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을 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니 안식일에 좋은 일은 해도 된다.”(마태 12,11-12)
매일 100종의 동식물 멸종
예수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과 논쟁하면서 동물에 대한 사랑과 동물에 대한 감상주의를 정확하게 구분했습니다. 동물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자세히 관찰한 사람만이 이런 생생한 논증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
자연이 새로운 동물 종種 하나를 만들어내는 데 3만 년이라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매일 1백여 종의 동식물을 멸종시키고 있습니다. 저 매력적인 동물과 식물의 세계가 사라진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될까요? 마술과도 같은 생명의 다채로움을 상실한 인간은 무엇이 될까요? 생태적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새로운 동물 윤리가 없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정신적 빈곤을 겪게 될 것입니다.
동물에 대한 합법화된 범죄
지금 이 순간에도 대량 사육장에서, 도살장에서, 혹은 운반 차량에서 수많은 동물들에게 자행되는 일은 합법화된 범죄행위입니다. 대다수의 닭, 돼지의 일생은 일어나고 먹고 눕고 죽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렇게 동물은 묵묵히 수난을 당하고, 인간은 아무 말 없이 이런 상황을 지속시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1996년 봄 광우병 파동이 일어나고 “19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가자 4백만 마리의 소에게 주저 없이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과연 동물들이 그렇게 떼죽음을 당할 만한 짓을 인간에게 했던가요? 소들이 미치는 것은 미친 인간 때문입니다. 야채를 먹고사는 동물에게 인간은 육류를 가공한 사료를 먹여 치명적인 해를 입혔습니다. 이제는 그 동물의 고기가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킬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라는 예수의 말을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은 인간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해방의 신학은 억눌리고 고통당하는 모든 생명을 끌어안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동물도 포함됩니다. 동물의 대량 사육 뒤에 감추어진 인간의 광기를 직시하고 그것을 통제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더 광우병을 비롯한 다른 파동들을 겪어야 할까요?
[caption id="attachment_163608" align="aligncenter" width="267"] 행복한 소 Copyrightⓒ. 2011. NourishOrganicMarket. All Rights Reserved.[/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63609" align="aligncenter" width="480"] 고슴도치 Copyrightⓒ. 2012. John Zettel. All Rights Reserved.[/caption]
[caption id="attachment_163610" align="aligncenter" width="480"] 하얀 바다표범Copyrightⓒ. 2014. vegan4jesus. All Rights Reserved.[/caption]
동물을 학대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모독
생태적 예수는 동물도 하늘 아버지의 피조물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동물을 학대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동물도 동료 피조물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동물은 그들만의 공간에서 그들 고유의 생명에 거스르는 처우, 불필요한 고통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합니다.
예수의 산상설교에 토대를 둔 교회보다 평화운동단체가 더 적극적으로 예수의 평화주의를 실현하는 데 나서는 것처럼, 동물보호단체는 생태적 예수의 정신으로 교회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동물이 고통당하는 데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예수의 평화주의와 생태주의 정신에 기초한 ‘신자들의 공동체’는 아무래도 교회 안보다는 밖에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평화운동가, 생태운동가, 동물보호운동가의 공동체가 될 때 진정한 교회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21세기의 살아 움직이는 교회의 핵심은 그런 미래지향적 공동체를 통해 형상화됩니다.
[caption id="attachment_163611" align="aligncenter" width="640"] 광우병 기자회견 Copyrightⓒ. 2003. jong hak park park. All Rights Reserved.[/caption]
구체적인 실천에 나서는 사람만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창조질서의 보존’이나 ‘자연’에 대한 논의는 아주 흔하고, 아무런 구속력이 없습니다. 단호히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구체적인 실천에 나서는 사람만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는 적대자들을 향하여 “저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며 거듭거듭 비판했습니다.
예수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복음은 동물도 포함합니다. 동물들은 경건한 설교를 알아들을 수 없으나 도와주고 보살피고 사랑하는 손길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설교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남성 위주의 교회가 신비주의, 생태주의, 동물과 식물을 교회 밖으로 몰아낸 것은 두고두고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것도 행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환경위기, 청소년 범죄, 대량실업, 경제 불안의 근본 원인입니다.
하느님은 별 속에서 주무시고
식물 속에서 향기를 발하시며 동물 속에서 꿈꾸시고 우리 인간 속에서 깨어나시려하네 |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계시고,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범재신론panentheism·萬有內在神論은 지금까지 말한 것에 근거하여 확언하건데 미래를 지탱해나갈 종교의 근간입니다. 범재신론의 깊은 경험은 생태주의적 경험입니다. 경외와 경탄은 지혜의 시작입니다.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의 윤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 문화, 정신의 차원에서 철저한 변화가 필요하며, 전혀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이 필요합니다.
동물과 식물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진화의 과정에서 보면 우리는 한참 후배입니다. 인간은 나이로 볼 때 훨씬 위인 동물과 식물의 세계를 딛고 서 있는 셈입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로마 8,21)
글 │ 성가소비녀회 최바오로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