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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_ 2007년 12월7일. 남극반도 킹조지 섬에서 펭귄 하나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남종영


세탁기에 빨래가 돌아가는 것처럼, 바다는 우리가 탄 배를 마음대로 휘저었다. 
“남극 환류에 진입한 겁니다. 남극에 들어가려면 꼭 치러야 할 의식이지요.”
휘청거리는 나에게 선장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객실의 탁자가 엎어졌다. 배를 따라오던 앨버트로스도 동행을 포기했다. 매일 세 차례씩 모이는 식당에 사람이 안 보일 때가 되고 나서야, 평안이 찾아왔다. 그리고 저 멀리서 은빛을 반짝이며 흘러내려오는 빙산이 보였다. 남극 환류는 남극대륙을 빙빙 도는 해류다. 배는 남극환류를 가로질러, 남극이 지배하는 영역에 들어섰다. 
킹조지 섬은 그러고서 하루를 더 항해해 도착했다. 이 섬은 남극에서 꼬리처럼 내려온 남극반도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정확히는 ‘아남극’이었다. 저기 먼 대륙의 땅의 탐험가들이 '거기도 남극이냐'라고 힐난할 만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바다가 주관한 의식을 치렀고 펭귄 또한 만날 수 있지 않은가? 
내가 남극에 온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기후변화를 취재하기 위해서였지만, 사실은 펭귄이 보고 싶어서였다. 
킹조지 섬 세종기지에서 해안가를 따라 2~3㎞ 가면, 대규모 펭귄 서식지가 있었다. 아델리펭귄, 젠투펭귄 등이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는 중요한 곳이었다. 대원들은 이곳을 ‘펭귄 마을’이라고 불렀는데, 나로선 꽤 괜찮은 산책길의 목적지가 되었다. 
언덕 위에는 펭귄 마을이 있었지만, 여기저기 둥지가 있어 조심스러웠고 펭귄 또한 바다에서 새끼에게 줄 먹이를 실어나르느라 분주했기 때문에 혼자서 들어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펭귄 마을로 가는 바닷길에는 어떤 날엔 바다코끼리가 엎드려 길을 막고, 펭귄들이 줄을 지어 걸어가곤 했다.
대부분의 펭귄은 한 번도 인간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런 것이 남극에 인간이 발을 들여놓은 지 100년 남짓밖에 안 되었다. 펭귄이 정작 두려워 하는 것은 해표나 범고래 같은 일상의 포식자이지,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가까이서 펭귄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서 펭귄을 쫓아다니면, 펭귄은 일정 거리 이상만 둔 채 도망갔다.
나는 전략을 바꾸기도 했다. 그리고 가만히 눈밭에 주저 앉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에게 쫓겨다니던 펭귄은 잠시 상황을 파악하는가 싶더니 한 발자국씩 나에게 다가왔다. 펭귄의 체취가 느껴질 만큼 가까와졌다. 펭귄에게 숨소리가 났다면, 그 횟수를 셀 수 있었으리라. 몇 초였을까.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엉뚱하게도 펭귄의 발을 찍었다. 돌밭으로 된 언덕을 종종걸음으로 오르고, 바다에서는 넓은 노가 되어주는 펭귄의 발. 사진을 찍자, 펭귄은 종종걸음으로 바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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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잠들었는데 신이 잠깐 왔다 간 순간, 소음과 혼란에서 갑자기 완벽한 조화가 찾아든 순간, 영원에 닿아있는 이 시간을 우리는 '에피파니'라고 부릅니다. 세계를 여행하며 만난 동물과 자연에 대한 짧은 생각을 한 장의 사진과 함께 담아봅니다.


남종영 생태지평연구소 운영위원 / 기자
15년 전 캐나다 처칠에서 북극곰을 만난 뒤 기후변화와 고래, 동물 등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