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의 글

 

장지연 |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백수도 과로사 한다는 사회. 너 나 없이 바쁘고 지친 삶을 살고 있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복지동향 이번호에서는 ‘시간빈곤’의 문제를 기획으로 다루었다. 

 

시간빈곤은 현대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의 의미와 복지국가가 이를 대하는 방식이라는 거시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다. 구매력에 따라 복지가 결정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일자리(정확하게는 일자리에 딸린 임금)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게 되고, 그러다가 어느새 노동의 필연성은 내면화하게 된다는 한동우 선생님의 글이 시간빈곤의 철학적 측면을 일깨운다. 복지국가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작동하고 있다는 지적에서도 무릎을 치게 된다. 시간빈곤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복지국가의 문제라면 개개인이 삶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 자명해진다. 물론 자연의 순리를 따르며 느리게 살기로 결심을 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같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결국 시간빈곤의 문제는 다른 한편에서는 현실 제도의 문제와 만나게 된다. 연간 2000시간을 넘는 노동시간을 1800시간대로 줄이겠다고 대통령이 약속을 했는데, 무슨 방도로 그렇게 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염려되기도 한다. 휴일근로를 연장근로의 일부로 간주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주당 최대 68시간 노동을 허용해 온 정부의 ‘행정해석’부터 폐기하는 것이 지극히 상식적이다. 하지만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상식을 적용하는 것이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동안 잘못된 행정해석에 기대어 기업이 노동자에게 덜 지급한 임금은 어찌할 것인가? 법대로 하자면 3년치를 소급해서 지급해야 한다는데... 어찌 보면 당연하고 사소한 것일 수도 있는 이런 문제들이 막상 해결하려면 당사자들의 이해가 얽히고설킨 문제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한번 잘못 나간 정책을 바로잡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해 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에스앤에스와 플랫폼의 한 쪽 끝에 매달려 사는 것이 일상이 된 초연결사회에서 노동과 노동 아닌 것을 구분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시간빈곤이라는 주제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다. 노동인 줄도 모르고 남의 일 열심히 해주고 있는 그림자 노동도 문제이지만(크레이그 램버트, 2016 『그림자 노동의 역습』 민음사), 시도 때도 없이 이메일과 문자로 전달되는 업무지시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하라는 건 아니라며 건네는 일들. 잠시도 쉼 없이 머리 위에 일감을 이고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장 할 일, 내일 아침까지 할 일, 내일 오후까지 할 일을 배치하고 재배치하면서...

 

이 글을 쓰다 보니, 제도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더욱 책임감을 느끼게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제약 조건 하에서나마 내 삶을 바꿀 방도를 강구해야겠다는 결심도 하게 된다. 이런 시간빈곤 사회에서 그대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