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 공정한 노동]
⑪ 나도 잘 몰랐던 ‘나에게 좋은 일’ 알아보는 법
“접대문화 없는 직장에 다니고 싶어요. 가치관에도 걸리고, 술도 잘 못 마시거든요.”
“저에게는 집과 회사가 가까운지가 중요해요. 퇴근 후 시간을 잘 쓰고 싶으니까요.”
“능률 끌어 올린다면서 ‘이것밖에 못 해?’ 하고 쪼아대는 문화, 그런 게 없었으면 좋겠어요.”
어떤 조직이 나에게 좋은 일터인지 알기 위해서는 어떤 점을 봐야 할까? 애널리스트들이 유망기업 분석하듯이 재정적으로 탄탄한지, 성장가능성이 있는지만 보면 될까? 탄탄한 것은 분명한데 조직문화가 나와 맞지 않는다면, 출근하는 것이 지옥처럼 느껴지는 곳이라면 좋은 일터라고 할 수 있을까?
희망제작소가 지난 10월 6일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스페이스류에서 진행한 ‘좋은 일 기준 찾기 릴레이 워크숍-나의 일 이야기’ 4회 취업준비생 편은 ‘나에게 맞는 일인지 정확하게 알고 입사할 권리를 찾자’는 취지로 기획된 행사였다. 앞선 연재를 통해서는 구인광고 분석, 근로계약서 작성 실습 세션의 내용을 소개했다. (취준생 워크숍 구인광고 분석 내용 보기), (취준생 워크숍 근로계약서 작성 실습 보기)
보드게임 ‘나에게 좋은 일’ 일반에 첫 공개
이어진 세션은 희망제작소가 자체 제작한 보드게임으로 ‘나에게 좋은 일’을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희망제작소 내부 구성원들과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개발 중이던 보드게임이 처음으로 일반 참가자에게 공개된 날이기도 했다.
이 게임은 아직 전반부까지만 개발된 상태다. 1부는 개인들이 ‘나에게 좋은 일’을 알아보는 내용이고 2부는 팀 단위의 협력을 통해 좋은 일을 위한 사회적 토대를 높이는 내용이다. 이날 워크숍에서는 1부까지만 진행됐다. (보드게임 ‘나에게 좋은 일’ 개발과정 보기)
희망제작소가 보드게임을 만든 취지는 ‘좋은 일’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건들을 알아보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요건들 중에서 나에게 더 중요한 요건들을 골라서 우선순위를 정해 볼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좋은 일의 모든 요건을 다 갖추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존재하기 어렵다. 단지 유망 일자리가 희소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규모가 큰 조직에서 체계적으로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자율적인 환경에서 최대한 독립적으로 일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즉, ‘나에게 좋은 일’은 다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좋은 일’의 기준을 단일한 것, 고정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대기업, 높은 초봉, 혹은 ‘사’자 붙은 전문직을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며, 그 일에 진입하지 못 한 사람들이 나머지 일을 한다는 인식이다. 그런 인식에 떠밀려서 좁은 문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던 많은 사람들이 막상 그런 일에 진입한 후에야 ‘이건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다’라고 깨닫기도 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신에게 좋은 일의 기준을 먼저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들의 기준들이 모이면 우리 사회 구성원의 상당수가 지향하는 ‘좋은 일의 상(像)’이 그려질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유명 대기업 공채사원, ‘사’자 붙은 전문직이 1980~1990년대 ‘좋은 일’의 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 여기, 우리 사회에 맞는 좋은 일의 상을 함께 그려야 할 책임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있는 셈이다.
내가 추구하는 ‘좋은 일’ 유형은?
보드게임 ‘나에게 좋은 일’은 ‘좋은 일’의 요건 40가지를 풀어서 써 놓은 ‘일 경험 카드’를 참가자들이 순서대로 한 장씩 구매하는 행위를 기본으로 진행된다. 카드를 구매할 때 지불하는 것은 참가자마다 40개씩 지급받은 ‘자원 칩’이다. 이는 어떤 일 경험을 가지기 위해, 즉 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원을 써야 한다는 의미다.
‘일 경험 카드’를 모으다 보면 카드에 기재된 색깔과 모양을 조합해서 ‘퍼즐 조각’을 받을 수 있다. 이를 개인의 퍼즐판 위에 잘 배열해서 최대한 꽉 채우는 것이 게임의 목표다. 게임이 종료된 시점에서 퍼즐판에 남은 빈칸이 가장 적은 사람이 승리한다.
워크숍 참석자들에게 처음 게임 룰을 설명했을 때, “어려워 보인다”,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했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게임이 정상적으로 진행돼 각자에게 맞는 ‘나에게 좋은 일’의 유형이 나올 수 있도록 다양한 장치를 넣어 설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테이블 당 배치된 퍼실리테이터들의 설명에 따라 직접 플레이를 하자 참가자들은 금세 룰에 익숙해졌다. 사전 시뮬레이션 상으로는 쉽지 않아 보였던, 퍼즐판을 빈 칸 없이 꽉 채우는 참가자도 여럿 나왔다.
게임들이 종료된 후 해석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각자 모은 카드의 색깔들은 일을 선택할 때 어떤 요건을 중요하게 보는지를 알려준다. 카드의 색깔들이 각각 ‘고용안정’, ‘임금’, ‘노동시간’, ‘조직 문화’, ‘주관적 만족도’를 뜻하는 것이다. ‘노동시간’에 해당하는 카드를 가장 많이 모았다면 그 사람은 일을 선택할 때 노동시간이 어떤 형태, 어느 정도인지를 중요하게 본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주관적 만족도’를 뜻하는 카드는 누구나 많이 모을 수밖에 없도록 설계됐는데, 아무리 객관적 요건(고용안정·임금·노동시간·조직문화)이 갖춰졌더라도 주관적 만족도가 없으면 그 일을 ‘좋은 일’로 보기 어렵다는 점을 반영한 것이다.
두 번째 분석에 사용되는 것은 각 퍼즐판 상에서 가장 많은 퍼즐의 색깔이다. 이는 개인이 추구하는 ‘좋은 일’의 유형을 보여준다. 안정·조직 내 성장·체계 추구형, 일에서 벗어난 ‘삶’의 중요성을 크게 치는 유형, 자율성·프라이버시·전문성 추구형, 관계·협력·가치 중시형, 성취·성과·전문성 중시형 등 총 5가지다.
“나도 인식 못 했던 내 성향, 신기하다”
게임 결과로 자신의 ‘좋은 일’ 판단 성향을 받아 본 참가자들 중에는 “나와 다르게 나왔다”는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는 “나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 했던 내 성향을 잘 보여준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는 ‘노동시간’을 중시한다고 나왔는데 정말 그래요. 지난 직장에서 근무시간이 초과되는 데 제일 많이 지쳤었거든요. 자기계발을 중시하고 일과 개인 삶은 분리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해 주는 직장을 원해요.”
“저는 ‘안정·조직·체계 추구형’으로 나왔어요. 실제로 지난 직장에서 야근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얻는 게 있어서 재밌었어요. 집에서 TV보고 밥 먹는 데 시간을 많이 쓰는 것보다는 성취하는 데 시간 쓰는 게 좋고 거기서 재미를 느끼는 편이에요.”
“저는 IT개발자로 일해 왔는데 ‘자율성·프라이버시·전문성 추구형’으로 나온 게 신기하네요. 다음으로 비중 있게 나온 유형이 ‘일에서 벗어난 삶 중시형’인데, 그것도 맞는 것 같아요.”
이렇게 나온 자신의 일 추구 유형을 놓고 자신의 지난 직장 경험, 희망 진로에 대해 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가 이래서 지난 직장에서 성과를 중요하게 여겼구나, 전문성을 키우는 일인지를 신경 썼구나, 생각하게 되네요.”
“제가 고른 카드대로 전문성 있는 사람이 되려면 지금 택해야 하는 직장은 좀 고생하는 곳이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고생해야 나중에 전문성을 쌓은 뒤에 여유로워 질 수 있을 테니까요.”
“저는 개인적인 성취에 대한 욕심은 별로 없는 편에요. 조직 문화가 좋은 곳, 안정과 균형이 있는 직장을 찾아봐야겠어요.”
전체적으로는 ‘좋은 일’의 요건을 다각도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자체가 좋았다는 반응들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조건을 놓고 선택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심하게 된다는 게 새로웠어요. 특히 ‘튼튼한 노동조합’ 같은 요건은 취업할 때 잘 생각해보지 않는 것인데, 이런 기회에 생각해 보니 중요한 측면이네요.”
“어떤 유형의 일을 택하려면 다른 조건은 포기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니까 좋았어요. 자기 시간을 자유롭게 쓰고 싶은 사람은 ‘정규직’이라는 고용조건을 포기해야 할 수 있고, ‘칼퇴근 보장’을 원하는 사람은 최저임금 주는 직장이어도 택할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아직 개발 중인 게임인 만큼 구체적인 룰에 대해서는 개선 의견들도 나왔다. 이 의견들은 게임 개발 과정에 반영될 예정이다.
4060세대 워크숍에서 2부 공개
이 보드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다음 기회는 12월 3일(토) 오후 1~5시에 서울시NPO지원센터 대강당에서 진행되는 4060워크숍 ‘끝에서 두 번째 일, 좋은 일이려면?’이다.
이 행사는 일 전환을 꿈꾸는 40~60대를 대상으로 한다. 살면서 여러 번 직업을 바꾸고 다양한 일 경험을 하게 되는 시대가 됐는데도 여전히 생애 첫 번째 일을 기준으로 ‘좋은 일’을 논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워크숍이다.
단, 유망 직종이나 직업, 직장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주기 위한 행사는 아니다. 중·장년기에 하게 될 일도 ‘좋은 일’이기 위해 우리 사회에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함께 논의하고, 정책제안을 도출해 보기 위한 자리다.
또한 이 행사에서는 보드게임 ‘나에게 좋은 일’의 2부가 처음 공개될 예정이다.
글 하단의 ‘좋은 일 기준 찾기’ 온라인 설문조사는 워크숍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도 비슷한 흐름에 따라 좋은 일의 기준과 이를 위한 사회의 변화 방향을 생각해 보도록 구성됐다. 오는 12월까지 진행될 이 설문조사 결과는 좋은 일이 많은 사회를 위한 정책 제안을 만드는 데 반영된다.
글 : 황세원 사회의제팀 선임연구원 · [email protected]
사진 : 이우기 |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