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와 기본소득“들”을 위해1)

윤홍식 인하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들어가며

시민이라면 누구나에게 무조건적으로 현금을 정기적으로 지급하겠다는 ‘기본소득’은 현실감 없는 몽상가들의 주장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그런 기본소득이 한국사회가 직면한 돌봄, 실업, 질병, 노령 등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는 ‘현실적’ 대안 중 하나로 검토되는 시대가 되고 있다. 성장을 해도 일자리가 생기지 않고, 그나마 있는 일자리의 질도 점점 더 나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40만 명을 넘었던 신규 취업자가 2016년 23만 명으로 반토막이 났고, 2018년 7월에는 5천 명으로 급감했다. 더욱이 열심히 일해도 빈곤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사람들과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 시대의 노동의 성격이 변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기본소득이 전통적 복지국가의 대안 중 하나로 검토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복지국가가 산업자본주의라는 생산체제에 기초해 만들어지고 발전했듯이 기본소득 또한 어떤 생산체제와 상호보완적 관계 속에서 진화하는 것인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현재 자본이 산업자본주의 시대처럼 노동을 포섭해 생산을 조직화할 필요가 없다면 그 생산체제가 무엇인지 이야기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그 새로운 생산체제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기본소득이 그들이 직면한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는 최적의 대안인지, 그들이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복지체제를 지지할 조직화된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지도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실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상이 하루아침에 변화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상품처럼 거래되는 플랫폼 노동이 증가하고 있지만, 당분간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전통적 고용관계에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사회보험과 보편적 수당과 같은 복지국가의 유산과 기본소득과같은 새로운 형태가 공존할 것이다. 물론 기본소득이 가장 적합한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역사적으로 사회보장 제도는 특정한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핵심적인 상품을 생산하는 생산자가 직면한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왔기 때문이다.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복지국가는 끊임없이 변화했다. 성별분업 해체에 대응해 돌봄을 사회화했고, 사무직 노동자가 증가하자 소득비례 소득보장체제를 도입했던 것처럼 복지국가는 늘 변화했다. 이런 역사를 생각하지 않고, 기본소득을 하나의 정형화된 어떤 것으로 상정하는 것은 현실의 역동성을 보지 못한 순진한 생각이다.

 

세상은 그렇게 변하지 않았다. 기본소득이 복지국가를 일거에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기본소득이 복지국가를 대체해가는 과정은 길고 예측할 수 없는 과정일 것이다. 우리가 세계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는 ‘기본소득’ 실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다양한 실험들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제도, 정책, 관례 등은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낯선 것들이었고, 수많은 실패를 거듭했던 결과였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당연한 것은 없었고, 처음부터 성공한 것도 없었다. 또한 처음에 의도했던 그 모습 그대로 만들어진 제도와 정책도 없었다. 왜 그것들은 되고

기본소득은 불가능한가? 기본소득도 사회보험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 역사적 과정에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기다리는 대안으로서 기본소득은 ‘그 기본소득’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기본소득들’일 것이다.

 

아마도 기본소득들이 복지국가의 새로운 대안이 된다면 기본소득들이 잘 설계된 좋은 제도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본소득들을 지지하는 광범위한 정치적 세력이 있고 그들 사이에 튼튼한 연대가 이루어지며, 기본소득들이 그 시대의 생산체제를 가장

잘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해 본 글에서는 기본소득과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쟁점을 정리했다. 기본소득의 기본적 성격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주로 복지국가의 대안이라는 관점에서 본 기

본소득의 쟁점에 대해 정리했다.

 

복지국가의 대안으로서 기본소득을 둘러싼 쟁점

좌파진영에서 기본소득

좌파, 우파, 기능적 접근이라는 세 측면에서 기본소득과 복지국가의 관계를 검토해보자. 먼저 좌파진영의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기본소득을 체제이행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경우이다. 판 빠레이스(van Parijs)와 반 더 빈(van der Veen)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기본소득을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사회 정책으로 이해하고 있다(van der Veen and van Parijs, 1986). 주목할 점은 이들은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사회주의 단계를 반드시 거칠 필요는 없으며, 기본소득의 실현을 통해 자본주의가 곧바로 공산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논쟁적인 주장이다.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반드시 사회ㆍ경제조직의 사회주의화 단계를 거쳐야하기 때문이다(Fitzpatrick, 1999: 133).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에릭 라이트(Erik O. Wright)와 조셉 카렌 (Joseph H. Carens)에 의해 즉시 반박되었다(Wright, 1987: 666; Carens, 1987: 679). 비판 이후 판 파레이스는 ‘공산주의’ 대신 ‘기본소득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Fitzpatrick, 1999: 133). 독일과 오스트리아 좌파당 내 분파도 최저임금 제도와 결합한 기본소득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연대경제라는 사회주의 경제를 실현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이끄는 트로이의 목마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곽노완, 2008: 165).

 

국내에서는 곽노완(2007, 2008)이 기본소득을 사회주의와 코뮌주의(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대안 정책으로 이해하고 있다. 사민주의 진영에서는 기본소득에 대한 상반된 입장이 존재한다. 우호적인 입장은 기본소득이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구(舊)사회주의 국가들의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보다 현재 사회를 우월한 체제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본소득은 누구도 저임금으로 착취 받으면서 일할 필요도 없고, 강제로 가내노동을 수행할 필요가 없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다(Jordan, 1987, Fitzpatrick, 1999: 131, 재인용; Jordan, 2008: 6). 더욱이 기본소득은 저임금 일자리에 대한 노동공급을 감소시킴으

로써 저임금 일자리를 양질의 일자리로 변화시켜, 노동자들의 힘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Wright, 2005; Fitzpatrick, 1999: 132). 사민주의 진영의 논리는 기본소득이 자본과 노동 간의 권력관계에서 노동의 힘을 강화함으로써 현재 자본주의를 노동계급에 유리한 방향으로 개혁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19세기 수정주의의 출현 이래 자본주의 내에서 사회주의적 개혁을 실현하려는 사민주의자들의 일관된 입장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입장은 사민당의 주류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민당 주류는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것보다 기존 복지국가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한다. 독일 사민당은 사민주의 복지국가를 보완하는 개혁을 지지하며, 기본소득은 노동시장에서 저임금 일자리를 확산시키는 일종의 콤비임금이라고 비판한다(최승호, 2013: 115-6; 이명헌, 2014: 27). 북유럽 사민당도 사민주의 복지체제를 대신하는 기본소득에 부정적이다. 스웨덴과 덴마크 사민당은 기본소득에 대해 전혀 흥미를 갖고 있지 않다(Andersson, 2000: 226-7; Christensen and Loftager, 2000: 263). 2017년부터 중도우파 정부에서 의해 시범사업이 시행되는 핀란드도 상황은 유사하다. 핀란드 사민당은 한 번도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적이 없다(Andersson, 2000: 231-233). 핀란드 사민당은 기본소득이 너무 비용이 많이 들고, 핀란드 사회를 일하는 사람과 기본소득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으로 분열시킬 것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노동조합도 기본소득에 반대한다. 노동조합은 여전히 복지국가가 완전고용을 실현해야 한다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

 

북유럽 사민당이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구축한 사민주의 복지국가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자리하고 있다. 더욱이 북유럽 복지국가가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의 연대에 기초해 구축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민당이 노동과 무관한 기본소득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기본소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스스로 해체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에도 사민당이 기본소득에 반대할 것이라고 속단하기는 어렵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사민당은 경제체제와 계급구조가 기본소득에 유리한 구조로 변화했다(한다)고 판단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기본소득을 지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사민당의 기본소득 지지 여부는 현재와 미래 자본주의 체제의 성격 변화에 달려있다.

 

우파진영에서 기본소득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우파진영은 기본소득이 복지국가를 대신해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는 분배체계라고 믿는다. 이들의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이유는 크게 4가지이다. 첫째, 기본소득은 시장 임금을 가장 낮은 수준까지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Fitzpatrick, 1999: 84). 기본소득이 로트(Roth)의 비판과 같이 일종의 콤비임금(Kombilohn)으로 기능함으로써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을 수용할 수 있게 되고, 자본의 이윤은 그만큼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Blaschke, 2009: 304). 좌파진영에서 기본소득을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높이는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상반된 해석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본소득의 성격이다. 만약 기본소득이 고용과 무관하게 충분한 수준으로 지급된다면 기본소득은 노동자의 협상력을 높이겠지만, 기본소득이 생활비용 일부를 보조하는 수준이라면, 기본소득은 콤비임금이 될 가능성이 높다.

 

둘째, 기본소득이 미국식 노동시장 유연화를 실현하는 전략적 도구로 기능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Fitzpatrick, 1999: 85). 기본소득이 미국식 노동시장 유연화와 유럽식 사회보호 제도를 결합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도덕적 차원에서 기본소득이 가족구조의 형태에 중립적이기 때문이다(Fitzpatrick, 1999: 86). 복지국가에 대한 우파의 오래된 비판 중 하나가 바로 복지국가의 관대한 지원이 가족해체를 조장한다는 것이었다(Murray, 1984). 그런데 기본소득은 개인에게 지급되기 때문에 복지급여를 더 받기 위해 굳이 이혼, 별거 등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논거는 기본소득이 복지국가의 복잡한 급여구조를 단순화시킴으로써 국가개입과 복지행정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파진영에서 구상하고 있는 기본소득 모형의 대부분이 이러한 주장을 반영하고 있다. 독일 기업가 베르너(Werner)는 연금, 실업급여, 주택수당 등을 기본소득으로 통합해 행정비용을 줄여 기본소득을 지급하자고 주장한다(곽노완, 2007: 200-1).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학자인 찰스 머레이(Charles Murray)도 연방정부가 매년 2조 달러가 넘는 돈을 빈곤감소, 보건의료, 연금 등에 지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합하면 연간 13,000달러의 기본소득을 모든 시민에게 지급하면서도 복지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Murray, 2016: 1, 11). 2014년 기준으로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연간 2,120억 달러의 복지비용을 줄일 수 있고, 2020년이 되면 그 규모가 9,310억 달러에 이른다는 것이다. 머레이와 베르너의 차이는 머레이는 의료서비스와 같은 현물급여도 기본소득으로 통합하자고 주장하는데 반해 베르너의 기본소득 구상에는 이러한 생각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머레이의 구상은 현행 복지급여를 모두 기본소득으로 대체하자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우파정치인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이 복지 담당 공무원과 공공사업을 줄여 “국민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는 총선공약을 발표했다(경향신문, 2012). 하시모토 구상의 특징은 기존의 현금급여를 대체하는 방식이 아닌 복지 행정비용과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일자리 비용을 줄여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것이다. 우파진영에게 기본소득은 완전고용을 대신해 노동시장 유연화와 국가기능을 축소하는 핵심 도구이다. 우파진영은 기본소득을 도입해 전후 케인스주의 자본주의에 조응하는 분배체계로서 복지국가의 유산을 완전히 해체하고,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에 조응하는 새로운 분배체계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여러 차례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체제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우파진영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보완 정책으로서 기본소득

세 번째 관점은 기본소득을 복지국가의 탈상품화 정책의 하나로 제도화하려는 시도이다. 국내에서는 주로 사회복지학계에서 주장하는 것으로 기본소득을 불평등과 빈곤을 완화하는 새로운 탈상품화 정책의 하나로 접근하고 있다(김교성, 2009; 백승호, 2010; 서정희ㆍ조광자, 2014).2) 핵심논거는 완전고용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 상황에서 완전고용을 전제한 전통적 탈상품화 방식의 사회보장 정책으로는 불평등과 빈곤을 완화할 수 없으므로, 고용과 무관한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소득보장방식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기본소득을 제도화했을 경우 빈곤율이 감소한다는 결과를 제시하거나(김교성, 2009), 여러 가지 기본소득 모델 중 어떤 모델이 불평등 감소에 더 효과적인지 등을 분석했다(백승호, 2010).

 

국내의 기능주의적 논의는 서구 복지집산주의자들의 입장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서구 복지집산주의자들이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이유는 기본소득이 사회보험 또는 공공부조와 달리 사각지대 없이 모든 사람을 탈상품화 제도의 대상으로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Fitzpatrick, 1999: 112). 다만 국내 기능주의적 논의가 서구 집산주의자와 같이 기본소득을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의 핵심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Fitzpatrick, 1999: 112-3). 오히려 국내의 기능주의적 접근은 기본소득을 후기산업사회의 새로운 고용형태에 적응하는 새로운 탈상품화 전략으로 이해하는 오페(Offe, 2009)와 같은 사회(민주)주의자의 접근방식과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대안적 분배체계로서 기본소득 논의의 한계

기본소득에 대한 지지와 반대는 매우 다양한 관점에서 제기되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특정 이념을 대변하는 분배체계의 기획이라고 할 수는 없다. 기본소득은 누가 어떤 정치ㆍ경제적 맥락에서 어떤 수준으로 제기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정치경제적

의미가 있게 된다. 한국에서 일부 논자의 주장과 달리 기본소득에 대한 지지가 진보를, 반대가 보수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더욱이 기본소득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선별주의자’라고 단정하는 것은 더더욱 부적절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지자이건 반대하는 사람이건 현재 복지국가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고 있으며, 복지국가를 대신할 유력한 대안 중 하나로 기본소득이 논의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누구도 기본소득을 지지 또는 반대하는 이유로 복지국가 위기의 근원에 대해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전후 구축된 복지국가가 전후 자본주의의 정치경제에 기초해 형성된 역사적 복지국가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복지국가의 위기는 곧 전후 자본주의 체제의 정치경제적 위기로 설명되어야 하고, 이에 대한 대안 또한 변화된 자본주의 체제의 정치경제적 성격에 조응하는 새로운 분배체계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이 복지국가의 위기에 대한 실제적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 먼저 우리가 기본소득을 대안적 분배체계로 주장하기 위해서는 현재 자본주의 체제와 분배체계로서 기본소득이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전후 복지국가는 시민들의 가처분소득을 확대해 자본의 생산물이 소비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전후 공적 사회서비스지출 증가율은 생산성 증가율보다 50% 이상, 현금급여의 증가율은 생산성 증가율보다 무려 두 배 이상 높았다(Amstrong et. al., 1993: 192-9). 정부지출의 증가가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를 지속시킨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고, 이렇게 지속된 황금시대는 전후 복지국가의 황금시대를 지속시켰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본소득이 현재 자본주의 생산체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답해야 한다.

 

앙드레 고르는 “기계가 일하기 때문에 인간이 더 이상 일하지 않을 시대가 왔다”는 마르크스의 글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생산의 문제에 의존하지 않고, 분배의 문제만 의식하면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했다(Gorz, 2011: 228). 하지만 생산이 지속되지 않는 사회는 지속될 수 없고, 역사상 생산과 무관한 분배체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자본의 확대 재생산은 자본주의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핵심 기제이기 때문에 생산의 감소와 중단이 자본의 확대 재생산의 중단을 의미한다면 이는 곧 자본주의의 몰락을 의미한다. 사실이 이와 같다면 기본소득은 지금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가 생산과 관계없는 ‘기본소득’이라는 분배체계를 구축하고도 생산과 소비를 어떻게 지속할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이에 대한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기본소득의 정당성은 어쩌면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으로부터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화에 대한 좌파의 대안 담론으로 제기된 인지자본주의가 그 대답의 실마리를 내재하고 있다. 인지자본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생산물을 물질에서 찾지 않고 ‘인지’ 또는 ‘정보’라는 생산물에서 찾고 있으며, 생산관계 또한 임금노동자와 자본이라는 특정한 계급간의 생산관계가 아닌 자본과 집단지성에 의한 생산에서 찾고 있다(조정환, 2011; Hardt and Negri, 2001; 이명헌, 2014: 61). 생산이 더는 개인의 임금노동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집단지성이라는 형태로 사회전체가 참여하기 때문에 개인 노동과 연계된 분배체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일정한 소득을 무조건 보장하는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분배체계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자본은 이윤확보를 위해 더는 노동계급을 포섭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요강』에서 부의 창조가 노동시간이 아닌 기술진보 때문에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사회의 필요노동시간은 최소한으로 단축되고, 개인은 자유롭게 예술, 과학, 교양활동을 할 수 있다

고 했다(Marx, 2000[1857/8]: 380-1). 「고타강령초안비판」에서도 마르크스는 다시 노동이 부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라는 점을 언급했다(Marx, 1995[1891]: 370). 직접적인 노동이 더는 부의 원칙이 되지 않는 사회의 도래를 예견한 것이다.

 

실제로 다음, 네이버, 구글 등이 창출하는 부는 “직접적인 형태의 노동”이 아닌 전 세계에서 이들을 이용하는 셀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생산과 분배의 연계가 불가능한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만약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적인 부의 창출 형태라면, 노동과 연계된 복지체제의 해체는 필연적이고, 노동과 무관한 기본소득과 같은 분배체계의 도래는 (그 실현 여부는 권력관계에 의해 결정되겠지만)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기본소득의 지지자는 단지 현대 자본주의의 높은 생산력의 발달수준을 반복해서 이야기할 뿐이다. 현재의 기술수준으로 많은 사람이 일하지 않고도 충분히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노동과 무관한 분배체계의 구축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단지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의 현상적인 모습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생태주의 관점에서는 덜 생산하고, 덜 소비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고, 기본소득은 이러한 수준에서 제도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러한 체제를 대다수 시민이 받아들인다면 이런 분배체계가 실현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현실정치는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서구에서 녹색당으로 대표되는 생태주의자가 주목할 만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 정치에서 당분간 이들이 우리 시대를 주도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는 기본소득의 정치적 주체가 누구인지 답해야 한다. 현재 복지국가가 위기에 처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역사적 복지국가를 지지하고 지켜나갈 정치세력으로서 사민당과 조직노동이 힘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복지국가를

대신하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형성될 필요가 있다. 복지국가가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의 연대를 통해 구축된 분배체계인 것처럼 기본소득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새로운 분배체계 또한 어떤 권력자원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속될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현재 기본소득을 둘러싼 권력관계를 간단하게 살펴보면 복지국가를 만들었던 핵심 정치세력인 사민당은 기본소득에 반대하고, 1968년 이후 새로운 좌파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녹색당, 일부 좌파정당, 중도(우파)정당, 자유주의 정당, 자본가계급과 보수정치인이 지지하는 구도가 형성되어 있다(최승호, 2013; Andersson, 2000; Christensen and Loftager, 2000). 문제는 이들 지지집단 내에서도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이유가 상이하고, 누가 주체가 되어, 누구를 동원하고, 누구와 함께 기본소득에 대한 지지를 세력화할지도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입장도 갈리고 있다. 조직노동은 기본소득이 단체협상을 통한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이라는 노동조합의 전통적 역할을 약화시키고, 복지급여를 노동으로부터 분리해 노동계급의 조직된 힘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한다. 반면 비정규직 노동자는 고용경력과 연동되지 않는 기본소득을 지지한다(최광은, 2011: 136). 특히 프레카리아트(Prekariat)라는 불안정 노동자에게 기본소득은 대안적 사회보장체계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1970년대 중반이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보험과 같은 복지수급권을 확보하기 위해 수십 년간 안정적으로 기여금을 낼 수 있는 노동계급은 급격히 감소했다. 칸디이 아스(Candeias)가 분석한 자료를 보면 전체 독일인 중 75%가 정규직, 비정규직, 실업 등을 반복하는 비연속적인 고용경력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곽노완, 2013: 97). 물론 이러한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자가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핵심 권력자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프레카리아트가 동질적 정체성을 갖는 단일한 정치세력화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단일한 정체성을 갖는 노동계급의 존재 자체가 신화이지만 복지국가 역사에서 노동계급의 세력화는 고용과 연계된 전후 복지국가의 확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한편 20세기 접어들면서 사민당을 포함해 대부분의 정당이 국민정당화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치적 기반을 특정 계급과 연계하는 것 자체가 적절한 접근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을 조직하고, 동원하지 않는 한 기본소득이 대안적 분배체계가 될 수는 없다. 적어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민주적으로 기본소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직된 주체’는 반드시 필요하다.3) 일회적으로 선거에서 승리해 기본소득이 제도화될 수도 있지만 기본소득의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다면 기본소득의 지속가능성은 담보하기 어렵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일부 기본소득 지지자는 기본소득은 제도의 무조건성과 보편성으로 인해 상위 1%를 제외한 99%로부터 지지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기본소득을 확장하고 지켜나갈 분명한 정치세력이 없다는 사실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분명한 것은 기본소득을 지지할 새로운 주체와 조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대 자본주의에서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기본소득이 중심이 되는 분배체계가 어떤 점에서 체제수준의 보편적 복지체제보다 우월한 분배체계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판 빠레이스의 주장과 달리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서 스웨덴식 복지체제와 기본소득 체제를 동시에 제도화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van Parijs, 2016; Bergmann, 2010). 실제로 최근까지 서유럽 복지국가에서 기본소득은 한 번도 사회 정책의 핵심적 의제가 된 적이 없다. 대신 일부는 기본소득의 실현 가능성을 고려해 당장 복지국가를 대신하는 완전한 기본소득을 실시하는 것 대신 특정 인구집단에만 지급되는 기초연금과 같은 사회수당이나 낮은 수준의 기본소득을 제안하고 있다(Groot and van der Veen, 2000). 하지만 특정 인구집단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현재 복지국가에서도 아동수동, 기초연금등 보편적 사회수당으로 이미 실현되고 있어 새로울 것이 없다. 또한 낮은 수준의 기본소득은 보편주의 복지국가의 초기 형태로 이미 제2차 대전 이후 영국과 일부 유럽국가에서 실현된 역사가 있다. 현재 보편적 복지국가는 낮은 수준의 정액급여가 중간계급의 이해에 조응하지 못해 시장의 역할이 확대되는 문제를 야기하자 1950년대 말부터 소득비례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Eley, 2008: 582). 그런데 다시 낮은 수준의 보편적 정액급여방식으로부터 출발하자는 것은 복지국가의 발전을 거슬러 올라가자는 것으로 설득력이 없다. 더욱이 기본소득의 제도적 우월성을 공공부조(또는 잔여적 정책)와 비교해 찾는 것도(강남훈, 2016), 체제수준의 보편주의와 정책수준의 보편주의를 구별하지 않고 모든 복지국가를 “선별적 복지 패러다임을 전제한 복지국가”로 전제하는 것도(곽노완, 2014: 344) 적절하지 않다. 기본소득의 지지자들은 왜 기본소득이 중심이 되는 분배체계가 체제수준의 보편주의 복지체제보다 더 우월한 분배체계인지를 분배체계의 관점에서 설명해야 한다.

 

논의 및 결론

우리는 기본소득과 관련된 다양한 논의를 검토하면서 현재 기본소득 논의가 현실정치에서 ‘완전한 기본소득’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기획이기 보다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공적 복지를 확대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적 담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

다. 왜냐하면 그 어떤 복지국가도 개인의 실질적 자유를 보장하는 완전한 형태의 기본소득을 정책 의제로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19세기와 20세기 사민당이 복지국가를 사회주의에 이르는 잠정적 유토피아로 간주했듯이, 소위 ‘부분 기본소득’이라 불리는 기초연금과 같은 사회수당의 제도화를(현실적 실현가능성 여부를 떠나) ‘완전한 기본소득’이라는 유토피아로 가는 중간 정거장으로 상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현재 복지체제를 급진적 방법을 통해 기본소득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면 크게 두 가지 선택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된다(Healy and Reynolds, 2012). 하나는 욕구에 근거해 가장 시급한 인구집단(노인, 아동, 청년 등)부터 점진적으로 ‘부분 기본소득’이라고 불리는 기초연금, 아동수당, 청년수당 등 보편적 사회수당을 도입해 완전한 기본소득에 다가서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복지급여를 낮은 수준의 기본소득으로 대체하기 시작해 점진적으로 완전한 기본소득을 실현하는 길이다. 그러나 낮은 수준으로부터 기존의 복지급여를 대체하는 방식은 중간계급의 생활수준 유지라는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실현가능성이 낮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인구집단에 따라 점진적으로 사회수당을 도입하는 방식이 정치적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방식이다. 사실상 기본소득은 전통적인 복지국가가 인구학적 특성에 따라 제도화한 사회수당과 유사한 소득보장 정책이다. 아마도 공적 복지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진영과 전통적 복지국가의 확대를 주장하는 진영은 ‘부분기본소득’이라는 지점에서 잠정적인 합의를 도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부분기본소득’이 사회수당의 성격을 갖는 한 전통적

복지국가 논자들이 부분기본소득의 제도화에 반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런 보편적 사회수당의 도입을 굳이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도입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여부이다. 다만 노동시장 참여와 관계없이 누구나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는 단순한 담론의 정치적흡입력을 고려한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복지국가를 확장하는 담론 전략으로 기본소득이라는 이름하에 부분 기본소득이라 불리는 보편적 사회수당의 제도화를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본소득을 기본소득들로 이해하는 한 기본소득과 복지국가는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1) 본 글은 다음 글을 정리ㆍ보완해서 작성한 글이다. 윤홍식(2018), 「기본소득 대 기본소득들」, 한국일보, 2018년 6월 29일, 윤홍식(2017), 「기본소득, 복지국가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기초연금, 사회수당, 그리고 기본소득」, 『비판사회정책』, 54: 81-119. 32.

2) 최근 기능주의 관점에서 접근했던 논자 중 일부는 기본소득을 1970년 중반이후 변화된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특성에 조응하는 사회 정책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김교성, 2016).

3) 물론 조직된 주체라는 것이 반드시 노동조합과 같은 경성권력자원의 형태일 필요는 없다. 네트워크 방식의 느슨한 연대체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방식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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