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필자는 이제까지 각종 선거에서 투표를 할 경우 대부분 정의당과 녹색당에 표를 주었던 것 같다. 그것이 거대 양당을 견제하고 우리 사회의 정치 발전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녹색당은 불가능한 것인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위기 상황에서 필자는 내심 녹색당을 많이 지지하고 싶다. 독일에서는 메르켈 총리 이후 녹색당의 집권 가능성이 제기될 정도로 주목받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환경과 기후위기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은 대단히 높다. 그러니 이러한 객관적 조건에 조응해 녹색당의 활동은 당연히 활성화되어야 마땅할 일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녹색당은 그 활동이 대단히 미미하다. 솔직히 말하면, 그 자취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다.
잘 알고 지내는 선배 한 분은 오랫동안 녹색당을 후원해오셨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선배분께서 녹색당이 완전히 ‘개판’이 되었다고 하셨다. 혹시 잘못 들었나 생각하고 자세히 들어보니, 녹색당 당원들의 온라인 대화에 거의 반려견과 고양이 얘기밖에 없다는 말씀이었다. 결국 선배 분께서는 오랜 후원을 끊으셨다.
과거 서울시장 선거에서 녹색당 후보가 녹색의 기치 대신 페미니즘을 기치로 들고 나왔던 것도 당의 정체성을 크게 혼란시켰다.
이 심각한 기후위기의 시대에 부디 녹색당이 의미 있는 존재로 활동할 수 있게 되기를 고대한다.
정의당, 그 정체성은 무엇일까?
한편, 정의당은 그간 적지 않은 진보적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정체성에 의문부호가 많아지고 ‘집권당 2중대’라는 꼬리표도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심상 정의당’이란 풍자(최근에는 ‘류호정의당’)가 이어지기도 했다.
특히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의당의 비례대표들은 정의당의 정체성과 그리 부합되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또 이후 비례대표로 당선된 한 후보는 수행비서 해고와 관련해 물의를 빚음으로써 ‘노동’을 중요한 기본 가치로 하는 정의당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불러일으키게 만들기도 했다.
2019년 비례대표 선거법 협상에서 거대 양당에 의한 ‘듣도 보도 못한’ 위성정당이 만들어지는 등 눈가리고 아웅하는 왜곡이 극성을 부렸다. 하지만 정의당은 이에 전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더구나 당시 선거법 개정 특위 위원장은 심상정 의원이었다. 사실 그는 비례대표 배분의 산식은 국민은 알 필요가 없다는 발언까지 함으로써 엉망진창 결과에 한몫한 셈이었다). 그 뒤 ‘무늬만’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에서도 정의당은 아무런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저 쳐다만 보고 있어야 했다.
시대정신으로부터 비켜 서있다
그 두 번의 상황에서 정의당은 결국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거대 양당만 비난하면서 막을 내렸다. 특히 ‘위성 정당’과 같은 사안은 사실상 “판을 완전히 깨는 행태”이기 때문에 정의당이라면 마땅히 소속 의원들이 의원직 사퇴 혹은 총선 불참이라는 최후의 강수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결국 자신들의 ‘그 작은’ 기득권조차 끝내 버리지 않는다는 비판과 책임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돌이켜보면, 오늘 정의당의 문제는 자신의 비례대표 구성으로부터 출발되었다. 비례대표 선출 당시부터 그 선발 방식에 문제 제기가 잇달았다. 현재 당 소속 의원 6명 중 남성은 단 한 명에 불과하고, 2030 남성 의원은 없다. 편중성은 부인될 수 없다.
필자는 고 노회찬 의원 생전에 그에 대한 평론 글을 몇 번 썼다. 그가 주최하는 토론회에 토론자로 나서기도 했고, 국회 앞에서 둘이 식사도 했다. 노 의원은 내가 책을 출간했을 때 금방 자신의 SNS에 좋은 책이 나왔다며 알리기도 했다. 노 의원이 뜻밖에 세상을 떠난 날, 필자는 추모 글을 프레시안에 실었다. 그가 없는 정의당은 많이 변했다.
무엇보다도 시대정신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센세이셔널한 이슈나 시류에 영합하는 퍼포먼스 위주로 되면서 정작 사회 양극화와 기후위기 문제라는 시대정신과 시대적 과제에서 비켜서 있다.
요즘 들어 정의당에 대한 비판의 글을 찾아보기 어렵다. 문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 터이다. 무관심 혹은 기대가 없는 것, 이야말로 가장 좋지 못한 상황이다.
최근 정의당은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에서 당원 이외의 시민을 참여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기득권 유지의 차원을 넘어 ‘외부 차단’의 의도가 읽혀진다. ‘통진당’ 시기 자신들의 투쟁 대상이던 ‘소수 전위’의 데자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