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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5년 8월 18일, 뜻밖의 전화

항의든 격려든 보도 후에는 으레 반응이 온다. 취재 대상이나 시청자, 독자로부터. 반응이 거의 없다면 그건 실패한 보도라고 할 수밖에 없다. 광복절 사흘 뒤 친일 후손 2명이 연락해 왔다. 8월 18일 오전에 전화를 걸어온 분은 한 대학의 노 교수였다. 그와는 이미 몇차례 이메일을 주고 받았으나 직접 통화는 처음이다. 이 교수는 지난 6월 말 ‘친일과 망각’ 제작진이 보낸 이메일 질문에 대해 역시 교수인 동생과 상의 후 두 차례 답변을 보내왔다.

조부께서 일제시대 때 고위직인 지사를 역임하셨으니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의 친일파 명단 발표는) 올바른 결정입니다. (선대의 친일행적에 대한 후손들의 공개사죄는)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 2015년 6월 29일 ◯◯◯ 교수 이메일 답변 중

앞으로도 간단한 질문에는 서면으로 대답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서서 인터뷰까지 하는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았으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2015년 6월 30일 ◯◯◯ 교수 이메일 답변 중

메일과 마찬가지로 통화를 하면서도 익명을 요구했지만 노 교수의 생각은 이전과는 좀 달라졌다. 그는 뉴스타파 프로그램을 본 후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고 말했다. 조부의 친일행적을 사죄하고 싶다고까지 했다. 다만 공개적인 사죄까지 할 용기는 아직 없다고 말했다.

이번 취재에 공감하는 게 많습니다. 지난번 이메일로 연락을 드렸지만, 방송을 본 후 잠시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선대의 친일 행적에 대해 사과하고 싶습니다.
– 2015년 8월 18일 ◯◯◯ 교수와 전화통화 내용 중

그는 “조부께서도 (독립운동을 위해) 간도로 가시려고 했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가족 때문에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민족학교를 세우는 등 사회 활동도 했음을 감안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조부의 친일행적은 인정한다고 했다. 그래서 더욱 몸가짐을 조심하겠으며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끝까지 후학을 양성하는 데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그 날 오후 또다른 친일후손이 전화를 걸어 왔다. 취재진이 찾아낸 친일 후손1,177명엔 들어있지 않던 인물이었다. 그는 친일파 이재완, 이달용의 후손이라고 밝혔고, 서울 강남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뉴스타파의 ‘친일과 망각’ 시리즈를 보고 방송 내용에 공감해 연락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친일후손임을 밝히고 공개 사죄할 만큼 용기를 내지는 못하지만 공개 사죄하는 친일 후손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 역시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겠습니다.
– 2015년 8월 18일 △△△ 대표와의 전화통화

▲ 왼쪽 이재완(조선귀족 후작 / 사진제공 민족문제연구소), 오른쪽 김교헌 (독립운동가) / 출처 대종교

▲ 왼쪽 이재완(조선귀족 후작 / 사진제공 민족문제연구소), 오른쪽 김교헌 (독립운동가) / 출처 대종교

그는 자신은 친일파의 후손이면서도 동시에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외가 쪽 선대가 친일파였고, 친가 쪽 선대는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일제의 귀족작위를 받은 친일파 이달용, 이재완의 후손이면서 독립운동가 김교헌의 후손이었다. 김교헌은 대종교의 제2대 교주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2. 친일의 길, 항일의 길

이처럼 친일파 후손인 동시에 항일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경우도 간혹 있다. 일제로부터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받아 3대가 습작한 정낙용, 그의 아들 정주영, 손자 정두화, 이 세 사람은 모두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가 지난 2009년 확정한 친일파 1,006명에 포함됐다. 그런데 정낙용의 손녀이자, 정주영의 딸 정정화는 ‘임시정부의 며느리’로 불리는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8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그렇다면 이 집안의 후손은 친일파의 후손인가? 독립운동가의 후손인가?

정정화 (1900∼1991) 1990년 애족장 독립운동가 가족들을 돌보고 임시정부 자금 모금책 및 연락책을 맡으면서 임시정부 수립·운영에 큰 도움을 줬다. (출처 국가보훈처)

정정화 (1900∼1991) 1990년 애족장 독립운동가 가족들을 돌보고 임시정부 자금 모금책 및 연락책을 맡으면서 임시정부 수립·운영에 큰 도움을 줬다. (출처 국가보훈처)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정정화 여사, 뒷줄 왼쪽에서 네번째부터 이동녕, 박찬익, 김구, 엄항섭 선생 (출처 국가보훈처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정정화 여사, 뒷줄 왼쪽에서 네번째부터 이동녕, 박찬익, 김구, 엄항섭 선생 (출처 국가보훈처

소설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도 비슷하다. 그의 할아버지 홍승목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참의의 이전 명칭. 중추원 개편 전에는 ‘찬의’, ‘부찬의’로 나뉘어졌으나 1930년 이후 ‘참의’로 통일됐다) 를 지냈다. 홍승목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의 친일파 명단에 들어갔다.

홍범식 (1871∼1910) 1962년 독립장 (출처 국가보훈처)  금산군수 시절 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쪽 가운데가 홍범식 (출처 국가보훈처)

홍범식 (1871∼1910) 1962년 독립장 (출처 국가보훈처)
금산군수 시절 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쪽 가운데가 홍범식 (출처 국가보훈처)

반면 홍승목의 아들, 즉 홍명희의 아버지 홍범식은 충남 금산군수로 재직하던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일제에 나라를 빼긴 데 분개해 그날 밤 소나무에 목을 매 자결한 순국열사다. 그는 ‘國破君亡 不死何爲 (나라가 파멸하고 임금이 없어지니 죽지 않고 무엇하리)’라는 유서를 남겼다. 또 아들 홍명희에게는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라는 유언도 남겼다. 홍범식은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추서됐다.

홍명희는 해방 후 월북했고, 그의 가족들은 한국전쟁 당시 월북자의 가족으로 몰려 우익 집단에게 죽임을 당했다. 홍명희의 가족사는 일제 식민지배와 민족분단이 빚은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 시기를 살았던 지식인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그리고 해방 7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친일반민족행위와 친일파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지난7월 뉴스타파 제작진은 친일파 후손들에게2번째 메일을 보냈다. 1차 메일에 답변을 보내온 후손들을 대상으로 했다.

저희가 생각하는 친일 문제의 맥락은 그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친일파라고 해서 다 같은 친일파인 것도 아니고, 그 후손들이라고 해서 전부 하나의 집단으로만 취급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친일파의 후손들이 살아왔던 삶의 궤적은 그 자체가 매우 섬세하게 다뤄져야만 하는 사회적 실험과도 같은 것이며 우리 사회의 집단적 기억 가운데서도 매우 미묘하고 독특한 어떤 것일 거라고 짐작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후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고 프로그램에도 이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제작진이 친일후손들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 중 발췌

그동안 친일에 대한 문제의식은 일종의 강요된 기억상실에 걸린 채 동결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상당수 1세대 친일파가 생존하고 있었고, 지금보다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사회적 기억은 뚜렷했다. 하지만 반민특위가 좌절된 이후 누구도 제대로 친일 청산 문제를 입밖에 꺼내지 못했다. 임종국이라는 빛나는 예외가 있었지만 2천년 대에 들어서기 전까지 친일에 대한 문제의식은 더욱 깊이 가라앉았고 친일청산이라는 용어 자체가 심각하게 오염되기까지 했다.

해방 6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국가 차원의 친일진상규명 작업이 다시 이뤄졌다. 그런데 우리는 당시 이뤄졌던 친일진상규명의 성과물을 사회적 차원에서 충분히 공유하고, 가르치고 있을까? 아직 충분치 못하다는 게 제작진의 생각이었다. 25권에 이르는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의 방대한 보고서와, 그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수집된 수많은 기록들은 더 이상 활용되지 않은 채 국가기록원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잊혀진 존재가 됐다. 뉴스타파가 해방70년을 맞아 ‘친일과 망각’ 시리즈를 기획한 이유 중 하나였다.

3. 2015년 2월, 실록 친일파.

뉴스타파 제작진이 ‘친일과 망각’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초기에 참고한 중요 자료 중 하나가 ⟨실록 친일파⟩다. 바로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적 인물인 임종국 선생이 쓴 책이다. 이 책은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2년 후인 1991년, 평생을 친일파 연구에 바친 그의 유지를 모아 출판됐다.

▲ <실록친일파> 지은이 임종국

▲ <실록친일파> 지은이 임종국

▲ 임종국 (1929-1989) ‘친일문학론’을 저술하는 등 평생 친일연구에 몸바쳤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 임종국 (1929-1989) ‘친일문학론’을 저술하는 등 평생 친일연구에 몸바쳤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이 책 말미에 이런 대목에 있다.

장직상은 병합 후 신녕, 하양, 선산군수를 하고 1916년에 퇴관했다. 왜관금융창고회사를 세워 사장이 된 그는 대구은행, 경일은행 이사와 어용 대구상업회의소 회두를 한다. 1924년에 경북도평의원, 1930년에 중추원 참의가 된 장직상은 8.15까지 15년 3개월간 중추원 참의를 중임한다. 이 사람은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대화동맹 심의원 기타로 거물급에 드는 사람이었다.

그의 동생 장택상이 미군정 때 수도경찰청장에 임명되었다.

“각하께서는 새 나라의 경찰권을 장악했으니 독립운동가에서도 잘해야 안 되겠습니까?

국일관 연회에서 누가 장택상에게 말하자 그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들을 동정할 수 없어! 내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에게 살해되었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잘하겠느냔 말이오! ”

그럼, 중형(둘째 형) 중추원 참의 15년으로 일제에게 대우를 받았으니까 일제에게는 잘할 수 있다는 말인가? 독립운동자에게 잘할 수 없고 일제에게나 잘할 수 있는 정치라면, 예속정치와 그것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독립운동자에게 잘할 수 없었던 미군정하와 제1공화국의 정치는 이후의 대한민국사의 짙은 암영을 드리워 놓았다. 친일자손들의 현주소, 그것은 이 땅의 상층부의 구석구석이며, 그 그늘에 치여 독립운동자와 그 자손은 빛을 볼 여가가 없었다. 이런 엄청난 불합리를 우리는 후세에 무어라고 변명해야 하는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임종국 지음 ⟨실록 친일파⟩ 중 362쪽

장택상은 해방 이후 수도경찰청장을 거쳐 국무총리까지 지냈다. 그리고 장택상의 형, 장직상은 일제 강점기 중추원 참의를 지냈는데, 해방 후에는 미 군정청이 관리하는 남선전기회사의 사장으로 활동했다.

장직상과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은 경상북도 관찰사를 지낸 경북 칠곡의 대부호였다. 장승원은 1917년 박상진이 이끄는 광복단원에게 암살당한다. 박상진은 판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임용을 거부하고 독립 운동을 펼치다 일제에 체포돼 1921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이를 두고 장택상은 “내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에게 살해 됐는데, 독립운동가를 동정할 수가 없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장택상의 태도는 이후 정부 요직을 차지하는 친일파 후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독립운동자에게 잘할 수 없었던 미군정하와 제1공화국의 정치는 이후의 대한민국사의 짙은 암영을 드리워 놓았다”는 임종국의 분석은 지금 한국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4. 1949년 1월. 한 친일파의 진술서

장택상의 형 장직상은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진술서를 제출한다. 그리고 7개월 뒤, 반민특위가 사실상 해체되던 1949년 8월 자수 의사를 밝힌다. 그는 고혈압으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 가료중이라며 선처를 호소했다. 다음은 1949년 1월 장직상이 반민특위에 제출한 진술서의 일부다.

본인은 단기 4243년(1910년) 6월 구한국정부의 신영군수에 임명되어 봉직 중 국운이 쇠퇴하여 한일합병을 본 것은 千古(천고)의 遺恨事(유한사)라 분통이 비할 곳이 없음으로 즉시 職(직)을 辭(사)하고 鄕第(향제)에 돌아가 집거하기로 결심하였던바 일 헌병과 한인 보조원이 매일같이 빈번히 내방하여 감시하면서 如此(여차) 중대시기에 사직할 이유를 힐문하는 동시에 계속 留任(유임)을 강요 또는 협박하므로 其時(기시) 가족회의에서 長子(장자) 아닌 본인으로서 시대에 순응함이 일가일족의 생존 상 부득이한 응변조치라는 의미 하에서 含忿不已(함분불이)하면서도 군수의 직을 사퇴할 길이 없이 其後(기후) 수개년을 계속 집무하였던바.

(중략)
가혹한 일정 하에서 생을 도모하는 자체가 일정에 순응치 않고는 절대로 불가능함이 疆土內(강토내)라 감히 생존을 꾀하기 위하여 일정의 법규를 준수치 아니치 못하고 또한 業에 취하지 않을 수 없어 이후 은행과 실업계에 다년 종사해 오던바 千萬意外(천만의외)에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우매한 본인으로서는 이것도 민족을 위한 대변할 기회이라고 사료하였음으로 원래 소원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사정상 거절치도 못하였음으로 지금 생각컨대 참괴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少毫(소호)라도 이것을 榮職(영직)이라거나 명예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또 이 자리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취할 의도가 아니었다함은 其後(기후) 본인의 행상으로 此를 증명코자 하나이다.

출처: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반민특위 조사기록 중 1949년 장직상 진술서

장직상은 이처럼 일제의 강요와 협박 때문에 군수직을 그만두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또 (일제 강점기) “시대에 순응함이 일가족의 생존에 부득이한 응변 조치였다고 판단했다”며 군수 자리를 계속 지켰던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했다.

그는 특히 ‘千萬意外(사천만의외)’, 즉 전혀 생각치도 않게 중추원 참의에 임명됐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매한 본인으로서는 중추원 참의 임명이 민족을 위한 대변할 기회”라고 생각했다는 궤변까지 늘어놓았다. 그는 일제 강점기 최고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 장직상 중추원 참의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 장직상 중추원 참의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장직상은 경술국치 두달 전인 1910년 6월 경북 신령군수에 임명됐다. 이후 1916년까지 관직을 유지했다. 같은 시기 군수직에 있던 홍범식은 자결을 했다. 그렇다고 그에게 자결을 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가 일제 강점기 군수와 중추원 참의를 지내며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권세와 부를 누렸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야 한다.

장직상은 반민특위에 낸 진술서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끝으로 반민법의 제정 시행은 민족정기를 새롭게 하고 자손만대에 垂範(수범)하기 위한 국가만년의 규범을 세우려는 시기에 적절한 良法이라고 사료함으로 과거의 죄과에 대하여는 엄중 공평하신 처단을 감수할 각오이옵고 이것으로서 진술을 끝마치나이다. ”

출처 :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반민특위 조사기록 중 1949년 장직상 진술서

그러나 장직상이 스스로 감수하겠다던 ‘엄중 공평한 처단’은 없었다. 장직상이 사장으로 있던 남선전기회사 직원들은 반민특위에 모두 6차례 진정서를 제출해 그의 선처를 호소했다. 국가산업건설을 위해 장직상을 용서해줄 것을 간청한 것이다.

반민법령에 의하여 해당한 자는 숙청함은 至當之事(지당지사)이오나 국가 재건도상에 긴요한 인사 또는 과거를 반성하여 건국에 이바지하는 인사에 대하여서는 심의에 있어 신중하올줄 남전사장 장직상씨는 반민법령에도 제외되는 기술가의 일인으로 해석할만한 특수회사 운영 기술자이옵고 또는 당사자보담 남전회사를 완전무결히 운영케 하시고 국가산업건설 견지로서 육성 애호하시는 의도 하에서 특별 전의하시와 관용하여 주시옵기 진정하나이다.

단기 4282년[1949] 7월 30일

남선전기주식회사 대구지점 한창수[韓昌壽] 외 308명

출처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반민특위 조사기록 중 장직상 진정서

1949년 8월 30일, 장직상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는다. 그가 자수한 지 한달도 안 된 시점이었다. 당시 반민특위는 사실상 해체 상태였다. 1949년 6월 반민특위가 경찰의 습격을 받고 김상덕 초대 반민특위 위원장이 물러난 후 반민특위는 더 이상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했다.

당시 반민특위가 장직상을 기소유예한 이유는 이러했다.

해방 후 南電(남선전기)에 대한 그 열성과 수완 따라서 남전 경영의 특기할 공적은 斯界(사계)에 주지하는 사실이며 기록의 첨부한 진정서로도 엿볼 수 있다. 또 본 1건 기록첨부한 본인의 회고의 진술서와 자수의 정신으로도 其(기) 심정의 일단을 覗知(사지)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그 범죄사실에 비추어 피의자의 성격, 주위환경, 그 당시의 정상과 現下(현하)의 사회정세와 특히 독립운동에 공훈한 공적을 충분히 인식하고 아울러 해방 후 남전에 남긴 업적 등을 고려하여 기소 유예함이 가하다고 인정함.

출처: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반민특위 조사기록 중 장직상 불기소사건기록

장직상은 이렇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1883년 생인 그는1959년에 사망했다. 천수를 다 누린 셈이다. 이로부터 60여 년이 흐른 뒤 장직상은 다시 역사에 심판대에 서게 된다. 이번엔 선처를 호소하는 진정서도 없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장직상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했다.

아래는 장직상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의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보고서다.

장직상 결정문

장직상은 1930~1945년까지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로 재직하면서 수차례에 걸쳐 회의 참석, 또는 서면 답신을 통해 자문에 응하였다. 특히 장직상은 1937년 제18회 중추원 회의 때에 조선총독의 자문사항에 대한 서면답신에서 ‘국체관념(國體觀念)의 명징(明徵)’을 위해 ‘일본정신의 고취’, ‘일본어 보급’, ‘일한병합조서(日韓倂合詔書)의 성지(聖旨) 철저’, ‘국기게양 장려’ 등을 주장하였다. 이와 더불어 각 지역에 신사나 사당을 설치하여 참배를 장려하고, 매년 1회 지방 유력자들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참배하도록 하는 한편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여 ‘국민적 신념의 앙양’을 기할 것을 주장하였다.

장직상은 1938~1939년 조선총독부가 황국정신, 내선일체의 완성을 목적으로 조직한 전시통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확대 개편해 만든 전시 최대의 조선총독부 외관단체인 조선총력조선연맹에서 1940~1944년 평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전시동원체제에 적극 협력하였다.

장직상은 1941년 8월 ‘황도정신의 앙양’, ‘시국인식의 철저’를 운동목표로 한 홍아보국단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1941년 홍아보국단과 임전대책협력회을 통합하여 ‘황도정신의 선양, 전시체제에서 국민생활의 쇄신’을 목적으로 만든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 이사, 경북도지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장직상의 행위를 ⟨특별법⟩ 제2조, 제9호, 제13호, 제14호, 제17호에서 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

출처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장직상의 친일행적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내려진 셈이다. 그의 후손들은 2000년대 후반 진행된 정부의 친일청산 작업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5. 2015년 6월, 서울 강남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죠”

‘친일과 망각’ 취재팀은 어렵지 않게 장직상의 후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한 중견기업의 대표였고, 업계를 대표하는 단체의 회장도 겸하고 있었다. 그와의 전화통화는 8분 남짓 이어졌다.

“저희가 친일파 후손 분들에게 어렵지만 연락을 드린 거예요. 혹시 할아버지(장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는데요. 생각한 다음에 전화 올릴께요.”

장직상의 손자는 부담스러운 듯,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재차 물었다.

“회장님 같은 분은 공적인 역할도 하시고, 산업분야에도 공헌을 많이 하셨는데, 말씀을 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전기 쪽에 공헌한 바가 훨씬 크기 때문에 전혀 할아버지를 욕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한 두 번, 끌려가서 이제 전쟁에 나가라 청년들한테 연설을 했다 그거였죠.”

그는 할아버지의 친일행적에 대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한두번 끌려가” 조선청년들에게 “(대동아)전쟁에 나가라 연설을 한 것“이 전부라고 말했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친일파로 규정한 정부의 결정을 ‘왜곡’으로 표현하며, 잘못됐다고 말했다.

(친일파 결정이 억울하지만) 지금 변명할 필요는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억울하지만 그 결정이야 그 때 정부(노무현 정부)의 방침이었으니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 아닙니까? 왜곡했죠.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이뤄진 반민규명위의 결정을 폄훼하는듯 ‘역사의 기록은 승자의 기록’에 불과하다고 했다.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고 보는 것은 강자 의존적인 역사인식의 전형이다.

6. 2015년 6월, 뉴스타파 사무실

늦은 밤, 취재팀은 사무실에서 장직상의 친일행적을 다시 살펴봤다.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보고서에는 장직상의 친일행위가 50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서술돼 있다. 다른 친일파에 비해 비교적 많은 분량이다.

장직상은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를 1930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15년 3개월이나 유지했다. 중추원 참의 시절 장직상의 행적은 “우매한 본인으로서는 중추원 참의 임명이 민족을 위한 대변할 기회라고 생각했다.”는 그의 반민특위 진술과는 전혀 다르다.

그가 총독부 중추원 회의에 참석해 행한 발언과 문서의 일부를 정리했다.

“내선융합은 이미 시대가 지난 표어고 내선일여의 슬로건에 매진하여야 한다. (중략) 앞으로 내선인의 결혼을 장려하고 혈족적으로 내선일여를 구체화시켜야 한다. ”
– 1935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의사록 중 장직상 발언

“내선일체는 제도상, 교육상, 언어상, 산업경제상 모든 방면에서 실현돼야 할 사안인데도, 그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자의 진정한 일심동체, 감정에서도 이해관계에서도 차이가 없고, 차별이 없는 마음의 경지인 정신적 결합이어야 한다. (중략) 가장 필요한 것은 공적생활보다 사적 가정생활에서 의식주는 물론 일상의 모든 생활에서 먼저 일본화를 꾀하고 일본화된 모든 행사는 곧 정신에 구현되므로 이러한 행사참여를 자주함으로써, 이를 항구할 수 있을 것이다.”
–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제19회 중추원 참의답신 중 장직상 답신

홍범식에게는 망국의 원통함과 치 떨리는 수치심으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던져야 했던 경술국치의 한일 강제 병합 조서가 장직상에게는 높이 받들어 모셔야 성지(聖旨), 즉 ‘일본 국왕의 지시’였다.

“일본 정신의 고취, 국어(일본어)의 보급, 그밖에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일한병합조서의 성지(聖旨) 철저, 국기(일본)게양의 장려 등 그 시행을 적절히 하고…”
– 1937년 조선총독부 중추원회의 참의 답신서 중 장직상 답변

▲ 1940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기원 2600년 봉축식, 일본은 전시체제를 맞아 일본의 위대성을 대내외에 알리는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벌였다.

▲ 1940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기원 2600년 봉축식, 일본은 전시체제를 맞아 일본의 위대성을 대내외에 알리는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벌였다.

그는 1940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기원 2600년 봉축식에도 참여했다. 친일파 고원훈과 함께 도쿄에 가서 이 행사를 참열했는데, 이 날 장직상의 감회는 어땠을까?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자세히 서술돼 있다.

“성의에 참열하여 폐하의 용안을 우러러 뵈옵고 玉音(옥음)을 배청할 수 있던 광영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하겠습니다. 황공하곱게도 옥음이 낭랑하옵시게 칙어를 하사하옵실 때 6만의 참열자가 정렬한 식장에 숙연한 광경은 다만 감격뿐이었습니다. 더욱이 반도인 참열자는 모두 감읍을 금치 못했습니다. 성전 4년에 이르른 오늘 이번 봉축식전을 통하여 제국의 여유작작한 면모에서 어떠한 난관이라도 넉넉히 돌파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반도인은 이번 식전에 참열하여 더한층 황실의 존엄과 황은의 홍대하옵심을 가슴에 깊이 새겼습니다.”
⟨매일신보⟩ 1940년 11월 15일

장직상은 일제의 침략전쟁에도 철처히 협력했다. 중추원 참의 대표로 1937년과 1938년 두 차례에 걸쳐 중국 주둔 일본군을 위문했다. 그는 위문방문의 경험을 중추원통신 109호에 싣고 매일신보에도 실렸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나는 필자 즉 장직상을 말한다.

“北支(북지) 전장에서 義戰(의전) 아닌 聖戰(성전)에 종사하고 있는 황군을 위문하기 위해 우리 일행 4명은 지난 9월 2일 경성을 출발하여 3일 북지땅을 밟았다. 먼저 천진에 도착하여 거기서부터 신전의 발자취를 巡歷(순역)하고 북평으로 들어갔다. (중략) 이 13일 동안이 나에게는 실로 광영의 여정, 감격의 행보였다. 위문여행이라기보다는 감사 순례행이라는 것이 나의 진실된 심정이었다.”
– 1937년 10월 15일, 중추원통신 109호

“상해에서 군용열차에 편승하며, 남경에 도착한 것이 14일이었다. (중략) 군사령부를 방문하고 朝香中將宮(조향중장궁) 전하께 배알하였는데 황공하옵게도 전하께서는 連路(연로)에 수고한다‘고 말씀하신 후 의자에 앉으라고 하시며 조선통치 이래의 實(실)과 금회 사변에 있어서 조선인의 총후의 적성미담 등을 말씀드렸더니 전하께서는 만족히 여기시며 ’지원병제를 실시하게 되어 반도인이 퍽 기뻐들 하지‘ 하심으로 ’정원에 제한이 있는 것을 오히려 섭섭히 생각들 하고 있습니다.‘고 말씀드렸다. (중략) 이번 위문여행에 있어서 나의 일생의 광영으로 생각하는 것은 朝香宮(조향궁) 전하께 배알하고 고마우신 말씀까지 한 일이다.”
– 1938년 2월 27일 ⟨매일신보⟩ 기사 중

▲ 중일전쟁 중 난징을 공격한 일본군이 일장기에 기록한 전투일지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 중일전쟁 중 난징을 공격한 일본군이 일장기에 기록한 전투일지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장직상이 난징에 도착하기 두달 전인 1937년 12월 난징 대학살이 발생했다. 당시 중화민국의 임시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6주 동안 포로나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했다. 특히 여성에 대한 집단윤간과 학살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난징 대학살은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에 견줄만큼 잔혹한 전쟁범죄다. 최소 30만 명의 민간인이 살육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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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香中將宮(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오) 일본 왕족 출신의 군인, 난징 대학살 당시 상해파견군사령부 사령관으로 있었다. 그는 일본 왕족인 탓에 전범재판을 피할 수 있었다.

▲ 朝香中將宮(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오) 일본 왕족 출신의 군인, 난징 대학살 당시 상해파견군사령부 사령관으로 있었다. 그는 일본 왕족인 탓에 전범재판을 피할 수 있었다.

장직상이 전하라며 배알했던 朝香中將宮(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오), 즉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오는 난징 대학살을 저지른 중국 주둔 일본군의 책임자였다. 그는 난징을 공략하며 “모든 포로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훗날 일본 왕족 출신인 탓에, 전범재판을 피할 수 있었다.

장직상은 극악무도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일본군 군대와 그 책임자를 ‘위문’ 방문하고, 이들 聖戰(성전)이라 칭송했다. 더구나 학살책임자인 朝香中將宮(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오)를 ‘배알’한 것을 ‘나의 일생의 광영’이라고 표현한 장직상의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일제의 전쟁범죄에 대한 장직상의 협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44년 군수업체인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가 설립된다. 이 회사의 설립목적은 일제 침략전쟁의 비행기를 공급하기 위함이었다.

(전략) 조선은 총독시정 이래 삼천유오년, 반도 2천5백만 민중은 똑같이 황은을 입어 이미 물심양면에 걸쳐 戰力(전력)에 응분의 공헌을 하고 있다나 하나, 아직 疆內(강내)에 항공기 생산관으로 볼만한 것이 없는 것은 큰 유감이다. 하루라도 빨리 우리들의 직접적인 힘의 의한 비행기를 전장으로 보냄으로써 정병의 피의 □에 응하야 하는 것은 일야의 염원이다. 특히 올해는 징빙제를 실시하는 기념할만한 해이니 지원병, 학병으로 계속해서 더욱 忠勇(충용)한 반도 장정 전원을 바쳐 황군의 精强(정강)으로 새로운 위력을 더 해야 한다. 이 때에 적 격멸의 제일무기인 정예 비행기를 우리 손으로 제작하여 우리의 장정이 싸우는 결전장으로 보내, 우리들이 사랑하는 자제들이 이를 驅使(구사)하여 동아의 숙적을 격멸할 수 있게 한다는 그 감격이 얼마나 크겠는가. (중략)
– 1944년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설립취의서 중

이 회사의 사장은 악질 친일 기업가 박흥식이었고, 장직상은 발기인과 이사로 참여한다. 또한 대주주 명단에는 박흥식(2만주), 백낙승(2만주), 박춘금(1만주), 김연수(5천주) 등과 함께 3천주 씩을 보유한 한상룡, 민규식, 정직상도 들어있었다. 장직상은 중추원 참의로 있으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했을 뿐 아니라 일제의 침략전쟁과 반인륜 범죄에도 적극 동참한 것이다.

7. 2015년 8월, ‘친일파’란 이름을 다시 생각하다.

‘친일파’, 말 그대로 하면 일본과 친한 집단이란 뜻이다. 친일파라는 명칭은 1948년에 김승학이 펴낸 ⟨친일파 군상⟩이라는 책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사전적 의미로 따지면 단순히 ‘일본과 친하다’는 의미에 불과한 ‘친일파’란 단어는, 그래서 그 대상을 정확하게 규정하기에는 불명확한 용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우리가 통용하고 있는 친일파엔 단지 매국 등의 반민족 행위자뿐 아니라 전쟁 범죄 등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거나 거기에 협력한 사람까지 포함된다. 전형적인 친일파의 범주엔 먼저 1905년과 1910년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에 뺏기는 과정에서 일제에 협력한 ‘매국자’를이 들어간다. 나라를 넘기는 대가로 은사금과 작위를 받은 을사오적, 정미칠적 등이다. 이어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일제가 일으킨 침략 전쟁에 협력해 반인륜, 반인도 행위를 저지른 이들이 친일파로 분류된다. 각종 국방헌금을 일제에 내고, 일제의 침략전쟁을 적극 옹호하며, 조선청년들을 일제의 총알받이로 내몬 행위가 대표적일 것이다.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독립운동가와 기타 사회운동을 했던 이들을 체포, 고문, 투옥하는 등 인권 탄압을 일삼은 이들도 빼놓을 수 없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친일파라는 용어 보다는 민족반역자, 전쟁범죄자라는 용어가 더 보편적인 용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준식 전 친일재산조사위 상임위원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에서 진행했던 나치 청산은 반인도 범죄라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면서 우리사회의 친일청산과 과거 극복의 과제 역시 “단순히 반민족행위가 아니라 반인륜적 행위”에 초첨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8. 2015년 8월, 공개 사죄 그 후

뉴스타파 ‘친일과 망각’ 취재진은 8개월 동안 자료와 싸움을 벌인 끝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가 결정한 친일파 명단 1,006명 가운데 203명의 후손 1,177명을 찾아냈다. 이들은 대부분 일제의 귀족작위를 받은 수작자와 중추원 참의 등 핵심 친일파의 후손들이었다. 이 중 뉴스타파의 요청에 응해 선대의 친일행적을 카메라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한 후손은 3명이었다. 문효치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김경근 목사, 홍영표 의원이다. 당초 기대엔 훨씬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의 용기 있는 자기 고백은 우리 사회가 친일 청산과 과거 극복이라는 과제를 해결하는데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뉴스타파의 작업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도 보여줬다.

▲ 문효치

▲ 문효치

지난 7월 문효치 이사장을 만났을 무렵, 그는 문인협회가 매월 발간하는 ⟨월간문학⟩의 올해 특집기획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가 올해 2월 문인협회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역점을 둔 사업이 ⟨월간문학⟩의 특집 기획이었다. 올해는 윤동주의 시세계를 다루기로 결정했다. 2회에 걸쳐 7월호와 8월호에 게재됐다. 기획특집의 제목은 ‘광복 70년, 윤동주 70주기’였다

문효치 이사장은 8월에 한국불교문인협회 등과 함께 ‘광복 70주년 기념 한국문학축전’을 열고, ‘민족시인 한용운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다루기도 했다.

그는 “개인적 불이익이 있더라도 감수할 것이고, 이 것 역시 내 업”이라며 증조부의 친일행적을 공개 사죄했다. 조상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삶은 선택할 수 있다. 문효치 이사장의 용기 있는 자기 고백이 그에게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 김경근

▲ 김경근

김경근 목사와 인터뷰를 한 뒤 다시 연락을 취한 것은8월 16일이었다. 모 언론사 기자로부터 김 목사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요청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본인의 허락 없이 연락처를 넘겨줄 순 없었기에 제작진은 김 목사에게 혹시 인터뷰가 가능한지 물었다. 그는 1시간쯤 지나 휴대전화 메시지를 통해 이렇게 답해왔다.

전 지금 제주에 내려와 있습니다. 출국까지 한 일주일 정도 남았는데 이것 저것 준비하랴 바쁠 것으로 예상됩니다. 방송은 감사히 잘 봤습니다. 장차 방송 취지에 맞는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고 기대하겠습니다. (다른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에는 감사드리나 잦은 취재가 도리어 진심에 대한 무게를 떨어뜨릴까 우려하여 이번에는 사양하고 싶습니다. 늘 바르고 정직한 기사로 사회에 빛의 역할을 감당하시길 기대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김경근 목사는 뉴스타파와의 인터뷰 내내 “자신은 공인이나 잘 알려진 사람이 아니라서 조상을 대신해 사죄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인터뷰는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줬을 것이다. 김경근 목사는 한 달 간의 안식월을 국내에서 보내고, 지난 8월 말 크로아티아로 돌아갔다. 그와 그의 가족이 먼 이국 땅에서 잘 지내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편안하게 영화 ‘암살’을 봐도 좋으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 홍영표

▲ 홍영표

공개적으로 선대의 친일행위를 대신 사죄한 3명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은 이는 홍영표 의원이다. 유권자의 검증을 받아야 하는 정치인이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홍 의원은 뉴스타파의 ‘친일과 망각’ 4부 ‘나는 고백한다’ 편이 방송되기 나흘 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친일과 망각을 보았습니다. 친일 후손으로서 사죄드립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지난 7월 하순, 친일후손의 오늘을 조명하는 특집기사를 준비한다는 한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을 받았습니다. 인터뷰에 응할지, 무척이나 망설였습니다. ‘그냥 지금처럼 조용히 하던 일을 해가면서 용서를 구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부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 오히려 더 화를 부를지 모른다’는 주변의 걱정까지, 인터뷰 전날 잠을 설치고 아침까지도 망설이다 결국 인터뷰를 했습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후손, 용서를 구하는 후손으로 사는 것이 그나마 죄를 갚는 길이라 생각하고 용기를 냈습니다.”
– 2015년 8월 11일 홍영표 의원이 페이스북에 남긴 글 중에서

홍 의원은 8월 17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조부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지만,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취재에 응하면서 다시 한 번 공개적으로 사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제 고백 때문에 가족과 친지 여러분이 불편해 하는 데에는 죄송한 마음도 있지만 후회는 없다”고 했다.

홍 의원은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독립운동가의 고결한 희생을 높이 받들기 위해서라도 후손들의 보상과 예우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2013년 12월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지금 상임위에 계류중이다.

9. 과거 극복을 위한 발걸음을 시작하며

뉴스타파는 해방 70년 특별기획 ‘친일과 망각’ 시리즈를 모두 4회(8월6,10,12,14일)에 걸쳐 방송했다. 스페셜 웹페이지를 통해 이번 에필로그 편을 포함, 모두 5부로 구성된 디지털 스토리도 선보였다. 친일과 망각 시리즈는 지금까지 2백만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는 등 뜨거운 반응을 끌어냈다. 또 많은 시청자와 독자들이 좋은 의견과 충고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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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여러 언론매체가 ‘친일과 망각’을 소개하거나 내용을 인용해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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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후손들을 처음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분석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는 평가가 주종이었다. 친일 문제를 어떻게 정리하고, 과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하나의 해법을 제시한 의미 있는 작업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여기서 멈춰서는 안된다는 충고도 있었다. 친일 후손의 추적 못지 않게 권력 기관 내에서 친일파가 만든 구조의 지속적인 재생산 시스템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쉽게 말해 악질 친일파 ‘노덕술’과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지만 친일파가 만들어놓은 정교한 권력 구조안에서 보면 ‘혈연 이상의 긴밀한 관계망’으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이 구조를 제대로 분석하고 혁파해야만 진정한 친일 극복의 과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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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질 친일파 ‘노덕술’(위 사진 왼쪽 맨 앞, 반만특위 체포당시사진 왼쪽)과 고문기술자 ‘이근안’(아래 사진 오른쪽)은 친일파가 만들어놓은 정교한 권력 구조안에서 보면 ‘혈연 이상의 긴밀한 관계망’으로 얽혀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 악질 친일파 ‘노덕술’(위 사진 왼쪽 맨 앞, 반만특위 체포당시사진 왼쪽)과 고문기술자 ‘이근안’(아래 사진 오른쪽)은 친일파가 만들어놓은 정교한 권력 구조안에서 보면 ‘혈연 이상의 긴밀한 관계망’으로 얽혀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검찰이나 경찰 등 권력 기관에서 친일파가 만들어 놓은 구조가 어떻게 전수 되고, 연결되어 지금까지 이르렀는지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식민지 시기 외세의 통치에 종속적으로 협력하는 시스템이 형태만 달리한 채 계속 진행되는 지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친일 청산을 넘어 과거 극복을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또한 친일 청산의 문제는 우리 사회 민주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검찰, 경찰, 법원, 국정원 등 국가 주요 기관에서 일제 잔재가 끊임 없이 재생산되는 지점을 밝혀내고 보다 민주적인 조직으로 바뀔 수 있도록 언론이 지속적인 역할을 해햐 한다는 지적이다.

쉼 없이 달려온 8개월이었다. 뉴스타파 제작진은 지난 1994년 이후 가장 뜨거운 여름을 친일파 후손들이 사는 곳, 일하는 곳을 찾아서 이들을 만나기 위해 뛰어다녔다. 적은 인력과 예산으로 과연 ‘친일과 망각’ 프로젝트를 제대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지 중간 중간 회의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제 ‘친일과 망각’ 시리즈를 이번 에필로그로 정리한다. 한계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성과도 있었다고 자평한다. 무엇보다 뉴스타파의 이런 프로젝트는 3만 5천여 후원자와 수백만 시청자, 독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의 사진 등 자료를 제공해준 민족문제연구소에 감사드린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정치 권력의 비호와 친일 세력의 저항으로 인해 친일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 결과 우리는 정의가 부정 되고 가치가 전도된, 뒤틀린 역사의 길을 밟아 왔다. 더 이상 정치적인 이유로 역사의 정의를 세우는 작업이 뒷전으로 밀려서는 안 된다. 친일 청산과 과거 극복의 과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과거 극복과 친일 청산을 위한 뉴스타파의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 전체 에피소드는 친일과 망각 특별페이지(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취재, 글 : 김강민, 김용진, 박중석, 송원근, 심인보, 이보람, 최윤원
디자인 : 최미정
사진 : 김남범, 최형석
출판 : 임종헌
자료조사 : 김민정, 김태민, 박단비, 박주은, 임세지, 서가람, 정상석, 제희원
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