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의 편지

 

 

감추어진 현실을 더 많이 드러내는 것이 새로운 운동

 

이상윤/노동건강연대 대표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미행하고 감시하며 의도적으로 왕따시켜 그 사람이 병에 걸릴 정도로 고통 받게 했다면 그는 어떻게 될까? 학대죄로 유죄를 받고 징역을 살거나 벌금을 내게 될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이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죽게 될 걸 알면서도, ‘에이 죽으면 어때?’ 라는 생각을 가지고 어떤 이를 죽게 했다면 그는 어떻게 될까?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로 유죄를 받고 징역을 살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를 해도 처벌받지 않는 이들이 있다. 바로 기업이다.

기업은 이런 범죄 행위를 저질러도 그 고의를 입증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법망을 피해간다. 처벌받더라도 기업의 말단 직원 몇 명만 가볍게 처벌받을 뿐 진짜 책임이 있는 기업의 최고경영자나 고위급 임원은 처벌받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일반 상식과 현실의 괴리를 극명하게 드러내고자 한 것이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이라는 이벤트였고, 사회운동으로서의 기업살인법 제정 운동이었다. 노동건강연대,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2006년에 제1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을 개최했고 올해로 10년이 넘었다. ‘이 기업은 살인기업입니다. 이 기업을 처벌하기 위해 기업살인법을 만듭시다!‘ 라고 노동건강연대가 공식적으로 주장해온 것은 2002년부터이니 관련 운동을 진행한 지 햇수로 15년이 넘는다.

 

초기에는 한국의 노동자 사망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 컸다. 매년 20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일하다가 죽거나 일과 관련되어 죽는데도 아무런 사회적 움직임이 없는 나라, 매년 OECD 국가 중 산재사고사망률 1위를 다투는 불명예를 가지고도 실효적인 대책은 내놓지 않는 나라에서 이런 살인 행위에 대해 정부와 기업이 책임지라!’고 외치고 싶었다. ‘살인이라는 표현까지 쓰는 것은 너무 자극적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는 우리 사회가 노동자 사망 문제에 대해 한번이라도 더 심각하게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2000년대 초부터 이러한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 사회적 반향은 적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운동에 관심을 보였고, 정부도 산재사망 문제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아전인수격 해석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운동 때문에 노동부는 2005년 산재사망 특별대책을 세웠고, 그 이후 몇 가지 전향적인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산재사망자 명단을 공지하는 전광판 설치, 산재 불량 사업장 명단 공표, 산업안전보건법상 사업주 처벌 최고 형량 상향 등이 운동의 성과로 이루어졌다. 2005년 한 일간지에서는 이 운동을 주요 주제로 9회에 걸친 기획기사를 연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운동의 성과가 직선적이지만은 않았다. 특히 생명보다 이윤, 안전보다 돈을 더 중시하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규제완화, 민영화,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정책의 흐름 속에서 운동은 정체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반올림의 삼성전자 백혈병 산재 인정 투쟁, 201220대 청년들의 어이 없는 용광로 추락 사고 등 잇따른 산재 사망 사고를 겪으며, 노동자 생명과 건강에 대한 책임은 기업에게 있으며, 이 의무를 다하지 않은 기업은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인식은 꾸준히 확산되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이 운동은 그 폭과 깊이 면에서 근본적 변화를 맞이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 사회의 안전 문제, 특히 공공 안전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가했다. 그에 따라 자연스레 노동자 안전 문제에 대한 관심도 증가하였고, 이와 관련된 사회적 논의도 활발해졌다. 논의의 확장에 걸 맞는 구체적 변화는 부족했지만 이는 무책임하고 무능한 정부 탓이 컸다. 하지만 시민사회와 노동 현장의 관련 인식은 비약적으로 높아진 것에 견줘, 이러한 인식 전환에 따른 내용적, 질적 변화 내지는 발전 속도가 더딘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노동자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 질적 발전 방향이 모색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욱 큰 변화는 세월호 참사를 겪은 후 운동의 문제의식과 근본 지향이 더 넓고 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운동의 시작은 노동자 산재 사망의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기업이란 무엇인가? 기업의 의무와 책임은 어떻게 규정되며, 탐욕스런 기업의 이윤 추구 행위를 어떤 방식으로 규제하는 것이 정의로운가? 기업의 범죄 행위는 어떻게 정의되고 어떻게 처벌할 수 있는가?’ 물음이 이어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우선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졌지만, 이와 더불어 기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라는 근대적과제와 기업이라는 신자유주의적과제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과 더불어 실천적 대응을 지금, 현재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객관적 상황의 변화로 여러 시민사회, 노동단체, 노동조합 등이 연대하여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제정연대가 만들어졌고, ‘중대재해 기업처벌법(가칭)’ 초안이 만들어져 국회에 제출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광범위한 촛불 투쟁으로 만들어진 문재인 정부는 시민의 안전과 노동자 안전에 대한 정부 정책의 우선순위를 높여 국민과 노동자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역사상 최초로 201773일 산업안전보건의날 기념사에서 그 어떤 것도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보다 우선이 될 수 없다. 산업안전 패러다임을 바꾸겠다고 밝히며 노동자 안전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한국이 경제 규모에 견줘 산재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까닭은 다양한 요인이 중첩되어 그 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요인 하나 하나는 모두, 매우 구조적 측면을 가지고 있어 창의적이고 효과적인 정책 하나로 단번에 해결하기 힘들다. 위험의 외주화 경향, 행정기관의 무능력, 낮은 노동조합 조직률, 노동자 안전 문제에 관심 있는 주체 형성의 어려움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든 현재 한국의 노동자 안전 문제는 대통령이 관심을 표명하고, 노동부가 단기적이고 파편적인 계획을 발표한다고 해서 획기적으로 해결하기는 힘들다. 몇몇 의미 있는 법제도 개선 등이 가시적으로 있을 가능성은 있지만, 한국 기업의 체질 변화를 이끌어 내고 노동자 역량이 획기적으로 강화되기 전에는 체감되는 현실 변화를 이끌어내기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 역설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회운동의 역할이다. 능력 있고 양심적인 관료나 전문가들의 역할보다 몇 배 더 중요한 것이 노동조합의 활동이고 사회운동의 역할이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오히려 이 정부조차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구나하는 실망과, ‘노동자 안전과 건강 문제는 백 약이 무효하다는 비과학적 체념을 낳을 수도 있다.

이 시기, 노동조합과 사회운동 진영은 보다 현실에 밀착하여 드러나지 않은 문제들을 발굴하고 드러내며, 그 과정에서 대중의 인식을 바꾸고 사회운동을 만들어가는 일에 더 집중해야 한다. ‘정책과 협의의 정치가 아니라 운동과 광의의 정치가 더 필요한 시기인 것이다.

이에 우리 노동건강연대도 그간의 활동을 성찰적으로 정리하면서, 기업의 노동자 살인 행위를 보다 더 잘 드러내고,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며, 시민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활동에 보다 힘을 쏟을 것이다. ‘중대재해 기업처벌법(가칭)’ 초안이 만들어지고 이에 대한 국회의 논의가 활성화되는 시점에, 주관적 어려움 때문에 오히려 관련 활동이 부진했다는 것을 성찰한다. 더욱 깊고, 넓게 관련 활동을 진행할 것이다. 앞으로의 활동에 많은 관심과 비판, 조언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