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1일은 농민의 날이었다.
농민의 날은 참 묘하게 정해졌다. 한자로 十과 一을 합치면 土(흙 토)자가 되니 흙을 기반으로 일하고 흙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국민에게 공급하는 농민과 농업을 기억하며 土월 土일을 농민의 날로 정했다. 계절적으로는 농사가 끝나가는 시기이니 적당하다. 다만 묘하다고 한 것은 농업과 관련해 여러 기념할 만한 날들이 많이 있는데 이렇게 숫자맞추기 식으로 정한 것은 국민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업을 기념하는 중요한 날을 정하는 방법으로는 좀 억지스럽지 않은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각설
올해 농민의 날은 17년 만에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로 치러졌다.
17년 만이라고 하면 그 사이의 대통령들은 농민의 날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얘기이고 17년 전은 노무현대통령이 취임하는 해 였으니 노무현 대통령도 그 뒤에는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번 농민의 날 행사는 코로나 감염 우려로 청와대에서 농민들과 관계자 2백여 명만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올해는 농업이 매우 어려운 해였다. 코로나19로 인해 다른 중소 상인들과 자영업자들도 큰 고통을 겪었지만 농업은 54일이나 이어지는 장마와 3개나 몰아친 태풍으로 생산량이 줄고 맛과 품질도 떨어지는 2중 3중의 피해를 입었다.
이런 어려운 해의 농민의 날에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농민들을 격려하고 감사를 표시하여 농업의 중요성을 확인한 건 잘한 일이다.
문대통령은 이날 기념사에서
“농업은 생명산업이자 국가기간산업이며, 농촌은 우리 민족공동체의 터전”이라고 하고 “코로나 이후 시대를 맞아 새로운 시대의 농정을 과감하게 펼쳐가겠다”고 하였다.
이날 기념사를 조금 더 살펴보면
– 식량안보를 위해 “2030년까지 밀 자급률을 10%로, 콩은 45%까지 높이겠다.
– 살맛나는 농촌을 위해 도서관과 체육시설을 갖춘 생활 SOC 복합센터를 올해 700개에서 2025년까지 1200여 개로 늘리겠다.
– 푸드플랜 참여 지자체를 현재 예순 일곱 개에서 2022년까지 100개로 늘리겠다.
– 농촌에서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과 귀농인들이 농촌에 혁신과 활력을 불어놓고 있다.
– 우리 정부 출범 전, 20년 전 수준까지 떨어졌던 쌀값이 회복되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이날 기념사는 우리 농업의 현실과 과제를 제대로 반영하고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선 식량안보를 위해 2030년까지 밀 자급율을 10%까지 올린다고 했는데 현재 국산밀 자급율은 1%를 밑돌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밀 생산 농민과 소비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가 고작 이정도인데 아무 준비도 없이, 밀농업에 대한 지원계획이나 예산반영도 없이 10%로 늘린다? 또 콩 자급율 역시 5%를 밑도는데 논 대체작물로 콩 심는 것도 막으면서 무슨 수로 45%로 올릴지 가늠이 안된다.
살맛나는 농촌을 위해 도서관과 체육시설을 갖춘 생활SOC 복합센터가 이미 700개 만들어진 것처럼 얘기했지만 실은 일반농산어촌 개발사업의 누적 실적이고 이런 시설은 경북 고령에 한군데 있다고 하며 그것도 2018년에 완공되었고 그 이후에는 실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2025년까지 1,200개소로 늘린다는 건지 이해가 안된다.
또 젊은이와 귀농인이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지만 2019년 현재 만 30세 미만 청년 농사꾼은 전국에서 다 합쳐봐야 5백명도 안되고 귀농인도 한해 만명도 안되는데 그 나마 대부분 소득작물 중심이고 식량작물은 늙은 노인들에게 맡겨져 있는데 무슨 활력을 불어놓는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지방의 푸드플랜 계획은 특정 컨설팅 업체가 독점을 하고 B지역 푸드플랜을 컨설팅하면서 A지역에 이미 세운 계획을 ctrl+C, ctrl+V 하여 짜깁기하고 있다고 소문이 파다한데 그걸 100개 지역까지 확대하겠다는 건 각 지자체들은 알아서 시행하라는 강요에 다름 아니다. 그 컨설팅 업체 대표를 하던 사람이 지금 청와대 농수산비서관으로 들어가 있다.
쌀값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건 코로나로 인해 집에서 밥먹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쌀소비가 늘어난 탓이지 정부가 한 일은 거의 없는데 숟가락 얹을 일이 아니다. 우리 국민이 1년간 먹는 쌀 소비량이 5백5십만 톤 정도 된다. 올해 장마와 태풍으로 인해 쌀 생산량은 360만톤으로 평년의 절반 가까이 감소하여 쌀 수급을 걱정해야 할 시기에 태평한 자화자찬은 심해도 한참 심했다.
농업계에서는 도대체 이 기념사를 누가 썼냐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문재인 정부에서 농식품부 장관을 5개월동안 공석으로 방치하였고 농업과 농촌은 수치상으로도 곤두박질 치고 있는데 너무나 안이하고 장밋빛 그림만 제시하고 있다.
국민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것과 거짓 수치를 제공하여 환상을 심는 것은 다르다. 대통령이 평소 농업에 관심을 두기 어려울 것이고 올해는 코로나 방역과 남북문제, 미 대선에 촉각이 서 있었으니 농민의 날 기념사의 문구를 세세히 검토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금방 탄로날 거짓말을 대통령에게 하게 한 자는 더 이상 대통령과 국민과 농민들을 우롱하지 말고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농업을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대통령을 만들게 된다.
많은 농민들과 농업계 인사들은 남은 임기 1년 여 라도 대통령과 정부가 우리 농업 회생의 토대라도 만들고 마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사족 : 농민의 날을 정부 행정기관들은 ‘농업인의 날’이라고 한다. 그런데 농민과 농업인은 다른 말이다. 1년에 90일 동안 주말농사를 해도, 120만원의 농산물을 생산, 판매해도, 300평의 농지를 소유하고 조경수 나무를 심어놓아도, 농업회사나 영종조합에서 회계, 포장, 배송을 해도 농업인이다.
그런데 행정기관에서는 땅을 매개로 땀흘려 농사짓는 사람인 농민을 지칭하며 농업인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농민과 농업인은 다른 개념이지만 계속 농민을 농업인이라 쓰고 있다.
이재욱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