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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무위당학교 – 원주에서 ‘언론’을 이야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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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무위당학교 – 원주에서 ‘언론’을 이야기하다

익명 (미확인) | 수, 2016/04/06- 15:12

제9기 무위당학교

“원주에서, 언론을 이야기하다”

한국 언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신문과 방송을 신뢰하십니까?
돈과 예능에 빠져드는 TV로부터 우리 애들을 어찌해야 할까요?

우리는 지금 미디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수십 종의 신문, 지상파 TV, 온종일 떠드는 종편방송, 그리고 100여개의 케이블채널 등,
다양성이 보장되는 “미디어 주권시대”라고 말하지만 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합니다.
주요 신문들은 사회정의보다 돈의 눈치를 보며
자사이기주의에 부합한 논조를 쏟아내고 있으며,
종편방송은 분열적이고 선정적인 뉴스보도와 해설로
우리를 흥분시키고 불안하게 합니다.
공익성이 생명인 지상파 TV도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예능오락 프로그램으로 아이들 정서를 흔들고 있습니다.

제9기 무위당학교에서는 신문과 방송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시고,
우리 언론과 미디어의 권력화, 상업화가 가속화되는 현실을 냉철하게 진단해보고,
미디어가 민주주의와 국민이 행복하고 풍요로운 공동체적 삶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보고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참으로, 언론분야의 귀한 분들을 모셨습니다.

무위당학교를 아껴주시는 많은 분들의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무위당학교장 황도근 모심

* 일시 : 2016년 4월 7일 ~ 6월 9일 매주 목요일 19시 ~ 21시

- 1강(4/7, 목)은 입학식으로 6시 40분에 시작

- 5강은 5월 9일 월요일, 7강은 5월 27일 금요일 진행

* 장소 : 밝음신협 4층 무위당기념관

* 수강료 : 인문도시 지원사업에서 부담해 수강료를 받지 않습니다.

한살림원주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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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근 모심과살림연구소 이사장(한살림연합 이사) 인터뷰가 언론에 소개되었습니다.

황도근

“언론, 빛과 소금 역할 회복해야”

2016-05-19 18:00  강원CBS 박정민 기자  /ⓒ노컷뉴스

황도근 무위당 학교 교장, 강원CBS 시사포커스 인터뷰

“언론이 지녀야 할 빛과 소금의 역할이 아쉬운 시대입니다. 언론이 제 역할을 회복해 생명 운동, 공동체 운동의 구심점이 돼야 합니다”

자세히 보기모심과살림연구소 바로가기

월, 2016/05/2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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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있다면 박뱅을 통하여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연적 법칙을 부여하여 만물이 운행토록 하였을 것이다. 이에 성서에서는 태초에 말씀(법칙)이 있었다 기록하였고, 아시아의 현자들은 도법자연(道法自然)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고 하늘을 따르는 것이 본성(天命之謂性)이라 논하였다.

사람들이 사회적 집단을 형성하고 대화가 가능한 언어를 공유하면서, 서로의 상상 속에서 창조주인 신을 발견하고 재창조하였다. 신의 존재 여부를 떠나서 인간은 바라는 바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로서 믿음 속에 각자의 제단 위에 신을 설정하였다. 유발 하라리 교수는 ‘사피엔스’라는 저작을 통하여 인간이 동물적 세계로부터 탈출하여 위대한 역사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 것은 집단적으로 공유한 상상(신화 또는 종교)이 빚어낸 열정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대규모 집단적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약 만년 전, 축의 시대부터 형성되었던 상상과 열정은 근세에 들어 산업시대를 겪으며, 양적인 교환이 가능한 상품화의 자기증식 과정에서 열정은 탐욕으로 변질되고 무지라는 자각에서 출발하여 획득한 과학적 지식으로 자연을 극복할 수 있다고 섣부른 예단에 이른다. 인간이 자연적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순간부터, 역설적으로 탐욕과 자만으로 Sapience & Sapience 라 불리는 현 인류종이지구라는 행성의 자연공간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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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토판 쐐기문자로 적힌 수메르 우르남무 법전(왼쪽)과 고대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오른쪽)

다시 과거의 역사로 돌아가, 기원전 18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에서 발견한 우르남무 법전(‘눈에는 눈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보다 앞섰다)은 가족과 재산권의 사적 소유 개념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이후 사적 재산권의 개념은 중동 아시아를 거쳐 로마제국에 이르면서 체계적인 법률의 형태를 지니게 된다. 한국역사에 있어서도 최초의 법으로 알려져 있는 고조선의 8조 법은 그 중에 3개항만이 한서를 통해 전해 지고 있는데, 나와 타인에 대한 규범을 분명히 세우고 남을 해하고 물건을 탐한 자에 대한 처벌과 보상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반면에 콜럼버스가 정복하기 전의 북미 아메리칸 인디언 공동체사회는 온전히 모두가 하나로 일체를 이룬다는 사고의 틀을 지니고 있었다. 인디언들의 인사말인 “미타쿠예 오야신”은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뜻으로 단순히 사람들간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지인 어머니의 품속에 동식물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가 하나인 전일적(holistic) 개념을 지니고 있었다 유명했던 영화 ‘늑대와 춤을’의 장면들을 연상해 보시면 도움이 될 듯 하다.

이렇게 중동아 및 고조선 사회와 북미 인디언 공동체가 보여준 결정적 차이의 배경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문가적 영역에서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한 주제이겠지만 필자의 직관적인 판단은 집단 주거공간인 자연적 조건과 생활에 필요한 물자 조달의 용이성 여부가 첫 번째 배경이 아닐까 싶다.

상대적으로 제한된 지리적 자연공간과 항상 흡족하지 못한 생활재의 공급과정에서 질서와 규칙이 요구되고 외족 침입의 방어를 위해 강력한 권력을 필요로 했던 전자의 사회에서는 사회적 강제로서 엄격한 법질서가 도입된 반면에, 넓은 광활지에서 생존에 필요한 물자를 자유롭게 조달할 수 있었던 후자의 공동체는 전일적 평화체제가 가장 이상적 해결책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회적 강제가 도입된 전자의 사회에서 지배자의 권력이 강해지고 수탈이 심해지면서 지배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다양한 상상력과 실천적 열정들이 신화와 종교 또는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이념적 체계로 등장하면서 인간 역사를 드라마틱하게 전개하도록 추동한다.

17-8세기를 전후하여 물적 필요에 대응한 산업 기반이 급진전되어 인류 전체의 수요를 해결하는 것이 가능해진 현대 사회 이전 인류사의 조건 속에서는 온전한 평화가 아니라 갈등과 대립이 역사의 발전을 만드는 역설이 발생한 셈이다.

예건데 인민들을 강압하고 수탈하는 기득권 질서에 대항하기 위한 종교적 상상력과 실천적 규범으로 중동과 서양사회에서는 기독교가 탄생했고, 중화권에서는 유교가 주요한 흐름을 형성해 왔다. 여기서 기독교적 가르침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 구절에서 보듯이 적극적인 형제애적 실천을 요청하는데 반하여, 동양에서는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마라(己所不慾勿施於人)’이라는 방어적이며 소극적인 예절의 형태로 나타난 것 역시 매우 흥미로운 문화사 연구의 주제가 될 법하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형제애적 실천은 주로 수도원 활동을 통하여 진행되어 왔다. 베네딕트를 시작으로 프란체스코, 도미니크 그리고 예수회 등 수도원 활동은 세속 사회에서 뿌리를 뽑혀 갈 곳이 없거나 범죄를 저지른 자, 그리고 영혼에 평화를 구하는 자들을 모두 포용하여 신의 은총에서 평온한 삶을 제공해주는 청량제적 역할을 해왔다.

십자가 전쟁 이후 돈과 권력의 탐욕에 물들기 이전에는, 대부분의 교회가 수입의 십일조 내지는 지역에 따라서는 과반이 넘는 교회 예산을 지역 공동체의 가난과 질병을 구제하는 활동에 사용해온 것으로 역사는 기록으로 증언하고 있다. 로마제국 멸망 이후 상업시대 출현이전 역사공백의 수세기 간 중세가 우리에게는 암흑기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종교선택과 거주이동 등 자유는 없었으나 신의 은총이라는 구속하에 교회를 중심으로 온전한 평화를 이룬 시기였다고 여겨진다.

문제는 속세의 삶보다는 죽음 이후에 오는 내세의 천국에 방점을 두면서 수도원 내 평온한 삶과 평화는 세속과 격리된 일종의 섬이었다는 점에 있다. 가톨릭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적 영성적 공동체 역시 일반사회 속에서 보통시민들과 함께 사회의 대변화를 추구하기 보다는 격리된 상황을 연출하며 세속적 영향과 편입을 거부하는 형태로 현재까지 존속해오고 있다고 짐작된다.

반면에 17-8세기 이후 산업화와 자본가들의 수탈이 진행되어 가는 와중에 19세기 중반 영국의 맨체스터 공업지대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20여명의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소비자협동조합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인류 미래에 새로운 계기와 가능성을 제시한다. 로치데일 협동조합 운동은 많은 국가에 영감을 주면서 독일에서는 라이파이젠 신용협동조합을 탄생시키는 계기를 제공하고, 제2차 대전 이후 스페인에서는 소수민족의 자치운동의 성격을 지닌 몬드라곤 협동조합이 호세 신부의 탁월한 지도력과 결합하여 거대한 조직으로 발전하고, 이탈리아에서는 유로코뮤니즘의 본산인 볼로냐에서는 장기간에 걸쳐 누적된 진보적 지식인들의 역할과 지침이 지역 저변을 묶어내는 네트워크로 활성화되었고, 캐나다의 퀘벡주에서는 불어권이라는 공유된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지역중심의 협동조합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상기에 언급하였듯이 국제적으로 모범 사례가 되고 있는 여러 지역은 나름대로의 역사와 배경   그리고 조건 속에서 조직을 확대하고 성장해 왔다. 특이한 것은 세계적으로 지역 활동이 가장 활발하다는 일본의 경우, 협동조합 운동의 아버지라고 추앙되는 한 종교인의 활동과 궤적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한살림의 창업자인 김재일선생은 ‘가가와 도요히코’의 저작 ‘우애의 경제학’을 번역하면서 그를 다음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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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명문가 첩의 자식(본처의 양자)으로 중학교 당시 영어교실에서 만난 로감과 마야스 전도사들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자가 된 후 메이지 신학대학과 고베신학교에 공부하다.전도 활동 중 치명적인 폐괴저 병에 걸렸으나, 나가오 목사 가족의 정성을 다한 보살핌으로 회복된 후, 삶 전체를 사회봉사에 바치겠다는 결심으로 고베 빈민가 정착하다.빈민운동 중에 헌신적인 여성 하루를 만나 결혼하고 미국 프린스턴 대학으로 유학하여 신학과 생물학을 전공하다.미국에서 대규모 파업과 시위 경험을 경험한 후 귀국하여 자주관리운동으로 칫솔공장 설립하고 운영하다. 1918-4-20 간사이 노동동맹창립 선언문을 작성하고, 오사카 전동주식회사 파업을 주동하고, 1922-04-09 추후 5백만이 넘는 회원을 갖는 일본농민조합 창립대회를 주도하다. 1923-09-01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교회를 중심으로 이재민 구제활동을 눈부시게 조직한 후, 자조와 자주의 정신에 기초한 수많은 조합운동을 전개하다. 1924년 이후 대만,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전도여행 하고,귀국 후 일본 내 백만 구령(기독교신자) 운동 전개하다. 이를 지원하는 미국 내 후원회 조직이 결성되고,일본의 대륙 침략 이후 일본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세계평화운동 전개하다. 일본 패전 이후 내각 참여의 권고를 거부하고 전국민 참회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의 확산에 노력하고, 사회당 창당 등 활동에 전념하다. 1955년 노벨 평화상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며, 현재 회원 130만명이 넘는 코프 고베를 창립하고 지원하다, 1958년 와병으로 쓰러져 심근경색, 만성신염, 대동맥중막염, 기관지확장증, 심장비대 등 종합병종으로 1960-04-23 사망했다.

요약하면, 가가와 도요히코는 1920년대의 백만 셀러 <사선을 넘어>저자이며 목사로서 철저한 복음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일본에 사회운동의 씨를 뿌린 사회주의자이다. 진보적 실천과 복음적 영성을 결합한 사상을 지녔으며, 일본 최초의 대규모 노동자 파업 주도하고 복음과 의식화를 통해 농민조직을 이끌었고 소비자 및의료 등 일본 협동조합운동의 전설적 지도자로 추앙되고 있다.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 내에 동상이 세워질 만큼 그가 사망한 당시에는 미국인들에게도 경의적인 존경의 대상이었다.

10여 년 전 그의 저서 ‘우애의 경제학(1936년 출간)’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저 열정적인 기독교의 사회운동가 정도로 기억하였다가, 최근 다시 열어본 책 속에 필자가 심한 갈증을 느끼며 찾고 있던 내용의 대부분이 담겨 있음을 발견하면서 스스로 놀랐다. 필자의 의견을 토씨로 달기보다는 그의 저술 내용을 아래로 요약하면서 그의 사상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다만 1936년 당시는 소련 연방이 산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여 전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자본주의 국가들은 공황으로 매우 고전하던 시절임을 미리 염두에 두고 읽어주시길 바란다.

카오스의 세상을 구원하는 길: 세계 대공황에 대한 해결책으로 마르크스와 케인즈의 이론이 성공하지 못한다고 확신하면서, 오로지 자기성찰과 형제애에 기반한 사회운동으로 인간과 사회의 근원적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믿고 협동조합을 통한 전 사회적 변혁을 꿈꾸다. 공산주의는 획일적인 사회이며 비인간적인 체제라고 부정하고, 자본주의를 1). 약탈적 시스템, 2)상류층과 유한계급을 위한 사회, 3) 자본과 물적 기반이 지배계급에 집중되는 구조, 4) 무산자를 양산하는 체제라고 비판한다.

그리스도와 경제: 종교적 신앙과 실생활의 경제를 분리시키는 것은 마치 신경계통과 소화기 계통을 분리시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치를 7가지 요소 – 생명, 노동 또는 활력, 교환, 성장, 선택, 질서, 목적으로 나누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단순한 영혼의 구원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의 완전한 융합으로 해석하고, 십자가는 세속적인 인간을 하나님의 영성으로 인도하는 가교의 역할로 본다. 사적 소유권 이념에 기초한 로마법이 속세의 권력으로 자본주의 전일적 지배의 기초를 닦았다면, 이를 대체하는 십자가의 사랑이 사회경제의 원리로서 현실의 경제활동에 도입되면 현존의 공산주의를 훨씬 능가한다. 입과 계시로만 하나님께 다가 가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거리를 만들고 심연을 깊게 할 뿐이다.

유물론적 경제관의 잘못: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은 아담 스미스의 고전 경제학도 아니고, 마르크스의 유물 경제학도 아니다. 인간의 각성된 종교의식에 뿌리박은 새로운 경제관속에서 발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스미스가 시도한 종교와 경제의 분리는 명백한 오류이며 윤리와 경제가 하나가 될 때만이 하나의 몸(소마)처럼 오롯이 온전한 활동이 이루어진다. 마르크스 이론 역시 유물론적 결정론에 경도되어 스미스가 저지른 동일한 오류를 공유한다. 경제와 경제행위는 인간의식의 발전과 수준과 함께 변화하고 발전한다고 믿는다. 물질생산의 형태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인 각성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하여 사적 소유권, 상속 그리고 계약권 등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켰다. 산업이 진행될수록 한 시대의 문화는 물질적 생산과 분배, 소비행태를 제어하는 당 시대 사람들의 의식과 각성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변혁의 철학: 인류역사 전체를 통하여 폭력혁명은 언제나 비참하게 종말을 맞게 된다. 반면에 경제적 혁명은 인간의식의 변혁으로 달성할 수 있으며, 기존의 소유권, 상속, 계약권 등 부와 직업에 대한 근본적인 혁명을 가져오면서 전진을 이루게 된다. 인간의 의식은 자연적 본능적 의식에서 자각적인 상태로 나가고 윤리적 사회적 의식으로 발전한다. 기독교적 형제애가 없으면 결코 이상적인 경제사회를 이룰 수 없다.

형제애: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 여러 수도회의 모습에서 형제애를 발견한다. 그리스도 신앙에서 행한 수많은 형제애의 노력을 바탕삼아 협동조합 운동이 등장했다. 이 경우에는 소유권이나 상속이 문제가 되지 않으며, 우선적으로 노동이 존중되고 금전의 이자가 허용되지 않았다. 한편 형제애가 약해지면 세상권력인 로마법에 근거한 사적 소유권 제도가 기승을 부린다. 성공한 로치데일 생협운동은 물건이 아니라 인격과 상부상조를 중시하였다.

협동조합국가론: 현대의 협동조합은 중세 길드의 연장선에서 개선되고 발전되어 왔다. 다만 중세의 길드는 비조합원까지 형제애를 미치지 못했고 자신들이 속한 하나의 종교와 신앙에만 갇혀있었다. 현대의 협동조합은 종교적 형제애에 바탕을 두면서도 여러 종파의 차이와 장벽을 뛰어 넘어 사회전체에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 협동조합 운동은 자본제하의 외로운 섬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향한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전략과 실천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한다. 보험-생산자-판매-신용-공제-공익-소비의 전 과정을 지역과 중앙단위에서 상호적으로 연결하고 상보하는 전체적 시스템 구성하고 이를 정치적 조직으로 발전시키는 조합국가를 만들어 자본제를 대체하도록 구상해야 한다. 이에 더 나가서 형제애와 협동조합 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국제연맹형태의 국제기구를 만들어 세계평화를 유지해야 한다

(필자 의견:현존하는 스위스는 가가와가 꿈꾸던 협동조합 국가에 매우 유사하다. 스위스 성공의 비결은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칸톤 자치주의 강력한 독립성과투표의 비례성이 온전히 반영되는 선거제 및 국민발안에 의한 직접 민주제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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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이라는 새로운 운동 영역을 일군 ‘원주 캠프’ 인사들. 왼쪽부터 장일순·지학순·김영주·김지하·박재일.(사진: 경향신문)

일본에서는 기독교적 형제애의 재발견으로 협동조합운동이 활성화 되었다면, 한국에서는 동학의변혁사상이 재발견되면서 협동조합운동이 뿌리를 내렸다고 할 수 있다. 시천주(侍天主)의 깨달음에서 출발하여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위대한 사상을 이룬 동학은 사회변혁의 일환으로 ‘유무상자(有無相資)’라는 생활실천운동을 전개하였다. 갑오농민혁명이 좌절되어 역사적 잠복기에 들어간 동학의 생활실천운동은 1970년대에 원주지역에서 장일순과 박재일 등에 의해 협동조합운동의 형태로 되살아났고 한살림 운동으로 전개된다. 한살림 운동은 한국시민사회를 각성시키며 다양한 생활협동조합을 탄생시키는 기폭제가 되었고 지금 수준에 이르게 된다.

한국사회내에서 현재 주춤한 사회적 경제영역을 다시 활성화하기 위하여 다양한 논의와 지원 방안이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실천단위에서 진지하게 검토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기존의 탐욕에 기반한 자본제적 방식과 단순한 시장기능적 접근으로는 새로운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제2 섹타의 수익중심과 성장일변도의 논리를 배제하고, 기독교가 제시하는 형제우애적 논리 또는 동학이 가르치는 무차등적 유무상자의 원칙이 사회경제적 시스템을 추동하는 강력한 흐름을 형성하여 자본적 탐욕을 제어하고 대체할 때만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동시에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목표로 하는 제3 섹타 영역을 제1 섹타인 공공의 영역과 제2 섹타인 시장 영역의 원심적 영향력에서 분리시켜 스스로 강화하고 확대할 수 있도록 다양한 조치와 환경을 조성하되, 도요히꼬의 발상을 역으로 적용하여 그 동안 축적된 사회과학적 성과와 정책시행을 통하여 얻은 경험을 온전한 기능적 도구로 재구성하고 재결합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제3 섹타의 영역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의 개별적 탐욕(욕구)을 모두를 위한 에너지로 승화시킬 수 있는 시스템의 구성 요소로 실행적 규범과 제도적 규칙, 혁신적 기제, 협업적 환경, 공유적 조건, 순환과 확산의 되먹임 구조, 자연환경과 지속조건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심도있는 연구와 논의가 절실하다.

화, 2018/09/0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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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림부산이 부산지역에 고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삶과 생명사상을 전하고자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무위당학교를 열기로 하였습니다.

무위당 장일순

부산에도 ‘무위당학교’

2016-05-08 윤여진 기자 /ⓒ부산일보

무위당 장일순(사진) 선생의 삶과 생명사상을 기리는 무위당학교가 부산에도 세워진다.

자세히 보기한살림부산 바로가기

월, 2016/05/09-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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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농 박재일 선생과 함께 한살림을 여는 데 공헌한 생명사상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주제로 한 칼럼이 언론에 소개됐습니다.

무위당 장일순

[문화산책] 3대가 덕을 쌓으면

2016-11-18 김원한 커뮤니티와경제 팀장 /ⓒ영남일보

‘사회’복지학과를 나와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 ‘사회적’기업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순전히 20세 무렵 읽은 책 한 권의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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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6/11/1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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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무위당 장일순 선생 생전의 강연과 대담을 모아 엮은 책 <나락 한알 속의 우주>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습니다. 고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한살림을 열고, 한살림운동을 펼치는데 공헌한 생명운동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입니다.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장일순의 이야기 모음 <나락 한알 속의 우주>

2017-01-15 21:54 김영태 기자 /CBS노컷뉴스

<나락 한알 속의 우주>는 반독재 투쟁에서 한살림 운동의 제창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대 생명운동의 스승, 무위당 장일순 선생(1928~1994)의 생전의 강연 및 대담을 모아 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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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7/01/16-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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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슈들 거의 전부가 한국의 주요 언론으로부터 완전히 외면되거나 피상적이고 하찮게 다루어진다. 이러한 경향은 지난 10년간 점차 심해져서, 이제는 사람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현재 한국은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이웃과 지역, 국가와 세계에 관하여 믿음직한 관련 정보를 국민에게 제공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해 버리는 어마어마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외국과 국제금융 그리고 보이지 않는 힘이 어떻게 한국을 조종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없다면 작금의 위협에 어떻게 대응해야만 하는지도 결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는 안보 위기이다. 저널리즘의 붕괴는 민주적 절차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 정책에 관하여 믿을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없고, 정치인의 됨됨이나 개인적 스캔들에 대한 선정적 기사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강요된다면, 국민은 의미 있는 투표를 할 수 없다. 주변 사람들과 정책에 관해 신중하게 논의하고 가장 중요한 이슈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 시간을 들이는 대신, 한때 시민이었던 사람들을 부추겨 선거 직전에 길거리 댄스나 지켜보며 자기만족을 앞세우게 만들고 일시적 기분과 충동에 휘둘리도록 하는 상황에서, 선거는 요식 행위로 전락한다.

현재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이슈들을 들여다보자.

  1. 한국에서 그리고 세계적으로, 극소수 부유층에 유례없이 집중된 부(富).
  2. 급격한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감당하기 힘든 위협. 이는 지금부터 향후 20년간 철저한 과학적 조사를 통해 기록될 것인데, 눈앞에 닥친 결과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반 건조 기후 상황의 증가. 이는 향후 10년간 계속 악화될 극심한 물 부족과 함께 오는데, 남한도 그렇지만 북한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을 것이다.

해수면의 상승 및 해수 온난화에 따른 해양생물의 황폐화.

기온 상승이 가져올 새로운 질병, 농업 생산성의 감퇴, 수입 농산물 가격의 상승.

석탄 발전의 증가에 따른 질병의 급격한 확산. 공해 산업의 자체 규제로 정부와 국민은 공장이 어떤 공해 물질이 내보내는지 모르는 상황의 발생.

  1. 점증하는 미국의 군사화. 미국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서 러시아 혹은 중국과 전쟁을 벌이려는 충동의 증가. 미국 외교의 소멸 그리고 기존의 이상주의 외교가 국제협력에 기여했던 바의 종언.
  2. 동중국해에서의 충격적인 기름 유출. 한국 연안의 물고기 오염과 제주도 및 여타 지역에서 예견되는 피해.
  3. 지역 경제, 특히 소도시 경제의 붕괴. 가족경영 사업체, 특히 식료품점과 레스토랑의 전국적인 폐업.
  4. 스마트폰, 자동차, 철강, 그리고 선박 등 수익성 좋은 시장의 임박한 붕괴. (그리고 이를 대체할 만한 시장의 부재) 이들은 지난 수십 년간 한국 경제 성장의 엔진으로 여겨졌다.
  5. 모든 혜택이 부여되는 장기 고용의 종료. 한국 청년층의 미래는 위험하고 불확실하며, 일부는 빚더미에 올라앉아 사회생활을 시작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핵심 이슈에 관한 언급을 한국 신문이나 텔레비전 방송에서 찾으려면 자세히 살펴봐야만 한다. 모든 신문의 1면을 매일 장식해야 할 이들 이슈 중 일부가 일회성 기사로 가끔 실리기도 하지만, 문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현재 무엇이 연관되었는지, 문제 해결을 위해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탐사보도는 거의 없다. 사실상 대부분의 기자들은 당장의 소비를 위한 피상적 일회성 기사를 써내야만 하는 압박에 처한 나머지 진정한 저널리즘에 빠져들 여력이 없다.

미디어오늘
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은 한국의 주요 언론들에서 얼마나 제대로 다뤄지고 있을까. 한국의 전국 단위 종합일간지 신년호의 1면 하단 광고는 10여년째 삼성전자의 차지다(사진:미디어오늘).

 

무엇보다 저널리즘이란 비즈니스가 아니며 저널리즘의 목적이 돈벌이가 아님을 반드시 인식해야만 한다. 언론은 국민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만 하며 국민으로 하여금 사회와의 지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접촉면을 넓히도록 장려해야만 한다. 음식이나 섹스에 관련된 사람들의 원초적 본성에 호소하여 국민을 바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자면 저널리즘과 미디어는 판매를 위한 상품이 아니라 윤리, 예술과 문학 표현, 그리고 지역과 국가 및 전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당대의 중요한 이슈로 국민을 이끄는 교육의 한 형태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언론 보도를 소비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이슈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지, 사람들을 보다 사려 깊게 사고하고 사회적 의무감을 가질 수 있도록 장려할 수 있는지가 본질이다.

모두가 눈 감고 있는 명백한 진실을 먼저 대면해야만 한다. 미디어의 광고 의존이다. 광고는 필연적으로 저널리즘을 왜곡한다. 진실과 윤리적 책임의 추구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광고주의 경제적 이익에 보도를 종속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의 뻔한 결과는 끊임없이 사회를 행복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심각한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심각한 위기들은, 보도 과정에서, 자연의 어쩔 수 없는 변덕으로 치부된다. 위기의 역사적, 문화적 원인을 한걸음 물러서서 천착하지 못 하도록 하고, 위기를 시스템의 문제이자 경제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신문과 잡지, 특히 텔레비전의 모든 뉴스는, 사회나 국가에 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자기만족과 이기적 행동 속에 자신의 욕망을 소비하고 충족하는 사람들의 이미지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에, 광고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광고가 저널리즘이 아니기는 하지만, 광고는 독자들에게 보도와 비슷하거나 오리려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광고에 들어간 그래픽은 보도에서 사용되는 그래픽에 비해 훨씬 질이 높으며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으려는 목적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광고 이미지와 한국 사회의 현실 사이에는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다. 희생과 절제 그리고 겸손의 가치에 대한 언급, 자신에 대한 광적인 숭배를 넘어서는 이상의 추구에 관한 언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최근 광고는 더욱 좋지 않은 방향으로 뚜렷하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로지 호화로운 집에 사는 부자들의 이미지만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광고에 숨은 전제는, 타인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부자가 되어야 하고 자기만족을 추구해야 하며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광고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계층이 겪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음은 물론이다. 한국 사회의 엄청난 부의 양극화란, 값비싼 커피숍들 사이를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떠도는 사람들을 더욱 부러워하고 추앙해야 할 또 다른 이유일 뿐이라는 것이 숨은 전제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슬픈 일이지만,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저널리즘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췄다. 문자해독이 가능한 사람들의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고, 대학교육 이상을 이수한 비율 역시 높다.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도 많다. 한국 기자들의 수준도 대단히 높다. 많은 기자들이 여러 언어를 구사한다. 한국의 대학에는 해외 유수 대학에서 석사 이상의 학위를 취득하고, 중요한 주제를 심도 있게 분석하고 이를 일반 시민에게 설명하는 훈련을 받은 교수와 강사가 많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지식인 사이에는 그들의 전문지식을 동료 시민을 도와야 할 책무가 아니라 계급적 지위의 원천으로 바라보는 문화 전통이 있다. 이러한 관습은 긴 역사를 지닌다.

그러나 구조적 이슈가 훨씬 중요하다. 대규모 중앙지와 지방 신문사에서는 고등교육을 받은 수천 명의 기자들이 일하는데, 이들은 정부 관료나 기업이 내놓는 발표를 취재하며 하루를 보내고 신문사로 돌아와서는 거의 똑같은 내용의 기사를 찍어낸다. 고등교육을 받은 기자들이, 특정 분야에서 전문성을 기르고 몇 주 혹은 몇 달이 소요되는 탐사보도에 매진하여 의미 있는 분석과 보다 나은 정책을 위한 실질적인 제안을 내놓기보다, 다람쥐 쳇바퀴에 갇혀 기사 작성에 급급한 현실이다.

교수들의 사정도 별반 낫지 않으며 이들의 상황 역시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는 등 보통 사람들을 위한 어떠한 활동도 권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억제된다. 대학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글쓰기란 오로지 사회과학인용지표(SSCI)에 들어갈 수 있는 학술논문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사회과학인용지표에 등재된 논문을 읽어보는 일이 전혀 없으며, 만약 읽어보고자 할 경우에는 요금을 지불해야만 한다. 정부가 인용지표의 발간 비용을 세금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도 말이다. 교수들이 학술 잡지에 글을 쓰는 일은 당연한 의무이지만, 논문이 어떠한 실질적 중요성을 지니는지 혹은 교수가 일반 대중도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지에 관한 고려는 전혀 없이 그저 학문적 글쓰기가 요구된다.

농촌의 상황이 특히 열악하다. 농촌에서 지적 탐구의 장으로서 유일한 대학들이 빠른 속도로 폐교하고 있으며, 지역 이슈에 관하여 철저하게 탐사 보도하는 저널리즘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일부 유권자 그룹, 특히 노년층 유권자들 사이에서 보이는 이른바 보수화 경향은 이들이 의지하는 지독한 저질 언론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들 유권자가 본래 편향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언론보도에 관한 작금의 접근법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측면은 기술을 필수적인 해결책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이다. 어떠한 과학적 증거도 없이, 보다 발전된 기술 형태로의 이행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것이 어떻게든 저널리즘을 본질적으로 개선할 것이라고 막연히 가정된다. 1950년대와 1960년대 한국의 잡지를 살펴보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자연 현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정부가 실질적으로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관하여 오늘날의 저널리즘에서보다 훨씬 자세하게 묘사되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 잡지는 오로지 인쇄에 의한 것이며, 이후 우리는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기술 기반의 미디어는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 매달리며 따라서 피상적인 읽기를 권장한다. 뇌를 자극하여 신경화학물질 도파민을 방출시키기 위해 이미지를 사용하고, 이에 따라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행위 속에서 감각적 충만함을 만들어낸다. 이와 같은 행위의 반복은 습관화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독자를 설득해야 할 시민의 한 사람이 아니라 속임수로 유혹해야 할 소비자로 보는 숨은 전제로 인하여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스마트폰과 경박스런 소셜 미디어 사용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고, 이들 수단이 현재 우리 사회를 이해하고 개선하기 위한 건강한 활동에 주로 활용되도록 해야만 한다. 기술을 긍정적인 공동체 형성이라는 보다 커다란 프로젝트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을 곁들인 카페 라테나 살찐 고양이 사진을 게시하는 대신 중요한 이슈에 관한 가치 있는 정보를 공유하는 데 소셜 네트워크를 활용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생명력 있는 미디어를 창조하는 작업은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프로젝트이다. 미디어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사람들이 확고하게 이해하고, 어려운 이슈를 거부하고 회피하려는 오늘날의 문화를 넘어설 수 있어야만 이 프로젝트가 추진될 수 있다. 대부분의 시민이 미디어를 통해 우선적으로 정보를 취득한다면 이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도 쉽지 않은 작업이 될 것이다.

건강하고 유용한 저널리즘 창조로 향하는 첫 걸음은 지역 수준에서 시작되어야만 한다. 지역 주민에게 관련 뉴스를 제공하는 지역 신문을 만들어야 하며, 이는 모든 주민에게 개방되는 지역 수준의 세미나와 결합되어야 한다. 세미나에서는 지역과 국가 및 국제적으로 중요한 경제사회 이슈가 분석적으로 다루어져야만 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논의에 사람들을 모으는 일이 뉴스를 다시 유의미하게 만드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한 세대에 걸쳐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에 바탕을 두는 광고에 익숙해진 상황에서는, 집중하는 방법과 자신의 삶에서 저널리즘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시민들에게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가정해야만 한다. 이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그리고 신문 기사를 어떻게 읽고 공유할지에 관한 교육으로 가능하다.

자신이 보는 바를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지역의 현안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를 사회에 제시하는 글쓰기를 초등학교부터 가르쳐 시민을 기자로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이를 기술하며 모든 시민의 편에 서서 활발하게 개선책을 제시하는 행위는 보다 커다란 저널리즘 공동체의 창조로 이어질 것이며, 이는 미래의 저널리즘을 지원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학교는 젊은이들에게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 사회, 문화적 변화를 스스로 배우도록 장려해야 한다. 주변 세계에 대한 탐사 보도와 사려 깊은 분석은 교육의 일부가 되어야 하며 교과서의 내용은 지역과 국가의 이슈와 직접적으로 연계되어야 한다.

양질의 저널리즘으로 가는 열쇠는 선정주의와 흥미위주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세계에 관한 과학적 접근법을 채용하며 동료 학생들과 협력하여 분석에 나서는 일이다. 이것이 교육 시스템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모든 중, 고등학교가 신문을 발행해야 하고, 신문기사 작성이 시험 성적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지역사회 수준에서 자기 각성과 적극적 행동의 새로운 문화가 장려되어야만 한다. 이는 저널리즘 르네상스를 뒷받침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습관의 변화가 하루아침에 일어날 수는 없다.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고, 이행기에 열리는 지역 수준의 세미나에는 시민들의 참여가 저조할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해내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정책과 분석에 시민들이 참여하는 유의미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면, 생각을 현실로 전환하는 일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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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미디어오늘)

시민 저널리즘을 뒷받침할 지역사회 공동체는 현재 거의 전무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웃의 이름을 알지 못 하며, 당면한 사회, 경제, 문화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이웃을 만나는 일도 거의 없다. 이들은 제3자가 생산하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소비자 심리에 사로잡혀 있다. 정보 생산자는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하여 분석하고 설명하며 철저하게 의문을 제기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역 대학과 언론인, 지역 사업가와 정부 관료들에게 중요한 이슈에 관한 논의를 이끌도록 하여 지역 사회 주민들이 활발한 지적 공동체의 일원임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상징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일단 시민들이 저널리즘을 생산하기 시작하기만 한다면, 글쓰기가 습관이 되고 (비판적 시각으로) 더 많은 정보를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신문이 죽어가는 이유는 온라인 콘텐츠와의 경쟁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문의 비 참여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신문의 콘텐츠가 일상의 삶에 유용하다고 생각할 때, 신문 보도가 그들이 살아가는 공동체의 활기 있는 일부라고 생각할 때 시민들은 그들의 지갑을 열 것이다. 스스로 제작한 책장이 돈을 주고 구입한 책장보다 더 소중하다. 저널리즘 역시 마찬가지이다.

광고 의존과 이윤 창출 저널리즘에서 벗어난 저널리즘 협동조합

한국은 광고 의존과 이윤 창출 저널리즘에서 벗어나 분석과 보도를 위한 협동조합 결성이라는 첫 걸음을 내딛을 수도 있다. 여전히 광고 수입에 중독되어 어려운 이슈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 하는 가짜 진보 미디어가 존재한다. 회원으로 뒷받침되는 저널리즘 공동체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야 할 필요 없이 중요한 이슈를 다룰 수 있다.

보도를 통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협동조합의 회원이 되기 위하여 비용을 지불하고, 자신이 염려하는 이슈를 다루는 세미나에 종종 참석한다면, 시민들은 그런 협동조합을 지원하고자 하는 진정한 동기를 가지게 된다. 그런 조직이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는 진보적인 비정부단체 세 곳에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나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자면 이 주장은 현실이 아니다. 한 달에 1만원을 지불하면 비정부단체의 회원이 되어 가끔 이메일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 단체가 개최하는 세미나의 주제를 제안할 수도 없고, 글을 기고하기도 쉽지 않으며, 단체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회원의 의견을 물어오지도 않고, 정기적인 회의에 초청하여 이웃에서 벌어지는 이슈에 관해 논의해 줄 것을 요청하지도 않는다. 회원이 고객이라는 식의 태도는 반드시 중지되어야만 한다.

향후 수년 안에 깊은 경제적 난관에 빠지는 시기가 찾아올 것이고, 지역 수준의 협동조합으로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언론사는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이른바 진보 미디어들은 그들의 존재가 가장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나는 예견한다. 왜 그런가? 문제는 미디어의 소유권과 관계된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사적으로 소유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소유자가 개방적인 태도를 지녀야 한다. 시장의 힘에 대응해야만 하는 압박 때문에, 가장 비판적이고 좋은 의도를 지닌 언론이라도 선정적인 글쓰기라는 뻔한 처방에 빠져든다.

가끔 기부를 함으로써 대안 언론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일부 부자들의 시혜에 의존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 아니다. (점점 신문을 아예 읽지도 않는) 일반 근로자들이 거의 관심도 가지지 않는 이슈들, 진보적 태도를 지닌 엘리트의 관심사만 다루는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소수가 아니라 모든 시민의 참여가 가장 중요하다.

생각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접근법은 새로운 미디어를 위한 미크로 주식 제도의 도입이다. 신문사의 소유권이 주식과 미크로 주식(주식을 쪼갠 일부)으로 나뉜다. 시민기자와 전문기자들은 기사를 쓸 때마다 기사에 대한 미크로 주식으로 보상받는다. 시간이 흘러 열 개나 스무 개 혹은 그 이상의 기사를 쓰면 그 회사의 상당한 지분을 갖게 되고, 기자들의 노력 덕분에 지분의 가치가 점차 증대된다. 신문사의 주식을 보유한 외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자들은 신문사로부터 급여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 신문사를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접근법을 통해 효율적이고도 독립적인 저널리즘을 한국에서 창출할 수 있다. 주요 신문사의 많은 언론인들이 이러한 접근법을 환영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유의미한 저널리즘의 발전에 핵심적인 정부의 역할

저명한 언론인 로버트 맥체스니(Robert McChesney)가 자신의 글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궁극적으로는 정부가 유의미한 저널리즘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광고비용을 지불하는 기업의 요구에 부응하는 분위기 창출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일반 대중이 활용할 수 있는 객관적 저널리즘이 되도록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일정한 형태의 정부 지원이 있을 때뿐이다.

언론 협동조합을 통한 시민의 기부가 정부의 자금 지원과 결합해야, 시민이 언제나 충분한 정보를 제공 받아 의미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중대한 이슈에 대하여 장기적으로 탐사보도를 펼치는 언론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금제공이 이루어질 수 있다. 정부 지원은 신문사들로 하여금 합리적 분업에 따른 전문성을 기를 수 있도록 한다. 똑같은 기자회견에 몰려가 신문에 동일한 기사를 써대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끝낼 수 있는 것이다. 정부의 자금지원으로 기자들은 특정 분야에 집중하여 진상을 파헤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자금지원과 이로부터 발생할 정치인의 언론 통제를 심각하게 우려한다. 엄격하게 통제된 관제 언론을 통해 여론을 조작했던 권위주의 정권을 경험했던 한국의 역사에 비추어, 이러한 우려는 전적으로 이해할 만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당연히 언제나 조심스러워야만 한다.

그러나 공교육과 과학기술 연구에 대한 정부의 자금지원은 이미 신뢰받고 있다. 이들 분야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이 완벽하게 성공적이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교육을 과격하게 민영화한 결과 문맹률이 치솟고 다수의 근로계층 주거지역에서는 학교가 전혀 제 기능을 하지 못 하는 미국과 비교하면 한국의 상황은 훨씬 낫다. 초등과 중등 및 고등교육기관을 통한 장기 교육으로 시민이 세계에 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정부는 교육에 막대한 투자를 해야만 한다. 저널리즘은, 사회에서 단기적으로 혹은 장기적으로 벌어지는 상황 전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리고 교육기관을 졸업한 사람들에게도, 과학적 방법론에 바탕을 두는 탐사보도를 통해 세심하게 생산된 정보를 제공한다.

교육과 언론은 민영화되거나 이윤을 목적으로 운영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에 관하여 객관적이고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모든 사람들이 이런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공공 서비스로 운영되어야만 한다.

정부의 자금지원을 통해 저널리즘이 포괄적이고도 장기적으로 공공선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일련의 견제와 균형을 도입하는 일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이런 시도는 가장 중요한 목표, 즉 직면하고 있는 중대한 이슈에 대한 분별 있는 논의에 시민들을 참여시키는 목표를 달성할 것이다. 정부는 장기 보조금을 통해 탐사보도를 수행하는 기자들의 급여를 지원할 수도 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그랬던 것처럼, 기자들에 대한 보조금의 분배 역시 전문가로 이루어진 위원회에서 결정하면 된다. 어쩌면 시민 대표가 정기적으로 모여 이 문제를 결정할 수도 있겠다. 지원금의 규모는 작지 않고 장기적으로 제공되며 심사를 받아야 한다. 현안에 관하여 광범위한 조사를 수행하고,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요약 보고는 물론 심층 보고를 제공하는 시민기자들의 급여와 사무실 및 장비에 정부자금이 제공된다.

이러한 제도가 부패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 사이에 탐사보도에 대한 새로운 문화가 확산되고 전문기자들의 탐사보도를 통해 이 문화가 강화될 수 있다면, 유의미한 저널리즘에 효과적으로 다가설 수 있을 기회로서 충분하다.

오늘날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부터 깨달아야만 한다. 저널리즘의 본질 자체를 바꾸는 폭넓은 개혁 외에 달리 선택할 방안은 없다. 시민들이 공상소설 같은 뉴스만 접한 나머지, 한국이 중국과 미국의 전쟁에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과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및 대학에서의 강의는 시민기자들이 담당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이다. 이는 기사작성만큼이나 중요하다. 시민회관 등의 장소에서 일반인들에게 경제와 문화, 기술과 사회 같은 복잡한 주제를 소개하는 일은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극히 중요하다. 이는 또한 기자들이 주제와 청중 모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기자와 언론에 자금을 지원하는 일은 정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데 핵심일 수밖에 없다.

저널리즘과 글쓰기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과정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피상적인 언론보도에 그리고 일반인은 전혀 참여할 수 없는 구조에 깊이 좌절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중대한 전환이 시작될 것이다. 심지어는 대안언론마저 전혀 투명하지 않고 접근불가인 경우도 있다. 탐사보도의 수행과 함께 현안에 관하여 시민교육을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꾸준하게 급여를 제공하는 강력한 미디어 플랫폼 몇 개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글쓰기와 읽기 및 토론에서 새롭고 진지한 문화를 창출할 수 있으며 이를 우리 사회 전체에 확산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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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랄 만한 객관성으로 잘 알려진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의 저널리즘 개혁에서 최고의 모델이라고 할 만하다.

정부의 자금지원을 통해 뛰어난 저널리즘을 구현했던 성공 사례가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BBC와 NHK가 좋은 사례이다. 한국의 경우, 정부가 운영하는 국민방송(KTV)에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이 방송국이 중대한 주제에 관하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기자와 학술인 및 시민기자에게 보조금을 지원할 수 있겠다. 국민방송을 한국의 대표적 언론사로 만들 수도 있다. 이와 동시에 연합뉴스 및 여타 방송사의 콘텐츠 개발을 감독하는 전문가 및 시민 위원회를 도입하여, 장기적 관점에서 국가의 실질적 중대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리랑TV의 사례가 가장 흥미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한국의 대표적 영어 방송인 아리랑TV는 일상 뉴스를 가볍게 소개하고 CNN이 그러는 것처럼 가벼운 뉴스거리를 압축적으로 송출하여 왔다. 그러나 알 자지라 TV, 러시아 투데이(RT), 혹은 BBC에서 볼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 있는 탐사보도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적절한 자금지원과 보다 높은 수준의 독립성이 보장된다면, 아리랑TV는 탐사보도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언론사가 될 수 있다.

자국의 문화적 뿌리를 찾아 나서고 앞날을 밝혀줄 전통을 재발견하기만 한다면, 한국은 저널리즘에서 최고가 될 것이다. 한국의 저널리즘 개혁에서 최고의 모델은 아마도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은 놀랄 만한 객관성으로 잘 알려져 있고, 기록과 편찬에 종사하는 사관들이 군주에게 그들의 가치를 끊임없이 입증할 필요 없이 급여를 받고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일련의 세심한 보호 장치 속에서 편찬되었다. 진실한 기록의 편찬을 담당했던 춘추관은 사료 편집에 관여하려는 왕이나 고위 관리의 시도에 저항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을 한국 저널리즘의 생태적 기반으로 활용하고자 한다면, 조선의 진실한 역사 기록에 대한 근본적인 재조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미래에 관한 영감을 탐색할 장소로서 한국의 과거를 돌아보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고무적일 수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언론조작에 앞서, 공공선을 위한 객관적 역사 서술의 어마어마한 전통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한국의 언론인들은 새로운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수, 2018/03/21-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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