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다운로드]
1.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4민사부(이하 ‘재판부’라 함)는 2021. 6. 7. 강제동원 피해자 등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시중공업‧스미세키 등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들의 소를 모두 각하한다는 판결(서울중앙지방법원 2021. 6. 7. 선고 2015가합13718 판결, 이하 ‘이 사건 판결’이라 함)을 선고하였다. 재판부는 이 사건 판결 선고 직후 설명자료를 통하여, ‘이 사건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해당하며, 청구권협정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국민을 상대로 소로써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의견을 밝혔다.
2. 그러나 이 사건 판결은 일제시기에 중대한 인권침해를 당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국내 사법절차를 통해 실효적으로 구제받는 것에 장애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 판결은 대법원 2018. 10. 30. 선고 2013다61381 전원합의체 판결(이하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라 함)의 소수의견과 결론적으로 동일하다. 이 사건은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내려진 사건과는 별개이기 때문에, 재판부가 위 전원합의체 판결의 법정의견에 기속되지 않고 소수의견에 따른 판결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법원이 이미 2012. 5. 24. 선고 2009다68620 판결에서도 이미 불법행위로 인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고, 그 후 다시 동일한 사건에 대해 재상고가 이루어져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심사숙고하여 동일한 법정의견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면, 하급심 법원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위 법정의견과 다른 견해를 취하는 것에는 신중을 기하여야만 한다. 즉,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법정의견과 달리 판단하여야만 하는 현저한 사정변경이 있지 않는 한 위 전원합의체의 법정의견에 따라 판결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것이야말로 오랜 시간 혼란이 있어온 청구권협정의 해석에 관해 안정성을 확보하고, 중대한 인권침해를 당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실효적으로 구제하기 위해 대한민국 법원이 해야 하는 역할이다. 그럼에도 이 사건 판결은 이미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소수의견에 머물렀던 의견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별다른 사정변경이나 추가 논리 없이 다른 해석으로 판결을 선고했다. 법적 안정성에 대한 부당한 침해이다.
3. 또한 재판부가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법정의견이 아닌 다른 의견을 취하면서 들고 있는 근거도 납득하기 어렵다. 재판부는 ‘이 사건 청구를 인용하는 것은 비엔나협약 제27조와 금반언의 원칙 등 국제법을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비엔나협약 제27조는 “어느 당사국도 조약의 불이행에 대한 정당화의 방법으로 그 국내법규정을 원용해서는 아니된다”고 정하고 있을 뿐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원용하는 것은 ‘불법행위로 인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에는 청구권협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고, 이것은 청구권협정에 대한 해석을 원용한 것이지 국내법규정을 원용해 청구권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즉, 조약의 ‘이행여부(조약이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한 이후의 문제)’가 아닌 조약의 ‘적용여부’가 문제되고 있는 사건에서, 비엔나협약 제27조는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법정의견과 달리 판단하면서 제시할 만한 적절한 국제법적 근거가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2005. 8. 26. 민관공동위원회에서 밝힌 바와 같이, 대한민국정부는 국가권력기관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와 관련한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히고 그 입장을 유지하여 왔으므로, 국제법상의 ‘묵인’에 해당하여 국제법상 금반언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4. 이 사건 판결의 가장 큰 문제는,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대법원에서 최근 정립된 청구권협정에 대한 해석에 대해 특별히 새로운 법리적 논거 없이 이를 따르지 않으면서, 오히려 비본질적, 비법률적 근거를 들어 판결을 선고했다는 점에 있다. 이 사건 판결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판결이 확정되어 집행으로 이어지면 “청구이의의 소 및 그 잠정처분의 대상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라며, 이를 원고 청구를 각하하는 이유 중 하나로 설시하였다. 그러나 민사사건 본안 재판은 원고와 피고 간 권리의 존부를 판단하면 될 뿐이다. 본안 재판에서 왜 판결 확정 이후 집행단계의 사정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지 납득할 수 없다. 심지어 이 사건 판결의 예상한 집행단계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현재 대법원 전원합의체 법리에 따를 때 극히 희박한 가능성일 뿐이다. 민사 본안 재판에서 비본질적인 집행단계의 문제를 청구 각하의 근거로 설시한 것은, 그만큼 이 사건 판결 논리의 빈곤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5. 무엇보다, 이 사건 판결은 국가적 이익을 앞세워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를 불능으로 판단하였다는 점에서 비법률적이다. 이 사건 판결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가 인용되어 강제집행이 이루어지면 국제적으로 역효과가 초래된다’, 원고들의 청구가 “국가의 안전보장과 질서유지라는 헌법상의 대원칙을 침해하는 것으로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판시하였다. 대한민국 사법 역사 중 민사소송에서 피해자의 주장을 ‘국가안전보장과 질서유지라는 헌법 원칙을 침해하여 권리남용’이라 판단한 사례 자체가 있는지 의문이다. 이 사건 판결 재판부는 노골적으로 이 사건 판결의 이유가 판결이 야기할 정치·사회적 효과 때문이라는 점을 고백했는데, 사회적 효과를 들어 판결을 바꾸는 것에 대한 문제점은 이미 오랜 시간 지적받아왔다. 재벌 총수들의 형사판결에서 기업의 경영악화 등을 이유로 형량을 줄여 선고하는 등의 사법부 악습이 이 사건 판결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판결의 사회적 효과는 원칙적으로 사법부가 판단근거로 삼을 영역이 아니다. 또한 사회적 효과에 대한 판단 자체도 현저히 부당하다. 재심으로 다시 판단되지 않는 한, 확정된 판결을 따르는 것이 법적 의무이다. 그 법적 의무를 강제동원 가해 기업들이 장기간 해태하고 역으로 일본 정부가 나서 외교적 공격을 하는 상황에서, 사법부는 오히려 그 부당한 상황의 원인을 확정판결로 권리를 인정받은 피해자들에게 돌리고 있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권리행사가 대한민국을 위태롭게 만든다며 권리 남용이라고 낙인찍은 것이다.
6.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과 외교적 압박이 거셌다. 강제동원 가해 기업들은 확정 판결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사과도 배상도 하지 않고 있다. 승소 원고들과 최소한의 협의절차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사건 판결을 내린 재판부는 이러한 상황에 포획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보복과 이로 인한 나라 걱정에 법관으로서의 독립과 양심을 저버린 판단을 하였다. 민사소송 원고의 권리를 인정하면 ‘대한민국의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및 공공복리’가 위태로워진다는 금시초문의 법리를 설시하면서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는 논리를 별다른 부끄러움 없이 판결문에 명시했다.
이 사건 판결은 항소심에서 파기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럼에도, 일국의 최고 법원에서 확정된 판결을 이행하지 않고 있는 일본 가해 기업과 최고법원 판결을 무효화하라며 비상식적 외교적 압박을 이어가고 있는 일본 정부가 만들어낸 현실에 굴복한 서울중앙지방법원 1심 재판부의 비상식적, 비법리적 판단은 중대한 비판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