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제작소의 기부자(후원회원)는 직업과 나이에 상관없이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배움과 성장에 대한 욕구가 강한 편입니다. (중략) 이분들은 삶에 대한 의미와 방향성을 깊이 고민하며 개인의 삶을 넘어 사회에 대한 대안을 찾고 그 변화에 기여하려 노력합니다.” - 2018년 1월 16일 박다겸 연구원이 쓴 ‘시민사회단체 펀드레이저의 고민과 희망 ①’ 중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당시 저는 홈페이지를 관리하며 뉴스레터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후원회원을 만나볼 기회가 많지 않았지요. 내용을 보고 놀라운 감정과 동시에 ‘정말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이음센터로 발령받아 여러 후원회원님을 만나게 되면서 박다겸 연구원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모든 것은 직접 경험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듯합니다.
이번에 만난 이판도 후원회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열혈 시민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실제 만나본 이 후원회원은 그보다 더 에너지가 넘치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엉뚱한 몽상가였던 어린 시절
“창의적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에 나오니까 저와 의논도 없이 길이며 지하철이며 빌딩이며 다 만들어 놨더라고요. 좀 화가 났죠. 사회를 잘 몰랐던 유년기의 불만이었습니다.”
이판도 후원회원의 부모님은 프랑스 문화가 유행하던 시기의 일본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해방 전 겨울에 한국으로 나왔는데, 어머니는 밤마다 책을 읽어주셨고 아버지는 한국에서 최초로 오르간을 만들 정도로 뛰어난 음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자녀들의 자유로운 사고나 예술성을 지지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특히 절대적인 존재셨어요. 지역 사회에 좋은 일도 많이 하셨거든요. 제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60명의 악대부를 만들어주시고, 아버지 공장에서 일하는 10대 아이들이 야학에 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거든요.”
하지만 아버지는 한창의 나이 마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이 후원회원은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책을 읽으며 삶에 대해 깊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에 가서 보니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가가 되는 길에 서 있더라고요. 산봉우리 같은 음악가가 많은데 왜 이 길에 서 있나 싶어 분통이 터졌어요. 한편 대학에는 지성인이 많을 거로 생각했는데, 막상 가보니 그렇지 않더라고요. 무지와 의문의 미궁을 빠져나올 기회도 없이 대학 2년이 다 가고 말았습니다.”
프랑스에서 배운 사회의식
“고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다 결혼했어요. 결혼 후 아이 셋을 낳았는데 피로가 밀려오더라고요. 안 되겠다 싶어서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즈음에 공부에 근력이 붙었는데, 넷째가 생겼어요.”
몸이 많이 약해지고 피로는 더 몰려왔습니다. 삶에 대한 회의가 들었습니다. 직장 생활, 결혼, 출산, 시집살이까지 다 해보고 나니 삶의 내용이 참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상이 깨지는 시기인데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무작정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사회의식’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유학생인데도 주택 임대료 반값은 물론, 의료보험, 학비, 양육비 등을 지원해주더라고요. 국가가 국민을 키운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원하는 길을 갈 수 있게 해준달까요.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아들은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서 악기를 빌려서 사용했어요.”
IMF 때문에 기러기 엄마 신분으로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오자마자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음악학원 개원을 위해 입주한 건물에서는 비가 샜습니다. 집주인에게 방수 처리를 해 달라 요청했지만, ‘나도 피해자이니 싫으면 나가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어디에 도움을 요청하면 될지 몰라서 생각나는 대로 참여연대에 연락했어요. 안진걸 씨(현 민생경제연구소 소장)가 집주인에게 전화했는데, 노발대발하는 반응이 돌아왔대요. ‘우리 자식들이 이런 사회에서 살게 할 수는 없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맑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참여연대 후원회원으로 가입했어요. 그리고 등산모임에서 다양한 분들을 만나 좋은 영향을 받았어요.”
이웃과 함께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다
20년 전, 화성 봉담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는 마을에 갈 만한 곳이 우체국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사한 지 9년쯤 지나니 도서관이 생겼고, 이후 4년이 더 지난 후에는 도서관에서 인문학과 미술사 강좌 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인문학 강좌가 신청 미달로 폐강된다고 연락이 왔어요. 지인을 동원해서 우여곡절 끝에 개강이 됐죠. 도서관에서는 저보고 출석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강의 후에 수강생들과 식사를 하면서 친분을 쌓았습니다. 이후 의기투합해서 독서회를 만들었는데, 멤버 구성에 조금씩 변화는 있지만 만 4년째 운영되고 있어요.”
봉담에는 주민자치위원회의 공모사업으로 만들어진 ‘마을계획단’이 있습니다. 주민이 직접 마을계획을 만들어 영역별로 프로젝트를 실행해보는 것인데요. 이판도 후원회원은 마을과 마을을 잇던 옛길 복원에 관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마을과 가장 가까운 곳에 ‘나무꾼의 길’이라는 코스를 만들었습니다. 2019년 여름에는 개통식을 하고, 가을에는 그림지도를 만들어 홍보 중입니다.
“마을계획단을 시작할 때 살짝 어려웠어요. 서로 잘 모르는 사이니까 관계를 만드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죠. 맡은 역할에 책임을 져야 하지만, 또 각자 사정이라는 게 있잖아요. 강요는 금물이라고 생각해요. 대신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면 되죠. 다만 저는 제 능력이 아닌 눈높이에 맞추려다 사서 고생을 한 것 같아요. (웃음) 그래도 주민들과 함께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경험을 하다 보니 삶의 재미를 느끼게 됐어요”
희망제작소가 시민의식 함양의 구심점 역할을 하길
이판도 후원회원은 ‘희망제작소가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오늘 이렇게 만난 것처럼, 더욱더 많은 후원회원과 시민을 만나길 바란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희망제작소의 활동을 소개하고, 다양한 방면으로 지원하여 ‘시민이 참가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에서 더 나아가 사회적 가치 실현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해주길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참여연대에서 처음 만난 이옥숙 선생님(희망제작소 후원회원)과 인연이 깊네요. 선생님 소개로 강산애와 희망제작소를 알게 되었거든요. 강산애 멤버분들은 참 대단하세요. 나이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서로를 편하게 대하시는 것은 물론, 배움을 나누려고 하시거든요. 배려가 일상화된 분들이죠. 아무도 가르치려 하지 않지만 많이 배울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판도 후원회원은 이야기하는 내내 소탈했고 때론 소녀 같은 모습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들은 절대 가볍지 않았으며, 울림을 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앞선 멘트를 빌리자면, 이 후원회원은 마치 ‘가르치려 하지 않지만 많은 배움을 주는 사람’ 같았습니다.
인터뷰가 진행된 공간은 봉담의 아담한 카페였는데요. 이판도 후원회원은 카페를 지역 거점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실제 이곳에서 많은 지역주민이 만난다고 합니다. 카페 사장님은 손님들이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하고 계셨습니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저희에게 필요한 것은 없는지 계속 물으셨고, 간식도 여러 차례 챙겨주셨습니다. 도심의 카페에서 느낄 수 없는 온기가 전해졌습니다. 이판도 후원회원은 이런 공간이 지역에 많이 생겨야 공동체가 활성화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후원회원의 꿈을 물었습니다. ‘나를 찾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경쟁에 매몰돼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세상이 만들어 놓은 환영을 계속해서 좇게 되고, 자신이 누구인지 돌아볼 기회가 적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의 최대 관심은 ‘자신을 아는 것’이에요. 정말 흥미로운 일 아닌가요?”
인터뷰 진행・글 : 최은영 | 이음센터 연구원 | [email protected]
사진 : 이규리 | 이음센터 연구원 |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