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

새로운 생산방식은 세계의 주요한 모든 경제체제에서 출현해왔다. 새로운 생산방식을 일컫는 많은 이름 가운데 가장 간명하고 가장 널리 회자되는 것이 지식경제이다. 우리는 또한 지식경제 나름의 작업에 대한 가장 특징적인 태도를 부각시킨다면 지식경제를 실험적인 경제라고 부를 수도 있다. 지식경제는 경제생활의 가장 깊이 착근한 보편적인 특성들의 일부를 우리의 이익이 되도록 변화시킴과 동시에 생산성과 성장을 극적으로 향상시키겠다는 약속을 견지한다.

그러나 지식경제의 효과는 아직까지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지식경제는 널리 확산되지 않고 소수의 노동자를 채용하는 생산의 전위들에 국한되어왔다. 기업적, 기술적 엘리트들이 지식경제를 통제한다. 소수의 세계적 대기업들은 지식경제가 산출한 이윤 중 알짜배기를 차지해왔다. 지식경제는 생산체계의 많은 부분에서 출현한다. 따라서 지식경제와 첨단기술 산업을 동일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나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지식경제는 노동자의 대다수를 배제하면서 좁은 프린지(fringe)로 머문다. 지식경제의 제품들이 더욱 더 널리 사용되는 경우에도 지식경제의 혁명적 방식은 지속적으로 고립된다.

우리가 이러한 고립된 전위들에서 사회적으로 포용적인 전위들로 넘어가는 경로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경제성장의 강력한 원동력을 확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우리는 또한 기성의 시장체제들 안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에 대하여 누진세와 재분배적 사회지출을 통한 사후적 교정책보다 훨씬 더 강력한 불평등의 해법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생산방식의 진정한 성격과 잠재력은 가려져 있다. 즉 지식경제는 고립성으로 인해 마찬가지로 정체되어 있다. 로봇과 인공지능과 같은 지식경제와 가장 최근에 결합되어온 기술들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제적 사회적 생활에 대한 지식경제의 중요성을 겨우 인식하기 시작했거나 지식경제의 가능적 미래들에 대한 통찰을 겨우 획득했다.

이 책에서 나는 지식경제, 즉 지식경제의 국한성의 원인과 결과 나아가 그 현재적 고립성에서 가능적 포용성으로의 이행을 제시해보겠다. 경제적 관념들의 기성체계는 유용하고 심지어 불가피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전통적인 경제이론은 현재의 고립적 지식경제에서 포용적 지식경제로 전진하는 데에 요구되는 제도적 및 정책적 변화를 이끌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통찰을 제공하는 데에는 부족하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의제를 통해 사고하려는 노력은 우리에게 경제학의 대안적 미래들과 경제의 대안적 미래들을 재평가하도록 자극한다.

경제적 현실과 경제적 사유에서의 이러한 상황은 모든 나라들, 특히 개발도상국들을 현재 실천적인 정치경제학의 전면에 나타난 딜레마에 빠뜨린다. 전통적인 산업화[전략]은 경제성장과 가장 부유한 경제체제들의 수준으로 수렴하는 데에 대한 보증으로서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안, 달리 말하면 넓은 저변을 가지고 경제 전반에 퍼진 지식경제 형태의 발전은 접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많이 교육받은 인구를 가진, 가장 부유한 경제들조차도 이러한 대안을 성취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안은 그렇지 않은 세계에서 의당 닿을 수 없는 목표가 아닌가?

경제사의 모든 국면에서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존재한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처음 출현하여 확산되기 시작할 때 그 방식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필요한 투입에 대비하여 가장 큰 산출을 낳는 방식)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은 가장 전도유망한 방식(생산성의 최전선에 도달하고 경제 전반에 변화를 고취하는 가장 큰 잠재력을 가진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에는 경쟁적인 생산방식보다 월등하게 다산성과 융통성의 속성들, 즉 다양한 여건에서 다양한 형태를 취하는 속성들이 있다.

과거에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경제의 특정 부문, 예컨대 농업이나 서비스업보다는 제조업에 연결되어왔다. 그러나 가장 선진적인 방식은 단지 한 부문과 동일시되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부문들의 부분으로서 출현할 수도 있다.

경제학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두 명의 사상가(애덤 스미스와 카를 마르크스)는 경제학의 가장 심오한 진리를 발견하는 최상의 방법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연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두 사람에게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18세기 말 산업혁명의 초기에 나타난, 기계화된 제조업(매뉴팩처)이었으며 이는 19세기 후반의 공장제 대량생산으로 이어졌다. 스미스와 마르크스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연구를 경제적 통찰에 이르는 관문으로 간주한 것은 옳았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우리의 역량을 가장 완전하게 드러내는 경제활동의 형태이기 때문에 그러한 방식에 대한 연구는 경제의 작동방식과 경제의 가능한 미래들에 대한 통찰을 얻는 데 가장 큰 성과를 내는 원천이다. 가장 선진적인 방식이 또 다른 생산방식을 계승하는 식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방식을 이전의 방식보다 선진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에 대한 관념도 변한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가장 선진적인 방식의 관점에서 어떻게 경제들이 작동하고 작동할 수 있는지에 대한 관념들을 변화시킨다. 이제 우리는 경제사 전체를 성찰하게 된다.

나는 오늘날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지식경제라고 부르고 지식경제의 특성들을 논의하고 해명하면서 지식경제의 대안적 미래들을 탐구해 나갈 것이다. 지식경제와 우리의 만남은 어떤 생산방식을 가장 선진적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시사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생산방식이야말로 정신, 특히 우리가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정신생활의 부분에 가장 근접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정신적인 방식은 경제활동의 모든 활용 가능한 형태 중 자연을 이용하고 변형하는 경험과 서로 협력하는 경험을 가장 밀접하게 지속적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이다. 가장 정신적인 방식은 그러한 일련의 각 경험들을 다른 경험을 자극하는 데에 사용함으로써 개별적인 경험들을 연결시킨다. 기술에 대해 생각하는 최상의 방법 중 하나는 기술을 그러한 두 가지 유형의 경험들(자연을 바꾸는 경험과 우리가 함께 작업하는 방식을 바꾸는 경험을) 결합한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지식경제의 관점에서 경제사를 회고할 때 우리는 이전의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새로운 안목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방식들 또한 각기 그 시대의 가장 정신적인 방식으로서 우리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활용하는 경험과 생산에서 우리의 협력방식을 변화시키는 경험을 가장 긴밀하게 결합하였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누렸던 탁월함의 이와 같은 이유들은 그러한 방식이 왜 우리의 특징적인 역량들(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역량)을 최상으로 드러내는지를 보여준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연구하는 것이 경제이론의 발전으로 향하는 가장 빠르고 믿을 만한 경로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경제활동의 역사를 희소성, 필요, 종속성, 강제가 주요한 역할을 하는, 냉혹한 통제의 영역으로 보는 데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지식경제의 부상이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경제생활도 역시 항상 상상력이 소란스럽게 진보하는 역사였다.

이 책의 중심적인 생각은 현재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인간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잠재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경제활동의 특징에서 중요한 변화를 드러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잠재력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정보, 통신, 인터넷과 연결된 새로운 기술의 영향과 같은 매우 피상적인 형태로만 파악한다. 새로운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성격과 파급 범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러한 방식을 국한된 형태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경제에서 아직은 널리 퍼져 있지 않고 기업적, 기술적 엘리트의 통제를 받는 고립적인 생산의 전위들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그러한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그 모든 잠재력을 드러낼 수 없다.

선진적 생산방식의 깊이(선진적 생산방식이 그 잠재력을 계발하고 실현하는 정도)는 선진적 생산방식의 파급 범위(경제 전반에 대한 이러한 선진적 생산방식의 확산 정도)와 관련된다. 생산방식은 많은 환경에서 출현하고 이러한 환경에서 비롯되는 특징적인 기회와 제약들에 적응하는 경우에만 출현한다. 그럼으로써 생산방식의 더 일천한 형태들의 표층 아래서 더 심층적이고 더 파급력이 큰 속성들을 우리가 알아챌 수 있게 한다.

지식경제는 국한되어 있지만 더 이상 생산의 어떤 특정한 부문에 묶여 있지 않다. 지식경제는 기계화된 제조업과 공장제 대량생산이 그랬듯이 서비스업이나 농업과 대비되는 제조업 분야와 특권적인 연관을 갖지도 않는다. 지식경제는 모든 부문, 즉 지식집약적인 서비스업과 정밀공학, 과학적 영농, 첨단기술 산업에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부문에서 지식경제는 프린지로서 출현하고 대다수 노동자들은 여기에서 배제된다.

지식경제의 작동은 점차적으로 세계적인 입지를 확보한 소수의 대기업들에 의해 통제받는다. 그러한 기업들은 생산활동의 많은 부분을 규칙화하거나 상품화하고 이윽고 그 부분들을 세계의 다른 지역에 기업들과 공장들에 하청을 주는 방식을 택하였다. 결과적으로 고유한 지식경제 또는 내가 나중에 탐구하게 될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특성들을 가진,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생산방식은 점차 더욱 제약된 이너 서클, 즉 왕국 안의 왕국으로 변한다.

현재 국제적이되 고립적인 지식경제 형태의 이너 서클과 그 일상화된 주변부는 자신의 제품과 서비스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플랫폼과 네트워크에 대한 접근 기회를 광범위하게 판매한다. 사회의 전 영역에 존재하는 기업들과 개인들은 이러한 상품을 이용한다. 그러나 그러한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으로는 기업이나 개인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참여하지 못한다. 기업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일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예컨대, 복잡한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 컴퓨터 네트워크와 관련 소프트웨어를 활용함으로써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기업은 심지어 자신을 지식경제의 주인공으로 전환시키게 될 변화에 착수하기보다는 변화를 예측하는 방편으로서 효율을 높이는 장치들을 채택할지도 모른다.

이 책의 중심 테제는 지식경제(현재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를 경제의 각 부문에서 고립적인 전위들, 즉 발전된 프린지들로 지속적으로 국한시킬 것인지 아니면 확산시킬 것인지에 따라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물질적 도덕적 이익들의 많은 부분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지식경제는 고립적 전위보다 포용적 전위로 변할 수 있다. 지식경제의 확산은 어쨌든 기본적인 경제적 제도들과 가정들, 즉 현행제도 아래서 경제를 규제하거나 사업을 수행하는 다양한 방식에서 변화를 요구하고 나아가 다른 종류의 시장경제를 요구한다. 이제 우리는 시장과 국가의 상대적 비율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논쟁, 즉 분산적인 경제활동의 조직을 위한 제도적 안배들에 관한 논쟁을 착수해야만 한다.

나는 지금처럼 선진적인 프린지에 국한되어 번창하는 지식경제를 고립적인 혹은 국한된 전위주의(insular or confined vanguardism)로, 널리 확산된 지식경제를 포용적 전위주의(inclusive vanguardism)로 부르겠다. 고립적 전위주의와 포용적 전위주의 사이에서의 선택은 피할 수 없다. 그러한 선택은 우리의 경제적 관심들 전체와 관련되고 다수의 정치적인 심지어 영적인 관심들과도 관련된다. 그러한 선택은 세계에서 가장 큰 권위를 지니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와 가장 강력한 연결성을 지닌 이상, 달리 말하면 행위주체, 즉 각자의 실존조건을 변화시키는 만인의 능력에 관한 이상을 더욱 완전하게 실천할 기회와 관련된다.

포용적 전위주의(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경제 전반에 걸친 확산 형태)를 수립하는 목표는 실천적인 정치경제학의 두 가지 압도적인 관심사인 경제적 침체와 불평등에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지식경제의 확산되고 발전된 형태는 사회적으로 포용적인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감소시키는 가장 전도유망한 방법을 제공한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최근에 앨빈 한센의 “장기침체”라는 케케묵은 상표 아래서 경제성장의 지속적인 둔화를 해명하려고 시도해왔다. 생산성의 증가를 측정하는 수치들은 이러한 둔화를 도표화한다. 상세하게 연구된 미국 경제를 고려해보자. 1947년부터 1972년까지 노동생산성(대략 총요소생산성으로 치자면)은 미국에서 매년 평균 2.8 퍼센트 증가하였고, 1972년부터 1994년까지는 매년 1.5 퍼센트, 1994년부터 2005년까지는 매년 2.8 퍼센트, 2005년부터 현재까지는 매년 1.4 퍼센트 증가하였다. 저성장 시기 이후에 생산성은 1994년부터 2005년 사이에 꼭짓점을 찍었고 이윽고 다시 하락하였다.

한 세기 전환기의 꼭짓점에서 잠시 중단되었지만 1972년 이래로 지속된 생산성 증가의 둔화는 1930년대에 한센이 강조한 많은 요인들, 즉 인구성장의 후퇴, 총수요 부족 그리고 “과잉저축”(소비를 초과하는 저축)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장기침체에 대한 해묵은 논쟁에서 전반적으로 빠져 있는 하나의 요소가 이제 중심적인 무대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즉 100여 년 전의 기술혁신들과 대비할 때 특히 정보통신에서 현대 기술들의 변혁적 효과가 더 제한적이라는 추정이다. 이러한 논의방향에 따른다면 우리는 1994년과 2005년 사이의 생산성 증가에서의 일시적 상승을 한시적 현상으로, 즉 광범위하고 다양한 거대기업, 대기업, 중소기업들이 컴퓨터 및 디지털 기술을 채택한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 컴퓨터와 디지털 기술을 채택하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기업들은 현재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따라가지도 못 했을 것이다.

장기침체 테제의 효과는 일반적으로 경제성장의 쇠락에, 특수하게는 생산성성장의 쇠락에 자연성과 필연성의 부당한 후광을 더해주는 것이었다. 현대기술이 1세기 전의 기계적 혁신들보다 잠재력에 있어 덜 혁명적이라고 믿어야 할 근거는 없다. 실제로 우리는 이제 겨우 현대기술의 잠재력을 활용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활용함으로써 그러한 기술이 일깨운 혁신들을 장려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어쨌든 기술의 결과들은 그 기술들이 발생하는 제도적, 문화적 여건들에 의해 항상 매개된다.

나는 1970년대 초반 이래로 경제침체의 주요 원인은 지식경제가 경제 전반에 확산되지 않고 상대적으로 고립적인 전위 부문들에 국한되었다는 점에 있다고 추정한다. 이러한 현상에서 자연적인 것이라곤 전혀 없다. 이러한 현상은 해명되어야 할 수수께끼이다.

과거에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기계화된 제조업과 공장제 대량생산)은 제조업 분야와 밀접하게 관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생활의 모든 부분에 흔적을 남겼다. 지식경제는 원칙적으로 더욱 더 광범위하게 확산되어야 한다. 지식경제의 어떠한 특성도 지식경제를 경제의 특정한 부문에 제한하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지식경제는 비록 프린지로서만 출현하지만 실제로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상반된 현상도 발생해왔다. 많은 부문들에서 지식경제가 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경제는 심지어 가장 부유한 경제[체제]들과 교육받은 인구층이 가장 많은 사회에서도 지식경제를 둘러싸고 있는 경제생활의 주요한 기조에 대해 이질적인 군도(群島)로 머물러왔다. 이러한 현상은 결과적으로 경제와 노동자들에게서 생산성 향상을 위한 가장 강력한 자극을 제거하였다. 생산성 향상을 위한 자극은 기계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혁신하고 동시에 협력하는 우리의 능력을 급진화하는 데에서 나온다. 이것이 포용적 전위주의의 약속이다. 현대적인 기술의 개발과 이용에서의 성공은 그러한 전진의 수많은 측면들 중 하나의 측면에 그칠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자면 장기침체 테제는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번창하는 협소한 경제활동 분야들과 제한된 기업들에 갇혀 있는 조건에서 그러한 생산방식을 해방시키지 못한 결과를 대체로 자연화하려고 시도한다. 우리가 이러한 고립성을 부당하게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더 심층적인 특성 자체를 이러한 특성을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특정한 경제 분야(첨단기술 산업)의 특성들로 오인함으로써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쳐버리는지도 깨닫지 못한다.

생산의 모든 부문들에서 프린지로서의 지식경제의 국한성은 불평등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강력한 결론을 함축한다. 고립적이지만 다양한 부문에서 등장하는 전위와 경제의 나머지 부분(후위들 전체) 간의 분할은 기회와 역량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의 강력한 원인이 되어왔다.

모든 경제에서 심지어 가장 교육을 잘 받은 노동자를 보유한, 가장 발전된 경제에서도 서비스와 소매업에서 퇴행적인 소기업(경제활동 인구의 상당한 비율이 농업에 종사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지 낙후한 소규모 농지보유와 더불어)은 이러한 경제적 주변의 가장 큰 부분을 대표한다. 그러한 소기업(small business)은 수억 명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이상이자 피난처로 여겨진다. 소기업은 고용의 최후 기반일 뿐만 아니라 또한 종종 어느 정도의 번영과 자립을 성취하려는 거의 보편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유일한 접근로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곳에서 소기업, 특히 가족기업은 가계저축과 자기착취로 연명한다. 지식집약적인 엘리트 전문직 서비스를 논외로 하고 전통적 기술업종을 부분적 예외로 한다면 소기업은 거의 항상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특성들과 전반적으로 무관하였다.

소기업이 경제적 후위의 첫 번째 주요한 구성 부분이라고 하면, 두 번째 구성 부분은 사양길의 대량생산 제조업이다. 이러한 제조업과 전통적으로 이와 연관되었던 서비스업은 한때 가장 선진적이라고 간주되었던 생산방식의 거점이다. 이러한 제조업과 서비스업은 소기업이 전통적으로 받았던 무관심과 비교한다면 그 중요도에서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큰관심을 유발한다.

사양길에 들어선 대량생산 제조업은 몇 가지 이유에서 관심을 받는다. 첫 번째 이유는 20세기 후반부의 발전경제학이 제시한 고전적인 발전 공식이 노동자들을 생산성이 더 낮은 부문에서 생산성이 더 높은 부문(이 경우 전자는 농업으로, 후자는 제조업으로 이해된다)으로 이전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노동운동과 정치에서 제조업 노동자의 대표들이 세계의 좌파 성향의 정당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어쨌든 또 다른 이유는 우익 정당들이 대량생산 제조업에서 노동자들의 추방과 불안정을 자신의 사회적 기반을 확장하고 재형성할 기회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세계에 걸쳐 공통적인 충동은 소기업의 이익을 위해 소소한 양보들의 갑옷을 제공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소기업 관행들의 퇴행적이고 상대적으로 비생산적인 성격을 자연적인 것 혹은 심지어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소기업을 각자도생하도록 포기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공통적인 충동은 국가적 대량생산 제조업을 지식경제의 관행으로 전환하거나 그러한 요구조건에 부합하도록 하는 어떠한 계획의 기미도 없이 임금경쟁을 포함한 해외경쟁에서 그러한 제조업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지식경제에 새로운 부가 쌓임으로써 지식경제와 생산의 넓은 주변부 간의 격차는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전통적인 장치들이 극복하기에는 벅찬 불평등을 낳는다. 전통적인 장치들은 전통적인 소기업의 보호와 조세와 이전을 통한 보상적 재분배(누진세와 보상적 사회지출)를 의미한다. 그러한 장치들은 1차적인 분배를 형성하는 제도들과 달리 경제적 편익의 2차적인 분배[재분배]를 담당한다.

그와 같은 사후적 교정은 경제조직과 특히 생산구조에 뿌리내린 불평등에 대해서는 주변적인 효과만을 발생시킬 공산이 크다. 이러한 교정 활동은 경제의 수요측면만을 변화시키고 공급측면과 생산제도를 방치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활동은 저축, 투자, 고용을 위한 기성의 유인책들을 동요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만족스러운 상태에 이를 수 없다. 효율성에입각한 논거와 형평성에 입각한 논거들 간의 익숙한 대립은 불평등을 완화하는 과업과 과업의 수행을 위해 선택한 방법들 간의 불균형에 관한 수사학적 성찰에 불과하다.

경제의 수요측면과 공급측면에서 동시적으로 편익의 불평등을 다루는 포용적 전위주의의 발전은 극단적인 불평등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해법일 뿐만 아니라 생산성성장의 둔화에 대한 가장 전도양양한 해답을 대표할 수도 있다. 새로운 교육양식의 확산, 생산의 정신적 기풍의 쇄신, 경제제도의 재형성 등에서 이러한 지식경제의 요구사항의 비상한 성격은 불평등에 대한 지식경제의 심층적인 효과를 확보해줄 수도 있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회고적 재분배(제도적으로 보수적인 사민주의의 본질적인 방법)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경제적 편익의 1차적 분배를 형성하고 불평등을 낳은 제도들을 수정함으로써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포용적 전위주의는 침체를 극복하는 데에 사용하는 바로 그 수단을 통해 불평등을 타파할 수도 있다.

이 책에서 나는 포용적 전위주의에 대한 논의를 9단계로 전개하겠다. 제1장(제1단계)에서는 현재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으로서 지식경제의 특성을 포착하려고 한다. 제2장(제2단계)에서는 지식경제가 고립적인 전위들로 국한된 수수께끼, 이러한 국한성의 주요한 원인, 나아가 그러한 지식경제가 경제적 침체와 불평등에 끼치는 광범위한 효과를 논의하겠다. 제3장(제3단계)에서는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경제 전반에 확산시키기 위한 조건들을 논의해보겠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은 세 가지 범주, 인지적-교육적 요구사항, 사회적-도덕적 요구사항, 법적-제도적 요구사항(시장질서의 제도적 틀에서의 변화)으로 구분하겠다. 제4장(단계)에서는 이러한 세 가지 요구사항들을 충족시키는 데에 가장 우호적인 환경을 형성하는 문화와 정치의 성격을 논의하겠다.

종합하면 제3장과 제4장은 청사진이나 체계가 아닌 누적적 변화의 궤도로 이해되는 포용적 전위주의의 기획을 제공한다. 각 장에서 나는 현대 경제의 여건에서 우리가 이러한 방향으로 운동을 시작할 수 있게 하는 활동과 개혁의 일부를 제시할 것이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프로그램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전개하는 일에 착수할 수단들은 이미 확보되어 있다. 프로그램의 전진은 경제적 침체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최상의 답을 의미한다.

제5장(제5단계)에서는 고전적인 발전경제학의 관심사, 즉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더 낮은 농업에서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더 높은 제조업(최근까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대표하였던 대량생산 형태의 제조업)으로 노동자와 자원을 이전시킴으로써 경제성장을 촉진시켜야 한다는 발전경제학의 주요한 권고사항에 비추어 국한적 전위주의와 포용적 전위주의에 대한 논의를 재검토해 보겠다. 지구적이고 변화무쌍한 거대기업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의 저임금 대량생산(철 지난 포드주의)으로부터의 경쟁을 포함해서 내가 검토하게 될 다양한 이유로 발전경제학의 공식은 현재 무너졌다. 그러나 공장제 대량생산의 낡은 공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면, 포용적 전위주의라는 대안은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부유한 경제들 중 어느 나라도 이러한 대안을 실행하거나 심지어 상상하지도 못한다면, 전통적인 대량생산을 위해 비교적 덜 까다로운 교육적, 제도적 요구사항들조차 종종 충족되지 못한 사회에서 어떻게 대안들이 수립되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

제6장(제6단계)에서는 이 책에서 제시된 지식경제와 그 미래들에 대한 견해를 부유한 나라의 정치경제에 적용해보겠다. 경제활동 인구가 가장 생산적인 관행을 널리 활용하도록 만드는 경제성장 전략을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가장 부유한 사회들의 많은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의 핵심(주춤거리는 경제성장, 경제의 위계적 분절화를 방치하는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시도의 부족, 박탈의 경험에 발언권을 주지만 구조변화의 전망을 제공하지 않는 정치인들과 정치운동의 등장)에 닿아 있다.

포용적 형태의 지식경제 프로그램은 시장질서의 제도들을 혁신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정치를 변화시키는 운동의 일부로서만 전진할 수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따라서 20세기 중반 이래로 이러한 사회에서 우세한 지위를 차지해온 제도적, 이데올로기적 안배들과의 단절(비록 단절이 점진적이고 분절적인 수단을 통해 성취된다고 하더라도을) 요구한다.

제7장(제7단계)에서는 경제이론의 가장 기본적이고 친숙한 문제(수요와 공급의 관계)의 시각에서 국한적인 전위주의와 포용적 전위주의에 관한 나의 설명을 재고해 보겠다. 공급제약들에 대한 돌파구들이 자동적으로 수요제약들에 대한 상응하는 돌파구를 보장해주지도 않고 그 역도 성립하지 않으므로 경제성장은 반복적인 중단, 실패, 침체에 빠지게 된다. 헨리 포드가 반농담조로 자신의 노동자들에게 제시한 약속(노동자들이 포드 자동차를 살 수 있도록 임금을 후하게 지급하겠다)을 기업의 수준이 아닌 경제 전체의 수준에서 계약을 통해 실행할 방법은 없다.

완전고용을 위한 수요와 공급의 적응에 관한 해법은 계약적인 것이 아니라 제도적이다. 현대 경제체제들의 여건 아래서 포용적 전위주의(수요와 공급의 제약들에 대한 가장 급진적이고 포괄적인 돌파구의 형식)만이 공급의 증가가 수요의 증가를 지지해주고 수요의 증가가 공급의 증가를 지지해주는 것을 보증해줄 수 있다. 케인스의 교리는 고용의 침체된 수준에서 공급과 수요의 적응(균형)의 실패라는 특수한 사례만을 다루고 있다.

제8장(제8단계)에서는 포용적 전위주의의 의제를 관통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경제적 관념들의 성격을 토론해보겠다. 나는 경제이론의 주류, 즉 19세기 말 한계주의 경제학자[한계효용학파]들이 전개한 경제학의 유용성과 한계를 검토함으로써 이 과제를 수행하겠다. 지식경제의 대안적 미래(오늘날의 고립적 전위주의를 넘어서는 미래)는 한계주의자들이 제공한 강력한 분석적 도구들보다 더 많은 자원을 가진 경제학을 짝으로 전제한다. 이러한 경제학의 설명적이고 변혁적인 야망은 한계주의자들의 야망과 달라야만 한다.

마지막 제9장(제9단계)에서는 포용적으로 변모하고 자신의 잠재력의 한계까지 전진해가는 지식경제의 더 높은 목적, 즉 더 원대한 삶을 실천하고 모두 함께 더 큰 존재로 변모할 더 좋은 기회의 약속을 논의해 보겠다.

이 책은 경제적 분석에서 하나의 프로그램이자 동시에 하나의 연습으로서 일종의 스케치이다. 이것은 지식경제의 대안적 방향을 상상하는 시도이자, 그러한 방향이 의존할 수 있는 사유방식을 범례화하는 시도이다.

국한적 전위주의와 포용적 전위주의의 주제 혹은 지식경제의 대안적 미래들에 관한 주제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오늘날 정치경제학의 중심적 쟁점들에 이른다. 이 주제는 우리로 하여금 이용할 만한 기성 방법이나 모형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영역에 대해 사유하도록 촉구한다. 프로그램으로서의 보상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공언된 정치적-경제적 목표(사회적으로 포용적인 경제성장)를 실천하는 우리의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전망이다. 사유방법으로서의 보상은 스미스와 마르크스처럼 우리도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연구를 활용하여 경제와 그 변혁에 대한 더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이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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