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1일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알려진 지 7년이 되는 날이다. 7년 전 2011년 8월 31일 정부가 역학 조사발표를 통해 원인 미상 산모 사망과 폐 손상의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라고 밝혔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직후, 2013년 정부는 대책으로 화평법(화학물질등록평가법률)을 준비했다. 하지만, ‘기업의 부담이 크다’, ‘기업을 죽이는 것’이라는 산업계의 반발로 결국 ‘반쪽짜리’, ‘누더기’ 법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caption id="attachment_193991" align="aligncenter" width="640"] ▲지난 7년 동안 피해자들과 시민단체가 재발방지대책을 요구한 결과,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서야 대책으로 화평법과 살생물제법 제개정됐다 ⓒ 환경운동연합[/caption]

오랫동안 피해자들과 시민단체가 재발방지대책을 요구한 결과,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공식 사과와 함께 후속 조치로 제개정된 ‘화평법’(화학물질등록평가법률)과 ‘살생물제법’(생활화학제품 및 살생물제의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이 내년부터 시행된다.

화평법과 살생물제법은 유럽의 REACH를 벤치마킹한 법으로 ‘한국형 REACH’로 불린다. 환경부조차 “해당 법들은 유럽의 규정을 최대한 준용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국내법 시행에 앞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유럽의 REACH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을까.

모든 화학 물질의 책임은 정부가 아닌 ‘바로 기업’

[caption id="attachment_193992" align="aligncenter" width="499"] ▲한국경영자총협회 앞에서 경총의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화평법)’ 무력화 시도에 항의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환경운동연합[/caption]

우리보다 약 10여년 앞선, 2006년 유럽은 유럽화학물질안전청(ECHA)설립과 함께 REACH(화학물질 등록, 평가 등에 관한 제도)라는 법률로 EU 28개국에 유통되는 모든 화학물질을 관리하고 있다.

유럽의 화학물질관리제도인 REACH는 시장에 유통되는 모든 화학 물질에 대한 독성 정보와 용도 정보를 등록케 하고, 유해성과 위험성에 대한 평가를 하는 절차로, 이후 허가, 제한 등을 두어 관리하고 있다. 지난 5월 31일 기준으로, 총 2만 2천종 물질이 등록되어 있다.

여기서 핵심은 화학물질 등록의 주체가 정부가 아니라 그 물질을 제조, 수입하고자 하는 기업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화학 물질 생산자만이 등록 물질 평가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또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후 각 기업체가 제출한 화학물질 자료를 바탕으로 평가하고, 그 평가를 기반으로 어떤 환경과 방식으로 화학물질을 사용할지 ‘용도’ 에 따라 시장에서 퇴출해야 하는 물질(허가 물질)인지, 용도를 제한해서 사용되어야 하는 물질(제한물질)인지, 유해성 연구가 더 필요한 물질(고위험성물질)인지 분류해서 관리하게 된다. 이같은 REACH의 화학물질 관리를 근거로 , 별도의 개별법으로-화장품법, 살생물제법, 식품접촉물질법 등- 제품 안전 기준을 마련해 관리하고 있다.

물질 중심으로 관리하는 유럽의 REACH와 달리, 기존의 화평법은 물질과 제품을 함께 관리하다가, 최근 개정을 통해 ‘생활화학제품’이 ‘살생물제법’으로 이관됐다. 문제는 이런 화학물질과 제품 관리가 환경부의 ‘화평법’과 ‘살생물제법’으로 모두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현재 많은 화학 물질과 제품 관리에 있어 여전히 여러 부처의 개별법으로 나눠져 있고, 부처 간 전문성이나 역량도 상이해 안전관리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유럽의 REACH와 같이 이번에 새롭게 개정된 화평법도 한국형 REACH라 불리고 싶다면, 화평법의 위상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 법 위상 강화와 함께 환경부의 기능 재정립을 통해 국내에 유통되는 모든 화학물질의 유해성과 용도에 대한 양질의 정보 구축하고, 제품을 관리하는 각 부처는 환경부로부터 전달받은 화학물질의 정보를 근거로 제품별 특성에 맞게 안전 기준을 마련하고, 철저히 제품을 규제할 수 있을 것이다.

가습기살균제와 같은 살생물제, 유럽은 어떻게 관리하고 있을까?

[caption id="attachment_193993" align="aligncenter" width="640"] ▲ 전 세계 유례 없는 피해를 입힌 옥시 레킷벤키저(Reckitt Benckiser)의 가습기 살균제 ⓒ 환경운동연합[/caption]

유럽에서는 살균제 피해에 대한 논의가 90년 초부터 논의가 시작되어 2013년부터 살생물제규제법(BPR)이 시행중이다. 최근 개정된 한국의 살생물제법과 같이 살생물제 제품에 사용되는 모든 살생물물질은 용도에 따라 독성, 효능, 위해성 등에 대해 사전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다.

여기에서 유럽의 살생물제 관리의 특이점이, 살생물질의 관리 중요성 만큼 물질의 승인신청자인 ‘공급자’를 관리한다는 점이다. 또한, 살생물질에 대한 사용 용도, 제품 유형에 대한 정보를 누구나가 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승인된 살생물질 목록과 살생물제품 유형, 물질 제조사에 대한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해당 물질 취급하는 제조사를 비롯해 소비자들도 쉽게 해당 물질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투명한 정보 공유로 각 물질에 대한 신뢰성 확보와 가습기살균제 같은 사고의 대비가 가능하다.

한국형 ‘살생물제법’은 어떨까. 기존 화평법에 있던 생활화학제품 23종이 살생물제법으로 이관되면서, 우리나라의 살생물제법은 유럽 살생물제법에서 관리하는 살생물질, 살생물제품, 살생물처리제품 뿐만 아니라 생활화학제품을 포괄하고 있다. 현재 관리하고 있는 생활화학제품 종류가 23종에 불과하지만, 시장의 다변화와 관리 대상 품목 확대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살생물물질과 살생물제품, 처리제품까지 하나의 법으로 해소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살생물질:유해생물을 제거, 무해화, 억제 등의 효과효능을 가진 물질 (예. 가습기살균제 물질 PHMG 등)
*살생물제품:유해생물을 제거 등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제품(예. 살균제, 보존제 등)
*살생물처리제품: 제품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살생물제품을 사용한 제품(예. 항균 필터, 항균 기능성 의류 등)

시행된 지 5년도 채 안된, 유럽의 살생물제법 또한 많은 한계를 갖고 있다. 살생물질, 살생물제품, 살생물처리제품에 대한 구분이 아직 명확하지 않아 여전히 현장에서는 혼란이 일고 있고, 소비자에게 위해 정보가 제대로, 적절하게 전달되지 않는 등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아있다.

24일 현재 정부에 접수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수는 6,072명이고, 그 가운데 사망자만 1,341명에 이른다. 이처럼 무고한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법이 바로 화평법과 살생물제법 이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들을 생각한다면, 이 법의 무게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다. 법 시행을 앞두고 현재도 그렇지만 앞으로 정부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 시행에 앞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선진국의 사례와 경험을 참고하고, 관련 기업, 전문가, 시민단체, 피해자 등 당사자들이 이마를 맞대어 한국 실정에 맞게 보완해 나간다면 조금 더 빨리 전환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노란리본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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