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7일, 서울 aT센터 그랜드홀에서 인농 박재일 선생 6주기 이야기마당이 열렸습니다. 곽금순 한살림연합 상임대표의 인사로 시작된 이야기마당의 분위기는 인농 선생의 삶을 담은 자료영상 시청으로 무르익었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마당에 들어서서 인농 선생과 오랫동안 우정을 나눴던 이길재 전 국회의원은 ‘인농 선생과 함께한 농업농촌을 위한 운동과 우리 농업현실’을 주제로 가톨릭농민회 활동 당시의 인농 선생을 추억했습니다. 이어서 정현모·정광영 생산자, 윤선주 한살림 연수원장은 ‘함께하는 이야기’에서는 인농 선생과의 인연과 그의 성품에 대해 풀어냈습니다.
이번 이야기마당에서는 특별히 장덕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를 초빙해 ‘급변하는 시대 환경과 우리의 대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장 교수는 “대외적으로는 동북아 원전 및 통일 문제가, 대내적으로는 이중화·고령화·정치체제 문제가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 우려스러운 상황”이라며 “입장과 차이를 넘어서서 공감과 합의를 만들어가는 정치체제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8월 19일에는 충북 괴산에 있는 인농 선생 묘소참배가 이어졌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생산자와 조합원, 실무자들은 인농 선생의 뜻을 이어 한살림 하는 것의 의미를 다시금 가슴속에 새겼습니다.
올해는 인농 선생이 한살림운동을 시작한 지 꼭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살림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만나게 하고 친한 사이가 되도록 하여,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보호하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보장하는 사이가 되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라는 인농 선생의 꿈으로 시작된 한살림이 앞으로 더욱 큰 꿈을 꿀 수 있도록 많은 관심 바랍니다.
■ ‘인농 박재일 선생 6주기 이야기마당’에서 나눈 이야기
인사말 | 곽금순 (인농기념사업위원장, 한살림연합 상임대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그저 묵묵히 그 자리에서 살아왔는데 우리가 했던 운동은 정말 새로운 방식의 운동이었구나를 느끼게 됩니다. 어딜 가든지 사람들이 너무 화에 차 있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사이좋음이나 관계 좋음이라는 것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겠구나, 정말 서로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서로의 마음을 읽어주면서 배려할 때 가능한 것인데, 이제까지의 30년은 그렇게 왔던 것 같습니다. 시장 상황 등 여러 환경에 노출되면서 어려움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올해 크고 작은 공간에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면서 30년을 맞아 어떤 방향을 찾아나갈 것인가를 궁리하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해 잘 알고 마음을 모아야 하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 이 자리도 그러한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함께 마음 모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야기마당 1>
인농 선생과 함께한 농업농촌을 위한 운동과 우리 농업현실 | 이길재 (전 국회의원, 가톨릭농민회 초대회장)
큰 살림 운동이 30년 역사 속에서 많이 발전해 왔는데, 아직도 우리 사회는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땅이, 농업이, 자연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걸 살리는 운동을 한살림이 계속 열심히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자리에서는 과거 가톨릭농민회 운동을 통해 인농 선생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1966년 창립부터 1984년까지 가톨릭농민회 본부에 근무하면서 박재일 형제와 만나서 함께 일했습니다. 과거 70-80년대 인농이나, 그리고 그 이후에 한살림을 만들어서 여기까지 온 인농이나 차이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1973년 남한강 홍수로 원주교구에서 재해대책사업이 진행됐을 때 인농이 가톨릭농민회와 만났습니다. 저는 가농에서 전국에 농촌,농민과 관련된 일이 있다면 달려가서 만나고 함께 일해 왔는데, 그때 인농과 돌아가신 지학순 주교, 김영주 회장님 등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원주교구가 가농에 참여하고, 가농이 원주교구 재해대책사업에 조금이나마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확실히 뛰어난 인물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1974년, 그 이듬해 인농이 가농 전국 조직 이사가 됐습니다. 75, 76, 77년에 부회장으로, 78년, 81년에 또 전국 이사로 일을 하고, 82-83년에 전국 회장으로 어려운 일을 해냈습니다. 제 기억으로 그 전에도 회장으로 누차 추대했지만 본인이 고사했는데, 82년에는 책임을 맡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0여 년을 전국 본부 임원으로 열심히 활동했고, 가농 성장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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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농민회 50년 활동
가농이 올해 50주년을 맞습니다. 설립 당시에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4.19혁명과 군사쿠데타로 군사정권 통치가 시작됩니다. 민주세력들이 저항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64년 한일협정 당시 6.3시위로 많은 이들이 구속되고, 군사독재 연장 반대운동이 계속되고, 70년대 노동문제를 대표하는 전태일 분신사건이 일어나고, 72년에 유신독재가 시작되었습니다. 긴급조치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고 희생되었습니다. 유신독재가 끝난 뒤에도 신군부가 등장하고, 그 속에서 우리 농민운동도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경제정책이라는 게 외국 자본에 의한 수출진흥경제개발계획이었습니다. 외국 자본을 끌어다 수출공업을 일으키는 형태였습니다. 따라서 저노임과 저농산물 가격정책이 실시됐습니다. 그 속에서 농업이 희생되고 어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가격이 보장되지 않는 증산 정책으로 풍년도 걱정 흉년도 걱정이었습니다. 소비를 촉진시키는 생활개선사업, 새마을운동이 진행되면서 일 년에 수십만 명씩 이농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속에서 가농운동은 무엇을 했는가.
처음에는 협동만 잘 하면 산다고 생각하고 협동운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생산, 판매, 구매.. 양돈조합 같은 생산조합도 만들고 협회도 만들었습니다. 협동농장도 도처에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6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이 구미 협동농장까지 헬리콥터를 타고 방문한 적도 있습니다. 농촌의 신용협동조합을 보급하고 만드는 일도 앞장서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제도와 정책이 협동과 자주적인 노력들을 포용하지 못하고 계속 수탈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그래서 농민들은 농촌을 계속 떠나게 되죠.
유신 체제가 되면서 우리 운동도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강제농정거부운동, 한 예로, 신품종을 보급하는데 농민들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어요. 밥맛이 없어서 소비자가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옛날 벼를 심으면 공무원들이 동원돼서 그 못자리를 다 짓밟고 다니는 겁니다. 비료, 농약 등 농자재를 강제로 판매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신품종으로 노풍이라는 게 꽤 유명했는데 전북에서 강하게 노풍피해보상운동을 전개하고 보상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정부와 갈등 관계로 나가게 됐습니다.
당시 농협은 정부의 농업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이었습니다. 박근창 교수 같은 분은 농협을 두고 “농민을 수탈하는 파이프라인”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농협을 바로잡아야 농민이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 농협민주화 운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조합장 직선제운동 100만 서명운동, 직접 조합운영에 참여하자는 취지로 실시한 교육 등을 진행했습니다.
어려움이 많았지만 대표적으로 함평고구마사건(1976-1977)이 있습니다. 4개 도 고구마 생산 농민들이 정부가 약속한 수매를 지키지 않자, 함평에서 보상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전국 운동으로 확산시켰습니다. 결국 1977년에 보상을 받게 됩니다. 대단히 큰 사건이었습니다.
이듬해 1978년에는 경북 안동에서 오원춘 사건이 일어납니다. 감자씨를 정부에서 공급했는데 제대로 싹이 나지 않아 피해가 엄청났습니다. 경북 영양에 청기라는 천주교 공소에서 보상운동을 전개해서 그때는 바로 보상을 해줬습니다. 그런데 1979년 그 주도자였던 오원춘 형제를 납치해 사건을 크게 만들었던 겁니다. 79년 9월 명동성당에서, 그 이전까지도 전국 각지에서 기도회가 있었고, 마지막 기도회가 열렸는데, 한국 천주교 역사상 기록적으로 천주교 성직자 700여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이 정도 단계는 정치투쟁 단계로, 농민생존권만 주장하던 데서 발전한 것입니다. 그해 10월 10.26 사건이 일어나면서 유신독재 정권이 막을 내립니다.
그 밖에도 가격보상운동, 생산비보장운동, 수입농산물 반대운동을 전개했는데, 직접 쌀 생산비를 조사해서 발표하는 대회도 매년 가졌습니다. 정부가 아주 곤혹스러웠죠. 그리고 농사짓는 데 땅이 제일 중요한 만큼 1974년에 농지임대차조사를 전국적으로 실시합니다. 소위 소작농 실태조사로, 정부 정책의 실태를 고발한 것입니다.
가농에서 인농의 역할
당시 운동에서는 동지적 신뢰를 매우 중요시했습니다. 항상 탄압과 감시 속에서 해왔기 때문에 그것을 생명처럼 여겼던 거죠. 지금 조금 아쉬움이 있다면 친구로서의 우정을 나누는 일에 너무 등한시하고, 일 위주로 관계 했던 점, 너무 각박했다는 생각입니다. 인농은 늘 근엄하고 중후한, 무거운 자세로 말 한마디 한마디 깊이 있었습니다. 같이 회장단에 일했던 서경원 형제가 박재일 회장보다 나이가 한 살이 더 많은데도 모르고 형으로 대했던 것도 기억납니다.(웃음)
자기 몸을 던져서 모든 생활 속에서 가농을 위해서 몸을 던졌기 때문에 그 속에서 품성과 자질이 저절로 드러났습니다. 원주교구 사회개발위원회의 경험, 그리고 원주의 민주화운동의 경험, 이런 것들이 가농 지도력 형성에 일조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남한강 유역 수해지역 농민들의 협동 활동을 만들어내고 협력하면서 얻은 현장 체험은 전국 농민운동을 발전시키는 데 좋은 경험으로 기여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70년대 가농이 성장하고 자리매김을 한 데 인농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농업농촌 현실
작년 11월 14일 농민대회 때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여전히 의식불명 상태입니다. 당시 민중대회에서 농민들의 구호는 “밥쌀수입 반대, 농산물 가격 보장, FTA‧TPP 반대” 이 세 가지였습니다. 이 때문에 전국 농민들 수만 명이 모이는 민중대회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게 오늘의 농업농촌 현실입니다. “공권력과 정책의 잘못에 의해 현재 식물인간 상태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2014년 FTA를 맺는 국가가 50개국인데, 그중 농산물 도입량이 돈으로 환산해서 18조7,900억 원입니다. 약 10년간 170배로 외국 농산물이 증대되고 있습니다. 외국의 싼 농산물이 들어오는데 농업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선진국에서는 농업을 시장 논리로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보호정책을 쓰는 반면 우리는 여전히 자유경쟁에 내맡기는 실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인농 박재일 회장이 86년에 시작한 살림운동, 농촌만 살리는 게 아니라 도시와 농촌을 같이 살리는 큰 살림 운동이 30년 역사 속에서 많이 발전해 왔는데, 아직도 우리 사회는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림의 문화로 바꾸어가는 우리 사명은 아직도 창창합니다. 여러분들이 사명감으로 노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요체는 땅, 자연이라고 합니다. 땅은 생명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이 땅이, 농업이, 자연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걸 살리는 운동을 한살림이 계속 열심히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함께하는 이야기 | 정현모 · 정광영 · 윤선주(진행) · 이길재
처음 시작할 당시에 농약을 안 치니까 논에 생전 구경도 못한 풀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이 와서 (풀 뽑기를) 했는데, 그때 같이 한 분들이 한살림의 주춧돌 역할을 하고 있어서 한살림이 앞으로 더 젊어질 것 같아요.
윤선주 (한살림 연수원장)
한살림에서 거의 전설이라고 알려져 있는 생산자 두 분을 모셨습니다. 정광영 님과 정현모 님 두 분입니다. 직접 박재일 회장님과의 인연, 한살림을 시작하게 되신 동기 등을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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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모 (한살림 생산자, 강원 공근)
인농 선생을 통해서 가톨릭농민회운동을 교육받고, 또 신협운동, 소비자운동 교육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농촌에 장리쌀이라고 있었는데, 80kg를 먹으면 이듬해 120kg를 갚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에 신협운동, 소비자운동을 통해서 생활이 나아지면서 없애게 되었습니다.
선생을 통해서 노는 것도 배웠습니다. 어떻게 놀아야 잘 노는가. 한살림 시작하기 전에는 천렵도 많이 다녔습니다. 한살림이 시작되고서는 논과 밭하고 놀아라 해서 논밭에서 어떻게 불러대는지, 도라지밭 같은 데서 1년에 여덟 번씩 불렀어요.
논밭에서 힘든 것보다 더 잘 노는 방법을 잘 지켜나가고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소비자 잘 되지 않는데, 농촌에서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우리 농산물 많이 아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한살림운동 처음 시작할 때 교육을 받았는데, 밀가루 수입 과정에서 20회 농약을 친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우리밀도 있지만 여전히 먹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잘 해결해가는 한살림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윤선주
놀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만들어주셔서 한살림은 더욱 특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광영 (한살림 생산자, 충남 당진)
민주화운동, 생협운동을 위해 애쓰신 여러 분들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3년 전에 뇌경색이 와서 사실 이 자리에 서기 어렵습니다. 전에는 농민운동 하면서 서울 큰 성당에 가서 강연도 여러 번 했습니다. 농민 문제에 대해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어떻게 해야 농업을 살리고 소비자인 도시 생활자들의 건강을 지키고 어떻게 국민들이 건강한 우리 농산물로 생활할 수 있는가, 많은 분들 앞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75년에 가농을 처음 알고 교회 교육으로 대전에 갔는데, 당시 이길재 회장님, 이상국 대표님 같은 분들이 농민회 실무자로 계셨고 김영주 선생님도 신협 교육 갔을 때 뵈었습니다. 당시 몇 분들이 가톨릭노동청년회를 하다가, 농민들이 어렵게 살고 있다, 우리는 농민 쪽에 관심을 갖고 농민운동을 해보자고 하셨습니다. 신자 교육을 갔는데 교리 교육보다는 가농 교육을 했어요. 저는 배운 건 없지만 말씀하시는 게 여러 가지로 타당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주위 분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농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우리 교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이 운동을 같이하자고 했더니 대답만 하고 같이 한다는 분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젊은 나이에 분회를 구성했는데, 당시 많은 분들이 찾아와서 독려해주고 하셨습니다. 그동안은 가정과 교회밖에 몰랐는데, 가정을 넘어서 농민의 한 사람, 교회의 한 사람,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역할을, 행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뒤로 가농 모임이라고 하면 안동도 가고 원주나 광주도, 서울, 대전은 말할 것도 없고요. 호미로 밭을 매다가도 연락이 오면 당장 손을 놓고 갔어요.
1986년 무렵에, 당시 가농에서 지도신부님이 교육을 하면서, 농촌경제활동이나 민주화운동도 중요하지만 가농 회원들의 역할은 생명을 가꾸는 일이다, 농약을 줄여서 주도록 하라는 교육을 받았어요. 그전엔 영농교육을 가면 첫째가 농약 주는 교육이었어요. 일 년에 열한 번을 주라고 했어요. 저도 아홉 번씩 농약 치고 비료도 적당히 주면서 마을에서 농사 잘 짓는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런데 신부님이 우리나라 암 발생원인은 농민들이 농약을 주는 것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마음의 가책을 느끼고 아홉 번 주던 것을 세 번으로 줄였더니, 이상국 대표님이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찾아와서 한살림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어요. 가농에서 하자는 거는 무조건 좋은 일이다, 감옥에 가도 같이 가야 되고, 그렇기 때문에 바로 대답을 했어요. 그해 12월인지 서울에서 첫 모임이 있다고 해서 갔는데, 그날 생산자로 모였던 분이 다 가농 회원이었어요. 음성의 최재명, 최재영 씨 등등. 본격적으로 87년부터 한살림을 시작하고, 당시에는 무농약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서 화학비료까지 주지 않는 유기농을 하면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박재일 회장님은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항아리 같은, 예언자적인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을 만날 수 있어서 이제까지 한살림을 해온 것이 큰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선주
인농 선생은 가셨지만 한살림의 지향과 활동 속에서 늘 함께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혹시 인농 선생이 생산자 분들께는 무슨 말씀을 하실 거 같으세요?
정현모
이 땅을 살려내고 이 땅에서 얻은 일용할 양식을 우리 모두 나누면 우리 모두 건강해질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 발전에도 이바지할 수 있지 않나 생각을 하고, 그래서, 같이 놀다 보면 제 몸도 망가지고, 조금 힘든 과정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발 들인 다음에야 끝까지 함께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살림 처음 시작할 당시에 농약을 안 치니까 600평 정도 논에 생전 구경도 못한 풀들이 많이 생겨서 당시 대학생들이 와서 (풀 뽑기를) 했는데, 그때 같이 한 분들이 윤형근, 최효숙, 김재겸, 윤희진 이런 분들이었어요. 낮엔 일하고 밤엔 얼마나 술을 많이 먹는지(웃음). 이제 이분들이 한살림의 주춧돌 역할을 하고 있어서 한살림이 앞으로 더 젊어질 것 같아요.
이야기마당 2>
사회: 정규호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
급변하는 시대 환경과 우리의 대응 | 장덕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원전 문제에서 안전을 확보하는 거의 유일한 해법은 ‘동북아아 원전투명성기구’와 같은 것을 만들어 서로 감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제안을 하려면 우리부터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투명성을 가져야죠. … 기후변화부터 고령화, 이중화 등 한국 사회가 당면한 큰 과제들이 있는데, 이러한 공동의 문제를 같이 풀어가기 위해서는 중간조직이 필요하고, 합의제 민주주의를 강화해나가야 합니다.
저희 연구소에서 2008년부터 연구를 시작해서, 올해로 8-9년째입니다.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이 함께 연구해온 결과인데, 오늘은 짧게 말씀드리겠다.
OECD 34개국에 대해 다양하게 연구해왔고, 그 결과 굉장히 우려스러운 상황에 봉착해 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80년대부터 30여 년 사회학 공부를 해왔는데, 그간 요즘처럼 절박한 심정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80년대는 지금보다 훨씬 암울한 상황이었지만, 당시엔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을 거라고 대부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절박함을 많은 한국인들이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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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회 문제 가운데 현재 우리 시스템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문제를 꼽아봤다. 동북아 원전 문제, 넓게는 에너지 문제라고 볼 수 있겠다. 몇 년 전 후쿠시마 원전이 멜트 다운 됐을 때 많은 분들이 걱정하셨고, 국내 원전에 대해서 걱정하시는 분들도 많지만, 더 심각한 것은 중국 원전이다. 중국 동남해안에 건설했거나 건설중, 또는 예정인 원전이 200개다. 여기가 편서풍 지역이다. 후쿠시마 원전은 한국으로 영향이 올 가능성이 별로 없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200개 원전을 아무 문제없이 잘 관리할 것인가. 일본도 실패했는데. 만약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심각하다. 문제가 안 생긴다면 괜찮은가? 주로 바닷가에 원전을 짓는 이유는 수냉식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바다에 버려지는 온배수가 바닷물 온도보다 7-8도 높은데, 이게 소양댐 50개 분량이다. 원전 문제가 안 생긴다 해도 서해바다 생태계 재앙은 피하기 어렵다고 봐야 한다. 우리가 중국한테 원전 짓지 말라고 할 수 있나? 우리는 늘려가고 있는데. 그렇다면 거의 유일한 해법처럼 보이는 것은 일종의 동북아원전안전성기구를 만들어서 서로가 서로의 원전을 투명하게 감시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이 먼저 세계 최고 수준 원전 투명성을 확보하고 도덕적 권위에 기대어 제안해야 하는데 우리는 거의 못하고 있다. 월성1호기 수명연장 결정을 할 때,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야당 추천 인사들이 퇴장한 상태에서 새벽 2시에 결정했다. 이런 방식이 괜찮은 건가. 독일은 완전 탈핵을 하기로 결정했다.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데 40년 걸렸다.
또 다른 문제는, 동시에 이것이 가져오는 기후변화, 해수면 상승, 범람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이다. 지금 배출하는 온실가스 시나리오대로 가면 2100년이 되면 군산, 김제, 정읍, 신안, 무안, 목포, 해남, 완도, 고흥, 고성, 여수, 순천, 광양 상당 부분이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이보다 더 심각한 지역도 있다. 대표적으로 인천이다. 정치인들 만날 기회가 간혹 있으면, 일단 이것부터 같이 해결하자고 한다. 지역이 있어야 지역 얘기를 할 것 아닌가. 지금 정치 체제에서는 장기적 과제에 관심이 없다.
또 하나는 통일 문제다. 대학 등 정부출연기관을 비롯해서 연구에 거의 대부분 빠져 있는 변수가 통일이다. 이걸 집어넣으면 보고서가 완전히 바뀌어야 하는데, 너무 큰 변수라 감안할 수가 없다. 만약 통일이 온다면, 대박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대박이기 위해서는 상당히 긴 시간 준비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쪽박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당시 미국 유명한 북한전문연구자는 북한 정권이 붕괴할 경우 지역을 안정화하는 데에만 병력 46만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을 대박이라고 할 수 있는가.
통일 비용으로 가장 적게 추산하는 데가 2천 조, 많게는 5천 조 원이다. 남한의 10년-15년 예산을 통째로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이고, 1년에 예산의 10%를 쓴다고 하면 100년이 걸린다는 거다.
서울대 의대 통일의학센터 자료에 의하면 북한 내 요오드 결핍 환자가 1천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키가 140-150정도, 아이큐가 80정도 선에 머문다고 한다. 통일은 대박이라고 얘기할 때 숨어 있는 전제는 주로 경제적 측면에서 통일을 본다는 거다. 값싼 노동력, 지하자원 등. 그런데 저런 환자 천만 명이 있다고 할 때 값싼 노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 전제에도 반대하지만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해도 대박이라고 할 수 없다.
북한 주민도 헌법적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통일 대박 얘기를 하기 이전에 북한 주민을 우리가 관리해나가는 대책이 있어야 한다. 1년에 미역국을 두 번만 먹으면 요오드 결핍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관점에서 북한 정권이 정말 나쁜 정권이다.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도 장기적으로 어떻게 이를 해결할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 외에도 통일과 관련한 우려 지점은 매우 많다. 화폐 통일 문제. 관용성 측면에서 한국이 62개국 중 최하위다. 1대 1 교환은 절대 동의가 안 된다. 남북한 차이는 동서독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1대 100으로 바꿔도 모자라다. 장기적으로 대비해야 하지만 지금 시스템하에서는 할 수 없다.
1953년 정전 이후, 소위 새로운 지정학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 같다. 중국의 ‘일대일로’, 한국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철도와 해상운송을 통해서 전 세계(호주와 북남미 제외)를 연결하는, 실크로드를 되살리는 프로젝트다. 저게 완성되면 전 세계 인구의 63%, GDP의 25%, 해상운송의 24%를 섭렵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가장 중요한 국가 프로젝트다. 병행해서 만들어진 게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다. 여기는 ‘일대일로’에 돈을 대는 기구다. 우리는 여기에 가입했고 일본은 가입하지 않았다. 중국 패권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데, AIIB에 가입한다는 것은 중국 패권 쪽에 발을 담그겠다는 시그널이다. 일대일로에서 특히 경제활동이 많이 일어나는 6개 경제회랑이 있는데 동북아 경제회랑이 없다. 북한에 막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돈을 투자했는데(5번째로 많이) 이득을 못 본다.
과거에는 미국 패권이 바다 건너 일본과 한국에까지 와 있었고 유일한 패권이었는데, 이제 중국 패권이 턱밑까지 와 있다. 두 개가 한반도에서 만나서 갈등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전쟁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져 있는 상태라고 생각된다.
박근혜 대통령 공약이기도 했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중국의 일대일로가 거의 똑같은 내용이다. 유일한 걸림돌이 북한이다. 어떻게 이들을 다루어서 적어도 경제적 측면만이라도 협력할 수 있는 길을 만들 것인지가 장기적 고민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은 개성공단조차 폐쇄한 상태다. 한국 대통령이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했다. 최근에는 반대로 사드 배치를 결정했다. 사드의 필요 여부를 떠나, 어떤 방식으로 정책적인 결정에 도달하느냐가 문제이다.
한국 사회 여러 가지 특징들을 연구해보니 가장 중요한 것은 세 가지 추세, 이중화, 고령화, 우리 정치체제(민주주의 문제)다. 하나하나 다 어려운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이 세 가지가 서로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이중화’는, 같은 한국 사람인데도 내부자와 외부자로 나뉘게 된다는 것이다. 40대 이상 정규직 남성이라면 내부자다. 세대적으로 20대 청년들은 내부노동시장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굉장히 적다. 한 세대가 외부자가 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생긴다. 아주 심각하게 사회 전 영역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지금도 OECD 34개국 중 노인빈곤율이 압도적 1위인데, 고령화가 진행되면 지금보다 빈곤노인이 더 많아지고 복지 수요는 더 많아진다. 노인빈곤이 증가하고, 세금은 점점 줄어든다. 세원은 고갈되고 그 결과 이중화를 더 가속화시킨다. 이중화가 진행되면, 부작용 중 하나가 출산율을 낮춘다. 요즘 젊은이들 결혼/연애 잘 하지 않는다. 이중화와 고령화가 서로를 악화시키는 관계다.
근본적으로 이중화의 해법은 정치에 있다. 전 세계적 현상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회 연대를 위해서 어느 방향으로 간다거나 재정 투입을 결정하는 것인데, 한국 정치권은 이중화 해결 의지가 없어보인다. 혹은 불개입선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중화가 진행되면 외부자들은 점점 더 정치에 개입하기 힘들어진다. 일용직 노동자가 대표적이다. 대의제 불평등을 가져오는 것이다. 내부자들을 더 많이 대표해주고 외부자들은 대표해주지 않는다. 또 서로가 서로를 악화시키는 관계다.
고령화가 진행되면 지금 시스템을 바꾸기 굉장히 어려워진다. 연령효과도 있지만, 일본은 지금 재정적자가 30년째 진행되고 있다. 대부분 의료와 연금, 즉 고령화 때문에 발생한다. 그럼 연금개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본은 이미 초고령사회가 됐기 때문에 유권자의 절반 정도가 연금 수혜자다. 연금 개혁을 하기 어렵다. 재정적자 증가를 멈추려면 고령화가 멈춰야 한다. 개혁 못하고 계속 가면 2065년에 고령화가 멈춘다. 앞으로 50년 더 재정적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우리도 고령화 속도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기 때문에 빨리 손쓰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어렵게 된다.
고령화에 대해 정치가 무엇을 해야 하는데, 현재는 고령화를 이용하는 데 더 관심이 있어 보인다. 선거 때면 세대 간 갈등을 통한 결집을 유도한다. 서로가 서로를 악화시키는 이 세 가지 문제를 풀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게 저의 진단이다.
한국이 지금 굉장히 고령화사회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고령화 속도가 제일 빠르다는 거지, 아직은 비교적 젊은 나라에 속한다. 경제활동인구 100명이 비경제활동인구 몇 명을 부양해야 하는가가 부양률이다. 1970년 이래 부양률은 거의 제일 낮은 상태다. 문제는 빠른 속도로 올라가서 2050년이면 1대1 부양사회가 된다는 거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7~8년 정도라고 본다. 부양률 상승 곡선을 보면 2022~3년부터 급격히 빨라지기 시작한다. 가장 많은 인구집단이 경제활동에서 빠져나가는 시기다.
사람들이 인식하고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하면 정책 수단이 먹히지 않을 거다. 1970년에도 90이 넘는 부양률을 경험했고 버텼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두 시기는 전혀 다르다. 아동부양과 노인부양률로 나뉘는데, 1970년대에는 85 정도가 아동부양이었다. 노인부양은 10이 안 됐다. 2050년에는 95 중 75가 노인부양, 아동은 20이 채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의 오늘을 만들어준 노인 세대를 모른척할 수 없을 것이다. 패닉 상태에 이르기 전에 남은 시간 동안 빨리 뭔가를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질의응답
사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하셨고 때를 놓치면 어려운 중요한 시기가 아닌가 하셨는데,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관성, 습관도 바꿔야 할 테고. 한살림도 마찬가지로 때를 놓치지 않고 지혜를 모아서 미래를 준비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기후변화라든지 여러 우리 시대가 당면한 큰 과제들이 있는데, 이게 너무 중요한데 장기적이고 거대한 과제여서 누구도 당장 책임 있게 해결하려고 나서지 않는 현실이다. 장기적인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구성원들의 공감과 합의를 잘 이끌어내는 책임 있는 리더십이 필요한 것 같다. 엮어서 말씀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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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
이런 얘기를 하면 많은 분들이 불안해하신다. 확실한 해결책은 없는 것 같다. 이중화, 고령화, 정치체제 세 개를 놓고 보면 이중화와 고령화는 짧은 시간 안에 추세를 역전하기 어렵다. 이중화는 한국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근본 원인은 보통 두 가지로 얘기한다. 하나는 기술 변동, 예전과 같이 사람을 많이 고용할 필요가 없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제조업이 점점 줄어들고, 한 사람이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기본적으로 제조업에 기반한 일자리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게다가 세계화로 일자리가 국경을 넘어 이동한다. 두 가지가 근본적인 것이라서 이중화를 하루아침에 바꾸기 어렵다. 고령화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가장 가능성 있는 것은 정치를 바꾸는 것이다. 어떤 조건들의 조합이 맞으면 하루아침에 바뀌기도 하는 게 정치다. 우선 박근혜 정부의 남은 임기는 굉장히 성공적이어야 하고, 다음 정부를 굉장히 잘 뽑아야 한다.
그를 위해 정치인 비판도 필요하지만, 한국은 정치 혐오가 심하고 반면 정치 참여는 거의 하지 않는 나라다. 우리 모두의 일을 1/n로 나눠서 같이 결정하는 것. 평소에 관심 갖고 개입하고 주장하고 그러다가 투표하고, 이런 과정을 가야 할 거 같다. 다가오는 선거 관련해서 어떻게 하면 이미지가 아닌 정책을 가지고 긴 시간 경쟁하게 만들 것인지.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회
상황이 엄중할수록 입장과 차이를 넘어서서 공감과 합의를 만들어가는 게 중요한데, 합의제 민주주의에 대해서 더 여쭙고 싶다는 질문이 있었다. 또 저출산 고령화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사례가 있는지, 보편적 복지/선별적 복지 중 어떤 게 우리에게 적절한지 등, 짧게 답해주시면 좋겠다.
장덕진
저출산 고령화 문제 성공적 해결 사례는 대표적으로 프랑스를 들 수 있다. 전 세계가 다 같이 고령화로 가는 게 맞다. 우리는 속도가 빠를 뿐이다. 우리나라 고령화 못지않게 걱정스러운 게 중국이다. 2040년이 되면 은퇴자가 4억 명이 된다.
프랑스의 해법은 아기가 태어나면 어떤 과정을 거쳐 태어났더라도 무조건 국가가 책임진다는 것이다. 한국은 우리나라 복지 지출이 OECD 중 끝에서 세 번째로, 복지 지출이 굉장히 낮기도 하지만 상당 부분이 자녀에 연동돼 있다. 그런데 법적으로 혼인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만 인정해준다. 물론 도덕적으로는 다양한 형태 출산에 대해서 비판하는 분도 있겠지만, 태어난 아이는 잘못이 없다. 한국의 영아사망률이 드라마틱하게 낮아졌는데 유일하게 증가한 게 태아사망이다. 합법적 부부 사이 출산이 아니면 비난, 경제적 부담, 사회적 비용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출산율 기준으로 0.3 정도 낮아지고 있다.
보편복지/선별복지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과거 보편복지에 반대하는 분들은 예를 들어 이건희 회장 손자 얘기를 하신다. 한편으로 일리가 있다. 장래 이 재정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도 고민이다. 그런데 다른 나라 사례를 보면 조세저항이 가장 심한 방식이 상위 소득 하위 80%에게만 복지를 준다고 했을 때다. 재정으로만 판단할 수 없다. 유럽의 보편복지 국가들의 경우 일자리가 늘어나고 경제 팽창 시기에 복지국가를 만들었는데 우리는 줄어드는 시기에 만들어야 한다는 특징이 있고, 한국인들은 압도적으로 물질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한국인들 대상 조사해보면 복지를 늘리면 게을러져서 안 된다는 응답이 많이 나온다. 가치관의 특성을 감안할 때 현실적으로 수용 가능한 것은 선별복지 쪽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합의제 민주주의, ‘민주주의가 뭘까’ 했을 때 대체로 다수결을 떠올릴 거다.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한 가지 중요한 운영 방식인데 이 외에도 많지만 우리는 다수결만 배웠다. 한 표라도 많으면 그 사람이 모든 걸 갖는, 그게 우리 정치체제다. 이게 굉장히 많은 갈등과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그와 비교되는 게 합의제 민주주의다. 독일의 경우 연방하원 표결에 부쳐진 법안이 통과되는 비율이 99%가 넘는다. 독일 합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는 그럴 바에 의회를 뭐하러 가지고 있는가라고 할 수 있지만, 법안 상정에 앞서 2~3년, 길게는 10년, 원전 문제 경우 40년 걸렸다, 긴 시간 여야 정치인, 노총, 경총, 관련 연구자, 이익단체 사람들을 모아서 합의를 한다. 합의된 상태에서 법안을 상정하니까 99% 이상 통과되는 것이다.
이 경우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책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 보통 합의제에서는 연정을 많이 하게 된다. 지난 정부가 했던 결정에 우리도 참여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5년 전에 녹색성장 주도하는 관료들이 현재 어디 가 있을까. 아무도 모른다. 장기 정책들을 하기 위해서는 합의제 민주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반드시 정치체제 내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5천만 인구 한 명 한 명 다 각자도생하고 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 각자도생의 사회를 어떻게 중간조직을 통해서 묶어줄 것인가. 잘 되는 나라들은 사람들을 묶어서 자기 목소리를 내게 하고 합의하게 하는 중간조직들을 갖고 있다. 스웨덴은 노조가, 독일은 정당이, 네덜란드는 소셜필라(social pillar, 종교‧정당‧노조의 결합체(combination))가, 미국은 헌법이 그 역할을 한다. 한국 사회는 그게 없어서 5천 만이 다 따로따로다. 빈곤층뿐 아니라 부자들도 불안하다. 부동산 제외 금융자산 10억 이상 가진 이들을 말한다. 이들에게 물어보면 70% 이상이 부자가 아니라고 한다. 50억 이상으로 좁혀도, 절반이 아니라고 한다. 얼마가 있어야 부자냐고 물으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답이 100억이다. 왜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할까. 불안하기 때문이다.
혼자 풀어야 하는 무제가 있고 공동의 문제가 있다. 우리의 불안감, 노후에 대한 걱정은 공동의 문제다. 어떻게 같이 풀도록 할 것인가. 중간조직이 필요하고 사회적 합의로 가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