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주의의 종언과 평화복지국가1)

 

윤홍식 | 인하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반공주의의 종언

무겁고 낡은 반공주의의 사슬이 끊어지는 것인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 수감은 박정희식 반공개발독재의 환상에서 우리를 깨웠다. 박근혜 정권이 자행한 민생파탄과 민주주의의 퇴행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경제성장만 되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반공개발독재의 최면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곧 박정희 체제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여전히 박정희 체제의 근원이었던 반공주의라는 오래된 사슬에 묶여있었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반공주의는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반공주의와 반북주의로 무장한 색깔론은 보수야당과 보수언론이 개혁세력을 공격하는 전가의 보도였다. 정부여당의 개헌안에 대해 보수언론과 보수야당은 사회주의 헌법이라고, 한국을 사회주의 체제로 바꾸려는 불순한 시도라고 비판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색깔론을 덧씌우면 괴물이 되고 마는 세상이었다. 더욱이 북미 간의 적대행위는 한반도에서 죽음의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을 만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겠다고 협박했고, 김정은 국방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을 ‘늙다리 미치광이’이라고 비난하면서 “사상 최고의 초강경 대응 조치를 단행하겠다.”라고 응수했다. 약삭빠른 아베 정권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할 경우 한국에 체류 중인 일본인을 피난시킬 대책을 총선 공약에 넣어 발표했다. 또다시 우리의 운명이 다른 이들의 손에 의해 결정될 것 같았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남북의 정상이 손을 맞잡고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역사가 만들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보수가 그렇게 증오했던 ‘빨갱이’ ‘주사파’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으며 평화와 민족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하나가 죽어야 끝날 것 같았던, 도저히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김정은 국방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손을 맞잡고, 서로를 상찬하는 거짓말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드디어 우리 손으로 반공주의의 사슬을 끊는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더 이상 반공과 반북을 빌미로 개혁적 변화를 가로막는 구태를 반복할 수 없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의 목적은 국민에게 보다 더 나은 삶을 보장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하려는 반공주의의 산물이었다. 반공을 위한 죽음을 건 체제경쟁에서 사람의 안위가 존재할 공간은 없었다. 어떻게든 경제를 성장시켜 공산당을 물리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곧 국가의 존재 이유였기 때문이다. 2012년 대선에서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가 중요한 이슈로 제기되었지만, 사실상 결정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은 NLL을 둘러싼 반공주의였다.

 

한반도에서 남북한 권위주의 세력의 적대적 공존이 사라지고 평화체제가 실현되어 남북이 모두 한반도의 주체로 승인되는 순간 한국 사회에서 반북·반공의 정치적 효용성은 사라질 것이다. 대신 분배를 둘러싸고 계급과 계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다양한 정치세력이 경합을 벌이는 민주적 장이 열릴 것이다. 이제 누구도 두려움 없이 사회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자본주의의 대안을 이야기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릴 것이다. 정의와 평등을 외치는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빨갱이’라는 사슬에 묶여 고통 받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는 이렇게 한국 복지국가의 새로운 길을 여는 역사적 변곡점이 될 것이다. 상상해 보라. ‘빨갱이’이라는 올가미 같은 사슬이 끊어지고, 보수와 진보가 민생을 위한 복지정책을 둘러싸고 경쟁하는 그날을. 이렇게 남북화해와 북미화해로 시작된 반공주의의 종언은 한국 사회가 박정희식 반공개발독재에서 벗어나 평화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길을 열 것이다.

 

ⓒ 청와대 홈페이지

 

 

평화복지국가

평화복지국가는 반공주의와 경제성장 제일주의라는 반공개발국가를 대신해 한국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평화복지국가에 대한 선험적(先驗的) 정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회체제의 성격이 그렇듯 평화복지국가는 한국사회의 사회·정치·경제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정의되는 것으로 1960년대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권위주의적)반공개발국가의 대척점에 서있는 대안체제이다. 평화복지국가는 남북한의 극한대결을 조장하고, 한국사회 내부에서는 반대세력과 진보적 정치세력을 탄압하며 민주주의를 무력화·형애(荊艾)화시키는 반공주의(반북주의)의 존립근거인 한반도의 적대적 분단 상황과 동북아시아의 냉전적 대결상황을 평화체제로 대체한다. 이를 통해 평화복지국가는 한국사회에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양극화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재벌중심의 신자유주의적 개발주의 성장방식을 지양하는 사회가 시장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함으로써 성장의 결과가 공정히 분배되는 복지체제이다. 

 

물론 평화복지국가는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최종목표는 아니다. 스웨덴 복지국가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사회가 실현해야할 평화복지국가는 우리들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잠정적 유토피아(Provisoriska utopie)가 되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복지국가는 어떤 고정된 도그마를 주장하지 않는다. 평화복지국가의 모습은 국내외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는 그런 대안체제이다. 평화복지국가가 우리가 꿈꾸어야하는 최종목적지가 될 수는 없지만 평화복지국가는 우리가 매 시기 직면하는 구조적 조건이라는 가능성의 한계 내에서 모든 시민들이 선택하는 최선의 대안이 될 수 있어야한다. 이를 위해 평화복지국가는 1945년 해방공간에서 민족의 절대다수가 지지했던 민주주의에 기반 한 사회주의, 즉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을 21세기 한반도에 창조적으로 재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평화복지국가인가? 한반도에서 남북 간의 적대적 대결이 해소되지 않는 한 한국사회 내에서 민주주의도, 복지국가도 완전할 수 없다. 첫째, 반공주의(반북주의)는 단순히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을 넘어 (권위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세력과 진보세력을 억압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동원됨으로써 한국 복지국가를 건설할 주체인 친복지 정치세력의 형성과 성장을 불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반도 분단은 남한에서 사회민주주의로 대표되는 모든 좌파적, 진보적 이념과 그 결사체를 불법화하고 탄압하는 강력한 반공국가를 출현시켰다. 둘째, 평화복지국가는 한국사회에서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일국적 과제가 아닌 국제적 과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북한의 핵실험과 북미·북중 관계에서 보듯 한반도 평화문제는 일국적 문제가 아닌 동북아시아와 세계적 안보문제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 사회에서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제는 일국적 차원을 넘어 한반도에서 냉전과 대립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확대하는 과정을 전제하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다. 

 

한반도에서 평화를 정착시키는 과제는 남북한의 대립은 물론 한반도를 둘러싸고 지속되고 있는 한·미·일과 북·중·러 간의 냉전적 대립관계를 해소하는 것이다(구갑우, 2010; 김연철, 2013; 황지환, 2009).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1953년 이후 지속되고 있는 정전체제를 종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는 1953년 전쟁당사국들이 맺었던 정전협정이 지켜지고 있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정전협정의 틀도 해체된 상태이다. 2013년 3월 5일 북한이 정전협정의 백지화를 선언함으로써 현재 상태는 단지 서로에 대한 물리적 위협만이 공포의 균형 상태를 유지시키고 있는 상황이다(김연철, 2013). 현실적 과제는 당위적 통일이 아니라 남북한을 둘러싼 적대적 대립관계를 해소하고, 현재 상태를 평화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전협정을 종전협정으로,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것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평화체제 구축과 한반도 통일이라는 최종목표에 다다르는 임시 정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종전협정과 평화협정은 한반도 남북 모두에서 서로를 적대시하는 논리와 이념의 정당성을 약화시킴으로써 남북한 모두가 분단으로 인한 이념적 제약에서 자유로운 민주적 정치활동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종전협정과 평화협정으로 조성된 평화적 여건은 한국사회가 ‘반공주의(반북주의)’라는 냉전적 이념 구도에서 벗어나 국가가 시장의 이해를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경제와 복지가 선순환 되는 복지체제를 만들어갈 수 있게 할 것이다.

 

평화복지국가의 주체와 복지체제

그렇다면 누가 평화복지국가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한반도 평화구축이 그렇듯이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 또한 철저히 정치적 과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복지국가를 만들어갈 주체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평화복지국가는 단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서구 복지국가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복지국가는 어느 한 정치세력(예를 들어 노동계급)의 힘만으로 만들어진 체제가 아니다. 복지국가는 정치세력 간의 연대(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의 연대)의 산물이다. 문제는 ‘평화복지국가를 실현할 주체와 연대세력이 누구인가’이다. 북서유럽의 경험을 보면, 노동계급이 복지국가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동계급이 당시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고통 받고 불안정한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엄밀히 이야기해 노동계급이 의식적으로 복지국가의 주체가 되었기 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이 자본주의의 모순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노동계급’이라는 정체성을 구성했고, 이렇게 구성된 노동계급이 자신들을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중간계급과 연대해 복지국가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평화복지국가의 주체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반세기가 넘게 지속된 분단과 (권위주의적) 개발국가로 인해 가장 고통 받는 집단이다. 분단과 신자유주의화로 인해 언론, 출판, 결사, 사상의 자유를 보장 받지 못하고, 생계의 위협에 내몰리고 있는 진보적, 자유주의적 지식인,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여성, 농민, 청년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사회적 위험을 해소하기 위해 평화복지국가의 주체가 되어야하는 당위성과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은 권위주의에 대항해 민주주의를 지지키 위해 투쟁했던 경험을 제외하면 자신들이 당면한 사회적 위험, 즉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싸워온 연대의 역사적 경험이 전무 하다는 것이다. 평화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바로 이들이 현실 생활문제에 대해 타협하고 연대해 반공주의와 신자유주의 개발국가와 맞서는 연대의 경험을 만들어가는 역사적 과정이 되어야한다.

 

어찌 보면 이렇게 다양한 계층을 하나의 주체로 구성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노동계급 또한 처음부터 단일한 정체성을 가진 계급이 아니었다. 19세기 말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는 대장장이, 벽돌공, 제화공 등 지금으로 보면 자영업자들이 자신들을 노동계급이라고 선언했고, 영국에서는 술집주인, 서적판매인, 전문직업인, 수직공, 면방적공, 장인, 소마스터 등을 노동계급이라고 분류했다(Sasson, 2014[2014]:66; Thompson, 1966: 610, 771). 중요한 것은 이토록 상이한 집단들이 노동계급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구성하고, 현실사회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조직화되고, 정치세력화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밝히는 것이다. 현실 자본주의로부터 고통 받고 있다는 당위만으로는 이들을 정체성을 공유한 정치적 세력으로 만들어 갈 수 없다. 당위를 실천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은 바로 현실보다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는 ‘전망’이다. 북서유럽의 역사적 경험을 보면 1860년대부터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까지는 마르크스주의가, 1917년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는 사민주의가 노동계급의 정치적 실천을 위한 대안이념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공주의와 신자유주의 개발국가로부터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지금 보다 더 나은 미래를 보여줄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전망을 분단으로 비롯된 반공주의를 대신해 ‘한반도 평화’를, 경제성장 제일주의에 의존하는 신자유주의 개발국가를 대신해 민주적 복지국가를 한국사회에서 실현하는 ‘평화복지국가’라고 주장한다.  

 

글을 마치며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적대적 대립이 평화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한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는 불완전한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사회의 과제는 평화복지국가를 만들어갈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주체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반북주의와 신자유주의 개발주의로 가장 고통 받는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여성, 청년, 농민, 진보적 지식인이다. 조직노동이 평화복지국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지는 유보적이다. 복지국가의 전통적 주체였던 대기업 중심의 조직노동이 평화복지국가를 만들어갈 주체가 될지 아니면 주체의 연대의 대상이 될지는 현재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판단하기 어렵다기 보다는 현 상태에서는 대기업 노동자들이 평화복지국가를 만들어갈 주체가 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조직노동이 주체가 아닌 연대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은 북서유럽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북서유럽의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특정계급이 주체가 되어야한다는 고정된 경험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안정적 고용, 소득, 기업복지를 보장 받는 조직노동에게 국가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그리 매력적인 대안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에 근거했을 때 북서유럽의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주체”는 그 시대의 역사적 맥락에 따라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조직노동은 북서유럽에서 중간계급이 했던 (연대의 대상이라는) 역할을 한국사회에서 수행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들 주체에 의해 만들어질 평화복지국가는 주체들이 직면하는 사회위험에 대응하는 복지체제가 되어야한다. 평화복지국가는 중장기적으로 노동자의 숙련에 기초한 성장체제를 구축하고, 공공부문에서 좋은 일자리를 확대함으로써 이들에게 안정적 일을 보장해 주어야한다. 하지만 노동숙련과 안정된 고용은 단기간에 성취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평화복지국가는 시민들의 노동시장 지위와 관계없이 시민들의 기본생활을 보편적으로 보장하는 제도를 확대하는 복지체제가 되어야한다. 기여금에 기반 한 사회보험을 폐기하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청년, 농민, 여성들이 전통적 사회보험으로부터 배제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여에 기반 한 사회보험을 평화복지국가의 분배제도의 근간으로 둘 수는 없다. 평화복지국가의 근간은 기여와 관계없이 시민권에 기반 해 생활(소득과 사회서비스)이 보장되는 사회적 분배중심의 복지체제를 구축해야한다. 사회보험의 강화는 평화복지국가를 만들어갈 주체의 연대세력인 정규직 중심의 조직노동의 이해를 보장하는 정책으로 배치될 수 있다. 평화복지국가는 시민의 기본생활을 보장하는 것을 전제로 각자의 성취에 따라 급여를 차등적으로 보장하는 복지체제이다. 한국 사회가 북서유럽이 걸어갔던 복지국가의 길을 걸어가야 할 이유도 당위도 없다. 모든 사회는 분배체계와 함께 존속될 수 있고, 최선의 분배체계는 그 사회가 직면한 역사적 현실에 근거해 구성되는 것이다. 

 

평화복지국가는 분단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한국사회가 만들어갈 역사적 분배체계이자 1945년 해방공간에서 우리민족이 꿈꾸었던 사민주의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다. 평화복지국가를 이 땅에 실현할 때 70여 년 전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저항했던 수많은 영령들께서 편안히 눈을 감으실 수 있을 것 이다.

 


1) 이 글은 아래의 글에서 발췌하여 수정·보완한 것임을 밝힘.

윤홍식. (2016). “한국 복지굮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바라보기: 반공개발국가에서 평화복지국가로.” 이병천·윤홍식·구갑우 편,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 pp. 91-143. 서울: 사회평론. 

 한국일보. (2018). [아침을 열며] 반공주의의 종언. 한국일보, 2018년 5월 18일.


<참고문헌>

구갑우. (2010). “녹색·평화국가론과 한반도 평화체제.” 『통일과 평화』, 2(1): 3-44.

김연철. (2013). “동아시아 질서와 한반도 평화체제 전망” 『경제와 사회』, 99:12-35.

황지환. (2009). “한반도평화체제 구상의 이상과 현실.” 『평화연구』, 17(1): 113-136. 

Sassoon, D. (2014[2014]) 『사회주의 100년: 20세기 서유럽좌파 정당의 흥망성쇠』. 강주헌·김민수·강순이·정미현·김보은 옮김(One hundred years of socialism: The West European left in the twentieth century, 2014 ed.). 서울: 황소걸음.

Thompson, E. P. (1966[1963]).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New York, NY: Vintage 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