 2차 세계대전을 도발한 것은 파리 강화회의 때의 독일에 대한 가혹한 징벌적 전범 청산 강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덜레스는 생각했을 것이다. 패전국 일본에 대한 그의 ‘관대’는 거기서 비롯됐고, 대일교섭 담당자로서 가부장적 천황제라는 일본적 특수성도 고려했을 것이다. 미국에게 중요했던 것은 전쟁범죄 청산 등 역사적 정의구현이 아니라 일본을 철저히 친미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일본의 자발적인 친미 예속을 유도해 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덜레스는 계산했다.

“덜레스는 일본 국민이 서양인과 동등하다고 느끼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일본은 서방의 일원으로 남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만일 우리가 그들(일본국민)을 열등한 민족으로 계속 취급한다면 (…) 그들이 갈망하고 있는 평등한 대우를 거부한다면, (대일 강화)조약은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을 것이다’ 라며 동료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 대일 강화조약 1년 전인 1950년에 덜레스는 ‘이것(일본국민을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에 실패하면 우리는 일본을 소련 진영에 내 주게 될 것이다. 왜냐면 소련이 일본국민을 평등하게 대우해 주겠다고 나설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 그는 대일 강화조약 교섭에서 일본인들의 인종적 편견을 불문에 붙이고 오히려 일본인의 인종차별관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미국의 세계전략에 이용했던 것이다. 덜레스의 도박은 나중에 미일관계의 딜레마, 즉 ‘자립하지 않는 일본에 대한 불만과 자립하는 일본에 대한 위구(危懼. 염려와 두려움)’가 돼 미국 지도자들을 괴롭히게 된다.”(<대미의존의 기원>)

지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그런 고민에 빠져 있다. 주일 미군을 위한 군사비(방위비)를 대폭 늘리지 않는 데에 대한 불만이 크지만, 만일 일본이 군비를 대폭 증강해 군사적으로 독립하게 된다면 그때는 미국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게 될 것이다.

어쨌든 덜레스를 비롯한 미국 전략가들이 일본을 영속적인 친미 예속국가로 만들기(‘소프트 피스’soft peace) 위한 필요조건을 일본의 안전을 보장하고, 일본경제에 과도한 부담이 될 정도로 전쟁배상을 청구하는 것을 차단하며, 문화관계를 확대·발전시킨다는 것으로 설정했다.

그리하여 미국은 강화조약 제14조에서 일본의 배상 의무를 최소화했다. “존립 가능한 (일본)경제를 유지하려면, 현재의 일본 자원은 일본국이 발생시킨 모든 손해 및 고통에 대한 완전한 배상을 실행하고 동시에 다른 채무를 이행하기에눈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명기했다. “여러분이 만일 배상을 기대하고 일본의 경제적 자립을 제한하고…일본의 선박을 해상에서 쫓아내고, 직물공장을 봉쇄하게 만든다면, 당신들은 오직 숙원(宿怨. 오래 묵은 원한)을 부를 뿐인 평화를 창출하는 것이며, 결국은 일본을 러시아의 세력권 내로 쫓아내게 될 것이다.” 덜레스는 일본에 대한 배상 청구를 극구 반대했다. 한국과 중국(대륙과 대만 모두)이 모두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초청받지 못한 게 일본의 배상금 지불을 줄이기 위한 미국의 계산과도 연관이 있는진 모르겠으나, 미국은 그렇게 해서 아낀 돈을 일본경제 재건에 쏟아부었다.

회의에 초청 받지도 못한 한국 중국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이 거론도 되지 않은 건 당연했다. 피해자들이 강제노동 현장에서 차별적인 저임금을 받았고 그나마 ‘저축’이란 형식으로 강제 적립한 그 돈마저 결국 돌려받지 못했으며, 연금 같은 전후 보상 혜택에서도 제외된 비극은 철저히 잊혀졌다. 그들 중 어렵게 근거 서류를 확보한 극히 일부가 청구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된 것은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이후였다. 민주화 이전 한일협정 체결의 당사자로, 한일 유착을 배경으로 정치세력화한 군사정권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약화시킬 그런 소송을 허용할 리 없었다.

그런데 그때의 강제노동 현장에는 조선과 중국 등 아시아 노동자들만 있었던 게 아니다. 일본군의 포로가 된 미국, 영국, 호주, 네덜란드 등의 병사들도 강제노동 현장에 동원됐는데 그 수가 3만 7,567명(3,415명은 사망)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그들 구미 포로들에겐 개인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강화조약에 명기(제16조)했고, 일본은 해외자산을 팔아 20만 3,599명의 포로 출신자들에게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모두 개인 배상금을 지불했다.(우쓰미 아이코) 그들 포로 감시인으로 징병당한 한국인들 다수는 일본 패전 뒤 포로 학대죄로 BC급 전범이 돼 사형당했고 그들의 일본인 상급자들은 오히려 살아남았다. 일본이나 미국은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생존자는 몇 명인지, 배상이나 보상은 받았는지 기본적인 조사조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일본국이 개별적 또는 집단적 자위의 고유 권리를 가지는 주권국임을 인정한다”는 강화조약 제5조는 강화조약과 동시에 체결된 미일 안전보장조약을 위한 것이었다.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조약으로 미국은 패전국 일본 점령통치기간에 확보했던 중요한 권리들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덜레스의 미국이 바란 것은 “우리가 원하는 장소, 원하는 기간에, 원하는 만큼의 군대(미군)를 주둔시키는 권리를 손에 넣는 것”이 그 핵심이었으며, 그들은 성공했다. 그리하여 일본은 미국의 기지국가가 됐고, 한국은 분단된 동족과 대립하면서 그 기지국가를 지키는 기지가 됐다.

19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의 기본조약 제2조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돼 있다. 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는 말을 한국쪽에선 1910년 ‘한일합병’과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은 무효 즉 불법으로 해석하고, 일본은 일본 패전 때까지는 유효 즉 합법이었던 것으로 해석한다. 그렇게 각자 해석해서 자국민들을 설득하기로 그때 합의했다. 한국 쪽 해석대로라면 을사늑약이나 합방조약 등은 모두 불법이고 한반도 점령과 식민지배도 일방적 침략이며 수탈이 된다. 따라서 일본은 그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일본 쪽 해석대로라면 일본의 한반도 점령은 합법이었으므로 배상금을 지불할 이유가 없다. 한일협정 교섭 과정에서 이른바 ‘구보다 망언’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는 한반도를 발전시킨 축복이었으며 일본의 지배 덕에 오늘날의 한국 발전도 가능했다는 그 후안무치한 식민사관 레토릭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다.

이 교묘한 절충과 더불어 한일은 무상 3억, 유상 2억달러로 합의한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청구권협정)으로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데 합의했다. 이것도 일본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한 것이 배상금이라고 주장하고, 한국은 그것은 그야말로 양국 민간의 재산문제 처리일 뿐 전쟁범죄에 대한 배상금이 아니며, 또 그 협정으로 해소된 것은 양국 정부의 그 문제에 관한 ‘외교보호권’일 뿐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리는 살아 있다고 주장한다. 이 개인청구권이 살아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도 동의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한일협정 체결로 한일간의 배상문제 등 모든 것이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며 일본 기업들에 대한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들 배상 청구소송에 원고 승소 확정판결을 내린 한국 대법원과 한국 정부를 ‘게임에서 골대를 마음대로 옮기는’ 국제법 위반이라 비난·비판을 계속하고 있는 일본 정부 쪽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골대를 자기 마음대로 옮기는 쪽은 오히려 일본 정부라고 관련 소송을 맡은 일본 변호사들도 얘기한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가 그 주장을 계속 고집하는 것은 지금까지 일본 쪽 주장이 통용돼 왔고 한국 쪽에서 정식으로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 외무성 주임분석관 출신인 사토 마사루는 길게 보면 “외교란 국력과 국력의 균형점에서 결정된다”고 주장했는데, 그가 말한 그런 ‘원리’에 따른다면 이제까지는 일본의 국력이 한국의 국력을 크게 능가했기 때문에 균형점이 일본쪽으로 훨씬 기울어진 지점에서 형성된 셈이 된다. 미국도 언제나 일본 편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한일협정을 압박했고,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며 한일의 무조건적 융합을 촉구하고 압박을 가한 것이 미국이었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정부가 ‘위안부’에 관한 “완전하고도 불가역적인” 합의에 서명한 데에도 미국의 강력한 압력이 작용했다. 그때 오바마 정부의 웬디 셔먼 국무부 정무차관이 한국과 중국을 겨냥해 과거사 문제를 현실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면서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 정리를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2016년에 체결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체결을 압박한 것도 미국이고, 한국정부의 지소미아 파기 결정에 가장 화를 낸 것도 미국이다.

한국 대법원의 확정판결은 바로 그런 관행이 잘못된 것이라고 못박은 것이며, 그 핵심 논거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배는 불법이라는 것이다. 즉 그 ‘이미 무효’는 한국 쪽 해석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이 근대에 한국과 체결한 모든 조약(협정)들은 불법 침략으로 강제한 것이며 따라서 무효라면 배상하는 게 당연하다. 예전에 어떤 정치적 거래가 이뤄졌든 식민지배나 전쟁범죄 등 ‘인도에 반하는 죄’에 대한 개인 배상 청구권은 인정돼야 한다는 건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지난 8월 ‘한국이 적인가’라는 타이틀로 발표된 일본 시민 8404명(8월 14일 현재)이 찬성, 서명한 선언도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지지했다.

일본은 1991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활동과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피해 증언 뒤 ‘고노 담화’를 통해 관과 군의 강제동원과 위안소 운영 및 학대 사실을 인정했으며, 1993년 자민당 정권이 무너진 뒤 등장한 비자민 연립정권의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도 일본의 전쟁범죄를 인정했다. 1995년엔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 ‘무라야마 담화’가 발표됐고, 1998년엔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한일 파트너십 선언, 2002년 김정일-고이즈미 준이치로 평양선언, 한일합병 100년을 맞은 2010년엔 간 나오토 총리 담화가 발표됐다. 한일은 협의를 통한 문제해결 가닥을 잡는 듯 보였다. 한국의 민주화와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가 그런 변화를 촉발하고 압박했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은 동아시아 냉전체제 연장과 미국의 중국 견제 등에 따른 신냉전의 반동적 흐름에 편승한 아베 정권의 등장과 함께 부정되고 역사는 역회전하기 시작했다.

일본 월간지 중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문예춘추(文藝春秋)> 2019년 10월호 ‘총력 특집’은 그 역회전이 어떤 지점에 도달했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일 수 있다. 그 특집의 타이틀은 ‘일한(日韓) 단절-분격과 배신의 조선반도’. “계속 엉뚱한 길에서 헤매고 있는(迷走) 문재인 정권, 이미 우호국이라 부를 수 없는 이웃나라,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도입문구를 단 그 특집의 첫 글을 기고한 수학자이자 작가 후지와라 마사히코의 글 “일본과 한국 ‘국가의 품격’”은 “문재인 정권의 무시무시한 반일 공세에선 광기마저 느낀다”며 저주에 가까운 험담을 늘어 놓고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왜곡·날조 구절들은 치졸하기까지 하다.

“지리적인 관점에서 살펴 봅시다. 조선반도는 산이 많은 지형으로, 전 국토의 75%를 산지가 차지합니다. 일본처럼 삼림자원이 풍부하다면 좋겠는데, 조선반도의 사람들은 식림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일본이 통치시대에 식림하기까지는 민둥산뿐이었습니다. 토지가 척박해서 일본이 통치시대에 농업을 근대화할 때까지 극히 낮은 생산량을 기록했습니다.” 이 나이든 수학자는 이런 환경에다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있는 지정학적 숙명 때문에 한반도는 ‘사대주의’을 생존전략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래서 “조선이 ‘주체적 국가’로 존재한 시기는 청일전쟁 결과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으로 (일본 덕에)‘독립 자주’로 인정받기까지 조선은 대부분의 기간에 중국의 속국”이었다며, 1965년 한일협정 때 일본이 준 돈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뤘지만 “한국인은 그 누구도 그것에 감사하지 않는다”고 개탄한다. 저 20세기의 저열한 식민사관을 계속 늘어 놓으면서 그는 지금의 한일관계 파탄도 이천년 이상 배양된 한국의 그런 민족감각 탓으로 돌린다. 아직도 이런 지독한 인종차별적인 생각을 하는 자가 있나 싶을 정도로 한심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놀랍게도 일본 매스미디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일본 우파들의 주장과 담론들 대세가 이런 정도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실로 충격적이다. 그들의 시선(관점)과 인식 및 지적 수준은 여전히 패전 이전 ‘대일본제국’ 시대의 그것과 다를 게 없거나 오히려 떨어진다. 일본이 총체적으로 열화(劣化)하고 있다는 우려는 일본 지식사회에서도 나오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 등 온라인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이른바 ‘넷 우익’들의 언설들을 보면 과거사에 대해 전혀 무지하거나 잘못된 역사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아베 정권이 위험한 것은 그들의 정치권력을 정점으로 일본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일본회의’ 등 우파세력이 그런 상황과 흐름을 방조하거나 적극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이 든 한국 보수우익 세력 가운데서도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이 보수우익 월간지 특집의 머릿글이 이 모양인데, 그 다음은 앞서 얘기한 사토 마사루의 “군사협정(GSOMIA) 파기, 문 정권은 외교전에서 패했다”, 마지막 글이 “문재인으로는 대한민국이 지구에서 소멸한다-지일파 엘리트가 폭로하는 반일정권의 무시무시한 참상”이다. 이 글은 국정원 간부임을 시사하는 익명의 ‘한국 정부 고관이 각오하고 털어놓는 고발’을 정리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제목부터 그렇지만 병적으로 냉전적 사고에 찌든 정체불명 우익 인사를 빙자한 전형적인 반 문재인정권 선동이다.

이 잡지는 지난 4월에도 “한일 단교, 완전 시뮬레이션”를 특집으로 꾸민 ‘특별호’를 냈다. 한일관계와 국제문제에 관한 저급한 인식 수준은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다. 이런 연속적인 ‘특집’들을 훑어 보노라면, 기획자들의 궁극적 목표가 그들이 주장하는 ‘반일적’ 한국 ‘좌파 정권’의 전복과 ‘친일’ 우파 정부로의 정권 교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일본 우파는 자신들을 시대변화에 맞춰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웃나라를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바꾸려는 시대착오적이고 내정간섭적인 열망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가. 8월 말에 아베 정권 대변지라는 <산케이신문>에 문재인 정권에 대한 쿠데타를 노골적으로 선동하는 기명 칼럼이 실리기도 했다. 그 세계인식과 사고 수준 또한 문예춘추의 노골적인 우익 선동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혐한·혐중과 얽혀 있는 일본 대중매체들의 이런 저급한 수준의 담론들이 ‘일본회의’ 이데올로그들의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을까. 문제는 아베 정권 각료들과 그 주변이 일본회의 멤버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저급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좋은, 별 문제될 게 없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더 위험해 보인다. 얼마 전 중의원 10선 의원을 지낸 고가 마코토古賀誠 전 자민당 간사장이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얘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아베가 독주하는 지금의 일본 정치에 대해 “논의가 사라져 (태평양)전쟁 말기와 똑같다”며 “어떤 사람(아베 총리)이 말하면 전부 찬성하고 아무것도 비판하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한국 내에도 정치적 이유 등으로 일본 우파들에 동조하거나 손잡는 세력이 적지않게 포진해 있다면? 그들간의 ‘한일 공조’를 걱정하는 건 기우일까.

이런 가운데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의 급속 성장으로 예전의 압도적 일본 우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아베 정권이 주도해 온 일본의 최근 변화가 바로 그런 변화에 따른 위기감에서 촉발된 것이라는 지적들도 적지 않다. 어쨌거나 “외교는 국력과 국력의 균형점에서 결정된다”는 사토 마사루의 ‘외교 원리’ 개념을 또 빌리자면, 지금 한일갈등을 둘러싼 외교전도 국력 변화를 반영해 예전만큼 일본 뜻대로 돌아가진 않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이 잘못돼 가는 흐름을 저지하고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동아시아 질서를 규정해온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1965년 한일협정 체제. 이미 흔들리고 있는 그 체제들을 해체하고 재구축해야 한다. 그 핵심은 미국의 냉전전략에 따라 무시되고 은폐돼 온 일본의 전쟁범죄와 불법적인 아시아 침략 역사를 사실대로 드러내고 재정립하는 일이다. 그 바탕 위에 비로소 일본은 바로 설 수 있으며,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 전체도 바로설 수 있다. 한반도 및 중국의 분단 해소와 동아시아 공동체 추구라는 미래지향도 가능하다. 이를 위해 미국의 패권적 폭주는 견제돼야 한다. 그런 변화를 이끌어낼 힘의 구축은 한국의 촛불혁명과 같은 각 지역 및 국가의 ‘시민혁명’이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

 

한승동

전 한겨레 선임기자, 피렌체의 식탁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