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입니다
시인 김지하가 쓴 「고행 ..1974」는 김병곤에 대해서 이렇게 시작한다.
사형이 구형되었다. 김병곤의 최후진술이 시작되었다. 첫마디가 ‘영광입니다.’ 아아! 이게 무슨 말인가? 이게 무슨 말인가?
1974년 7월 9일 오전 용산 비상고등군법회의 재판정에서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구형공판이 있었다. 그해 4월에 있었던 민청학련 민주화 시위와 관련된 인사와 학생들에 대한 결심공판이었다. 검사의 장황한 논고 끝에 이철, 여정남, 유인태, 나병식, 김병곤, 김지하, 유근일, 이현배 등 8인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다. 무더웠던 재판정 분위기가 일시에 싸늘해지고 방청석이 술렁였다.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이 시작되었다. 김지하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엄청난 충격 속에 휘말려들기 시작했다. 죽인다는데, 목숨이 끝난다는데, 일체의 것이 종말이라는데, 꽃도 바람도 눈매 서글한 작은 연인도, 늙으신 어머니의 주름살 많은 저 인자한 얼굴 모습도, 흙에 거칠어진 아버지의 저 마디 굵은 두 손의 훈훈함도, 일체가 모든 것이 갑자기 자취없이 사라져버린다는데….. 그런데 ‘영광입니다.’ 성자의 말이다. 우리가 성자인가? 사형을 집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비꼬는 말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저들의 그 독살스러움을 잘 알고 있는 우리가 다만 집행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여 여유있게 비꼬고 있을 그럴 처지인가? 아니다. 그러면 무슨 말인가? 그렇다. 확실히 그렇다. 우리가 드디어 죽음을 이긴 것이다. 그 지옥의 나날, 피투성이로 몸부림치며 순간순간을 내내 죽음과 싸워 드디어 그것의 공포를 이겨내버린 것이다.
같은 군사법정에 섰던 김지하가 김병곤의 ‘영광입니다’라는 당찬 진술에 충격을 받고 그 순간 머리 속을 오갔던 생각들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김지하는 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이철, 유인태, 김병곤 등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로 감형되어 영등포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다음 해 2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이 글은 그가 출감한 직후 동아일보의 요청으로 3회에 걸쳐 연재한 「고행 ..1974」의 일부이다. 김지하는 「고행 ..1974」에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의 고문에 대해서 폭로하는 등 박정희 유신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함으로써 석방 27일만에 다시 재구속되어 70년대 내내 옥고를 치르는 수난을 당했다. 그래서 더욱 유명해진 이 글은 대학가에 유인물로 은밀히 돌아다니면서 70년대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가 발령된 이후 유신독재에 저항하여 감옥으로 향했던 수많은 학생운동 투사들에게 이 「고행 ..1974」는 필독 문건이 되었다. 그들은 시위를 모의하는 과정에서 이 글을 돌려 읽으면서 결의를 다졌고, 절대권력의 위협 앞에 꺾이지 않는 김병곤의 당당한 모습에 크게 용기를 얻었다. 75년 이후 70년대 내내 김병곤은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김병곤은 1990년 12월 6일 2년 6개월의 투병 끝에 3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 짧은 생애 중에 6번에 걸쳐 6년여를 감옥에서 살았다. 1971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이후 20년을 불꽃 같이 살고 갔다. 그를 죽음으로 이끈 위암이라는 병도 오랜 감옥생활과 쉴 새 없이 몰아쳐온 민주화운동의 요청을 감당하면서 생긴 병이었으니 그는 참으로 한국 민주주의 제단에 자신의 젊음과 귀한 생명을 모두 바친 셈이다.
그의 불꽃 같은 삶과 죽음은 민주인사들의 기억 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동시에 큰 슬픔과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광주교도소에서 함께 수감생활을 한 이영희 선생은 김병곤 빈소에서 문익환 목사를 만나 김병곤 같은 훌륭한 사람이 가는 것이 너무 아깝다면서 눈물을 쏟았고, 추모의 글에서도 ‘슬프다! 김병곤 같은 인물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야하다니!’라며 두고두고 애통해 했다. 김병곤의 처 박문숙과 함께 김병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던 인재근의 글은 지금도 읽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제 김병곤은 우리 곁을 떠나고 없다. 살아 펄럭이는 청춘을 송두리째 불의에 저항하는데 바쳤던 그의 죽음을 두고 무슨 췌언이나 미화가 필요한가? 원통하고 슬프다.(『영광입니다』, 거름, 1992)
민중과 함께 한 젊은 지도자
지금은 전설처럼 남은 ‘영광입니다’라는 김병곤의 이 말뜻은 그럼 무엇인가? 무엇이 영광이라는 말인가? 그에 대해서는 같은 법정에서 서서 함께 사형을 구형받았던 이철은 이어지는 진술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고맙습니다. 아무것도 한 일 없는 저에게까지 이렇게 사형이란 영광스러운 구형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땅의 이 민생들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에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거름, 1992)
진술을 마치고 돌아서는 김병곤의 얼굴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였고, 눈빛은 너무나 평온하였다. 이철은 그 웃음과 눈빛에서 무념의 세계, 마치 열반에 든 부처님을 보는 듯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자식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어머니처럼 김병곤의 저 높은 기개는 바로 불의와 독재에 신음하는 민중에 대한 한없는 사랑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형구형 앞에서 평온하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김병곤의 민중에 대한 관심은 대학 입학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민중 현실과 접하게 된 최초의 사건은 바로 1971년 8월에 발생한 광주대단지 사건이었다. 김병곤은 입학하자마자 고등학교 선배의 권유로 한국사회연구회라는 서클에 가입했는데 사건이 나자 회원들과 함께 실상을 알고자 광주대단지 철거민들을 찾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철거민들의 참상을 보고나서 자신은 민중의 고통을 함께 하고 그 고통을 제거하는데 생을 걸겠다고 결심한다.
그 후 그는 당면한 반독재 학생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여 73년 10월 시위와 74년 민청학련 사건 주동자로 2번의 혹독한 옥고를 치러냈다. 75년 감옥에서 나온 그는 일찌기 마음먹었던 민중과 함께 하겠다는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도시산업선교회 등과 관계를 맺고 활동을 모색한다. 향린교회에서 대학생부를 지도하면서 야학을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1976년 아들 사형 소식에 대한 충격으로 병석에 누웠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부득이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코리아 하이답프라는 주방기기 회사에 취직을 하면서 잠시 운동 일선을 떠났다가 1978년 동일방직사건이 나자 회사를 그만두고 운동에 복귀한다. 그는 EYC(한국기독청년협의회)에서 동일방직 사건의 실상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1979년 12월 박정희가 죽고 긴급조치가 해제될 때까지 1년 8개월간의 3번째 징역을 살았다.
그 이후에도 민중의 아픔을 함께하고자 하는 운동가로서의 그의 행보는 생애 마지막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6번의 징역살이가 어찌보면 그런 초심의 초지일관한 실천 속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청련 의장으로 87년 대선 시기를 김병곤과 함께 활동했던 김희택은 김병곤의 큰 딸 희진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병곤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빠는 투병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때 극진한 사랑으로 병상의 아빠를 격려하시던 조화순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목사님, 제가 겪고 있는 이 극심한 고통은 이 땅의 고난받는 민중의 고통,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 아빠는 이 땅의 고난받는 민중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꾸준히 한 길을 걸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앞을 향해 전진하는 젊은 지도자였다.(『영광입니다』, 거름, 1992)
김해 선비 가문의 아들
김병곤은 1953년 2월 24일 경상남도 김해군 이북면(이북면 퇴래리 145)에서 아버지 김한영 선생과 어머니 송차희 님의 1남 4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한영 선생은 김해 김씨 중에서도 선비 가문으로 유명한 서강파의 종손이었다. 이북면 면장을 오래 지내서 면장을 그만둔 뒤에도 동네에서는 “김 면장”으로 통했다. 면장을 하기 전에는 학교 선생님을 오래 하셨다. 김 면장의 아버지, 김병곤의 조부는 한학으로 근동에서 이름 높은 선비였던 김종락 선생이었다. 같은 김해 출신으로 김병곤의 집안을 잘 알고 있는 장기표의 기억으로는 김병곤이 천성적으로 유순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 조부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김병곤은 중학교 때부터 부산으로 나가 개성중학교와 부산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만해도 공부 잘하고 학교일에도 열성적인(대대장을 했다) 평범한 모범생이었다. 덩치가 크고 공부도 잘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단연 대장노릇을 했지만 그러나 자기보다 떨어지는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고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집안에서는부모님에게는 어른스럽고 든든한 아들이었고, 누나들의 고민을 들어줄 수 있는 믿음직한 동생이었으며 누이동생에게는 언제나 기댈 수 있고 뒤에 숨을 수 있는 큰 나무 같은 오빠였다.
김병곤이 사회현실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도산연구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부터인 것을 보인다. 국어선생이었던 살매 김태홍 선생도 김병곤의 의식이 성장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살매 선생이 즐겨 쓰던 말이 “비겁한 자여 그대 이름은 방관자니라.”였는데, 김병곤도 친구들에게 이 말을 자주 했고, 대학에서 만든 유인물에 이 말을 집어넣기도 했다. 그러나 김병곤이 민주화운동가로 성장하게 된 것은 1971년 서울 상대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학년 때 가입한 서클 한국사회연구회는 그를 운동가로 담금질하는 용광로 역할을 했다.
김병곤은 투사로서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와 가깝게 지낸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부드럽고 섬세한 사람인가를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는 항상 부드러운 미소와 듣기 좋은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대학 들어와서 서클 한사회에서 치열한 사회과학 이론학습과 토론을 하는 중에도 그는 틈을 내서 도스토에프스키를 읽고, 영시를 읊었다.
1978년 동일방직사건이 났을 때 김병곤은 조화순 목사가 해고노동자들과 숙식을 같이 하는 인천산업선교회 사무실에 자주 찾아 갔다. 조화순 목사는 정보부의 감시가 번득이는 사무실에 김병곤이 소주 한 병을 웃옷 품 속에 집어넣고 오징어 한 마리를 들고 찾아 와서는 “목사님, 술 한잔 합시다.” 하면서 긴 시간을 보내고 가곤 했다고 회고한다. 열심히 싸우라는 말을 할 법도 한데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살벌한 분위기를 녹여 주기만 했다. 조화순 목사는 당시 피곤에 지쳐 병색이 완연한 자신의 얼굴을 걱정해 준 유일한 청년으로 김병곤을 기억한다.(『영광입니다』, 거름, 1992)
김병곤은 서울대 주류 서클의 리더였기 때문에 박석운을 비롯한 많은 서울대 학생운동가들이 김병곤을 존경하며 따랐고, 중요한 판단이 필요한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그의 생각과 말을 듣기 위해 그에게 찾아갔다. 때로 의견이 다르거나 관념적이고 과격한 주장을 펴는 후배를 만날 경우에도 그는 바로 논리적으로 논파하고 배척하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차근차근 그 후배의 논리의 맹점을 지적하고 끈질기게 설득하려 노력하였다.
87년 대선 시기에 민통련 정책실에서(당시 김병곤은 장기표 정책실장이 구속되어 정책실 차장으로 민통련 정책실을 이끌었다) 함께 일했던 윤석인도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다. 당시 10여명이 모인 한 비공식 모임에서 대통령 후보문제를 둘러싸고 한 후배가 자기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일이 발생했다. 그러자 김병곤은 그를 뒤따라 나가 설득하고 달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고, 결국 이 모임은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말았다. 다른 후배들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한편 불평을 토로하면서도 그의 인품에 대한 존경심은 더욱 커졌다.
‘진정한 용기의 별’
1984년 10월 김병곤은 김근태가 의장으로 있는 민청련에 상임위원장으로 참여하면서 인생의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된다. 당시 김병곤은 고등학교 선배가 경영하는 배진산업이라는 텐트를 만들어 수출하는 중소기업에서 자리를 잡고 일하고 있을 때였다. 전두환 신군부가 80년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집권한 뒤 집권 4년 만에 이른바 유화조치라는 걸 통해 정치권과 사회운동에 조금 숨구멍을 열어주었을 때다. 유화조치는 전두환 신군부의 기만적 집권연장책이었지만 그 틈새를 뚫고 김근태 의장을 중심으로 민청련이 창립되어 1년이 지났을 때였다.
김근태 의장은 김병곤을 찾아가 민청련 참여를 권유한다. 김근태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주류 학생운동 출신 일부가 민청련의 공개 운동을 ‘소영웅주의적이며, 결국 적들의 아가리에 운동역량을 똘똘 말아 처넣고 말 것’이라는 비판을 하고 있을 때라 당시 주류 학생운동의 대표적 선배활동가인 김병곤이 과연 제안을 수락할 수 있을 것인지 내심 걱정했다. 그러나 김병곤은 의외로 선선히 수락했다. 김근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기뻤지만 한편으로 이제 막 두 아이를 낳고 모처럼 안정된 생활을 꾸리는 후배를 대책없이 끌어들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무거웠다. 당시의 상황을 김근태는 옥중에서 보낸 한 편지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병곤이는 참으로 선선히 수락했습니다. 오랫동안 그 대답을 가슴에 담아두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그 모든 것에 부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생활의 타성에 물들지 않고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는 그것은 그 밑바탕에 큰 용기가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런 약속을 한 곳은 원효로 어디쯤인가 창고 같은 2층에 병곤이가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마루에 애들 기저귀가 치렁치렁 걸려 있었고, 문숙씬 식사준비 한다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지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기쁘고 자랑스러웠지만, 동시에 가슴 저 밑바닥에서 솟구쳐오르는 아픔, 그리고 슬픔으로 옆구리가 결리는듯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건지 뭐 대단한 계획이야 있을까만, 그래도 봉급 받아서 뭣인가 해 보려고 하고 있었을 텐데 아무런 대책 없이 그렇게 떠나는 병곤이가 과연 잘 하는 것이고 그것을 권하는 나는 또 무엇인가 하는 상념에 흔들렸습니다. 그날 문숙씨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외면하고 앉아 있다가 게처럼 옆걸음을 쳐 나왔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영광입니다』, 거름, 1992)
김근태 의장은 처자식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가도 시대의 부름에 망설임 없이 털고 일어서는 김병곤의 모습에서 군사법정에서와는 또다른 진정한 용기를 본 것이다.
김병곤이 합류하고나서 민청련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고, 1985년 2,12 총선과 5월 삼민투의 미문화원 점거사건을 계기로 독재정권은 다시 민주운동권에 탄압의 칼날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그 일차 대상이 학생운동과 더불어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의 고리로 지목된 민청련이었다. 이 엄혹한 시기에 학생운동과의 연대는 저들의 표적이 되는 것이었다.
이 때 김병곤이 또다시 총대를 메고 나섰다. 1985년 5월, 민청련의 김병곤과 이범영이 민청련 대표로, 황인하가 EYC대표로 각 대학의 광주 학살 원흉 처단 투쟁과 삼민투 전학련 구성을 위한 연례모임에 참석하고, 6월에는 각 대학의 대표들과 공동으로 ‘민중민주운동 탄압저지를 위한 공동대책회의’의 모임을 가졌다. 정권은 이를 학생운동과 민청련 탄압의 계기로 삼았다. 김병곤은 7월 18일 구속되었다. 5번째의 구속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발로 하여 민청련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이 이어져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민청련 간부 전체에 대해 구속과 수배가 떨어졌다. 고난과 수난 앞에서 몸사리지 않고 구속을 감수하는 김병곤을 회고하며 김근태는 그런 그의 감옥살이를 ‘진정한 용기의 별’이라고 했다.
6월항쟁과 대통령선거
김병곤은 꼬박 2년간 5번째 징역을 살고 6월항쟁의 성과로 87년 7월 석방됐다. 거듭되는 감옥살이로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을 본인이 느끼기 시작했지만 6.29 이후 대중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였으므로 김병곤은 석방되자마자 운동 일선에 다시 뛰어들었다. 김근태를 비롯해 전 간부가 구속되거나 수배되어 지하로 들어갔던 민청련도 6월항쟁으로 김근태를 제외한 간부들이 거의 석방됨으로서 공개운동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8월에 열린 총회에서 민청련은 김희택을 의장으로 김병곤, 박우섭, 장준영, 권형택을 부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이 당시 김희택은 김병곤을 의장으로 추천하고 수락할 것을 종용했지만 김병곤은 끝까지 고사하고, 선배인 김희택이 의장을 맡도록 밀었다.
당시 김병곤이 의장을 고사한 것은 겸양의 뜻이 컸지만 한편으로 6월항쟁으로 열린 공간에서 민중운동연합으로서 민통련을 강화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민통련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병곤은 자신의 뜻대로 민통련 정책실 차장을 겸하게 되었다. 정책실장 장기표가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선국면에서 실질적으로 정책실을 총괄하는 책임자였다. 그는 민통련 기관지 ‘민중의 소리’를 통해 민중운동이 중심이 되는 통일전선 건설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가면서 경기남부 민통련 건설 등 실제적인 조직작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8월 말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12월 대선 일정이 구체화되면서 정국은 대통령선거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어갔다. 김병곤의 생각은 6월항쟁 이후 열린 공간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대중운동의 성장과 그를 바탕으로 한 민중운동 세력의 정치적 진출이고, 대통령후보 문제는 2차적 문제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선거국면에서 대중들의 관심은 후보문제로 쏠릴 수 밖에 없었고, 국민운동본부, 민통련, 민청련 등 재야운동 단체는 이 대통령 후보문제로 엄청난 갈등과 분열을 겪게 된다. 김병곤은 민중운동세력의 성장이 아직 미약한 상태에서 독자후보를 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보았으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김대중 후보의 ‘비판적지지’와 김대중, 김영삼 양 후보의 ‘후보단일화’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갈등을 겪었던 것 같다. 그러나 김병곤이 속한 민청련과 민통련이 많은 토론과 조직적 진통 끝에 ‘비판적지지’를 결정하자 김병곤은 그 결정을 지지하고, 수호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 결정을 끝까지 옹호하고 관철하려고 했다. 그의 건강에 결정적 타격이 된 구로구청 투쟁과 6번째 징역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김병곤의 조직인으로서의 자세에 대해 김근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로 신화로 만들어야 되는 것은 “사형을 주어서 영광입니다.”가 아니고 병곤이의 바로 이 점, 자신의 의견과는 달리 내려진 공적 결정인 경우에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단호히 그것을 보위하는 것, 이것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병곤이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신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미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영광입니다』, 거름, 1992)
그러나 민청련과 민통련의 비판적지지 결정 이후에 전개된 상황은 김병곤에게 큰 실망과 좌절을 안겨준 것 같다. 애초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지지’는 민중운동에 중심을 두고 민중 역량 강화를 위해 채택된 전술적 방침으로 천명되었으나 선거국면이 진행되면서 비판적지지 진영은 점차 ‘4자필승론’ 같은 선거혁명론의 환상에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객관적 상황과는 무관하게 선거 감시만 잘하면 무난히 승리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낙관론이 유포되었다. 게다가 재야운동권 다수가 비판적지지 입장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양김의 팽팽한 균형은 깨지지 않았다.
이런 위기감이 김병곤으로 하여금 10월 7일 양김 초청 고대집회를 추진하게 한다. 이 집회는 국민운동본부 산하 청년학생공동위원회가 주최하여 전두환 퇴진과 거국중립내각 수립을 촉구하는 집회였다. 이 집회는 한편으로 양김 단일화가 협상이나 중재로 이루어지기 힘든 상태에서 투쟁 속에서 대중적 압력으로 양김 단일화를 이루자는 취지를 갖고 있었다. 문제는 함께 단상에 서는 것을 꺼리는 김영삼씨가 참석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때 김병곤이 김영삼 씨 교섭을 맡고 나섰다. 그는 김영삼 씨 상도동 자택을 방문하여 일부 참모들이 강력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씨를 설득하여 집회 참석을 받아내고 집회를 성사시켰다. 그러나 10월 7일 고대집회는 10만 관중이 참석하여 뜨거운 열기를 보였지만 바로 그 다음 날 김대중 씨 측의 ‘분당 발표’로 집행부의 취지가 무색하게 되었고, 양김 단일화를 달성하려는 원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제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하겠습니까?”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야권의 분열, 관권 금권 부정선거 시비로 얼룩진 대통령 선거가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막을 내렸다. 6월항쟁으로 타올랐던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는 급격히 싸늘히 식어갔다. 정권교체를 열망했던 시민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과 체념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이 때 그 속에서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살려 보려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병곤이었다. 대선 투개표과정에서 구로구청에서 발견된 부정투표함 사건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부정선거 관련 공무원들을 억류하고 구로구청을 점거함으로써 경우에 따라서 대선 결과를 뒤집을 수도 있는 중대한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의 권력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그것은 결국 실현되지 못한 희망으로 끝나고 말았다.
어쨌든 당시 대통령선거가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치러졌기 때문에 김병곤 역시 선거 결과에 대해서는 비관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통련 대선 상황실장이었던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김병곤은 선거 당일에도 공정선거감시단 활동을 돕기 위해 부정선거 고발 현장을 쫓아다니는 차량을 여러 대 구해 부정선거감시활동을 감시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국민운동본부 공정선거감시단 서울본부의 김희선 본부장과 연결되었고, 구로구청을 점거한 시민들과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리더십은 그로 하여금 결국 구로구청 투쟁의 지도자로 나서게 했다.
2박3일의 구로구청 부정선거규탄 투쟁은 12월 18일 쇠파이프와 각목과 최루탄으로 무장한 경찰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당했다. 김병곤 등 지도부들은 엄청난 구타 속에서 1천여명의 시민들과 함께 체포 구속되었고 진압과정에서 서울대 학생 양원태가 추락하여 척추 골절상을 입고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진압경찰의 진입이 예상되는 17일 민통련에서는 의장 문익환 목사와 임채정 사무처장이, 민청련에서는 김희택 의장과 권형택 부의장이 구로구청에 김병곤을 찾아가서 현장에서 나올 것을 권유했다. 김병곤인들 할 수만 있다면 왜 나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민청련사건으로 2년여 감옥생활을 한 후 겨우 5개월 만에 다시 감옥에 갈게 뻔한 상황이었으니. 그러나 당시 구로구청 상황은 그가 없으면 싸움을 지휘하기 어려웠고, 그 사실을 그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김병곤이 임채정에게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 형님, 제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하겠습니까?”
이미 자신이 그곳에 남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남기로 결심한 상태에서, 김병곤의 이 말은 ‘피하고 싶은 쓴 잔이지만 피해서 안된다면 감당하겠다는, 깊이 깨달은 한 인간의 간결한 고백’이었던 것이다.
투병과 죽음
구로구청사건은 법정에서 부정투표함 여부를 놓고 진실공방은 있었지만 가려지지 않았고, 결국 김병곤은 폭력 및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6번째 징역을 영등포 교도소에서 살게 된다. 김병곤은 수감 중 88년 2월부터 극심한 복통에 시달리면서 중병을 감지하고 있다가 4달 후인 6월 2차례 정밀진단을 받고 위암 3기로 판정되어 가석방으로 석방된다. 김병곤은 자신의 위암에 대해서 두 가지 원인을 짚었다. 첫째는 대선 때의 분열상 같은 것들이 자신한테 준 충격, 그리고 87년 여름에 출옥 이후 몸을 돌보지 못한 것을 원인으로 들었다. 그 중에서도 대선과정에서의 정신적 충격을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했다.
김병곤은 출옥 후 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여 서둘러 수술을 받았다. 수술 전 상태가 위중해 수술결과에 대해 담당 의사들은 우려했지만 본인은 수술 결과가 괜찮다고 느꼈다. 그리고 6개월간의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도 잘 이겨냈다. 그리고 시골로 내려가 6개월간 휴양하면서 뜸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면서 상태가 다시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검진을 받은 결과 장유착으로 판명이 나서 2번째 수술을 받았다. 이 때에는 김병곤의 몸은 일말의 기대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였다. 수술 후 식사를 하지 못하고 수액에 의존하면서 서서히 체력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47킬로까지 체중이 감소했다. 수술 후 마지막일년 남짓한 기간의 투병생활은 ‘죽음과의 한판 대결이었고 처절하고 기나긴, 힘겨운 노정이었다.’
선후배들이 투병위원회를 조직하여 집회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박형규 목사가 부르짖듯이 기도 했다. ‘우리가 이토록 많은 사람이 모여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느님, 왜 기적을 보여주시지 않습니까’ 하고. 인재근은 고통을 참지 못해 진통제를 놓아주기를 호소하는 김병곤을 두고 돌아서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몇 번이나 울었다. 마지막 일년동안 암세포가 그의 모든 장기, 모든 세포, 심지어 머리카락 한올한올의 모근까지 퍼져나갔고, 운명하기 열흘 전에는 혈액까지 침투하여 수혈로 혈액을 바꾸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마지막 1년 동안 김병곤은 무섭도록 치열한 투병모습을 보여 담당 의사와 가족 친지들을 놀라게 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토록 강렬한 삶의 의지로 병과 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너무도 차분한 심경으로, 담담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고 있었다는 점이다. 김병곤은 평소 존경하는 조화순 목사에게 부탁하여 세례를 받았다. 조화순 목사는 병실에서 정기적으로 기도회를 열었다. 김병곤은 조화순 목사에게 ‘말로만 관념으로만 머물러 있던 민중의 고통과 예수의 십자가 형의 고통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조화순 목사는 김병곤의 마지막 투병과정을 보면서 ‘인간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구나’하고 느꼈다.
부인 박문숙의 의연한 간병 모습도 감명을 주었다. 의사들조차 포기한 남편의 병을 박문숙은 의사보다 더 정확하게 세심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보살폈다. 마지막에 피부에 번진 종양으로 김병곤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할 지경이었는데도 박문숙은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이면 단정하게 머리를 빗고 곱게 화장을 했다.
김병곤은 12월 6일 소래 신천리병원에서 박문숙과 조화순 목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운명했다. 박문숙이 김병곤의 몸을 감았던 붕대를 뜯어내는 동안 조화순 목사는 내내 찬송가를 불렀다. 투병기간 내내 냉정할 정도로 꿋꿋했던 박문숙이 남편의 시신 위에 엎드려 몸부림치며 통곡했다. 김병곤은 김희택의 말처럼 “평소 ‘맑은 향기’를 풍기며 살았듯이 마지막 또한 똑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서 사라져 갔다.”
아내 박문숙
김병곤을 마지막까지 그림자처럼 내조했던 아내 박문숙도 2014년 4월 희진, 은희 두 딸을 남기고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대 같은 남편이 떠난 뒤 그 빈자리가 너무나 허전했겠지만 내색하지 않고 두 딸을 키우며 꿋꿋이 살다가 조용히 남편 곁으로 갔다. 그녀는 경기도 도의원, 사단법인 녹색환경운동 이사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장 등 사회활동도 활발히 했다. 암 발병 후에는 가까운 친지들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수술도 하지 않은 채 시골에 내려가 자연요법 치료만 하다가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주위에서 손쓸 틈도 없이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박문숙은 남편 김병곤이 있는 마석모란공원에 묻혔는데, 다음 해에 김병곤의 묘를 옮겨 합장하였다.
김병곤이 세상을 떠난 2년 후 그를 추모하는 재야인사들과 김병곤의 선후배, 지인들이 추모의 글을 모아 회고문집 ‘영광입니다’를 거름출판사에서 발간하였다. 이 글의 많은 부분이 그 문집에 실린 글에 힘입은 것이다. 지금부터 10년쯤 전에 김병곤기념사업회에서 모금을 하여 기금을 마련하고 김병곤평전편집위원회(편집위원장 김희택)를 구성하여 평전 발간을 추진하였다. 원래 20주기에 맞춰 2010년에 발간할 예정이었으나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늦어졌고, 우여곡절 끝에 올해 4월에 드디어 실천문학을 통해 출판하게 되었다. 김병곤의 고향 김해시에서는 시내 중심가 문화의 거리에 김병곤의 뜻을 기리는 조형물을 만들어 세우기로 했다고 한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반가운 일이다. 아무쪼록 김병곤의 ‘맑은’ 마음과 ‘아름다운’ 삶이 후대에 잘 전해 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