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국권침탈 이후부터
학교 고유 교육이념 없애고
제국주의 주입하며 지배화
민족성 담긴 ‘교표’ 사라지고
친일파 만든 ‘교가’ 아직 불려
배화학원 태극문양→ 난초로
중동학원 무궁화 도상 사라져
대부분 사립학교 교표 바뀌어
민족정체성 없애기 교묘히 시도
친일잔재 은연 중 한국사회 잠식
일제 강점기 동안 일제가 자행한 민족말살 정책은 전통 문화를 훼손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런 민족말살 정책은 유·무형의 잔재로 해방이후에도 존속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학교 상징물이다. 초창기 민족성을 담은 학교 교표는 일제 상징물을 형상화하는 문양으로 교체됐다. 이런 일제 잔재를 그대로 담고 있는 교표는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친일 작사·작곡가들이 제작한 교가는 지금도 어김 없이 학교내에서 불리어지고 있다. 8·15 광복 76주년을 맞아 경기도내 학교에 남은 일제 잔재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또한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있는 학교도 소개한다.
지난 9일 평택시 한 고등학교 교문은 돌로 된 기둥 둘 사이에 있었다. 기둥에는 날개 형상 위에 둥근 원이 그려진 모양이 있었다. 색깔을 더한 모양을 보자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문양은 청색 바탕에 황금색의 날개가 새빨간 반원을 떠받치고 있었다. 한국식이라기 보다는 일본식에 가깝다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 문양은 학교를 상징하는 교표다. 교표에 대한 설명을 봐도 한국식과는 달라 보였다. 붉은색 반원은 아침을 여는 태양의 의미, 날개는 비상하는 독수리의 날개라고 했다.
이미지를 검색하다 보니 비슷한 모양이 검색됐다. 바로 독수리 날개를 단 일본 항공자위대의 상징이었다. 일본 항공자위대의 상징 뒤에 일장기를 그리면 학교의 교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최근 경기도교육청이 실시한 ‘경기도 학교 일제 잔재 전수 조사 보고서’에서도 해당 교표를 일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 학교 교화 역시 일본 철쭉인 영산홍이다.
l 일제에 의해 사라진 전통 교표
학교가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을 부착하기 시작한 것은 100여년보다 그 이전으로 흘러간다. 1885년 반포된 교육입국조서와 소학교령은 조선 고종이 공교육의 기능을 국가의 부강과 독립, 생활상 필요한 보통 지식과 기능을 익히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일제는 학교에 제국주의 이념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립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제한하는 학교령을 통해 조선의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교표는 학교의 교육철학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일제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기존 태극문양과 무궁화 등 한국 전통의 문양을 교표로 택하고 있던 학교들은 일제시절 교표개정의 아픔을 겪었다.
1885년 원두우 학당으로 개교한 경신학교는 1905년 십자가 중앙에 태극을 넣고 ‘경신학원’ 네 글자의 한자를 태극기의 4괘와 같이 배치했다. 이 태극교표는 1910년 한일병탄 이후 교표 중앙의 태극 도상(圖像)이 삭제당했다.
l ‘민족말살통치’의 수단으로 활용된 학교 교표
, 한국 교표 디자인의 역사와 문화적 변용 연구(정선아) 등에 따르면 교표 개정은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1937년 극에 달했다. 당시는 만주를 침공한 일제가 대공황 등으로 경제적 위기를 겪으며 소위 ‘문화통치’에서 ‘민족말살통치’로 노선을 전환하던 시기였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사립학교에 교표개정령을 전달해 민족정신의 말살을 시도했다. 이는 경기도 내무부가 경찰에서 보낸 ‘사립학교 교표개정령’에서 확인됐다.
당시 일제의 통치에도 한민족의 얼을 기리는 내용의 교표를 가진 다수의 사립학교들의 교표가 바꿨다.
배화학원의 경우 배화학당 시절 도장과 고등과의 졸업장 등에 태극문양을 사용했다. 1923년 교표를 만들 당시에도 태극 도안을 주 도상으로 썼다. 그러나 1937년 교표개정령과 함께 난초를 모티브로 한 일본 가문과 유사한 교표를 사용하게 됐다.
송도학원도 1937년 교표를 일제 경찰에게 압수당했다. 송도학원은 무궁화 사이에 펜을 그려넣은 교표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이를 압수당한 후 독수리 날개에 ‘중’자를 세긴 교표를 사용했다.
중동학원은 무궁화 사이에 떠오르는 태양의 도안으로 이뤄진 교표를 1929년부터 제정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1937년 교표를 압수당하고 교표 개정을 받자 문제가 된 무궁화 도상을 삭제하고 중동이란 교명만 표시하게 됐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 정체성을 담고 있던 교표의 수난사였다. 교표는 제작 주체의 의도와 그 전달 방식이 함축된 상징물이란 점을 고려해 일제는 민족성 말살 정책에 교표 개정을 철저히 이용했던 것이다.
l 친일행적자 작곡·작사 교가의 탄생
교가 편찬은 1945년에서 1950년대에 집중돼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교가보다 일본 국왕을 찬양하는 노랫말을 주로 불렀다. 그러다 보니 개별 학교를 상징하는 교가가 없었고, 해방 후 학교들은 교가를 제정하게 됐다.
문제는 당시 교가를 제정할 수 있는 음악가들 다수가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던 점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경기도내 39곳의 학교 교가를 작곡한 이흥렬(李興烈, 1909~1980)은 1938년 7월 라디오를 통해 방송된 등을 반주하고 ‘음악으로 내선일체를 실현하자’는 목적으로 결성된 경성음악협회 제1회 연주회에 출연했다. 1943년 7월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촉탁으로 조선에서 악단의 식민통치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데 역할을 한 히라마 분주의 고별연주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음악계 명사로 역할을 바꿔 가장 많은 교가를 작곡했다. 이 때문에 이흥렬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됐다.
도내 22곳의 교가를 작곡한 김동진(金東振, 1913~2009)은 평안남도 안주 출신으로 1942년 ‘대동아전쟁의 의의를 철저하게 관철시킬 가요 등을 보급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만주작곡연구회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활동했다. 일제를 찬양하는 ‘조국찬가’를 김대현, 윤용하 등과 함께 창작하고 1943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국, 양산가와 합창곡 건국 10주년 찬가 등을 작곡했다. 해방 후에는 민족 음악가로 변신해 1961년 조국광복, 조국수난, 조건재건 3부를 작곡하고 지휘하는 등의 행적을 보였다. 김동진도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이외에도 친일 행적이 뚜렷한 김성태(金聖泰, 1910~2012), 현제명(玄濟明, 1903~1960)이 작곡한 교가가 각각 18개교, 7개교 사용되고 있다.
작사가로는 친일 행적을 남긴 백낙준(白樂濬, 1896~1985), 이광수(李光洙, 1892~1950) 등이 있다.
해방 후 음악계 명사로 탈바꿈한 친일 행적 작곡·작사가는 한국 사회 음악계를 이끄는 주역으로 부상한다. 교가에 직접적인 친일용어를 담지 않았지만 근면과 애국, 조국 등 일제가 강조하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며 은연중에 한국 사회를 잠식해 왔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일제의 잔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한국 사회를 잠식해 왔다”며 “친일파 작곡·작사가가 만든 교가를 부르고, 일제를 상징하는 문양이 담긴 교표를 쓰는 등 배움의 장인 학교에 침투한 일제 잔재는 반드시 청산해야 할 적폐”라고 말했다.
/김중래 기자·김보연 수습기자 [email protected]
[인터뷰/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l “학교 안 일제 잔재 수두룩 국민이 나서 뿌리 뽑아야”
“일제 잔재가 학교에 남아있는 것은 친일파가 아닌 대한민국 역사 교육이 만든 상황입니다”
방학진(사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10일 인터뷰에서 “해방 후 청산하지 못한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가 아직도 이렇게 남아있는 것”이라며 이같이 지적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후 80년이 넘게 흘렀지만, 아직도 학교 현장에서는 일제 잔재가 남은 교표와 친일 행적 작사·작곡가가 만든 교가를 부르고 있다. 방 실장은 교육적인 목표에서도 이러한 잔재를 해소해 가야 한다고 했다.
방 실장은 “친일 작곡·작사가가 만든 교가를 학생들이 만들고 듣는다고 해서 친일파는 아니다”면서도 “그러나 학생 개개인의 집에서 부르는 것도 아니고 교육의 장인 학교에서 이를 부르는 건 대단히 모순된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 현장에 남은 일제 잔재의 이유로 친일 잔재 청산의 부재를 꼽았다. 특히 친일 행적 작사·작곡가의 교가 탄생 배경에 해방 후 음악계의 구조를 지적했다.
방 실장은 “해방 이후 한국 음악계는 친일 행적자에 의해 정리됐다”며 “이흥렬, 현제명 등은 서울대와 숙대, 경희대 등 유명한 음악대학의 초대 학장이 됐고, 교가를 음악계 권위자에게 맡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일 행적자들이 많은 교가를 만들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 사회가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던 것처럼 학교에서도 교육부분의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차별’도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지목했다. 여자와 소수자, 장애인 등을 차별했던 제국주의 파시즘의 영향은 지역 차별, 인종차별, 성별차별 등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이라도 일제 잔재를 청산해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방 실장은 “과거 ‘시대에 맞게 친일파는 열심히 살았고 독립운동가는 게을렀다’는 헛된 소리가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여준다”며 “이러다가는 이완용이 열심히 산 멋있는 사람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어 “대한민국은 1919년 임시정부의 정통에 따라 친일파 청산을 내걸었지만 해방 이후 일제 부역자 청산, 토지개혁 등을 실시하지 못했다”며 “국가는 친일파 청산을 안 했으니, 이제는 국민이 나서 일제 잔재를 청산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중래 기자·김보연 수습기자 [email protected]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전세계 여성 인권문제로 봐야”
오는 14일 제9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앞두고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한일 양국간의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전세계 여성의 인권문제로 봐야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이은희 독일 풍경세계문화협의회 대표는 10일 수원시 매원감리교회에서 열린 ‘용담 안점순 기억의 방’의 활용 방안 모색을 위한 비대면 의정토론회에서 국제사회와 연대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는 “일본군 성노예제로 인해 35개국에서 피해자가 발생했다”면서 “사안 그 자체로 초국가적인 주제”라면서 국제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동안 한국은 대규모 반 인륜범죄 7가지를 해결할 것을 일본에 요구했다. ‘전쟁범죄 인정’, ‘정부 차원의 공식사죄’, ‘법적 배상’,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역사교육 실시 등 피해자 명예 회복에 초점을 맞춘 해결’ 등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외면해 왔다.
김현정 배상과 교육을 위한 위안부 행동 대표는 “위안부는 전시상황에서 국가가 여성에게 얼마나 조직적으로 장기간 인권 탄압을 했는가에 대한 문제”라면서 “한일간의 역사 갈등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최대 성노예제도로 보고 해결해야한다”고 했다.
이어 “한국정부는 2015 구두선언은 위안부 문제의 궁극적이고 원칙적인 해결책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7가지 원칙에 기반한 해결을 위해 일본과 포괄적인 재협상을 요구해야한다”면서 “그동안 한국정부는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묻고 싶다면서 일본을 국제사법재판소로 회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김보연 수습기자 [email protected]
인천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