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주:

한국에는 ‘백년의 급진’이란 저서로 알려져 있는, 중국의 삼농三農문제 최고 전문가 원톄쥔溫鐵軍 (전)인민대학교 교수가 중국 인터넷 신문 포털 ‘오늘의 헤드라인今日頭條’에서 2월중순부터 매주 1회 세차례에 걸쳐 “팬데믹 영향하의 글로벌라이제션 위기”라는 제목으로 온라인 강연을 행했다. 매 강연은 수백만명의 시민, 청년 대학생, 지식인들이 시청하는 등, 뜨거운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강연자의 동의하에 이를 녹취 번역해 ‘월간 공공정책 5월호’에 게재된 것을 ‘공공정책’지의 허락으로 ‘다른백년’에도 옮겨싣는다. 


“사실 내가 여러분에게 제공하는 것은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생각의 재료일뿐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이데올로기적으로 분석을 하기 시작하면, 매우 쉽사리 당시의 어떤 제도가 나쁘다고만 얘기한다. 그런데 이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너무 간단한 결론이 아닐까? 내가 여러분께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사실 모든 문제에는 본래의 원인이 따로 있고,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그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지금 인터넷 방송에 사용하는 어플리케이션에는 ‘안색’을 조정하는 기능이 있는데, 사용법을 잘 몰라서 그대로 이용했더니, 내가 화장을 했다느니, 어디 아픈거 아니냐는 둥, 별소리를 다 듣는다. 지금 우리가 접하는 SNS와 인터넷 매체 등의 뉴스를 포함한 미디어 환경이 이와 같다. 정보를 접하고,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말기 바란다. 특히 과거 교과서를 통해 형성한 가치관에 지나치게 의존해서도 안된다. 나는 여러분에게 다양한 생각 거리를 제공할 뿐이고 내 이야기엔 당연히 오류도 많을 것이다. 나는 단지 여러분의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사고 능력의 제고를 도우려고 한다.

지난번 강의에서 나의 이런 생각을 나눈 바 있다. 세번째 글로벌라이제이션은 금융자본에 의한 것인데, 그 전개는 항시 글로벌 위기로 귀결할 수 밖에 없다. 지난번 강의 후 겨우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중국에서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후, 전세계 산업자본의 배치, 글로벌 금융자본의 자원흡수 및, 각종 산업자본이 만든 이윤창출 구조가 막대한 영향을 받고 있다.

세번째 글로벌라이제이션의 비용은 누적적이고, 최후에 위기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니, 다들 패닉에 빠지지는 말자. 이번에는 중국이 어떻게 이러한 글로벌라이제이션 구조안으로 들어오게 됐는지, 그리고 지금과 같은 위기를 맞게 됐는지, 외부요인에 의한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 역사적 인과를 설명하기 위해, 1970~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한다.

2차대전 후, 미소 양강의 냉전구도하에서 양 진영이 각자의 지오폴리틱스geopolitics에 따라서, 재공업화를 추진하고, 동서로 나뉘는 세계 공업화 시스템을 만드는 과정을 복기해 보자. 1차대전 종전후 불과 십수년만에 자본주의 국가내에 다시 생산과잉이 발생하고, 2차대전의 원인이 된다. 마찬가지로 1945년 2차대전 종전후 서방은 1947년의 마셜 플랜을 실시하고, 소련은 1950년에 중국에 중공업과 설비제조업을 이전한다. 그리고 재공업화 후 다시 생산과잉과 사회갈등이 발생하는데, 60년대, 프랑스의 68혁명, 일본의 적군파와 도시 게릴라, 미국의 흑표범당, 이태리의 붉은여단이 다 이런 결과이다. 중국은 같은 시기에 마오쩌뚱 사상이 제3세계의 주류이념이 되며, 동시에 문화대혁명에 의한 계급투쟁이 발생한다. 물론 중국에는 아직 생산과잉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60년대 서구의 사회혼란은 2차대전후의 생산과잉과 일정한 연관성이 있고, 동방에서의 혁명도 어느정도는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한다.

공업화가 이루어지면,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1권에 설명한 바와 같이, 노동과 자본의 직접적인 대립과 모순이 발생한다. 노동집약형 산업은 그래서 해외로 이전하게 된다. 1970년대에 미국과 서방의 많은 국가들은 라틴아메리카로, 일본은 아시아의 네마리 용에게 이전하는데, 공통적으로 권위주의 국가, 군사독재 국가가 이를 수용했다. 이유는 자본-노동쟁의를 효율적으로 억누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전한 후에야 서방 국가의 주민들은, 본격적으로 자유와 인권을 누리게 된다.

중국은 그렇다면, 언제부터 서방의 산업을 이전 받게 됐는가? 1971년, 닉슨의 방중 직전, 키신저가 큰 선물을 들고 왔다. 1950년 한국전쟁 후 시작된 중국에 대한 수출금지를 해제했다. 군사, 고급 기술분야는 제외하고, 일반 제품의 수출과 생산기지 투자를 허용해줬다. 한국전쟁후 소련이 중국에 이전한 산업은 무기와 군수물자 생산에만 부합하는 중공업, 장비/설비 제조업에 국한돼있었고, 경공업, 방직, 화학, 전자 등의 생활용품을 만드는 산업은 모두 빠져있었다. 1973년 중국의 리더들은 43억USD 상당의 서구의 설비와 기술을 받아들이는 ‘43방안’을 승인했고, 마침 서방 세계는 노동집약 산업을 해외로 이전해야할 필요가 있었으니, 당시 중국의 개방은 윈-윈이었다.

1863년, 1864년, 청조말, 당시의 관료였던 리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 등은 장쑤성江蘇과 저장성浙江에서 태평천국군과 맞서는 가운데, 서양무기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래서,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 서방의 기술을 이용해서, 오랑캐를 제압하자)라는 기치를 내걸게 됐는데, 70년대에는 ‘인진소화흡수引進消化吸收’라는 말로 이를 바꿔 부르게 된다. 하지만 서방의 기술과 설비를 들이는 것은 공짜가 아니므로 필연적으로 재정적자를 가져왔다. 1973년에 기술과 자본을 도입한 결과 1974년에 100억위안의 적자가 발생했다. 과거 재정의 삼대지출 영역은, 행정부 운용, 사회복지, 인프라 건설이었으며, 앞의 두 영역이 경상비로써, 감소가 불가능한 반면, 유일하게 줄일 수 있는 것은 건설부문투자였다. 그런데 이러한 감소는, 결국 재생산이 역량을 줄이는 결과를 낳게 됐고, 도시에서 고용창출이 어려워져서, 74년에는 세번째의 ‘하방上山下鄉’이 시작된다. 즉, 하방의  본질은, 정치운동이라기 보다는, 수백만의 도시 실업자들과 취업준비생들을 일시적으로 농촌으로 보내 실업과 이에 수반되는 사회불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투자가 감소했기 때문에, 생산규모를 다시 확장할 수 없다. 하지만, 채무는 사라진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서방국가에서 산업이 이전된 개발도상국들이 왜 공통적으로 70년대에 사회운동이 격렬해졌는가이다. 이 국가들은 대개 권위주의적 독재정부이고, 자본과 노동이 대립하는 노동집약형 산업을 받아들였다. 또, 아직 산업화가 시작된 초기 단계에 국가채무와 재정적자가 늘어났기 때문에, 경제문제가 발생하고, 그 와중에, 노동과 인권 문제가 제기되면서, 사회운동 세력이 자국 정부에 대해서 저항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사회혼란은, 일종의 산업자본의 비용이 서방세계에서 전가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와중에 ‘43방안’의 시행을 책임졌던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 후계자들도 개방정책을 지속해야 했다. 그래서 77년에 ‘82방안’이 나와서 82억의 USD를 8년에 걸쳐서 균등하게 도입하는 방안이 제시됐지만, 현장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서, 서두르는 바람에  2년만에 모두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79년에 재정적자가 다시 200억에 달했다. 이렇게 문제가 반복됐고, 서방산업자본의 이전이 촉발한 경제적 사회불안은 중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위 서방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국가 설계와 건설의 기본으로 삼은 국가들은 그래서, 사회 혼란의 와중에 정부와 리더쉽이 바뀌는 변화를 겪게 된다. 하지만, 재정적자와 국가채무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80년대에는 사회운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와중에, 구조적 문제를 깨달은 이들을 중심으로 ‘채무반환거부운동’도 생겨난다.  IMF와 IBRD등의 국제 기구가 이에 대한 대응으로 개발도상국에 제도적 변화를 요구한다. 채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를 모럴해저드와 제도의 불비로 진단하고, 서구의 선진적인 제도를, 자본과 기술에 이어서,  다시 수입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쿠데타나 선거에 의해서 수립된, 새로운 정권이 서구의 제도에 기반한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할 것을 요청했다. 당시, 개발도상국의 지식인들은 이를 받아들여서, 모두 자국 시스템이 문제라고 자책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어떤 국가의 어떤 시스템과 제도가 과연 아무 문제도 없고, 완전무결한가 ? 제도가 모두 옳다는 것도 아니고, 그 제도를 해결하기 위한 답이 틀렸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전체 맥락을 보자면, 그런 제도가 만들어지고, 그게 문제가 돼서 새로운 해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도 역사적 배경과 같은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나는 남들과 다른 이야기를 하냐고? 실은 내가 80년대 중앙정부의 기관에 근무하면서 소위 ‘신양무新洋務’(역자주: 서방의 자본, 기술,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청조말의 양무운동에 빗대어 표현함)에 참여했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세계은행대표단이 중국에 새로운 제도의 도입을 요구할 때, 나는 구체적인 업무를 담당하던 실무자였다. 이런 제도를 배우기 위해, 중국 정부가 나를 미국에 파견해서, 제도의 수립, 감독과 평가방법을 공부했다. 특히, 실제 데이터에 의거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배웠고, 중국에 돌아와서 새로운 제도를 실험할 때, 결과를 평가하고 보고하고, 의견을 제시한 것이 바로 내가 한 역할이다.

80년대 중국의 제도 개혁 이야기 중에 서방이든 중국이든 가장 좋아하는 성공사례가 있다. 그것은 농촌생산의 시장화, 거래자유화, 사유화와 이에 따른 생산성 증가다. 실은, 일정부분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중국정부는 60년대에 내외부를 막론하고 채무를 모두 청산했다고 선포했던 마당에, 70년대부터 부채가 다시 누적되고 74년에는 감당을 할 수 없게 됐다. 78,79년 재정적자가 두배로 늘어났다. 당시 리셴녠李先念총리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니, 재정지출 절반을 줄일 것을 제안했고, 그게 바로 농촌이었다. 농촌은 이미 당시, 세금에 의한 재정 공헌은 적고, 재정 지출은 많은 구조였다. 그 결과로 농촌 대포간大包干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농촌에 재정지출이 가장 높았을 때는, 1966년 문화대혁명 이후이다. 당시 도시의 공업생산은 모두 중단됐고, 그래서 경제의 중심이 농촌으로 옮겨갔다. 그때, 농촌에 지출되는 재정이 거의 20%에 달했다. 대규모 수리水利프로젝트가 그때 진행됐다. 모두 정부가 재정을 댔고, 농민들을 조직해서 노동력으로 삼았다. 마침, 하방된 도시의 청년들도 여기 참가했으니, 한  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희생이 바탕이 된 것이다. 동련삼구冬練三九, 하련삼복夏練三伏 (역자주: 가장 추운시기, 더운시기를 가리지 않고 노동에 참여하는 근면한 태도를 이른다. 동지후 19일부터 27일간, 하지후 삼복에 걸쳐)이라는 말이 있었다. 바로 효과가 있거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성질의 투자가 아니었다. 나중에 재정적자가 심화되고서는 농촌 투자를 없앴다. 그러니까, 대신에 대포간大包干을 실시한 것이다. 즉, 농민들에게 땅을 분배한 것이고, 1950년 신중국 건립 시기의 분배 방식을 다시 적용했다. 이걸 제도 개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중국은 2천년간 역성혁명이 일어나 왕조가 바뀔 때마다, 균전면부均田免賦(고르게 땅을 나누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함)정책을 실시했으니,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이 당시에는 농업세가 남아 있었으므로 면부는 적용되지 않았고, 그래서 농민의 부담에 대한 사회적 토론이 지속됐다.

농촌 경제를 자유화한 후에, 중국 농촌이 어떻게 경제발전을 선도했는가?  나는 항상 농민이 중국을 구원했다고 이야기하고, 특히 신중국 수립후 세차례에 걸쳐 국가에 큰 공헌을 했다고 설명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시기이다. 당시, 토지뿐아니라, 삼림, 갯벌 등 모든 자연자원을 농민들에게 일시에 분배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 미국이나 소련에서는 농민들을 1차산업 종사자로만 여기는 관점이 있는데, 이는 식민지 농업 경영에 기반한 대형 농장 모델에 따른 것이다. 반면 중국의 수천년 역사를 돌아보건데 농촌에서는 다양한 산업이 번성했다 百業興旺. 당시 중국은 중공업이든 경공업이든 모두 부족한 상황이었고, 당시 인구의 85%를 점하던, 농민들이 자율성을 부여받자, 80년대 마을에서 각종 산업을 발전시켰다. 마치, 공무원이 아닌 민간인 교사民辦老師와 의사赤腳醫生가 마을에서 정부의 최소한의 도움과 규제안에서 교육과 의료 서비스에 종사하게 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선, 농민은 본래 식량을 생산하고, 기아에도 늘 대비하기 때문에, 국가는 도시를 제외하고, 식량 자급문제에 대해서도 신경을 쓸 필요가 없게 됐다. 그리고, 향진기업鄉鎮企業이 등장해서 다양한 생필품을 생산하게 됐을 뿐아니라, 80년대를 거치면서, 수년내에 심지어 수출기업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국가는 정책을 제시하고, 격려하기만 하면됐다. 당시, 홍콩과 대만에 가까운 광둥성廣東과 푸졘성福建, 또 한국에 가까운 산둥성山東과 랴오닝성遼寧 등에서 경공업, 전자산업, 방직업에 종사하는 수출기업들이 급성장 하게 된다. 이 당시의 발전 상황을 정리해서, 세계은행에 보고했더니, 중국이 개혁개방과 제도개혁의 최고 모범생이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중국 농촌은 80년대 중국 경제발전의 선도적 역량이 됐다. 물론, 이러한 경제발전이 농촌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발전이 빨랐고, 당시의 지도자들도 농촌개혁이 이 정도의 성과를 가져올 것을 예상치 못했던 탓에, 매우 놀랐다. 당시 농촌개혁을 세가지로 설명했는데, 첫째, 대포간大包干(토지승포제土地承包制), 둘째, 향진기업鄉鎮企業, 셋째가 향진기업의 발전에 의한 읍면화城鎮化 (역자주: 도시화城市化와 대비되는 중국식 개념이지만 현재는 도시화라는 뜻으로 혼용되기도 한다)이다. 삼천여개에 불과하던 읍면이 삼만개로 급증했다. 그런데 이러한 읍면의 확장을 위해서, 인프라 건설이 필요했고, 이를 위한 설비제조업이 또 도시에서 발전할 수 있었다. 읍면화가 도시의 공업화도 촉진한 것이다.

이렇게 중국은 글로벌라이제이션에 합류하게 되는데, 다른 개발도상국들이 채무부담으로 인한 경제문제와 졍권교체 등의 사회불안을 겪는 것과 달리, 서구의 생산자본이 이전하는 과정에서, 비교적 안정된 발전을 지속하게 된다. 앞서 이야기했듯, 60년대에 내외의 채무를 모두 청산했기 때문에, 70년대 채무를 확대하는 것에 큰 부담을 느꼈다. 그래서 재정지출 부담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농촌경제를 자유화한 후에, 모든 선순환이 일어난 것이다. 식량안전문제를 해결했고, 동시에 앞서 언급한 ‘세가지 혁신’을 이룩했다. 결과적으로 경공업, 화학공업, 방직공업 등 상당수의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10년 가량 발전한 후에, 농사를 지으면서 향진기업에서 일하는 농민이 거의 1억명에 이르렀고, 90년대 초반에는 1억2천만명에 이르렀다. 이때, 농민인구를 8억으로 잡는데, 그 중 1억명 가량이 이러한 겸직 농민이었던 것이다. 도시가 아니라 농촌의 마을에서 공업생산에 종사하므로, 교통난과 같은 도시 문제도 야기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밭일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공장으로 향했다. 오후 5시경에 퇴근해서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두시간 정도 더 농사나 집안일을 거들었으니, 농촌의 산업은 1차농업생산뿐 아니라 다양한 업태를 갖게 된 것이다. 농촌공업화 발전이 이와 같이 매우 신속했던 이유는, 집체集體형 공동체 보상구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일하고 싶으면 추첨을 해서 당첨돼야 했는데, 그렇다고해도, 농업생산에 참가하는 것에 비해서 높은 급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노천에서 일하는, 농업생산의 노동강도가 더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많은 보상을 받았다 (역자주: 집체내에서 집체농사참여든, 공장노동이든 무관하게 公分이라는 형태로 급여를 부여했다. 이는 세금이나 준조세와도 연동돼, 각 농가마다 일종의 계좌형태로 관리됐다. 참고 – http://thetomorrow.kr/archives/11701

). 따라서, 공업생산소득의 잉여는 집체에 귀속됐다. 생산요소인 토지와 원재료도 따로 비용이 들지 않고, 노동력도 큰 보상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초자본의 축적과정은, 마르크스가 고대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처럼, 자본의 노동에 대한 수탈이나 착취가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중국 농촌의 공업화는 전체 국가 공업화 증가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됐는데, 이 과정에 대해서 일반적인 경제학자들은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중국은 70년대의 채무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이 다른 개발도상국가와 달랐다.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농민이 자신의 거주지인 농촌에서 반농반공형태의 일자리를 갖게 됐고, 다른 국가처럼 농민이 도시로 진입하면서 전업 공장노동자가 될 때 발생하는 여러가지 비용 부담을 떠안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중국의 개혁개방이 상대적으로 많은 이윤을 남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80년대 당시의 문헌은 이와 같은 성과를 인정했고, 이는 중국의 민중, 그리고  농민의 위대한 승리이자 인민이 창조한 역사로 칭송해 마땅한데, 이상하게도 훗날의 보고서에서는 이와 같은 점들이 충분히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다.

 원래 중국의 공업계획은 모두 도시 중심이었다. 대량의 자금을 분배하고, 원재료등의 물자도 도시에만 분배했다. 그런데 갑자기 공업증가분의 절반 이상이 농촌에서 나타나자, 산업 가치사슬 전반에 걸쳐 왜곡현상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농촌 공업은 자금, 원재료, 시장을 어떻게 분배받을 것인가 ? 이러한 변화가 다시 도시에 큰 충격을 주기 시작했다. 농민이 가공업에 뛰어들자, 원재료가 부족해지고, 농촌의 읍면이 10배로 증가하자, 인프라 건설에 필요한 시멘트 등의 자원도 부족현상이 생긴다. 이게 다시 도시 건설에 영향을 끼쳤다.

자원배분의 우선순위에서 밀린 농민들이 생각해낸 방법은 도시 관료들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이었다. 과일 등을 포함한 귀한 농산품들이 공물처럼 유관부서로 보내졌고, 아직 부패하지 않은 관료사회에선 이런 선물들을 직원들에게 모두 공개적으로 분배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와중에 많은 비판이 제기됐는데, 정당한 비판이다. 결국 소박한 선물들이 나중에는 접대문화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결국 당시 내가 근무하던 중공중앙농촌정책연구실에서는 농민을 대변해서 판단을 했고, 농촌에도 생산 자금을 분배하기 시작한다. 물론 규모가 있는, 지역의 대표기업龍頭企業 위주였다.

하지만 도시 문제가 심화된 원인은 기실 다른 데 있었다. 70년대 후반, 새로운 정책에 따라, 농촌으로 하방됐던 수천만명에 달하는 고학력 청년들이 도시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바로 취업문제가 생겨났다. 우리집안의 네명의 형제자매도 나를 포함해 모두 이 때 도시로 귀환했다. 그런데 78,79년은 바로 심각한 재정적자가 발생한 시기이다. 생산능력을 늘리는 투자를 할 수 없었다. 당시 정부의 정책은 “5명을 위한 밥상을 10명이 나눈다 (일자리 나누기)”였다. 국유기업에 직원 자녀들이 취업을 하고 OJT (On the Job Training) 頂崗에 임했다. 부모의 자리를 자녀들이 이어받고, 50대 한창 일할 나이의 핵심 고급인력들이 퇴직했다. 이때 국유기업의 업무숙련도가 자연스레 하락했고, 업무효율과 생산성도 떨어졌다. 정부 기관은 스핀오프spin-off 辦三產를 시행해서, 너도 나도 창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10억 중국인민중 9억이 사업을 하고, 1억이 창업대기중이란 말이 있었다. 문제는, 실제 수요가 있는 곳에 필요한, 혹은 혁신을 통한 창업이 아니라, 기존의 가치 사슬에 불필요한 과정이 늘어난 것이다. 기업 하나면 될 일에, 열개 기업이 붙었다. 보통 시민들도 모두 사업에 나섰는데, 결과적으로 비용부담이 너무 커지고, 생산자 물가지수 PPI (Producer Price Index)가 치솟았다. 회사에는 일거리보다 사람이 더 많았고人浮於事,가격이 앙등하여,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앞서 농촌이 중국을 구했다고 말했는데, 지나친 급성장이, 이를 좇아 변화할 수 없던 도시 경제 시스템에 마비를 가져왔고, 일련의 커다란 문제들이 발생했다. 그때, 나는 세계은행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서방 세계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4대개혁 – 사유화, 시장화, 자유화, 세계화 등에 의한 중국 급성장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곧이 곧대로 믿었다. 문제는 이런 서방 주류의 이념적 경제학 이론과 겉으로는 서방의 제도를 도입해서 ‘만들어진’ 중국 실천사례의 ‘밝은 면’만이 중국에 역수입돼 소개되고, 중국의 주류학자들에게 교조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그들의 이론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중국 경험의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으면서, 80년대부터 ‘자유시장과 경제개방’만이, 발전의 금과옥조로 여겨지게 됐다. 그러면 80년대 후반의 이야기를 시작해야하겠다. 이런 큰 변화가 일어나는 와중에, 소련은 무너졌는데, 중국은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가 ? 중국은 왜 다른 개발도상국과 같은 극심한 사회 혼란을 피할 수 있었는가?

나는 이미 답을 이야기했다. 중국은 다른 개발도상국과 같은 외자중심이 아니라 농촌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시초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기때문이다. 소련과 동유럽은 문자그대로 서방의 이론을  교과서적으로 따랐다. 대부분의 국유기업들을 사유화했다. 우리도 그렇게 했으면 붕괴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나는 소련과 동구 체제가 무너질 때, 현장에 가서 필드 조사를 수행했다. 1991년 12월, 이런 변화가 시작하던 바로 그 때, 소련과 동유럽 7개 국가를 방문했다. 그래서 진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중국은 그들과 달랐다.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난제를 해결하면서 전진했다. 그 결과, 체제를 온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이 정말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그들과 대비해서 말할 수 있다. 당시에 우리는 세계은행이 원하는 이야기를 만들어줬다. 나는 5년간 이 일에 종사했다. 그들은 연구비를 지원했고, 우리는 그들의 입맞에 맞는 결론을 제공했다.  당시에 나는 양방향 통역을 자처했는데, 서방의 세계적 경제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와서 ‘뜬구름잡는 이야기’를 늘어 놓으면, 각 지역의 실험구 간부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해석을 해줬고, 반대로 지방의 간부들 이야기를 다시 세계은행 전문가들이 알아듣도록 설명했다. 내가 훗날 대학에 가서 연구를 하게 됐을 때, 결과적으로 비주류가 됐다. 하지만, 실은 외국의 유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중국으로 돌아온 주류학자들의 이론과 주장은 실은 우리가 세계은행과 함께 만들어 낸 원본 이야기를 역수입해서 파는 중고품과 다를 바 없다. 어찌 됐든 우리가 만들어 낸 당시 이야기는 모두 실제 데이터에 근거한 것이었다. 서방의 주류 이론에 의해, 서구 제도를 이식해서 중국이 성공했다는 ‘큰 흐름의 스토리라인’을 우리는 실제 데이터의 의거해 실증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나는 마침 소련해체 당시에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연구중이었다. 그래서 중국의 실제 이야기를 그들에게 전했는데,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철의 장막’이 무너졌으니, 다음은 ‘죽의 장막’ 차례일 거라며 무시했다. 그래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40일간 자비를 들여 소련과 동유럽 7개국을 방문한 것이다. 당시 나의 이런 단독 필드연구는 정부의 규정위반이어서, 상사에게 질책을 받았다. 나는 대신 연구보고서로 답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현대화의 구조적 해석 解構现代化’이라는 나의 강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의 해석은 그래서, 주류 학자들과 다르다. 그리고,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서구 주류 이론 교과서대로 실천하다가 체제가 무너진 것과 달리, 중국은 중국의 상황에 맞는 나름의 시장경제中國特色市場化를 만들어오며 체제를 온존해온 사실을 데이터와 역사적 사실에 의거해 증언할 수 있다. 다만, 이 경험을 온전히 정리하고 모두가 인정하는 형태로 결론짓지못했을 뿐. 중국이 88년에 만든 방안은 소련의 것보다 못하지 않았다. 당시 덩샤오핑이 생존해 있었고, 천윈陳雲은 리스크가 너무 크니, 일부만 시행할 것을 건의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가격의 시장자유화. 원재료 가격이 너무 높았고, 88,89년 연속해서 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88년의 물가지수가 18.6에 다다른다. 89년에 생산이 중지되는데, 삼각채무 (갑, 을, 병의 기업이 순환채무구조를 갖게된 상황)에 빠진 많은 기업들이 자금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속에 설상가상으로 89년 6월부터 미국이 중국에 경제제재를 시작했다. 50년 한국전쟁 이후 두번째 경제제재였다. 중국이 막 공업화에 기세를 올리던 차에 서방자본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이 시작되면서 90년에 심각한 경기침체가 시작됐다.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서, 92년을 전후해서 국내 자본시장을 열었다. 증권, 선물, 부동산 시장이 생겨났다. 화폐를 발행했을 때, 흡수할 수 있는 시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재정과 금융을 양손에 쥐고 있는 상태에서, 화폐와 국채를 발행했으므로, 자주 금융이라고 할만했다. 바로 이것이 핵심주권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다. 외자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는 핵심수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93년 대량으로 화폐를 발행했을 때, 아직 중국인들이 증권시장에 익숙치 않은 상태에서, 시장이 충분히 이 화폐를 흡수하지 못했고, 대규모 유동성이 공급되면서, 94년에 다시 물가지수가 앙등했다. 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채무가 늘어났다. 79~80년에 한번, 88~89년에 이어서 세번째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수많은 어려움을 “투쟁적으로 극복하며 여기까지 왔다”는 중국 정부지도자의 말들은, 그러니까, 비유적인 표현이나 클리쉐이가 아니라, 실제 역사에 대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마침 서방 자본이 철수한 자리에, 92~93년 말레이시아, 싱가폴, 한국 등이 외교 관계를 맺으며 들어와 틈새를 매워주었다. 싱가폴이 장쑤성江蘇 쑤저우蘇州에 싱가폴 공업단지를 설립했고, 일반제조업 산업자본이 이들 국가에서 이전되기 시작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버지 부시는, 중미간에 외교 관계가 수립됐을 때, 주중연락처주임이었고, 초대 중국대사를 역임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이해가 제법있었다. 그는 중국을 완전히 봉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고,  93 ~ 94년에 미국도 제재를 해제함으로써, 하이테크, 군사기술을 제외한 일반 제조업이 다시 활성화됐다. 이렇게 한쪽으로는 자주적 금융,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로부터의 산업자본 이전에 의해서 중국은 또 한번 위기를 극복한다. 94년 홍콩, 대만의 핵심산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제조업이 중국 대륙의 연해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이때부터 수출산업이 급격히 발전했다. 그러나, 역으로, 향진기업들의 상당수인 2700만개가 문을 닫고 , 이때부터 농민들이 자신의 고향을 떠나, 연해지역으로 이동하여 농민공이 됐으며, 이후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중국 사회의 커다란 숙제로 남게 됐다.

여기서 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한 원인을 짚어보자. 타격을 입은 국가들은 한참 산업성장기의 기존 투자가 문제가 됐고, 채무를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실상, 그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미국이 일극 체제를 구축하면서, 92~94년에 걸쳐서 군사기술이 상용기술로 전환되어, 컴퓨터나 IT 기술을 이용한 기업들이 크게 성장하고, 국제자본이 미국 시장으로 재흡수됐다. 결과적으로 동아시아의 일반제조업은 자본부족에 노출되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 금융위기는 당연히 중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1997년 11월, 정부에서 전국금융회의를 열어서, 은행 재무상태를 살펴봤다. 중국의 4대은행 모두 불량자산 점유율이 30%이상이었다. 따지고 보면, 금융위기를 맞은 동아시아의 여타국가들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유는 90년대 불경기에 정부 요구로 수십만개의 국유기업들을 지원해야 했기 때문이다. 작은 기업은 포기하고 큰 기업들만이라도 살려야했다 抓大放小. 당시 4천만명에 달하는 실업자가 생겼는데, 정리해고가 아니라 복귀 및 재취업 대기상태待業라는 중국식 명칭을 사용했기 때문에, ‘등록실업자’로 정식 통계에 잡히지 않을뿐이었다. 이들에게 상당기간 일정한 생활구제금을 주기 위한, 기업대출을 지원했고, 모두 불량채권이 됐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은행만을 비판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 금융 위기가 발생했다. 그래서 재정을 동원했다. 국가재정으로 관리하는 외환을 은행에 투입해서 은행 재무제표를 정리하고, 모두 민간상업은행으로 전환시켰다. 21세기에 중국 금융자본이 글로벌 자본으로 진화할 수 있었던 계기이다. 명목상 상업은행이고, 중국과 해외증권시장에 상장돼 있으나, 80%이상의 자본금은 중국 국가의 소유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여전히 국유은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재정과 국가금융을 양손에 쥐고 컨트롤하고 있으니, 중국은 21세기 경제 전쟁에서도 주권을 잃지 않고 순항해 나갈 수 있다.

80~90년대 중국 경제의 큰 변화 과정을 설명해 준 것은,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심각한 글로벌 위기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국가가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재료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중요한 것은, 교과서나 남들이 얘기하는 것만을 믿지말고, 스스로 직접 가서 보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