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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기각한
재판부의 각성을 촉구한다

오늘 서울중앙지방법원(판사 박성인)은 일제강점기 일본제철에 강제동원 당한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과 배상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온 우리는, 이번 판결이 강제동원 문제가 갖는 역사성과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밝힌다.

전범기업 일본제철을 상대로 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투쟁은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1997년 일본의 재판소는 일본제철이 파산한 후 다시 합병했기 때문에 지금의 일본제철은 다른 회사라는 등의 이유를 들며 피해자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후 피해자들이 다시 한국법원에서 소송을 시작하여, 처음으로 강제동원으로 인한 인권피해를 인정받은 것이 2012년 5월 24일 대법원 판결이다. 파기환송 된 이 사건은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판결이 확정되었다.

오늘 재판부는 ‘원고들의 권리행사 장애사유’가 이 2012년 5월 24일 판결로 인해 해소되었다며,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를 들어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 판단에는 크게 두 가지 잘못이 있다.

첫째, 재판부가 기준으로 삼은 2012년 5월 24일 판결은 2018년 10월에서야 확정되었다는 점이다.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변경할 만한 사유가 없어 굳이 별도의 판단이 필요하지 않다는 소수 의견에도 불구하고, 6년이 넘게 시간을 끌다 결국 피고의 주장을 기각했다. 따라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행사는 최소한 2018년 10월 30일 확정판결 후에나 가능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둘째, 재판부는 이 사건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재판부가 시효의 기산점으로 삼은 사건은 2005년에 제소되어 2012년 5월에 파기환송 된 후, 이례적으로 6년이 지난 2018년 10월에서야 확정판결이 선고되었다. 이 기간, 법원행정처, 청와대, 외교부가 회합하며 판결을 뒤집기 위한 ‘추악한 거래’를 지속했고 구체적으로 ‘소멸시효’를 활용하는 방안 등을 마련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미 밝혀졌다. 심지어 피고 대리인인 김앤장은 법원행정처와 긴밀히 논의하여 ‘의견서 제출 촉구서’를 대법원에 제출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식민지배와 전쟁동원으로 인한 인권피해에 관여한 가해자들에게 책임을 묻는데 시효를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이번 사건의 피고인 일본제철과 대리인 김앤장은 재판부가 기산점으로 삼은 2012년 5월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 사건의 ‘사법농단’ 당사자들이다. 재판부는 이들이 담합하여 재판을 지연시키는 동안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20여 년간 싸워온 원고들이 대부분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이들의 불법행위가 없었다면 당시 고령이 된 강제동원 피해자들 가운데 몇 명이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데 나섰을지 알 수 없다. 이 책임은 이제 아무에게도 물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번 판결은 법적 안정성을 위해 마련된 ‘소멸시효제도’를 불법적으로 활용하여 재판을 지연시키고 재판 결과를 바꾸려 시도한 당사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법익을 최대로 보장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위임받은 권력을 남용하여 국기를 문란하게 한 중대 사건에 대해 사법부가 얼마나 안이한 인식을 갖고 있는지 확인시켜주는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최소한의 역사인식도 부끄러움도 없이 법리에도 맞지 않는 판결을 내린 이번 재판부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항소심에서 이번 판결의 오류가 바로 잡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또 일본 정부의 눈치를 보며 판결을 이행하지 않는 일본제철에 대해서도 끝까지 마땅한 책임을 물을 것임을 다시 한번 밝혀둔다.

2021년 9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