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전 세계가 놀라워한 이 역사적 사건은 그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JTBC의 태블릿PC보도가 있었던 작년 10월 24일부터 탄핵결정이 있기까지의 넉 달동안, ‘민주공화국’이라는 다섯글자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추운 겨울 주말마다 거리로 나와 불을 밝힌 자랑스러운 국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기에 헌정사상 초유의 불행한 일은 한편으로 87년 민주항쟁으로 탄생한 헌법의 정신을 우리 공동체에 깊이 뿌리내리게 하는 미래지향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임은 경천동지할 국정농단의 일부분이 조금씩 드러났던 지난 9월경부터 이를 이슈화하기 위하여 형사고발의견서를 준비해 오던 중, 10월 24일 언론 보도가 있자 담당 회원들이 밤을 새워 수정하여 발표, 사건의 본질을 언론과 국민들에게 알리기 시작한 것을 필두로 회원 비상시국회의를 통한 ‘박근혜정권퇴진과 헌정질서회복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 70명에 가까운 회원들이 헌신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저마다 생업이 있는데도, 특위 위원들은 매주 회의에 주말 집회에 참석하며 필요할 때마다 의견서와 성명서를 작성하여 여론을 이끌어가고, 각종 고발장과 고소장을 작성, 제출하였습니다. 특위위원들 뿐만 아닙니다. 20번의 촛불집회에 서울 뿐 아니라 전 지역의 회원들이 적극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주었으며, 사무처는 카드뉴스를 제작배포하고, 국민들에게 탄핵심판절차 및 상황에 대해 제대로 알리기 위한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 13회에 걸쳐 성공리에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 결과, 몇몇 아쉬운 점은 있으나 박근혜 대통령과 국정농단자들에 대한 탄핵 및 사법절차는 지금까지 순조로이 진행되었고, 촛불 시민들은 우리 모임의 활동에 대해 깊은 감사와 격려,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성과는 회원 여러분들의 자발적인 헌신과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이제 모임은 새로운 정부의 출범을 눈 앞에 두면서 그간 넉달 여에 걸친 ‘퇴진특위’의 활동을 마무리하고 우리 앞에 놓인 과제들을 하나씩 풀어가려 합니다. 급하게 세월호 진상규명부터 검찰개혁, 범죄자 수익 환수법에 이르기까지 중요하고도 적지 않은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의 산을 넘어 또 다른 산을 두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간의 퇴진특위 활동을 뉴스레터 특별호로 엮어 회원 여러분께 보내드립니다.
회원 여러분도 기쁘게 읽어 주시기를 바라며, 참여한 회원들에게 격려의 인사 보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모임은, 불의에 결코 굴하지 않고 우리 헌법의 역사적 순간 순간을 만들어 온 국민들 곁에서 새로운 민주주의, 새로운 사회질서를 수립하는 걸음을 늘 함께 할 것입니다.
어느 해보다도 희망어린 정유년, 신입회원 이예리 변호사입니다. 지난 2017. 1. 19. 친구 유원정 변호사를 만나던 날 마침 인연이 닿아 여성인권위원회 1월 월례회의를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미가입자가, 월례회에 참석해도 되는지 세미나가 있다하니 무엇인가 준비해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긴장감에 손톱 밑을 뜯자 유원정 변호사는 “준비물은 몸과 마음”이라 하였고, 이에 용기 내어 미뤘던 민변 가입을 행하고자 친구를 따라 나섰습니다.
살짝 늦은 시간에 도착하여 후다닥 유인물을 집어 들고 빈자리를 찾아 앉았습니다. 위원장님을 시작으로 자기소개가 시작되었고, 제 차례가 되어 친구 따라 여성위 온 사연으로 인사를 드렸습니다. 인사가 끝이 난 후 본격적인 월례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위원회 활동 보고가 있었습니다. 여성인권위원회에서는 가족법연구팀, 빈곤과 여성노동팀, 여성폭력방지팀과 이주여성법률지원단 등 각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변호사님들을 뵈면서 적극적이고 온화한 목소리를 가진 분들이구나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1월 세미나 주제는 ‘디지털 성폭력’이었습니다. D.S.O.(디지털성폭력대항단체)의 하예나 대표는 약간 격양된 목소리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설명해나갔습니다. 디지털 성범죄가 사회적 문제로 인지된 사건부터 디지털 성범죄의 현황 및 그에 대한 수사당국의 안일함 등 제가 살고 있는 세상의 이야기가 아닌 것만 같았습니다. 작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술이나 약에 취한 여성들을 상대로 게임을 하듯 강간을 하고 여성의 몸에 이를 인증하던 소라넷에 대해 방영되었던 내용들이 떠올랐습니다. 세미나를 들으면서 프로그램을 보면서 느꼈던 끔찍함과 당혹감이 다시 느껴졌습니다. 하루에도 수 십 개씩 성범죄 영상이 올라오고, 그 속에는 실제 강간 영상이나 아동 청소년 영상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발표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세미나에 참여하며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떠한 시선에 노출되는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을 지나가는 모르는 여성도 강간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이를 영상으로 찍어 타인과 돌려보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는 시각은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사회문제이며, 더욱 끔찍한 문제는 이러한 영상들이 부지기수로 쏟아져 나오지만 수사당국에서는 어떠한 예방책이나 적극적인 수사 방법을 강구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보통 디지털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가벼운 어감이 들었지만,이제는 그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딸이고 누나이며 동생인 화면 속의 여성이 2차, 3차 피해를 입지 않도록, 이러한 영상을 찍고 유포하는 이들이 적절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디지털 성범죄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다는 생각이 든 세미나였습니다.
D.S.O.는 수사당국에서 하지 않은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D.S.O. 회원들은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그 수많은 동영상을 보고 추려 신고 및 민원을 제기하고 있었고, 그 존재만으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있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사명감을 가지고 열일하고 있는 D.S.O.의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친구 따라 갔던 여성위 월례회의에서 따뜻한 변호사님들도 뵐 수 있었고, 사회문제 및 그에 대한 다양한 법적 대응도 공부 할 수 있어서 정말 뿌듯한 시간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지방근무로 인하여 매달 열리는 월례회를 찾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래도 자주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봄을 알리는 입춘이 지난 2월의 어느 날, 민변 가족들에게 전북지부의 소식을 알리게 되어 매우 반갑고 또 영광입니다. 2016년은 민변전북지부의 많은 변화가 있던 한 해였습니다. 민변 전북지부 창립 최초로 회원수가 30명(특별회원 2명 포함 31명)이 넘는 양적인 발전이 있었으며, 8월에는 전북지부를 이끌어갈 새로운 임원단(지부장 : 김현승, 부지부장 : 김석곤, 사무국장 : 박재홍)이 선출되어 여러 운동들을 실행해보고자 하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해 준 – 인권감수성 향상 프로젝트 “공감과 연대”
지난 10월 29~30일 우리 민변회원들과 전북지역 로스쿨 인권법학생들이 “공감과 연대”를 주제로 함께 참여한 인권감수성 워크샵은 회원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공기 좋은 완주군 리조트에서 인권 감수성, 가정폭력, 언론과 민변, 그리고 지역 사회의 통일운동과 민변이라는 주제로 전문적이고 열성적인 강사님들로부터 좋은 강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강의 후에 마련된 뒤풀이 시간은 민변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함께 세대를 뛰어넘는 고민을 나누며 회원과 인권법학생들 간의 돈독한 우정을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촛불집회를 통해 시민의 목소리를 듣다
어지러운 시국 속에서,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국민들과 함께 하고자 우리 전북민변회원들도 매주 토요일 5시 전주 한옥마을 앞 관통로 사거리에 모여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습니다. 때론 비가 왔고, 때론 눈이 왔지만 민변의 깃발은 언제나 힘차게 펄럭였습니다. 촛불집회를 통해 민변회원 뿐만이 아니라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이들의 외침에 우리 민변이 더욱 더 귀를 기울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좋은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또, 집회 후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치맥을 하며 회원들끼리의 우정을 다졌던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2016년을 떠나보내며 2017년 새희망을 보다
유독 국민들을 실의에 빠지고 좌절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많았던 2016년(병신년)을 떠나보내는 송년모임이 12월 14일에 있었습니다. 20명에 가까운 많은 회원들이 참석하였고, 김현승 지부장님의 2017년 민변전북지부의 계획 및 앞으로의 활동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올해 민변전북지부가 많은 양적·질적 성장한 만큼 내년에는 소송 구조와 공동변론활동에 더욱 많은 참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지부장님의 말씀에 한편으론 어깨가 무거워지면서도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차오르기도 하였습니다. 미리 준비된 식사와 음주를 하며 회원들 간의 덕담을 주고받고 사무국에서 준비한 송년 선물까지 한가득 받아 몸도 마음도 따뜻한 송년회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2016년 민변전북지부는 지부 공동 변론활동으로 김승환 교육감 사건, 한상렬 목사 보안관찰법 위반 사건 등을 수행하였으며, 소송구조로는 남원평화의 집 고소대리 사건, 자림원 사건 등 다수의 사건을 맡아 수행하였고 고종윤, 박일지 회원을 주축으로 시민법률학교 강연과 같은 외부활동에도 충실히 하였습니다. 2017년에는 대한민국의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할 것을 전국의 민변회원 분들게 약속드리며 이상으로 민변전북지부의 2016년 하반기 소식지를 마치려 합니다.
과거사청산위원회는 2017. 2. 9. 19시 2월 월례회의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장소가 어디였는지 아시나요? 바로 ‘이태원’이었습니다. 살짝 지겨운(?) 서초동을 벗어나, 색다른 장소에서 맛있는 태국 음식을 곁들이며 회의를 진행하였네요.
현재 과거사위원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대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특히 한일정상전화회담에 대한 정보공개거부처분 취소소송, 한일외교장관회담 관련 정보비공개처분 취소소송, 위안부 합의 발표 위헌확인소송 등을 제기하는 등 위안부 합의의 부당성을 알리고 잘못된 합의결과를 무효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번 월례회에서는 제주 4·3 70주년을 1년 앞두고 향후 4·3사건의 온전한 청산을 위하여 기여할 방안,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조사단 참여 방안 등에 대하여 논의하였어요. 아픈 역사에 공감하면서, 우리 사회에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된다는 사명감으로 뭉친 과거사위원회입니다.
주제가 ‘역사’라고해서 어렵고 무거운 분위기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 과거사위원회의 월례회 끝에는 언제나 뒤풀이가 자리하고 있답니다. 이번 월례회는 특히 이태원에서 진행된 만큼, 독특하고 색다른 분위기의 장소에서 맛있는 술을 곁들일 수 있었습니다. 평소 호프집, 포장마차, 막걸리집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던 위원님들의 눈이 초롱초롱하네요. 즐거운 뒤풀이였습니다.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변호사들이 모여 있는 곳. 언제나 즐겁고 유쾌한 술자리와 대화가 있는 곳. 과거사위원회는 언제나 신입 회원 여러분들을 격하게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언제든지 과거사위원회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2017. 2. 8. 쌀쌀한 저녁. 민변 광주전남지부에서 정기총회가 열렸다. 총회에는 대략 30여명의 회원이 참석하였고, 이 날 두 명의 신입회원이 가입하여 총 53명의 성원보고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총회가 시작되었다. 최근 광주지방변호사회 회장으로 당선된 최병근 변호사님과 정연순 회장님의 인사말에 이어 2016년 주요 안건과 사업에 대한 보고와 결산 및 세세한 평가가 이어졌다. 광주전남지부 총회를 위해 본부에서는 7명이 내려갔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신입회원에 대한 가입 승인과정이 본부와 달리 매우 엄격하다는 것이었다. 이 날 승인된 두 명의 신입회원은 가입신청서 제출 후 40여분에 이르는 집행부의 심층 압박 면접을 견뎌야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신입회원에 대한 보증 절차를 거쳐야 했고, 승인 전 표결을 위한 질의를 받은 다음, 6인 이상의 반대가 없으면 그제서야 비로소 광주전남지부의 정식회원이 되는 것이다! 이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는 의미로, 지부에서는 회원임을 인증하는 커다란 벽시계를 선물로 증정한다. 그 시계에는 “민변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다고.
총회 당일 험난한 과정을 거쳐 신입회원 승인을 받고, 인증 시계를 수여받은 길탁균, 김춘호 변호사님
총회자료집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각종의 활동들이 지난 한 해 동안 지부가 얼마나 분주하게 공익을 위해 헌신하였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각종 사업보고에 이어지는 정량평가와 정성평가는 아주 세심하고 날카로웠다. 가령 2016. 공익소송기획에 대한 정량평가의 경우 5점 만점을 기준으로 공익소송 활동은 4점, 배당은 2점, 사건발굴은 4점을 부여받았는데, 양질의 사건을 발굴한 것이 높게 평가되었다. 회원사업의 보고는 회원 상호간 친목도모의 경우 배점은 7점이나 그 평가에 있어서는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점수를 줄 정도는 아니라고’ 자평. 또한 활동을 하면서 회원들이 자연스레 만나는 과정에서 인생의 동반자가 됐거나, 회원과 지부에 관심이 많은 비회원 간에 곧 결혼할 커플이 있었는데, 이러한 인연 뒤에는 회원사업단이 의미 있는 인과관계를 끼쳤다며 회원사업단의 업적으로 자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소 억지스러운 자찬을 의식해서인지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인과관계가 없다는 측의 항의를 우려해 각주처리를 하면서, 막연하나마 인과관계에 대한 근거를 곁들이며 설명한 것은 마치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게 하는 나름의 설득력이 있어 어느새 수긍되었다.
재미나면서도 따뜻한 정감이 느껴지는 총회자료집만 봐도 광주전남지부의 활동과 분위기가 얼마나 가족적이고 화목한지 추운 날씨 속에서도 절로 훈훈함이 느껴졌다. 6시가 넘어 시작된 총회는 8시로 넘어가자 식사를 위해 뒷풀이 장소로 이동했다. 숨소리마저도 크게 들릴 정도로 근엄했던 총회와 달리 뒷풀이는 웃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즐거웠다. 지부 사회는 총회며, 뒷풀이며 정인기 변호사님 전담으로 보였는데, 진행이 깔끔하고 착착 진행되는 느낌에 감탄스러웠다. 김상훈 지부장님은 귀여운 얼굴을 더 돋보이게 하는 덧니가 매력적이어서 보기만 해도 웃음이 삐져나오곤 했는데, 그 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부장님의 그 덧니 뒤에는 또 다른 이가 숨어있는 게 아니라 익살스러움과 유머스러움이 한가득 자리 잡고 있음을. 특히 본부에서도 시급히 도입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 건배사 전의 지부장님의 호명 3창은 분위기를 흥겹게 달아오르게 하면서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었고, 서 있는 사람으로서는 짧게나마 건배사 멘트 준비시간을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친구따라 조건 없는 기부를 거침없이 하시고, 자그마한 얼굴에 우병우와 유재석, 최근 대한변협 회장으로 당선된 그 분의 얼굴까지 두루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그맨보다 더 웃겼던 강성두 변호사님, 지부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선한 아우라를 가진 임태호 변호사님, 소고기도 아닌데 겉만 익었다 싶으면 마구 먹어치우는 제 앞에서 연신 고기 굽느라 바빴던 박인동 변호사님, 가장 지부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도 부족했다며 활동이 뜸한 회원을 위축시키게 한 송창운 변호사님, 너무도 아름다우신 임선숙 변호사님, 광주지부 여성회원들은 어찌 다 그리 고우신지요. 이름만 접했을 때는 원로변호사님 같은 느낌이었는데 실제는 최강 동안인 이상갑 변호사님. 그가 있어 광주가 낯설지 않은 동기 김정우 변호사님. 지부를 든든히 지키고 있는 두상이 잘생긴 전직 락커 박상희 간사님 등 한분 한분이 그렇게 정겹고 그 시간이 너무도 행복했다.
오른 쪽 세 번째가 “웃기려고 하는 게 아닌데 여기저기 빵빵 터트리는 놀랍고 신비로운 일”(박상희 간사)을 일으킨다는 강성두 회원. 광주지부 제공
광주에서 발견한 것은 지부 회원들의 따뜻함만이 아니었다. 그 날 식당은 낙지마을로 예정돼 있었는데 실제는 낙지가 아닌 메뉴에도 없는 생뚱맞은 삼겹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낙지전문점인 그 식당에서 맛본 삼겹살은 그 동안 먹어 본 삼겹살 중 가히 최고라 말할 수 있었다. 역시 맛과 멋의 고장 광주는 남달랐다. 전공이나 전문이 아니더라도 최고의 맛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아마도 광주지부의 변호사들 또한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전문영역뿐 아니라 때로는 낯설고 막막한 공익사건을 마주할 때도 최고의 실력과 헌신으로 준비한다는. 광주는 이런 전통과 습관이 모든 곳에서 자연스레 베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으면서도 불의 앞에 당당했던 민주화의 성지 광주는 지부 회원의 면면 속에 그대로 담겨있었다. 따듯한 추억 한아름을 선물해 주신 광주전남지부 회원여러분, 정말 감사드리고, 5월 총회에서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이야기 둘 : 광주전남 지부 속 공익전담 이소아 변호사의 사는 이야기
이혜정 : 오랜만입니다. 모르는 회원들도 있으니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이소아 : 안녕하세요?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의 이소아 변호사입니다. 저희 단체는 수도권을 벗어난 지역, 특히 인권의 도시 광주에서 공익인권 전업으로 법률지원을 하는 비영리단체이구요. “존엄과 권리를 상실한 이들 곁에서 바라보는 귀, 듣는 눈으로 들어 법의 목소리로 세상에 전달하고자“하는 지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혜정 : 서울에서 활동하다 광주로 가셨는데 광주에서의 근황은 어떤가요.
이소아 : 2013년 광주에 내려오면서 개인적으로는 정말 많은 일이 있어서 정신없이 지냈어요. 친정 부모님 두 분이 모두 편찮으셔서 간병을 해야 했고, 지난 가을에는 아빠가 돌아가셨구요. 아이를 낳게 된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생활에 있어 변수는 더 많아지는 것이니까요.그래도 뭐 어찌어찌 다~ 어떻게 지내왔어요. 주변 분들의 도움도 컸고, 신랑의 도움도 컸구요.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오히려 미리 걱정하는 버릇이 줄어들었어요. 미리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두더지와 같은 근시안으로 살기로 했어요. 닥친 일을 하나씩 해나가는 걸로. 일적인 측면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지요. ‘동행’이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으니까요. 처음 이 일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부정적인 전망도 많았어요. 광주는 도시 자체가 생산 도시가 아닐뿐더러 후원에 대한 시민의 인식도 상당히 박하거든요. 또 변호사가 왜 굳이 비영리단체의 상근변호사로 일하냐, 그냥 지금처럼 자신의 사무실에서 좋은 일하면서 지내면 되지 하는…. 그런데 사실 저는(이런 말 하면 겸손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뭔가 잘될 것 같은, 잘 해낼 것 같은 자신이 있었어요. 제가 광주에 내려와서 계속하여 접촉했던 인권단체들은 법률전문가의 결합에 매우 목말라 하고 있었고, 지역에도 지역 고유의 여러 가지 인권 이슈들이 있었거든요. 저는 서울에서 계속 단체 내 상근변호사로 일을 했었기에 이를 어떻게 하면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고 있고, 이를 잘 엮어낸다면 시민들에게도 후원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현재는 약 170명 정도의 후원회원들이 계시고 월 약 300만원 정도의 정기 후원금이 들어오는 단체로 성장했어요. (지역에서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이 정도 규모로 성장한 비영리단체는 없답니다)
이혜정 : 와 대단하시네요. 광주에서 공익전담으로 전업하게 된 과정과 동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소아 : 제가 올해 9년차 변호사인데, 해마루 광주분사무에서 근무했던 1년 반 동안만 로펌에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단체 내 상근변호사로 있었어요. 그러니 해마루에서 공익전담으로 전업을 했다기 보다는, 공익전담으로 다시 복귀를 했다고 보시면 되어요. 저는 연수원을 수료하자마자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성매매피해여성을 위한 ‘다시함께센터’에서 일을 했고 아파서 잠깐 쉬다가 2011년 5월에 민변에 상근변호사로 들어갔었지요. 왜 공익전담으로 일을 하냐고 물으신다면…. 그게 저한테 재미있고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얼마 전에 제가 2004년도에 적었던 일기장을 보고 웃었던 적이 있어요. 당시는 제가 사법시험 1차에 여러 번 떨어지고 마음속으로 굉장히 지쳐있던 상황이었는데, 1년 후, 5년 후, 10년 후, 30년 후, 계획을 써놨더라구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왜 하고 싶은가, 어떻게 이룰 것인가 순으로….5년 후 계획이 단체 상근변호사로 일한다, 10년 후 계획이 뭐더라… 이거랑 비슷한 거였는데… 아무튼 그때 왜 하고 싶은가를 적는 칸에 “의미가 되고 싶어서”라고 써있더라구요. 당시에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상태라 인정욕구가 정말 강해서… 그런데 지금은 이유를 바꾸고 싶어요. “재미있게 살고 싶어서”라고.
그리고 광주에서 변호사가 상근하는 비영리단체를 만든 이유는 간단해요. 필요하니까. 그리고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광주에 내려와서 1-2년 동안은 앞에서 말했던 개인사 때문에 돈이 좀 많이 필요해서 로펌에 잠시 있었지만, 광주에 내려오면서부터 제 마음 속에 광주의 공감 같은 단체를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지요. 그래서 광주지역 인권단체 현황을 계속 알아봤었어요. 그냥 먼저 전화하거나 찾아가서 저를 알리고 함께 일할 부분 있으면 함께 하자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1년 반 이상 네트워킹을 쌓아갔어요. 그러던 중 마침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공익전업변호사 자립지원사업 공모전을 하는 거에요. 2년간 변호사의 급여를 어느 정도 지원해주는 거에요. 기회다 싶어서 바로 단체를 만드는 것을 실행에 옮겼지요. 실질적으로 단체를 만드는 부분은 ‘희망법’이나 ‘감사와 동행’, 법률사무소 ‘보다’, 이주민센터 ‘친구’등에 의견을 구하면서 진행했구요. 결국 저 혼자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이혜정 : 그러면 공익 전담을 결정했을 때나, 현재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어려움이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공익 전담을 결정했을 때 어려움은, 제가 광주에서 공익전업을 다시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무래도 신랑이 약간 당황했었어요. 전보다 줄어들긴 했지만 엄마 간병비 등 계속 고정적인 목돈이 들어가거든요. 그래도 결국 흔쾌히 받아들여줬고, 이제 시아버님과 시누이도 저희 단체의 든든한 후원자세요.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는 법원에서 실무자가 화난 목소리로 전화해서 변호사를 찾을 때, 제가 변호사라고 했더니 목소리 톤이 바뀐다거나… 하는. 단체의 실무자가 없어서 모든 실무를 제가 직접 하는데, 제가 숫자에 어두워서 홈택스 등 세무 신고에서 오류가 날 때. 뭐 그럴 때.
이혜정 : 현재 주로 진행하는 공익 사건은 어떤 사건들인가요.
이소아 : 장애인권 관련해서 근육병 환자가 노인장기요양등급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활동보조서비스를 신청할 수 없게 되어있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활동보조서비스 변경신청 거부처분 취소소송, 성매매 피해 여성에 대한 사건들 중 특히 태국 여성들이 한국에 데려와져서 성매매를 하도록 강요당하는 일들이 생기고 있는데 그 여성들에 대한 지원, 뇌전증 환자 장애등급변경취소소송, 결혼이주여성의 이혼사건, 이주노동자의 난민불인정처분취소소송, 장애여성에 대한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원, 국가보안법 형사변론, 세월호 현장에서 70일간 근무하다가 자살하신 진도경찰분 유족의 유족보상금거부처분취소소송 등…. 뭐 지금 생각나는 건 이 정도입니다. 올해에는 주로 장애인권분야와 이주노동분야에 집중하려고 해요. 농업법률분야도 신경 쓰고 싶은데 아직 여력이 없네요.
이혜정 : 다양한 사건들을 두루 하시네요. 광주에서의 공익사건 현황이나 루트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이소아 : 주로 단체들을 통해서 진행돼요. 성매매피해여성상담소, 성폭력 상담소, 장애인권센터,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발달장애지원센터, 이주노동자 상담소 등. 저희 단체가 상담소처럼 붙박이로 상담하는 인력이 배치될 수는 없는 구조여서 개인이 직접 찾아오시는 경우는 아직은 잘 없어요.
이혜정 :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이소아 : 2014년 겨울 여수의 한 유흥주점에서 여성종업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이 사건은 원래 조용히 묻힐 뻔했는데, 함께 일했던 동료 여성 9명이 업소를 나와 광주에 있는 언니네 상담소에 제보를 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어요. 보통 다른 성매매 관련 사건의 경우 동료들이 이렇게 증언해주지 않아요. 왜냐하면 어찌 되었건 간에 자신의 생계가 달렸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사건의 경우 9명의 여성 모두가 업주의 끈질긴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고 일관되게 증언해 주었어요. 9명의 여성은 수사과정에서만도 각 2-3회 조사를 받았고, 재판 과정에서도 업주가 혐의를 부인해 모두 법정에서 2-3시간씩 증언을 했었거든요. 그 과정이 언니들에게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증언을 해주었어요. 그래서 업주들도 상당한 처벌을 받았구요.
‘여수 여성 사망사건’에서 흔들림 없이 증언했던 ‘언니들’의 손. 이소아 변호사 제공
이 사건은 제가 일을 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여성들이 용감하게 증언을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사건이어요. 그래서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그리고 진도 경찰분 유족보상금거부처분취소소송 1심에서 승소했을 때, 1심만 거의 2년이 걸렸는데요. 당연하고 마땅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심리적 부검이라는 입증방법에 대해서 고민도 많이 하고 여러 가지 자료도 많이 찾아보았던 사건이라 보람이 되는 사건이었어요. 아직 2심이 진행 중이긴 하지만요.
이혜정 : 활동가와 변호사 그 경계선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차이가 있나요?
이소아 : 변호사와 활동가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거죠. 활동가는 그 문제에 전면적으로 결합하게 되는 부분이 있어요. 활동가로서 당사자, 단체 분들과 함께 가며 일을 진행하는 방식이 저와 맞아요. 반면 변호사로써 거리두기가 필요한 경우도 있어요. 그래야지 나의 전문성이 인정받고, 내가 제출하는 서면에 힘이 실리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이 부분의 강약을 조절하기가 참… 힘들어요. 그럼에도 당사자, 단체 분들과 ‘함께’ 가는 것이 좋아요. 법률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거든요. 저는 ‘내가 이 문제 전체를 해결하겠다.’라는 마음으로 일하지는 않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해야 할 부분을 다하는 것일 뿐이지, 그 결과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이혜정 : 광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이소아 변호사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든든하네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혜정 : 저희 단체가 광주에 있긴 하지만 저희가 다루는 인권 이슈들이 단지 광주에만 한정되는 문제들이 아니에요. 장애인권, 이주노동자 인권도 마찬가지로 저희가 다루는 문제들이 결국 관련한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일들이더라, 그래서 인권의 연대의 중요성에 대하여 새삼 깨닫게 돼요. 광주전남지역에 사는 분이 아니더라도 저희 단체가 다루는 문제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후원을 해주시길 바래요. 여러분의 후원이 작지만 커다란 변화를 이끌어낼 원동력이 될 것이거든요. 후원신청은 www.companion-lfpi.org 홈페이지에서 온라인으로 간편하게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유년 새해가 시작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월에 접어들었네요. 새해에 세운 계획들 잘 실천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아동인권위원회는 1. 17.에 열린 새해 첫 월례회를 통해 지난 한 해를 평가하고, 올 한해의 활동 계획을 세웠습니다.
작년에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한 꼬꼬마 신생위원회인 아동위는 지난 한 해 동안 좌충우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회원들의 뜨거운 열정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올해에는 작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내실을 다지기 위한 심도 있는 학습을 진행하고, 외부적으로 타 아동인권 시민단체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합니다.
그 일환으로 지난 2. 21.에 열린 두 번째 월례회에서는 출생등록제도에 대해 알아보고, 그동안 진행해온 출생신고 사례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그림으로 보는 아동권리협약’ 중 7조와 8조 부분. 아동권리협약 제7조는 ” 아동은 출생 후 즉시 등록되어야 하며 출생 시부터 성명권과 국적 취득권을 가지며”, “당사국은 이 분야의 국내법 및 관련국제문서 상의 의무에 따라 이러한 권리가 실행되도록 보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유엔아동인권협약을 비롯한 각종 국제인권규범들은 “아동이 출생 후 즉시 등록될 권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국내에는 출생신고 밖에 존재하는 수많은 아동들이 있습니다. 월례회에서는 현행 가족관계등록 법령과 행정사무 관행은 아동의 인권보장을 위한 측면보다는 국민의 신분정보의 관리 및 공시라는 행정적 편의에 더 우위를 두고 운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고, 출생신고 될 권리는 아동의 생존에 직결된 필수불가결의 권리인 만큼 조속한 시일 내에 보편적 출생등록 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데에 회원들의 공감을 이끌어 냈습니다.
한편 아동위 청소년팀은 2. 15. 성명을 통해 각 당이 어떠한 합리적 이유 없이 오로지 정치적 계산으로 18세 청소년들의 선거권 보장을 연기하는 결정을 한 것에 대해 규탄하고, 유예 조항 없이 즉시 18세 청소년들의 선거권을 보장하도록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을 촉구하였습니다. 청소년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는 UN아동권리협약 제12조 제1항과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25조에서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인권인 만큼 아동위는 청소년들의 선거권 보장을 위해 앞으로도 지속적인 목소리를 낼 것입니다.
ⓒYTN
아동의 출생등록제도와 청소년 선거권 보장 외에도 아동위가 올 한해 중점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주제는 입양제도 개선에 관한 것입니다. 작년 한 해만 해도 대구 입양아 뇌사사건, 포천 입양아 학대사건 등 입양 아동에 대한 아동학대 사건이 수차례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었는데요, 아동위 회원들은 그동안 대구 입양아 아동학대 사망사건 진상조사위원회에 참여하여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한편, 현행 입양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향후 예정된 월례회에서는 위 진상조사의 결과를 공유하고, 현행 입양제도의 문제점과 그 개선방안에 관한 공부모임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외에도 아동위는 올 한해 소년사법 제도 개선, 아동에 대한 보편적 복지, 보육제도 개선 등 다양한 영역의 아동인권 개선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 나갈 것입니다. 아동인권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아동위의 문은 활짝 열려 있으니 언제든 서유란 간사님이나 총무변호사님이신 김영주 변호사님께 문의해 주세요.
회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따스한 햇볕이 곧 다가올 봄을 기대하게 만드는 2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계속될 것 같던 추위도 어느덧 지나가며 봄이 오는 것처럼, 적폐를 청산하고 새 시대를 만날 희망이 움트는 시기입니다.
디지털정보위원회는 위원회 내부 역량을 강화하여 산적한 현안에 대응하고자 지난 1월 12일에 있었던 1월 월례회에서 위원회 내부 스터디·IT 전문가 초청 강연·각종 현안에 대한 발제를 골자로 하는 2017년 주요 내부 사업계획들을 통과시켰습니다. 그에 따라 지난 2월 2일에 진행된 2월 월례회에서 김우중 위원의 “공인인증서의 문제점” 발제, 윤영태 위원의 “‘단통법’의 문제점” 발제로 우리 생활 속 깊게 자리 잡은 정보인권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어서 김하나 위원의 위원회 소관 판례동향 발제, 이광철 위원장의 디지털증거의 증거능력 관련 하급심 판례 발제, 조지훈 부위원장의 위원회 소관 법률에 대한 발제가 이어지며 밀도있는 월례회를 마쳤습니다.
아울러 위원회에서는 사업 진행과 공부뿐만 아니라 위원들의 친목 도모와 단합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3월 중으로 경기도 인근에서 1박 2일의 MT를 진행할 예정으로, 이 글을 보시는 회원분들께서 함께 와주시면 더욱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빈번한 개인정보의 유출부터 국가기관의 사찰의혹까지, 정보인권의 문제는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디지털정보위원회는 정보인권을 옹호하는 전문가들의 모임으로 인권옹호의 새로운 영역을 함께 개척하실 신입 회원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민변의 미래가 될 디지털정보위원회에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가입 부탁드립니다.
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면에서 제가 소송대리하였던 부산시 동구 소재 일본영사관 앞 집회 금지 처분 효력정지 신청 사건에 관하여 몇 글자 써보려고 합니다. 때는 2016년 12월 29일 목요일 16시 경. 박근혜정권퇴진 부산운동본부(이하 ‘신청인’)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틀 뒤인 31일 토요일 집회 때 서면에서 본집회를 한 후 일본영사관 앞을 지나 그 인근에서 정리집회를 하고자 집회신고를 했는데 부산광역시지방경찰청장(이하 ‘피신청인’)이 일본영사관 인근 100미터 구간에서의 집회는 금지한다는 집회 일부 금지 통고를 해 왔으니, 이에 대한 효력정지신청 소송대리를 맡아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연합뉴스TV
그간 일본영사관 앞에서는 작은 규모의 집회·시위가 있어 왔지만, 피신청인이 집회를 금지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피신청인이 이러한 반응을 보인 것은 아마도 집회 신고 하루 전 날인 12월 28일 한 시민단체가 일본영사관 앞에 설치한 소녀상을 부산 동구청이 강제로 철거하고 압수까지 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영사관 앞에서의 대규모 집회·시위가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이유로 보입니다.
집회신청서와 피신청인의 금지통고서를 보내달라고 하여 받아 보니, 신청인 측은 대규모 집회가 예정된 2016년 12월 31일뿐 아니라 이후 1주일 동안을 집회일시로 기재하여 일본영사관 앞을 포함한 장소에서 행진을 하겠다고 신고를 하였고, 이에 피신청인은 행진구간에 일본영사관 경계 지점으로부터 100미터 이내의 장소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 제11조에 따라 당해 구간에서의 행진을 금지한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연말인 31일 토요일의 대규모 집회 이후에도 같은 장소에서 시민들이 집회의 자유를 누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효력정지신청 사건에서 패소하여 12월 31일 토요일의 대규모 집회 시에 일본영사관 앞 경로에서의 행진이 금지된다면 신청인 측에 큰 타격이 될 것이라 판단하여, 우선 토요일 대규모 집회에서 행진이 가능토록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신청인 측에, 당해 구간 행진 예정시간으로부터 48시간이 되기 전에, 집회 개최일시를 ‘2016년 12월 31일 18시부터 22시까지’로 한정하여 재차 집회신고를 하도록 권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집시법 제11조 제4호 다목에서는 ‘외교기관의 업무가 없는 휴일에 개최하는 경우로서 외교기관 또는 외교사절 숙소의 기능이나 안녕을 침해할 우려가 없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외교기관의 경계 지점으로부터 100미터 이내의 장소라도 집회·시위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휴일인 토요일의 집회까지 제한할 수는 없다는 주장에 초점이 맞춰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피신청인은 신청인 측의 새로운 집회 신청에 대하여 즉답을 하지 않았고, 다음 날인 30일 금요일 정오가 되어서야 재차 금지 통고를 해 왔습니다. 같은 이유였습니다. 일본영사관은 외교기관으로 집시법 제11조에 따라 그 100미터 인근에서의 집회는 금지되며, 주한 일본국 총영사뿐 아니라 부산 동구청장도 피신청인에 공문을 보내어 소녀상 설치단체와 일본영사관 간의 마찰을 예방하기 위한 경찰력 배치를 요청하였으며, 지난 12월 28일 소녀상 강제철거 당시 시민단체 회원이 부산시 동구청 공무원의 적법한 공무집행을 방해한 사례가 있다는 등의 이유였습니다.
저는 처분서를 받아보자마자 효력정지신청서를 작성하여 오후 2시 경 신청서를 전자 접수하였습니다. 당시 향후 2주간 부산지방법원이 휴정기를 갖는다고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금요일 오후 2시에는 대부분의 재판부는 재판 일정을 잡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휴가 전야에 전자 접수된 효력정지 신청서가 언제 재판부 배당이 되고, 언제 심문기일이 잡힐지 불분명한 상태였습니다. 당장 내일 집회를 해야 하는데 말이죠(더 큰 문제는 제가 내일부로 휴가를 가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짜고짜 제1행정부로 전화를 해서 재판부 배정 및 심문기일 지정을 요구하였습니다. 재판부도 사안의 중대성 및 시급성을 재빠르게 판단하고 재판부 배정, 상대방에 대한 신청서 송달 및 심문기일 지정을 하였습니다. 재판부가 얼마나 신속하게 일을 진행했던지, 아직 전자소송 시스템에서 재판부 배당이 되지 않아 재판부에서도 제가 제출한 신청서가 보이지 않는다면서 저에게 신청서를 이메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재판부에 신청서 등의 서류를 이메일로 보내줬고, 재판부는 이를 피신청인에게 ‘이메일로 송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오후 4시에 심문기일이 열렸습니다. 신청서를 접수한 지 2시간 만이었습니다.
심문기일에서 피신청인은 일본영사관 직원들이 토요일에도 나와서 근무를 하기 때문에 토요일을 휴일로 보기 어렵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을 하였으나, 함께 신청인 측 소송대리를 맡은 부산지부 최성주 변호사님께서 일본어로 된 주한 일본영사관 홈페이지 화면을 출력해와 제시하자 피신청인 측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영사관 홈페이지에도 토요일을 휴일로 공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몇 차례 공방 후 심문기일을 마쳤습니다.
ⓒ연합뉴스TV
다행히도 그 날 저녁 7시 30분 경 신청인 측의 효력정지신청이 전부 인용되었다는 재판부의 전화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집시법 제11조 규정 중 ‘외교기관의 업무가 없는 휴일에 개최되는 경우’ 요건은 집회일시가 토요일 저녁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추가로 요구되는 ‘외교기관의 기능이나 안녕을 침해할 우려가 없다고 인정되는 때’라는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었던 것은, 지난 2개월 간 신청인 측에서 주최한 수차례의 평화집회에서 보여준 시민들의 성숙한 시민의식 덕분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후에 부산지방법원은 두 차례에 걸친 같은 내용의 피신청인 측 집회 일부 금지 통고에 대한 신청인 측 효력정지 신청 사건에서, 선례가 있음을 이유로 ‘심문기일을 열지도 않고’ 전부 인용하고 있다는 미담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아마 누구나 2014년 4월 16일 뉴스를 기억할 것입니다. 대형 여객선이 침몰하고 있다는 속보, 머지않아 나온 전원구조 소식, 그리고 안도의 숨을 내 쉰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정정된 생존자 수……. 오락가락하는 보도 사이에는 충격에 빠진 생존자들의 얼굴과 오열하는 실종자 가족들의 눈물이 뒤범벅되어 있었습니다. 그날 밤 소식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가족들은 팽목항에 앉아 까맣게 변한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로부터 2년이 지난 2016년 그 아픔을 다시 바라봐야 했습니다. 참사 초기 팽목항에서 벌어진 어떤 일에 대해 조사해달라는 신청 사건이 들어왔고, 수소문 끝에 당시 현장에서 촬영된 영상들을 구하게 되어 그 날의 모습을 퍼즐 맞추듯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흔들리는 카메라와 그 안에서 들려오는 절규를 통해 차마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던 가족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달되어왔습니다.
그날 밤 어둠이 내려앉은 팽목항에는 아이들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비명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누구는 환호성을, 누구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문자가 왔다, 전화가 왔다, 선체를 두드리는 소리를 누군가 들었다 등등. 살아있다는 소식이 왔다는 말에 가족들은 우르르 뛰어가 해경을 찾으며 제발 배를 띄워 아이들을 찾아달라고 울었고, 현장에 있던 해경과 경찰들은 영문을 몰라 상황실에 전화만 연신 할 뿐이었습니다. 기자들 역시 가족들을 쫓아다니며 뉴스에 내보낼 용도로 연락이 왔다는 문자를 찾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구조는 하고 있는지, 살아있다는 소식은 사실인지, 현장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사람도, 제대로 보도하는 언론도 없었습니다.
저는 2015년 8월부터 2016년 9월까지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서 일했던 조사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상규명국에서 언론보도의 공정성·적정성과 피해자에 대한 명예훼손 실태조사 업무를 하였습니다. 침몰 원인과 구조 실패의 원인을 찾는 조사는 아니었기에 다소 세간의 관심 밖에 있었지만, 막상 그 날의 기억들을 꺼내어보면 언론이나 인터넷만큼 피해자들을 아프게 한 존재도 없었습니다.
참사 당일의 오보부터 이후의 무분별한 취재경쟁까지, 언론의 보도 행태는 유가족과 생존자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KBS 보도 화면 캡쳐
한 희생학생의 형은 당시 기자들에 대해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진도체육관에서 구조 소식을 기다리던 중 병원에 동생이 있다는 전화를 받았는데 기자들이 둘러싸고 길을 막아 나아갈 수가 없었다고, 병원에 도착해서야 동생이 시신으로 수습된 사실을 알았는데 패닉 상태인 가족들을 촬영하고 있어서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났다고 말입니다. 또 한 생존학생은 기자들이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들을 발견하면 마구 뛰어와 붙잡으려고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습니다. 전화번호를 알려준 적이 없는데 문자와 전화로 인터뷰 요청이 오곤 했는데, 기자들이 ‘희생된 친구들을 위해’,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며 접근하면 이미 죄책감에 휩싸인 아이들은 너무나 무방비하게 언론에 노출되곤 했다고도 했습니다.
공중파 언론은 세월호 생존 학생들이 대학 입학 특례를 받는다는 사실만을 강조해 보도하며 사실상 비난했습니다. ⓒMBC 보도 화면
제가 사건들을 조사하며 살펴본 2014년의 언론은 이러했습니다. 희생학생의 시신 사진이 외국 언론에 촬영, 보도되었는데, 우리나라 언론은 이것을 그대로 복제해 보도했습니다. 내용은 외국 언론사에서 희생자 사진을 보도한 것이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이었으나, 정작 해당 기사들은 문제가 된 사진을 캡처해 사용하며 ‘충격’ ‘논란’이라는 제목을 붙인, 전형적인 낚시성 기사였습니다. 세월호참사 희생자와 생존자에 대해 이와 유사한 자극적인 기사들은 바이라인도 없는 ‘온라인 뉴스부’ 같은 이름으로 생성되었고, 한 언론사 내에서도 스포츠, 연예뉴스, 심지어 자동차 사이트까지 글자 하나 다르지 않게 복제에 복제를 거듭했습니다. 생존학생들과 희생학생의 형제자매 모두를 힘들게 한 대학입학 특별전형 기사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많고 많은 특별법 쟁점 중 아이들이 ‘특례’를 받는다는 부분만을 중요하게 보도한 공중파의 기사는 팩트를 가장한 비난이었고, 뒤이어 등장한 인터넷 뉴스들은 ‘지원만 하면 SKY’와 같은 제목을 달고 나날이 자극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실종자 중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한 대참사 앞에서, 내 아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누구라도 좀 살려달라고 울던 가족들에게, 조용하고 침착하게 비극을 받아들이라며 ‘피해자의 자세’를 강요하는 듯한 논평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변호사가 되기 전 기자였고, 변호사가 된 후에는 민변 언론위원회에 있는 저는 세월호특조위에서 언론을 조사하며 수없이 번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언론 이상으로 조사하기 어려운 집단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공공기관도 아니면서 공적 기능을 하는 언론사들은 세월호특조위의 자료제출요구와 출석요구를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동행명령장 집행을 거부하고 청문회 출석요구도 무시했으며, 이후엔 이 모든 것들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세월호특조위를 비난하는 보도를 내보냈습니다. 세월호참사와 관련한 많은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방대한 영상이 언론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었지만 협조 없이는 열람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세월호참사에 대한 보도를 멈추지 않고 가족들 곁을 지키던 언론사와 기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강력한 언론권력을 쥔 자들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과연 우리가 이 비극 앞에서 각자의 과오를 얼마나 반성했는지 의문도 많이 들었습니다.
충격적 오보와 자극적인 보도, 생존자와 유가족에게 상처를 입히는 인권침해적 보도에 대해 반성한 언론도 없지 않았습니다. ⓒ중앙일보 홈페이지 캡쳐
언론의 참사로도 불렸던 일련의 사건들이 폭풍처럼 지나가고, 일부 기자들은 반성문을 쓰고 국민들에게 사과했습니다. 세월호참사를 기화로 재난보도 심의 기준도 바뀌었고, 많은 언론사에서 보도준칙을 업데이트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안전한 나라 안에서 정의로운 언론을 보며 살고 있긴 하는 걸까요. 크고 작은 사건사고의 현장에서 피해자들은 충분히 보호받고 있으며, 왜곡되지 않은 정보 속에서 피해자를 마녀사냥 하는 일은 없어진 것일까요.
이제 곧 벚꽃이 피는 봄이 오면 세월호참사 3주기가 됩니다. 그리고 그 전에 책임을 지지 않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드디어 직책과 본분에 걸 맞는 책임을 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대통령 탄핵과 천만 촛불 집회의 시작에도 언론이 있었듯, 결국 민주주의의 작동과 권력의 감시에는 언론의 역할이 절대적이라 생각합니다. 제4의 권력이라 불리는 언론이, 그 어떤 권력보다 자유롭고 강력한 힘을 가진 언론이, 헌법상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를 방종의 방패로, 권력 비호의 무기로 사용하지 않아야할 것입니다. 자유가 소명인 언론에 대해 변호사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지만, 우리 언론위원회의 역할도 결국 이 지점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다가오는 새 봄에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하길, 그리고 벚꽃과 함께 떠오를 그날의 아픔과 미안함에 보답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 의혹 대응 TF, 故백남기 농민 변호인단, 세월호 특조위 조사관 공무원 보수 지급 청구 소송, 박근혜 정권 퇴진 특위, 민변 탄핵정국 특별 팟캐스트 <탄캐스트> 등 민변의 굵직한 사업이나 변호인단에는 언제나 ‘오 시스터즈’의 이름이 있다.
그런데 정작 둘 사이 사연은 좀 심심하다. 둘이 ‘오 시스터즈’가 된 건 그냥 공교롭게도 성이 같아서 보시는 분들이 별명 붙이기 좋았던 것 같고, 친해지는데 특별한 계기나 사연 같은 건 없고, 같은 기수, 비슷한 나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게 많아서 그런 거라고 한다.
옆에서 가만 보니 오현정 변호사는 말할 때 상대방 눈을 보고 말하고, 오민애 변호사는 자기 얘기하는데 어색해보여도 들을 때는 상대를 잘 쳐다봐준다. 다른 사람 말을 잘 들어주는 오민애 변호사의 장점을 닮고 싶다는 오현정 변호사와, 필요한 순간 필요한 이야기를 자신 있게 하는 오현정 변호사의 장점을 닮고 싶다는 오민애 변호사. ‘오 시스터즈’를 만났다.
법을 공부하면 당연히 차별과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되는 건 줄 알았지
20년쯤 전에, 어떤 영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어린이가 있었다. 그 어린이가 본 영화는 <타임 투 킬(A Time to Kill)>. 아직 KKK단이 횡행하던 시절, 인종차별이 특히 심했던 미국 남부 미시시피의 어떤 흑인 살인자를 변호하게 된 신참내기 백인 변호사 이야기다.
딸을 처참하게 강간한 백인 건달들이 법의 처벌을 벗어나 거리를 나다니는 것을 참지 못한 흑인 아버지 칼리는 법정에서 기관총으로 이들을 살해해버린다. 이 사건 변호를 맡은 백인 변호사 제이크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테러로 살던 집이 완전히 타버리는 상황까지 내몰리면서도 끝내 배심원의 무죄 평결을 받아낸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제이크는 자신의 입으로는 “흑인과 백인은 친구”라 말하면서도 사실은 얼마나 위선적이었는지 깨닫는다. 칼리는 “당신은 내가 어디 사는지 모르지. 우리 아이들은 함께 놀 수가 없어.”라고 지적한다.
영화 <타임 투 킬(A Time to Kill)> 이야기를 하는 오민애 변호사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본 오민애 어린이는 변호사가 되면, 혹은 법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면 차별과 사회문제를 조금은 해결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대학에 와서 법을 공부하는 동기들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사회적 차별과 구조적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빨리 성공하면 그만큼 더 주목받았다. 대학생 오민애는 변호사가 되면 단순히 법으로 돈을 버는 일이 아니라 공익에 관계된 일이나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오민애 변호사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사연이 아니라서, 재미는 없는 이야기”라면서도, “민변 활동을 하면서 원래 하고 싶었던 활동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어쩐지 전공이 재미가 없다 했더니, 이 길이 내 길이 아니었네
오현정 변호사의 학부 전공은 경제학부다. 어릴 땐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건 어릴 때 얘기다. 경제학을 전공으로 삼긴 했는데 막연하게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에 들어가 뭘 어떻게 하겠다, 이런 계획엔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오현정 변호사는 “그 전에는 사회에서 실제로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고 말했다.
오현정 변호사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사건은 프랑스 교환학생 경험이었다. “거기 사회에서 제가 처음으로 ‘여성 이민자’라는 소수자적 입장에서 삶을 살아보게 된 거죠. 그 경험이 저에게 미친 영향이 있었어요.” 마이너리티에 대한 경험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다르다는 걸 목격한 것도 의미가 컸다.
연말의 어느 날, 오현정 변호사는 유명 서점으로 책을 사러 몰려든 사람들 틈에 끼어있던 참이었다. 계산대마다 사람이 수십 명씩 장사진을 쳤다. 그런데 기다리는 사람들을 놓아두고, 계산대 직원이 “근무시간이 끝났다”며 그대로 떠나버렸다. 줄 서있던 사람들 중 누구도 직원을 비난하거나 불만을 토하지 않았다. 그냥 다른 줄로 옮겨갔을 뿐이었다.
“일상적인 거긴 한데, 여기는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시간과 욕구를 존중받으면서 사는구나,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우리나라였으면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 같고, 욕을 하지 않더라도 투덜거리면서 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정도는 있었을 거 같거든요.” 한국에서 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4학년이 되자 사회문제에 관심이 생겼다. 이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관심을 갖게 되자 자연스럽게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로스쿨에 진학한 뒤에도 오현정 변호사는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 공적인 규범을 다루는 일을 하고 싶어 로스쿨에 진학했는데, 정작 로스쿨에서는 “경쟁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하는 삭막한 교육 현실”이 오현정 변호사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면서 여러 이슈를 다루는 민변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싶다는 맘이 많이 들었죠.”
오민애 변호사와 오현정 변호사가 처음 만나 것도 그 즈음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계기는 미군문제연구위원회 위원장 하주희 변호사 덕분이다. 하주희 변호사가 자신이 강연 등으로 인연 맺은 로스쿨 학생들을 모아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때 오민애 변호사는 6개월 실무 수습 기간 동안 <민중의 소리>에서 법조전문 기자 활동을 병행하고 있던 참이었다.
오현정 변호사의 이야기를 듣는 오민애 변호사
대학 졸업 후 바로 로스쿨 진학한 과정이 비슷하고,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서, 관심과 고민도 비슷하고, 민변 활동도 같이 한다. 여기에 기수도 같고, 나이도 한 살 차이로 비슷하다. 어떤 게 힘든지, 일이 잘 안 풀릴 땐 무엇이 고민되는지, 일이 잘 됐을 때 얼마나 성취감을 느끼는지, 특별히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금방 알아준다. 초코파이도 아니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같은 사이다.
오현정 변호사는 오민애 변호사에 대해 “당사자 앞에서 말하려니 좀 부끄럽지만, 언니가 정말 착하다”고 칭찬했다. “제가 징징거리면 따뜻하게 받아줘요. 언니가 더 힘든 일이 많을 거 같은데, 저로서는 감사할 뿐이죠.”
서로 다른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오민애 변호사가 말을 꺼내기 전에 한참을 고민하고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 타입이라면 오현정 변호사는 반대로 필요한 말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곧 잘 하는 성격이다. 서로 정확하게 반대되는 특징이라, 오민애 변호사는 오현정 변호사를 부러워하고, 오현정 변호사는 오민애 변호사를 부러워한다.
오현정 변호사는 “제가 철이 없는 거 같기도 하고, 성격인 거 같기도 하다”며 신중한 오민애 변호사를 칭찬했다. 대학 때는 동아리 선배들이 “쟤는 신입생인데, 하고 싶은 말 다 한다”는 얘기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반대로 오민애 변호사는 “생각을 많이 해야 말이 나온다. 그게 저한테는 단점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며 “해야 할 이야기를 못하고 놓치면 피해가 제가 아니라 제가 변호하는 분한테 간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아찔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바로바로 필요한 말을 하는 오현정 변호사의 장점을 배우고 싶다고.
변호사로 살면서 잊을 수 없는 순간들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꼽은 건 故백남기 농민의 부검 영장 집행을 끝내 저지했던 그 날이다. 첫 영장이 기각된 후 조건부 영장이 나왔을 때, 오민애 변호사는 “조건이 해석하기에 따라 난점이 좀 있지만, 결국 경찰이 밀고 들어오면 부검이 강행될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했다. 영장 집행 기한 마지막 날 박근혜 대통령이 처음으로 ‘태블릿 PC’와 국정농단에 대한 해명 기자회견이 열렸다. 그때서야 ‘아, 영장 집행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현정 변호사는 대화할 때 가끔 놀랄 정도로 상대의 눈을 또렷하게 쳐다본다.
경찰이 물러가자 서울대병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떠나는 경찰을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곧 축제 분위기가 이어졌다. 오현정 변호사는 “경찰이 최종적으로 영장 집행을 안 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과 같이 환호하고 기뻐했던 경험이 저한테 강렬하게 남았다”며 “영장을 막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사람들이 모여서 결국 영장 집행 저지를 가능하게 한 힘이 됐다는 게 좋았다”고 떠올렸다. 오민애 변호사 역시 “사람들이 찬 바닥에서 자면서 몸으로 막아내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꼈다”며 “영장 집행을 결국 저지하고 축제 분위기가 되는 걸 보면서 힘을 얻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민변에서만 배울 수 있는 특별한 이야기
민변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소문 난 두 사람. ‘오 시스터즈’라는 별명까지 붙은 건 사실 그런 적극적 활동에 대한 칭찬의 의미도 없지 않을 테다. 하지만 오현정 변호사는 “사무실에서 민변 활동을 많이 장려해서 저희가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거”라며 “저희가 독특해 보이는 이유는 사실 다른 초년차 변호사들에 비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사무실에 민변 회원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하거나, 다른 업무에 바쁜 회원들에 비해 여건이 좋기 때문에 유난히 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라는 이야기다.
선배 변호사들을 보고 배우는 점도 많다. 오현정 변호사는 특히 하주희 변호사에게 배울 점이 많다고 꼽았다. “여성 변호사로서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에서 이슈를 발굴하고, 문제의식을 밀고 나가는 부분이 굉장히 닮고 싶다고 생각한다”며 “그냥 어디 들어가 열심히 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정말 어떤 걸 바꿔보고 싶다”고 말했다. 문제를 제기하는데 얼마나 절실하냐에 따라 도전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마련이고, 자신에게 부족한 바로 그 부분을 하주희 변호사한테 배우고 있다고.
오민애 변호사는 “변호사라고 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한 뒤 그 문제를 사후적으로 해결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을 민변과 선배 변호사들을 보며 바꾸게 되었다. “사후적 해결도 중요하지만, 필요한 곳에 가서 ‘어떤 걸 해보자’고 제안도 할 수 있고, 법정에서 서면으로 이야기하는 것 말고도 함께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선배들이 몸소 보여준다.
오민애 변호사는 민변 활동을 하면서 변호사의 역할과 변호사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에 대해 고민하는 중이다. 오민애 변호사는 “변호사는 법정에서 말 잘 하고 서면 잘 쓰면 된다고들 한다”며 “그건 당연한 일이지만, 민변 활동을 하면서 변호사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영장이 발부되던 그 때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아이러니를 느꼈다. 법원의 판단 하나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기뻐하거나 이렇게 분노하고 슬퍼할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오민애 변호사는 “변호사가 해야 할 일, 하면 안 되는 일을 딱 잘라 구분 지을 수 없다는 걸 많이 느낀다”며 “다양한 선배 변호사님들을 보면서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 게 가장 적절하고 현명한지 많이 배우게 된다”는 것을 민변 회원이 되기 전과 후 가장 크게 달라진 점으로 꼽았다.
대화 중인 오민애, 오현정 변호사.
민변에서 다루는 사건은 다른 사건에 비해 훨씬 예민하고 첨예하다. 일반적인 사건이라면 즉각 수사하고 일사천리로 재판까지 이어질 텐데, 故백남기 농민 같은 피해자들은 사건 진행이 유난히 어렵다. 경찰이나 검찰은 수사를 하는 건지 아닌지 알 수도 없고, 평범한 사건에서는 문제되지 않을 사소한 절차 하나를 두고 다투는 부수적인 싸움도 많다. 사람마다 대응하는 방식도 다르다. 어떤 사람은 직설적으로 싸우고, 어떤 사람은 우회적인 협상으로 원만하게 넘기기도 한다. 오현정 변호사는 “민감하고 예민한 상황 속에서 각기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여러 선배님들의 다양한 스타일을 보고 배운다”고 말했다.
“민변 활동을 통해 적절할 때 잘 싸울 수 있는 변호사가 되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되는 게 목표구요.” 인터뷰가 끝나고, ‘오 시스터즈’는 민변 사무처로 가는 오르막길을 올랐다. 이날도 점심 회의가 ‘오 시스터즈’를 기다리고 있었다.
2014년 4월 16일 침몰 후 1075일 만에 세월호가 인양되었다. “박근혜가 내려가니 세월호가 올라왔다”는 퇴진행동 권영국 변호사의 말씀은 본질을 꿰뚫고 있다. 비록 헌재의 법정의견은 세월호를 탄핵사유에서 제외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월호와 함께 무너지기 시작해서 결국 세월호 때문에 파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2016년 12월 말 다른 대리인들보다 늦게 국회 대리인단에 합류한 탓에 우리(나와 전종민, 탁경국 변호사)가 전담할 탄핵소추사유는 세월호와 언론의 자유 침해 부분밖에 없었다. 검찰 1기 특수본이 수사한 나머지 탄핵소추사유는 이미 검사 출신 대리인들이 나누어 맡고 있었다. 황정근 총괄팀장과 첫 인사를 하면서 무엇을 맡겠냐는 질문을 받고, 주저 없이 세월호를 선택했지만(전변호사에게 더 어려운 부분을 맡길 수는 없다는 선배의 마음?), 그 직후 나의 마음은 가라앉은 세월호 만큼이나 무거워졌다. 세월호 선원과 해경에 대한 형사기록, 감사원 감사결과 모두 말단의 잘못만을 들추고 있을 뿐 해경청장정도까지도 세월호 사고와 무관한 듯 처리되어 있었다. 세월호 특조위의 조사는 축소, 왜곡되어 있었고, 국회 청문회의 조사결과는 변죽만 올리고 말았다. 세월호 사건 당시의 국가안보실장이 주중대사로 영전되고, 위기관리센터장이 외교안보수석으로 재임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304명의 세월호 희생자와 그 유가족들이 탄핵심판의 법정 안에 있는 듯 했다.
세월호와 언론의 자유 침해 부분이 탄핵사유로 인정될지도 중요했지만, 탄핵심판 내내 가장 중요한 우리의 임무는 ‘신속한 탄핵결정’이었다. 전변호사는 탄핵기각이 되면 혀를 깨물겠다고 확언을 했다고 하지만, 당시 압도적인 찬성표로 탄핵안이 가결되고, 식을 줄 모르는 촛불집회의 열기, 그리고 연이어 쏟아내는 언론 보도로 인해 탄핵결정은 당연한 것처럼 보였고, 남은 문제는 그 시기를 얼마나 앞당길 것인지 여부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대리인단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 하나는 탄핵안 가결을 3당 합의로 한 상황에서 탄핵심판의 속도는 곧 대통령선거일과 관련되어 있었는데, 3당의 대선 준비에는 차이가 났다. 또 다른 문제는 2월 29일 종료되는 특검보다 일찍 탄핵선고가 있게 되면, 특검이 전직 대통령을 구속 수사할 수 있는데, 헌재가 이를 감수할 것인지가 문제되었다. 마지막 문제는 헌재 소장의 퇴임과 이정미 재판관의 후임 인선이었다. 특히, 재판관의 후임 인선은 탄핵 논의의 초점을 흔들 수도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려는 대법원장의 뜻은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초기에는 1월 31일 이전 종료설도 있었지만, 탄핵심판이 2월로 넘어가면서 2월 말 변론종결, 3월 초 선고설이 유력해졌다. 어떤 경우에도 3월 11일을 넘기면 안 된다는 것이 대리인단의 지상과제가 되었고, 여기에는 어떤 이견도 없는 듯했다. 다만, 예상은 예상일뿐이었고, 실제 심판절차 속에 있었던 대리인단의 마음은 2월 27일 변론종결이나 3월 10일 선고기일이 발표되기까지 새까맣게 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큰 문제는 탄핵심판에 적용될 증거법칙이었고, 이것이 이번 탄핵심판에서 가장 뜨거운 논점이었다. 탄핵의 회색지대(심정적으로는 탄핵을 반대하지만, 드러내놓고 반대를 이야기하지 않는 영역)에 있었던 법조인들의 논거가 절차적 정당성이었고, 그 구체화가 형사소송법의 전문법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주장에 따르면 탄핵심판은 적어도 6월까지는 끝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논점에 대해 탄핵심판의 특수성 논리(우리)과 형사소송법 준용 논리(대통령 측)가 부딪혔는데, 헌재는 절묘하게 이 문제를 절충하여 탄핵심판의 증거법을 제시했고, 결과적으로 선택과 집중에 의한 증거 선택과 절차적 정당성을 구비할 수 있었다.
세 번째 문제는 대통령 측 대리인들의 종잡을 수 없는 변론에 대응하는 다소 세세한 문제였다. 대통령 측 대리인들의 변론은 크게 세 시기로 변화하였는데, 1기는 정호성, 안종범, 최순실 등 주요 인물을 신문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대통령 측 대리인은 비교적 정상적인 변론을 통해 방어를 하려고 하였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았다. 정호성의 진술과 녹취록, 안종범의 진술과 수첩은 사후에 어찌할 수 없는 많은 진실을 확인해 주었고, 돌이켜보면, 사실 이들을 신문한 시점에 이미 헌재가 인정한 탄핵소추사유의 대부분은 밝혀진 셈이었다. 1월 31일 이전에 탄핵심판을 종결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이 무렵 나는 국가가 아주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2013년 2월 대통령 취임사를 수정하면서 박근혜, 최순실, 정호성은 ‘문화융성’, ‘체육진흥’이라는 단어를 찾으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누군가 그냥‘문화체육’이라고 하자고 하니, 서로 낄낄대고 웃으면서 ‘그러면 역풍 맞아’, ‘그것이 진짠데’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들이 당선되기 훨씬 이전부터 문화와 체육을 이용해서 축재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확신했다. 선거공약에는 이미‘문화 예산, 재정의 2%’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나라는 사익을 추구할 작정을 한 대통령 후보를 검증하지 못했고, 담당 공무원들은 이들이 부리기 쉬운 사람으로 채워졌다. 이들은 김종 전 차관을 ‘bell(종)’이라고 불렀다. 이들을 감시할 사법기관의 핵심도 이들을 추종했다. 탄핵소추사유에는 없었지만, 이들에 대한 부역의 흔적은 아직도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2기는 헌재가 정호성, 안종범 등의 수사기록을 증거로 채택한 1월 17일 이후 대통령 측의 증인신청이 무더기로 기각된 2월 14일까지였다. 그 사이 장외에서는 탄핵각하론이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고영태 음모설이 주장되었고, 탄핵반대집회가 몸집을 키웠으며, 원로 법조인들이 탄핵각하론에 힘을 보태는 광고를 게재하기도 하였지만, 이 시기 대통령 측의 기본적인 입장은 증인신청을 통한 지연술이었다. 헌재는 답답할 정도로 대통령 측의 증인신청을 받아주면서 절차적 공정성에 공을 들였지만, 대통령 측이 신청한 증인은 그 자체로 유리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새로운 사실도 제시하지 못했다. 우리는 반대신문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할 정도로 김을 빼려고 했다.
지루한 공방을 끝낸 것은 각하론이 전면에 등장한 3기였다. 장외에서 각하론을 주장하던 김평우 변호사가 2월 16일 선임계를 내더니 그 논리를 그대로 심판정에서 주장하기 시작했고, 대통령 측 대리인단의 대부분이 각하론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최후변론 때 대통령 측 대리인단 중 3명만이 기각론에 방점을 찍었고, 나머지 대부분이 각하론을 주장했다. 우리는 이들의 변론 변화가 일응 탄핵에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음모론을 배제할 수 없었다.
당시까지 심판정에서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던 세 명의 재판관이 기각이론을 구성할 수 없으니 각하론을 취할 수 있고, 이것에 기초한 변론이라는 것이 음모론의 정체였다. 이 음모론은 여러 정보보고와 짜리시 등에서 등장했고, 선고기일을 앞두고는 ‘5:2:1설’즉, 2명의 재판관이 각하이고, 1명이 아직 입장 정리를 못했다는 것으로 구체화 되었다. 그러나 각하론은 지극히 정치적인 이야기일 뿐 헌재가 받아들일 정도의 내용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마지막 고비는 이른바 고영태 음모설이었다. 탄핵에 반대하는 몇몇 언론에서 고영태 음모설을 띄우기 시작했고, 내용을 잘 모르는 기자들이 이것을 받아쓰기 시작했다. 녹취파일을 다 들어본 결과 오히려 탄핵에 기여할 것이라는 확신을 했지만, 문제는 이것이 변론종결일을 늦출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도 헌재의 현명한 판단으로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었다.
나는 선고기일에 앞서 국회 대리인들에게 탄핵이 인용되더라도 심판정에서 절대 기뻐하면 안 된다고 문자를 남겼다. 탁변호사는 반대로 탄핵이 기각되면 크게 웃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선고기일에 이정미 재판관이 전원일치로 탄핵을 한다고 하면서, 이어서 세월호 관련 김이수, 이진성 재판관의 보충의견을 읽을 때 그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세월호를 탄핵 심판정에서도 구하지 못한 미안함과 두 분 재판관에 대한 고마움 등 복잡한 심정의 눈물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탄핵심판은 끝을 맺었다.
대부분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마음을 졸이면서 듣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말. 수많은 사람들이 듣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노력 했던 그 말. 한국 사회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길을 가게 만든 그 말. 2017년 3월 10일은 그 많았던 문장들을 뒤로 하고 저 짧은 세 문장으로 역사에 기억될 것 같습니다.
2016년 10월 24일 JTBC가 최순실 박근혜 게이트를 열어내던 그 날 이후로 6개월 동안 시민들은 광장에서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그 갈등상황은 헌법재판소를 통해 제도 안에서 해결되었습니다. 제도 내에서 해결되었다는 것은 한국사회가 아직 자정작용을 할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고,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살고있는 시민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자랑스러운 한 페이지를 또 끼워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민변이 있었습니다. 박근혜 정권 퇴진 특위에서 노력해주신 변호사님들, 탄캐스트, 탄캐스트의 진행자 김준우 변호사님과 오민애 변호사님, 집회를 개근하신 사무총장 강문대 변호사님, 직접 대통령 탄핵소추 대리인단에서 전 대통령을 겨눈 창이 되신 탁경국 변호사님이 계셨습니다. 저마다 계신 위치에서 자신의 몫을 다한 민변의 1000명 넘는 회원님들과 간사님들이 계셨습니다. 탄핵을 만들어낸 것은 그 모든 분들이었습니다.
월례회는 탄핵을 축하하고, 탄핵을 이뤄낸 시민들의 힘을 경외하며, 그 안에 민변이 있었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던 자리였습니다. 특히 민변이 시민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마지막 탄캐스트가 공개방송으로 이루어져서 많은 시민들이 함께 해주셨던 점, 마지막 탄캐스트의 마지막 게스트가 이번 탄핵의 주역들이었던 김덕진 천주교 인권위원회 사무국장님과 노승일씨였다는 점이 시민 속의 민변, 시민들과 함께 하는 민변을 보여주었습니다.
탄캐스트 마지막 방송은 감동적이었습니다. 탁경국 변호사님께서는 탄핵소추인 대리인단에서 활동하셨음에도 모든 공을 광장으로 넘기는 겸양을 보여주셨고, 강문대 변호사님께서는 탄핵 결정이 난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담담하게 앞으로의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김덕진 사무국장님께서는 집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그랬음에도 퇴진행동이 현재 얼마나 많은 채무를 안고 있는지 말씀하셨고 노승일씨께서는 자신이 가진 자료들을 공개했던 이유는 누군가는 이 일을 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동은 어떤 마음가짐에서 나오는지, 그 마음들이 어떤 행동을 만드는지 들으며 이 수많은 노력들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어진 뒤풀이에서는 조금 더 속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김용민 변호사님과 노승일씨가 친구가 되어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고 김덕진 사무국장님의 민변에 대한 애정(“내가 변호사 술 사주는 사람으로 유명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준우 변호사님께서 탄캐스트를 만들며 느꼈던 고충도 들었습니다. 문득 ‘민변의 변호사님들이 어떻게 자라오셨는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실 예정인지 알려주는 그림의 한 조각을 보고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변이라는 이름은 저에게 늘 부모님의 등과 같습니다. 제가 따라가야 할, 언젠가는 그 길의 끝이 한 발자국이라도 더 멀리 내딛어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아름답고 넓은 길입니다. 그래서 모든 계절과 모든 걸음을 함께 하고 싶은 공간입니다. 부모님의 등이라는 건 왠지 언제나 가까이서 볼 기회가 적은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의 등을 가까이서 보는 건 뭉클하고 따뜻한 경험입니다. 월례회는 저에게 그런 따뜻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앞으로도 민변의 이름이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도록 저도 선배님들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라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탄핵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은 사실 탄핵을 믿는 사람들이 소망하는 어떤 것의 실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령, 탄핵 이후 우리는 반드시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모두가 평등한 그야말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세울 수 있다는 소망 말이다. 또한,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우리가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함께 만들어낸 일들은 ‘한국 사회가 적어도 비정상적이었던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고 다시금 환한 민주주의의 빛을 밝힐 역량이 있었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사실의 증거가 되어있지는 않을까. 탄핵 과정에서 민변이 했던 수많은 활동에 수많은 회원이 함께 하며 지난겨울을 보냈다. 분홍빛 벚꽃 피는 봄을 목전에 둔 3월, 추운 겨울과 함께 했던 수많은 회원 중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했던 세 사람의 회원에게 지난 ‘겨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첫 번째 이야기: ‘2017 민변 탄핵버스킹’과 광화문 본무대 발언에 참여했던 김도희 변호사
민변 박근혜 정권 퇴진과 헌정질서 회복을 위한 특별위원회(이하 ‘퇴진특위’) 특검대응팀과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 국민행동’(이하 ‘퇴진행동’) 법률팀에 참여했던 김도희 변호사. 퇴진특위 활동과 회사 일을 병행하다 보니 점점 바빠져서 “아침에 출근하면 제일 먼저 두세 시간 바짝 퇴진특위 논평이나 성명을 쓰고 업무를 시작”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김도희 변호사는 그래도 지난겨울이 재미있었던 것 같은 얼굴이었다. 김도희 변호사는 민변이 지속적으로 성명과 논평을 발표하고, 때로 특검에 고발하기도 하는 일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검찰과 특검이 헌정유린의 주범과 비리 재벌을 수사하는 과정에 대해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메시지를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원래 김도희 변호사는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난겨울 김도희 변호사는 방송 출연, 팟캐스트 출연, 길거리 버스킹, 광화문 본무대 발언 등 유난히 시민들 앞에 서서 몸을 드러내고 입을 벌려 말해야 할 일이 많았다.
두 차례 광화문 본무대에 올라갔던 일을 두고 김도희 변호사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제가 사실 앞에 나서서 이슈를 만들고 사진을 찍고 그러는 걸 정말 싫어하고, 잘 못해요.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말이 안 나오는 그런 스타일이거든요.”
김도희 변호사가 처음 광화문 본무대에 올라갔을 때는 ‘반올림’에서 활동 중인 삼성반도체 산업재해 피해 노동자와 그 어머니, 현대자동차 노조원까지 네 사람이었다. 김도희 변호사는 “너무 떨려서 겨우 1분 이야기하는 건데, 원고 볼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후로도 계속 다른 사람 앞에 나설 일이 생겼다. 민변 탄핵 정국 특별 팟캐스트 ‘탄캐스트’에도 출연했고, ‘김어준의 파파이스’에도 출연했다. 라디오 인터뷰도 있었고, 눈이 펑펑 내리던 1월의 어느 토요일 ‘2017 민변 탄핵 버스킹’의 두 번째 버스커로 시민들 앞에서 길거리 버스킹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탄핵 전날에는 두 번째로 광화문 본무대에 올랐다.
“두 번째 올라갔을 때는 혼자 올라가서 5-6분 정도 발언했어요. 정말 달달달달 외워서 올라갔죠. 그래도 그 때는 좀 흥분하긴 했지만 틀리지는 않았어요. 잠깐 얼어서 말을 못 하는 순간도 있었는데, 보시는 시민 분들이 환호를 해주시면서 괜찮다고 격려해 주시더라고요.” 광화문 촛불집회 본무대만큼 거대한 객석을 마주보는 무대도 없을 텐데, 신기하게도 격려해주고 호응해주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다 들렸다. 그날 김도희 변호사는 “내일 탄핵 인용이 결정되면 박근혜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검찰 앞까지 데려다주고 싶다”고 말해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대면 의사소통에서 언어의 뜻으로 전달되는 정보는 7%밖에 되지 않는대요. 나머지는 전부 눈빛, 표정, 제스쳐, 목소리, 억양 같은 비언어적 정보라는 거예요. 제가 전달하는 정보의 93%가 ‘난 지금 당황했다, 난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잊어버렸다’는 메시지를 ‘뿜뿜’ 내뿜고 있는데, 보시는 분들이 모를 수가 없죠.” 이 이야기를 하면서 김도희 변호사는 광화문 본무대에 섰던 자신의 모습이 다시 생각해보면 민망한 듯 웃었다.
그러면서도 “적성에 안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모두가 탄핵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뛰는데 ‘저랑 안 맞아서 못 하겠어요’라는 말이 안 나오더라”고 말했다. 상황에 떠밀렸다고 할 수도 있지만, 김도희 변호사 스스로의 의지인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이런 경험이 저의 내성적인 성향도 극복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요?”
퇴진특위는 해단식을 치렀지만, 김도희 변호사의 활동은 끝나지 않는다. 특검대응팀은 앞으로도 박근혜에 대한 검찰 수사를 모니터링하고, 필요할 경우 논평과 의견을 발표할 계획이다. 이번 퇴진특위 활동을 계기로 재벌개혁 문제에도 관심이 생겼다. “재벌을 포함한 국정농단 세력이 얻은 그 재물들을 뺏어 와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고, “그게 이뤄지지 않으면 유신 세력이 권력과 돈의 힘으로 뭐든 해결하려는 행태는 계속 남아있을 것”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상 지난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돈으로 흥한 자는 돈으로 응징해줘야” 하고, 범죄수익이 환수되어 “그들이 빼돌린 돈까지 탈탈 털어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김도희 변호사는 “탄핵이 된다는 것에 대해 별로 의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범죄 수익을 환수하고 재벌의 권력을 해체하는 것도 언젠가 이뤄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탄핵 직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진행자가 집요하게 ‘탄핵이 몇 대 몇으로 인용될 것 같냐’고 묻자 “8:0, 최소 7:1”이라고 말했던 김도희 변호사다. 주변에서 “다들 입 조심하는데 8:0을 이렇게 질렀다”고 놀렸지만, 그게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 기쁘기만 하다. 그러니까 재벌과 유신 세력의 범죄수익환수도 언젠가 반드시 될 것이라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제 세대에서는 안 될 수도 있지만, 이것도 믿고 가는 거죠. 되어야 하니까. 믿지 않으면 안 되는 거 같아요. 믿고 시작하지 않으면…….”
두 번째 이야기: 국회 탄핵 소추위원 대리인단 전종민, 탁경국 변호사
국회 탄핵소추위원 대리인단에 합류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떠오른 생각 세 가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재판에 참여하게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시작으로, 처음 생각은 ‘역사 앞에 무거운 책임을 지는 재판이니 책임이 무겁구나’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현실적으로 “야, 이거 일이 많겠구나”라는 생각이었다. 마지막은, “민변 회원으로서 탄핵 심판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정말 잘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전종민 변호사와 탁경국 변호사가 탄핵소추 대리인단에 합류한 것은 12월 중순이었다. 국회 법사위원장인 새누리당 권성동 의원이 민주당과 합의하지 않은 채 대리인단을 선임하자 더불어민주당에서 항의했고, 그 과정에서 민변 회원인 두 사람이 9개의 소추 사유 중 언론의 자유 침해 부분을 맡아 합류하게 됐다.
겨울에 시작한 재판이 끝날 때까지 석 달 남짓,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재판이었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엔 사실관계를 두고 다툰 바는 많지 않았지만, 이번엔 반대로 사실관계를 대통령측이 치열하게 다투어서 사실관계를 어떠한 증거조사 방식으로 인정할 것인지, 증인신문, 사실조회, 서증제출을 어느 범위까지 할 것인지에 대하여 대통령 측 대리인단과 치열한 다툼을 벌여야 했다.
전종민 변호사는 “헌재 재판관들도 사실 처음 재판을 시작할 때는 기준을 세우지 못했다”고 전했다. “쉽게 얘기하면 증거를 채택할 때 형사재판에 준하여 채택할 것인가, 아니면 민사재판에 준하여 채택할 것이냐가 문제였거든요, 형사는 굉장히 엄격한 조사방식을 거쳐 증거채택을 하잖아요. 그래서 국회에서는 ‘민사처럼 진행해달라’고 요청했어요,” 형사재판처럼 엄격한 증거 채택 절차를 거친다면 제출된 증거에 대한 피고인의 동의 절차를 거쳐야 하고, 피고인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원 진술자가 재판에 출석하여 진술의 진위를 확인해야 해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재판부는 절충적인 방식을 기준으로 세웠어요, 형사법상 전문법칙을 적용하는 쪽으로 원칙을 세우되, 다만 검찰 기록 중 변호인이 입회하여 진술한 조서는 원진술자가 심판정에 나오지 않더라도 증거로 채택한다는 것 등이지요.” 증거 채택 절차부터 매 순간이 고비였다.
두 번째 고비는 안종범과 정호성의 증인신문이었다. 최순실이 사실대로 증언할 것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다행이 안종범, 정호성이 사실관계를 인정했다. 안종범은 ‘업무수첩 내용은 대통령 재임 기간 중에 작성된 것이 맞다’고 인정했고, 정호성 역시 ‘청와대 내부 문건을 최순실에게 보낸 것은 맞다’고 증언했다. 전종민 변호사는 “안종범이 수첩을 인정하는 순간 ‘5부 능선을 넘었다’고 생각했고, 정호성을 신문하면서 ‘7부 능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고 돌이켰다.
탄핵소추 대리인단이 겪은 마지막 고비는 태극기 집회가 가열되기 시작한 이후였다. 김평우 변호사 등 원로 변호사들이 대거 대통령 측 대리인단으로 선임되었고, 재판은 전종민 변호사의 표현에 따르면 “법리논쟁보다는 정치적인 싸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탁경국 변호사에게 가장 인상적인 증인은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었다. 증인신문에 출석한 유진룡 전 장관은 “2014년 1월 초까지만 해도 ‘장관 소신대로 하라’던 박근혜 대통령이 어느 순간 좌파 척결을 주창하는 김기춘 측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안창호 헌법재판관이 “도대체 어느 시점에 박대통령이 태도가 변한 것 같냐”고 묻자 유 전 장관은 “아마 세월호 참사 이후로 태도가 변한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고 답했다. 탁경국 변호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탁경국 변호사는 “세월호 참사, 언론 자유 침해, 뇌물죄 부분에 대해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세월호 참사와 세계일보에 대한 언론 탄압은 검찰 등 수사기관의 수사 자료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뇌물죄 역시 국회가 탄핵 사유를 작성할 당시 검찰 공소장에 근거해 박근혜 대통령의 위법행위를 ‘직권남용’과 ‘강요’라고 제시한 상태였다. 특검이 박 대통령을 뇌물죄로 입건했다 한들 재판부에 특검 수사 결과를 증거로 제출하는 그 순간부터 대통령 측에 반박할 시간과 기회를 제공해야 했다. 두 사람은 “안종범이 5부 능선, 정호성이 7부 능선이었다. 조기에 승부를 보자는 대리인단의 전략이 주효했다”면서도 “그러한 전략으로 인해 언론 탄압과 세월호 참사가 탄핵 사유로 인용되게 할 수가 없었다”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부터 “탄핵이 인용되지 않을 거란 의심은 없었다”고 했지만, 탄핵 전날 전종민 변호사는 극도의 긴장감을 느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라의 운명을 헌법재판관 8명한테 맡기다니 가혹하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전 변호사는 “말로는 동네방네 8:0이라고 떠들고 다니면서도 한편으로는 긴장됐다”며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이렇게 내기라도 해야 한다”고 웃었다.
TV로 탄핵 선고를 지켜봤던 사람들 입장에서 가장 궁금했던 건 아마도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무슨 생각,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아닐까. 역사적인 재판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탄핵소추 대리인단이 그 순간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지 궁금했다. 전종민 변호사는 “사실 처음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문체부 1급 공무원들에게 사표 받은 것도 배척하고, 세계일보에 대한 언론의 자유 침해도 배척하고, 세월호까지 배척하는 걸 보면서 ‘아 이거 이상한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렸다는 것까지 탄핵 사유에서 배척되자 불안감도 느꼈다.
“사실 세월호 참사를 탄핵 사유에서 배척할 때는 좀 불안했죠. 저희는 문체부 1급 공무원들 사표 받은 것까지 두 개는 인정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국정농단과 기업의 자유를 침해한 부분만 인정했으니까요.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게다가 대통령측 대리인단은 그날 하나같이 밝은 얼굴이었다. 전종민 변호사는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채명성 변호사가 날 보면서 씩 웃는 것 같더라고요.”라고 떠올렸다. 대통령 측 대리인단을 마주보고 앉는 국회 소추위원들이 “저쪽은 우리보다 정보가 훨씬 많을 텐데 뭔가 불길한 일이 있는 거 아니냐”는 의심을 했다는 이야기가 방송에까지 회자됐다.
그러나 탁경국 변호사는 “원래 소추사유는 첫 번째가 국정농단이고, 세계일보 언론 탄압과 세월호 참사는 세 번째, 네 번째였다”고 지적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소추 사유가 먼저 등장하는 것을 듣고 선고 도중에 ‘아, 인용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탄핵이 인용되어 “주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문장이 낭독되자 전종민 변호사를 바라보며 웃던 채명성 변호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이동흡 변호사 역시 급히 자리를 떴다.
탄핵 선고 직전, 탄핵 소추 대리인단 단체 톡방에서는 탄핵이 인용되더라도 웃으면 안 된다는 말이 오갔다. 탁경국 변호사는 “기각되면 웃어도 되죠?”라고 되받았다. “뭐, 저는 워낙에 자신 있었으니까.” 라면서도, “막상 ‘파면한다’는 주문을 듣고 나니까 좀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탄핵을 믿었고, 믿음 그대로의 결과를 만들었지만 감격이 없을 순 없었을 테다. 탄핵 소추 대리인단 중 흡연자들은 담배를 피우러 나간 뒤 서로 치하했고, 탄핵 소추 대리인단에 함께 참여했던 이용구 변호사 역시 언론 인터뷰에서 울었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따로 회포를 풀 만한 여유는 없었다. 전종민 변호사는 “사실 도망간 거죠. 그날 안국역 일대 어땠는지 아시잖아요”라고 웃었다.
인터뷰 말미 전종민 변호사는 “민변에서 치열하게 활동하고 헌신하는 회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며 92년 윤종현, 김선수, 김한주 변호사를 도와 故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을 준비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사법시험 직후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 준비를 돕다가 시험 합격 후 판사가 되었던 전종민 변호사가 법원을 그만 두고 나왔을 때, 10년 만에 다시 마주친 김선수 변호사가 “법원 왜 나왔어? 법원에 좀 더 있지, 밖에 나와서 뭐하려고.” 하시던 게 그렇게 서운했다고. “그 후에 민변 활동을 대의원회 참석하는 정도밖에 못 했어요. 변호사 생활이 바쁘더라고요. 민변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지 못한 마음의 빚 같은 게 있어요. 처음 탄핵 심판에 참여하게 됐을 때 그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으려고 정말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민변에서 법조 첫 출발부터 지금까지 치열하게 활동하고 계시는 변호사님들에게 존경과 격려를 보낸다고, 꼭 적어달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인터뷰가 끝나고 사진을 찍는 동안, 탁경국 변호사는 “잘 생긴 얼굴이 아니”라며 부끄러워 했다. 육아 및 가사 분담에 철저한 가정적인 남편과 아버지로 유명한 탁경국 변호사 얼굴에 웃는 주름이 선명했다. 탁경국 변호사는 지난 2015년 <계란찜 아빠, 꼬막 남편>이라는 에세이집도 냈다. 탁경국 변호사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것이 가정”이라며 “어려운 이론 말고,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찍었을 때 예쁘게 나오는 얼굴은 따로 있다. 탁 변호사님은 얼굴에 웃는 주름이 잡혀있어서 사진 찍었을 때 근사하다”고 말하자, 탁경국 변호사의 답이 이랬다. “아내한테 사랑받아서 그래요.”
간담회가 이렇게 친근하고 부드러운 뜻을 가진 단어임을 오늘에서야 알게 됐다. 정책간담회, 기자간담회가 입에 착착 붙는 걸 보면, 간담회란 단어는 다소 공식적이고 엄숙한 느낌이지 않은가. “와인과 함께하는”, “신입회원”, “간담회”가 열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다소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을 애써 조합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민변 신입회원 환영의 밤”, “민변, 나의 동료가 되라”, “하늘과 바람과 민변과 신입”, “젊은 민변, 잠 깨어오라”등 무난한 행사명이 가득한데 “신입회원 간담회”라니 으으… 와인을 붙이면 엄숙한 것이 부드러워질거라 생각한걸까.
오해였다.
와인은 부드러웠고, 간담회는 정다웠다.
20병을 쾌척하신 변호사님의 “와인 병을 따야한다”는 책임감 덕분에 주최 측의 의도와는 달리 미처 간담회 개회도 전에 병을 붉게 채우던 와인들은 사람들 면면으로 스민다. 와인은 과연 “신의 물방울”이다. 언제 어디서나 어색할 수밖에 없는 첫 만남의 공기를 부드럽게 덥혀준 건 달콤 쌉싸름한 와인이었다.
회장님의 환영사, 회원팀장님의 민변사를 지나 위원장님들의 신입회원들에 대한 위원회 가입 구애의 시간. 사법위가 신입회원들에게 참 좋은데,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아쉬웠던 것만 기억난다.
“신입회원” 간담회인만큼 제일 중요한 “신입회원”들의 자기소개 시간. 단이아빠님의 단호하고 유쾌한 진행이 자기소개 사이사이의 어색함을 웃음으로 녹인다.
권호현 변호사가 신입회원 간담회에서 세 단어로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노동법 덕후, 마라톤, 어디서 많이 본 얼굴, 대박, 경찰, 검찰”
키워드 세 개를 쓰게 하고 그 중 임의로 하나를 선정해 자기를 소개하게 하는 방식은 짧은 시간임에도 웃고 떠들며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처음 보는 40여명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지라, 단 세 시간만으로는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기는 어려웠을 테다. 다만, 그 자리에 있었던 신입회원들, 또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민변을 밀고 끄는 간사님들, 변호사님들은 한 가지는 분명히 느꼈을 테다.
“이번 신입들은 유쾌한 녀석들이네, 기대된다”
동기들만의 시간을 갖지 못한 아쉬움은 천천히 채울 수 있을 테다. 비슷한 생각을 나누고픈 갈망을 가진 유쾌한 녀석들이 모였으니.
지난 해 광장의 촛불을 지나 장미대선을 앞두고 4월의 활발한 선거운동이 어색하기도 하고 새삼 감격스럽기도 한 요즘입니다. 국제연대위원회도 우리가 여기서 지금 할 수 있는 일, 다양한 인권시민단체들과 연대하여 대한민국이 비준한 국제인권 규약들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국제사회에 알려야 하는 새로운 인권 이슈들을 정리하며 ‘인권의 옹호와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3월 정기회의에서 Human Rights Now 김창호 일본변호사님과의 특별좌담회>
2017년은 유엔 사회권규약 (Committee 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 CESCR), 고문방지협약 (Committee Against Torture, CAT), 국가별 인권상황정기검토 (Universal Periodic Review, UPR) 의 대한민국 심의가 모두 있는 해입니다. 국제연대위원회는 국제인권네트워크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공익법센터 어필, 국제민주연대,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유엔인권정책센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원회) 구성원으로서 지난해 10월 ‘2017 유엔 심의 준비를 위한 시민사회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올해 한국 심의를 미리 준비해왔습니다. 이번 뉴스레터에서는 특별히 국가별 인권상황정기 검토 (UPR)와 11년 만의 고문방지협약 (CAT) 심의 대응에 대해 간단히 소개할까 합니다.
(1) 국가별 인권상황정기검토 (UPR)
UPR은 유엔 회원국들의 국제인권 규약 가입 여부와 상관없이 인권을 증진해야 할 국가의 책무를 강조하기 위해 마련된 새로운 유엔인권메커니즘으로 4년 6개월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심의가 이루어 집니다. UPR은 한국 정부가 제출한 보고서, 이제까지 유엔이 한국 정부에 내린 권고사항 요약본 그리고 국내외 시민사회와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출한 보고서 (이해관계자 보고서) 요약본, 이렇게 세 가지 문서에 기반하여 검토가 이뤄집니다. 올해 11월 제3차 한국심의가 예정되어 있으며, 민변이 사무국으로 참여한 NGO 보고서는 3월에 제출하였고 정부보고서는 8월에 마감하게 됩니다.
Human Rights Council During UPR On November 5, 2010 ⓒU.S. Mission/Photo by Eric Bridiers
민변에서는 NGO보고서에 전통적으로 국가보안법, 보안관찰법에 대한 내용을 작성해 왔습니다. 이를 포함하여 올해 보고서에는 유엔이 한국 정부에 여러 차례 권고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사형제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의 도입 등의 과제에 지난 5년여 동안 진전이 없었으며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 역시 여전하고, 성소수자, 미혼모, 장애인, 이주민, 난민, 아동 등 소수자 집단에 대한 인권 개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평가를 담았습니다. 정부보고서가 제출되고 나면 NGO 사무국은 다시 로비문서를 작성하여 주한 외국대사관과 국내외 언론을 대상으로 국내인권 문제들을 공론화해 나갈 것입니다.
(2) 고문 및 그 밖의 잔혹한, 비인도적인 또는 굴욕적인 대우나 처벌의 방지에 관한 협약 이행 심의 (CAT)
민변은 1996년 1차 고문방지위원회 심의, 2006년 2차 심의에 참가해 주도적으로 국내 NGO를 대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11년만의 이번 3-5차 통합 고문방지협약 한국심의는 제 60차 CAT 세션 (4월 14일 – 5월 12일) 중 5월 1-3일에 열리게 되며, 민변에서는 황필규, 전민경 변호사님이 심의기간 동안 다른 NGO 대표단들과 함께 NGO 브리핑, 심의담당관 로비 등 제네바 현지 대응활동을 할 예정입니다. 현재 진행중인 제60차 CAT 세션은 http://webtv.un.org/live/ 에서 영상으로도 시청 가능합니다.
NGO 보고서에는 그동안 고문방지위원회에 제기되었던 국가기관에 의한 폭행, 가혹행위, 과도한 장구 사용, 집회·시위 진압과정에서의 무력사용, 국가보안법을 통한 자유의 억압, 구금시설에서 구조적으로 행해지는 비인간적이고 굴욕적인 대우 또는 처벌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 외에도 2015년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집회에서의 물대포와 캡사이신 사용, 세월호 유가족들의 평화로운 집회·결사의 자유 탄압, 밀양·강정·쌍용자동차 집회시위의 국가폭력, 박근혜 정부의 예술검열과 블랙리스트 작성, 일본군 위안부 등의 내용을 포함했습니다.
많은 단체들이 함께 모여 UPR와 CAT NGO 보고서 이슈를 분담하고, 집필, 취합 후 다시 영어로 번역하는데는 많은 시간과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네바에서도 전략을 세워 제네바 주재 각국 대표부, 심의담당관을 직접 찾아가 우리의 이슈를 알리는 활동도 쉽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탄핵 이후에도 계속된 법관의 자율성과 독립성 이슈, 동성애자 군인 색출 수사, 집회현장에서의 경찰 위법행위, 노동자의 죽음 등의 문제를 국제사회에 새롭게 알려야 하는 마음도 무겁습니다.
국제인권는 당장 눈앞에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서로 연대하며 한걸음씩 나아가야 하는 분야입니다. 국제연대위원회는 새롭게 들어서는 정부가 국제사회의 권고를 성실히 이행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며 계속해서 끈질기고 꾸준하게 활동하겠습니다.
과거사청산위원회와 긴급조치변호단은 2017. 4. 1. 경상북도 경산시에 위치한 코발트광산과 대구광역시 팔공산 갓바위를 들르는 일정으로 워크샵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일정은 특별히 과거사청산위원회와 긴급조치변호단이 함께 기획하고 참여하였다는 데에서 더욱 의미가 컸습니다.
이번 워크샵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바로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사건”과 “대구 10월 항쟁”. 두 사건 모두 국가가 해방 이후 혼란기에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던 비극적인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이와 같은 비극을 한으로, 운명으로 안고 살아가는 유가족들이 있는 사건들이었습니다.
버스는 오전 7시에 출발했습니다. 경상북도를 당일로 다녀와야 하는 일정인 만큼, 서둘러야겠지요? 이른 아침이었지만, 피곤함보다는 설렘이 앞섭니다. 배움이 있는 여행은 언제나 즐거우니까요!
김상숙 박사님의 ‘10월 항쟁’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버스는 경상북도 경산시 코발트 광산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도로변에서도 쉽게 보이는 광산. 버스에 내려서 5분도 채 안 걸었는데 기념비로 보이는 조각물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코발트 광산 학살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탑이었습니다. 코발트 광산 학살사건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산, 청도, 대구, 영동 등지에서 끌려온 국민보도연맹원 및 요시찰 대상자들과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 중 상당수가 경산․청도지역 경찰과 경북지구CIC 경산․청도 파견대, 국군 제22헌병대에 의해 1950년 7~8월경 경상북도 경산시 평산동에 위치한 코발트광산 등지에서 집단 사살된 사건입니다. 전체 희생자 수는 1,800명을 상회할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희생자 수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위령탑 앞에서 서중희 위원장님이 제를 올리고, 추도사를 낭독하였습니다.
이어서 前 진실과화해위원회 유해발굴팀장이자 현재 부경대학교 국제지역학과에 계시는 노용석 교수님이 코발트 광산 학살사건에 대하여 실제 학살이 이루어진 경로, 유해 발굴과정 등을 실감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위령제를 마친 후 다함께.
이후 코발트 광산 안으로 들어가서 실제 광산의 모습을 둘러보았습니다. 위원장님과 조영선변호사님, 그리고 코발트광산 유족회장님 뒤에 보이는 저 철문이 코발트 광산으로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내부 통로는 무고하게 학살당한 분들의 유해가 쌓여 있던 수직 갱도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수직 갱도에는 아직 미처 발굴하지 못한 유해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조속히 남은 유해들도 지상 밖으로 모시고, 진상규명을 통하여 그 원통함을 조금이나마 달래드리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과거사위&긴조변호단은 코발트 광산을 둘러본 후 팔공산 갓바위로 향했습니다.
갓바위로 향하는 회원님들의 모습이 즐겁기 그지없습니다.
갓바위 정상에서 단체샷!
하산하는 길에 함께 막걸리를 나누는 소소한 즐거움도 있었구요.
원래 워크샵 당일에 비가 예보되어 있어서 걱정이 많았는데, 비는 다행히도 팔공산 갓바위에서 하산할 때가 되어서야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늘도 이번 워크샵을 배려해주었던 것이 아닐까요ㅎㅎ 하산한 후 기쁜 마음으로 함께 단체 사진 촬영!
산도 올랐으니 출출한 배도 달랠 겸, 뒷풀이를 안 하면 섭섭하겠지요? 저녁식사는 팔공산 근처에 위치한 “이조명가”에서 자리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사진만 봐도 군침이 돌지 않나요? 이조명가의 대표메뉴 ‘오리쟁반정식’과 함께, 막걸리, 소주, 맥주, 고량주 등의 술을 곁들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늘 있었던 과거사 워크샵 일정을 곱씹으며, 서로 소감도 공유하고요.
그런데 한가지 더, 우리가 저녁식사를 위해 자리 잡은 “이조명가”는 10월항쟁민간인희생자유족회 회장이신 채영희 선생님이 운영하고 계시는 식당입니다. 채영희 회장님의 부친께서는 1946년 10월 항쟁 당시 경찰의 무자비한 학살에 의하여 무고하게 희생당하셨습니다.
채영희 회장님은 10월 항쟁 유족들의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 현황을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간곡히 당부하셨습니다. 10월 항쟁을 잊지 말아줄 것을, 그리고 유가족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써 주기를..
채영희 회장님이 부친을 생각하며 불러주신 “여옥의 노래”의 한 소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10월 항쟁 희생자들과 유족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전달해보고자 합니다.
「불러도 대답없는 님의 모습 찾아서 외로히 가는 길에 낙엽이 날립니다 들국화 송이송이 그리운 마음 사람은 말없구나 어디매 계시온지 거니는 발자욱 자욱마다 넘치는 이 마음 그리움을 내어이 전하리까」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음을 느꼈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채영희 회장님과 함께 단체샷.
너무나도 즐거운 워크샵이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먹먹함과 사명감을 안고 갈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며 더 좋은 미래를 꿈꾸는 변호사들의 모임!이상 민변과거사청산위원회, 긴급조치변호단의 공동 워크샵 후기였습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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