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행동, 기후침묵을 깨는 정치적 행동

신동혁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이상 기후로 지구 곳곳을 강타했던 날씨는 가을이 되자 푸른 하늘과 좋은 날씨로 돌아왔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설마 기후 위기가 올까 의심스럽다. 그러나 의심하지 마라. 이미 위기는 이상 기후, 녹아내리는 빙하, 기후변화로 서식처를 잃고 먹이부족으로 위험에 처한 극지방의 동물들의 고통으로 지속적으로 경고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도 인류는 그 경고를 무시하거나, 다른 생명체의 불행에 불과하다고 여기며 마지못해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이런 위기적 징후는 1℃ 정도의 온도 상승으로 인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온도 상승이 가져올 변화는 지구 역사에서 이미 재앙 수준으로 몇 번 반복되었다. 인류가 지금과 같은 경제성장을 계속 유지한다면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이 반복되는 데까지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지구는 그 위기를 몇 번인가 넘겼지만, 사실 그것은 지구의 위기가 아니라 멸종된 종들의 위기였다. 인류가 그 위기를 넘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넘을 방법을 인류는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인류 역사 이전의 몇 번의 위기와 이번 위기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앞의 위기는 ‘피할 수 없는’ 원인에 의한 기후변화로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피할 수 없는 원인에 의해 초래된 것이 아니다. 인류가 자초한 원인이다. 그래서 피할 수 있다. 그리고 막아내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원인제공자가 아닌 사회적 약자와 지구의 약자들에게 먼저 올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어린이, 노인, 농민, 저지대 거주 인류, 빈곤층-인 세계 시민들이 기득권이나 부국들의 경제성장 논리의 포박을 끊고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행동에 나서야만 한다.

그런데도 임박한 위기에 우리 인류는 어찌 이렇게 담담할 수 있을까? 아마 인류의 인식 특성 탓도 있다. 인간의 인식은 시각 정보에 너무 많이 의존하게 되어 있어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착각하기 쉽다. 그래서 쉽게 망각하고 현재 모습에 쉽게 휘둘린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제시되는 근거에 대한 사실 여부와 판단의 문제가 있다. 과학자들의 예측이 맞을까 하는 문제제기가 있고, 그리고 그 예측이 맞다 해도 기온 상승이 사실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기후문제는 복잡계의 문제라서 그 누구도 미래를 확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위기적 징후만으로도 그 대비를 서둘러야 하는 근거로 충분하다. 그러기에 전 세계가 30년 넘게 그 대응에 대해 노력해오지 않았는가? 1988년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발족으로 기후위기에 대한 과학적 기초를 마련하였고, 1992년 브라질 리우 세계정상환경회담에서 ‘기후협약’, 1997년 교토의정서 기후변화협약, 2015년 파리협약 등 국제적 노력을 이어 왔다.

하지만 일련의 노력에서 미국, 일본, 중국, 인도, 캐나다, 러시아 등이 빠지면서 협약 내용의 실천을 통한 기대한 결과를 얻기는 힘들어졌다. 왜 이들 나라는 인류의 임박한 위기 앞에서 그 대응에 앞장서도 부족한데,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탈했을까? 그리고 발전국과 발전도상국들은 첨예하게 맞서고 있을까? 이렇게 30년 넘게 위기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그 실천들은 여전히 미진하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오랜 노력 끝에 역사적 전환점이라고 평가된 파리협정이 2015년 체결되었는데, 미국은 이것이 미국에 불공평하고 미국민에게 손해를 끼친다고 하면서 2017년 탈퇴하였다. 이는 ’위기는 지구화하고 이익은 독점‘하겠다는 전형적인 시장경쟁 논리다.

등교거부, 그레타 툰베리. 지난여름 햇볕만큼이나 뜨거운 이름이다. 2018년 폴란드에서 24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가 열리고 있을 때, 그레타 툰베리(16)는 학교로 향하지 않고 ‘기후를 위한 등교거부’를 적은 상자 종이 팻말을 들고 스톡홀름 의사당을 향해 갔다. 한 아이의 행동은 ‘미래를 위한 금요일’로 확산되었고, ‘정치인들에게 기후 변화를 우선순위에 두고 위기 상황처럼 이 문제를 다뤄달라. 당신들 같은 어른들이 우리 미래를 망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 같은 아이들이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그에 말에 전 세계 많은 아이들이 동참하고 있다. 이에 반해 기성세대는 이 아이에게 시위보다는 기후 위기를 해결할 과학자가 되라고 충고하거나, 언론은 툰베리가 말하는 내용에 주목하기 보다는 어린 아이의 특이한 행동을 전하기 바빴다. 아이들은 이처럼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데 반해 왜 우리 기성세대와 정치인들, 국가들은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진지하게 인식하지 않을까? 그것은 아이들은 진실을 직시할 힘이 있으며, 그 힘은 ‘경제적 이해’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기성세대는 ‘생존경쟁과 실업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정신이 없고, 생존경쟁으로부터 자유로운 기득권은 진실을 받아들이기엔 잃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와 발전국, 초국적 자본은 기후위기 대응으로 어느 정도의 불편과 독점적으로 누리던 이익의 축소를 감수해야만 한다. 기후위기는 인간의 산업 활동으로 인한 온실가스 증가로 말미암은 것이고,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이 온실가스를 줄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따라서 경제성장을 줄이지 않고 기후위기를 말하는 것은 기만이기 때문에, 그로 인한 기득권의 축소는 불가피하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정부간협의체가 내놓은 실천계획에 따라 경제성장을 줄여나가면 되는데, 이것 때문에 대부분의 나라들이 미온적이다. 특히 미국은 의정서가 발효되기 전에 탈퇴하고 중국, 인도는 개발도상국이란 이유로 포함되지 않고 이를 빌미로 캐나다도 탈퇴하고, 일본도 탈퇴하였다. 결국 온실가스 15% 정도만 배출하는 나라들만 참여하고 있다. 이는 논의에는 참여하지만, 그 실천 위해 경제성장을 그만 두거나 경제활동과 산업구조를 바꾸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온난화 가스 배출원인 화석 에너지와 자원을 많이 사용하는 구조에서 환경적이고 재생가능한 산업구조로, 공업 중심에서 지속가능한 지역순환농업 중심 사회로 바꿔나가지 않으면 기후 위기가 아니어도 화석연료와 자원고갈로 성장 위기가 아니라 경제를 멈춰고, 생존자체가 위태롭다.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한 합의 과정과 실행과정도 험난한데, 보다 근본적인 사회적·경제적 전환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기존체제로부터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나라들과 세력들의 저항이 크다. 그럼에도 기후위기 앞에서는 성장도 기득권도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언제까지 초국적 자본과 소수의 기득권세력의 배만 불리는 성장에 매달릴 것인가? 이제는 이런 맹목적 성장 대신 기후위기를 재촉하는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성숙된 사회로의 거대한 전환을 도모해야 한다. 그런데 이 거대한 전환 앞에서 머뭇거리는 이유는 성장하지 않으면 쓰러지는 ‘시장경쟁체제’ 때문이다. 인류 사회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부를 생산하였지만, 지금의 그 부를 다 누리지도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계속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경쟁체제를 작동시키는 자유시장체제 때문이다. 충분히 누리고 있는데도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어 경쟁이 격화되고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 경쟁에서 살아남아도 결국 무한 성장이 초래한 기후위기로 인해 우리 모두는 생존의 위협에 처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후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쟁을 부추기는 자유시장질서와 그것을 강제하는 WTO 체제를 해체해야 한다. 자유시장질서는 초국적 자본과 발전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저개발국과 약자들에게는 빈곤을 심화시키고, 위기를 지구화하는 체제이다. 이제 기후위기 앞에서 남과 북을 따질 시간이 없다. 초국적 자본과 부국들이 자기만 살아남기 위해 지구를 국경 없는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여 경쟁체제를 유지하고 성장을 도모한다면 인류 모두는 기후 위기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경쟁과 자유무역, 시장논리를 옹호하고 강제하는 WTO, IMF,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을 폐지하고, 무한 성장을 추구하는 자유무역을 제한해야 한다. 대신 지역의 ‘자연적,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경제적’ 조건에 맞는 자주적 발전을 할 수 있도록 서로가 가진 기술과 지혜, 자산의 교류와 협력은 적극 확대해야한다.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 인류 삶의 가치 기준은 성장과 발전이 아니라 공존과 생명이 되어야 한다. 기득권을 수호를 위해 경제성장을 외치는 탐욕을 따를 것인가? 눈이 밝고 영혼이 맑은 아이들의 외침 앞에서 언제까지 행동을 망설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